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 4부
본문
아침 일찍 사단가는 차 안에서 연대장은 클래식 음악을 틀었다.
-내 원래 음대가려고 했었는거 니 아나?
-네 연대장님, 전에 한번 말씀 하셨습니다.
-집이 약간 여유만 있고 동생들만 줄줄이 있지만 않았어도 어떻게든 한번 소신대로 밀어보는건데 아쉽다.
-그래도 그 시절에 육사 나오시고 대령까지 하신거면 정말 성공하신거 아닙니까? 전 연대장님이 존경스럽습니다.
-됐다 야, 그런 아부는 신임 연대장한테나 해라. 내보다 5기수나 아래인 사람인데, 깐깐할거다 아마.
강진후 대령은 다른 곳으로 발령가기에 앞서 사단장에게 신고를 하러 가는 길이었다. 모내기 한 지가 얼마 안되는거 같은데 이제 초록색 물결이 많이도 올라왔다. 가을에 있을 준장진급 심사 여부도 기다려졌고 Y군 보다 더 오지로 들어간다는게 썩 내키지도 않았다. 강진후 대령은 주머니에서 흰 봉투를 꺼내 차 앞에 손잡이를 열고 봉투를 집어 넣었다. 민성이 잠시 그쪽을 보자 강진후는 농담조로 말했다.
-편지 아니야 임마. 그동안 수고했으니까 휴가 나가서 맛있는거나 사먹으라고.
-감사합니다, 연대장님. 그동안 제대로 보필하지도 못했는데 항상 과분하게 보살펴주신거 같아 항상 죄송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됐고, 그 대신 너 처음 나한테 했던 말 잊지 말고 항상 초심잃지 말고 노력하는 자세로 살아라. 약속대로 올해 안에 서울에서 밥한번 먹자. 대학생물 먹으면 또 달라지려나. 하하
민성은 사단에서 돌아온 후 1년 넘게 운행해온 1호차에서 공식적으로 완전히 손을 떼었다. 오랜만에 수송부 연병장으로 돌아와 정비고 앞에 차를 대었다.
-섭섭하냐?
정비고 안에 쇼파에서 빵을 먹던 김형호 하사가 민성을 불렀다. 옆에서 같이 빵을 나눠먹던 정비병 왕고 우근조 병장이 한마디 거들었다.
-너 실업자 됐으니까 이제 정비 막내로 들어와라 ㅋㅋㅋ
-아이고 우병장님. 같은 실업자끼리 왜 이러시나.. 왕고되고 스패너 한번 만지는 꼴을 못봤는데. ㅋㅋㅋ
-나 이제 군인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ㅋㅋ 안그렇습니까 김형호 하사님?
-지랄하고 자빠졌네. 하여튼 우리 나라 군대는 병장새끼들이 문제야.. ㅋㅋㅋ
셋이서 쇼파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정비고 뒤에서 소리지르는게 들렸다. 민성은 일어나서 뒤로 가보았다. 기두식이 조일신과 배원찬을 세워두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야 이 씨발놈아. 엔진오일 떠오랬더니 담배를 피고 있어?
조일신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어이, 신병. 넌 안 죄송하냐?
-죄송합니다.
원찬이 우거지상을 쓰고 입을 떼었다. 두식이 한발 더 원찬쪽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니 쌍판떼기는 별로 안죄송한거 같은데?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차량점호할 때 레토나 아무차나 붙잡고 배워야지 너 그 시간에 어디갔었어?
-잠깐 화장실에 갔었습니다.
-개새끼야, 그 잠깐이 30분이 넘었어. 너 솔직히 말해. 그때 전화했지?
두식이 원찬을 쪼다가 일신이를 바라봤다. 일신이는 눈빛으로 긍정의 뜻을 보냈다. 두식은 주먹으로 원찬의 가슴을 한 대 툭 쳤다.
-야 이 개새끼야. 말해보라고. 너 애인한테 전화 한거 아니야? 이 쉐끼가 모를줄 아나. 여기 군대야 임마. 니 행동거지가 다 드러난다고. 어디서 씨발 구라를 치고 있어. 뒤지고 싶나?
-여자친구가 그 시간만 전화할 수 있다고 해서.... 죄송합니다.
