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天上)의 향기 - 22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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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天上)의 향기 222(또 다른 시작)-10
제갈세가에 도착한 란은 가주인 만통선생을 찾아갔다. 만통선생은 자신의 집무실 앞마당에서 란을 기다리고 있다가 멀리서 걸어오는 란을 발견하고 달려왔다.
“다녀왔습니다.”
“그래! 고생했지.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다.”
만통선생은 한손으로 란의 손을 잡아주고 나머지 한손으로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날씨가 차다. 우선 안으로 들어가자!”
란는 가주의 집무실에 들어서자 만통선생에게 큰절을 올리려 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밖에서 했으면 됐지. 또 무슨 절이냐? 자~ 앉아라.”
만통선생은 란을 손을 잡아 의자에 앉히고 자신도 그녀 앞에 앉았다.
“저기, 무슨 말부터 드려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를 믿고 무림군의 군사로 천거(薦擧)해 주셨는데 본가의 이름만 더럽히고 말았습니다.”
란은 힘없이 말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그녀의 어깨가 들썩거린다.
“네가 최선을 다했다고 알고 있다. 그럼 된 거야.”
“아닙니다. 소녀를 벌해 주세요. 맡은바 소임을 다하지 못해 가문을 욕되게 하고 아가씨도 지켜드리지 못했습니다.”
란이 끝내 울먹이며 말하자 만통선생은 따뜻한 손길로 란의 손을 잡아주었다.
“란아! 무림군의 군사에서 물려난 것은 네가 못해서가 아니다. 또한 무경의 일도 너의 잘못이 아니다. 어차피 죽을 놈이 죽은 거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고 드렸는지 모르겠지만 아가씨는 살아 계십니다.”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풍운이라는 놈과 함께 있는 무경은 우리가 알고 있던 무경이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무경은 죽었어. 나도 그렇게 알고 있고 아버님도 그렇게 알고 있다.”
“예? 멀쩡하게 살아있는 아가씨를 버리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무경은 가족과 가문을 버리고 자신의 행복을 찾아갔다. 예전의 무경이라면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경은 죽었어.”
란은 말없이 만통선생을 바라보았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만통선생이나 전대가주는 무경을 이해하고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고 있는 것이다. 만통선생은 길게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나 란의 옆에 앉았다.
“란아! 모두 잊어라. 무경의 일도 잊어버리고 무림군의 일도 잊어버려. 그리고 나는 한번도 너를 남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너는 내 딸이고 이제 나에겐 너만 남았다. 앞으로 네가 본가를 이끌어가야 한다.”
“저는..........세가를 이끌어갈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란이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만통선생은 란을 일으켜 세웠다.
“먼 길 달려오느라 피곤할 것이다. 그만 돌아가서 쉬어라.”
무경이 떠난 지금 란의 심경(心境)은 복잡할 것이다. 란에게 무경은 언니였고, 스승이었으며, 정신적인 지주(支柱)였다. 무경은 가족과 가문뿐만 아니라 란까지 버렸다. 란에게 세상누구보다 믿고 의지하던 무경의 선택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지금 란은 휴식이 필요하다. 엉클어진 생각을 정리하고 자신의 앞날에 대해 차분히 생각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어야 한다. 란은 만통선생을 바라보다가 힘없이 하직인사를 올리고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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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은 도치가 익히기 적합하게 변형한 사사무량도법을 정리해서 도치에게 전해주었다. 정교하고 섬세한 부분은 과감하게 삭제하고, 동작이 크고 공격지향적인 초식위주로 변형한 것이다. 도치는 풍운이 전해준 종이뭉치를 읽다가 머리에서 쥐가 날 정도였다. 하얀 종이위에 그림은 코빼기도 안보이고 온통 글씨들만 가득했기 때문이다.
“연병할 놈! 하얀 것은 종이고 검은 것은 글씨라는 것은 알겠다. 근대 이걸 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
도치는 10장이 넘는 종이뭉치 중에 2장을 채보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풍운에게 가려했다.
