천상(天上)의 향기 - 12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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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天上)의 향기 122(애증(愛憎)의 그림자)-10
혁린무는 녹림대답에 있는 조철봉의 집무실에 앉아 손으로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무언가 고민이 있는 표정이다. 장강수로십팔채의 총채와 군산의 점령은 혁린 무의 치밀한 작전이 만들어낸 완벽에 가까운 승리였다. 전쟁에서 정보란 곧 승패와 직결된다. 장강수로십팔채는 배화교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와 반대로 혁린 무는 사안을 통해 장강수로십팔채의 위치, 인원, 순찰시간........심지어 경비인원까지 손바닥 보듯 환하게 알고 속전속결로 군산과 총채를 점령하는 작전을 구상했다. 장강수로십팔채는 대륙의 강과 수로를 장악한 세력답게 물에서는 천하무적이지만 육지해서는 힘을 쓰지 못하는 특성이 있다. 이와 반대로 자신이 이끄는 흑풍대와 혈영대는 사막의 용사(勇士)들로, 육지에서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만 물에 들어가면 오합지졸(烏合之卒)이 되어버리는 부대다. 즉 장강수로십팔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강점을 살리고 상대의 약점을 물고 늘어져야 한다. 혁린 무는 장강수로십팔채를 하나하나 점령하기 보다는 총채를 점령하는 기습작전을 선택했다. 뱀의 머리부터 잡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런데 혁린 무의 작전에서 알맹이가 빠져버렸다. 총채주가 도망친 것이다. 설마 총채주라는 놈이 총채를 버리고 도망칠 줄도 예상하지 못했다. 조금만 심중했다면 잡을 수도 있었는데 다 잡은 고기를 눈앞에서 놓친 꼴이다.
“공자님 형오삼살입니다.”
군산일대를 수색하려 나갔던 형오삼살이 돌아온 모양이다.
“어떻게 됐어.”
“군산일대를 이 잡듯이 수색해서 숨어있던 놈들을 모두 잡아들었습니다.”
“혹시 총채주는 없었어.”
“없었습니다. 군산에서 빠져나간 모양입니다.”
“빌어먹을.......다 잡은 물고기를 놓쳤어. 잠깐.........혹시 놈의 가족이라도 있지 않을까? 형오일살!”
“예~”
“포로들을 한사람도 빼놓지 말고 조사해라. 누구의 처인지? 누구의 자식인지? 철저하게 파악해.”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기........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뭐냐?”
“부하들이 상을 바라는 눈치입니다.”
혁린무는 쓰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하들이 바라는 것은 여자일 것이다. 군산을 점령하면서 많은 여자들이 포로가 되었다.
“지금은 안돼. 모든 포로들의 조사가 끝나면 그때 상을 주겠다.”
“알겠습니다.”
형오삼살은 그길로 뇌옥으로 가서 포로들을 조사했다. 포로들의 대부분 장강수로십팔채 무사들의 가족들과 전투에서 부상당한 무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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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에 있던 도치일행은 짐을 챙겼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풍운과의 약속장소인 악양으로 출발하기 위해서다. 이막수와 유미림은 통나무집의 집기들을 한쪽에 모야 하얀 천으로 덮었다. 집기들에는 이막수와 유미림의 소중한 추억들이 담긴 물건들이다. 실제적으로 이곳 통나무집에서의 기간이 유미림과 이막수의 신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수랑!.........이제 다시 강호로 나가야겠죠?”
“왜~ 미림은 싫어.”
미림은 얇은 미소를 지으며 촉촉한 눈길로 이막수를 바라본다.
“제가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하실 거죠.”
“그........그거야. 그러니까?”
“호호호~ 농담이에요. 가야죠. 일사님과의 약속을 지켜야죠.”
“미림은 이곳을 떠나기 싫은 모양이구나?”
이막수의 말에 미림은 이막수의 품에 살며시 안겨온다. 이막수는 유미림을 포근히 안아주었다.
“속 좁은 미림은 수랑만 생각한 답니다. 배화교에 대한 복수........가문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는 사명감.......마령단의 해독.......그런 것보다는 이렇게 수랑과 함께 있는 것이 마냥 행복한 미림입니다.”
“미림.......미림이 겉에 있어서 얼마나 힘이 되는지 알아? 미림이 없었다면 무척 힘들었을 거야. 나도 떠나기 싶어. 하지만.........가야 해..........나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잖아.”
