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정풍운(雷霆風雲) - 12부
본문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모래알로 떡 해 놓고, 조약돌로 소반지어. 언니누나 모셔다가 맛있게도 냠냠.”
장강 수룡보의 후원.
서초하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땅바닥에 이리저리 그어진 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콧노래를 부르며 그런 그녀를 재미있다는 듯 쳐다보고 있는 이현성.
가끔 지나가는 하인과 무사들이 무슨 일인가 기웃거리다가, 장강십팔채 전체의 은인이라 할 수 있는 이현성과 장강용왕의 장중보옥인 서초하가 함께 있으니 감히 물어보지도 못하고, 슬그머니 물러나고 있었다.
한참이나 바닥을 내려다 보던 서초하가 풀 죽은 듯 고개를 푹 숙이자 이현성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이걸로 내 오연승이로구나.”
“다.. 다시 해요!”
서초하는 이전 만났을 때의 부끄러움은 어디로 갔는지 뾰족하게 언성을 높였다.
“우하핫. 얼마든지 덤벼라. 그런다고 네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런 서초하가 귀여운지 이현성은 과장되게 고개를 뒤로 젖히며 웃었다. 소녀는 억울한 표정으로 바닥에 비질을 해서 선을 지웠다.
정오 무렵, 점심을 먹고 수련을 하러 연공실로 가던 이현성은 난데없이 뒤통수가 간지러운 것을 느꼈다.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뒤로 돌리니 건물 구석으로 재빨리 숨는 사람의 머리가 보였다. 순식간의 일이었지만 이현성의 날카로워진 시각은 그 인물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는 내심 웃음을 지으며 다시 걸음을 옮기는 척 했다.
그렇게 몇걸음 걷다가 재빨리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러자 처음 이곳에 왔을 때처럼 건물 구석에 숨어 그를 훔쳐보는 서초하와 눈을 정통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서초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얼굴을 붉혔지만, 이현성이 대놓고 그녀를 부르자 도망갈 수도 없어서 천천히 그에게 걸어왔다.
또 다시 스토킹(?)을 하다 발각된 서초하는 당장 쥐구멍이라도 들어가 숨고만 싶었기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물어보는 이현성의 말에 조그맣게 입술만 오물거릴 뿐이었다.
이현성은 그 모습도 나름대로 귀엽기는 했지만 부끄러워만 하는 그녀와의 서먹함을 희석시키기 위해 한 가지 놀이를 제안했다.
그것은 ‘땅따먹기’였다.
그러나 서초하나 이현성이나 무공을 익힌 몸. 일반적인 땅따먹기는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
그리하여 시작된 방원 사장이 넘는 넓이를 무대로 한 땅따먹기. 그리고 한 사람이 실수를 했느냐의 여부는 관계없이 순서는 번갈아가면서 하기로 했다. 그리고 손이 아닌 발만 사용하는 것
처음에는 마지못해 이현성이 시키는 대로 하던 서초하였지만, 자꾸 한끗발 차이로 지다보니 역시 무가의 자손인지 호승심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일류고수만 되어도 원하는 방향과 거리만큼 물체를 던질 수 있기 때문에 땅따먹기 같은 놀이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서초하의 무공은 아직 미숙하고, 이현성은 내공과 감각은 초절정고수라지만 기본기가 딸려서 힘의 수발에 능숙하지 못했기에. 근소한 차이의 승부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번엔 내가 먼저 할래요.”
서초하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위치로 가서는 생사대적이라도 만난 듯 조약돌을 노려보았다.
“그럼 가요.”
신종하게 발을 드는 서초하. 그때였다.
“이공자님!”
멀리서 이현성을 부르는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후원 귀퉁이에서 수룡보의 무사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입니까?”
“총채주님이 부르십니다.
이현성은 어쩔 수 없이 미안한 빛을 띠우고 서초하를 쳐다보았다.
“미안한데. 가봐야겠다..”
아쉬움이 짙게 배인 서초하의 눈동자. 활기 있던 목소리가 사그라져 들릴락 말락 하게 중얼거렸다.
“가보세요.”
“그럼 다음에.”
서초하는 그를 부르러 온 무사를 따라 등을 돌려 멀어지는 이현성의 뒷모습을 야속한 듯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쟤를 만나면 꼭 서극이 부르네. 날 견제하는 거 아냐. 그럼 금단의 사랑인가?’
이현성이 서극이 자신을 부른 이유를 짐작하려다 엉뚱한 상상까지 하고 있을 때 서초하가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응?”
이현성이 재빨리 망상을 지우고 뒤를 돌아보니 서초하가 밝은 웃음을 띠우고 소리쳤다.
“다음에는 제가 이길 거에요.”
이현성이 손을 흔들어 답하고 건물 귀퉁이로 사라진 후, 서초하는 스스로가 한 말이 부끄러운 듯 가슴을 부여잡곤 종종걸음으로 어딘가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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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성이 무사를 따라 도착한 곳에는, 이미 이제는 수계십일왕이 되어버린 수채주들과 삼십여명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과연 수적의 무리라 다들 우락부락한 것이 한 성격하게 생긴 이들뿐라 여인이라고는 오로지 흑수채주 낙약란 혼자였다.
