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SF

현월 야우 - 4부

본문

댓글과 추천 주신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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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이이이~익”


신경을 긁는 날카로운 휘파람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자고 있던 침상을 박차고 일어나 검은 장포를 서둘러 입는다.


우리 8조원들이 함께 사용하고 있는 널찍한 통나무집 문으로 벌써 서너명의 흑의(黑蟻)들이 튀어 나가고 있다.


옷을 벗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던 놈들이다.


잘못하면 늦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진다.




달도 없이 캄캄한, 오리(五里)정도 되는 길을 한달음에 달려와 도착한 바닷가 백사장에는 스무명도 되지 않는 흑의들만이 교두들 앞에 도열해 있었다.


다행이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


붉은 복면을 쓴 교두들 어깨너머 검게 보이는 바닷물위로 흔들리는 파도의 포말이 하얗게 부서진다.




400여명중에 150명을 선착순으로 추려낸 교두들이 그 후에 도착하는 흑의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있다.


늦은 흑의들은 우리 150명들이 조식을 끝마치고 나올 때까지 교두들의 기합에 시달리고 있어야 했다.


내가 시간이라는 개념을 인지하는 순간부터 지난 6년간 매일 일어나던 일이다.




조식(朝食)을 마친 우리 8조 38명은 함께 산위를 달리고 모래밭에서 도인체조를 한다.


몸 안에 탁기가 쌓이지 않게 하는 체조라고 몇 년 전에 교두들이 알려줬다.




그리고 모래위에서 다른 조원들과 맨손 격투를 한다.


코피가 터지고 팔이 부러져 나가는 흑의들이 속출하지만, 교두들은 온몸을 이용한 격투 후에 바다수영으로 몸을 풀고 살이 익을 것 같은 뜨거운 모래로 찜질을 하면 근골과 관절이 유연해 진다며 더 살벌한 격투를 조장한다.


오늘 우리 8조의 상대는 6조다.


6조에는 235호라는 덩치가 크고 힘이 센 놈이 있다.


지난달 6조와의 격투에서 우리 조원중 2명의 늑골과 코뼈가 놈에게 부러졌다.


그중 늑골이 부러졌던 629호는 내출혈로 죽어서 바다에 던져졌다.


오늘 내 목표가 235호 저놈이다. 


그 놈의 왼쪽 겨드랑이가 훤히 드러나고 내 발이 날아간다.




중식을 먹은 후에는 교두들의 강의가 있다.


지리와 천문, 역사와 문화를 강(講)하고 강호문파의 시조와 그 원류무공의 파훼하는 초식을 익힌다.


오전의 격렬한 움직임으로 나른해진 흑의들이 중식후의 식곤증으로 졸고 있는 경우도 과거 있었지만, 일년전 강의시간에 졸다가 교두가 던진 몽둥이에 머리가 터져서 죽은 314호 이후로는 그런 배짱 있는 흑의는 나타나지 않는다.


강의는 오직 한번씩만 행해졌다.


하지만 일개월에 한번 씩 치러지는 시험문제의 답을 수준이하로 적어내면 다음시험이 치러질 때까지 잠을 못 자고 구타와 욕설이 함께하는 재 강의를 밤새 들어야 한다.


교두들의 모든 강의가 하나의 큰 흐름으로 연결되어 진다는 것을 느낀 2년 전부터, 내가 재 강의를 들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석식 후에는 그날 배운 교두들의 강의를 각자 갈무리 할 수 있는 시간을 한시진씩 주어 서고를 이용하게 했다.


지옥도 석실의 서고에는 수만권의 서책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경서와 역사서 종교의 교리서와 외국에서 흘러 들어온 외국서적까지 방대한 저서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후 잠들기 전까지 지옥도의 숲속에서 모의전투를 한다.


그간 배웠던 모든 것들을 이용해 상대편으로 지목된 조의 상징인 십장생이 그려진 기(旗)를 탈취하는 것이다.


모의전투라고는 하지만 어둠속에서 이루어지는 이 전투에서 죽어간 흑의들의 숫자가 다른 상망 원인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매일 밤 이루어지는 모의전투 결과를 일개월동안 평가한 교두들이, 가장 성적이 안 좋은 조의 조원들 중에 일할을 선정해 산채로 상어가 우글거리는 바다 속으로 던졌기 때문에, 전투에 참가하는 흑의들이 상대의 목숨을 빼앗는 한이 있어도 승리하려고 했던 것이다. 