“알아요. 그냥 속 좁은 여인내의 투정이라고 생각하세요. 다른 분들이 기다리겠네요. 우리도 가요.”
미림이 막수의 품을 빠져나오며 짐을 챙긴다. 막수는 미림의 등을 포근히 감싸준다.
“미안해.......그리고 고마워~”
미림은 자신을 안고 있는 막수의 손을 잡아주며 고개를 돌려 막수를 바라본다.
“수랑........이제 가요. 다른 분들이 기다리잖아요.”
유미림과 이막수는 정든 통나무집을 뒤로하고 도치일행이 모여 있는 동굴 입구로 출발했다. 곽지향과 악무룡은 아직 지향의 통나무집에 있었다. 곽지향은 커다란 보자기에 약들을 담고 있었다.
“이게 모두 독(毒)이야.”
“바보~ 독(毒)이 있으면 당연히 해독약도 있어야죠. 그리고 제가 독(毒)만 사용하진 않잖아요. 암기들도 많아요.”
“그렇군. 어라~ 이건 뭐야.”
악무룡은 다른 약들과는 달리 예쁜 나무상자에 담긴 약을 발견했다.
“그건 이막수님께 드릴 선물이에요. 저번에 한빙어와 열화어로 약을 만든다고 했잖아요.”
“완성했구나.”
“예~ 힘들게 완성했어요. 저는 벌써 먹었으니 그건 이막수님께 드릴 거예요.”
“지향은 벌써 먹었단 말이야. 어때 효과가 있어.”
“당연하죠. 누가 만든 약인데........생으로 먹는 것보다는 못하지만 효과는 확실해요.”
“이것도 그냥 지향이가 먹어버려.”
“씨~ 유혹하지 마요. 정말 먹어버리는 수가 있어요.”
“하하하~ 농담이야. 짐 다 챙겼으면 가자. 다른 사람들 기다리겠다.”
곽지향은 보따리를 매고 악무룡의 팔짱을 낀다. 악무룡과 곽지향은 그사이 많은 정이 들었던 모양이다. 동굴 입구에 도착하니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야~ 빨리, 빨리 좀 다녀라. 다들 기다리고 있잖아.”
“저 때문에 늦었어요. 왜~ 불만 있어요.”
악무룡 대신 곽지향이 솟아 붙이자 도치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고개를 돌려버린다. 곽지향과 말싸움을 하면 자신만 손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모두 모였네요. 자~ 출발하기 전에 다시 한번 각자 짐을 점검해보세요. 혹시 빠진 것이 있을 지도 모르잖아요.”
마수의 말에 나머지 일행이 각자의 짐을 점검해 본다.
“없어.”
“나도 없다.”
“모두들 잘 챙겨오셨군요. 그럼 출발합니다.”
마수가 앞장서서 동굴로 들어가자 나머지 일행도 마수를 따라 밖으로 통하는 동굴로 들어간다. 드디어 태산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악양으로 출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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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과 천유가 악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맥성에 도착했다. 이제 한 두시진만 더 가면 악양에 도착한다. 풍운은 하늘을 올라다보다가 객점으로 향했다. 밥 먹을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풍운과 천유가 객점의 창가에 앉아 음식을 주문했다.
“이봐~ 자네 소문 들었어. 군산이 불바다가 됐다고 하더군.”
“그게 무슨 말이야. 군산이라면 장강수로십팔채의 총채가 있는 곳이잖아.”
“맞아! 총채가 불바다가 되었다는 거야.”
“말도 안돼. 장강수로십팔채라면 관(官)에서도 함부로 못하는 놈들인데 감히 누가 그들을 공격해.”
풍운과 천유가 앉은 옆에 있는 탁자에 표사들 차림의 무사들이 식사를 하며 떠들고 있었다. 풍운은 장강수로십팔채의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이 친구가 속고만 살았나. 내 친구 왕이 알지.”
“그 대륙상회에 있다는 친구 말인가?”
“맞아. 그 친구가 물건을 하역하고 돌아오는 길에 직접 두 눈으로 봤데. 밤하늘이 붉어질 정도로 군산이 불바다가 됐다는 거야.”
“그래. 도대체 어떤 놈들이 겁도 없이 장강수로십팔채를 공격했지. 흑룡방이나 사해방의 소행일까?”
