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담소설가 유관필 - 10부
본문
당철기가 현경을 개척하기 위해 떠난다는 것을 처음 안 사람은 유가장의 하인 명진이었다. 저녁을 먹자마자 돌과 석회를 들고 자신의 담으로 향한 명진은 벽에 쓰인 글을 보았고, 그것을 곧장 유관필에게 알렸던 것이다. 글을 알지 못하는 명진을 대신해서 벽에 다녀온 화영이 당철기의 전언을 전하자, 식사를 마친 후 차를 들고 있던 모두가 놀랐지만, 유관필만은 싱긋 미소를 띄우며 당척에게 말했다.
"잘 되었습니다. 형님. 그럼, 일을 도모하시죠."
"응? 무슨 소리야?"
"어르신께서 당가에 계셨다면, 설사 마교 교주를 형님과 제가 없앤다고 해도 공은 형님에게 돌아가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어르신이 지금 떠나셨으니 기회가 좋질 않습니까?"
"하지만, 동생이 말한대로 일이 그렇게 쉽게 되겠어? 그리고 마교가 있는 운남은 사천이랑 너무 가깝기도 하고. 뒷탈도 좀 걱정이 돼서 말이야."
"누구든 상관이 없다면, 마교 교주처럼 덩어리가 큰 놈이 아니고, 색귀는 어떤가? 누가 뭐래도 지금 강호 제일의 악적은 그 자니까 말이야. 세력도 없으니 없애기엔 딱 좋은 놈이 아닌가?"
적송자의 말에 당척이 반색을 했지만, 곧 어두운 얼굴을 했다.
"하지만, 색귀 인면동이라면, 그의 진면목을 아는 사람이 없질 않습니까?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르고요. 솔직히 그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면, 잡을 사람이야 강호에 삼태기로 건질만큼 많을테니, 그를 잡는다고 해서 제 명성이 올라가는 것도 아닐 듯 합니다."
"하긴, 그렇긴 하구만, 그나저나 유 장주. 그 짤다막한 영감탱이는 과연 현경을 극복할 수 있겠나?"
"알 수 없지요. 그래서 좀은 걱정이긴 합니다."
"흠... 이제야 좀 안심이 되는 군."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네는 뭐든 알고 있는 사람 같아서 말이야. 무공을 익힌 적이 전혀 없음에도 화경의 고수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그것도 새파랗게 어린 나이에 말이야. 한참 일할 나이에 낙향을 한 것도, 낙향한 벼슬아치가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것도 모두 조금 이상했네. 솔직히 말해, 지금도 좀 이상스럽긴 하네. 당가 꼬맹이처럼 어린 여자아이와 나같은 노인, 그리고 당 가주와 같은 장년인의 마음에 모두 드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말일세."
"어르신의 말씀을 들으니 그렇긴 하군요. 결의 형제를 맺을 정도로 전 동생이 좋은데, 솔직히 말해서 딸 아이와 제가 동시에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이 이해가 되질 않는군요. 저랑 그 녀석은 항상 취향이 달랐거든요."
당척과 적송자의 말에 대답을 한 건, 조용히 차를 따르던 유가장의 안주인 오세인이었다. 오세인은 차가 비워진 적송자의 잔에 국화차를 따르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상공을 좋아하는 건, 어르신들 뿐만이 아니에요. 상공을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공을 좋아하죠. 어린 아이들 부터 노인들까지 모두요. 저 역시 상공의 모든 것이 좋아요. 혼약을 맺을 때보다 지금이 더 좋아요. 어르신처럼 저도 왜 상공을 그렇게 모든 사람이 좋아하나를 생각했던 적이 있었어요. 가만가만 생각하다가 알게 됐어요. 상공은 거울 같은 사람이라는 걸요."
"거울이라니요. 부인, 그게 무슨 소리요?"
"상공을 보고나면 꼭 자기를 보게 되거든요. 바른 사람이니까 처음엔 상공을 그저 좋은 사람으로 보지만, 곧 상공의 그 좋은 면속에 담긴 자기 모습을 발견하게 되거든요. 그러면서 더 좋아지는 것 같아요."
