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天上)의 향기 - 227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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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天上)의 향기 227(전신연가(戰神戀歌))-1
첩첩산중(疊疊山中) 인적(人跡)조차 미치지 않는 검산계곡에 고고하게 빛나는 달빛이 주위를 밝혀주고 있었다. 평소에는 사냥꾼이나 산적들도 발걸음을 꺼려하여 적막함만이 흐르던 계곡에 십여 명의 남녀가 모여 있고,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공터에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남녀가 있다.
냉하상은 은은한 달빛에 드려나 도치의 모습을 보며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밤길에 혼자 만나면 당장이라도 줄행랑을 칠만큼 산만한 덩치와 험악한 인상을 가지고 있으며, 딱딱하게 굳은 표정과 온몸에서 풍기는 살기(殺氣)는 보는 사람의 숨을 막히게 한다. 상대는 전신(戰神)이라 불리는 사내다. 전투에 임하면 후퇴(後退)라는 것을 모르며, 추호의 망설임이나 인정도 없이 상대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사내다. 과연 도치를 이길 수 있을까? 지난 몇 달 동안 도치를 이기기 위해 절치부심(切齒腐心)했지만 막상 도치를 마주하니 자신이 없어진다. 그리고 자신도 알 수 없는 이 감정의 덩어리는 무엇이란 말인가?
“준비 끝났어. 끝났으면 시작하자.”
도치가 들고 있던 도(刀)를 빼내니 은은한 달빛에 거대한 도(刀)가 반짝거린다. 냉하상은 의아한 눈으로 도치를 바라본다. 도치가 도끼대신 도(刀)를 가지고 나온 것이다. 물론 저번에 도(刀)를 사용하는 것은 보았지만 당시에는 도끼가 없어 할 수 없이 도(刀)를 사용했다고 알고 있다.
“무기를 잘못 가져왔군요. 도끼를 챙겨오세요.”
“도끼는 필요 없어. 도(刀)만 있어도 충분해.”
“지금 도(刀)로 대결하겠다는 겁니까?”
“왜? 내가 도(刀)를 쓴다고 하니까 이상해!”
“당신의 무기는 도끼가 아닌가요? 그런데 왜 도를 가져온 거죠?”
“너도 이상한 검(劍)을 버리고 도(刀)로 대결하잖아.”
“저야 검(劍)과 도(刀)를 같이 수련했으니 어떤 무기를 쓰나 관계없지만 당신은 오직 도끼만 쓰던 분이 아닌가요?”
“무슨 잔말이 그렇게 많아. 도(刀)로도 너를 이길 자신이 있으니 도(刀)를 가져왔겠지 일부러 지려고 도(刀)를 가져왔겠어.”
냉하상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온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도치는 자신의 장기인 부법(斧法)이 아니라 도법(刀法)으로 자신을 이길 수 있다고 한다. 도대체 이게 말이 되는가? 도치와 만난 지 3개월 정도 지났다. 당시 도치가 도(刀)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초보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파괴적인 초식과 높은 내력 때문에 위력(威力)은 대단했지만 초식의 완성도나 운용에서 보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도치가 그동안 얼마나 대단한 수련을 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단 3개월 동안 익힌 도법(刀法)으로 20년 넘겨 수련한 자신을 상대하겠다는 것은 모욕(侮辱)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자신이 얼마나 형편없이 보였으면 단 3개월 동안 익힌 도법으로 자신을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하겠는가? 냉하상은 손에 들고 있던 광풍혈도를 빼내고 도집을 던져버렸다.
‘나와 천인살막을 모욕(侮辱)하는 도치를 용서할 수 없다. 죽이리라.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도치만은 반드시 죽이리라.’
달빛에 반짝거리는 비단결 같은 은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며 하얀 얼굴을 살짝 가린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살짝 휘어진 은빛 눈썹이 신비함을 자아내고, 긴 팔다리와 들어갈 때는 들어가고, 나올 때는 나온 육감적인 몸매를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울렁거리고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북해의 심연(深淵)처럼 차갑게 빛나는 눈동자와 잘 갈아놓은 칼 같은 예기(銳氣)는 겉으로 보이는 아름다움을 상쇄(相殺)시켜버린다.