“어디 가냐?”
도치가 문을 나서니 빙그레 웃고 있는 풍운의 모습이 보인다.
“마침 잘 됐다. 이게 뭐냐? 이걸 보고 사사무량도법을 익히라는 거냐?”
도치는 풍운에게 종이뭉치를 내밀었다.
“왜! 알기 쉽게 풀이했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어.”
“빌어먹을 자식! 알면서 이거만 딸랑 준 거지. 겨우 글이나 읽는 놈한테 이런 걸 던져주고 가면 어떻게 하라는 거냐?”
“그래서 어려운 말을 풀어서 알기 쉽게 설명했어.”
“지랄을 해라! 너나 쉽겠지. 이거 말고 그냥 말로 하던지 눈으로 보여줘~”
도치는 풍운의 손을 잡아 종이뭉치를 쥐여주니 풍운이 피식 웃는다.
“부탁하는 놈이 너무 건방지다고 생각하지 않아? 짜식야. 정중(正中)하게 부탁해봐~”
“이런 쌍! 알려주기 싫으면 관둬!”
“정말이냐? 배우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풍운은 종이뭉치를 갈무리하고 자신의 통나무집으로 가버린다. 도치는 풍운이 그냥 가자 마음이 급해졌다.
“야마! 알려주기로 한건 알려주고 가야지. 그냥가면 어떻게.”
“관두라며!”
“속은 좁아가지고,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제발! 알려 주세요”
풍운은 도치가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자신의 팔을 붙잡고 아양을 떨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도치야. 내가 알려주기 전에 이거 하나는 확실하게 하자. 너와 내가 친구지만 무공을 가르칠 때만큼은 사제지간(師弟之間)이 되는 거야. 무슨 말이지 알겠어.”
“알았어. 스승님으로 각득하게 모실게. 됐지.”
“하하하~ 좋아. 그럼 숲으로 가자. 그곳에서 알려줄게.”
풍운은 도치와 함께 통나무집 뒤에 있는 숲으로 갔다.
“우선 자리에 앉아. 사사무량도법에 대한 개략적인 부분부터 설명해 줄게.”
풍운은 숲에 있는 공터에 도착하자 도치와 함께 바닥에 앉은 다음 종이뭉치를 도치에게 전해준다.
“이거보고 익히라는 건 아니겠지?”
“우선 받아. 나중에라도 볼일이 있을 거야.”
도치는 종이뭉치를 받아 품속에 갈무리했다.
“사사무량도법은 18초로 구성되고 초식별로 5초의 변화가 있으니 총 90초로 이루어진 도법이다. 하지만 내가 준 사사무량도법은 도치 네가 익히기 편하게 18초를 반으로 줄이고, 대신 초식의 변화를 6개로 늘렸다. 다시 말해 90초를 54초로 줄인 거야. 하지만 54초를 다시 줄이면 3초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럼 결과적으로 3초만 익히면 되는 거냐?”
“그건 아니야. 3초는 앞선 54초의 정화(精華)가 담긴 초식이기 때문에 54초를 완벽하게 익혀야 익힐 수 있어.”
“뭐가 그렇게 복잡해. 말로 설명하지 말고 한번 보여줘~”
풍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도치가 가져온 도(刀)를 들었다.
“먼저 54초가 연속해서 펼쳐지니까 잘 봐~”
풍운은 도(刀)를 가슴 앞에 세우더니 힘찬 기함소리와 함께 도(刀)를 휘둘렸다. 도치는 풍운이 펼치는 사사무량도법을 보고 넋을 잃었다. 풍운은 기(氣)를 사용하지 않고 초식만 펼치고 있다. 그런데도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빠르게 움직이는 도(刀)의 잔상(殘像)들이 춤을 춘다.
“잘 봤어.”
