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天上)의 향기 - 252부
본문
흑룡강성을 벗어난 빙궁의 행렬이 길림성을 지나 요녕성(遼寧省)에 이르렀다. 요녕성(遼寧省)은 중원의 변방에 위치한 성으로 몇몇 군소문파가 있기는 하지만 칠대세가의 하나인 모용세가(慕容世家)와 장백파가 장악하고 있는 곳이다. 궁주가 타고 있는 화려한 마차로 장로들과 사군자(四君子) 중 국(菊)이 들어왔다. 궁주의 측근에서 대소사를 처리하는 사군자(四君子)중 매(梅)와 란(蘭)은 천상루를 지휘하고 있고, 죽(竹-궁아라)는 천려빙백강시가 되어 국(菊)만이 설초희를 보필하고 있다. 본래 규율대로라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죽(竹)을 대신하여 새로운 사군자를 뽑아야 했지만 설초희는 죽(竹)이 엄연히 살아 있기에 새로운 사군자를 뽑지 않은 모양이다.
“모두 자리에 앉으세요.”
마차에 있는 기다란 탁자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가 준비되어 있다. 장로들과 국(菊)이 자리에 앉자 설초희도 자리에 앉았다.
“드디어 중원에 들어왔어요.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이곳 오녕성은 몇 개의 군소문파가 있긴 하지만 모용세가(慕容世家)와 장백파가 장악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겁니다. 쉽게 말해 두 개문파만 장악하면 요녕성 전체를 장악할 수 있다는 말이죠?”
“설마 모용세가와 장백파를 공격하자는 말씀은 아니시겠죠?”
“요란을 떨 필요는 없어요. 그냥 조용히 장악해야죠!”
“장악? 궁주님! 궁주님께서는 최대한 빨리 중원으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물론 여기 요녕성도 중원이긴 하지만 한쪽 끝에 위치한 별 볼일 없는 변방입니다. 괜히 시간만 허비하는 꼴이 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요녕성은 계륵(鷄肋)과 같은 존재에요. 정복해야 별로 먹을 것은 없죠. 하지만 본궁입장에서는 그 어느 지역보다 중요한 지역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중원정복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준비를 철저하게 했지만 본궁에서 지원받을 것도 많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본궁과 중원을 연결하는 교통로의 확보는 무엇보다 중요하며 요녕성은 본궁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라고 할 수 있어요.”
“음~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럼 모용세가(慕容世家)와 장백파를 섬멸(殲滅)하고 요녕성을 우리가 차지하자는 말씀인가요?”
“그건 아니라고 말씀드렸어요. 아직 배화교도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하지 않았는데 우리가 먼저 시작해서 이목(耳目)을 끌 필요는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모용세가(慕容世家)와 장백파에는 배화교의 간세들도 있지만 본궁의 간세들도 많다는 것을 염두(念頭)에 두시고 모용세가와 장백파를 장악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을 생각해 보세요.”
설초희의 질문에 장로들과 국(菊)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본다. 선뜩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저기~ 모용세가(慕容世家) 가주인 모용창과 소가주인 모용천악이 지독한 호색한들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미인계(美人計)로 이놈들을 휘어잡을 수만 있다면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모용세가를 장악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매(梅)장로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설초희가 빙그레 웃었다.
“핵심은 집어냈어요. 그럼 구체적인 방법이 말씀해 보세요?”
“미모(美貌)와 방중술에 뛰어나고, 투철한 충성심으로 무장한 제자들을 이용하여 모용창과 모용천악을 손아귀에 넣으면 되지 않습니까?”
“장로님! 호색한치고 한 여자에게만 정(情)을 주는 놈 봤습니까? 아무리 빼어난 미모(美貌)와 방중술(房中術)을 가지고 있어도 금방실증내고 다른 여자를 찾는 것이 호색한들의 특징입니다. 미인계(美人計)는 장백파 놈들에게나 써먹으면 딱 좋아요.”
“그럼 궁주님께 좋은 방안이라도 있습니까?”