도치는 냉하상을 무시하거나 모욕하지 않았다. 냉하상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혹시라도 풍운이나 나머지 사람들이 알면 곤란해질까 두려워 그녀의 정체를 감춰주려 노력 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떻게 해서든 빨리 일을 마무리하고 무사히 돌려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냉하상은 그걸 모른다.
도치가 힘들게 도법을 배운 것도 냉하상 때문이다. 냉하상이 자신을 이기려면 도법이 아닌 검법을 사용하면 간단한데 자신의 이점을 버리고 몸에 맞지도 않은 도법으로 이기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물론 사람이 하는 일이니 노력해서 안 되는 일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름길이 있는데 힘들게 돌아갈 필요는 없지 않는가? 도치는 냉하상이 고집을 부리는 것이 답답하지만 그녀를 위해 다른 길을 찾아보았다. 냉하상은 정정당당한 대결을 원하고 있다. 정정당당한 대결이 되려면 같은 조건에서 싸워야 한다. 나는 자신의 장기를 사용하는데 상대는 몸에 맞지도 않은 무공을 사용한다면 정당한 대결이 될 수 없다. 도치는 냉하상과 같은 조건에서 대결하기 위해 도법(刀)을 수련했다. 냉하상이 원하는 대로 정당한 대결을 위해서 도끼가 아닌 도를 가지고 나온 것이다. 그런데 냉하상은 자신의 마음도 모르고 모욕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자신의 마음을 보여줄 수 없으니 일일이 설명해야 할까? 아니다. 말 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왜 자신이 도법을 수련했으며, 얼마나 열심히 수련했는지 보여주어야 한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도끼를 가져오세요.”
냉하상은 솟구치는 분노를 억누르고 도치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네가 먼저 도(刀)를 버리고 검(劍)을 가져오면 나도 도끼를 가져오겠다. 하지만 계속 도(刀)로 대결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나도 도(刀)로 대결하겠다.”
“칼에는 눈이 없어요. 죽고 싶지 않으면 도끼를 가져오란 말이에요.”
“나를 죽일 수 있다? 대단한 자신감이군. 만일에 내가 이기면 어떻게 할래. 도끼가 아니라 도(刀)로 너를 이기면 어떻게 할 거냐고?”
도치가 버럭 소리를 지르니 냉하상은 살기가 가득한 눈으로 도치를 노려본다.
“되지도 않는 말은 하지도 말아요. 어떻게 당신이 이겨요. 무슨 기연(奇緣)이라도 있었나요. 3개월 동안 수련한 알량한 도법으로 어떻게 광풍천인도법을 익힌 저를 이길 수 있다는 거죠?”
“3개월이고 지랄이고 이기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잖아?”
도치가 윽박지르자 냉하상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도치를 바라본다. 어떻게 자신을 이길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3개월 동안 수련한 도법으로 자신을 이긴단 말인가? 도대체 저 알 수 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무엇을 믿고 큰소리를 치는 것일까? 냉하상은 입술을 깨물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힘들게 말했다.
“만일.........제가 지면...........혀를 깨물고 죽을게요.”
“미친년.........이런 하찮은 대결에 졌다고 죽어? 누구 마음대로 죽어? 내가 죽게 내버려 둘 것 같아.”
“그럼 어떻게 해줄까요. 당신의 종이라도 될까요?”
“그런 건 필요 없어. 앞으로 똥고집 부리지 말고 잘 먹고 잘 살기만하면 돼. 이제 시작하자. 싸움을 입으로만 할래.”
“시작하기 전에 저도 한마디만 하죠. 죽어도 저를 원망하지 마세요.”
“원망 안 해. 그러니까 닫치고 시작하기나 해. 보는 사람 지루해서 미치겠다.”
도치는 다리를 넓게 버리고 도(刀)를 가슴 앞에 세웠다. 냉하상도 이제 마음의 결심을 하고 도(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두 사람사이에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적막감이 흐른다. 도치는 풍운에게 배운 사사무량도법을 떠올리며 냉하상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냉하상은 부려진 광풍혈도만을 바라보며 석상(石像)처럼 굳어 있다. 마치 폭풍전야(暴風前夜)의 고요 같다.