“흑룡방이나 사해방 같은 군소방패가 장강수로십팔채에게 덤비지는 못하지.”
“그럼 누구야. 정말 알 수가 없네.”
풍운이 말없이 표사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 천유가 탁자를 두드린다.
“무슨 생각해.”
“응~ 아니야. 군산이 불바다가 되었다. 그렇게 쉽게 당할 줄은 몰랐는데........이거 문제가 심각하네.”
“혼자서 중얼거리지 말고 나도 좀 알자. 대체 무슨 일이야.”
풍운은 다정화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천유에게 해 주었다.
“그럼 배화교가 군산을 공격했단 말이야.”
“지금으로써는 그렇게 밖에 해석이 안돼.”
“배화교 놈들이 대단한 모양이네. 장강수로십팔채의 총채라면 지키는 무사들도 많았을 텐데.”
“아무래도 안 되겠어. 천상루에 가봐야지.”
“천상루?........거긴 왜?”
“정확한 정보를 얻으려면 천상루를 찾아가는 것이 빨라.”
“나머지 십이사를 만났다고 했잖아. 시간이 돼.”
“아직 이틀이 남았으니 충분해.”
“알았다. 그럼 나는 객점에서 기다려야겠네.”
“천유도 같이 가자.”
“싫어. 그냥 혼자 다녀와. 나는 피곤해서 쉬어야겠어.”
“쩝! 그래........일단 악양에 도착해서 결정하자.”
풍운과 천유는 다시 길을 나서 밤이 깊은 시간 악양에 도착했다.
“객점을 잡아야 하는데........어느 객점이 좋겠어. 천유가 골라봐~”
“가까운 곳으로 가자. 저기 객점이 좋겠네.”
천유는 제법 규모가 크게 깨끗해 보이는 객점을 골랐다. 풍운과 천유는 점소이에게 말을 맡기고 객점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주무시고 가실 겁니까?”
“며칠 묵어야 하니까 깨끗한 방으로 두개 주세요.”
“동행 아니세요.”
“저 친구가 잠버릇이 고약해서 따로따로 자야 합니다.”
풍운의 말에 주인은 빙그레 웃더니 객실이 있는 이층으로 안내했다. 풍운과 천유가 이층에 올라 복도를 따라가는데 복도에 있던 방의 문이 열리며 면사를 두른 여인이 나왔다.
“어~ ”
풍운이 발걸음을 멈추고 여인을 바라본다. 여인의 복장이나 체형으로 보아 제갈세가의 풍설이었기 때문이다. 여인은 손에 쟁반을 들고 풍운과 천유의 겉을 말없이 지나친다.
“뭐해.”
천유가 멍하니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풍운의 어깨를 친다.
“아니야. 가자.”
풍운은 다시 천유와 함께 주인을 따라 갔다.
“이방입니다. 마음에 안 드시면 다른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좋네요. 천유가 이방을 써. 나는 옆방으로 갈게.”
“알았어. 참~ 식사는 어떻게 할 거야.”
“먹어야지. 우리 내려가서 먹자.”
“왜~ 그냥 편하게 방에서 먹으면 돼지.”
“밥 먹고 천상루에 가려고........천유는 함께 가자.”
“싫다. 혼자 다녀와.”
“알았다. 식사는 할 거지. 짐 내려놓고 밑으로 내려와.”
천유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풍운도 옆방에 들어가 짐을 풀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객점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깨끗하고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풍운은 복도에 있는 방들을 살펴보니 빈방이 얼마 되지 않는다. 그때 복도 있는 방문이 열리며 무사 두 명이 나왔다. 풍운은 무사들의 복장을 유심히 살펴보고 밑으로 내려와 창가에 앉아 밖을 구경하고 있었다.
“먼저 왔네. 음식은 주문했어.”
천유도 밑으로 내려와 풍운의 앞에 앉는다. 천유은 평소와 다름없이 하얀 무복에 건[巾-관모(冠帽)의 원시 형태로서 헝겊 등으로 만들어 머리에 쓰는 물건]으로 머리까락 묶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치 않은 모습이다.
“아직 안했어. 천유가 알아서 주문해.”
천유는 점소이를 불러 식사와 술을 주문했다.
“천유가 마실 거야.”
“안 마셔 운이 마시라고.”
“난 또 천유가 마시다고........그래도 한잔 정도는 해라.”