당척은 오세인의 말을 듣고서, 자신이 왜 그토록 쉽게 유관필을 받아들였는지를 알게 되었다. 딸아이에게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어 처음부터 호감이 있었던데다, 유관필이 고백했었던 한림학사에 대한 열패감이 자신이 아버지 당철기에게 느꼈던 그것과 꼭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끄덕거리던 당척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왔을듯한 적송자가 자신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게 됐다.
"어르신도 저 이야기에 공감을 하시는 겁니까?"
"그렇다네. 유 장주는 나와 꼭 닮은 사람이지. 저리 보이지 않지만 유 장주도 나처럼 호사를 좋아하고, 맛있는 것을 즐기면서 풍류를 아는 사람이라네."
"예에? 제가 본 동생의 모습은..."
"그러지들 마십시오. 사람을 앞에다 두고서요. 그럼 형님 일은 천천히 생각을 해보도록 하지요. 어르신 청성산에 올랐던 일은 잘 되셨습니까? 전 며칠 산에서 유하다 내려오실 줄 알았습니다."
"그럴 생각으로 올라갔었네만, 자네의 일이 궁금해서 말이지. 내 산에 올랐다가 그 기녀를 봤거든. 아! 그 이야기는 따로 하지."
무슨 말을 들어도 늘 미소를 지을 것 같던 오세인의 매서운 눈빛을 처음 본 적송자는 모르고 뜨거운 것을 만졌을 때의 표정을 지으며 월향의 이야기를 하려던 것을 멈췄지만, 오세인의 다음 말에 하려던 이야기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어르신, 이야기를 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당장, 내일부터 어르신의 식사가 없을지도 모르는데요."
"하하. 별 이야기는 아니네. 그저, 그 월향이라는 기녀가 장주의 발복을 기원하러 산에 오른 것을 봤는데, 제자놈의 말로는 그게 오늘이 처음이 아니고, 최근의 이레를 매일 그렇게 오른다는 것을 들었다는 것 정도랄까?"
적송자의 대답을 들은 오세인은 아무 말없이 일어나 아들 경민과 시비 화영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버렸고, 유관필은 따라나서려 했지만, 당척과 적송자의 만류로 자리에 앉았다. 잠시 말이 없던 당척이 유관필에게 말했다.
"제수씨는 안채로 들어갔네. 속 시원하게 말해보게. 어쩔 셈인가?"
"네?"
"그래? 어쩔 셈이야. 내 일전에 장주에게 그 기녀에게 아무 맘이 없다는 것을 들었긴 했네만, 기녀가 그 정도 진심을 보이는데,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건, 사내의 도량이 아니네. 솔직히 기적을 정리하면 아무 문제가 될 것도 없질 않나. 자네 아내야 속이 좀 끓겠지만, 자네의 명망에 소실 하나 없대서야 그게 말이 되나. 그렇지 않나. 당 가주."
"허허. 이 사람이야 사람이 못나서 소실은 커녕, 제대로 눈요기도 못하고 살았습니다만, 아우야 다르지요. 일단, 제수씨가 아우를 생각하는 마음이 남다르니, 처음이야 좀 질시가 있다해도 받아들이질 않겠습니까? 저야 어렵지만, 아우라도 즐기며 사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것이 이 사람의 바람입니다. 어르신."
"허어, 자네 왜 그렇게 약한 소리를 하시는 겐가? 자네가 누구야. 사천의 일문인 대 당가의 가주가 자네야. 이참에 자네도 하나쯤 골라잡아 소실을 들이게. 자네도 늙어보면 알게야. 즐기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게 얼마나 후회가 되는 일인지 말이야. 내 도인이 아니었다면 백 명의 여인도 마다하지 않았을 걸세."
"하지만, 저는 그놈의 마누라가... 동생! 뭐든 도와줄 수 있다고 했지?"
"그럼요. 형님 일인데요."
"그렇다면, 나도 이번에 소실을 들일 수 있게 해주게. 가만히 생각했더니 말이야. 어르신의 말이 옳아. 내가 뭐가 모자라서. 내가 생각했던 것이 틀렸어. 아마도 아내는 내가 마교 교주를 독살해서 명성을 드높인다고 해도, 날 존경하지 않을 거야. 뒤로 알아보고 자네의 힘을 빌린 것을 알게되면 나를 더 한심하게 생각하겠지. 이런 건 질렸네.
