色魂 無影客! - 4부 3장
본문
깊은 호흡을 들이마신 사다케가 검을 잡고 일어섰다. 유끼꼬를 바라보는 사다케의 몸이 흔들렸다. 유끼꼬를 향해 걸어가는 그를 주시하는 스미토모 영주와 요시테루 사부의 눈빛!
스 르릉!
검집에서 검을 빼 드는 사다케의 냉엄한 자세!
"용서해라! 유끼꼬."
사다케의 검이 높이 쳐들어졌다. 눈물이 맺히고, 그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의 눈에는 유끼꼬의 하얀 목이 너무도 작게 보였다. 그의 검이 내려치려는 찰나.
"잠간만!"
작지만, 암중의 기도가 서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시테루 사부의 목소리였다.
"내게 주실 수 없소?"
"......?"
스미토모 영주의 시선이 천장 한구석에 박혀 있었다. 그는 고심 중이다. 그리고 한 마디!
"머리채를 잘라라!"
고심해서 내린 영주의 결단이었다. 머리채는 여인의 생명, 기녀로 팔려가도 머리채는 자르지 않는 법이거늘.
"풀어라! 유끼꼬."
유끼꼬는 거의 혼이 나간 상태로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풀어 앞으로 내렸다.
스스…! 촤악!
사다케의 검에 베어진 유끼꼬의 머리채가 그녀의 앞에 떨어졌다.
"가라! 요시테루 사부님을 따라갈 준비를 해라."
유끼꼬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자신의 머리채를 들고 일어섰다. 유끼꼬의 몸이 흐느적거리며 쓰러질 듯 뒷걸음쳤다. 유끼꼬는 무슨 정신에 어떻게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얼마만인가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으흐흐…흐흑!"
점차 그녀의 서러움이 요동을 치기 시작하고 가슴이 저려왔다.
"아 흐흐…! 엉…엉엉!"
소리 높여 울어본들 누구 하나 그녀를 따뜻하게 할 사람은 없는 고립무원(孤立無援)이다. 하인들은 모두 일하느라 바쁘고 홀로 남은 빈방의 적막 속에 그녀의 통곡만 메아리친다. 엎드려 우는 그녀의 작은 체구가 들썩이기를 얼마인가? 그녀가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눈물로 범벅이 된 그녀의 눈이 독기를 품었다.
"죽인다. 스미토모…! 네놈 때문이야!"
그녀는 얼마 되지 않는 소지품을 챙겼다.
"그래 가자! 스미토모, 널 죽이러 다시 돌아온다. 사다케 도련님 안녕!"
그때 문밖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유끼꼬! 나와라. 요시테루님께서 가신다."
방문을 나선 유끼꼬의 시선에 사다케와 요시테루 사부가 보였다. 요시테루 사부는 벌써 걸어 나가고 있었고, 사다케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소주님!"
사다케를 바라보는 유끼꼬의 눈빛은 애절하였다.
"난 너를 베었다."
사다케는 냉정히 돌아서서 요시테루 사부의 뒤를 쫓아 배웅하러 걸어 나갔다. 이렇게 하여 유끼꼬는 또 다른 삶 속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요장(伊豫莊)은 날로 번창하였다. 스미토모 영주는 자신과 사다케에 대한 관리를 철저히 하며 일국을 설계하는 꿈을 키워 나갔다. 결국 스미토모 영주는 일국을 받을 수 있는 시험단계로 황실의 고위직으로 들어가고, 사다케가 영주가 되었다.
오쿠라(大倉)의 고시고애(腰越)장원(莊園).
당대의 숨은 권력자 도키타다(平詩忠)의 소유지이다. 밤이 깊은 시각이건만, 장원 으슥한 침실에는 불이 밝혀 있다. 장원의 주변은 무사들이 엄중수비를 하고 있다. 황실에 있어야할 장주가 와 있기 때문이다.
도키타다, 그는 황 촛불을 마주하고 걱정에 잠겨있다. 황실의 고위직에 있는 그는 잠시 휴식을 취하러 자신의 장원에 내려와 있는 것이다. 헌데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진다. 수시로 자신을 압박해오는 도모모리(知盛)가 두렵다. 어차피 그를 두려워 할 바에는 그를 제거하는 방법뿐이 없다. 별 수 없이 자객을 고용해야 할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그는 불을 끄고 들어 누웠다. 불이 꺼지는 것을 신호로 흑점이 고시고애 장원 담을 넘었다. 무사들은 순시를 하건만 흑점의 움직임을 전혀 눈치 채지를 못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흑점은 마치 바람이었다.