“알았어. 한잔만 마실게........참~ 좀 전에 여인 말이야. 아는 사람이야.”
“누구? 복도에서 봤던 여자.”
“응~ 눈치가 아는 사람 같던데.........”
“제갈세가의 풍설이라는 여인이야. 좀 전에 복도에서 보았던 무사들의 복장으로 보아 제갈세가의 제갈무경과 함께 있는 모양이야.”
“제갈무경........제갈세가의 소공녀라는 여인 말이야.”
“응~ 전번에 만났을 때 악양으로 간다고 하더니 이곳 객점에 있는 모양이야.”
“그래........그런데 아까 그 여인은 본 척도 하지 않았잖아. 혹시 잘못 본거 아니야.”
“내가 역용을 하고 있어서 못 알아보았을 거야.”
“역용?........그럼 지금까지 내가 본 얼굴이 본 얼굴이 아니라는 말이야.”
“생각해보니 그렇게 됐네. 미안해. 속일 생각은 없었어.”
“정말~ 할 말이 없군. 너무 했다. 대체 왜 역용을 하고 다니는 거야.”
“본 얼굴로 다니면 귀찮은 일이 많이 생겨서 그래. 천유도 알지만 내가 무림공적 이잖아.”
“하기는.........그래도 그렇지. 친구인 나에게까지 본얼굴을 숨기면 안 돼지. 당장 역용를 풀어봐~ 얼굴 좀 보자.”
“여기 사람들이 많으니까 다음에 보여줄게.”
“나에게만 살짝 보여주면 안돼.”
“보고 싶어.”
“당연하지.”
그때 점소이가 술과 음식을 가지고 왔다. 풍운은 먼저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고 천유의 잔에도 술을 따라주었다.
“일단 술이나 한잔 하자.”
풍운은 술을 마시고 안주를 먹었다.
제갈무경은 란과의 식사를 마치고 창가에 앉아 밖의 풍경을 보고 있었다. 무경은 풍운과 헤어진 이후 계속 악양에 머물며 배화교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삐걱~”
문이 열리며 란이 들어온다. 란은 면사를 벗고 탁자에 앉았다.
“란........답답하지 않아. 계속 객점에만 있었잖아.”
“저보다는 아가씨가 더 답답하죠. 전 가끔 외출이라도 했잖아요.”
“우리 오랜만에 외출이라도 할까?”
“답답하세요? 밤이 깊었어요. 내일 나가요.”
“잠깐만 나갔다 오자. 계속 방에만 있었더니 답답해.”
“알았어요. 대신에 잠깐 입니다.”
란이 다시 면사를 두르자 무경도 면사를 두른다. 란은 무경을 바퀴달린 의자에 앉히고 밖으로 나왔다.
“호위무사들을 몇 명 불려야겠네요.”
“그냥 우리끼리 나가자. 잠깐 이잖아.”
“혹시 모르잖아요.”
“별일 없을 거야. 그냥 우리끼리 가자.”
“알았어요. 그럼 다시 방으로 들어가요. 저 혼자서 의자를 옮기기 힘들잖아요.”
“알았어. 그럼 나도 걸어가야겠네.”
란은 의자를 다시 방에 들여놓고 무경을 부축하여 밑으로 향했다. 풍운과 천유는 식사를 하고 있었다. 천유가 식사할 때 말하는 걸 싫어하기 때문에 풍운과 천유는 조용히 식사를 한다. 풍운은 식사를 마치고 젓가락을 놓더니 다시 술을 따른다.
“벌써 다 먹었어.”
“응~ 잠마동에서 빨리 먹던 버릇이 있어서 그래.”
“음식은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야 해. 그렇게 급하게 먹으면 위장에 부담을 준단 말이야.”
“나도 알다. 잔소리 그만하고 빨리 먹고 잔이나 들어라.”
“하여간 못 말려. 술이 그렇게 좋니.”
천유는 못 이기는 척하며 술잔을 들었다. 풍운이 술을 마시고 잔을 내려놓다가 계단을 내려오는 란과 무경을 발견했다. 무경도 계단을 내려오며 창가에 앉은 풍운을 발견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중간에 마주친다. 풍운은 무경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린다. 무경은 풍운의 눈빛을 기억한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몸이 떨린다.
“아가씨! 어디 아프세요.”
“란.........저기 창가에 앉은 분들 보이지.”