풍운은 순식간에 54초를 모두 펼치고 도(刀)를 거두었다.
“보긴 봤는데, 뭐가 뭔지 모르겠어. 그냥 빠르고 힘찬 도법이라는 느낌 정도야.”
“본래의 사사무량도법은 잔인하면서도 부드러우며, 힘찬 기상(氣像)과 함께 정교함이 적절하게 조화된 도법(刀法)이야. 하지만 방금 보여준 사사무량도법은 정교함이 떨어지는 단점은 있으나 잔인하고 패도적인 측면에서는 본래의 사사무량도법보다 위력적인 도법이라고 할 수 있어. 쉽게 말해 공격과 수비가 적절하게 조화된 사사무량도법을 공격일변도의 도법으로 고친거야.”
“이론적인 설명은 필요 없고 어떻게 펼치는지만 알려줘~”
“내가 처음부터 말했지. 너를 가르칠 동안만큼은 우린 사제지간이야. 그러니까 입 닫치고 끝까지 들어.”
풍운이 정색(正色)을 하며 말하자 도치는 입을 다물고 얼굴을 씰룩거린다. 불만이 가득하지만 감히 풍운의 말에 토를 달지 못한다.
“이번에는 54초를 요약한 3초를 설명해 줄게. 제1초 섬도(閃刀)는 전광석화처럼 빠른 초식이야. 제2초 환도(幻刀)는 무수한 변화가 내표된 초식이며, 제3초 붕도(崩刀)는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도법, 즉 패도(覇道)라고도 할 수 있어.”
“............”
“방금 설명한 섬도, 환도, 붕도를 전삼초라고 하는데, 전삼초를 완벽하게 익히게 되면 후삼초를 배울 수 있어. 후삼초는 도령(刀零), 도환(刀環), 도광(刀光)이라는 초식인데 이건 아직 나도 완벽하게 익히지 못했기 때문에 보여주긴 힘들어.”
풍운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도(刀)를 들었다.
“섬(閃)은 일체의 변화를 배제한 직선(直線)이라고 생각하면 돼.”
풍운이 들고 있던 도(刀)가 부르르 떨리니 이장밖에 있는 나무가 허리가 베어져 한쪽으로 쓰려졌다.
“환(幻)은 54초의 변화가 모두 내포되었다고 생각하면 돼.”
풍운이 도(刀)를 좌우로 크게 베니 무수한 도영(刀影)들이 피어났다. 도치는 간단하게만 보이는 환도의 초식에 무수히 많은 변화가 숨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붕(崩)은 패도라고 생각하면 돼. 느리지만 가장 강력한 위력을 가지고 있는 초식이다.”
도치는 마른침을 삼키며 도(刀)의 움직임에 주시했다. 그런데 도(刀)가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움직이더니 천둥소리와 함께 멀리 있는 바위가 반으로 갈라진다.
“모두 봤어!”
“보긴 본 것 같은데...........도무지 어떻게 펼치는지 모르겠어.”
“하나하나 배우다보면 알게 될 거야. 그리고 지금까지 펼친 초식들은 기(氣)를 사용하지 않았어. 기(氣)를 사용하면 위력이 달라지겠지?”