“은공. 이쪽으로 오시지요.”
이현성은 서극이 권해주는 자리에 앉아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무언가 큰일이라도 벌어진 듯 대부분 긴장해서 서극 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배신자도 해결 되었는데, 이제 와서 무슨 일인 걸까. 이현성은 궁금증을 느끼고 다른 이들처럼, 서극의 입에서 말이 나오기만 기다렸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리한 모든 이들을 시야에 담은 서극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런 시기에 다시 나쁜 소식을 전하게 되어 유감이오. 시간이 없으니, 쓸데없는 소리는 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리다. 마교가 쳐들어오고 있소.”
“마교?”
“마교라니 무슨 말입니까?”
장내가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이현성이 떠올리기만 해도 괜히 얼굴이 붉어지는 칠색화모가 속해있는 곳이었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물음표 하나가 떠올랐다.
‘마교? 그 놈은 분명 왜놈이었는데. 무림식으로 하면 부상인지 동영인지 모르겠지만, 수로채를 먹으려는 건 그쪽 놈들일 텐데. 갑자기 마교가 왜 나와.’
이현성이 고민하는 사이 서극은 쥐상을 한 남자를 지목했다.
“추상명당주 설명해 주시오.”
쥐상을 한 그 노년의 남자는 수룡보의 정보를 담당하는 집수당(輯水堂)의 당주였다.
“형제들의 첩보에 의하면 마교가 근처에 집결하고 있다고 합니다. 숫자는 파악되지 않았지만 일천은 넘을 것 같습니다.
“근처라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이오?”
매황기채주가 물었다. 현성에게 이상한 선물을 한 매부용의 숙부가 되는 이다.
“하루 이내의 거리입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에서는 기습이나 다름없지요. 당장 준비를 시작해도….”
추상명은 초조한 듯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서극이 급하게 뒷말을 나꿔챘다.
“따라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소. 형제들을 모으기 위해 이미 근처의 수채에 내 직권으로 전령을 보냈소. 한 시진 이내에 대책을 세우고, 적을 맞을 준비에 들어가야 하오.”
장내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저마다 옆자리의 사람과 수군거리며 대책을 골몰한다.
“그런데 마교의 세력이 근처에 모이고 있다고 해서 그들이 꼭 우리를 공격하라는 법은 없잖아요.”
낙약란이 문제를 제기하자 추상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낙채주님. 그들은 분명 차혼대(嵯魂隊)와, 천품대(天品隊)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마교사흉신!”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현재 외부에서 활동하는 마교의 인물들 중 가장 고수이자 각각 무력단체의 수장들이기 때문이다.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이 쇠락한 마교에서 무력단체가 빠져나온다는 것은 반드시 피를 보아야한다는 의미다.
“그렇습니다. 이 주변에 마교가 두 개의 단체 이상의 무력을 동원해야할 세력은 이곳 수룡보 외에는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분명 우리에게 암수를 쓰려다가 실패하니 힘으로 밀어붙이려는 게 틀림없습니다.”
추상명이 딱 잘라 말하자 다른 채주들 역시 그렇게 납득하는 듯 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이현성은 조금은 다른 생각을 하며 머릿 속을 정리했다.
경천세의 자백을 통해 일단 배반한 채주들을 잡아내고 심문을 했지만 그들도 자신들이 손잡은 세력의 정체를 잘 모른다고 했다. 모든 수가 틀어진 이제 와서 배신한 수채주들이 그들에 대한 의리를 지킬 이유도 없으니, 진짜로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경천세 등이 아는 것은 단 하나 적들이 스스로를 ‘궁’이라 칭했다는 것과 엄청난 고수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 서극 등은 그렇게 강하면서도 자신들을 삼키려 할만한 단체는 신주사패천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신주사패천의 이름은 북산신검영, 현음마부, 태양군도, 십절병기보. 그들 중 궁이라는 칭호를 쓰는 단체는 없었기에 오리무중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이런 시기에 마교가 나타나니 어느 새 음모세력이 마교일거라는 추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하지만 이현성은 마교가 그 배후라는 전혀 믿을 수 없었다. 그것은 그가 만난 미남청년이 왜도(倭刀)를 쓰고 섬에서 온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는 다른데 있었다. 그것은 그 자신이 장강에 온 이유와 관련되어 있었다.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능벽운의 추측대로라면, 분명 수로채를 날로 먹으려 한 세력과 뇌정검호각을 멸망시킨 세력은 같은 곳이 틀림없다. 그런데 만약 수로채를 손에 넣으려 한 세력이 마교라면, 그들이 뇌정검호각을 습격할 때 장강을 이용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들의 근거지는 남만(南蠻)에 가까운 광서성(廣西城) 일대이기 때문이다.
