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SF

현월 야우 - 7부

본문

기관으로 엄중하게 은폐된 혜화루 지하 밀실,


하오문 광주 지부의 지부장만이 들어올 수 있는 이곳에 십육명의 검은 복색을 한 인영들이 모여 있다.


벽고영과 십오인의 비영들이다.


검은 야행의와 검은 복면(覆面)으로 통일된 복색을 하고 있는 비영들의 등 뒤에, 장검 손잡이가 비죽이 튀어나와있고, 왼손 팔뚝 토시위로는 십살시(十殺矢)가 장전된 박궁(膊弓)을 장착하고 있다.


복면의 이마 부분에는 노란색으로 수놓아진, 일 부터 십오 까지의 숫자가 매우 작은 글씨로 비영들 개인마다 하나씩 새겨져 있었다.


비영들 하나하나와 모두 눈을 마주친 벽고영이 입을 열었다.




“금일 작전의 요체는 신속과 보안이다. 


비영들은 흑하보주의 친위대 흑하특무대(黑河特務隊) 38인을 동트기 전까지 모두 제거한다. 흑하특무대의 위치는 흑하보에서 조금 떨어진 성고산(聖膏山)기슭의 특무대 숙소인 장원(莊園)안에 삼십이인이 모여 있고, 나머지 육인은 자신의 집과 주루(酒樓)등에 있다. 


일단 장원안의 32인을 잡는다. 그 후에 나머지 육인을 처리한다.


육인의 자세한 위치는 일영이 알려줄 것이다.


박궁의 봉인을 해제한다. 단 발사된 십살시는 반드시 회수하라.


시신은 화골산(化骨散)으로 모두 녹여 흔적을 없앤다.


비영들이 특무대를 제거하는 동안 나는 흑무대와 같은 장원 안에 있는 특무대주 장명운을 나포한다. 작전이 종료된 후에 비밀통로를 통해 다시 이곳에 재집결한다.


이후의 작전은 재집결 후에 지시하겠다.


질문 있나?“


“없습니다.”


“좋다! 모두 다치지 마라. 작전을 개시한다.”


“존명(尊命)”




비영들이 기관 작동으로 열린 벽면의 비밀통로를 통해 모두 사라진다.


저 비밀통로는 광주부(廣州府) 성 밖으로 흐르는 하수구와 또 다른 곳으로 이어져 있다.


밀실의 위치와 기관 작동법은 하련이 조금 전에 침상에서 알려준 것이다.




비영들을 모두 내보낸 벽고영이 품속에서 이마에 반월문양이 수놓아진 검은 복면을 꺼내어 쓴다.


삼백년전의 전설적인 대살수(大殺手) 월영(月影)으로 화(化)한 것이다.


복면을 쓴 벽고영의 눈빛에 평소와는 다른 싸늘한 기운이 감돈다.


살인을 위한 준비가 끝났다.






벽고영이 처음으로 살인을 경험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8년 전쯤, 지옥도를 떠나기 3년 전 초여름이었다.


그때의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었으나, 후일 지옥도에서 나와 지옥도주가 마차에서 나를 데리고 나와 사흘간 함께 머물렀던 곳이, 호남성(湖南省) 장사(長沙) 근처의 야산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나와 비슷한 아이들이 열일곱, 열여덟 살 정도 되었던 걸로 추정하여, 내가 처음 427호를 살해했을 때의 나이는 아마 열서너 살 때쯤 이었을 거라고 짐작한다.




삼개월 전 봄부터 새롭게 시작된 야간 모의전투 월말 평가에서, 내가 조장으로 있던 우리 8조는 다행스럽게도 두 번의 평가에서 모두 최하위를 면했다.


반면 최하위를 기록한 50여명이 생존 했던 1조와, 40여명이 생존해 있던 4조에서는 월말 평가가 끝나는 날 저녁 6명과 5명의 지목된 흑의를, 남아있는 조원들 스스로의 손으로 절벽에서 바다 속으로 밀어야 했다.