“몇 가지 계략을 복합적으로 사용하면 가능해요. 먼저 장로님 말씀대로 간세들을 이용해 미모가 빼어나고 방중술이 뛰어난 제자들을 모용세가에 잠입시킵니다. 호색한 놈들이 먹잇감(?)을 가만두지 않겠죠. 제자들의 실력이라면 잠시간이나마 모용창과 모용천악을 휘어잡을 수 있을 겁니다. 이때가 중요합니다.”
“.............”
“놈들의 사랑이 집중될 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두 놈들의 부인과 첩들을 포섭(包攝)합니다. 간세들이 많으니 약점이 있는 여자는 약점을 잡고, 슬픔에 잠겨 있는 여자는 따뜻하게 감싸주면 포섭하는데 어렵지 않을 겁니다.”
“부인과 첩년들을 포섭한다하여 무슨 효과가 있습니까?”
“한두 명이면 효과가 없겠죠. 하지만 놈들은 호색한답게 수십 명의 부인과 첩들이 있으며, 그년들에게 달라붙어 어떻게 한번 출세해 볼까하는 기생충들도 많습니다. 아마 모용세가 전력(戰力)의 절반이상은 그년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설마~ 모용세가가 그렇게까지 섞었겠습니까?”
“지금까지의 모용세가를 보면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을 겁니다. 다시 설명하죠. 일단 모용창과 모용천악을 미인계로 홀리고 놈들의 사랑이 집중될 때, 부인과 첩들을 포섭합니다. 다음으로 각 여자들 처소에 있는 시녀들을 본궁의 제자들로 바꿔치기 합니다. 이정도 진행되면 모용세가는 본궁의 손에 들어온 것이나 진배없어요. 물론 만성독약까지 사용하면 금상첨화(錦上添花)겠죠.”
설초희의 설명에 장로들과 매(梅)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설초희는 무공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세상에 다시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미모(美貌)와 지혜(智慧)까지 겸비한 재녀(才女)였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장백파에 대해서 말씀드리죠. 장백파 문주는 칠십이 넘은 노인이라 미인계를 쓰긴 힘들어요. 하지만 문주의 아들과 딸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져요.”
“아들은 알겠는데........딸이요? 같은 여자에게 미인계를 쓴단 말입니까?”
“이름 고불영, 나이 24세, 활달한 성격에 사냥과 활쏘기를 좋아함. 특이한 것은 단 한 번에 남자를 만나지 않았으며, 그녀의 처소는 금남(禁男)의 구역으로 알려져 있음. 간세들의 보고서를 읽고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여자 나이 24살이면 시집가서 애까지 나를 나이에요. 그런데도 남자에게 관심은커녕 처소에 남자그림자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해요.”
“남자가 싫은 모양이죠?”
“또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을 말씀드리죠. 그녀 처소의 시녀들이 주기적으로 바뀌는데 유독 한 시녀만은 몇 년째 바뀌지 않고 있어요. 더 웃기는 것은 그녀가 고불영과 한방을 쓴다는 겁니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설초희의 질문에 모두들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고불영은 여자를 사랑합니다. 다시 말해 동성애를 즐기는 여자라는 말입니다.”
“세상에? 그게 말이 됩니까?”
설초희의 말에 장로들과 매(梅)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이다. 여자가 같은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하지만 역사를 보면 왕족이나 귀족들 중에 동성애에 아닐까 의심되는 내용을 심심치 않게 발견하게 된다. 동성애는 밖으로 드려나지만 않았을 뿐 예전부터 공공연한 비밀의 하나였던 것이다.
“세상에는 보통사람이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종종 발생합니다. 이번 경우도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어요. 고불영은 몸은 여자지만 자신을 남자라고 생각하는 여자일 겁니다.”
“음~ 궁주님의 말씀이니 믿어야겠죠. 그런데 그녀에게 미인계를 쓰긴 어렵지 않을까요? 자기 스스로 떳떳하지 않으니 내놓고 여자를 밝히지 않을 거 아닙니까?”
“간세들을 이용해야죠. 성공만 한다면 고불영은 절대 우리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어요. 장로님 말씀대로 스스로 밝히고 싶지 않은 비밀이니까요? 자~ 설명은 이걸로 충분할 겁니다. 장백파 문주의 아들과 딸을 미인계로 포섭하세요. 물론 문주까지 포섭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죠. 국(菊) 명령을 받으라.”