흑점은 넙죽 엎드려 스르르 흘러가다가 처마 밑에 들러붙었고 어느새 문틈으로 스며들 듯이 사라진다. 순식간에 흑점은 도키타다의 방문 앞까지 다다랐다. 절대 쾌(快)였다. 구름에 가려던 달빛에 모습이 들어난다.
체구가 작은 흑의의 자객이었다. 그것도 잠시, 자객은 소리 없이 도키타타의 침실로 들어섰다.
"뭐…! 뭐야?"
검술을 익힌 도키타다가 시커먼 암영을 보고 검을 잡으려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흑광이 번쩍였다.
"끅!"
비명도 없이 숨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도키타다의 몸이 푹! 고꾸라진다. 자객은 도키타다의 심장에 손가락을 대고 절명한 것을 확인한다. 소리 없이 방을 나온 자객의 몸은 바람같이 고시고애 장원을 빠져나와 장원 뒤편 요시노산(吉野山) 기슭으로 올라간다. 그의 모습은 마치 다람쥐와도 같이 빠르다.
자객은 산기슭 작은 신당(神堂) 앞에 와서 잠시 머뭇거렸다. 그것도 순간, 자객의 몸이 지붕위로 올라가 거꾸로 매달렸다. 자객은 기왓장 밑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들고 한 마리 새처럼 날았다. 자객은 신당 뒤편으로 날아와 바위틈새에 앉았다.
자객이 두건을 벗어 들었다. 남자가 아니고, 해맑은 여인의 얼굴이 들어났다. 눈물을 뿌리며 이요장(伊豫莊)을 떠난 유끼꼬였다. 변해있었다. 앙증스런 미모는 여전하지만, 똘똘 뭉쳐진 강기에 요화(妖花)의 자태가 흘렀다. 겨울의 한풍이 불어와 그녀의 흑발을 휘날렸다.
"후우!"
그녀는 한차례 긴 숨을 토해내고는 손에 든 것을 펼쳤다. 그녀가 신당에서 가져온 것으로 그녀가 속해있는 자객단 아까묘(赤猫)에서 보내온 살수첩이었다. 다음 살수대상자가 들어있는 살수첩이다. 그녀는 살수첩을 펼쳐 들었다.
살사인(殺死人)
구죠 사다케(九條佐竹).
아까묘(赤猫)
"흐읍!"
놀란 그녀는 자신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사다케…! 사다케란 말인가? 누가.......?"
그렇다. 그녀를 버린 이요장(伊豫莊)의 소주였다. 운명은 그녀를 절망 속으로만 몰고 있었다. 그녀가 여태껏 살아온 것은 소주 사다케 도련님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그녀는 가끔 이요장을 찾아가 먼발치에서 사다케를 바라봤다. 사다케는 결국 엣츄(越中)성주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
유끼꼬에게는 삶의 의미도 없고, 인자의 세계는 냉정하다. 살수와 은둔, 그 자체뿐이다. 남자 인자들은 기루의 기녀를 찾아 갈등을 풀기도 하지만, 그녀는 단지 고독한 생활 속에 몸에 배어 갈 뿐이다.
요시테루 사부를 쫓아간 유끼꼬는 인자로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네 년의 몸에는 남자를 홀리는 사악한 요기가 가득하다. 그것을 파괴하려면 네년의 몸을 스스로 단근질을 하고 인자가 되어 복면을 벗을 생각을 말아!"
요시테루 사부는 호통을 치며 채찍질을 하였다. 오십 근이나 되는 철추를 양발에 매고 모래밭을 달리고, 빙수에 몸을 담근 채 거꾸로 서 있고, 지네와 독벌레가 우글거리는 지하암굴을 기어 다니는 등의 고통은 저승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고난의 단계를 거쳐 그녀는 요시테루 사부에게 잠영인술(潛影忍術)은비검법(隱飛劍法).세류은탄술(細柳隱彈術)을 사사 받았다. 인자의 수업을 받던 남자들도 죽어간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그런 단계를 거쳐 그녀는 붉은 고양이라는 아까묘(赤猫) 자객단에서 고독한 인자생활을 시작했다.
