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SF

色魂 無影客! - 1부 1장

본문

올려다 보이는 경대 안에서는 붉은 안개가 모락모락 뿜어져 나온다. 그리고 음산한 목소리가 귀청을 울리며 메아리쳤다.




"네 영혼을 바칠 준비가 되었느냐?"


"네....? 네!"




형체도 없이 들려오는 음산한 목소리에 갈제면은 바닥에 넙죽 엎드린다. 그리고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을 하였다. 다시 억양의 고조도 없이 냉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렇다면 흑오를 섭취하면 아수라의 영혼이 열릴 것이다!"




갈제면은 손에 쥔 흑옥을 바라보았다. 헌데 요상한 일이 발생하였다. 까마귀 모양의 흑옥이 어느새 선혈을 뚝뚝 흘리는 심장으로 변해 있었다.




"으흐흐.....흑!"




그는 시뻘건 심장을 들고 부들부들 떨었다. 심장은 살아서 뚝딱뚝딱 맥박 치고 있었다. 겁에 질린 그의 두 눈에 뻘겋게 핏줄이 돋았다. 바닥에 놓을 수도 없는 지경, 그는 심장을 입속으로 넣고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삼켰다.




"으…….웩! 억!"




눈을 부릅뜬 갈제면은 헛구역질을 하며 바닥을 뒹굴기 시작했다. 오장 육보가 마구 뒤틀리기 시작하였다. 그의 몸에는 적무가 흘러나오고 그의 뼈마디가 요동을 치기 시작하였다. 다시 음산한 목소리가 호통을 쳤다.




"흐~흐흐! 수라천이 열릴것이다!"




고통 속에서도 갈제면은 거울을 올려다보았다. 혈무가 피어오른 거울 속에 사악한 사술의 구결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의 눈동자는 온통 시뻘건 혈안으로 변해 거울 속의 사술을 읊어갔다.




"개환지옥(開還地獄) 래신수라천(來身修羅天) 사즉생(死卽生) 개천마옥(開天魔獄)......."




거울의 붉은 운무 속으로부터 음산한 득의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대가 나이고 내가 그대이거늘… 중원이 하나 됨을 위하여… 내가 원하는 것을 그대가 이룰 테고… 그대가 원하는 바를 내가 이름이니라!"




아울러 기괴한 일이 벌어졌다. 목소리와 함께 경대로부터 흘러나온 혈무가 갈제면의 전신을 감싸는 것이었다. 그리고 갈제면의 전신을 휘감은 혈무가 경대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적무도 사라지자 경대마저 스르르 안개같이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갈제면과 경대가 사라진 방안에는 어둠과 적막만이 깃들었고, 황실의 밤은 깊어만 가고 있었다.




천둥과 번개, 그리고 끊이지 않는 빗줄기가 모든 것을 감추어 버리는 황궁.


순간적으로 병사들이 지키는 전각위로 유령 같은 혈무가 솟아오르건만, 번개와 폭우가 쏟아지는 밤하늘을 유심히 살피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다음날 병사들은 평상시와 같이 위풍이 근엄한 자밀부위사 갈제면을 운무전에서 볼 수 있었다.




해가 질 녘! 바람이 분다.


천수현(天水縣) 북쪽 성벽 가까이 다닥다닥 붙은 천민들만 사는 거리. 한 달을 내리 쏟던 폭우가 걷히고 가랑비를 머금은 삭풍이 불고 있다. 시커먼 먹구름은 아직도 오대산을 휘감아 머물고 바람! 바람이 불고 있다.




"삐...이...익!"




대장간 문이 열리고 대장장이 염노야가 문을 나섰다.




"쿠...당...탕!"




바람결에 열린 문이 담벼락에 부딪쳤다.




"콜록!....콜록..크!"




염노야는 감기 기운이 있다. 그러나 자신보다는 마누라 때문에 약방에 다녀올 참이다. 염노야의 시야에 검은 물체들이 들어왔다. 대장간 맞은편에 꾀죄죄한 차림의 네 명의 걸아(乞兒)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쯔...쯧!"




걸아들의 누추한 모습에 염노야는 혀를 차면서 부리나케 약방을 향해 골목을 벗어났다. 비 개인 화창한 날이면 잔치 집을 돌며 구걸을 하고 있을 소년들이다. 그러나 이런 날씨에 누구인들 치르려던 잔치도 연기할 판이다. 그러나 웅덩이 구정물에 손을 담그고 있는 소년들의 표정은 마냥 즐겁기만 하다.




