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화신승 - 프롤로그
본문
서장. 동자승의 몸으로 들어가다.
구천(九天)-!
아홉개의 하늘-!
강호의 사가들은 명망있는 무인들의 별명을 지어주고, 무공이나 지략의 수준을 가늠해서 순위 짓기를 좋아한다. 그들의 입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이들은 구천이라 불리는 현 강호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인사들이었다. 구천에 속해있는 위인들은 소위 무공만 강한 외골수들만은 아니다. 무공뿐만 아니라 지략, 독공, 의술이 뛰어나거나, 무공은 변변찮으나 엄청난 세력을 거느리고 있거나, 혹은 특정 한분야에서 놀랄만한 성취를 이룬 강호인만이 구천에 오를수 있었다.
사도지존이자 패천궁의 궁주인 왕진악, 마도를 이끄는 마교의 교주 사마천, 무림맹의 맹주 자리를 맡고있는 검황 이세민, 무림 최고의 지낭이자 정파 오대세가의 수장인 제갈진성, 소림사에서 백년만에 나온 불세출의 기인이자 지금은 신승의 반열에 오른 각원대사, 정사마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으나 뛰어난 무공은 물론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의술도 가지고 있는 신의 은정천, 검으로는 검황과 맞수를 이룬다는 검마 서진량, 마지막으로 낚시대 하나로 세상을 낚는다는 동해어옹까지 중인들은 보통 여덞명의 최강자만을 거론하곤 했다. 허나 구천중에서도 잘 거론되지 않는 위인이 한명 있었으니, 바로 색마라는 치명적인 별명을 가지고 있는 단리수유였다.
단리수유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사가들이 추론하건데 대략 백살정도는 됐을거라 짐작을 하고 있었다. 색마 단리수유에 대한 얘기들은 너무나 많아서, 오히려 구천중에서 세인들의 입에서 가장 많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에 대한 소문은 꽤 많았는데, 고관대작집의 규수들이나 강호에서 꽤 명성을 떨치고 있는 문파나 세가들의 영애들을 탐하는 걸로 유명했다. 한창일때는 유랑나온 황제의 동생이자 웬만한 남자들은 쳐다보지도 않았던 콧대높은 옹혜공주를 무너뜨렸을 정도로, 그의 여자 후리는 기술은 무림에서는 따라 올 사람이 없었다.
또한 그의 괴상한 철학은 강호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의 지론은 이미 한번 먹은 음식, 쉰 냄새 나는 음식, 돌이 섞인 음식, 보기에도 맛이 없어 보이는 음식은 먹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에 의해 몸을 망친 여인이 한두명이 아니었다. 게다가 여인들의 집안은 고위관리는 물론 구대문파, 오대세가, 마교, 패천궁 등 정사마에 걸쳐서 다양하게 포진되어 있었다. 때문에 수유가 본격적으로 무림에서 활동한지 일갑자의 세월이 흘러갈 무렵, 그에 대한 강호인들의 원성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에게 몸을 잃은 여인이 물경 삼천명 정도에 이르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무림맹의 맹주인 이세민의 여식인 이수경을 탐하고, 정파 최고의 무인 집단인 백룡회의 추적을 피해 도망을 다니고 있다는 소문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었다.
@ @ @
"헉헉... 이 새끼들은 왜 이리 빠른거야... 헉헉... 수십년동안 도망치기 위해 경공만을 수련해온 나를 이렇게까지 몰고오다니..."
하북성에 위치한 황산의 외딴 골짜기. 한 인영이 숲속 한가운데를 가르며 엄청난 속도로 쇄도하고 있었다. 얼마나 빠른지 범인의 눈으로는 식별을 못할 정도였다. 신기한 것은 일반적인 경공과는 달리 나뭇잎이나 풀잎같은 것들을 가볍게 밟고나서 한번에 십수장의 거리를 도약해서 나아간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경공에서 최고의 경지로 알려져 있는 초상비였다. 이정도의 경공을 지니고 있다면 틀림없이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으리라... 그는 땀까지 뻘뻘 흘리며 어디론가로 도망을 가고 있었다. 그리고 뒤를 이어 산 밑자락부터 수많은 사람들의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천하의 음적, 단리수유를 잡아라!"