란이 무경이 가르치는 곳을 보니 창가에 젊은 남자 두 명이 앉아있었다.
“저기 젊은 남자 두 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저기 탁자로 가자.”
“모르는 사람들인데 합석하자는 말씀이세요. 빈 자리도 많잖아요.”
“이유는 나중에 설명할게”
“알았어요.”
란은 무경을 부축하여 풍운이 있는 탁자로 왔다.
“안녕하세요. 다시 만났네요.”
무경이 먼저 인사를 하자 풍운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우리가 앉아도 될까요?”
무경의 말에 천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풍운! 누구야.”
“조금 전에 말했던 제갈무경님과 풍설님이야.”
“아~ 안녕하세요. 왕천유라고 합니다.”
천유가 인사를 하자 무경이 천유를 보고 잠깐 눈빛이 흔들린다.
“제갈무경이라고 합니다. 합석해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세요.........제가 자리를 옮겨야겠군요.”
천유가 자리를 옮겨 풍운의 겉으로 가려고 했다.
“옮기실 필요 없어요. 제가 풍운님 겉에 앉으면 됩니다.”
무경은 풍운의 겉에 앉았고, 란과 천유가 같이 앉았다.
“절 어떻게 알아보셨죠.”
“눈빛!.........눈빛은 역용이 안 되잖아요.”
풍운의 질문에 무경이 짧게 대답한다. 란은 이제야 상대가 풍운이라 걸 알아보았다.
“란.......음식하고 술을 주문해. 우리가 합석하자고 했으니 우리가 대접해야지.”
란은 힐긋 풍운을 쳐다보다가 점소이를 불려 음식과 술을 추가로 주문했다.
“소문에 들으니 무창에 계신다고 하더니 악양에는 무슨 일이죠.”
“제가 무창에 있다고 누가 그래요.”
“무림에 풍운님이 천마마련을 떠나 무장으로 가셨다는 소문이 자자해요.”
풍운은 피식 웃었다. 다정화가 천상루의 정보망을 이용해 헛소문을 낸 모양이다.
“소문이 그렇게 났어요. 하하하~ 악양에 볼일이 있어서 왔어요.”
“혹시 다른분들과의 약속 때문에 오신 건 아닙니까?”
“쩝~ 귀신은 속여도 무경님은 못 속이겠네요. 맞아요. 이곳에서 도치일행을 만나기로 했어요.”
“그렇군요. 참~ 얼마 전에도 악양에 오시지 않았어요.”
“저를 보셨어요.”
“예~ 객점 앞을 지나시는 모습을 봤어요.”
“잠깐 볼일이 있어서 왔었어요.”
“무슨 일이지 물어봐도 돼요.”
“배화교에 대해 조사할 것이 있어서 왔었어요.”
“그래요. 저도 배화교에 대해 계속 조사하고 있었어요. 뭐 좀 알아내셨어요.”
“이번에 군산을 공격한 것이 배화교일 겁니다. 제가 악양을 떠나기 전에 그들이 배를 구하고 있었거든요.”
“그건 저도 알아요. 하지만 그들이 군산을 공격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죠.”
“지금부터 알아보면 알겠죠.”
“직접 군산에 가보시겠다는 말씀인가요.”
“그럴 필요 없어요.”
“무슨 말씀이죠? 풍운님께 따로 정보통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건 말씀드리기 곤란하군요.”
“천상루!........저번에 천상루에 가셨죠?”
조용히 듣고 있던 란의 말이다. 풍운은 란을 힐긋 쳐다보더니 술을 마시고 술잔을 내려놓는다.
“란님이 그걸 어떻게 아시죠?”
풍운의 말에 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한번 넘겨짚어 본 말인데 사실인 모양이다. 아니길 빌었다. 자신이 잘못 본 것이라 믿고 싶었다. 풍운은 무경이 사랑하는 남자다.........풍운은 깨끗하고 순순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아니다. 기루에나 드나드는 보통남자하고 별다른 것이 없는 남자였다. 저런 사람이 하늘이 선택한 사람이라는 것이 싫다. 아가씨가 저런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싫다.
“천상루라면 중원제일의 정보망을 가지고 있죠. 풍운님은 천상루에 아시는 분이 있나보죠?”