그 바다 속은 길이가 일장이 넘는 백상어 들이 우글대는 곳이었다.




세번째 월말 평가를 며칠 앞둔 우리 8조는 중간 평가단계에서 최하위평가를 받아, 이제 한번만 더 거북이가 그려진 8조의 기(旗)를 탈취 당하면 최하위 확정되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장마비가 내리던 캄캄한 밤, 나와 우리 조원들은 숲속의 나무 위와 바위틈에 은신해서 2조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2조 조원들이 조심스럽게 우리 조원들이 은신한 나무 밑을 지나갈 때 공격 명령을 내리려던 순간 강한 충격이 내 뒤통수를 강타했고 나는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다음날 막사 안에서 내가 깨어났을 때 우리 8조원들은 모두 얼빠진 얼굴로 나를 보았다.


우리 8조원 중의 한명이었던 427호가 조장인 나를 암습하고, 내 품에서 거북이가 그려진 기를 탈취해, 8조와 최하위 탈출 경쟁을 하고 있던 9조의 조장에게 갖다가 바친 것이었다.




9조의 조장은 358호, 키가 날씬하고 예쁘게 생긴 여자애였다.


그 358호가 427호를 유혹해 나를 암습하도록 지시하고 427호를 9조의 조원으로 편입시킨 것이었다.




지옥도에서는 사사로이 자신이 속한 조를 옮기는 것은 교두들이 철저히 금했지만 그들이 판단하기에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되면 조를 옮기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당시 427호의 행동은, 그 상당한 이유에 속한다고 교두들은 판단한 것이지만, 그 일이 있고난 며칠 뒤 바닷가 바위 뒤에서 교두들 중 하나의 양물을 빨아주고 있는 358호를 본적이 있는 나는, 결코 그 판단과정이 공정했다고 여길 수 없었다.




아무튼 최하위를 기록한 우리 조는 교두들이 지목한 6명의 흑의들을 절벽에서 밀수 밖에 없었고 나는 427호와 358호에 대한 원한을 가슴에 묻었다.


그리고 그날이후로 한달간, 매일 밤 야간 모의전투에서 9조만을 공격한 우리8조는 다섯번의 9조 상징기를 탈취할 수 있었고, 네번째 평가 전날밤, 427호는 내 올가미에 목이 걸려 밤새도록 나무위에 혀를 빼물고 대롱거리며 매달려 있어야 했다. 


437호는 한달 전 나를 죽이려고 했던 것이었다. 427호가 내 뒤통수를 공격한 무기는 어른의 머리통만한 바위돌 이었었다. 


그날밤 탁월한 육감으로 뒤에서 오는 살기를 느낀 내가, 타격을 당하던 순간 고개를 살짝 숙이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그것이 내 첫번 째 살인이었다.




358호는 427호가 죽던 날 밤 내 목도에 맞아 늑골이 부러졌지만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남아, 지옥도를 나오는 배에 승선한 7명의 흑의들 중 하나가 되었다.




나에게 늑골이 부러진 358호의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그 날 이후 묘하게 반짝이곤 했었다.




그 사건이 지나고 몇개월 후에, 달을 유난히 좋아했던 나는 지옥도 서고에 꽂혀있던, 온통 달을 소재로 지은 시들의 모음집인 월영시집(月影詩集)이라는 서책을 발견했었다.


그리고 시집의 맨 끝에 적혀있는 장난 같은 낙서 한 줄을 발견한 나는 온통 2년의 시간동안 거기에 매달렸었다. 시구(詩句)속에 숨겨놓은 칼 한 자루와 발걸음 하나를 찾으라는..




장난으로 치부할 수도 있었지만 글귀의 끝에 있는 월영(月影)이라는 서명에 마음을 빼앗겨, 이년간이나 두꺼운 시집을 모두 외우고 글귀 하나하나를 조합해 본 끝에, 월영산무류(月影散霧流)라는 운신법(運身法)의 구결과 연검(軟劍)을 이용해서 펼치는 월영혼(月影魂)이라는 명칭의 검보(劍譜)를 얻을 수 있었다.