"까르르....륵!"




다섯 명의 소년은 외눈박이, 절름발이, 좌수가 없는 외팔이, 그리고 또 다른 소년 하나만은 신체가 멀쩡하다. 소년의 얼굴은 장발로 덮인 탓에 들어나 보이지 않았다. 외팔이 소년이 신체가 멀쩡한 소년에게 말을 건다.




"야! 흙탕물 튕긴다. 비켜! 키키킥...!"




그러나 장발의 소년은 요동도 하지 않는다. 외팔이 소년이 장발의 소년에게 흙탕물을 튀겼다. 흙탕물은 장발의 소년의 전신을 적셨다. 또 한 차례 소년들의 웃음소리가 자지러진다.




"하지 마! 듣지 못한다고, 그러지마!"




외눈박이 소년이 장발의 소년을 두둔했다. 그렇다면 장발의 소년은 귀머거리인가? 그 짓거리 놀이에도 지쳤는지 외팔이 소년이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간다!"


"나도......!"


"버버리! 안녕…!"




한참을 까르륵 거리며 놀던 소년들이 하나, 둘 자리를 떠났다. 적막이 깃드는 골목에 귀머거리 소년 혼자 남았다. 가랑비 내리는 어둑어둑한 골목에 그렇게 소년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소년은 언제부터 그곳에 그렇게 웅크리고 있었는지 기억조차 잊은 듯 일어날 줄 모른다.




염노야가 지나간 지 벌써 한 시진이건만 수년은 비바람을 피할 생각도 전혀 없다. 빗물웅덩이가 패인 침침한 골목의 빛보다 소년의 옷 색깔은 더 칙칙하다. 나이가 십오 육세 정도 되었을까. 때 국물이 꾀죄죄한 얼굴을 수북한 앞머리로 가려져 확실한 나이를 추축키 어렵다. 




폭우와 태풍이 지나간 마을은 전쟁(戰爭)의 주마(駐魔)가 할퀴고 간 들판처럼 아수라(阿修羅)였다. 뿌리 채 뽑힌 나무, 무너진 담장, 바람에 날린 지붕.......




"휴~~~우"




소년이 고개를 들고 일어서서 먹구름 낀 하늘을 쳐다봤다. ‘반~짝!’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오! 누군가 혜안이 있어 소년을 자세히 보았으면 경악하였을 것이다. 소년의 꾀죄죄한 외양과는 달리 소년의 눈동자는 깊고 맑으며 학의 기품이 있는 용모!. 살집과 피부는 말라 비루먹고 말랐지만, 극히 보기 드문 범의 골격이라고 할까. 용골호형지체!




소년은 다시 앉아 땅바닥에 무엇인가를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소년이 진흙바닥에 그리는 낙서는 예사 것이 아니었다. 이런 일이.......!


소년의 나이로서는 엄두도 못낼 난해한 기문진(奇門陳)을 거침없이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선(線)과 작은 돌(小石)로 배열한다. 천원(天元)에서 시작하여 음양(陰陽), 삼재(三才), 사상(四象), 오행(五行), 육합(六合), 칠성(七星), 팔괘(八卦), 구궁(九宮)에 두었다.




제갈량이 이 어린 소년에게 현신한 것일까? 잠시 땅바닥을 주시하던 소년은 누가 볼세라 낙서를 발로 비벼 지우고 슬그머니 일어났다. 빗방울이 뜸해지고 있다.




(띠기랄~......)




소년은 일어나면서 손에 쥐고 있던 돌멩이를 물웅덩이에 힘껏 던졌다.


그때 골목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일남일녀가 있었다. 이십 여세 가량의 청포를 걸친 청년과 화사한 목단무늬가 수놓아진 홍색 경장을 걸친 십 오세 가량의 미모의 소녀였다. 청년의 어깨에는 장검이 걸쳐있어 무인임을 알 수가 있다.




"철퍼덕.....!"


"허~억!"




흙탕물이 마침 골목 모퉁이를 꺾어 나오던 청포의 청년의 옷자락에 튀겼다.




"이 버버리 거렁뱅이 새끼…! 죽고 싶어?"