풍운은 냉정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명은 신강무림 최고의 살수문파인 천인살막의 광풍천인도를 익히고 있고 한명은 중원 사도(邪道)무림의 총본산인 사사천교의 사사무량도법을 익히고 있다. 광풍천인도와 사사무량도법 중에 어떤 무공이 낮다고 말하긴 힘들다. 두 가지 모두 도법으로 일가를 이룬 무공들이며, 같은 무공이라도 익히는 사람의 자질(資質)이나 노력여하에 따라 그 위력이 달려지기 때문이다.
도치는 3개월 전에 처음 도(刀)를 잡았다. 20년을 넘은 세월동안 광풍천인도를 수련한 냉하상에 비하면 형편없이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무공은 순간의 깨달음만으로 남들이 수십 년 동안 수련한 것보다 더욱 높은 경지에 오르는 경우도 많다. 하늘의 도우심인지 몰라도 도치에게도 기연(奇緣)이 있었다. 양의심공으로 익히고 있던 화령마공과 빙백마공이 하나로 합쳐지며 내력이 엄청나게 높아지고 무공을 이해하는 오성(悟性) 또한 놀라보게 향상되어 약점으로 지적되던 신법과 경공까지 완벽하게 익히고 있다. 그거뿐이 아니다. 도법(刀法)을 익히겠다고 마음먹은 도치는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순식간에 사사무량도법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운랑...........그냥 두고 보실 거예요?”
“무경은 도치가 걱정되는 모양이지.”
“도치님이 혈무부법을 쓰신다면 걱정하지 않겠죠. 하지만 도치님은 겨우 3개월 익힌 사사무량도법으로 대결하겠다고 나서잖아요. 저 여자가 마수님 말씀대로 천인살막의 막주라면 광풍천인도를 어려서부터 수련했을 거예요. 도치님과는 비교가 안 되죠.”
“나는 도치를 믿어. 자신이 없다면 도법으로 대결하겠다고 나서지 않았을 거야.”
“물론 저도 도치님을 믿지만.........혹시라도 잘못되면 큰일이잖아요.”
“그런 불쌍사가 생기지 않게 조심은 해야겠지. 한번 도치를 믿어보자.”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두 남녀.........
그들은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고 서로에게 칼을 겨누고 있다.
상대는 전신이라 불리는 무사다. 방심(放心)은 곧 죽음이다. 도치를 만난 흥분과 격양된 감정을 뒤로하고 오직 승부에만 집중해야 한다. 냉하상의 거칠 숨소리가 안정되고 도(刀)를 바라보는 눈빛이 심연(深淵)처럼 깊고 고요하게 변한다. 그리고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것 같지 않던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더니 은은한 달빛만 가득하던 검산계곡에 한줄기 붉은 도영(刀影)이 피어났다.
“광풍천인도 천인섬”
도치는 붉은 빛을 머금은 번개 같은 도영(刀影)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자 도(刀)에 내력을 불어넣어 가볍게 도영(刀影)을 쳐냈다.
“까~아~앙~”
지난 3개월 동안 오직 도치를 이기겠다는 일념으로 광풍천인도를 수련했다. 천인섬은 번개 같은 속도와 바위도 부셔버리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도치의 배려(?)로 부려진 광풍혈도로 펼치는 천인섬은 예전에 비해 두 배 이상 빨라졌다. 그런데도 도치는 천인섬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쳤다.
“이럴 수가”
밤하늘을 울리는 짧은 신음소리가 들리더니 냉하상이 빙판(氷板)에서 미끄러지듯 주르륵 밀려나고, 도치는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자세를 바로잡는다. 도치가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도끼를 사용할 때의 이야기다. 20여년을 수련한 부법과 3개월 정도 수련한 도법에는 분명 차이가 있어야 정상이다. 냉하상은 냉정한 시선으로 도치를 바라봤다. 도치는 천년고목처럼 처음 자세에서 움직임이 없다. 부법를 사용할 때의 도치는 미친 황소처럼 공격일변도의 싸움을 즐긴다. 그런데 지금은 상대의 공격을 기다리기만 할뿐 먼저 공격할 의사가 없는 모양이다. 냉하상의 머리에 순간적으로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도치가 펼치는 도법이 무슨 도법인지는 모르겠다. 예전에 광도묵랑의 마령월광도법을 펼치는 것을 보았지만 지금 도치의 자세나 기세(氣勢)를 보면 마령월광도법은 아니다. 하지만 그건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도치가 도(刀)를 수련한 기간이 3개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도 3개월 안에 하나의 도법을 완벽하게 수련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합, 일합 전력을 당한 대결이라면 도법의 숙련도나 완성도 보다는 힘과 내공에 의해 승패가 결정되지만 어지럽게 엉켜버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살수는 생각은 짧게, 행동은 빠르게, 정확한 판단과 과감한 결단력이 생명이다. 냉하상이 화살처럼 튀어나가 도치의 상하를 베어왔다.