살수 월영은 달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신의 이름은 물론이고 무공에까지 월영의 이름을 붙이고 그 무공을 자신이 직접지은 월영시집 안에 숨겨놓은 낭만적인 달 중독자였다.










벽고영은 얼마 전에 진관에게서 받은 연검의 이름도 검법의 이름을 따서 월영혼(月影魂)이라고 붙였다.




복면을 쓴 벽고영이 비밀통로를 통해 바람같이 사라진 얼마 후에 밀실로 양손에 꾸러미를 든 정하련이 들어온다.


기관을 조작해 비밀통로를 닫아 원래의 벽으로 돌려놓은 후에 꾸러미를 풀어 뭔가를 하기 시작했다.


벽고영이 별채에서 부탁한 것을 준비하는 것이다.






성고산(聖膏山)중턱의 숲 속에서 복면을 쓴 벽고영과 비영들은 장원을 바라보며 뭔가를 기다리고 있다.


장원 안에서 뻐꾸기 울음소리가 세차례 들리자 일제히 경공을 발휘해 장원으로 내달린다. 


뻐꾸기 소리는 일각 전에 장원으로 잠입한 비영 육호와 구호가 장원외부를 경계하던 특무대원들을 모두 청소 했다는 신호였다.


제일 먼저 장원의 외곽 담을 넘은 벽고영은, 장명운이 있다고 파악된 내실을 향해 길게 뻗어 있는 복도를 최대한의 빠르기로 내달린다.


중간 중간 방문이 열리며 무사들이 튀어나오지만 벽고영이 발사한 박궁에 맞아 모두 쓰러지거나 신음을 흘리며 다시 문안으로 도망친다.


저들은 뒤에서 오는 비영들이 마무리를 할 것이다.




내실 문 앞에 벽고영이 도착했을 때는 비명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난 장명운이 검을 뽑아들고서 문을 열고 막 나오려던 참이었다.


“휘이이익~”


휘파람소리와 함께 벽고영의 허리에서 벼락같은 빛줄기 한 가닥이 막 문밖으로 몸체를 드러낸 장명운의 가슴 쪽을 향해 터져 나갔다. 월영혼 제 일식 발검(拔劍)..



엉겁결에 검을 들어올려 빛줄기를 막은 장명운이, 그 기세를 못 이기고 방안으로 뒷걸음질 치며 쿵쿵 발소리를 내고 있다.


“휘이이익~”


다시 한번 휘파람소리가 들리며 벽고영이 허공을 밟아 장명운에게 돌진하며 써늘한 푸른 검기가 스며있는 월영혼을 휘두른다. 월영혼(月影魂) 제 이식(第二式) 추혼(追魂)..


챙챙챙..


“크악~”


벽고영이 전력을 다한 월영혼의 이초식도 버티지 못하고 장명운이 왼쪽 팔과 어깨에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지고, 그제 서야 바닥에 발을 댄 벽고영이 긴 숨을 토해내며 장명운에게 다가가 목 뒤쪽의 마혈(麻穴) 천주혈(天柱穴)과 목 가운데의 아혈(啞穴) 아문혈(啞門穴)을 동시에 점혈 한다.


벽고영은 장명운을 발견하고, 검을 뽑아 그를 물러나게 한 후 그가 월영검법을 못 견디고 팔과 어깨에 상처를 입고 쓰러질 때까지의 짧지 않은 시간을, 호흡 한모금과 더불어 허공에 계류했던 것이다.


운검장 비전신법 제운종(製雲從)과 살수비전 월영검법의 완벽한 조화였다.




월영혼은 총 사식(四式)으로 이루어졌다.


발검 추혼(拔劍 追魂)..검을 뽑아 혼을 쫒으니


낙명 월영(落命 月影)..목숨이 떨어져 달그림자 속에 묻히리라. 