천명이 넘던 흑의들이 매년 백여명씩 죽어나가 이젠 사백명정도만이 살아남았다.


흑의들은 나이도 모르고 이름도 없다.


그냥 흑의 몇호일 뿐이다.


검은 장포의 왼쪽 가슴에 흰실로 수놓은 숫자가 흑의(黑蟻)의 이름이다. 


나는 검은 개미 144호다.










혜화루의 지하 깊숙한 밀실 안에 벽고영과 이십대 중후반쯤 되는 눈매가 서늘한 여인이 찻잔을 마주하고 다탁에 앉아있다. 




벽고영의 맞은편에 앉은 여인은 혜화루(惠化樓)의 루주 정하련(鄭夏蓮)으로 올해 29세인, 광주부의 기루에서 10년 가까이 그 미모와 조리 있는 말솜씨로 광주의 취객들을 휘어잡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녀에게는 혜화루주라는 드러난 신분 외에도 하오문(下午門) 광주지부장 이라는 숨겨진 신분이 있다.


오늘 벽고영은 하오문 지부장을 만나러 혜화루에 들른 것이다.




“공자님께서 의뢰하신 건은 앞으로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 같아요. 좀처럼 꼬리가 잡히질 않네요.”


“쉽게 밝혀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십년 전의 일이 쉽게 드러날 리가 없겠지요..”


“시간도 시간이지만 당시 상황이 전쟁이 있던 정난지변(靖難之變)의 혼란스런 시기여서 파악하기가 쉽지 않군요. 관부의 서류도 미비하고 저희 하오문도 당시 전화(戰禍)에 휩싸여 서류가 소실되고 많은 피해를 입었던 시기 인지라...”


“좀 더 시간을 가지고 조사하여 주십시오. 지부장님! 어차피 기간이 정해진 것도 아니고 그리 급할 것도 없으니....조사하다 보면 뭔가가 나오겠지요.”




벽고영은 하오문에 조사를 의뢰해 놓은 것이 있다.


지옥도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이십여년전에 대량으로 실종된 유아들을 조사하고 있는 것이다.


사물을 겨우 인지하기 시작할 어린 시절에 지옥도에는 약 천여명의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존재 했었다.




인간의 목숨을 개미목숨 취급하는 지옥도에, 그 아이들의 부모들이 자식들을 자발적으로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데 착안해서, 그만한 수의 아이들을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모으려면 납치나 유괴 같은 범죄가 발생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뒷골목 정보기관인 하오문에 조사를 의뢰해 놓았는데 하필 그 시기가 당금황제인 영락제가 전 황제인 혜제를 축출하는 전쟁의 시기와 묘하게 겹쳐, 조사가 초반부터 벽에 부딪힌 상태이다.




흔히 정난지변(靖難之變)이라고 불리는, 이십년 전의 조카와 숙부간의 이 전쟁은 명태조(明太祖)인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이 일찍 세상을 떠난 장남 주표의 아들인, 자신의 손자 주윤문(朱允炆)을 태자로 삼고 보위를 물려줌으로써 발발되었다.




주원장 사후(死後) 대명제국(大明帝國)의 2대 황제에 오른 혜제(惠帝) 주윤문은, 당시 지방에서 막강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던 자신의 숙부들을 견제하기 위해 삭번(削藩)을 단행하였는데 이 정책에 반발한 주원장의 사남(四男)이었던 연왕(燕王) 주체(朱棣)가 반란을 일으켜 숙질(叔姪)간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쟁투가 시작된다.




당시 북평왕(北平王)이라고도 불리던 북경지역의 맹주였던 연왕이 1399년부터 1402년까지 치열하게 전개된 4년간의 전쟁끝에 대명제국의 수도였던 남경(南京)을 함락시키고 승리함으로써 대명의 제 3대 황제(皇帝)에 오르게 된다.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은 남경함락 당시 후일 건문제(建文帝)라 불리게 된 2대 황제 혜제 주윤문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채 실종되었다는 점이다.