인자의 생활 중에 그녀는 우근위대장(右近衛隊長) 사네토모(實朝)의 눈에 들었다. 허지만 복면을 벗으면 여인이라는 것이 탄로됨으로 갈수도 없었다. 그녀는 사네토모의 청을 거절하고 아까묘의 수석자에 지원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동영 자객단에는 여인이 없었다. 남자도 꺼려하는 자객 수석의 세 가지 관문은 곧 죽음이었다. 설령 도전한 남자들도 모두 죽거나 도중에 포기하기 마련이었다. 허지만 삶의 의미도 없고, 고독과 독기로 똘똘 뭉친 그녀는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였다.
첫 번째 관문부터도 문제였다. 독벌레들과 고독(蠱毒), 지독한 독향이 난무하는 지하암굴은 그녀가 훈련단계에 거쳤던 것은 조족지혈(鳥足之血)이었다.
두 번째 관문은 용암이 들끓는 용하를 건너고, 빙하수를 건너야만 했다. 거의 두 번째의 단계에서 수석자 지원자는 죽은 시체로 변하고 말았다.
세 번째 관문은 심적 고통을 주는 마의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그녀는 원혼이 된 부모를 만났다. 백팔번뇌(百八煩惱)와 희노애락(喜怒哀樂), 오욕칠정(五慾七情)을 일으키는 인간군상(人間群像)이 들끓어 사경을 헤매게 되고, 심맥이 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살아 나왔다. 그녀가 세 가지 관문을 통과하였을 때, 세인들은 지옥귀신이 나오는 줄 알았다. 그런 시련을 딛고 살아온 그녀에게 다가온 운명은 사랑하는 사람을 암살하라는 것이다. 비록 사다케가 그녀의 목에 검을 겨누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황금을 위해 사다케의 목을 자르라는 것이다. 황금의 의미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눈에 흐른 눈물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래…! 가자!)
심중을 굳힌 유끼꼬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몸이 요시노산(吉野山) 아래를 향하여 날았다. 까만 점은 어둠에 묻혀 살아졌다.
다음날.
눈이 내리고 있다. 밤을 하얗게 채색할 듯 눈이 내려와 쌓이고 있다. 이요장(伊豫莊)의 장주 사다케의 거실.
"흠! 눈이 많으니 내년은 풍년이군......."
사다케는 문서 정리를 손수 하는 버릇이 있다. 정리한 문서를 넣은 목함을 들고 일어섰다. 훈훈하던 방안에 때 아닌 한풍이 잠시 불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헛~!"
흑두건과 흑의를 입은 괴인이 태연하게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냐?"
놀란 사다케는 검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흑객은 소리 없이 두건을 벗었다. 사다케는 다시 한 번 놀랬다.
"넌…! 유끼꼬......!?"
그에게 머리채를 잘리고 이요장(伊豫莊)을 떠난 유끼꼬였다. 유끼꼬는 말없이 품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탁자에 놓았다.
"......?"
사다케가 탁자의 종이를 펼쳤다.
살사인(殺死人)
구죠 사다케(九條佐竹).
아까묘(赤猫)
"허헛!."
사다케 자신을 살해하라는 자객단의 살수첩이 아닌가?
"유키이에(行家)! 이놈…!"
단번에 사다케는 살수 청탁을 한 자의 이름을 뇌까렸다. 그의 두 눈이 이글이글 거렸다. 유끼꼬가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사다케의 시선이 유끼꼬를 향했다.
"네가 인자가 되었단 말이냐?"
"약속대로 소녀의 목숨을 바치러 왔습니다."
그랬다. 그녀는 분명히 오 년 전 사다케의 손에 죽음을 맞이한다고 하였다. 사다케의 안면이 일그러졌다. 인자는 살수를 행하지 못하고 신원이 노출되면 자결을 해야 하는 법이다. 그녀는 분명히 살수첩을 내놓아 보였고, 신원도 밝혔다. 자객단에 대한 배반이고 청탁자의
신원도 노출시킨 것과 같다. 사다케는 그녀를 또 다시 베야만 한다.
"돌아가라! 나는 이미 너를 베었었다."
"이 소녀가 죽을 곳입니다."
"......!"
사다케는 묵묵히 포단위에 앉았다.
"사나이는 두 번 말하지 않는다."
담담히 내뱉은 사다케는 눈을 감았다. 그의 눈가에는 잠시 호롱불이 반짝였다. 백설이 내리는 밤은 깊어만 갔다. 대화가 끊어진 방안에는 두 사람의 끈기만 남아 있었다. 침묵이 이어지고 동이 트기 전에 사다케는 방문을 나서서 사라졌다.