벽고영이 장명운을 제압하고 있을 때 비영들은 삼인일조(三人一組), 총 다섯개 조로 분류되어 장원의 각 방들을 청소 하고 있었다.


일호, 육호, 십일호가 일조로 방안에 침투하여 박궁으로 적들을 쓰러뜨리면, 이호. 칠호, 십이호의 이조가, 일조가 쓸고 간 방안에 재 진입하여 등 뒤에 맨 청운검(靑雲劍)을 뽑아 쓰러진 적들을 살해하고, 삼호, 팔호, 십삼호의 삼조는 일조와 같은 방식으로 일조가 들르지 않은 방에 침투하여 박궁을 난사하고 사호, 구호, 십사호도 삼조의 뒤를 따르면서 이조와 같은 임무를 수행한다.


마지막 오조의 오호, 십호, 십오호는 제일 뒤에 처져 적들의 몸에 꽂힌 십살시를 수거하고 혹시 목숨이 붙어있는 적들을 확인사살하며, 앞서간 네 조가 감당하기 버거운 적이 등장하면 그 조원들을 지원하는 역할이다.




흑하특무대의 32명의 대원들은 십오명 비영의 기습공격을 받고 추풍낙엽처럼 각개격파 되었다. 


비영과 일대일로 겨루었을 때에도 무공수준이 현저히 떨어지는 특무대원들은, 박궁을 앞세워 태풍처럼 몰아치는 비영들의 강력한 공격에 칼 한번 휘두르지 못하고 속절없이 목숨을 내어주고 있다.


가끔 무공이 뛰어난 특무대의 조장급들이 완강하게 저항해보지만 몸에 꽂혀지는 박궁의 숫자만 증가시키고 쓰러질 뿐이다.




처음으로 실전에서 박궁을 사용하고 통합작전을 펼친 비영들은, 수련 때보다 훌륭하게 작전을 소화하고 있었는데, 장원에 들어와 최초로 완강한 저항에 부딪힌 것은 마지막 방에서였다.




벽고영이 장명운을 제압한 바로 앞방에서, 비영일호가 발사한 십살시를 왼손으로 막아 손바닥이 관통된, 대머리의 덩치가 커다란 인물이 거대한 귀두도를 휘두르며 반항을 한 것이다.


때마침 장명운을 제압하여 이불에 둘둘싸서 어깨에 메고 나오던 벽고영이, 십살시를 들어 그 장한을 조준하고 있던 일조 조원들을 제지하고 나선다.




“일호를 제외한 나머지는 장원을 샅샅이 뒤져 살아남은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고 무공을 모르는 일반인이 있으면 제압하여 장원의 정문 앞으로 집결하라. 흑하보의 무사라고 확인된 인물들은 가차 없이 사살하고 화골산으로 처리하라. 그리고 특무대원들 시신의 숫자 확인을 다시한번 하라. 이상”


“존명”


일호를 제외한 나머지 비영들이 곧바로 방문을 나와 흩어지자 벽고영이 대머리 장한에게 눈을 돌린다.


“당신이 바로 해남도에서 올라온 낙성도(落星刀)로군”


“네놈들은 누구냐?”


왼손에 꽂힌 십살시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지혈하면서 대머리가 으르렁댄다.




그 대머리 장한은 낙성도라는 외호를 가진 도법을 익힌 고수로 삼년전부터 해남도의 남쪽 섬에서 생활하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해적이었다. 


성품이 잔인하고 흉폭하여 해적질을 할 때 물건만 빼앗는 것이 아니라, 남자들이 있으면 모두 죽이고, 젊은 여자들은 납치하여 자신의 섬으로 데려와 노리개로 삼았다.


얼마 전에 그의 악행에 조카딸을 잃은 해남검문의 노검사가 그의 섬을 찾아갔으나, 그 소식을 먼저들은 낙성도(落星刀)가 내륙으로 피하고, 예전부터 안면이 있던 장명운에게 몸을 의탁했던 것이었다. 