“기(氣)가 뭐야”
“미안! 내공이야. 지금부터 한 초식씩 알려줄게”
풍운은 도치에게 도(刀)를 주고 자신은 나뭇가지를 들었다. 풍운이 먼저 초식을 펼치면, 도치는 풍운을 보고 따라한다. 그럼 풍운은 도치의 자세를 교정해주며 초식의 변화를 설명한다. 도치는 말이 아니라 직접 몸으로 알려주기 시작하자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빠른 속도로 사사무량도법을 배워나갔다. 마령월광도법을 익히며 도법(刀法)에 대한 기본지식을 가지고 있던 도치는 오일이라는 짧은 시간에 풍운이 알려준 사사무량도법을 오성수준까지 익혔다. 풍운은 도치에게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자 자신도 새로 익히기 시작한 음양권 등을 수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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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성은 양자강, 민강[岷江], 타강[타;江], 가능강[嘉陵江]의 4대 강이 성내를 흐르기 때문에 ‘四川’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한족(漢族) 이외에 이족[彛族], 장족[藏族], 묘족[苗族], 회족[回族], 강족[羌族] 등 여러 종족이 살고 있으며 동쪽의 사천분지[四川盆地]와 서부고원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사천분지는 적색 토양으로 구성되어 있어 ‘적색분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분지 주위에는 대량산[大凉山], 민산[岷山], 대파산[大巴山], 무산[巫山] 등의 산지와 고원이 펼쳐진다. 분지(盆地)는 광대하고 비옥한 선상지 청두평원도 있으나 고원의 대부분은 파상지를 이루고 있다. 청장고원[靑藏高原] 남동쪽의 서부고원은 원래 서강성[西康省]의 주요 지역으로 대부분이 높은 지형을 이르고 있다. 산맥이나 하곡은 북서쪽에서 남서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많고, 하곡은 깎아지른 듯한 협곡을 이루는가 하면 공알산[貢알山]처럼 1년 내내 눈이 덮여 있는 산도 있다. 하천은 모두 양자강 수계에 속하고 양자강의 본류가 무산을 횡단하는 성의 경계에는 예로부터 험하기로 이름난 삼협[三峽]가 나타난다. 동부분지에서는 겨울이 따뜻하고 여름에 극심한 무더위가 계속되며 ‘촉(蜀)의 개는 해를 보면 짖는다.’는 말이 있을 만큼 안개가 잦다. 그 반면 서부고원은 서늘하고 건조한 기후를 나타낸다.
사천으로 출발한 금막비일행은 감숙성과 사천성의 경계에 있는 청천(靑川)에 도착했다. 사람들의 통행이 잦은 관도를 통하지 않고 산길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막비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닫으며 당령과 귀왕사영을 둘려보았다. 당령과 귀왕사영은 계속된 강행군에 지칠 만도하지만 표정만은 무척이나 밝다.
“당령! 힘들지 않아. 힘들면 쉬었다가자.”
“오늘 중으로 평무(平武)까지 가려면 서둘러야 해요.”
“여기서 평무까지 거리가 얼만데........무리가 아닐까?”
“서두르면 가능해요.”
“서둘러 가는 것도 좋지만 지금까지 편히 쉬지도 못하고 노숙만 하면서 왔어. 여기서 더 무리하면 병난다.”
“힘드세요? 그럼 천천히 가요.”
“그래, 일단 쉬면서 배나 채우고 다시 출발하자.”
금막비는 등짐에서 건량과 물주머니를 꺼내 당령에게 내밀었다.
“비랑이 먼저 드세요.”
“또 꺼내면 돼. 자~ 물부터 마셔.”
당령은 사양하지 않고 물주머니를 받아 물을 마신다. 금막비는 당령이 물을 마시는 모습을 보고 귀왕사영을 돌아보니 그들도 각자의 등짐에서 건량을 꺼내먹고 있었다.
“자네들은 힘들지 않아.”
“저희들이야 걱정 없습니다. 다만 당령님이 걱정이네요.”
귀왕사영은 가족들을 만난다는 기대감에 힘들 줄도 모르는 모양이다. 금막비일행은 간단한 식사를 끝내고 사천당가가 있는 성도를 향해 다시 출발했다.