무경은 란처럼 단순하지 않다. 무경은 천상루라는 말을 듣고 천상루의 정보망을 먼저 생각한 것이다. 천상루는 악양을 중심으로 중원전역에 지점을 두고 있는 중원제일을 기루다. 똑같은 사건을 가지고 란과 무경의 생각이 다른 것은 관점의 차이 때문이다. 란은 풍운을 불신하고 천상루라는 외형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고, 무경은 풍운을 신뢰하며 풍운이 천상루를 찾아간 이유를 다각적으로 해석해 본 것이다.
“십이사 중 칠사가 천상루와 연이 깊어요.”
“칠사라면 혈지화호(血指花狐)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자세한 것은 말씀드리기 곤란하군요.”
“그 정도면 충분해요. 칠사님이 천상루와 연이 있다면 천상루도 평범한 기루는 아니라는 말이니 천상루의 배후에 어떤 거대한 무림세력이 있다는 말이 되겠죠.”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저번에 풍운님께서 사호팔랑.........죄송해요. 십이사라고 해야죠. 십이사님들은 배화교의 음모에 의해 잠마동에 잡혀갔다고 하셨죠. 천상루와 연이 있는 칠사님이 우연히 잡혀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다시 말해 칠사님은 배화교의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 스스로 잠마동에 들어갔다는 말이 되겠죠. 또한 천상루가 평범한 기루라면 배화교의 비밀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을 겁니다. 결론적으로 천상루의 배후에는 배화교를 견제(牽制)하려는 무림세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풍운은 무경의 설명을 듣고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다. 단순한 사건들의 조각들을 연결해서 하나의 결론에 이르는 무경의 추리력이 풍운을 질리게 만든 것이다.
“풍운님 제 말이 틀렸나요?”
“무섭네요. 앞으로 무경님 앞에서는 조심해야겠어요.”
“제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말씀이죠?”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제갈세가 사람이라 경계하시는 모양이군요. 저는 풍운님 편입니다.”
“글쎄요? 이번에도 중원을 돌아보고 왔지만 백도 무림인들에게는 왠지 정감이 가지 않더군요. 무경님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백도 무림인들 자체가 싫어요.”
“이봐요~ 아가씨는 당신에게 성심(誠心)을 다하고 있는데 너무 무례하군요.”
란이 풍운의 말에 발끈하고 나선다.
“아가씨........우리가 끼어들 자리가 아닌 것 같은데요. 아가씨는 저랑 술이나 마시죠.”
천유는 란의 잔에 술을 따라준다. 란은 천유를 힐긋 쳐다보더니 고개를 돌려버린다.
“란님은 저에게 불만이 많은 모양이군요.”
“풍운님.........란이 말에는 신경 쓰지 마세요. 풍운님이 백도 무림인들을 불신하는 것은 저도 알고 있어요. 말이 좀 이상하지만........백도 무림인이라고 모두 풍운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나쁜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닙니다.”
“그만하죠. 백도무림인들을 욕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알았어요. 그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고 다른 이야기를 하죠.......저기~ 십이사님들을 만나시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예~ 어떻게 하다니요?”
“설마 아무 계획도 없는 건 아니겠죠?”
“계획은 있지만 말하지 않겠습니다.”
“정말 못 들어 주겠네. 계속 삐딱하게 나올 겁니까? 아가씨가 걱정 되서 물어보시는 거잖아요.”
란이 화를 내며 풍운에게 쏘아붙인다. 란은 풍운의 성의 없는 대답에 화가 났다. 아가씨는 자기가 걱정되어 물어보는데 풍운은 상대를 놀리듯이 건성으로 대답한다. 풍운은 쓰게 웃으며 잔을 들어보니 술이 떨어졌다. 풍운이 술병을 들자 무경이 풍운의 손을 잡았다. 심장이 뛰고 짜릿한 흥분이 등골을 타고 올라온다.
“제..........제가 따라 들릴게요.”
무경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풍운은 손을 놓고 술잔을 들었다.
“탁~ 탁~ 탁~”
술병이 술잔에 부디 친다. 무경이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 이걸 어떻게~”
술잔이 넘쳐서 술이 풍운의 바지로 떨어지고 있었다. 풍운은 무경이 무안하지 않도록 수라기를 끌어올려 허공섭물로 떨어지는 술을 끌어올려 마신다.
“무경님이 따라주니 술만이 좋군요.”
풍운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나머지 술도 모두 마시고 술잔을 내려놓았다.