"맹주께서 색마를 붙잡는 자에게는 평생 먹고 살 정도의 재화를 하사하신다고 하셨다!"
"그 자를 잡으면 평생 호의호식하면서 살수있다!"
산을 에워싸며 오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무인들이었다. 손에는 각자가 다양한 무기들을 꼬나쥐고 있었다. 사나운 기세로 올라오는 무인들은 눈짐작으로만 해도 몇천명은 되보였다. 그중에는 무공이 뛰어난 자들이 많아서 방금전 초상비로 산을 올라간 인영에 비하면 느리긴 했지만, 확실히 빠른 속도로 목표물을 쫓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지금 도망을 치고 있는 자는 색마 단리수유였다. 현재 그는 무림맹의 맹주의 여식을 꼬시고, 신세를 망친 죄로 쫓기고 있었다. 단리수유보다 족히 나이가 오십여세는 많은 맹주 이세민은 검황이라는 별호에 어울리는 격한 성정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그의 슬하에는 수많은 자식이 있었지만, 여식은 오로지 한명뿐이어서 오히려 아들보다 더 아끼고 있었다. 그런 여식의 몸을 망쳤으니, 이세민이 이렇게 노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해서 무림맹은 물론, 수유에게 당한 고위관리들이나, 유명한 문파에서도 추격에 가담해서 현재 수유를 쫓고있는 무인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비교적 무공이 약한 자들은 산밑에서 천라지망을 펼쳐놓고 있었고, 일류 수준 이상의 무공을 지닌 수천명의 무인들은 서로 약속하지 않았음에도 촘촘하게 포위망을 유지한채 단리수유를 산위로 몰아넣고 있었다.
당사자인 단리수유는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강호에서 경공을 논하자면 그를 빼놓을수 없었다. 그의 경공은 거의 신급의 경지로 천하제일의 대도이자 수많은 강자들의 뺨을 때리고 도망을 친 도수부도 평생에 단 한번 수유의 경공을 보고 감탄을 한 바 있었다. 실제로 따져보아도 백장내에서 그를 붙잡을 수 있는 자는 구천에 속한 무인들을 제외하면 찾을수 없었다. 물론 구천에 속한 위인들은 엄청난 무공을 지니고 있음에도, 그를 따라잡을 사람은 가장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있는 두세명의 불과했다.
하지만 안타까운 사실은 속된말로 튀는 기술은 강호 최고였지만, 추적자들이 물밑듯이 밀려오니 경공도 어쩔도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교묘하게 추적자들을 피해서 도망을 갈수 있었지만, 수천명의 무인들이 포위망을 유지하며 오니 도저히 도망갈 길이 보이지가 않았다. 물론 웬만한 고수들은 일신의 무공으로 처리할 수 있었지만, 무리중에는 거의 구천에 준하는 강자들도 섞여있었기 때문에 섣불리 손을 썼다가는 패가망신을 할것임을 그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차피 잡힐걸 알면서도 산 꼭대기로 도망을 갈수 밖에 없는 것이다.
수유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이정도에서 포기했으면, 지금까지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이다. 세인들은 자신이 따먹은 여인을 삼천명 정도로 예상했지만, 어린 시절까지 포함을 하면 대략 삼천명을 훨씬 넘었다. 이렇게 많이 따먹고도 상처하나 입지 않고 살아남은 이유는 비교적 여인들이 호의적이었다는 점도 있었지만, 전적으로 교활한 머리와 뛰어난 경공 덕분이라 할 수 있었다.
"헉헉... 도저히 숨이 차서 못달리겠다..."
며칠동안 끊임없이 도망쳤더니 한모금의 진기도 남아있지 않았다. 없는거 다 끌어모아서 경공을 시전하고 있었기에 수유는 지금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숨은 폐까지 차올라와서 가슴 흉부를 압박하고 있었고, 다리 근육은 후들거리고 있었다. 수유는 서서히 머리가 하얗게 변해갔다.