이곳 세인들이 벙어리라고 칭하는 걸인 소년은 묵묵부답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철~석....!"




청포인은 번개같이 다가와서 소년의 뺨을 후려쳤다.




"털썩~!"




뺨을 맞고 물웅덩이에 쓰러진 소년은 올려다보지도 않은 채 일어날 기척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소년은 의례히 당하던 습관이러니 내심 중얼거린다.




(그래! 또, 지기랄! 때려라...때려..)




소년은 뭇 세인들에게 핍박을 받을 때마다 반항 대신에 언제부터인가, 혼자 가슴속으로 독백을 하는 습관이 생겼다. 




(나를 괴롭혀라. 이왕이면 모질게 나를 괴롭혀라! 떠그랄…!)




걸인 소년을 내려다보는 청포 청년은 분이 풀리지 않는지 씨근덕거렸다. 청포인의 미목은 마치 여자처럼 고왔다. 청포청년의 옆에 서서 바라보는 홍의소녀의 호수 같은 잔잔한 봉목에 파문이 일었다. 소년을 향한 소녀의 눈동자에 일어나는 파문은 동정 일런가! 아니면 걸인 소년을 핍박하는 청포청년의 난폭함에 대한 원망이련가!




문득 물웅덩이에 넘어진 채 소녀를 보는 걸인 소년의 눈동자가 말을 하듯 의외로 반짝인다. 소년은 자신과 신분이 전혀 다른 지체의 홍의소녀의 맑은 눈동자를 처다 보았다. 나긋나긋한 허리를 비트는 소녀의 몸매는 나이가 어리지만 무척 선정적이었다. 소녀를 보는 소년의 눈가에 미소가 흐른다. 소녀가 옥구슬을 굴리듯 소녀의 청아한 음성을 흘리며 청년의 팔을 잡아끌었다.




"오라버니 그냥 가세요..."


"이걸....콰악!"




여동생의 만류에도 청년은 번개같이 소년에게 달려들어 발길질을 하였다. 




퍼억! 퍽! 퍼퍽!




청년의 연거푸 걷어차는 발길에 벙어리 걸인 소년은 물웅덩이에 뒹굴며 전신에 흙탕물을 뒤집어썼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청년은 씩씩거리며 걸인소년을 내려다보았다. 잔뜩 소년을 노려보던 청년은 소녀의 만류에 못 이기는 척 뒤돌아 걸어갔다. 홍의 소녀가 걸인 소년에게 슬쩍 자신의 손수건을 흘리고 청년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훗! 이쁜 기집애.....!)




소년은 내심 중얼거리며 물웅덩이에서 슬그머니 일어난다. 뒤돌아보는 소녀의 맑은 눈망울에 손수건을 집어 드는 소년의 모습이 비추었다.




그들이 사라진 골목은 다시 정적이 찾아 왔다. 두 눈에 눈물이 맺힌 걸인소년은 한동안 멀거니 청년과 소녀가 사라진 골목 저편을 쳐다보고 서있었다. 시커먼 소맷자락으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은 소년은 어금니를 물고는 중얼거렸다.




(뜨발...! 이렇게라도 살아야 하는 것인가?)




걸인 소년은 사라진 청년과 소녀가 누구인지 안다. 천수현에서 옥문관으로 이르는 수림(樹林)에는 목단살검(牧丹乷劍)이라는 독가무공을 기반으로 하는 무림가(武林家) 모란장윈(牧丹莊園)이 있다. 그 모란장원의 장주인 목단살웅(牧丹乷熊) 소상확(昭翔確)의 자제 소금호(昭錦虎)와 소류진(昭流珍)이었다.




땅거미가 어스름히 밀려들고 날이 어둑어둑해도 벙어리 걸인 소년은 자리를 떠날 줄 모르고 서 있었다.




모란장윈(牧丹莊園). 운몽헌(雲夢軒)


다음날, 흐렸던 날씨가 언제 그랬냐는 듯 청명한 날씨였다. 높은 전각과 누각의 처마 끝이 하늘을 치받을 듯 바라보이는 모란장원의 입구 남광문(南光門) 앞에 한 소년이 어슬렁거리고 있다. 남루한 복장에 벙어리 걸인 소년이었다.




