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天上)의 향기 - 230부
본문
살수란 대가를 받고 사람을 죽이는 직업이다. 대상자를 죽이는데 필요한 정보 외에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고, 관심을 가저셔도 안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죽어야 한다. 일부 살수들 중에 정면승부를 고집하는 놈들도 있다. 하지만 그건 살수로써의 기본자세부터 잘못된 놈들이다.
냉하상은 지금까지 살수로써의 본분에 충실하며 대상자를 죽이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데 왜 혈부광랑에게 집착(執着)하는가? 무엇 때문에 그와의 승부에 집착하는가? 왜 쓸데없는 정면승부에 목숨을 걸단 말인가?
천인살막의 명예.........자존심.........살수에게 그런 것이 무슨 필요가 있단 말인가? 모두가 허울이다. 모두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솔직해지자. 가슴의 울림을 속이러하지 말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냉하상이 고개를 들었다.
아침햇살에 도치의 뒷모습이 희미하게 보인다. 도치는 지금도 등을 돌리고 있다.
“한 번도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보지 못했어요.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감, 의무........어릴 적부터 ‘너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는 말을 들으며 살았고, 한 번도 그 말에 거부하거나 반항하지 않고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했어요. 그게 운명이라고 생각했어요. 여자?..........분명 여자죠. 하지만 한 번도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살막의 막주일 뿐이지 여자가 아니었어요.”
적막만이 흐르던 실내에 냉하상의 조용한 목소리가 울려 펴진다. 도치는 등을 돌린 상태에서 말없이 듣고만 있다. 마치 벽하고 말하는 느낌이다. 싫다. 도치와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서로의 마음을 열고 솔직한 대화를 나누고 싶다. 냉하상이 도치에게 다가온다.
조용한 발자국 소리, 코끝을 자극하는 여인의 육향(肉香), 도치는 피하고 싶다. 도망치고 싶었다. 사르륵~ 냉하상이 도치의 어깨에 손을 얻었다.
“부르르”
손만 얻었을 뿐인데 산만한 덩치가 떨고 있다.
“뭐야! 치우지 못해”
도치가 버럭 소리를 지르지만 냉하상은 눈썹하나 까닥하지 않고 어깨에 얻은 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도치는 부르르 떨기만 할뿐 바위처럼 꿈적도 하지 않는다.
“저를 보세요. 보면서 이야기해요.”
“할 말 있으면 그냥 이야기해.”
“왜요? 겁나요?”
“뭐.......뭐라고?”
“용기가 없으니 피하는 거잖아요.”
“피하긴 누가 피한다고 그래.”
도치는 화를 내며 돌아섰지만 감히 냉하상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다. 냉하상을 보고 있으면 주체 없는 흥분이 밀려오기 때문이다.
“이제 됐지. 말해봐~ 할 말이 뭐야.”
냉하상이 고개를 들어 도치의 얼굴을 바라본다. 냉하상도 큰 편이지만 도치의 턱밖에 차지 않기 때문이다. 도치는 여전히 고개를 돌리고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다. 이대로는 진솔한 대화가 되지 않는다. 손을 들어 도치의 손을 잡으려 했다. 도치가 얼른 손을 뒤로 뺀다.
“뭐하는 거야.”
“힘들어요. 우리 저기 앉아서 이야기하면 안 될까요?”
냉하상이 탁자를 가르치며 말하자 도치는 힐긋 냉하상을 바라보고 성큼성큼 탁자로 가서 자신이 먼저 앉았다. 냉하상은 짧게 한숨을 쉬고 도치의 앞에 앉았다.
“향상 이런 식인가요? 다른 여자한테도 이렇게 차갑나요?”
“뭐?”
“아니에요. 물어본 제가 바보죠?”
“.........”
“말씀드리기 전에 부탁이 있어요.”
“말해!”
“저를 보세요. 제 눈을 보고 말씀해 주세요.”
“바라는 것도 많다. 듣고 있으니 그냥 말해.”
“지금.............제가............얼마나 힘들게 부탁하는지 아세요. 저도 여자예요. 부끄러운 것도 알고 창피한 것도 알아요. 그런데도 당신에게 부탁하고 있어요. 알몸이나 다름없는 이런 차림새를 하고 있으면서도 부탁하는 거란 말이에요.”