설초희의 마지막 말에 국(菊)이 설초희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명(下命)하세요.”
“미모와 방중술이 뛰어난 오백제자를 선별하여 모용세가와 장백파를 장악하라.”
“명을 받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모용세가와 장백파 놈들을 섬멸(殲滅)하라는 말이 아니다. 아무도 모르게 장악하라는 말이다. 물론 배화교의 간세들을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소녀에게 맡겨 주세요.”
국(菊)은 그길로 본진 전사(戰士)들 중에 400명을 선발하고 악양에 있는 천상루에 전서구를 날려 미모가 출중하고 방중술이 뛰어난 100명의 제자들을 요녕성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아무래도 본진보다는 천상루에 미모와 방중술이 뛰어난 제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설초희는 국(菊)과 사백제자를 남기고 천상루가 있는 악양으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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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깔린 공동산 하늘을 선회하던 전서구가 건물로 날아들었다. 책상에 앉아 책을 읽던 도사는 전서구를 발견하자 재빠른 동작으로 서찰을 꺼내고 전서구를 다시 날려 보냈다. 도사는 주위를 살펴보고 서찰을 펼쳤다.
“본진 공동산 포위완료! 공동파의 움직임에 대해 소상하게 보고하라. 본진공격 시에 가슴에 검은 천을 달고 내부를 혼란시켜라.”
서찰의 내용은 무척이나 간단했다. 도사는 촛불에 서찰을 태워버리고 의복을 꺼내더니 가슴에 검은 천을 달았다. 전서구는 한명에게만 전달된 것이 아니었다. 최소한 10군대 이상 건물로 전서구가 날아들었다.
공동산 전체에 비상종이 울리니 많은 건물에서 무장을 완료한 무사들이 연무장으로 모여들고 각 당의 당주들과 원주들이 회의실로 모여들었다. 대회의실에 장문인인 광인자가 상석에 앉아있고, 뒤늦게 도착한 책임자들이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모두 앉으세요.”
“문주님!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공동산 전체를 배화교 놈들이 포위했습니다.”
“예?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배화교 놈들이 포위해요. 어떻게 이런 일이?”
“며칠 전부터 배화교 놈들이 감숙성일대로 쳐들어 왔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사실이었던 모양입니다.”
“아니 그런 소문이 있었다면 당연히 대비를 했어야죠?”
“설마 놈들이 우릴 공격할 줄은 몰랐습니다.”
장문인의 말에 나이 많은 원로들은 50년 전의 악몽이 떠올랐다. 50년 전에 배화교가 앞장선 새외연합군은 곤륜파를 비롯한 청해성(淸海城)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사천까지 밀고 들어왔다. 당시 곤륜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이미파와 청성파도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거나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수많은 제자들이 때죽음을 당했다. 그런데 50년이 지난 지금 배화교가 다시 쳐들어 왔으며 하필이면 가장 먼저 자신들이 희생양이 될 위기에 봉착했다.
“문주님! 빨리 지원을 요청해야 합니다. 우리들 힘만으로는 놈들을 막을 수 없어요.”
“알고 있어요. 그래서 구파일방과 칠대세가에 지원을 요청하는 전서구를 보내라고 했습니다.”
“구파일방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문파에도 지원을 요청해야 합니다.”
“주변에 우릴 지원할만한 문파가 어디 있습니까?”
장문인 말대로 공동산 주변에 지원을 요청할만한 문파는 없다. 이름도 쟁쟁한 공동파가 40여년 넘게 주변일대를 장악하고 있는데 누가 감히 공동산 주위에 터를 잡고 문파를 세우겠는가? 막말로 40년 동안 잘 먹고 잘 살았다. 황제보다 공동이란 이름이 더 무서울 만큼 떵떵거리며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르며 살았다. 하지만 위기에 쳐한 지금, 그동안의 행복이 독(毒)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주변에서는 없다는 말이군요. 큰일입니다. 가까운 청성이나 아미에서 지원을 온다고 해도 최소한 열흘이상은 걸립니다. 과연 우리가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군요?”