-이 새끼 완전 개념을 놨네. 조일신. 넌 맞선임이란 새끼가 .. 막내를 하도 오래해서 선임이 맞선임이 뭘 해야 하는지 모르지? 너 이새끼 잘 하다가 꼭 이러네.
불똥이 조일신에게 튀었다. 일신은 연신 죄송하다고 하며 고개를 숙였다.
-니 와이프가 그시간에 딴놈 밑에 깔려서 낑낑대더라도 넌 일과 준수하고 시키는거 다 해놔.
두식의 도발적인 말에 원찬이 두식을 노려보았다. 민성이 보기에 두식의 성격상 그냥 넘어가진 않을 거 같기에 말려보려 한발 내딛는 순간 아니나 다를까 두식은 원찬의 귀싸대기를 한 대 후려쳤다.
-씨발새끼야, 노려보면 어쩔건데? 니가 밖에서 뭐 얼마나 날고기었는지 모르겠지만 짬찌면 짬찌답게 알아서 설설 기어라. 눈깔을 진짜 숟가락으로 다 파벌라..
그리고 일신이, 너 이번주까지 신병 이 새끼한테 레토나 엔진오일, 기름 들어가는 양이랑 타이어 공기압, 자키 띄우는 법, 타이어 가는 방법까지 다 가르쳐놔. 얘 모르면 너까지 죽는다.
-네. 알겠습니다.
일신이 원찬을 데리고 갔다. 원찬은 뭐가 분한지 계속 씩씩 대고 있었다. 민성은 두식이에게 갔다.
-두식아 뭔일이야?
-신병 새끼가 완전 개판입니다. 차량 점호 째고 애인한테 전화하다가 걸렸답니다. 엔진오일 떠오랬더니 하도 오래걸리기에 보니깐 담배를 피고 있지 않습니까. 일신이 하도 착해서 신병새끼가 지 꼴리는 데로 하나봅니다. 다른 소대 애들 보기 창피해서...
-그래? 이새끼 안되겠네. 니가 고생이 많다. 두식아
-아니 근데 저새끼랑 최민성 상병님이랑 친구라든데 맞습니까?
-응? 으응. 친구..까지는 아니고 같은 고등학교를 나온거지.
-최민성 상병님은 절대 안그러겠지만 저 새끼 감싸고 돌면 안됩니다. 군대 개판됩니다.
-두식아... 아니 두식이 형.. ㅋㅋ 절대 그럴일 없어. 난 분대장님인 두식이형 편이야.
-뭘 새삼스럽게 형이라 합니까? ㅋㅋ 뒷맛이 왠지 쎄~하네.
-난 이제 군인이 아닌데 나이대로 가야지. 두식이 형도 이제 민성동생 해. ㅋㅋ
민성은 우근조 병장이 한 말을 그대로 해봤다. 기두식 상병도 노기를 지우고 민성의 농담에 씩 웃어보였다. 민성은 두식의 등을 두어번 토닥거린후 행정반에 들어갔다.
-충성. 행정보급관님. 이거 포상휴가증입니다.
-특급전사 포상 그거 올려자녀
행정보급관 이찬휘 원사가 말했다. 민성이 수송관 다음으로 중대에서 친한 간부가 이찬휘 원사였다. 1호차 공백을 최소한 줄이기 위해 민성의 상병휴가를 못가게 막았지만 연대장의 연가에 맞춰 민성에게 포상을 주기도 했었다. 민성은 딱히 휴가를 길게 나갈 생각이 없었고, 2학기때 맞춰 복학을 하려면 휴가를 모아놀 필요성도 있었기에 이찬휘 원사의 뜻에 따르기로 했었다.
-그거 말고 연대장님이 오늘 하나 주셨습니다.
-안돼안돼. 너 너무 많이 나가. 규정 위반이야.
행정보급관이 손사래를 치며 나가라는 시늉을 취하자 민성이 주머니에서 벌꿀이 들은 인삼드링크를 꺼냈다. 아까 사단 피엑스에서 사온 것이었다.
-행정보급관님... 한번만 도와주십시오. 저 복학할려고 휴가 차근차근 모은 겁니다. 헤헤
-너 이새끼. 알겠다. 그대신 병장 달고 쳐지지 말고 똑바로 해
-옙 알겠습니다.
-수송관이 뭐 따로 한말 없냐?