실종당시 주윤문이 25세의 젊은 나이여서, 43세의 나이로 새롭게 황제에 오른 연왕 주체는, 젊은 조카가 언젠가 복위(復位)를 위해 세력을 모을 거라는 두려움에, 수도를 자신의 근거지였던 북평(北平-천도후에 북경으로 명칭을 변경)으로 천도하고 사라진 주윤문을 찾는데 온힘을 기울인다.




황제 즉위 후 시호를 영락(永樂)으로 바꾼 연왕은, 사라진 전 황제 주윤문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남쪽으로 내려갔다는 어느 도사의 말을 믿고, 환관 정화(鄭和)에게 명해 대함대(大艦隊)를 인솔하게 하여 남쪽 지방을 샅샅이 뒤지게 하였는데, 이것이 후일 정화의 남해사략(南海史略)으로 불리게 된다.




그리하고도 혜제 주윤문을 찾지 못한 연왕은 강남(江南)을 주윤문 세력들의 근거지로 추정하고 광동성, 절강성 등 강남의 지역들을 탄압하게 되는데, 예로부터 반골기질이 강했던 강남의 지사(志士)들은 영락제(永樂帝)로 불리던 연왕 주체의 사후까지도 그를 황제로 칭하지 않고 건문제 주윤문 만을 대명의 정통황제로 인정하며 추앙하게 된다.






이렇게 전쟁으로 유민이 많이 발생하고 나라의 주인이 바뀌는 혼란스런 시기에 어느 관부에서 아이들의 실종 사건이 있다고 한들 제대로 조사를 했겠는가?


자기들 명줄 유지하기에도 바빴을 터인데..


다만 한 가지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지옥도의 조직이 만만치 않은 대형조직 일거라는 가설뿐이다.


천명이 넘는 유아들을 모으고 이동하는데 들키지 않았다는 것은 천명이상의 인원수가 그 일에 동원되었다는 뜻이고, 지옥도에서 생활할 때 흑의들이 받아쓰던 보급품들의 소요가격도 어지간한 조직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벽고영이 그 일의 의뢰를 황서계나 개방과 같은 고급정보기관에 의뢰하지 않고 하오문에 의뢰한 이유는 절도, 마약, 인신매매 같은 생활범죄들에는 반드시 뒷골목의 하오문도가 한둘씩은 꼭 끼어있기 때문에 시간을 주면 하오문에서 아이들 납치에 관한 단서나 목격자가 나오리라는 확신 섞인 예상 때문이다.


물론 앞에 앉아있는 하오문 광주지부장인 여인에게 전모를 모두 알려주지는 않았다.


단지 이십오년 전부터 이십년전 사이에 일어난 영유아들의 대량실종을 찾으라는 부분만을 의뢰해 놓았다.




지옥도와 지옥도주의 정체를 조사하는 일은 신중에 신중을 더해야 한다.


그들은 철저하고 무자비하고 잔인하다,


벽고영이 자신들의 뒤를 추적하는 것을 알면 어떤 수를 쓰던 벽고영을 제거할 것이다.




이십년전의 유아 실종건에 대해 얘기를 끝낸 벽고영이 다른 용건을 꺼낸다.


“지부장님!..혹시 흑하보의 해부를 맞고 있는 우문걸(宇文傑)해부주와 안면이 있으신지요?”


“네! 공자님! 몇 번 만난 적이 있기는 합니다만..”


별일 아니라는 듯 혜화루주 장하련이 가볍게 답을 한다.


“혜화루주로 만난 것입니까? 아니면 하오문 광주지부장 으로 만난 것입니까?”


벽고영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고 눈빛이 강해진다.


그 눈빛을 본 장하련이 지금 벽고영이 말하고 있는 것이 심각한 사안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눈치 채고 목소리가 신중해 진다.


“루주로서도 몇번 보았지만 지부장의 신분으로 거래한 적도 있습니다만.”


“지부장님께서 저와 우문걸 해부주의 공식적인 대면을 주선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 비밀리에..”


하오문이 두 사람의 신분을 보장해 달라는 뜻이다.


거기에 비밀이라는 단서조항이 붙었다.


보통 심각한 사안이 아니라는 뜻이다.


장하련의 눈빛이 침중해 진다.


“하오문 광주지부장의 역량이 허락하는 선까지는 해드릴 수 있습니다만 비용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사안도 미리 알아야 하고요..”