성도(成都)는 사천성의 성도(成都)로 사천분지 서부, 서도평원 중앙에 위치한다. 전국시대부터 있던 도시로, 춘추전국시대에는 촉(蜀)의 수도였다. 진(秦), 전한(前漢) 때는 촉군(蜀郡)이 관할하는 성도현[成都縣]이 설치되었고, 후한(後漢) 때에는 익주[益州]의 통치도 겸하게 하였다. 삼국시대 때 유비(劉備)가 촉한을 통일하고 이곳에다 수도를 건립하여 촉한(蜀漢)의 중심지로서 번영하였으며 당(唐)의 현종(玄宗)은 안사의 난 때에 이곳으로 피신하였다. 수당(隨唐) 시대 때는 장안[長安], 양주[揚州], 둔황[敦煌]과 같이 4대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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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인살막의 냉하상은 차가운 폭포수에 목욕을 마치고 미리 준비한 궁장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반 토막밖에 남지 않은 광천혈도를 들고 마지막 남은 면사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향상 면사를 쓰고 다녔기 때문에 하녀가 면사까지 준비한 모양이다. 냉하상은 면사를 만지작거리더니 계곡에 던져버렸다.
“사영(死影), 사영 거기 있어.”
“부르셨습니까?”
멀리서 냉하상을 지켜보고 있던 사영이 냉하상의 앞에 나타났다.
“알아보라고 한건 알아봤어.”
“혈부광랑과 나머지 일행은 감숙성에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확한 위치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돈은 얼마든지 써도 된다고 했잖아. 이틀의 시간을 더 주겠다. 개방, 천상루, 하오문(下午門) 등 모든 정보망을 이용해 혈부광랑의 위치를 알아내라.”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냉하상은 삼일 전에 사영을 불려 혈부광랑 도치의 위치를 알아보라고 지시했고, 사영은 동원 가능한 모든 문도들과 중원에 깔린 정보망을 이용해 도치의 행방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림산에서 증발한 십이사를 찾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십이사가 다른 사람들에게 발각(發覺)되지 않도록 워낙 조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영은 자신들의 힘만으로 십이사의 행방을 찾을 수없자 중원오대 정보망 중에 십이사와 연관된 장강수로십팔채와 대륙상회를 제외한 개방, 하오문, 천상루에서 돈을 주고라도 정보를 사오기로 했다. 하지만 그들도 십이사가 감숙성에 있다는 정도만 파악하고 있을 뿐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고 했다. 냉하상은 사영이 계곡을 내려가자 자신의 거처(居處)로 향했다.
“마, 막주님 오셨습니까?”
오랜만에 거처로 돌아온 냉하상을 보고 하녀가 말을 더듬는다. 3개월 만에 돌아온 냉하상이 너무 많이 변했기 때문이다. 먼저 예전부터 입던 옷이 헐렁한 것으로 보아 살이 많이 빠진 모양이다. 또한 예전부터 온건(溫乾)한 성품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잘 갈아놓은 검(劍)’처럼 날카로운 예기(銳氣-날카로운 기운)가 느껴진다. 하지만 가장 큰 변화는 향상 쓰고 다니던 면사를 쓰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배고프다. 음식을 준비해 다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냉하상이 방에 들어가 기다리고 있으니 하녀들이 음식들을 가져왔다.
“너무 수척(瘦瘠-여위고 마르다.)해 지셨어요. 많이 드세요.”
냉하상은 상에 차려진 음식들 중에서 기름진 음식을 치우고 채소와 곡식위주로 식사를 했다. 기름진 음식은 몸을 둔하게 하기 때문이다.
십이사의 행방을 찾기 위해 이틀이라는 시간은 결코 많은 시간이 아니었다. 사영은 저번에 배제한 장강수로십팔채와 대륙상회를 비롯하여 중원오대정보망과 이용 가능한 모든 사람들에게 돈을 뿌리며 십이사의 행방을 알아보았다. 이틀이라는 시간이 화살처럼 지나갔다. 사영(死影)은 이틀 동안 취합(聚合)한 정보를 종합하여 냉하상을 찾아갔다.
“혈부광랑의 위치는 알아냈어.”
“모든 정보를 취합해 보았지만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땅으로 꺼졌단 말이냐? 하늘로 솟았단 말이냐? 분명 어딘가에 있을 것이 아니냐?”