유끼꼬의 눈에 또 다시 눈물이 흘렀다. 누구도 이 여인에게 이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할 수는 없는 것을. 유끼꼬는 슬며시 일어났다. 그녀는 두 번씩이나 눈물을 뿌리며 이요장을 떠나는 것이었다. 여명이 밝아오는 백설위의 발자국은 남으로 향하고 있었다.
고베시(神戶市).
호족(豪族)들이 많아 전각들이 즐비하다. 그중에 하나의 전각(殿閣).
어둠을 타고 하나의 흑영이 지붕을 타고 내려와 들창 안으로 사라졌다. 흑영이 들어간 방안에는 일남일녀, 사무라이와 여인이 누워 잠들고 있었다.
"흐 윽!"
사무라이는 숨이 막히는 가위에 눌려 눈을 떴다.
"억!"
사무라이는 모치히토왕(以仁王)의 딸 하치죠인(八條院)의 근위총령(近衛摠領)이다. 그가 기겁을 하는 것은 자신의 침상 앞에 한 흑객이 복면을 하고 서 있었다. 흑객은 그의 목줄에 검을 들이대고 있었다. 검날은 목 줄기 피부에 깊숙이 박혀 있어 여차하면 목이 달아날 판이다. 목 줄기에서는 피가 흘러 내렸다. 흑객이 복면을 벗었다.
"너…! 넌, 유끼꼬!?"
사무라이는 유끼꼬가 잊지 못할 사람 중 하나, 마스나가(松永)였다.
"그래. 내 인생을 망친 너를 잊지 못하는 나다. 출세했구나! 허지만 오늘은 너의 목숨을 가져가야겠다."
"사…! 살려줘라!"
마스나가는 꼼짝도 못하고 바들바들 떨며 애원을 하였다. 마스나가 옆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줄도 모른 체 여인이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었다.
"조용해라! 네 여인이 깬다.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마!"
유끼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둠속에서 번쩍 혈무가 튀었다.
큭! 끄르륵!
마스나가는 비명도 못 지른 채 두 눈을 홉뜨고 목을 떨어뜨렸다.
"왜 그러세요.……?"
잠결에 침상위의 여인이 모로 누우며 잠꼬대를 했다. 벌써 유끼꼬는 들창으로 빠져 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어차피 쫓기는 몸이 되었던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이 지경으로 만든 원인은 마스나가에게 있다고 생각을 했다. 그녀는 죽더라도 마스자가의 목을 따리라고 결심하였던 것이다.
유끼꼬는 그 후 자취를 감추었다. 아까묘(赤猫)와, 그리고 마스나가의 사인을 규명하던 모치히토의 국부(國府)또한 아까묘를 통해 그녀의 수법임을 알게 되어 추살하려 했으나 그녀의 흔적은 동영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유끼꼬는 그후 사부 요시테루를 찾아가서 처신을 기다렸던 것이다. 요시테루는 불도에 귀의하여 다이사(東大寺)에 있었다. 요시테루는 전생(前生)에 요살(妖殺)인 그녀를 내치고 만나지 않았다. 허지만 유끼꼬는 한 달간을 식음을 전폐하면서 부복하고 기다렸다.
결국 요시테루는 그녀의 타고난 업보를 불쌍히 여겨 밀선(密船)을 이용하여 중원으로 보냈다. 야래향에 있는 인자들의 대부분이 동영에서 축출된 사무라이나 인자들이었다. 현재 남은 수석자는 절애(節愛)의 사랑으로 인한 낙오자(落伍者)였다. 그는 이미 혼인한 황녀와 정을 통한 죄로 성기를 거세(去勢)되어 유배(流配)되었다가 축출된 사무라이였다.
석가세존은 생명이 있는 것은 유한(有限)한 것이며, 세상 만물은 끊임없이 변해가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하였고,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 하였다. 인간의 죽음과 삶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이더냐? 유끼꼬는 두 번의 죽음보다 더 소중한 것을 찾아 헤매다가 이국(異國)의 하늘 아래에 있는 것이다.
유끼꼬의 얘기를 들은 설무영은 애잔한 마음으로 동요되었다. 애끓는 단장(斷臟)의 만가(晩歌)를 부르듯 자신의 과거를 토설한 유끼꼬의 봉옥에는 아침이슬 같은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고, 아픔을 아픔인줄 모르고 가녀린 몸을 지탱해 온 그녀를 어찌 전생의 요살이었다 할 수 있는가?