“비용은 걱정하지 마시고..사안은..”


벽고영이 중간에 말을 멈추고 장하련의 눈을 강하게 한동안 쳐다본 후 말을 이어간다.


“사안은 흑하보의 선장을 바꾸는 일입니다.”


장하련의 눈에 경악의 빛이 떠오른다.




흑하보의 선장을 바꾼다는 말은 흑하보주 장 대운(張大運)을 축출해 내고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을 앉히겠다는 말이다.


지금 벽고영은 광주에서 최고 성세를 자랑하는 문파의 수장을 축출 해내는 의논을, 그 문파에서 서열 삼위권에 들어가는 인물과 상의를 하겠다며, 그 사안의 신뢰를 하오문에서 담보해 달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장하련이 벽고영을 바라보는 눈빛이 경악에서 호기심으로, 호기심에서 확신으로 바뀌는 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고만 있다.


침묵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그 숨 막히는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장하련 이었다.


“공자님! 그 일의 성공확률이 얼마나 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그 일이 성공했을 때 하오문에서 받는 대가는 뭐죠?”


“제 계획대로만 된다면 성공확률은 구할 이상...그리고 지부장님은 내년부터 운검장 소작지에서 생산되는 쌀과 밀의 전체 판매권중 삼 할을 가질 수 있으실 겁니다. 또 신임 흑하보주 에게도 그 대가를 받으실 수 있을 거구요..이정도면 해볼 만한 일 아닙니까?”


한동안 뭔가를 생각하던 장하련이 뭔가를 결정했다는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공자님께서는 저를 어떻게 믿고 그 같은 내용을 섣불리 털어 놓으시는 겁니까? 제가 흑하보주에게 그걸 밀고라도 하시면 어쩌시려고요..호호호”


“루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하오문의 강서 지부장님을 믿는 거지요..하하하..지난 2년간 제가 보아온 지부장님은 하오문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물불을 안 가리시더군요. 그리고 만에 하나 흑하보주에게 밀고를 한다고 해도 커다란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겁니다. 흑하보 내부에도 저희 운검장 사람들이 있거든요. 하하하”


“호호호 ..공자님은 참 무서운 분이시라는 것을 오늘 소첩이 처음 알았네요..호호”


“하하하 저도 루주님이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시라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그려..하하”


어느새 무겁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가벼운 농담이 오간다.


서로 계약이 이루어진 것이다.




벽고영이 지난 이년간 하오문과 거래하며 쌓아왔던 신용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흑하보는 광주를 끼고도는 주강(珠江)의 한 지류인 광주부 동편 금사강(金砂江)에 총단을 두고있는 방파로, 광동성내의 내륙수로를 관장하는 수부(水府)와 해로를 관할하는 해부(海府), 그리고 흑하보주의 친위 세력인 흑하특무대(黑河特務隊)로 구성되어 있다.


그 외에 총관부나 기타 조직들도 있지만 무력은 위의 세 조직이 가장 강력하다. 




수부와 흑하특무대는 보주의 친동생들인 장하운과 장명운이 그 수장(首長)직을 차지하고 있고, 해부는 우문걸이 맡고 있는데 우문걸은 올해 45세가 되는 장년으로 이십년전 왜구와의 해전에서 전사한 전 흑하보주 우문황(宇文皇)의 장남이다.


아버지 우문황이 사망하였을 당시 우문걸은 임시 해부주의 직분으로 1년여의 시간이 걸리는 뱃길을 서역의 상인들과 함께 막 출발한 상태였다.


1년여의 후에 서역에서 돌아온 우문걸은 자신의 부친이 사망하고 흑하보주 자리를 부보주였던 장대운이 차지하고 있는 것을 말없이 수긍하고 그 밑에서 정식 해부주직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이십년전 취약한 흑하보내(內)의 기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문걸에게 해부주직을 넘긴 보주 장대운이 수부와 특무대를 자신의 동생들을 시켜 장악한 후에는 우문걸의 해부마저 자신의 손아귀에 쥐려고 끊임없는 견제와 압력을 우문걸에게 넣고 있는 중이다.