이제 포기를 해야하는 건가...
자신이 죽어가는 모습을 희미하게 생각하고 있을때, 지쳐가는 수유의 눈에 작은 사찰이 눈에 들어왔다. 남루한 간판에는 절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을 살펴볼 겨를도 없이, 수유는 바로 사찰의 벽을 넘었다. 절안은 너무나 조용했다.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폐허처럼 보였다. 그는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절이라 하면 조용한게 당연하지만, 스님들의 불경외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건 조금 괴이하게 느껴졌다. 수유는 방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돌아다니다가, 밥 짓는 냄새를 맡고서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다다른 곳은 부엌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니 나이 어린 동자승이 홀로 아궁이에 불을 피고 있었다. 갑자기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동자는 잠시 놀라는 눈치였지만 가끔씩 길잃은 객손님들이 절을 찾아오곤 했으므로 자연스럽게 수유에게 말을 걸었다.
"길을 잃으셨나봐요?"
동자승은 수유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수유는 사악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환혼대법이었다. 그 대법은 스승이 죽기전 마지막으로 가르쳐준 사공으로, 온몸의 진기를 사용해서 자신과 상대방의 혼을 바꿔치기 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여인들의 음기를 취해서 키워온 무공을 모조리 잃어버린다는 단점이 있지만, 목숨만은 연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번쯤 시도해볼만 했다.
한참동안 수유는 아무말없이 심각하게 고민했다. 동자승은 아직 여섯, 일곱살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몸도 유연해 보일 뿐더러, 속세와도 접촉이 없었기 때문에 몸에 불순물도 없어 보였다. 즉, 마음잡고 무공을 다시 익힌다면 다시 재기를 할수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가 존재했으니, 환혼대법의 성공률이 이할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쉽게 말하면 다섯번 시도해서 한번 성공할 확률이라는 것이다. 그 확률을 믿고 시도했다가는 허공으로 혼이 흩어지게 되고, 당사자나 상대방이나 백치가 되버리고 만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저기 사찰이 있다. 음적이 숨어들었을수도 있으니 샅샅히 뒤지자!!"
한참 고민을 하던 수유는 멀리서 들려오는 사내들의 거친 함성을 듣고서는 비로소 결정을 할수 있었다. 여기서 머뭇거리다 잡혀봐야 고문 당하다가 참혹하게 처형당할것이 뻔하다. 어차피 죽을거 환혼대법이라도 시도해보는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정해지자 행동은 재빠르게 이루어졌다.
"시주님... 왜 그러시나요... 읍!"
수유는 동자승의 머리를 부쉴듯이 잡았다. 그리고 전신의 진기를 모두 끌어모았다. 동자승은 그 모습이 무서웠는지 이제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사정을 하기 시작했다.
"제가 잘못했어요... 아니... 절에 있는건 다 가져가세요... 부디 목숨만은..."
허나 수유는 대답이 없었다. 이미 환혼대법을 동자승을 상대로 시전하고 있었다. 검은색의 묵기가 수유의 손을 따라서 흘러나왔다. 천천히 흘러나온 기류는 동자승의 머리로 다시 흘러들어갔다. 그리고 끈끈한 몇줄기의 실타래가 되어서 둘의 몸을 이어주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수유는 온 정신을 집중시켰다.
"시주님... 제발... 제발...제..."
잠시후 동자승은 눈을 까뒤짚었다. 혼이 바뀌는 동안에 잠시 백치가 된 것이다. 혼을 잃은 몸뚱아리에 가느다란 실타래를 따라서 수유의 사념이 주입되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동자승을 잡고있던 그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동자승은 물론 환혼대법을 시행한 수유또한 땅에 쓰러졌다.
차한잔 마실 시간이 지나갔을까? 약속이라도 한듯 동자승과 수유는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허. 진짜로 된건가?"