한밤의 창문으로 쏟아지는 달빛은 유끼꼬의 자태를 들어내어 비추고 있었다. 자신의 몸을 살인도구로 삼아 살수첩을 품고 다니던 인자의 복면을 벗은 그녀의 모습은 월륜(月倫)에 살았던 선녀(仙女) 항아(姮娥)와도 같았다.
설 무영이 그녀의 살 프시 안고 등을 토닥이었다. 그녀의 파르르 떨리는 작은 체구로 부터 맑은 청백의 향기가 콧속을 스며들었다. 설 무영은 유끼꼬의 옥으로 빚은 듯 맑은 이마에 입술을 살짝 맞추며 입을 열었다.
"유끼꼬! 너는 나의 그림자이고 나는 너의 그림자이다. 너와 나와는 해로동혈(偕老同穴)일수 밖에 없다. 내가 너이고 네가 나다. 아름다운 너를 취하고 나의 정인(情人)으로 하고 싶다."
"주군의 여인입니다!"
속삭이듯 뇌까리는 그녀의 이슬 맺힌 봉목이 설 무영을 바라봤다. 설 무영은 섬세한 윤곽의 밝고 깊은 눈동자는 천정무심(天井無心)의 기도(氣道)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마지막 목숨과 마음을 소유한 무소불능의 주군이며 남자였다.
설 무영을 바라보는 유끼꼬의 눈에는 한없는 신뢰감과 정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 또한 불같은 정념이 들끓고 있었다. 허나 슬며시 그녀의 시선을 외면한 그가 몸을 일으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너를 소유하고 싶어도 네 마음만 취한다. 너와 내가 정인이 되면 앞으로 닥칠 생사를 넘나드는 순간에서 정심으로 인한 흔들림으로 일을 그르칠 것이 두렵다. 내가 치러야 할 업보를 치루고, 새로운 생을 이룰 때 너를 취하마!"
"......!"
"다만 그 안에 언제라도 유끼꼬의 마음을 취할 수 있는 정인이 나타난다면 놓아 줄테니, 그때는 무복과 가면을 벗고 여인임을 밝혀라! 그것이 놓아달라는 너의 마음을 알리는 신호로 알겠다. 그 전에는 가면을 벗지 마라!"
"주군.......!"
그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설 무영의 말에는 그녀를 생각하는 깊은 마음에서 울어난 것이었다. 설 무영의 말에 유끼꼬는 가슴 한 쪽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전율을 느꼈다. 배려보다도 깊은 애정이었다.
"이것을 줄 테니 섭취하고 운공을 하라."
설 무영은 축잠낭(縮潛囊)에서 빙하설연과(氷河雪蓮果)를 꺼내어 그녀에게 건넸다. 설 무영의 천근같은 발걸음은 침실을 나가고 있었다. 그가 나가고 나간 허전한 침실에서 유끼꼬는 빙하설연과를 만지작거렸다.
요시테루 사부님과 같은 말을 그녀에게 남기고 그는 사라졌다. 가면을 벗지 말라고! 헤어나고 싶을 때 가면을 벗으라고 하더니 내공을 높이는 영약을 주고 나가버린 것이다.
"무정한 남자.......!"
그녀가 설 무영에게 의존하고 싶어 분분(紛紛)히 들끓는 정감은 영약으로는 채울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의 붉은 홍협(紅頰)에 다시 뜨거운 이슬이 흘러 내렸다.
당대 황실은 아직도 혼란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평로(平盧) 절도사가 거란족(契丹族)의 도움을 받아 후당(後唐)을 쓰러트리고 세운 후진(後陳)을 세웠었다. 그때 후진은 원조의 대가로 만리장성 이남의 연운(燕雲) 십육 주를 거란에게 주었다. 이에 만족하지 않은 거란은 대군을 이끌고 도읍인 개봉(開封)을 점령하고 국호를 요(遼)로 하고 지배를 굳히려고 했지만, 절도사들의 항거로 철수하고 후한(後漢)이 세워졌었다.
그러나 후한 역시 절도사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새로운 왕조가 건국된 황실이 후주(後周)였다. 다행히도 후주의 제이대 세종(世宗)은 황제가 된 후 직속군을 강화하여 북의 거란, 남의 남당(南唐)을 압박하여 통일의 길을 마련 중이었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일까? 황제에게는 두 명의 왕자가 있었다. 혜련황후(惠蓮王后)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일곱 살 용운왕자(龍雲王子) 주태무(周泰茂)와 송희비(松姬妃) 사이에서 태어난 열 살 난 태현왕자(太峴王子) 주태인(周泰隣) 이였다.