작은 목소리로 시작했던 말이 끝으로 가며 높아진다. 스스로 솔직해지기로 했기에 굳이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려 하지 않는다. 도치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리다가 화들짝 놀랐다. 날카롭기만 하던 눈방울에 눈물이 글썽거린다.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다. 여자의 눈물에 약한 것이 남자라고 했던가? 냉하상처럼 강한 여인의 눈물은 바위처럼 단단한 도치의 마음에도 엄청난 파문(波文)을 일으켰다.
“왜 울어.”
“아파요. 너무 아파서 미칠 것만 같아요.”
냉하상이 울먹이며 말하자 도치가 벌떡 일어났다.
“어디.........어디가 아파.”
“앉으세요. 앉아서 끝까지 들어주세요.”
냉하상이 울먹이며 말하자 도치는 엉덩이를 붙이고 불안한 얼굴로 위아래로 살펴본다. 아직 몸이 아프다는 것으로 알아들은 모양이다.
“왜 이렇게 어려워요. 왜 이렇게 힘들어요. 그냥 솔직하게..........있는 그대로 보여주시면 안돼요. 저도 솔직해 질게요. 자존심 따위는 던져버리고 솔직하게 말할게요. 당신도 솔직하게 말씀해 주시면 안돼요?”
“알았어. 알았으니까 울지 말고 말해.”
도치의 말에 냉하상은 손매로 눈물을 훔치고 격한 감정을 진정시켰다.
“왜 저에게 잘해 주시죠? 왜 저에게 친절을 베푸시는 거죠?”
냉하상이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질문하자 도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솔직해지자고 했다. 솔직하게 말해 달라고 했다. 냉하상의 간절한 눈빛을 보고 차마 거짓을 말할 수는 없다.
“그냥! 해주고 싶어서..........”
“............”
“그게 다야.”
“더 없어요. 저에게 원하시는 것은 없어요?”
“없어!”
도치의 짧은 대답에 이번에는 냉하상이 말없이 도치를 바라본다. 질문이 잘못된 모양이다. 아직까지 자존심이라는 껍질을 벗어 던지지 못한 모양이다. 다른 사람의 진실을 알고 싶다면 자신부터 진실해져야 한다. 상대방에게 먼저 진실을 강요하기 보다는 자신부터 진실을 말해야 한다.
“도(刀)를 수련한 이유가 뭐죠? 도로 저를 상대한 이유가 뭐죠? 대답하실 필요 없어요.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 아니에요!”
“............”
“대결이 시작되기 전에 제가 했던 말 기억하세요. 제가 패하면 죽겠다고 했어요. 당신의 종이라도 되겠다고 했어요. 당신은 제가 죽기를 바라시나요?”
“..............”
“............”
“이번 질문은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이냐?”
“예! 대답해 주세요.”
“누가 죽으라고 했어? 누가 종이 되라고 했어?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너희 패거리한테나 돌아가!”
“제가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하실 거죠? 제가 끝까지 죽겠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도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지면 냉하상을 노려본다.
“할 말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했는데, 누구 때문에 일사님과 무경님이 그 고생을 했는데...........”
“알아요. 알기에 물어보는 거예요. 도치님과 마수마랑님은 평생 갚지 못할 은혜를 베풀어주셨어요.”
“알면, 죽겠다는 생각은 집어치우고 악착같이 살아. 그게 은혜를 갚는 길이야.”
냉하상은 입술을 깨물고 도치를 바라본다. 답답해서 미칠 것 같다. 말을 돌리면 통하지 않는다. 그냥 속에 있는 말을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저요. 당신을 좋아해요.”
“뭐?”
탁탁하게 표정이 멍하게 변하며 냉하상을 바라본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당신을 좋아한다고 했어요.”
처음에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다. 분명히 자신을 좋아한다고 했다. 실내에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정적만이 감돈다. 믿을 수 없다. 거짓말이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미쳤군. 세상에 좋아할 놈이 없어서 나 같은 놈을 좋아해.”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이니까 좋은 거예요. 혈부광랑 당신이니까 좋아하는 거라고요?”
“아직 재정신이 아니구나............더 쉬어야겠다.”
도치가 고개를 흔들며 일어나려 했다. 더 들을 가치도 없다는 태도다.
“앉아요. 지금 일어나면 죽어버릴 거예요.”
“기가 막혀........지금 그걸 협박이라고 하는 거냐?”
“거짓말 같아요. 미친년이라고 하셨죠. 그래요! 미쳤어요. 미치지 않았으며 이런 부끄러운 차림으로 당신 앞에 있지도 않았을 거고, 당신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못하겠죠. 미쳤어요. 당신한테 미쳤어요. 그러니까 당신이 이대로 일어나면.........죽어버릴 지도 몰라요.”