소년은 물웅덩이에 빠져 흙투성이가 아니고 남루한 의복이지만 말끔히 세탁하여 단정한 모습에 더벅머리도 빗어 올리고 있었다. 햇빛을 받은 그의 용모는 이목구비가 또렷한 영준한 용모에 오관이 반듯하여 지극한 청기가 흘러 나왔다. 소년의 이마 한가운데는 소금호의 핍박에 상처를 입은 듯 상흔(傷痕)의 붉은 반점이 있었다.




소년이 모란장원 앞을 배회한 시간은 벌써 한 시각이 지나고 있었다. 벙어리 소년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자리를 떠날 줄을 모르고, 땅바닥에 낙서를 하다가 두 눈을 감은 채 명상에 잠기기도하며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모란장원 입구로 들어오는 소로에서 벽력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버버리 새끼! 오늘은 왜 여기서 어물쩡거리는 거야!"


".........!"




모란장원의 영식과 영애인 소금호와 소류진이었다. 그들을 보자 벙어리 소년이 부리나케 다가갔다. 다가오는 소년을 본 소금호가 불끈 성을 냈다.




"뭐, 이런 병신이 있어? 어딜 다가와."




다짜고짜로 소금호의 주먹이 벙어리 소년의 가슴에 작렬하였다.




퍽!




소년은 끙! 소리를 내며 다섯 걸음을 뒤로 뒤뚱거리다가 나자빠졌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소류진이 날카롭게 외쳤다.




"오라버니! 왜 또, 그래....?"


"뭔 참견이야? 앞으로 진아(珍牙)는 날 쫓아다니지 마!"




소금호는 말을 툭 뱉어 놓고 또 한 번 벙어리 소년을 신경질적으로 걷어찼다.




"흥! 누가 쫓아다니고 싶어 다니나? 아버지가 말썽 피우는 오빠 곁을 떠나지 말라고 해서 그렇지........!"




남광문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소금호의 등을 바라보며 그녀가 입술을 쑥 내밀었다. 벙어리 소년이 먼지를 툭툭 털고 일어나 손수건을 불쑥 그녀에게 내밀었다.




"......!"




벙어리 소년에게 건네주었던 소류진의 손수건이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벙어리 소년의 얼굴에는 백치같이 미소가 어려 있었다. 소류진은 보조개를 드리운 미소를 흘렸다.




"안줘도 되는데....! 우리 오라버니 때문에.... 미안해."




소년을 바라보는 그녀의 봉옥이 선홍빛으로 물들었다.




".........!"




잠시 머뭇거리던 소년은 후다닥! 짝발을 뛰면서 소로를 달려갔다. 벙어리 소년이 소로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자, 소년을 바라보던 소류진도 모란장원 안으로 사라졌다.




천수현은 감숙성 동남부에 위치하며 동쪽은 관중(關中), 남쪽은 파촉(巴蜀), 북쪽은 농저(弄箸), 서쪽은 정서(定西)와 감남(甘南)으로 연결되어 감숙성, 산서성, 사천성을 가는 길목이다. 따라서 천수현을 왕래하는 세인들도 많다.




모처럼 쾌청한 날씨가 연 이어저서인지 해질녘이 다 되었건만, 천수현 거리를 왕래하는 사람들의 표정과 발걸음도 가벼웠다. 중원 천하는 오대십국시대 이전은 무인을 천시하고 문인이 우대를 받던 시대였다. 그런 까닭인지 글을 가르치는 서원이 많이 늘어났었다.




천수현 동편 거리에는 등선서원(登仙書院)이라는 현판이 걸린 서원이 있다. 등선유사(登仙儒師) 운하려(雲荷黎)라는 선생이 유학을 가르치는 서원이다. 십여 명의 소년 서생들이 모여 앉아 등선유사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열린 창문으로는 폭우가 지나간 초가을의 신선한 바람이 불어 더욱 글공부에 좋은 계절이다. 초목이 짙푸른 색으로 변하고 발과 나비들이 꽃 위에 날고 있는 반면에 폭우로 농사일이 늦은 농부들은 뒤늦게 논과 밭에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문득 운 선생이 창문 밖을 바라보다가 서생들에게 질문을 하였다.




"도연명(陶淵明)의 귀전원거(歸田園居)를 읊어 보아라!"




이어서 서생들의 낭송하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왔다.