“확실한 정보는 아니지만 감숙성 난주에서 십이사를 보았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난주? 어디서 들어온 정보야?”
“배화교 시안에서 흘러나온 정보입니다.”
“배화교? 하긴 배화교 놈들이라면 십이사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을 거야? 난주란 말이지. 사영! 말과 건량을 준비해라. 오늘 당장 난주로 출발하겠다.”
“마차가 아니라 말을 준비하라는 말씀입니까?”
“마차는 속도가 너무 늘려. 말을 준비해.”
“알겠습니다.”
사영이 말과 건량을 준비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자 냉하상은 천일살막의 총관을 불렸다. 냉하상의 부름에 삼십대 중반의 총관이 눈썹이 휘날리게 달려왔다.
“부, 부르셨습니까?”
“앉으세요.”
총관은 불안한 눈으로 냉하상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지난 3개월 동안, 아예 폭포 옆에 움막을 짓고 무공수련에만 매달리던 냉하상이 자기를 보자고 했다. 그는 사영이 얼마 전부터 십이사의 행방을 조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요즘 제정상태가 어때요?”
“오영(五影)의 부상과 막주님의 활동중단으로 수입이 대폭적으로 줄어들었지만 그동안 벌어놓은 돈이 있어 그런대로 꾸려 가는데 지장은 없습니다.”
“다행이네요. 오영은 아직도 치료중입니까?”
“부상이 심한 2명은 아직 치료중이고 나머지는 회복훈련 중에 있으니 다음 달이면 다시 활동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다음달이면 다시 수입이 좋아지겠죠?”
“일감은 꾸준하게 들어오고 있으니 오영(五影)이 다시 활동한다면 좋아질 겁니다. 사실 사천당가일로 많이 걱정했는데, 그들도 떳떳하지 못하지 저번 일을 함구(緘口)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행한 일이죠.”
“사천당가라는 이름에 먹칠하고 싶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건 그렇고 총관님! 제가 없어도 큰 문제없겠죠?”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어디 가십니까?”
“감숙성 난주에 다녀올까 합니다.”
“난주라! 난주라면 길게 잡아도 한달이면 다녀오실 수 있겠죠? 뭐! 한달정도라면 막주님이 안 계셔도 큰일이야 나겠습니까?”
“한달이 걸릴지, 두 달이 걸릴지 몰라요. 어쩌면 몇 년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십이사의 암살에 실패하고 돌아온 냉하상은 그날부터 살막의 모든 일을 자신에게 일임(一任)하고 무공수련에만 매달렸다. 오영은 혈부광랑에게 당한 패배의 충격 때문일 거라고 했다. 총관은 냉하상 본인이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이유도 묻지 못하고 속만 끓이고 있었다. 그런데 끝내 우려했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냉하상은 천일살막에서 절대적인 존재다. 그녀가 있었기에 천인살막이 존재할 수 있었고, 그녀가 있기에 천인살막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냉하상은 천인살막에서 신(神)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인데 살막의 일까지 팽개치고 떠나시겠다는 겁니까?”
“저를 지탱해왔던 자존심이 무너졌습니다. 혈부광랑에게 당한 패배를 설욕(雪辱)하고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지 못하면 아무 일도 못할 것 같습니다.”
“잊으세요. 그냥 잊어버리시면 되지 않습니까?”
“놈에게 일점홍이 있어요. 일점홍을 찾기 위해서라도 놈을 찾아야 합니다.”
총관은 심각한 얼굴로 냉하상을 바라보다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냉하상의 말이나 표정으로 보아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그녀의 고집을 꺾지 못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살막 일은 걱정하지 마시고 다녀오세요.”
“고마워요. 총관님께 너무 무거운 짐을 떠맡긴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죄송한지 아시면 최대한 빨리 돌아오세요.”
“알았겠습니다. 식구들에게는 총관님께서 대신 알려주세요.”