“깡, 깡, 그르르륵~ 깡~”
도(刀)와 도(刀)가 부딪치며 불꽃이 튀고 몸과 몸이 엉킨다. 냉하상은 귀신같이 빠르고 날렵한 신법으로 치고 빠지는 공격을 퍼붓고 있었고, 도치는 움직임을 최소화하며 수비에 치중하고 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냉하상의 움직임이 빨라지며 이제는 흐릿한 갈색 그림자만 보이고, 불꽃놀이를 하듯 도치주위에 수많은 불꽃이 튀며 펄럭이는 옷이 걸레처럼 변해가는 동시에 여기저기 붉은 핏자국이 보이기 시작한다. 냉하상의 생각대로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공격에 도치가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이 있다. 잔매에 골병든다는 말이 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대로 있다가는 공격다운 공격도 못해보고 진다. 언제까지 수비만 할 수는 없다. 도치가 내공을 끌어올려 도(刀)에 불어넣으니 도(刀)가 붉게 변했다.
“천지혈세.”
도치는 몰아치는 냉하상의 도(刀)의 처내는 것과 동시에 붉게 변한 도(刀)를 뿌리니 밤하늘에 엄청난 도기(刀氣)가 피어나 흐릿한 냉하상의 그림자를 향해 날아간다. 냉하상은 자신에게 향해 비 오듯 솟아지는 도기(刀氣)들을 바라보며 내공을 끌어올린다. 한번 잡은 승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냉하상도 물려나지 않고 받아치는 것이다.
“광풍천인도 천인나환”
냉하상의 도(刀)가 부채가 펼쳐지듯 여러 개로 변하더니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도기(刀氣)을 향해 날아간다.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각오해. 연호구환~!”
도치의 도(刀)가 중간에서 방향을 바뀌어 빙글빙글 돌아가며 냉하상의 도기(刀氣)을 향해 날아간다. 냉하상은 성난 파도처럼 밀려오는 도치의 도기를 보고 미꾸라지 같은 신법을 도치의 피해버린다. 힘이나 내공에서 밀리니 정면승부는 피해야 한다.
“환(幻), 붕(崩)”
도치는 도망치는 냉하상을 쫓아 화살처럼 튀어나가고, 빙글빙글 돌아가던 도(刀)가 붉은 빛을 뿌리니 엄청난 도기(刀氣)가 도망치는 냉하상의 전신을 향해 날아간다. 냉하상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도영(刀影)들을 보고 도망치던 발걸음을 멈추고 도치를 향해 돌격했다. 피하는 것도 좋지만 도망치기만 하면 답이 없다. 도치는 한번 승기(勝氣)를 잡으면 상대가 쓰려질 때까지 공격을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냉하상의 광풍혈도가 도치가 만들어낸 도영(刀影)들 사이로 파고든다.
“이런 멍청한! 빌어먹을........”
“우르르르 꽝~”
내공을 머금은 두 자루 도(刀)가 출동하자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폭음과 함께 주위에 있던 흙과 돌들이 사방으로 날아오른다. 도치는 냉하상이 목숨을 돌보지 않고 도영(刀影)들 사이로 파고들자 순간적으로 도(刀)를 거두고 공중으로 솟구쳤다. 그대로 공격을 계속하면 냉하상이 버티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번 실천한 초식을 거두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야. 하늘로 솟구친 도치는 내공이 이어지지 않아 냉하상의 머리를 향해 수직으로 떨어졌다.