"맹하초목장(孟夏草木長) 요옥수부소(繞屋樹扶疎) 중조흔유탁(衆鳥欣有託) 오....오....?"




다음 귀절을 잊은 서생들은 같은 말을 되 내이고 있었다. 이때 창문 밖에서 홀연히 소리가 들렸다.




"오역애오려(吾亦愛吾慮)."


".....?"




운 선생이 소리가 들려온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주위를 유심히 살피는 운선생의 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서생들도 하나, 들씩 창문에 매달려 밖을 내다보았다. 인척은 보이지 않고, 다만 항상 서원 담 밑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벙어리 걸인소년만이 웅크리고 


있었다. 어느 서생의 입에서 비소가 터졌다.




"벙어리 영(影)아 아냐? 크 크큭...! 누가 낭송했지?"




서생들과 운 선생은 의구심을 갖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자 앉아서 지금까지의 구절을 풀이해봐라!"




운선생의 지시에 서생들이 이구동성으로 입을 열었다.




"초여름에 초목이 자라, 집 둘레의 수목이 무성하니, 뭇 새들은.... 뭇 새들은...."




뜻풀이에 막힌 소년들이 같은 말을 되풀이하였다. 잠든 줄 알았던 벙어리 소년은 혼자 말로 중얼거리며 일어섰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 봐야지.... 아버님이 유(酉)시가 지나기 전에 오라하였지...)




서원의 모퉁이를 돌아가는 소년의 입에서 서생들이 막혔던 부분의 뜻풀이가 낭랑하게 들려왔다.




"뭇 새들은 의탁할 숲이 있음을 기뻐하고. 나도 또한 나의 초옥을 사랑하노라."




너무나도 또렷한 벙어리 소년의 목소리였다. 그렇다면 소년은 무슨 연고로 벙어리 노릇하고 있는 것인가? 어스름한 땅거미가 밀려드는 시각에 소년은 마을 어귀를 벗어나고 있었다.




소년이 도착한 곳은 맥적산으로 이르는 야트막한 구릉지의 허름한 흙집들이 이십여 채 모여 있는 타야소(陀也所)라는 걸인 촌. 소년은 타야소의 외곽에 한 채의 다 쓰러져가는 흙집의 거적을 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눈에 보이는 것은 초라한 살림도구. 그러나 보잘 것 없는 흙집의 실내는 의외로 정갈하였다.




"영아냐…?"




입구를 등지고 앉았던 중년남자가 미동도 안은 채 소년에게 묻는다. 




"네...!"




소년은 분명히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였다. 이 어린 소년은 귀머거리도 벙어리도 아니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중년남자와 마주앉은 중년여인이 소년을 마주 바라본다. 중년여인의 잔잔하고 그윽한 눈동자. 사십대이건만 아직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았다. 소년은 묵묵히 탁자 앞에 다가섰다.




".........!"




중후한 기품의 눈동자로 아들을 바라보는 중년남자의 이름은 서진탁(舒進卓)이다. 평생 남의 이목을 피해서 살아왔던 그들, 그들 가족은 한 결 같이 꿰맨 의복을 걸쳤으나 정결하였다.




"어머…! 또 넘어졌구나!"




옥음을 흘리며 아들을 걱정하는 중년 여인. 그녀의 이름은 궁 단향(弓端香).


어머니의 섬섬옥수가 아들의 옷에 뭍은 먼지를 털어낸다. 서진탁의 두 눈동자는 오랜 세월을 인내하고 살아온 신념으로 살아온 그런 눈빛이었다. 아들을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서진탁의 어깨가 미세한 격동을 일으킨다.




"들어가자!.... 무영(霧影)아!"




단호하지만 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아들을 부른 서진탁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섰다.




(오늘인가.......?)




무영은 의구심을 일구며 흠칫 뒤로 물러섰다, 아들은 이내 아버지가 뜻하는 바를 심중 파악했다.




(아! 오늘이구나....)




무영은 소년답지 않게 굵고 짙은 검미를 돋군다. 서진탁이 탁자를 한쪽으로 밀고, 또 탁자 밑의 평석 하나를 밀어냈다.




"두두....둥!"




