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SF

야담소설가 유관필 - 6부

본문

첫 입맞춤은 강렬했다. 입술에 닿는 꺼끌꺼글 마른 유관필 입술의 느낌에 놀라 고개를 뗀 당예인은 일평생 해를 받지 않아 하얀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 그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가는 걸 보고 말았다. 놀란 마음에 다시 입술을 가져다대고 응급처치를 하면서도 당예인은 아찔한 입맞춤의 느낌을 잊지 못했다. 숨을 불어넣다 자신의 혀와 살짝 닿은 유관필의 치아의 느낌에 다시 정신을 잃을 뻔한 당예인은 하지만 강호의 여인답게 기어코 반쯤 저승길에 발을 뗐던 유관필을 살려내곧야 말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쥐고 헐떡거리는 유관필을 멍하니 바라보며 잠시 눈물을 흘리던 당예인이 정신을 차린 건, 시전의 쌀가게 주인 장삼보가 도망쳤던 유관필의 말을 잡아 가져다 주면서였다. 




호흡은 돌아왔지만,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유관필을 일단 당가로 옮겨야 겠다고 생각한 당예인은 두 필의 말을 장삼보에 가게에다 맡기고는, 유관필을 팔에 안고는 전력으로 당가로 내달렸다. 주위를 살필 여력도 없이 그저 스승의 얼굴을 보며 관도를 내달린 당예인은 쓰러져 정신이 없는 가운데에서도 세인아, 세인아를 나지막히 읊조리는 유관필을 발견하고나서야, 자신의 선생님은 절대로 다른 여인에게 한 눈을 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까닭없이 속이 상했다. 이유를 알지도 못한 채로 급한대로 당가의 약당인 의독전에 도착한 당예인은 자신의 숙부이자 의독전의 전주인 당약환을 찾았지만, 숙부는 자리에 없었다. 의독전의 방에 자리를 펴고, 유관필을 눞힌 당예인은 당약환을 찾아달라 시비에게 전하고는 그대로 굳은채로 쓰러진 유관필의 하얀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이었다.




당예인의 그런 모습을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당약환이 아닌, 독왕 당철기였다. 소식을 전하러 시비가 찾은 곳은 당가의 독물사육장이었고, 당약환은 당철기를 모신 채로 당철기가 기르는 독물들의 상태를 살펴보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해 마지않는 손녀가 웬 남자를 안고 들어와서 약당의 전주를 찾았다는 말에, 쏜살같이 달려온 당철기가 본 것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누워 신음하느 유관필과 그런 유관필을 몹시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며 얼굴을 붉히고 있는 손녀 당예인이었다.




"뭐하는 짓이냐!"




80세에 이르고, 작은 덩치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쩌렁쩌렁한 당철기의 목소리가 온 당가를 들었다 놓았다. 그 바람에 정신을 차린 당예인이 자신의 할아버지를 질책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야 말로 무슨 짓이에요. 지금 선생님이 쓰러지셨단 말이에요. 잘못해서 기혈이라도 다치면 어떻게 하려고."


"그 망할 자식은 왜 쓰러진 것이냐. 그리고 네가.. 네가.."




차마, 열아홉의 자신의 손녀가 서른이 넘은 중늙은이에 자식까지 있는 유부남을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이냐고 물어볼 수가 없었던 당철기는 울화가 끓어올랐고,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의약전의 마당에다가 일장을 내질렀고, 그 일장에 의약전으로 복귀하던 당약환은 온 몸에 먼지를 뒤집어 써야했고, 청명환을 다려오던 시비는 놀라서 들고있는 탕약을 놓치고야 말았다. 쨍하고 사기그릇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유관필이 깨어났다. 




"음..여기가, 아, 어르신! 여기가.. 난 분명, 예인이와.."




유관필의 두서없는 말에서 그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을 알게 된 당철기는 끌어오르는 노화를 억지로 참으면서, 유관필이 정신을 차리기만 하면 사건의 전후에 대해 추궁해야 겠다고 결심했다. 스승이 일어나자마자 작은 할아버지의 등에 숨은 당예인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유관필의 안부를 물었다.




"선생님. 여긴 당가에요. 선생님이 쓰러지는 바람에 여기로 모셔왔어요. 괜찮으세요?"


"어. 예인이구나. 그래, 난 분명 적송자 어르신과 내가 쓰던 야담을 이야기 하고 있었는데, 그 뒤로.. 말을 탔나....기억이 잘 나지 않는구나. 속도 좀 미식거리고, 예인아 물을 좀 주겠니?"


"네. 선생님. 숙부는 대체 뭘 하고 계신거야. 쟁쟁아. 여기 물을 좀 가져다 주렴. 숙부님은?"