냉하상은 도(刀)가 충돌하자 속이 울렁거리며 목구멍까지 핏물이 올라왔으나 불굴의 의지력으로 고통을 인내하며 조금도 물려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앞을 가로막던 장벽이 사라진 것처럼 자신을 공격하던 도영(刀影)들이 사라지고 그와 반대로 머리위에서 엄청난 살기(殺氣)가 느껴져 하늘을 올려다보니 도치가 자신을 향해 수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피하기는 늦었다. 냉하상은 내공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도(刀)에 몰아넣으니 붉게 빛나던 도(刀)가 일자나 늘어나며 붉은 빛을 토한다. 천인살막의 명예와 자신의 자존심이 걸린 일전(一戰)이기 때문에 도망이란 있을 수 없다. 냉하상의 도(刀)가 반원을 그리며 천천히 도치를 향해 날아간다.
“천인사도~”
천인사도는 광풍천인도의 최후 3절초 중 첫 번째 초식이다. 반원을 그린 도(刀)는 도치를 향한 상태에서 미세하게 떨리며, 수많은 살기(殺氣)를 뿌린다. 화려한 도영(刀影)이나 눈에 보이는 큰 변화는 없으나 한 순간에 상대를 난도질하는 무음(無音), 무형(無形)의 초식이 천인사도다. 도치는 순간적으로 내공을 끌어올려 도(刀)에 불어넣고 일도양단(一刀兩斷)의 초식으로 냉하상의 머리를 내려친다.
‘아니야........이건 아니야.’
냉하상은 무모한 도치의 공격에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공격을 멈추지 않으면 도치는 천인사도에 난도질당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도 도치의 도(刀)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도치는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동귀어진(同歸於盡)의 수로 나왔다. 무언가 이상하다. 무섭게 몰아치던 도기(刀氣)가 사라지고 도치가 머리 위에 있었다. 계속 공격했다면 확실한 승기를 잡을 수 있었는데 도치는 왜 공격을 멈추고 하늘로 솟구친 것일까? 그리고 갑자기 왜 동귀어진의 수로 나온 것일까? 그만큼 급했던 것일까? 냉하상은 눈을 감았다. 그녀의 손이 부르르 떨리며 도치를 향해 날아가던 무음, 무형의 살기(殺氣)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콰아아아앙~”
첫 번째 충돌의 여파로 피어오른 흙먼지가 가라않기도 전에 검산계곡 전체가 들썩거릴 정도의 폭음과 함께 엄청난 양의 돌과 흙들이 사방으로 날아오른다.
“운랑! 어떻게 된 거죠?”
초초하게 지켜보던 무경이 겉에 있던 풍운을 바라본다. 주위에 피어오른 자욱한 흙먼지가 도치와 냉하상의 모습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둘 다 무사해. 마지막 순간에 서로 양보했어.”
“양보? 그게 무슨 말씀이죠?”
“이번 대결은 이상한 대결이야. 둘 다 이기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 같아.”
“설마.......?”
“평소의 도치는 한번 시작하면 둘 중 하나가 쓰려질 때까지 공격을 멈추지 않아. 도치에게는 분명 승리할 기회가 있었어. 첫 번째 충돌에서 상대의 균형이 무너졌으니 계속 밀어붙였으면 승기를 잡을 수 있었을 거야. 그런데 도치는 공격을 멈추고 공중으로 솟구쳤고 상대는 도치가 양보한 것을 모르고 극단의 초식으로 나왔어. 여기까지는 무경도 봤을 거야.”
“.............”
“상대의 공격을 피하긴 늦었다고 판단한 도치는 동귀어진의 수로 나왔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그대로 진행되었다면 둘 다 죽었을 거야.”
“아이~ 답답해.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자가 먼저 도(刀)의 방향을 돌렸고 도치도 상대가 아닌 땅으로 공격방향을 돌렸어.”
“그럼 둘 다 무사하다는 말이죠. 안심이에요. 그런데 운랑 말씀대로라면 왜 이런 싸움을 하죠.”
“글쎄........그건 잘 모르겠어.”
“정말 알 수없는 사람들이네요. 운랑! 도치님을 말려보세요. 쓸데없는 싸움 같은데 둘 중 한명만 실수해도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나올 수 있잖아요.”
“우리가 끼어들 일이 아닌 것 같아.”
“도치님이 너무 위태롭게 보여서 그래요. 제발 그만하라고 하세요.”