평소에 흑하보의 내부사정에 관심이 많던 벽고영이 그 사실을 들었었고 대머리를 보자마자 그가 낙성도라는 것을 유추해낸 것이다.




“일영! 저 대머리는 살려두어서 득이 될것이 없는 해적이네. 무공도 괘 고강하다고 알려졌으니 자네의 실전 연습 상대로는 그만 일게야. 한 가지 유의할 점은 저 대머리가 접도(接刀)를 익혔다는 것이네. 저자의 도와 자네의 검이 부딪히지 않도록 조심하게..”


“네! 주군..알겠습니다.”


“아니 이 개자식들이 뭐라는 거야?”




고영의 말을 듣고 있던 대머리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며 벽고영에게 도를 휘두르며 달려들었으나, 청운검을 뽑아 유운 삼십육검(流雲三十六劒)의 검로를 밟으며 옆구리를 노리는 일영의 검에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나야 했다.


대머리의 싸늘한 도기가 일영에게 짓쳐 들어가고, 일영이 유려하게 흔들리는 유운신법의 묘(妙)를 살려 피하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한동안 이어졌다.


처음에는 검을 부딪치지 못해 수세에 몰리던 일영이 금방 적응하여 대머리를 몰아붙이고 얼마 지나지 앉아 일영의 검에 오른 팔목을 찔린 대머리가 도를 떨어뜨리며 주저앉는다.




“감사합니다. 주군! 덕분에 검을 맞대지 않고 적을 상대하는 요령을 깨우쳤습니다.”


일영이 고개를 숙인다.


“살..살려 주십시오. 대협..”


“일영!..이자는 거머리 같은 인간이다. 살려두면 다른 이의 피를 빨아댈 것이다. 처리하도록..”


벽고영이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는 대머리를 싸늘하게 보며 일영에게 말을 하고 이불로 둘둘 말은 장명운을 둘러메고 방문을 나선다.


잠시 후 비명소리가 들리고 메케한 살타는 내음이 난다. 


일영이 화골산을 사용한 것이다.






벽고영은 지옥도에서 인간의 악한 본성을 너무 많이 보아 왔다.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 옆자리에서 함께 뒹굴며 잠자던 동료흑의를 배신하는 일들을 수없이 많이 보았다.


벽고영도 다른 흑의(黑蟻)의 음모에 걸려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런 과정을 겪으며 인간의 본성을 파악하는 눈을 가지게 되었다.


대머리는 뱀과 같은 본성을 가진 인간이라고 판단하였다.






벽고영이 도착한 장원의 정문 앞에는 비영들과 일곱명의 남녀들이 함께 있었다.


장원의 잡일을 했던 걸로 보이는 오십대 노인 두명과 십대초반의 어린아이 두명, 그리고 사십대의 여인 세명이었다.


파악을 해보니 여인들은 특무대원들에게 밥을 해주던 식모들이었고, 노인 둘은 예상대로 식모와 부부인 하인들이었다. 아이들은 그 자식들이었고..




“비영 십호는 이들을 태평원(太平院)에 대려다 주고 오게..태평원에 근무하는 본장의 무사들에게 이들의 특별감시를 명령하고 일영과 합류하게..”


“네! 주군”


태평원은 운검장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으로 외전소속의 무사들이 그 고아원을 보호하고 있다.


저 일곱명은 태평원에서 잠시 기거하다가 운검장의 목화 제배지로 떠나게 될 것이고, 저들은 하인 생활을 할 때보다 벌이와 환경이 훨씬 좋아지게 되니 특별한 불만은 없을 것이다.


불만이 있더라도 어쩔 수 없다. 큰일에는 작은 희생이 따르는 것이니..






잠시 후 일영이 나왔고 비영들은 화골산으로 처리하고 남은 뼈들을 성고산 깊은 곳에 묻었다.