"전주님은 방금 태상가주님 때문에 먼지를 뒤집어 쓰셔서 옷을 갈아입으러 가셨습니다. 여기.."


"그러게. 갑자기 왜 마당에다가 장력을 퍼부으시는 거예요? 모두가 할아버지 때문이에요."




자신에게는 내내 투덜거리면서, 멀쩡해 보이는 유관필에게 다가가서 혼자서 먹을 수 있는 물을 기어코 자신의 손으로 먹이는 당예인의 꼴을 더는 보지 못한 당철기가 큼큼하며 헛기침을 해서, 유관필을 눈으로 불렀고, 눈을 마주친 유관필에게 아주 냉정한 일갈을 던지고 말았다.




"이 늙은이가 성질이 고약하다네. 난 내 손녀가 소실이 되는 꼴을 볼 바에야, 자네의 현숙한 부인과 귀여운 아이를 해치는 쪽을 택하고 말걸세."


"예? 어르신, 그게 무슨.."


"할아버지!"




당철기는 늘 가지고 다니는 대나무 장죽의 머리부분을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구기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쇠를 구기는 당철기의 괴력에 유관필은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몹시 긴장한 유관필을 바라보면서 당철기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 어떻게 된 일이야? 왜 자네가 예인이의 품에 안겨 당가의 땅을 밟았지?"


"어르신, 전..기억이.."


"할아버지, 제가 이야기 할게요."




당예인은, 우연히 유관필과 적송자의 대화를 듣게 됐다는 것, 믿고 있던 마음에 배신을 당하고, 분한 마음에 억지로 미월루로 유관필을 끌고 가다가, 얼굴을 붉히는 유관필을 보고 욱해서 일장을 내갈긴 건 자신이었고, 그 결과로 숨이 멎을 뻔한 유관필을 당가로 데려오다가 무의식 속에서도 아내의 이름을 부르는 유관필을 보고서는 모든 것이 자신의 오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말했다. 유관필은 그제야 모든 일이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그건 오해라고, 진짜로 자신은 오세인 말고는 누구도 마음에 둔 적이 없었다는 말을 몇번이고 거듭했고, 당예인은 그런 유관필에게 정말로 죄송하다면서 머리를 조아렸지만, 당철기는 이번에는 유관필에게는 좀 더 누워있으라고 한 후 의독전의 후원으로 자신의 손녀를 불러세웠다.




"왜요? 할아버지. 지금 선생님, 안정이 필요한 시기라고요. 혼자 두면 안될텐데요."


"그놈의 자식은 아무렇지도 않아. 내가 나오기 전에 완맥을 잡아봤더니 내상도 남지 않았어. 그보다, 너! 저 사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게냐?"


"예? 선생님을요? 선생님이야, 선생님이시죠."


"내 눈을 속일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게냐. 내가 독왕이야. 저 놈의 입술에 왜 네 입술연지가 묻어 있는 것이냐. 그리고 저 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널 내가 이미 보았다."


"그건, 선생님의 숨이 갑자기 멎는 바람에... 그리고 선생님은.....모르겠어요! 진짜로, 모르겠다고요."




갑자기 얼굴을 감싸쥐고, 도망쳐 버린 당예인을 멍청한 눈으로 바라보던 당철기가 긴 한숨을 쉬었다. 일단, 자신의 손녀보다는 저 중늙은이를 단속하는 게 먼저라고 판단한 당철기가 의독전의 문을 거칠게 열어졌혔다. 그곳엔 연락을 받고 온 것인지 가주이자 자신의 아들인 당척이 유관필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아들 앞에서 손녀 이야기를 할 수 없었던 당철기가 도망친 당예인을 잡으러 다시 나가고 당척은 아직은 어리둥절한 유관필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딸애에게 많은 말을 들었습니다. 당척입니다."


"아, 당가주님이셨군요. 유관필입니다. 석죽산 근처에 작은 장원을 짓고 살게 되었습니다. 잘부탁드립니다."


"딸아이를 맡겨놓고서는 한 번 인사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의독전엔 무슨 일이십니까? 어디 아프신 곳이라도."


"아닙니다. 작은 오해가 있어서, 예인이에게 한 대 맞았습니다. 아이고. 이거 힘이 장사네요. 여기가 욱신거려서 사내가 되어서는 다리가 풀렸네요."


"그 녀석이요? 죄송하게 됐습니다. 제가 다 과문한 딸을 둔 탓이지요."


"아닙니다. 오해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오해는 모두 풀렸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한 번 뵙고 싶었습니다."


"예? 저를? 무슨 일로.."




유관필은 당철기가 버려두고간 장죽을 가리켰다.




"저 것이 보이십니까?"


"네, 장죽이 아닙니까? 이건, 아버님이 그러셨습니까?"


"네. 어르신이 그러셨지요."