“둘이 생사(生死)를 걸고 끝을 보겠다면 달라지겠지만 지금 상태로 보면 걱정할 필요는 없어. 무공의 완성도나 운용에서는 도치가 밀리지만 힘과 내공에서 앞서기 때문에 누가 앞선다고 말하기도 힘들고 더구나 서로 상대를 죽일 마음도 없어 보여. 둘 사이에 우리가 모르는 미묘한 것이 있을 거야. 계속 지켜보자.”
공터에 피어난 먼지가 가라앉으며 서로의 목에 도(刀)를 거두고 있는 도치와 냉하상의 모습이 드려났다. 냉하상은 복잡한 눈길로 바로 옆에 깊게 파인 구덩이와 도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만일 도치가 도(刀)의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면 자신은 푸줏간의 고깃덩어리처럼 변했을 것이다. 물론 자신이 도(刀)의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면 도치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멍청한 년. 죽고 싶어.”
도치의 무뚝뚝한 말에 냉하상은 차갑게 웃는다.
“당신이야말로 죽고 싶어요. 왜 평소처럼 싸우지 않죠. 제가 우습게 보여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당신이 저를 무시하고 있잖아요?”
“내가 언제 무시했다는 거야.”
“전신(戰神)! 한번 공격을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것이 당신의 전투방식 아닌가요. 왜 중간에 멈춘 거죠? 왜 공격을 멈추고 하늘로 솟구친 거죠.”
“내가 어떻게 싸우던 그게 너하고 무슨 상관이야. 넌 이기만 하면 되잖아.”
“지금 적선(積善)해요. 동정(同情)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주면 제가 고마워할 줄 아세요. 진지하게 최선을 다하란 말이에요.”
“누가 적선해. 누가 동정해. 난 최선을 다하고 있어.”
“거짓말 하지 말아요. 최선을 다한다는 사람이 이따위로 싸워요.”
도치는 차가운 눈으로 냉하상을 바라본다. 냉하상은 곧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다. 무엇이 냉하상을 슬프게 하는 것일까? 그녀의 간전할 눈빛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내가 어떻게 해주면 좋겠어. 내가 어떻게 해주면 만족하겠어.”
“평소대로 하세요. 남들이 전신(戰神)이라고 부르는 그 모습대로 하란 말이에요.”
“알았다. 원하는 대로 해줄게. 대신 조심해. 부탁이다.”
“당신이나 조심해요.”
서로의 목에 도(刀)를 거두고 있던 도치와 냉하상이 오보씩 물려났다. 도치는 냉하상이 자세를 잡자 그대로 냉하상을 돌격한다. 냉하상도 이젠 피하지 않는다. 도와 도가 엉키며 불꽃이 피어난다.
“캉~..........카카카카카카아아앙~”
도치와 냉하상의 주위에 처음에는 편경(編磬)소리처럼 맑고 청명한 금속음이 났더니 곧이어 고막이 찍어질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수많은 불꽃이 피어난다. 도치의 허벅지와 어깨에서 핏방울이 피어오르고 냉하상의 옆구리에서도 핏방울이 솟구친다.냉하상은 도치의 공격에 등줄기가 싸늘해지며 온몸에 부르르 떨리는 전율(戰慄)을 느낀다. 수비는 찾아볼 수 없고 오직 공격만 있는 도법이다. 도치의 도법은 실전을 거듭하며 더욱 거칠고 투박하게 변하여 미친 황소처럼 밀어 붙인다. 냉하상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내공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도(刀)에 불어넣었다.
“천강파망(天剛波網)~”
천강파망은 혈풍천인도의 최후3절초 중 두 번째 초식으로 물결처럼 피어난 도영(刀影)들이 광풍처럼 몰아쳐 상대를 난도질 하는 극강의 초식이다. 냉하상이 내공과 힘에 밀리자 최후의 결단을 내린 것이다. 도치는 성난 파도처럼 밀려오는 도영들을 바라보며 도(刀)로 거대한 원을 그려 촘촘한 그물을 만들었다.