“알겠습니다. 언제 떠나실 겁니까?”
“지금 당장 떠날 겁니다. 아참~ 사영(死影)을 남겨두고 갈게요. 힘든 일 있으면 사영에게 부탁하세요.”
“아니 그럼 혼자가시겠다는 겁니까?”
총관은 냉하상이 당연히 사영과 함께 가는 줄 알고 있었다. 사영은 냉하상의 그림자가 아닌가? 그런데 냉하상은 사영(死影)까지 남겨놓고 혼자 가겠다고 한다.
“이번일은 개인적인 일입니다. 공(公)과 사(私)는 구분해야죠. 사영도 살막에 소속된 식구 아닙니까?”
“사영은 전대막주님께서 특별히 막주님만을 위해 키운 분입니다? 당연히.......”
“그만 하세요. 이미 결정된 사항입니다. 사영에게 많이 도와달라고 하세요. 시간이 됐네요. 그만 일어날게요.”
“바로 출발하시는 겁니까?”
“가야죠. 배웅은 필요 없어요.”
냉하상은 광천혈도를 챙겨 밖으로 나가보니 사영이 말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사영! 총관님을 부탁해.”
“예? 무슨 말씀이세요. 함께 가는 거 아닙니까?”
“총관님 혼자서 힘드실 거야. 사영이 총관님의 힘이 되죠.”
“혈부광랑은 십이사들과 함께 있습니다. 혼자 가셨다가 놈들에게 험한 꼴이라도 당하시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래요.”
“이번일은 혈부광랑과 나와의 일이야. 다른 십이사가 나서는 일은 없을 거야.”
“세상일이란 모르는 겁니다.”
“나는 혈부광랑과 십이사들을 믿어. 그들은 결코 비겁한 사람들이 아니야.”
냉하상은 사영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말(馬)에 올라탔다.
“사영! 간다. 이라~”
사영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멀어지는 냉하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몰래 따라가야지.”
사영은 냉하상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뒤를 따라가려 했다.
“사영님! 혼자 가시게 두세요.”
사영이 뒤를 돌아보니 총관이 자신의 뒤로 있었다.
“어릴 적부터 오직 살막만 알고 살아오신 분입니다. 막주님께도 개인적인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총관님은 막주님이 어디 가시는지 알고나 그런 말씀하세요.”
“혈부광랑을 찾아간다고 하시더군요.”
“막주님께서 말씀하셨나 보군요. 그럼 무슨 일로 혈부광랑을 찾아가는지 아세요.”
“알고 있습니다.”
사영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다.
“아신다면 말리셔야죠. 혈부광랑은 다른 십이사들과 함께 있어요. 막주님 혼자서 그들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영님은 저보다 막주님에 대해 모르시는 군요. 막주님은 삶의 전부였던 설막을 팽개치고 혈부광랑을 찾아갔어요. 또한 향상 착용하시던 면사까지 벗으셨어요. 막주님께서 면사를 착용하셨던 이유가 뭐죠? 여자이기 전에 막주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인생보다 살막이 소중했기 때문에 여자로써의 삶을 포기하고 막주로써만 살기 위해 향상 면사를 쓰고 다니셨던 겁니다.”
“..............”
“막주님은 자신을 억압(抑壓)하던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혈부광랑을 찾아갔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모릅니다. 패배를 설욕하고 일점홍을 찾아 다시 돌아오실 수도 있고, 아니면 막주님 개인의 인생을 찾아 영영 돌아오시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만일에.........막주님이 끝내 돌아오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실 거죠?”
“막주님께서 우리들을 버릴 수는 있지만, 우리가 막주님을 버리진 못합니다. 제가 말려도 살막의 식구들이 막주님을 찾아갈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아직 막주님은 아무런 결정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또한 저는 막주님을 믿습니다.”
사영은 총관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다. 그도 냉하상이 혈부광랑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총관이 무슨 말을 하는지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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