이런 우문걸의 상황을 이년 전부터 흑하보에 침투시킨 간세를 활약을 통해 파악한 벽고영이,운검장 총관의 일에 수부주 장하운이 깊이 개임되어 있는 것을 기화로 아예 흑하보주 장대운을 축출하고 그 자리에 우문걸을 앉히려고 계획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지난 몇 년간 흑하보의 수하들이 운검장이 운영하는 포목점이나 주루에서 행패를 부리고 무시하는 행동들을 해 왔고 광주부내의 일반 백성에게도 패악질을 하는 등 원성이 자자해 이번에 아주 뿌리를 뽑으려는 것이다.








장하련과 만난 그 이튿날, 혜화루의 그 밀실에서 우문걸과 만나 두시진 동안의 긴 회담을 하고 주루를 나선 벽고영은 곧바로 광동성의 패자(覇者)중의 한 집단인 녹수산장(綠水山莊)의 광주지부에 들러 지부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곳을 나올 때, 그 곳에서 몇 마리의 전서구가 떠올랐다.




흑하보주 장대운은 녹수산장과 광동성의 패권을 두고 경쟁하는 남천패가(南天覇家)와 무척 가까운 사이이고 운검장의 노장주는 녹수산장의 핵심간부와 사돈 관계이다. 


노장주 손자의 미망인(未亡人)중 하나인 이지련이 녹수산장 장주의 조카딸이고 그녀의 부친은 녹수산장 제일의 무력집단인 창천대(蒼天隊)의 수장인 것이다.


흑하보주를 축출하고 난후 남천패가의 도발을 견제하기 위해 녹수산장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미리 녹수산장 본장에 연락을 취해놓은 것이다.


장으로 돌아온 벽고영은 또 다시 운검장의 내, 외전주를 불러 무엇인가를 숙의한 후에 그 날의 일과를 마감했다.






잔월도 스러져 칠흑같이 어두운 밤


검은 야행복을 입은 벽고영이 묵환(墨環)을 던져 놓았던 그 석굴에 서 있다.


벌써 사흘이 모두 지난 석굴 안에는 기이한 향(香)이 감돌고 있다.


극락환희사가 교접을 하며 토해놓은 정을 묵환이 모두 흡수하지 못하여 기화된 극락사의 정들이 석굴안의 공기 중에 포함되어 나는 향(香)이다.


석굴바닥에 정방형으로 파여져 뱀 떼들을 가두어 놓았던 곳에는 수천마리의 뱀 떼들이 수분을 모두 빼앗긴 것처럼 말라죽어 있었고 뱀 떼의 사체들 위에 묵환, 아니 이제는 묵환(墨環)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붉은 빛을 띠는 환이 놓여져있다.


오늘밤 저 환(環)에 흡수되어 있는 기(氣)를 모두 벽고영의 내공으로 치환한다면 저 환은 다시 검은 묵환이 될 것이다.




잠시후


발가벗은 벽고영이 우수에 붉게 빛나는 환(環)만을 차고서 석굴바닥에 가부좌를 하고 환희밀양공(歡喜密陽功)의 운기법에 따라 흡기(吸氣)를 하고 있다.


팔목의 내관혈(內關穴)로 쏟아져 들어온 극락환희사들의 정(精)이 팔꿈치 안쪽의 척택혈(尺澤穴)을 지나 어깨 아래쪽 중부혈을 통과하여 수태음폐경(手太陰肺經)의 22개 혈자리를 모두 통과하여 다시 내관혈로 돌아오는 순간 지난 12년간 혈액속에 쌓아왔던 양기와 음기가 극락환희사의 정(精)에 반응하여 혈액 속에서 들끓어 오르며 수태음폐경의 중부혈로 모여든다.




이제 부터가 매우 중요한 고비이다.


중부혈로 모여든, 혈액 속에서 잠자다가 깨어난 야생마 같이 거친 양기와 음기를 내곡혈을 통해 다시 묵환으로 배출시켜 정제한 후에, 극락사들의 정과 융합하여 일주천(一週遷) 시키고 다시 묵환으로 내보내서 정제하고 다시 몸속으로 흡기, 일주천, 배출 그 과정을 열두번 반복해야 혈액 속에서 잠자던 양기와 음기, 그리고 극락사의 정들이 완전하게 내공으로 치환되어 단전에 쌓이는 것이다.




