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SF

혈화 진서연 - 2부

본문

독왕 당적이 혈화곡을 찾은 것은 그의 둘째 딸인 독심나찰 당예가 보낸 전서구가 당가타의 전서구 연락소에 닿기도 전이었다. 혈화곡은 절정 고수라도 쉽사리 드나들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었는데, 유일한 출입구인 곡의 절애와 화산구의 절벽 사이엔 천잠사를 섞어 꼬아만든 삼실로 된 얄팍한 끈이 연결되었을 뿐이었고, 그나마 거기엔 당가 비전의 독이 발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가 무려 30여장이 넘었기 때문에 검제와 독심나찰, 그리고 독왕을 제외하면 거의 출입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출입구를 만들어 둔 것은 곡의 운영을 위해 필요한 생필품을 그 끈으로 구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혈화곡이 있는 운남의 제일상단에선 타산이 맞지 않은 그 장사를 위해 혈화곡 부근의 거평현에 지부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당대의 천하제일인과 거래하는 유일한 상단이라는 위세를 업고 강남의 신흥상인세력으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당적은 화산구의 절벽 끝에 서서, 끈 옆에 설치된 큰 종을 두 번 쳤다. 잔뜩 낀 산안개 너머로 작은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아. 주아냐. 할애비다.” 




“아. 잠시만요. 바구니를 보내드릴게요.” 




곧, 드르륵 하는 소리도 없이 도르래를 통해 사람 두엇은 타고 남을 만한 큰 대바구니가 도착했다. 훌쩍 올라타자마자 다시 혈화곡의 절애 쪽으로 천천히 이동했고, 키가 작은 당적은 바구니의 가운데를 잡고 혈화곡이 있는 가령산의 절경을 구경했다. 거참, 이 것이 꽤 구경할만 하단 말이야. 이동하던 바구니가 15장을 지나자 한 줄기 와선풍에 몹시 흔들렸다. 그래, 이것도 좋단 말이야. 짜릿한 기분이 들어. 당적이 만족감에 고개를 끄덕였다. 혈화곡이 눈 앞에 가득 들어왔다. 몇 몇의 사람이 그를 마중나와 있었는데, 그 중엔 검제 진영현이 있었다. 






“빙장어른 어서 오십시오. 이렇게 빨리 연락이 닿았습니까?” 




“그게 무슨 소린가? 자네 기별을 보냈던가?” 




“예.” 




당적은 아직 거리가 좀 남아 있는 허공을 바구니에서 뛰어나와 땅에 사뿐히 착지하고서, 고개를 조아리는 많은 사람들을 물리치고 진영현과 단 둘이서만 혈화곡의 내원을 향해 걸으며 물었다. 




“주기가 지났나? 날 찾은 걸 보면.” 




“후~. 예. 지나갔습니다. 사실, 이번엔 정말 악연과 끝을 내고 싶었습니다. 칼을 들었지만, 내리칠 수 없더군요. 또 아까운 생목숨을 하나 취했습니다.” 




“어쩌겠나. 그게 그 아이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니겠나. 그래 이번엔 누군가? 사람을 사왔나?” 




“이번엔 예상보다 빨리 주기가 닥치는 바람에, 곁에서 따르던 친동기같던 시비 아이가…….” 




“자책하지 말게. 태어나면 누구나 죽기 마련이야. 그 아이 명줄이 거기까지였던 게지. 내게 연락을 한 것은 서연이의 몸상태를 알기 위한 것이었나?” 




“그렇습니다. 호전되지 않는다면, 다비사태가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정말로 독심을 품을 생각입니다. 하나가 죽어 열이 살고, 백이 산다면 그게 옳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고, 조금 이르구만. 난 사실 서연이의 발작주기보다 좀 앞서 와서 서연이를 관찰할 생각으로 성도를 떠나 온 것이었거든.” 




“그 점도 걱정입니다.” 










내원에 들어서자, 지름길을 질러 왔는지, 대나무바구니를 보내 준, 당혜주가 곁문을 열어줬다. 당혜주의 곁엔 당예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깎아 놓은 듯 아름다운 얼굴에, 깃든 냉랭함이 섬뜩하게 무섭게 다가왔다. 




“오셨어요?” 