“우르르르~ 콰콰콰콰쾅~”
냉하상이 만들어낸 붉은 도영(刀影)들이 도치가 만든 그물과 충돌하며 지축이 흔들릴 정도의 폭음과 함께 주위 있던 초목(草木)과 바위들까지 사방으로 날아가며 자욱한 흙먼지가 피어난다. 그리고 냉하상의 날카로운 비명과 묵직한 신음소리가 들리고............잠시 시간이 지난 후 자욱하게 피어났던 먼지들이 가라앉으며 도치와 냉하상의 모습이 드려났다.냉하상은 도(刀)를 의지하여 힘들게 서 있는데 핏기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에 계속해서 피를 토하고 있었고, 도치는 입고 있던 옷이 붉게 변하고 몸의 여기저기에 커다란 상처들이 입을 벌리고 있으나 무덤덤한 표정으로 냉하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냉하상은 피를 토하면서 세차가 머리를 흔들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지난 3개월 동안 이날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천인사도외에 완성하지 못했던 천강파망을 완벽하게 익혔다. 또한 도치는 도끼가 아닌 도로 자신을 상대하고 있다. 그런데 자신이 밀린다. 어떻게 자신이 밀릴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현실은 냉정한 법이다. 자신은 지금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없지만 도치는 부상을 입기는 했으나 너무나 태연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도치는 마음이 복잡했다. 육체(六體)의 고통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몸의 여기저기에서 피가 솟구쳐도 아픔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이 아프다. 냉하상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 한쪽이 아련하게 아파온다. 왜일까? 무엇 때문일까? 그녀가 원해서 최선을 다했다. 그게 그녀가 원하는 거였다. 그런데 마음이 아프다. 도치는 하늘로 눈을 돌리며 한숨을 쉬었다.
“쿨럭~쿨럭~ 지금 그게 무슨 도법이죠.”
“사사무량도법”
“중원 최고의 도법이라는 사사무량도법........역시............하지만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냉하상은 힘들게 질문했다.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광풍천인도 최후 3절초 중 천인사도와 천강파망까지 사용하는데도 자신이 밀린 것이 믿을 수가 없다. 광풍천인도의 최후 3절초 중 두 가지를 사용하고도 겨우 3개월 도법을 수련한 도치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어떻게 믿으란 말인가. 도치가 방금 사사무량도법이라고 했다. 사사무량 도법은 사사천교 최고의 무공이다. 도치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이를 악물어 보았다. 냉하상을 보면 마음이 아프기 때문이다.
“이제 그만하자. 이만 하면 됐잖아.”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최후 1초가 남았단 말이에요.”
“지금 너 상태를 보란 말이야. 그 몸으로 싸우겠다는 말이 나와.”
“혀를 깨물고 죽는 한이 있어도 여기서 끝낼 수 없어요.”
“내가졌다하자. 그럼 되잖아.”
“동정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끝까지 최선을 다해 주세요.”
“휴~ 나도 모르겠다. 그래 끝까지 가보자.”
냉하상은 내공이 뒤틀린 상태에서 억지로 내공을 끌어올려 내상을 입었다. 덕분에 온몸의 뼈가 어긋나고 창자가 뒤틀리는 고통이 엄습했지만 지금은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냉하상은 마지막 한수를 위해 남아있는 내공을 모두 끌어올려 도에 집중한다. 도치도 냉하상을 바라보며 도에 내공을 불어넣었다. 비틀거리던 냉하상의 몸이 조금씩 공중으로 떠오르며 붉게 변한 도가 하늘를 향해 올라간다.
“천강천파”
도가 빛을 뿌리고, 하늘과 대지가 온통 붉은 빛에 감싸인다. 천강천파는 주위의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빛의 폭풍이었다. 도치의 도가 미세하게 요동치며 붉은 빛이 하늘높이 솟구치며 대지를 반으로 가른다.
“도강(刀剛)이란 말인가?”
냉하상의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파도처럼 밀려가던 도영들을 반으로 가르며 날아오는 도치의 도가 마치 환영(幻影)처럼 보였다.
“콰아아아아~”
“키아아악~”
상처 입은 작은 새가 떨어지듯 실 끊어진 연처럼 공중으로 솟구친 냉하상이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도치는 잡고 있던 도(刀)를 던져버리고 냉하상을 안아 사뿐히 떨어졌다.
“이봐~ 정신 차려........이봐~!”
“제가.........제가 졌어요.”
냉하상은 희미하게 보이는 도치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정신의 끈을 놓아버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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