예쁘거나 잘나지 않아도 좋아. 그저 나 하나만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여자이면 좋겠네. 자네의 그 월향이 같은 여자 말이야. 그래, 탄실이가 좋겠어. 탄실이를 내 소실로 들일 수 있게 도와주게."
"탄실이가 누굽니까?"
"아, 내 전담시비야. 좋은 아이지."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요? 시비라면 어리지 않습니까?"
"스물은 넘었을 걸."
참았던 남자들의 기세는 거셌다. 평생을 수도를 이유로 여자를 멀리한 적송자는 갑자기 그렇다면 나도 도적을 정리하고 내려와서 유가장의 옆에 자신의 속명인 차명윤의 이름을 딴 차가장을 지어 여인과 혼인을 맺겠다고 소리쳤고, 당척은 그렇게 하시겠다면 차가장의 집을 지어주고, 당가의 고문으로 영입해서 앞으로의 삶을 책임지겠다는 제안을 하기에 이르렀고, 적송자는 자신이 평생 여인을 경험한 적은 없지만, 그런만큼 여인을 보는 눈은 가장 정확하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를 들며, 당장 수하를 불러 탄실이라는 시비를 데려오라고 당척을 을러댔다. 쿵짝이 잘 맞는 두사람을 내버려두고, 안채로 숨어들려던 유관필은 당장 적송자에게 잡혀왔고, 당척은 마누라에게 잡혀봐야 자신의 꼴이 날 뿐이라면서, 일단 두번째 재수씨를 보러 갑시다라고 외쳤다.
"좋아. 그것이 좋겠어. 당 가주, 아니, 이제는 나도 당가의 식솔이 될 참이니, 예를 갖추지요. 가주님. 고민할 것이 무에 있습니까? 불문곡직 미월루로 가지요. 아, 유 장주가 있는데, 월향이 고것이 우리를 박대하겠습니까?"
"고문님. 그리 하시지요. 이리와서 동생의 한 팔을 잡으세요. 사내가 뜻을 정했으면 바로 하는 것이 도리지 않습니까? 가지시요."
적송자와 당척에게 한 팔씩을 붙들린 유관필이 성도로 날아가버리자, 그 때까지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던 일문이 일어나 안채로 향했다. 일문을 보는 오세인의 얼굴은 냉막하고 차가웠다.
"상공은?"
"적 어르신과 당 가주님께 잡혀서 지금 미월루로 갔습니다. 하지만, 장주님께선 실제로 그 기녀를 어떻게 할 마음은 없으신 듯 보였습니다. 안채를 찾지 않으신 것도 안채로 오시다가 적 어르신께 잡히는 바람에 그리 된 것입니다."
"적송자 어르신이야 원래 그런 분이라고 치고, 당가주님까지도?"
"그것이 제가 옆에서 지켜 본 바로는 당 가주님께서 가모님과의 사이를 어려워하는 듯 보였습니다. 존경받는 남편이 되겠다면서 시비를 소실로 들이겠다는 말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적 어르신이.."
"어르신이 왜?"
"환속을 하셔서 유가장 옆에 차가장을 짓겠다고.."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다들 미쳤어. 안되겠어. 일문, 지금 당장 당가로 연락을 해서, 사정을 전하고 가모님을 뵙자고 청해. 그리고 추헌을 청성산으로 올려보내. 안되겠다. 지금은 너무 시간이 늦었으니, 일단 성도로 가는 편에 청성산에다 전서구를 띄울 수 있는 지 알아 봐. 적송자 어르신이 환속을 하겠다하면 청성에서도 반응이 있겠지. 이참에 유가장에서 적 어르신을 내 보야겠어. 상공께 좋지 않은 영향만 끼치는 것 같아."
총관인 일문이 아무 말 못하고 꼼짝없이 오세인의 말에 복종하는 것을 본 당예인의 개인시비 린아는 황홀감에 젖어 오세인을 우상처럼 바라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너무 멋있는 사람이었다. 오세인의 손짓 하나, 찡그리는 미간 하나에도 몸이 저릿저릿했다. 이상한 마음이었다. 린아는 오줌이 마려웠고, 부끄럽게도 몸의 정중앙 은밀한 비부가 간질간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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