동편 바다 쪽이 어슴푸레 밝아오는 시각이었지만 아직 남은일이 있었다.


비영들은 남은 여섯명의 특무대원들을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제거해야 했고 고영도 따로 할일이 남았다.


벽고영은 어깨에 둘러맨 장명운을 비영 팔호에게 넘겨주어, 장원에 있는 마차를 이용해 남들 눈에 뜨이지 않게 혜화루 밀실로 옮기라는 지시를 하고 비영들과 헤어졌다.








흑하보 총단이 위치한 금사강(金砂江) 나루터 거리에는 주루가 많다.


거친 뱃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곳이니 그들을 상대하는 기녀들도 당연이 많고 그녀들이 소속되어 웃음과 몸을 파는 주루도 성행이다.


밤늦게까지 휘황한 등롱을 밝히던 주루거리가 어슴푸레 밝아오는 새벽이 되자 가끔 요령을 울려대는 두부장수를 제외하고는 오가는 사람이 없다.


밤늦게까지 술주정을 하던 술꾼들도, 그들에게 헤픈 웃음을 팔며 쌈짓돈을 힐끔거리던 기녀들도, 모두 잠자리에 들었을 것이다. 




벽고영은 그 주루거리의 백화원(白花苑)이라는 꽤 큰 규모의 주루지붕에 몸을 바짝 붙이고 있다.


주루의 정문과 주루 안을 항상 흰 꽃들로 장식해 놓아 백화원으로 불리는 이 주루는 흑하보의 고급간부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벽고영은 자신이 찾는 인물이 백화원에서 술을 마시고 객실에서 잠들었다는 하오문의 정보를 듣고, 그 인물이 잠든 객실을 찾으려고 지붕의 기와를 들어내고 천정에 구멍을 뚫어가며 객실들을 살펴보는 중이다. 


이일은 절대로 타인에게 들켜서는 아니 되는 일이었기에 벽고영이 손수 이런 수고를 감내하는 것이다. 




얼마 후 목표한 사람이 자고 있는 객실을 확인한 벽고영이 기와를 다시 덮어놓고 그 객실의 창문을 통해 안개처럼 방으로 스며든다. 


월영산무류(月影散霧流)... 




꽤나 어리고 예쁜 기녀를 껴안고 알몸으로 잠든 얼굴이 젊다.


장 인교(張仁橋).. 흑하보주의 아들이고 벽고영이 목표한 인물이다.


아비의 위세만 믿고 술과 여자로 인생을 낭비하는 보잘것없는 인간이지만 벽고영의 계획에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다.


기녀와 장인교의 ,가슴아래쪽 훈혈(暈穴)인 현기혈(玄機穴)을 가볍게 점혈하여 기절시킨 후 장인교의 신발과 옷을 찾아 따로 챙기고 대충 겉옷으로 둘러싸준 벽고영이, 기절한 장인교를 메고 창문 밖으로 다시 빠져 나간시간은 방안으로 들어 온지 채 반각이 되지 않아서였다.


기녀는 아침에 눈을 떠서 장인교가 먼저 돌아간 것으로 알 것이다. 옷도 신발도 없으니까..






장인교를 어디엔가 두고 혜화루 밀실로 돌아온 벽고영은, 흑무특위대 잔당을 처리하고 돌아온 비영들에게 또 뭔가를 지시하고 정하련이 있는 후원별채로 향했다.


벽고영이 별채로 들어섰을 때 정하련은 아침을 준비해 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아침 햇살이 후원 앞뜰에 웃자란 감나무 가지 사이로 따스하게 비추고 있었다.








“하련 누이! 우문걸을 바로 만나야겠소. 비밀리에 이곳으로 그를 불러줄수 있겠소?”


“네! 공자님 바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고맙소. 그리고 밀실에 준비해 놓은 것도 보았소. 그것도 고맙구려..”