동자승은 나이에 맞지 않은 표정과 말투를 쓰고 있었다. 마침내 성공을 한 것이다. 수유의 몸에는 동자승의 혼이 들어가 있었는데, 어린 동자승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눈앞에 자신의 몸을 보고 있었다. 자기가 꿈을 꾸고 있나해서 눈을 비볐지만,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시... 시주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수유는 동자승에게 한마디 대답조차 하지 않고, 빠른 몸놀림으로 바깥을 둘러보고 왔다. 벌써 수많은 무인들이 절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수유는 이제 자신의 것이 아닌 동자승의 몸을 뒤져서 한가지 약을 찾아냈다. 평소에 잡힐 위기에 처하면 자살하기 위해서 가지고 다니던 것이었다. 약을 꺼내서 키가 닿지 않았지만, 빨리 아궁이를 밟고 올라가서 어리둥절해있는 동자승의 입에 쑤셔넣었다. 동자승은 영문도 모른채 약을 삼켰는데, 그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목을 붙잡은채 땅에 쓰러진 것이다. 예전 자신의 몸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나서 잠깐의 자책감이 들기는 했으나, 일단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수유를 기쁘게 했다.
[벌컥!!]
마침내 부엌문이 열리고 무인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수유는 여자꼬시던 실력을 발휘해서 어린아이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마치 땅바닥에 쓰러져있는 사람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냥 연기를 했다. 몇명의 사내들은 시체를 둘러보기 시작했고, 다른 몇명은 동자승을 둘러쌌다.
"이 음적은 이미 절명을 했습니다. 온기가 남아있는걸로 봐서 방금전에 약을 먹고 자살을 한것 같습니다."
그러자 무리에서 대장노릇을 하고있는 사내가 험악한 얼굴을 들이밀며 수유에게 물었다.
"너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있었느냐?"
들킬까봐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수유는 그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두려운 마음을 내비춰야 잘 믿어줄 것이다.
"엉엉...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저는 그냥 이 절에 살고있는 동자승이에요..."
아이가 구슬프게 울자, 일말의 동정심이 느껴졌는지 사내는 다소 누그러진 말투로 물었다.
"너를 문책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 죽어있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될 음적이다. 실제로 죽었으면 천만다행이지만, 만약에 우리의 눈을 속이고 도망을 쳤다면 다시 세상으로 뛰쳐나가서 악행을 저지를 것이다. 그러니 방금전 상황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다오."
수유는 눈을 하얗게 치켜뜨며, 공포심을 드러냈다. 그리고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 악적이 처음에는 저를 죽이려 했어요. 그러다가 잠시 고민을 하는듯 하더니... 갑자기 품안에서 이상한 약을 꺼내서는 집어삼키고는... 저렇게 바닥에 쓰러졌어요... 그외에는 아무것도 몰라요..."
사내가 보기에도 동자승의 대답이 맞아보였다. 또한 일련의 상황을 통해 추론을 해보아도, 음적이 자살을 했다는 사실을 믿어야만 했다. 혹시 몰라서 다른 조들에게는 산위에까지 수색을 해보라고 말해두었다. 그들이 별다른 소득없이 돌아온다면, 지금 눈앞에 있는 시신이 단리수유인건 확실했다. 사내는 별 의심없이 부하들에게 단리수유의 시신을 수거해가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충격을 받은듯 벌벌 덜고있는 동자승에게 다가갔다.
우리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 무림맹이라는 곳에서 나온 무인들이란다.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해를 끼치지 않으니, 걱정안해도 된다. 그리고 저기 죽어있는 사람은 세상에 패악을 끼친 악적으로 어떤 형태로든 죽어야 마땅한 놈이다. 사람이 죽은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겠지만, 오늘일은 부디 잊어주길 바란다.
십수명의 사내들은 단리수유의 시체를 천으로 둘러싸고서는, 산아래로 운반해가기 시작했다. 자신의 몸이 힘없이 실려가는 것을 보니 웬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래도 적들의 이목을 속이고 살아남은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비록 온몸에 진기란 찾아볼수 없었지만 말이다. 산아래로 내려가는 수천명의 무인들을 보면서 수유는 나이에 맞지 않는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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