“쉬어. 쉬다보면 생각이 틀려질 거야.”
“앉으라고 했어요. 정말 제가 죽기를 바라시나요.”
냉하상이 소리를 지르자 도치는 심각한 표정으로 냉하상을 바라본다. 지금까지 본 냉하상은 한번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절대 허튼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또 원하는 거라도 있니? 싸우자고 해서 싸워줬고, 부상당한 너를 치료해 줬어.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다해줬잖아. 네가 너한테 바라는 거라도 있니. 모두 잊어버리고 네가 맡긴 이상한 검이나 찾아가서 잘 먹고 잘 살라고 했잖아. 그러면 되잖아. 더 이상 뭘 바라는 거야.”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그랬어요. 그럼 이렇게 힘들어하지도 않잖아요.”
“죽어 가는데..........그냥 두면 죽을 것이 뻔한데 어떻게 그냥 두니.”
“제가 뭔데........제가 뭔데 당신이 신경 써요. 제가 죽든 말든 당신하고 아무 상관도 없잖아요?”
도치는 입술을 깨물고 부르르 떨다가 벌떡 일어났다. 생각 같아서는 뺨이라도 한대 후려갈기고 싶다. 하지만 이제 막 부상에서 회복한 사람을 때릴 수도 없지 않는가?
“무슨 말을 듣고 싶어. 무슨 말을 듣고 싶어서 이렇게 몰아붙이는 거야.”
“솔직하게 말씀해주세요.”
“좋아! 말해봐! 솔직하게 대답해 줄게”
“저는........당신을 좋아해요. 당신은 저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몰라!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어.”
“싫다는 말씀은 아니군요. 제가 당신과 함께하고 싶다면 어떻게 하실 거죠?”
“무슨 말이야.”
“당신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어요.”
“지금 청혼하는 거냐?”
“예!”
“미쳤군. 제정신이 아니야.”
“저도 미쳤다고 생각해요. 단 한 번도 제가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내 인생에 남자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당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셨어요. 여자라는 사실을 느끼게 해주셨어요.”
“세상에 남자가 그렇게 없어. 좋아할 사람을 좋아해야지. 내가 누굴 좋아할 사람으로 보여? 누군가 사랑할 사람으로 보여?”
“아니요. 당신처럼 매정하고 거친 남자가 누굴 사랑하겠어요.”
“잘 아는 구나? 알면서 그런........”
“잠깐만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세상에 예외라는 것은 있어요. 세상 모든 여자가 당신을 싫어해도 저는 당신을 좋아해요. 왜냐면.........당신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저에게 정을 주셨기 때문이에요.”
도치는 할 말이 잃고 말았다. 냉하상도 이젠 말이 없다. 도치는 한동안 말없이 냉하상을 바라보다가 차갑게 돌아섰다.
“생각할 시간을 줘. 도망 안가니까 죽겠다는 헛소리를 하지 말고 얌전하게 기다려.”
도치가 밖으로 나갔다. 냉하상은 도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침상으로 갔다. 몸은 날아갈 듯이 상쾌하지만 마음이 피곤하다. 아무 생각 없이 잠이라도 자고 싶다. 침상에 누웠다. 잠이 오질 않는다.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실타래처럼 엉켜버린다.
도치는 풍운의 집으로 갔다.
“야! 얼굴이 왜 그 모양이냐.”
“저한테 말씀하시는 겁니까?”
“너 말고 거기 누가 또 있어?”
도치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 표정이 그래.”
“제 표정이 이상해요.”
“마치 귀신한테 홀린 표정이다.”
“일사님.........잠깐 앉아보세요. 물어볼 말이 있어요.”
풍운이 도치의 앞에 앉았다.
“냉하상이 저를 좋아하네요.......이걸 어떻게 받아들어야 합니까?”
도치가 한동안 망설이가 입을 열었다.
“축하할 일이네. 너도 냉소저 좋아하잖아.”
“세상에 좋아할 놈이 없어서 저 같은 놈을 좋아합니까?”
“네가 어때서?”
“아시잖아요. 단순무식에 지랄 같은 놈 아닙니까?”
“겉으로 보면 그렇지.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도치는 정(情)도 많고 세상 누구보다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나이 중에 사나이야. 냉소저도 그걸 알아본 것이 아닐까?”