-수송관이 일이등병 영내 운전 교육은 제가 전담하라고 말했습니다. 당직대기는 아마 정일이가 쭉 할겁니다. 정일이 없을때 제가 당직대기 땜빵하겠습니다. 그리고 일신이가 1호차 할거 같은데 일신이한테도 인수인계 확실하게 해 놓겠습니다.
-더 바쁘겠네. 경철아. 민성이 못 놀게 뺑뺑이 제대로 돌려라. 알았지?
배차계 업무를 보던 박경철 상병이 뒤를 돌아보았다. 민성쪽을 바라보고 실실거리며 말했다.
-예, 알겠습니다. 민성이놈 1호차로 여태 꿀빨았는데 이제 좀 뺑이 쳐야지?
-놀구있다. 동기라는 놈이 도움은 못될망정. ㅋㅋㅋ
민성은 행정반을 나와 레토나가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갔다. 기두식은 운행을 나갔고 조일신과 배원찬이 차 근처에 있었다. 조일신은 차 문을 다 열고 걸레를 들고 열심히 내부청소를 하고 있었다. 원찬은 다른 차 안에 기대어 걸레로 닦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원찬아. 너 뭐하냐?
-보면 모르냐. 잘난 분대장이 차 내부 다 청소하란다. 딱 봐도 똥찬데 닦으나 마나지. 1호차는 되야 청소한 티가 나지 이건 뭐...
나에게 반말을 하는 모습을 보고 조일신 일병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이쪽을 쳐다봤다. 민성은 미리 주의를 주지 못한 자신이 실수한 부분을 인정했다. 민성은 지금까지 후임이 명백한 잘못을 하거나 상하관계를 무시하는 언행을 했을때를 제외하고는 후임을 갈군적이 없었다. 그래서 어느정도 짬이 된 이후에는 별다른 쓴소리를 하지않아도 후임들이 모두 민성의 말을 잘 듣고 잘 따랐다. 민성은 자신이 후임병이던 시절 말되안되는 갈굼과 인격모독을 당했지만 자신만은 그런 악습을 끊고자 다짐했고 어느정도는 지켜졌다고 생각했다. 군대에서 이루고자 했던 자신의 발전은 외적인 면 뿐만 아니라 내적인 면도 포함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건 아니었다. 명백히 일과시간에 다른 병사도 있는 자리에서 말을 툭툭 내뱉고 분대장 욕을 서슴없이 하는 행동을 제재를 가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야, 배원찬.
-뭐?
-말 가려가면서 해라. 여기 군대다.
원찬은 뭔가 공기가 달라졌음을 느끼고 일신쪽을 한번 보더니 다시 민성을 바라봤다. 원찬의 얼굴을 울그락붉으락 해졌다. 뭔가 대꾸하고 싶지만 이등병과 낼모레 병장간의 기세는 원찬도 어쩔수 없었다. 원찬은 고개를 떨구고 바르르 떨었다. 민성은 그런 원찬을 뒤로하고 일신에게 갔다.
-일신아 너 1호차 하는거 알지? 수송관님이 말 했을텐데.
-저로 확정된겁니까? 김원재 일병이랑 계속 경합하는줄 알았습니다.
-원재보다 니가 후임이지? 원재는 6호차 아마 계속 할거야. 근데 나는 그게 좋더라.
-감사합니다. ㅋㅋㅋ 이제 운행좀 나갈수 있어서 정말 좋습니다.
-야 ㅋㅋ 그것도 한두달이지. 난 참모부 배차가 더 좋던데. 맨날 간부 바뀌고 가는 곳도 다양하고.. 더 재밌어. 1호차는 계속 CP에 있어야 하고 지루해. 연대장님이 사람 좋으면 상관없지만 안그러면 진짜 지옥이 따로 없어.
-아무튼 열심히 하겠습니다.
연대장 이취임식이 지나고 주말도 지나고 최민성은 병장이 되었다. 선임도 이제 몇 명 남지 않았고 집에 갈 날만 세는 입장에서는 상병이나 병장이나 느낌상 크게 다를바가 없었다. 힘들고 험했던 군생활을 이제 마무리 해간다는 감격은 있었다. 민성이 이등병일때 전역하는 선임들을 보면서 막연히 부럽다는 생각뿐이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들이 약간 존경스러웠다. 사회에서 보면 정말 별것 아닌 장삼이사의 사람들이었지만 이 개같은 군생활을 버텼다는 것만으로도 인정할만 했다.