그런데 극히 주의해야 하는 것은, 위의 과정 중에 지난 10여년간 받아 들였던 엄청난 양의 음기와 양기가 음경과 뇌를 자극하게 되는데, 그 순간 자칫 이성을 잃어 폭주하게 되면 그 동안 쌓아왔던 모든 기들이 기해혈을 부수면서 배출되어 허공 속으로 산화되어 사라지고, 다시는 내공을 익힐 수 없는 폐인이 된다는 점이다.




벽고영이 일주천을 마쳤을 때 그의 좌반신은 붉게 물들었고 다리사이의 거대한 음경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양기가 먼저 도발을 하는 것이다.




이주천을 마쳤을 때에는 좌반신이 희게 물들면서 귀두가 새빨갛게 부풀어 오르는 현상이 나타났다.


음기의 자극이었다.




이러한 몸의 현상은 벽고영이 십주천 할 때까지 반복되다가 십일주천 때에는 좌반신의 백색과 우반신의 붉은색이 섞이면서 석굴안에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자극하는 향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강력한 최음제의 원료로 쓰이는 극락사의 정과 수월화의 분말들이 완전히 융합되면서 나타나는 일시적인 향의 발현이다.




이 향기는 십이주천이 끝나면 대부분 완전하게 몸속으로 녹아들어 내공으로 치환되지만 일부는 혈액과 묵환 속으로 스며든다.


혈액 속에 스며든 이 향기는 치명적인 최음향으로 변해 이성(異姓)을 유혹한다.


결코 동성(同性)은 맡을 수 없는 이 향기는 입속의 침이나 겨드랑이의 땀, 사타구니의 분비샘 등에서 외부로 노출되는데 한번이라도 그 향기를 맡은 이성은 그 향기에 뇌리에 각인되어 평생을 잊지 못하게 된다.


환희밀양공 운기의 묘를 살리면 일시적으로 향을 짙게 할 수도 또 옅게 할 수도 있다.


환희밀양공을 색공이라고 부르는 한가지의 이유가 또 이것이다.


묵환속으로 스며든 향은 평소에는 향을 발하지 않다가 환희밀양공을 완성한 사람의 몸에서 벗어나는 순간부터 짙은 향을 발한다. 




이 향을 맡은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음심이 동하게 되는데 내공이 약하고 정력이 굳건하지 못한 이들은 음심을 이기기가 매우 힘들다.


묵환이 아주 치명적이고 훌륭한 무기로 변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치명적인 환희밀양공이 강호 무림에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대대로 시행착오를 반복해가며 연구해 오던 일인전승의 환희밀양공이 여교두의 사부 때에서야 겨우 완성된 탓이다.




벽고영이 최초의 환희밀양공 완성자가 되는 것이다.






캄캄한 밤인 자시에 시작된 환희밀양공 사단계의 십이주천 연공이 끝난 시간은 날이 환하게 밝아오고서도 한참을 더 지난 한낮의 오시(午時)였다.


십이주천을 모두 끝내고 들끓었던 기운들을 모두 정제하여 단전에 갈무리한 벽고영의 벌거벗은 신체가 운공전과는 조금 틀려져 있었다.


피부가 더 희게 변했고 가슴이 더 넓어졌으며 다리가 조금 길어지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의 검은색이 짙어졌다.


가장 큰 변화는 아직까지 우뚝 발기한 채로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음경의 귀두부분 이었는데 연공전보다 귀두가 확연히 굵어지고 색이 짙은 붉은색으로 변했다.






연공의 무아(無我)중에 환골탈태를 한 것이다.


육개월전 벽고영의 제운공이 구성에 들어섰을 때 노장주 운현이 구해준 의성가(醫聖家) 비전 환단(丸丹)이라는 검은색의 환단을 복용하고 운기한 직후, 순식간에 제운공의 십성단계에 들어서면서 생사현관의 타통을 경험했었다.




운기를 마치고 눈을 뜬 벽고영의 눈 속에서 잠시 별빛이 반짝이다가 사라진다.


반박귀진(返朴歸眞)일까?




옷을 다시입고 밖으로 나온 벽고영이 손을 한번 가볍게 휘둘러 석굴입구를 무너뜨려 환희밀양공 수련의 흔적들을 완벽하게 은폐하고 연무실로 향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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