“별말씀을 다 하시네요. 공자님의 말씀이시라면 무언들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미혼향과 검은색, 노랑색 헝겁들은 어디다 사용하시려고 하시는지 여쭈어 봐도 될까요?”


“하하하..오늘 밤이 되면 다 아시게 될 겁니다. 나중에 알려 드리지요..그것보다 오늘 중으로 장대운을 흑하보밖으로 끌어낼 방법이 없겠소? 만약 방법이 없다면 내가 흑하보로 잠입해야 하는데..”


“금사강 나루터 기루의 어느 기녀에게 장대운이 빠져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알아보도록 하지요..”


“하하하,,잘 되었군요..고맙소!,,하련누이.”


“호호..공자님 그 고맙다는 소리 좀 그만하세요. 자꾸 그러면 저와 거리를 두시려는 것으로 생각할거예요..호호호”


“하하하”


아침을 먹으면서 고영과 하련이 나눈 이야기였다. 




하련과 고영이 이른 아침식사를 끝마치고 철관음을 마시고 있을 때 우문걸이 3층 별실에 도착했다는 전갈이 왔다.


오늘 하루는 무척 길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벽고영은 3층의 계단을 올랐다.




“소장주님 무슨 일입니까? 수하들과 성고산으로 출발하려다가 소장주님의 전갈을 받고 이곳으로 달려 왔습니다. 혹여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입니까?”


우문걸은 오늘 성고산 장원에 있는 장명운을 잡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해부주(海府主)님! 장명운과 특무대는 간밤에 수하들과 제가 모두 잡았습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계획이 변경되었습니다. 그 문제의 상의 드리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아침 일찍 해부주님을 모셨습니다. 죄송합니다.”


“대체 어떤 사정이기에 ..”


벽고영이 우문걸에게 지난밤에 읽은 서찰의 내용과 향후 계획을 상세하게 설명을 한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우문걸의 눈이 커지고 침음성이 흘러나온다.


탁자위에서 싸늘하게 식어가는 찻잔에는 두사람 모두 관심이 없었다.




사실 벽고영은 우문걸에게 서찰의 내용에 대해 알려줄지 말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었다.


결국 내린 결론은 사실대로 모두 알려주고 협조를 요청하자라는 것이었다.


비밀을 안 우문걸이 마음을 돌려먹고 남천패가쪽으로 붙게 될수도 있겠지만 흑하보의 도움 없이는 자신의 계획이 성사되기가 불가능한 까닭에 어쩔 수 없이 도박을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결정적으로 시간이 너무 없었다.


내일 점심때 흑하보주 와 운검장 노장주의 회담이 예정되어 있고 그 자리에 녹수산장에서 나온 패검(覇劍) 이건학(李建鶴)이 자신과 함께 동석하기로 되어 있었던 까닭이다. 


패검 이건학까지 속여야하기에 그전에 모든 것을 결정해야 했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이 파악한 우문걸의 성정도 그런 결정을 내리는데 한몫을 차지했다.


지난 2년간 자신이 모아온 정보를 토대로 파악한 우문걸은 호협하고 강직한 인물이었다.


우문걸이 믿을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사실을 말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물론 대비책도 마련해야 했다.


우문걸을 담당하고 있는 비영칠호가 더 바빠질 것이고 흑하보 하인 중에 숨어있는 하오문도들의 우문걸에 대한 감시도 심해질 것이다.




우문걸과의 긴 회동을 마친 벽고영이 또다시 흑하보 총단이 있는 거리의 백화원에 나타난 것은 점심 무렵 오시(午時)가 조금 못된 시각이었다.


이 기루에 흑하보주가 평소에 자주 찾는 기녀가 있다는 말을 정하련에게 들은 까닭에 그 기녀를 만나러 이곳을 방문한 것이다.




“녹영(鹿英)이 좀 불러주게”


은자 몇푼 받은 점소이가 신이 나서 달려 나가고 차 한잔을 모두 비웠을 때 인기척과 함께 벽고영이 자리하고 있는 백화원 특실의 문이 열린다.