“모르겠어요. 제가 냉하상이라면 절대 나 같은 놈은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왜?..........왜 그렇게 생각해.”
“볼게 뭐가 있습니까? 일사님처럼 잘생기기를 했어요. 능력이 좋아요. 그렇다고 여자한테 잘해주길 합니까? 뭐하나 거질 게 없지 않습니까?”
도치와 풍운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무경이 슬며시 풍운의 겉에 앉았다.
“그건 도치님이 잘못생각하신 겁니다. 사랑은 조건이 없어요. 머리로 이해하려하지 마시고 가슴으로 이해해 보세요.”
“가슴이요? 무슨 말이지 모르겠네요.”
“도치님도 냉소저 좋아하시죠. 냉소저의 어떤 점을 좋아하세요.”
“예? 글쎄요. 그냥..........그냥 좋아요.”
“특별히 이게 좋다고 말씀하시기 힘들죠. 마찬가지요. 냉소저도 도치님이 좋은 겁니다.”
“휴~ 두 분이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리죠. 저도 냉하상이 좋아요. 머리에 털 나고 처음으로 정(情)주고 싶은 여자에요. 그래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저에게 오면 불행해져요. 저보다 더 잘난 놈들도 많고, 저보다 행복하게 해줄 놈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저를 좋아합니까?”
“도치님이 잘해주시면 되잖아요.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게 해주시면 되잖아요.”
“무경님도 아시잖아요. 배화교가 쳐들어오면 당장이라도 싸워야 합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놈인데 누굴 사랑하고, 누굴 행복하게 해준단 말입니까?”
“허참! 듣다보니 기분 나쁘네. 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뭐야?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놈들이란 말이야.”
“맞아요. 저를 비롯한 다른 분들을 따르는 여자들은 뭐죠. 저희들은 그걸 몰라서 사랑하나요. 사랑이란 조건이 없다고 했잖아요.”
“죄송합니다. 미쳐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좋은 남자 많잖아요. 왜 저 같은 놈을 좋아해요.”
“여자는 사랑할 때 많은 걸 따지지 않아요. 한 남자만 바라보죠. 냉소저가 좋아하는 사람은 도치님이에요? 세상에 남자들은 많지만 냉소저가 좋아하는 남자는 도치님 하나란 말입니다.”
“무경님........같은 여자 입장으로 제가 어떻게 해주면 좋아할까요.”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감추지 말고, 지금 우리에게 하셨던 말씀을 모두 하세요. 그럼 냉소저도 거기에 대한 답을 주실 거예요.”
“휴~ 모르겠네요. 말씀 고마웠습니다. 냉하상 옷 좀 주세요. 그만 가봐야죠.”
무경은 빨아놓은 냉하상의 옷을 주었다. 도치는 냉하상의 옷을 받아 자신의 집으로 갔다.
“어떻게 될 것 같아.”
“도치님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거예요.”
“내가 보기에도 그래. 냉소저가 먼저 고백했다면 끝난 이야기야. 도치가 임자 만났어.”
“운랑은 어찌 고소하다는 표정이네요?”
“남들이 들으면 내가 도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드리겠다.”
“그런 뜻은 아니고 ‘너도 한번 당해보니까 알겠지.’ 뭐. 이런 표정이라는 거죠.”
“하하하~ 그런가?”
풍운은 무경이 속마음을 이야기하자 웃어버리고 만다.
도치는 자신의 집 앞을 서성거리고 있던 곽지향과 마주쳤다. 곽지향은 작은 상자를 들고 있었다.
“마침 잘 됐네요. 안 그래도 도치님을 만나려 했어요.”
“저에게 볼일이라도 있으세요.”
곽지향은 도치의 이곳저곳을 살펴보며 미간(眉間)을 찌푸린다. 얼굴은 푸석푸석하고 상처부위를 싸면 천의 색이 바래있었기 때문이다.
“하루에 한 번씩 약을 바르고 푹 쉬어야 한다고 했죠. 그런데 이게 뭐죠. 약은 언제 바른 겁니까? 잠은 제대로 주무신 겁니까?”
곽지향의 말에 도치는 말을 못한다. 그동안 냉하상을 간호하느라 정작 자신의 상처는 돌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간단한 상처라도 제때 치료하지 않으면 덧나요. 그리고 도치님처럼 단련된 분이니까 간단한 상처라고 말씀드렸지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죽었어요. 그냥 두면 괜찮아지는 대수롭지 않는 상처가 아니라는 말이에요.”