“꽝아앙~”
“지금 무슨 소리하는 겁니까. 우리 공동파가 하찮은 배화교 놈들 따위를 물리치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혈기왕성한 젊은 당주 한명이 탁자를 치며 일어났다.
“저놈은 배화교 놈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는군. 50년 전에 곤륜파가 힘이 없어서 당했냐? 당시의 곤륜은 지금 우리보다 더 막강한 전력(戰力)을 구축하고 있었어. 그런데도 쑥대밭이 되었다. 뭘 알고나 말해야지.”
나이 많은 원주의 핀잔에도 젊은 당주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문주님! 우리 공동이 어떤 문파입니까? 이름도 당당한 구파일방의 하나에요. 그런데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겁부터 먹는 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앉으세요. 우리 현실을 내정하게 분석해야 합니다. 먼저 분문의 주력 중에 복마이십사검수(伏魔二十四劍手)와 복마검대(伏魔劍隊)는 무림맹에 있기 때문에 현재는 탕마삼십팔수(蕩魔三十八手)와 탕마검대(蕩魔劍隊)만 남아있습니다.”
“복마검대가 빠졌지만 탕마검대와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3천의 제자들이 있습니다. 충분히 배화교 놈들을 상대할 수 있습니다.”
“당주의 말대로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현실적으로 우리 힘만으로 배화교를 무찌르긴 힘들어요. 거기에 놈들의 숫자가 만만치 않아요. 대충 살펴보아도 수천 명이 넘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도망이라도 치자는 말씀입니까?”
“무조건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텨야죠. 부녀자와 노약자를 대피시키고 제자들에게 철저하게 수비하라고 하세요. 우리가 문을 걸어 잠그고 수비만 한다면 놈들도 섣불리 공격하지 못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제자들에게 전하겠습니다.”
“잠시만.........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그냥 수비만 하라는 식의 명령은 곤란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대처하라는 구체적인 작전계획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 잘 하셨어요. 원주님께서 세워놓으신 좋은 작전이라도 있습니까?”
“방어선을 삼중으로 구성하는 겁니다. 일차방어선이 무너지면 이차방어선으로 후퇴하고, 이차방어선이 무너지면 삼차방어선으로 후퇴하는 식입니다.”
“삼중방어선? 말씀해보세요. 어떻게 하자는 말씀이죠?”
“놈들이 어디로 쳐들어올지 모르니 일차방어선은 정문을 중심으로 궁수들과 궁수들을 보호할 검수(劍手)들로 구성하여 분문으로 침입하는 적(敵)을 섬멸(殲滅)합니다. 이차방어선은 연무장을 중심으로 탕마삼십팔수(蕩魔三十八手)로 이루어진 삼절검진(三絶劍陳)과 복마검대(伏魔劍隊)로 이루어진 탕마검진(蕩魔劍陳)으로 구성하고, 일차방어선에서 후퇴한 무사들은 탕마검진을 지원합니다. 삼차방어선은 분문의 주요건물들이 있는 내당을 중심을 구성하는데 이곳까지 무너지면 전멸(全滅)이라는 각오로 싸울 수 있는 모든 사람들로 구성합니다. 배화교 놈들은 분문의 구조에 대해 잘 모르니 건물 곳곳에 숨어서 치고 빠지는 식으로 싸우면 될 겁니다. 그리고 내당 뒤편에 있는 뇌옥과 창고에 부녀자와 노약자를 대피시켜야 합니다. 놈들도 사람인데 설마 저항능력도 없는 부녀자와 노약자까지 공격하진 않겠죠.”
“삼차방어선까지 무너지면 끝나는 겁니까?”
“이차방어선이 무너지기 전에 팔원(八院)에 지원을 요청해야 합니다.”
“파, 팔원(八院)? 그분들까지 나서야 한다는 말입니까?”
“본문이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험에 쳐했는데 무엇을 따지겠습니까? 본문을 지킬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해야 합니다.”
팔원(八院)은 현역에서 은퇴하고 진리(眞理)를 깨달아 우화등선(羽化登仙)을 꿈꾸는 원로들이 수도하는 곳이다.