황태자 옹립을 위해 은연중의 대립이 일어나고 있었다. 정통성을 주장하는 측과 양희비의 일파간의 의견이 충돌하고 있었다. 이것은 중원대륙을 통일하려는 황제의 염원에 걸림돌이 되는 일이다. 설중가중으로 중원에 강시가 출현하였다는 소문과 아울러 의적 흑설매(黑雪梅)가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하며 때로는 분신술을 하는 열 명의 흑설매가 다닌다고도 하기도 하고, 흑설매의 팔과 다리가 한쪽 없다는 등의 뜬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개봉 황실이 있는 용정궁(龍亭宮).
궁 안의 깊숙한 밀실. 석대 위에는 칠세 정도의 어린 소년과 심팔 세가량의 청아(靑娥)한 미소녀가 혼절하여 누워 있었다. 소년은 용모가 천진난만한 동안(童顔)이고 궁장을 한 소녀는 각 피어난 꽃봉오리 같은 홍안의 봉옥이었다.
그러나 소녀의 자태는 의외로 굴곡이 완연하고 신체가 막 여물어가는 수밀도와 같았다. 벌어진 궁장 사이로 소녀의 탱탱한 허벅지가 노출되어 있었다. 기괴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소년과 소녀는 천하를 지배하는 황제가 애지중지하는 용운왕자(龍雲王子) 주태무(周泰茂)와 정랑공주(精浪公主) 주예소(周刈少)였다.
그런데 정랑공주의 벌어진 옷 틈으로 삐진 터질듯 탄력 있는 허벅지를 음험한 눈동자로 내려다보는 괴인이 있었다. 핏줄이 불거진 괴인의 창백한 손이 정랑공주의 고의를 들추었다. 구중궁월에 자라난 상아빛 빙기옥골(氷氣玉骨)의 피부와 하체는 관능적이었다.
감추어져 있던 윤기 흐르는 둔덕이 적나라하게 들어나자 사나이의 손길이 은밀한 균열을 수줍게 덮고 있는 뽀송한 처녀림을 쓰다듬고 지나갔다. 혼절한 정랑공주의 몸이 꿈틀거렸다. 황실이 있는 곳에서 그것도 왕자와 공주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불빛이 일렁이며 괴인의 얼굴이 들어났다.
"흐흐흐…! 생여강시(生女糠豉)로 만들기 좋은 재원(財源)이야........"
음사한 미소를 띠우고 중얼거리는 금의곤포(錦衣袞袍)를 걸친 사나이에게는 살아있는 인간이라고 볼 수없는 보기에 어두운 그림자 같은 사악한 사기가 어려 있었다.
"나더러 일개 성을 지키는 절도사가 되라고.......? 이제 내게는 황실이 필요 없다. 머지않아 중원은 내 것이 될 것이다. 용운왕자를 없애면 내 피가 흐르는 태현왕자가 황제가 될 터이고........ 흐흐흐! 그때는 황실이 강시로 무림을 재패한 나를 찾을 것이다. 흐흐.......!"
또 다시 괴인의 두 손이 정랑공주의 가슴을 파헤쳤다. 우악스런 두 손이 매끄럽게 곡선을 이룬 젖가슴과 봉긋한 융기를 한꺼번에 물건을 고르듯 헤집어 보았다.
"흐 으........!"
혼절한 공주의 입에서 고통의 신음이 흘러 나왔다.
"됐어! 눈여겨보았던 데로 훌륭한 음기(陰氣)의 체질이야. 우선 하나를 옮기고......."
괴인은 공주를 들쳐 업었다. 궁장이 말아 올려져 요염한 둔부가 들어난 공주를 들쳐 업은 괴인이 밀실을 빠져 나갔다.
"......?"
홀연히 목가구 뒤에서 사십대 여인이 나타났다.
"아! 난국을 어찌 할 것인가? 황실도 어쩌지 못하는 걸 나 혼자의 힘으로는......."
여인은 뇌까리며 혼절한 용운왕자 곁으로 다가섰다.
"저주받을 악마! 공주를 강시로 만들고 왕자마저 죽인다고.......?"
치를 떨던 여인은 어린 왕자를 들쳐 업고 밀실을 빠져 나갔다. 황실에서는 경천동지의 극악무도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안개 속 같은 황실의 풍전등화(風前燈火) 운명이 어떻게 되려는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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