애들한테 아침메뉴를 물어보니 그 거지같은 조기순살튀김이랜다. 조기냐고는 멸치만큼도 살이 안붙어있는데 그걸 먹느니 아침점호를 마치고 민성은 그냥 생활관으로 들어와 티비를 보았다. 선임이 돼서도 리모콘은 별로 잡지 않아서 뭘 봐야 할지 몰라서 이리 저리 채널을 돌리고 있는데 밖에서 또 갈구는 소리가 들렸다.
-씨발새끼야, 빨리 씻고 일과 준비를 해야지 여기서 담배 쳐 물고 앉았냐?
민성이 나가보니 작전과 계원 김청화 상병이 원찬을 갈구고 있었다. 또 아침부터 한소리 들은 원찬은 담배를 툭툭 끄더니 쓰레기통을 향해 꽁초를 탁 튕겼다. 꽁초는 쓰레기통 옆에 맞고 떨어졌다. 원찬은 세면도구를 가지러 컨테이너로 향했다.
-야. 서!
김청화 상병이 원찬을 세웠다.
-개새끼야. 꽁초 똑바로 못버려?
원찬은 아무말도 안하고 가서 꽁초를 손으로 주우려고 허리를 숙였다. 청화는 원찬을 벽으로 확 밀치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신병. 입으로 주워
원찬은 고개를 꼿꼿이 세우며 김청화를 노려보았다.
-못하겠습니다.
-뭐? 못해?
원찬의 도발에 근처에서 담배를 피던 상병장들이 우르르 청화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너 그거 입으로 안주으면 니 군생활 끝이야
-못하겠습니다. 다들 밥먹고 담배피우는 데 왜 저한테만 뭐라고 합니까?
-짬찌새끼가 쳐 도랐나? 니 눈깔로 한번 봐라. 다 상병장인데 어디 갓 들어온 새끼가 같이 담배를 물라고 해? 너 진짜 미쳤냐?
-밥먹고 그 잠깐 담배 피는 것도 안됩니까? 아직 일과 시간 전이고 제가 시간 분할 잘해서 빨리 피고 준비하겠다는데 그것도 안됩니까?
-그만!!!! 얘들아 그만 해라. 아직 2주대기도 안풀렸다. 내가 알아서 얘기할테니깐 다들 가봐.
보다 못한 내가 끼어들었다. 나름 중대 내에서 신망이 있었기에 청화를 비롯한 다른 애들도 군말없이 사라져주었다. 아예 사태를 관망하듯이 쳐다만 보던 중대 최고참 말년 두어명만 <민성아 고생많겠다 ㅋㅋㅋ> 라는 말을 남기고 생활관으로 들어갔다.
원찬을 데리고 레토나 주차장으로 갔다. 차량점호를 마치고 일과에 돌입했다. 원찬은 씩씩대면서 말했다.
-아.. 진짜 밖에서 만나면 병신같은 애들이 여기서 존나 가오잡는다. 죽여버릴까부다.
-그럼 밖에서 만나든가. 너 아까 나 아니였으면 죽을수도 있었어.
-너도 씨발 걔네들 편이지? 군대라는 조직은 진짜 다 썩었구나.
-썩었다고?? 썩었지. 니가 한번 잘 바꿔봐 ㅋㅋ
수송관 주헌 상사가 오더니 원찬을 불러세웠다.
-니 운전 좀 하나?
-밖에 있을때 오토로 몇 번 해봤습니다.
-오토가 운전이가? 그 놀이동산 뭐냐 그... 그...
민성이 재빨리 대답했다.
-범퍼카입니다.
-그래 그래. 밤파카.. 전에 말한대로 민성이 니가 일이등병 애덜 영내에서 운전 교육 시키라.
-예 알겠습니다.
원찬이를 운전석에 태우고 민성이는 조수석에 탔다. 출발하려는데 4번이나 시동을 꺼먹었다. 차가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자 원찬은 차가 똥차라고만 욕해댔다. 난 이 차로 경사가 거의 90도인 지피 지오피도 다닌다고 놀려대니까 더 성질이 나는 듯 독이 바짝 올랐다. 한가한 지원중대 뒷길로 천천히 차를 이동하면서 민성은 며칠내내 궁금했던 일을 원찬에게 물어보았다.
-야 근데 윤진이 소식 못들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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