“그래! 팔원(八院)의 원로님들이라면 많은 힘이 될 겁니다. 그렇게 하시죠.”
“예전에도 전례(前例)이 있던 일이나 그분들도 기꺼이 나서실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공동산전체가 술렁거리며 부녀자들은 아이들과 노인들을 모시고 내당 뒤에 있는 창고와 뇌옥으로 대피하고 무사들은 창고에 쌓여있던 무기들을 꺼낸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회의가 끝나자마자 구파일방과 칠대세가로 날아가는 전서구들과 섞여 혁린강이 있는 군막으로 날아가는 전서구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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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산 하늘에 수많은 전서구들이 날아올랐다. 구파일방과 칠대세가를 비롯한 연락가능한 모든 곳에 지원을 요청하는 전서구들일 것이다. 배화교도 그걸 알고 있으나 애써 잡으려하지 않았다. 자신들을 향해 날아오는 전서구들도 있었기 때문일까? 혁린강은 전서구편에 날아온 서찰들을 정리하여 작전계획 세웠다. 서찰들에는 공동파에 숨어 있던 간세들이 기록한 공동파의 대응과 방어선의 병력구성 및 건물배치들이 소상하게 적혀 있었다. 한쪽은 상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한쪽은 상대에 대해 손바닥처럼 알고 있다. 자파(自派)에 배화교의 간세들이 숨어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 공동파 비극(悲劇)의 시작이었다. 혁린강은 공동파의 방어선을 공략할 병력구성을 완성했다.
혁린강이 머물고 있는 군막(軍幕)으로 난주에서 달려온 일마(一魔)일행이 도착했다. 혁린강은 일마(一魔)와 삼마(三魔)에게 인사하고 뒤에 있는 두 명의 여인을 살펴보았다. 전투력이 가장 떨어지는 십살(十殺)과 십일살(十一殺)이다. 혁린강은 재빨리 일마(一魔)의 손을 잡고 자리에 앉혔다.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힘드신데 우선 자리에 앉으세요.”
일마(一魔)는 혁린강의 따뜻한 말에 왈칵하는 감정의 덩어리가 올라왔다. 패배(敗北)의 책임을 물어 무섭게 문책(問責)할 줄 알았다. 최소한 십이살(十二殺)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라도 물을 줄 알았다. 그런데 혁린강은 온화한 얼굴로 반갑게 인사한다. 일마(一魔) 복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저를 벌해주세요.”
혁린강은 얼른 일마(一魔) 일으켜 세웠다.
“무슨 말씀이세요. 결과가 좋지 않지만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럼 된 겁니다. 우리 겉을 떠난 이마(二魔)님을 가슴에 묻고 다시 일어나야죠. 그게 우리 겉을 떠나 이마(二魔)에 대한 도리입니다. 한번 패배로 의기(意氣-기세가 좋은 적극적인 마음)까지 꺾어야 되겠습니까?”
일마(一魔)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 이마(二魔)의 죽음을 외면하고 후퇴를 명령한 혁린강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다. 혁린강이 인정도 눈물도 없는 놈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불만 따위는 눈 녹듯 사라지고 혁린강을 오해하고 원망했던 자신이 얼마나 옹졸했던가를 반성하게 된다. 그리고 혁린강에 대한 충성심이 가슴 밑바닥에서 올라왔다.
“앉으세요. 조금 있으면 사람들이 들어올 겁니다.”
일마(一魔)와 삼마(三魔)가 감정을 정리하고 자리에 앉자 얼마 지니지 않아 벽안환요를 비롯한 각부대의 대장들이 들어왔다. 환요일행이 일마(一魔)와 삼마(三魔)에게 눈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으니 각 대장들도 자리에 앉았다.
“개인적인 이야기는 전투가 끝난 다음에 하시고, 지금까지의 진행상황을 보고하세요.”
혁린강의 말에 혈영대 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령대로 개미새끼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하게 포위하고, 전서구들은 모두 살려 보냈습니다.”
“공자님! 전서구를 왜 그냥 보내신 거죠. 우리 행적이 밝혀져서 좋을 것이 없지 않습니까?”