"예인이 때문입니까? 그 어른이 손녀를 괴이시는 마음이 커서."


"가주님도 저 장죽을 저리 만들 수 있으십니까?"


"그거야. 어려운 일은 아니지요."




당척은 장인이라도 된 듯 완전히 구겨진 장죽을 조심스럽게 폈다. 원형이 되살아나진 않았지만, 그럭저럭 모양을 되찾은 장죽을 보면서 유관필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예?"


"이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지 않겠습니까. 저같은 사람이야 그 대나무를 꺾는 것도 어려운데 말입니다."




유관필이 꺼내려는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게 된 당척이 황급히 말을 돌렸다.




"허어, 아드님이 있으시다지요. 다섯 살이라는 말을 들었는데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마주치게 됩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지요. 제 경우는 한림학사 최항이라는 자였습니다."


"......."


"문장으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출사하고 처음 배속받은 직처가 경사의 북부시장이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내 필적, 내 문장이라면 언젠가는 기회가 열릴 거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낭중지추 네글자를 마음에 붙여놓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그 자를 알게 되었지요. 매년 시월이 되면 시전의 점포들마다 모두 그 해 정월부터 구월까지의 영업실적을 제게 보고 하게 되어 있습니다. 전 그걸 두달동안 분석해서, 명년의 과세지표를 삼고, 또 그 조사된 보고서를 토대로 새로 시전의 점포의 위치같은 것을 조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두달간이 저와 시전 상인들의 승부같은 거라 할 수 있지요, 영업실적이 좋으면 많은 세금을 내게 되지만, 실적을 누락시켜서 부실한 경영실적을 내게 되면, 오히려 시장의 구석이나 사람들의 발길이나 동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게의 위치를 조정당할수도 있으니 그렇게 할 수도 없고. 또 나중에라도 누락된 것이 적발되면, 처벌을 받게 되는 식이지요. 하지만, 장사꾼들이란 한 푼의 이무이라도 남기고 싶어하는 사람들이기에 어느 정도의 누락분은 모두 있는 것이고, 그 각각 제출된 누락분의 허실을 가늠하는 것이 제 일이었습니다."


"......"


"전 그날도 시전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남루한 관복을 입고 있는 한 벼슬아치가 시장의 구석에 퍼질러 앉아서 붓에 물을 찍어 시장의 바닥에 문장을 쓰고 있었습니다. 관심이 갔습니다. 뒤에 가서 그가 쓰는 문장을 봤습니다. 해가 나 있는 시간이라, 물로 쓴 글은 곧 말라가더군요. 그러니까 그 때 그가 쓴 글을 본 사람은 세상에 저랑 그 둘 뿐이었습니다. 사라지는 글씨들이 아쉬워서 제 입이 다 말랐습니다. 천하의 명문이었습니다. 그가 쓴 글은 세제의 개혁에 관한 글이었습니다. 제가 열심히 하고 있다고 생각했더 제 일을 까마득한 위에서 내려다보며 이런 식으로 개혁을 하면 황실의 세수가 훨씬 더 늘어나면서도 시전의 상인들도 발전할 수 있는 방도를 제시한 글을 보면서 제가 느낀 건, 이 사람은 평생을 갈고닦아도 이길 수 없겠다 였습니다. 처음 마주친 벽이었지요."




유관필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었다. 당척은 유관필의 말을 들으면서 당척은 절정고수가 되고 나서야 처음 보게 된 아버지의 진신무예가 생각났다. 3천개에 이르는 우모침을 내공으로 모두 각각의 다른 방향으로 내쏘았던 그날 밤 이후로 독왕 당철기는 당척에게는 단 하나의 꿈이 되었다. 아련해지는 당척의 눈을 바라보면서 유관필이 말했다.




"때때로 평생 이룰 수 있는 꿈도 있는 겁니다. 사람들은 꿈을 쫓는 인간이 행복하다 말하지만 말입니다. 사실, 인생은 절치부심보다는 유유자적이 좋은 겁니다. 하지만 유유자적보다 더 좋은 삶이 있지요.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게 무엇입니까?"


"손에 닿는 목표를 계속해서 이뤄가는 삶이지요. 진짜로 만족하려면 말이지요. 뭔가 손에를 쥐어야 하는 법입니다. 아!"




유관필이 갑자기 배를 움켜쥐었다. 놀란 당척이 다가서자 유관필은 손을 내밀었다.




"좀 일으켜 주시겠습니까? 호되게 배를 맞았더니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요."


"예. 그러지요."




유관필은 당척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껑충 키가 큰 당척에게 말했다.




"가주님은 손이 크시군요. 많은 걸 쥐실 수 있으실 겝니다. 좋지 않습니까. 이 빈약한 책상물림의 손도 잡아보니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질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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