“란님.......무경님. 무경님의 질문이 개인적인 질문이라면 모두 답변해 드렸을 겁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연관된 일이라면 말씀들이기 곤란해요. 조금 전에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보셨죠. 단순하게 말해서 배화교에 복수할 겁니다. 하지만 세부적인 계획은 말씀드리기 곤란해요. 사실 도치일행을 만나서 협의해야 하기 때문에 아직 결정된 것도 없지만 모든 계획들은 나뿐만 아니라 우리 십이사들의 생사(生死)가 걸린 문제기 때문에 함부로 말씀드리기 곤란하다 것이지 무경님이나 란님을 삐딱하게 대하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설명하지 않으셔도 알아요. 란이가 오해를 한 모양입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릴 게요.”
“무경님의 사과를 받자고 한 말은 아닙니다.”
“계속 우리 이야기만 했네요.........천유님이라고 하셨죠. 이렇게 만나서 반가워요.”
“쩝~ 저는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두 분이서 말씀 나누세요.”
“그럴 수는 없죠. 천유님은 풍운님과 어떻게 되세요.”
“예?..........친구에요!”
“방금 친구라고 하셨습니까?”
“왜요? 뭐가 이상해요?”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가 친구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죠?”
“예!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천유님은 여자분 이잖아요.”
천유는 얼굴이 붉어지며 풍운을 눈치를 본다. 당황한 모양이다. 그런데 풍운은 무경의 말에 별다른 반응이 없다. 이미 풍운도 알고 있었다는 표정이다.
“제가 여자라고 어떻게 단정하시죠?”
“직감입니다. 은은하게 풍기는 창포냄새........작고 고운 손.......큰 키에 어울리지 않은 호리호리한 몸매.........볼록한 가슴........... 천유님이 여자라는 증거는 많아요.”
“휴~ 그래요.........풍운........풍운도 내가 여자란 걸 알고 있었어.”
풍운이 술잔에 술을 따르면 말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어.”
“그런데 지금까지 왜 모른 척하고 있었지.”
“천유가 스스로 밝힐 때까지 기다렸어.”
천유는 쓰게 웃더니 술잔의 술을 모두 마셔버린다. 천유가 이렇게 술을 마시는 모습은 처음이다.
“나도 한잔 줄래.”
천유가 잔을 내미었고, 풍운은 천유의 잔에 술을 따라준다.
“힘들게 숨길필요 없으니 잘됐군.”
천유가 술을 마시며 건을 풀고 머리를 풀어버리니 긴 생머리 폭포수처럼 흘려내려 어깨를 덮고 허리까지 내려온다. 풍운은 천유를 보고 멍해졌다. 사람에게는 분위기라는 것이 있다. 향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변화........약간의 변화로도 분위기는 백팔십도 변할 수 있다. 특히나 여자의 머리카락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똑같은 사람이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왕천유가 머리를 풀어버리자 갑자기 주위가 환해질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했다. 특히나 큰 눈과 가느다란 얼굴이 검은 생머리와 어울려 마치 전설에 등장하는 선녀처럼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한 것이다. 란은 천유와 풍운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길게 한숨을 쉬었다. 풍운이 넋 빠진 놈처럼 천유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정말 아름다운 분이네요.”
무경이 한숨을 쉬며 말하자 풍운이 앞에 있던 술을 꿀꺽꿀꺽 마신다.
“휴~ 천유가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인지 알았으면 친구가 아니라 연인으로 만들 걸 그렇군.”
“꿈 깨. 나는 정혼한 사람이 있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다며.”
“찾아야지.”
“어디서.......이 넓은 중원천지에서 얼굴도 모르는 정혼자를 어떻게 찾겠다는 거야.”
“왜 이렇지~ 지금 유혹하는 거야?”
“못할 것도 없잖아.”
“수혜아가씨도 있고 아라누님도 있고, 소하소저도 있고, 벽하소저도 있잖아. 그런데도 날 책임질 수 있겠어.”
“열 여자 싫다는 놈이 어디여. 더구나 천유처럼 아름다운 여자라면 무조건 환영이지.”
“그 거짓말 정말이냐.”
“당연하지.”
“흥이다. 다른 여자들 등살에 말라죽고 말겠지. 난 못나도 나만 사랑해주는 남자를 찾을 거야. 풍운 같은 바람둥이는 관심 없네요.”
“쩝~ 아쉽군.”
“저기.........제가 좀 끼어들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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