곽지향이 큰소리로 말하자 도치는 조용하라고 손짓하며 제 빨리 대답한다.
“알았어요. 당장 말씀대로 할게요. 그럼 됐죠?”
곽지향은 통나무집과 도치를 번갈아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평소의 도치가 아니다. 평소의 도치라면 은근슬쩍 농담으로 받아 넘기거나 호탕하게 웃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안에 있는 냉하상이 들을까 겁난다는 듯이 제 빨리 자신의 입을 막으려 한다.
“도치님이 안에 있는 분께 마음에 있다고 들었어요. 모르는 사람이 봐도 도치님께서 삼일동안 주무시지도 않고 간호하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겠죠?”
“다음에 말씀하시면 안 될까요? 곧 있으면 떠날 사람입니다. 그때 말씀하시죠.”
곽지향은 냉하상을 미워하기 때문에 결코 좋은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문 앞이라 여기서 떠들면 안에까지 들릴 것이다. 도치는 냉하상을 들을까 걱정되는 모양이다.
“지금 할게요. 지금 하지 않으면 후회할거 같아요. 잠마동을 출관해서 계속 같이 지냈으니 여기 있는 여자들 중에 제가 도치님과 가장 오래 만났을 거예요.”
“............”
“결론만 말할게요. 도치님 착하고 좋은 분이세요. 제가 한때 도치님을 마음을 두고 있었다면 믿으시겠어요.”
“예! 설마..........?”
“설마라고 생각하세요. 아니에요. 정말 좋아했어요. 그런데 왜 제가 포기했는지 아세요. 도치님의 마음속에 여자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에요. 도치님은 여자보다는 친구와 싸움을 더 좋아했죠. 제가 끼어들 틈이 없었죠. 여자는 멋있고 착한 사람보다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사랑하기 마련이에요. 그래서 도치님을 포기했어요.”
“........”
“안에 계신 분이 어떤 분인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도치님께서 마음에 두고 계실정도라면 대단한 분을 거예요.”
“...........”
“저 때문에 눈치 보실 필요 없어요. 저도 이제 미워하지 않을게요. 도치님께서 사랑하시는 분을 제가 어떻게 미워하겠어요. 많이 사랑해 주세요. 두 분이 잘되길 빌어드릴 게요.”
곽지향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상자를 도치에게 내밀었다.
“받으세요.”
“이, 이게 뭐죠?”
“약이에요. 저번에 드린 약은 버리고 이약으로 바르세요. 이만 갈게요.”
도치가 상자를 받자 곽지향이 돌아선다. 도치가 곽지향을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곽지향이 돌아선다.
“깜박 잃은 말이 있어요. 도치님 몸도 챙겨가면서 간호하셔요. 사랑도 건강해야 하는 겁니다. 제 말 명심하세요.”
곽지향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고 도치는 복잡한 눈길로 곽지향을 바라본다.
침상에서 뒤척이고 있던 냉하상은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은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자신의 기억이 맞는다면 혈지독호 곽지향일 것이다. 다음으로 도치의 낯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애써 귀 기울이지 않아도 곽지향이 이야기가 가슴속에 파고든다. 곽지향의 말대로라면 도치는 삼일동안 한숨도 자지 않고, 심지어 자신의 몸도 돌보지 않고 자신을 간호했다. 자신은 도치를 좋아하는 것일까? 스스로의 감정에 빠져 좋아하는 이가 아파하는 것도 모르고 있었으면서 좋아한다고 말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자신이 너무 한심하다. 조금만 유심히 살펴보았다면 도치가 아프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조그만 생각했다면 자신과의 대결에서 도치도 무사하지만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십이사가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배화교에 맞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제갈무경은 성심(誠心)을 다해 자신을 치료해 주었고, 마수마랑은 무림인들이 꿈에도 그리는 임독양맥과 생사혈관까지 타동시켜 주었다. 자신을 미워하던 곽지향도 자신과 도치를 축복해주었다. 무언가를 바라는 것도 없다. 단지 같은 십이사인 도치가 좋아하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에게 잘해 주는 것이다.
곽지향이 돌아가는 모양이다. 곽지향의 마지막 말이 마음을 할퀴고 지나간다. 좋아한다는 년도 가만있는데 곽지향이 도치를 챙겨준다. 문이 열리며 도치가 들어왔다.
냉하상이 고개를 숙이고 침상에 앉아있다. 혹시 곽지향의 이야기를 들은 것은 아닐까? 도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냉하상에게 다가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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