다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뇌정검호각이 멸망할 때, 뇌운려를 납치해 뇌정천왕을 유인한 것도 마교사흉신인 것을 떠올려보면, 마교는 그 ‘궁’이라는 세력에 속해 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 곳 장강수로연맹이 그렇게 될 뻔했던 것처럼..
그럼 마교가 궁의 하부세력의 불과하다면, 이곳으로 오는 것이 과연 마교 뿐일까? 이현성은 불안한 의문이 들었다. 마교 뿐이던 아니던 분명 장강수로연맹이 막아내기엔 어려울 정도의 힘이리라.
수로연맹의 힘은 구만리 장강에 흩어진 수적들이다. 그들이 마음을 먹었다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수적들의 총채에 불과한 이곳을 무너뜨리지 못할 이유가 없다. 뇌정검호각도 거의 멸문지경에 이르러 산속에 꼭꼭 숨어 있는데, 이곳 수룡보가 뇌정검호각보다 강할 리가 없지 않은가. 가중되는 걱정에 이현성은 잠시 신경을 놓고 있던 회의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들은 어디에 모아놓고, 병력은 어디에 집결시키고 어디를 중점적으로 막느냐에 대한 것, 적의 고수는 어떻게 상대하는 가 등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어찌 보면 아주 중요한 사안들이었지만, 이현성에게는 쓸모없어 보였다.
‘뭐야. 기기묘묘한 계략같은 건 없는 거냐? 이년 동안 군생활하면서 하늘을 놀라게 하는 지략 같은 건 삼국지에서나 등장하는 말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하긴 내가 수적들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건가.’
그 때. 한 가지 번뜩이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회의를 주제하고 있는 서극에게 직설적으로 말했다.
“총채주님. 이길 수 있겠습니까?”
일단 외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이현성이 전투를 코앞에 둔 상태에서 이와같은 질문을 한 것은 매우 불쾌한 일이었다. 의견을 나누던 사람들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서극은 그래도 수로연맹 전체의 은인과도 같은 이현성에게 대놓고 뭐라 하지는 않았지만, 단호하게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가시가 섞여 있었다.
“반드시 막을 수 있소. 지금은 마교가 흉명을 날리던 백년전이 아니오. 감히 우리 수로채를 넘본 대가를 뼈아프게 느끼게 해줄 것이오.”
“하지만 많은 피해를 입겠지요.”
비관을 더해가는 이현성의 말에 점점 분위기가 미묘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분명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우리 수로연맹은 숫자는 많지만 고수는 적으니, 그렇긴 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오.”
대답을 해준 것은 이현성에게 이상한(?) 선물을 한 매황기 채주였다. 그의 말대로 수로연맹은 그 본질이 수적의 무리라 다른 세력에 비해 무공도 약한 편이고, 고수도 적었다. 얼마 전에 죽은 장강용왕이 없었다면 이만한 세력을 구성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터였다.
이현성의 질문은 이어졌다.
“그들을 막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까?”
“무슨 말이오. 그럼 항복하라는 말이오?”
누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더 계속했다가는 다들 참지 않을 것 같았지만 작정한 바가 있는 이현성은 빙글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닙니다. 꼭 이 곳을 지켜야 하냐는 말입니다.”
“그건 수룡보를 내주자는 말이오? 그거나 항복하자는 말이나 무슨 차이가 있소?”
분위기가 갈수록 험악해 졌다.
“수룡보가 수로연맹의 자존심이라도 된다는 말 같군요?”
“당연한 말을 하지 마시오. 피해가 두려워서 싸우지도 않고 총채를 내주면 강호의 동도들이 우리 수로연맹을 어떻게 보겠소? 전 총채주님께서 건설하신 수룡보는 우리 수로연맹의 상징이고, 자부심이오.”
이현성은 슬쩍 비웃음을 띠우고 사람들의 이성을 날려버리는 결정타를 날렸다.
“수적이 땅을 중요시 여기다니 이름을 장강육로연맹으로 바꾸는 게 어떻습니까?”
“뭣이. 우리를 능멸하는 것이오.”
거의 삼분의 이가 넘는 자들이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잡아먹을 듯 눈에 불을 켜고 이현성을 노려본다.
“모두 자리에 앉으시오!”
다른 사람들을 말린 것은 철면노호(鐵面怒虎) 묵자강(墨滋康)이었다. 그는 장강용왕의 오른 팔과도 같은 존재. 현 총채주인 서극도 어른으로 모시고 있는 이다. 불만을 토하려 하던 이들은 노기를 감추지 못하면서도 자리에 앉았다. 그는 딱딱한 어조로 이현성에게 물었다.
“공자가 하고자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묵자강은 이현성의 말에서 다른 이들과 뭔가 다른 것을 느낀 듯 했다.
“대체 수적이 언제부터 육지에서 싸웠습니까?”
이현성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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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현성에게 별호를 줘야 하는데.. 생각 나는 게 없군요.
대충 구무협스런 거 아무거나;; 지어주시면 안될까요.
추가.. 되도록이면 후기지수틱한 게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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