“그래, 서연이는 어디에 있느냐?” 




“아범이 연공실에 가두었습니다.” 




“그럼 연공실로 가자꾸나. 아니, 잠시 들어가자. 할 말이 있다.” 




“주아야, 차를 준비해 주겠니?” 










당예의 부탁을 들은, 당적은 고개를 가로 젓더니, 당혜주를 불러 일렀다. 




“지금부터, 내원의 모든 인원을 밖으로 내 보내고, 네가 문을 지키거라. 어느 누구도 내원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이야.” 




“예. 할아버님. 이 시간에 내원에 있는 사람은 주방어멈과 침모를 포함해도 다섯도 안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부탁하마.” 










당적이 상석에 앉고, 교탁의 양 옆으로 진영현과 당예가 자리잡아 앉자, 당적은 품안에서 소중히 간직한 듯한 작은 은상자를 하나 꺼냈다. 




“이것을 좀 보게.” 




“이것이 무엇입니까.” 




진영현이 받아 상자를 열자, 거기엔 털이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작은 새끼 쥐가 하나 있었는데, 눈에서 광채가 날 정도로 비범한 구석이 있었다. 




“아버지, 이게 뭐죠? 왜 쥐를?” 




“그건, 지난 번에 내가 왔을 때, 채취해 간 서연이의 피를 먹인 쥐가 낳은 새끼다. 세 마리가 태어났는데, 모두 죽고, 그 놈 한 마리만 남은 것이지.” 




“그런데요?” 




“놀랍게도 저 쥐는 인간으로 치면, 천골지체에 해당한다. 극상의 재질을 타고났다는 말이다.” 




“아버지 그게 무슨 말이죠? 설마?” 




“그래. 이제 서연이 나이도 있으니, 시집을 보내야 할 것이 아니냐. 실험을 해 봤는데 말이야. 일할 오푼의 확률로 이런 놈이 태어난다. 사위에 손녀는 물론이고, 증손자까지 천하제일인을 배출하게 되는 것이지.” 




“장인어른. 그 말은…….” 




“자네는 천하제일인치고는 너무 감상적이네. 서연이는 천하를 잡을만한 재목이야. 그런 아이를 아주 작은 흠이 있다고 죽일 텐가?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지. 내 후년에 개최되는 무림영웅대회에 보낼 걸세. 내 손녀에 자네와 예아의 딸일세. 강호에서 이보다 뛰어난 혈통은 없지. 우승은 따논 당상일게야. 서연이의 내공은 나와도 자웅을 겨루니 말이야. 힘이 바탕이 되어 있으니, 세기는 가르치면 되네. 그리고 태어나는 천골지체의 증손자. 이보다 더한 축복이 어디 있겠나?” 




“장인어른! 안될 말입니다. 연아의 피를 잇다니요. 연아는 그럴 수 없습니다.” 




“여보!” 










끼익! 




쇠를 쇠로 긁는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시작되나 보군.” 




“여보, 당신이 나가서 연공실 주변에 아무도 다가가지 못하게 주의를 주고 오세요. 혹시 모르니 연공실에 들어가서 우리 연이를 지켜 주시고요.” 




“당신은?” 




“아버지가 먼길을 오셨으니, 잠시 차라도 대접하려고요. 전 연이의 그 모습을 도저히 보지 못하겠어요.” 




“알았어.” 










끄윽 끄윽 




괴로운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시비 춘섬은 너무 괴로운 나머지 연공실의 문을 뛰쳐나가 토악질을 했다. 검제가 다가왔다. 




연공실의 문을 열고, 진서연이 갇혀 있는 철제 상자의 숨구멍으로 진서연의 상태를 관찰했다. 온 몸이 피로 낭자했다. 손톱이 날카롭게 자라 있었다. 움직일 수 없는 좁은 틈에서 온몸을 부딪치고 있었다. 




뱀이 허물을 벗듯 머리로부터 껍질이 떨어지고 있었다. 




쉬익쉬익 




알 수 없는 휘파람 소리를 내며 번뜩이는 눈에, 세상을 향해 가득찬 분노와 증오가 무섭게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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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 장면이 등장하지 않아 서운하실 수도 있겠지만. 좀 기다려 주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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