지하로 내려가는 검은 계단이 보였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 그들이 계단의 마지막 돌을 밟자, 머리위의 평석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시야는 온통 암흑이다. 그러나 그들은 익숙한 걸음으로 컴컴한 통로를 따라갔다. 침묵 속에 통로를 따라 도착한 곳은 서너 평 남짓한 기련산 밑의 어느 지하석실. 




서고(書庫).


칙칙한 어둠을 사르는 유등(油燈). 사방의 벽에는 온통 책자로만 가득 차있다. 서재에 진열되지 못한 책자가 한구석에 수북하게 쌓여 있다. 서진탁은 그의 아들 무영을 위해 책자를 구입하러 중원 천하를 유랑하였다. 사막을 지나 변황(邊荒), 서장(西藏), 묘강(苗疆), 신강(新彊), 막북(漠北), 멀리 고려국 까지도.......




그래서 구입한 고금동서(古今東西) 기서(奇書)도 부지기수(不知其數)였다. 허지만 진법(陣法)을 제외하고 무공에 관한 책자는 없다. 그의 선조는 신분을 감추고, 잡다한 무공도 배우지 말라는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금기사항(禁忌事項)이다. 선조대의 어떤 비운의 결과로 신분이 노출되어 후손이 살아 있어서 무공을 익힌 것을 알려지면 비밀 속에 감추어진 무림 조직들에게 추적을 받아 참살(慘殺)을 면치 못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소년 서무영도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남의 이목을 피해서 살아야 했다. 다른 아이들처럼 떠들고 한창 뛰어 놀아야할 나이인데 벙어리, 귀머거리 노릇 하자니 자연히 책만이 유일한 그의 친구이고 그의 놀이 감이었다. 그는 책벌레일 수밖에 없었다.




원래 서진탁의 삼백여 년 전 선조는 무가(武家)였었다. 무가로서는 마지막 후손인 선조는 강호무림과 혈겁으로 인하여 가문이 파멸되는 천추의 한을 남기게 되었다. 강호무림에 의해서 멸문 당할 수밖에 없는 지경이었고, 설령 후손이 살아 있어도 영원히 중원무림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서진탁의 선조는 피 맺힌 절규를 토하며 중대 결심을 하고 은거하였다. 그리고 절대강자가 되지 않는 한에는 강호에 나오지 말고, 신분을 감추고 은신하여 절대강자를 만들라는 유시와 함께 한권의 의공비급을 남겼다.




그들 조상은 상고시대(上古時代)로부터 내려오는 만박기서(萬博奇書) 윤회역근대승공(輪廻逆筋坮承功)을 얻게 되었다. 십대를 걸쳐서야 이룰 수 있는 절대강자, 불사지체의 인간을 만드는 불가능의 비급이었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에게는 장기간에도 달성하기 힘들기에 휴지에 불과하고 이론으로만 전해지던 미실현의 고금 의술비급이었다.




삼백여년 이상의 장고한 시간과 무모한 인내력을 견디어내야만 겨우 실현의 그 가능성을 엿볼 수 있기에 절전된 비급이었다. 그러나 그 후손들과 가문은 억 겹의 고통을 겪는 오랜 세월을 걸쳐 천기(天氣)를 역행(逆行)하는 전대미문의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이다. 어느 문파도, 가문도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하나의 기인(奇人)을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그 결과로 서무영이라는 절세에 없는 인간의 탄생을 목전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태어난 신동(神童), 서무영(舒霧影)!


그의 암기력은 대단했다. 무영은 태어나면서 임독이맥, 천지현관으로서 용골호형지체이며 지혜가 막힘이 없었다. 그것은 모두 그들 선조 대대로 내려오면서 시전 된 윤회역근대승공(輪廻逆筋坮承功)이라는 기이한 의공 수련 탓이었다. 




그리하여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천기조원(天氣朝元).


천기조원(天氣朝元)의 절대 신체를 갖은 사람은 천하의 모든 사(邪), 마(魔), 독(毒)을 체내에서 정화할 수 있다 전한다. 설사 심장이 파괴되고 뇌가 산산이 부서저도 한 가닥 숨만 붙어 있어도 다시 소생한다는 신비(神秘)의 불사지체(不死之體), 한 번 본 것은 그 어떤 오묘한 섭리(燮理)라 해도 판독하여 암기해 버리는 두뇌(頭腦)와 아울러 무공의 근원인 내공이 역대를 두고 누적되어 쌓이고 일정한 량만큼 상승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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