벽안환요의 질문에 혁린강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중원으로 출발하기 전에 말씀드린 것이 있었어요. 요점만 다시 말씀드리면 초토화! 공포! 혼란! 입니다. 각대문파로 지원을 요청하는 전서구들을 그냥 보내준 이유를 설명하죠. 지원군이 도착했을 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사늘한 시신(屍身)과 황패해진 건물들뿐일 겁니다. 구파일방과 칠대세가를 비롯한 모든 중원 놈들에게 우리가 얼마나 무섭고 잔인하며 무자비하며 철저한지 각인(刻印)시켜 주어야 합니다. 우리 이름만 들어도 공포에 몸서리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나타났다는 말만 들어도 꽁지가 빠지게 도망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공동파의 참상(慘狀)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다른 이유도 있지만 그건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혁린강의 설명에 벽안환요를 비롯한 대장들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한없이 인자(仁慈)하고 너그럽게만 보이는 혁린강에게 이렇게 무서운 일면(一面)이 있는 줄 누가 알겠는가? 벽안환요는 애써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작전계획은 다 세우셨습니까?”
“예? 오늘밤 안에 공동파를 지상(地上)에서 지워버리겠습니다. 먼저 공동파가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간세들의 정보를 종합에서 설명하겠습니다.?”
혁린강은 간세들의 정보를 종합하여 분석한 것을 일행에게 설명했다.
“설명은 충분할 겁니다. 이제 구체적인 공격계획을 설명하겠습니다. 선발대는 혼류환령님과 사백의 강시들입니다. 정문을 돌파하여 궁수들을 제거하고 주변을 정리하세요.”
“알겠습니다.”
“일마(一魔)님께 혈영대 오백을 드리겠습니다. 정문이 열리면 진격(進擊)하여 일차방어선 무사들을 도륙(屠戮)하세요.”
“알겠습니다. 놈들의 씨를 말려버리겠습니다.”
“삼마(三魔)님께도 혈영대 오백을 드리겠습니다. 일마(一魔)님까지 진격(進擊)하시면 놈들의 전력(戰力)이 한쪽으로 몰릴 겁니다. 아마 이차방어선으로 집결하려 하겠다. 삼마(三魔)님 께서는 측면으로 진입하여 숨어 있는 간세들과 힘을 합쳐 적진(敵陣)을 교란(攪亂-어지럽힘)하세요. 사마(四魔)님께 흑풍대 이백을 드리겠습니다. 뇌옥과 창고에 숨어 있는 부녀자와 노약자를 찾아 도륙(屠戮)하세요.”
“모두 죽이라는 말씀입니까?”
“뱃속에 있는 아이까지 죽이세요. 한 놈도 살려주면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흑풍대 대장님은 흑풍대와 함께 공동산 주위를 포위하여 도망치는 놈들을 도륙(屠戮)하세요. 한 놈도 놓치지 말고 모두 죽어야 합니다. 혈영대 대장님은 저와 함께 대기하고 있다가 나머지 혈영대와 함께 진격합니다. 질문 없으면 모두 준비하세요. 인시(1~2시 사이)에 선발대를 시작으로 총공격을 시작하겠습니다.”
“잠깐만 저는 뭐하죠? 저는 할일이 없나요?”
지금까지 별다른 활약이 없는 오마(五魔)가 손을 들고 이야기한다.
“나중에 알려드릴게요. 패천일도님께서는 이번 전투의 승패(勝敗)를 좌우할만한 큰일을 해주셔야 합니다.”
“그래요? 저는 또 이번에도 저만 빠지는 줄 알았는데 공자님께서 중요한 일을 맡기려 하셨군요. 알겠습니다.”
산만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소심한 성격인 패천일도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웃는다.
“출발하기 전에 무사들에게 공지할 사항이 있습니다. 공동파에 숨어있는 간세들은 가슴에 검은 천을 달고 있습니다. 서로 오해가 없도록 모든 무사들에게 공지하세요. 자~ 준비하세요.”
각 군막에서 쉬고 있던 수천의 배화교 무사들이 무장을 완료하고 한곳으로 모여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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