들어오는 기녀를 보는 벽고영의 눈에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녹영이라는 흑하보주가 자주 찾는다는 기녀는 오늘 새벽 장인교와 동침하던 그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한 기녀를 아버지와 아들이 번갈아가며 품고 있는 것이었다.


벽고영의 머리 속에 순간적으로 하나의 계획이 세워지며 일이 쉽게 풀리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네가 녹영이라는 아이냐?”


“네 공자님!”


“흑하보주가 너를 아주 예뻐한다면서..”


“그것은 어인 연유로 물으시는 지요?”


“흑하보주의 아들도 너를 자주 찾는다는 소문이 있더군..”


기녀 녹영의 눈이 커지며 경악의 기색이 어린다.


자신과 장인교가 만나는 것은 백화원의 주인만 아는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흑하보주는 물론 모르고 있겠지?..어찌된 연유인지 소상하게 말해 보거라..네 이야기를 듣고 눈감아 줄수도 있으니.”


놀라서 눈이 커진 녹영이 더듬거리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장사를 하던 녹영의 아비가 빛을 남기고 죽은 후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제 발로 백화원을 찾은 것이 일 년전, 녹영의 나이 18세 때였다.


육개월간 가무와 기예(妓藝)를 배우고 손님들 술시중을 들기 시작한 며칠뒤에 술자리에서 흑하보주를 만나 백화원 주인의 권유로 그와 동침을 했다.


그 늙은이는 양물(陽物)도 제대로 서지 않았지만 나름 자신을 귀여워 해주었다. 


그렇게 백화원에서 손님들의 술시중을 들며 보름에 네 다섯번 찾아오는 흑하보주와 동침을 하곤 했는데, 두달전에 우연히 술자리에서 장인교를 보았다.


자신에게 눈독을 들이던 장인교가, 어떻게 백화원주를 꼬드겼는지 자신이 자고 있는 침실로 뛰어들어 강간당하다 시피 관계를 맺었다.


관계가 끝난 후 장인교는 녹영과 자기 아버지와의 관계를 알고 있다며 자기 아비가 찾지 않는 날은 자신이 오겠다는 패륜의 말을 지껄였다.


그 후 장인교는 자신의 아비가 백화원에 오지 않는 날이면 이곳을 찾아서 다른 기녀를 끼고 술을 마시다가 밤이 깊어지면, 백화원주의 묵인하에 자신의 방으로 숨어들어와 정사를 치르곤 했었다.


만약 흑하보주에게 들키면 자신의 목숨만 사라지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수 없이 장인교를 받아 들여야 했다.


자신은 흑하보주도 무서웠지만 패악을 떠는 장인교도 무서웠기 때문이다.






벽고영은 눈물을 흘리며 말을 끝낸 녹영에게 금자를 몇푼 쥐어주고, 오늘밤 흑하보주를 불러내어 녹영의 방으로 유혹하라고 이르고서, 백화원주에게 기예를 배우며 진 빛은 자신이 모두 갚아 주겠다는 말을 하고 기루를 혜화루로 옮기라는 말을 덧 붙였다.


정하련이라면 나이도 어리고 얼굴도 예쁜 녹영을 잘 거두어 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왕 기녀로 나섰으면 혜화루같은 큰 기루에서 일을 하는 것이 녹영의 삶에 보탬이 될 것이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나중에라도 녹영이 비밀을 누설할까 싶어서였다.


점소이와 기녀들이 모두 하오문도인 혜화루라면 녹영이 그런 말을 하는 즉시 정하련의 귀에 들어가리라..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려 기분이 산뜻해진 벽고영이 녹수산장 광주지부를 들러 그곳에 도착해 있던 패검 이건학과 인사를 나누고 다시 혜화루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오늘밤에 자신이 계획한 새로운 계획의 일차완성이 이곳 혜화루의 지하 밀실에서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하며 벽고영은 미소를 지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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