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야사 - 21부
본문
21장 불운한 해후 2
대청안
대청안은 이미 거나하게 술이 돌아 취기가 오른 사람들의 목소리로 떠들썩했다.
대청안의 사람들은 모두 알게 모르게 고천성을 주시하며, 그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려 앞다투어 술을 권했다.
‘허, 대단하시오. 위기쌍마를 바둑판으로 패 죽이시다니, 내 그놈들 죽는 꼴을 봤어야 하는데……, 한잔 받으시지요. 고대협’
남궁준은 자신의 아들뻘도 안되는 고천성에게 장배를 대하는 듯한 깍듯한 태도로 술을 권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남궁가주. 하긴 그놈들 무공이 좀 쎄긴 쎄더구만요. 거기다가 혜매를보호하느라 마음도 분산됬지만, 그래도 제가 누굽니까? 떠벌떠벌’
칭찬만 들으면 겸손이 사라지는 병이 도진 고천성은 사공혜가 옆에서 꼬집는 대도 불구하고 계속 지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 놈이 맛이 간 놈 아닌가?’ 생각을 하면서도 남궁준은 맞장구를 칠수밖에 없었다.
귀왕이 누구인가? 100년전의 정사대전에서 정과사에 속하지 않는 문파들과 낭인무사들을 규합해서 혈수라성의 야욕을 분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신인이 아니던가?
고천성이 어리고 철없어 보여도 그의 뒤에는 언제던지 강호를 뒤엎을 수 있는 무시무시한 세력이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귀왕의 전인이기에……
혜아는 오늘따라 유달리 말이 많고 허풍이 심한 천성을 보며, 쪽팔리기도 했지만, 평소와 다른 그의 모습 속에서 이상함을 느꼈다.
오빠가 장난이 심하긴 해도 그렇게 앞뒤 분수 없이 설치는 또라이는 아닌데, 오늘은 왜 이렇게 과장되게 행동하지? 혹시, 아까 그 화부인 때문인가? 가만있자. 전에 오강현에 갔을때도 화가장을 찾았었는데? 혹시 그녀가 ? 에이 설마 그런 우연이 있으려고…… 아무튼 있다가 조용히 물어봐야 겠다.’
시간이 더 흘러, 천성은 여기저기서 권하는 술을 다 받아먹느라 이미 인사불성이 되었다.
‘이만 물러가서 쉬어야 되겠습니다.’
혜매가 천성을 부축하며 일어나려 하자, 이공자 황보승은 재빨리 시녀를 시켜 천성을 부축하도록 했으나, 혜아는 시녀를 물리치고 자신의 천성을 부축했다.
‘제가 하는게 더 편할 거예요’ 이런 말을 하며 혜아는 천성의 한쪽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치고 장내를 벗어났다.
‘음, 우리 이쁜 혜아구나. 그래, 집에 가야지,가만있자 이거 왜 땅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냐?’
‘아휴, 오라버니, 무슨 술을 그렇게 넙죽넙죽 다 받아먹어요? 좀 분수껏 먹어야지. 무림 명숙들 앞에서’
‘내가 이래봐도 주량이 해량(바닷물처럼 많다는 뜻)아니냐, 이 정도는 아직 괜찮아 끅.’
‘알았어요. 알았으니. 빨리 가자구요. 쪽팔려 죽겠네, 정말, 나중에 술 깨고 봐요. 내 가만히 안둘 테니’
천성의 부인이라도 된듯이 공중앞에서 그를 부축해 나가는 혜아를 보고 이공자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분노를 느꼈으나, 겉으로는 태연하게 잘 가라는 인사를 했다.
천성과 혜아가 사라지자 장내는 쥐 죽은듯이 고요해 졌다.
아무튼 고천성이 혜아를 돕고 있는 한 제왕성에서 혜아의 지지를 얻는 자 만이 보이지 않는 힘의 균형을 깨고 제왕성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장내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어쩌면 이런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위해 혜아가 천성을 부축해 나갔다는 생각이 들정도로……
‘참으셔야 합니다. 이공자. 지금으로선 혜아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세가군과의 싸움에서 이기려면 그의 힘이 절대적입니다. 확실한 힘의 우위만이 그들의 도발을 막을 수 있습니다. 승부의 관건은 공자님이 혜아의 지지를 얻느냐 못 얻느냐에 달려있습니다. 현재로선 참는 것이 약입니다.’
신기묘산은 아직 젊은 나이인 이공자의 성정을 아는지라 이렇게 충고했다.
‘나도 알고 있소. 총관, 그러나 나의 처나 다름없는 정혼녀를 저렇게 두어야 한다는 것이 서글프구료.’
천성의 방에 도착해
천성을 거의 끌다시피해서 침대에 눞혀놓은 혜아는 깊은 장탄식을 했다.
‘애구, 이 인간이 언제 이렇게 무거워졌다냐?’
천성을 보니 거의 인사불성이 된 것 같은데, 여자는 천성적으로 궁금한 것을 알지 못하고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법이다.
‘일어나봐요, 오라버니’ 혜아는 천성의 몸을 흔들어 보았으나, 천성이 아무 반응이 없자 그의 옆구리를 세게 꼬집었다.
‘윽’ 천성이 옆구리를 잡고 비명을 지르자, 역시 자신의 필살기의 효과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천성에게 물었다.
‘아까 왜 그랬어요?’
‘음, 누구야 , 혜아구나.’
‘아이구 우리 이쁜 혜야,’천성이 혜아를 꼭 끌어안으려 팔을 허우적 거리자 혜아는 몸을 살짝틀어, 피하며 다그쳤다.
‘아까부터 왜 자꾸 그렇게 술을 먹으며 허풍을 일삼았냐구요? 평소 오빠답지 않게….’
‘오빠?????’
‘천성은 혜아를 안으려던 자세에서 혜아가 빠져나가자 그대로 엎어진 상태로 잠들어 있었다. 코를 드르릉 골며……
‘아니 이 인간이 정말 사람 인내심 테스트하나? 야 이 잡놈아, 너 안 일어날래? 어디 한번 해보자 이거지. 좋아 나의 필살기 물어뜯기다.’ 혜아가 천성의 어깨를 물어뜯으려는 순간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아가씨, 잠자리 준비가 되었습니다.’
일부러 들으라고 크게 말한 소리에 혜아는 펄쩍 뛰어 일어나며, 옷 매무새를 고쳤다.
‘음, 오늘은 너 운좋은 줄 알아라. 오빠야. 하지만 내일은 각오하는게 좋을거야. 내 궁금한 것은 절대로 그냥 못 넘어가….. 이 나쁜 오빠야’
혜아는 중얼거리며 방을 나섰다.
‘휴, 큰일 날 뻔했네. 저것이 갈수록 내 상투잡고 놀려고 하는데, 앞으로 이거 교육시키려면 문제가 크겠는데…. 쩝. 갈수록 기고만장이니, 암튼 여자는 자고로 가정교육이 중요하다니까’
천성은 혼잣말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명히 그녀였어. 그녀가 어떻게 여기에 있게 된 거지? 그래. 맞아, 그때 그 잘생긴 공자, 비록 지금은 백치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때의 모습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 보면, 가희는 그와 결혼했구나. 그가 제왕성의 대공자 였다니….. 벌써 10년이 지난 일이건만 아직도 그녀를 보면 가슴이 뛰니…… 천성아, 천성아 정신차리자. 이제 그녀는 옛날의 화가장의 소공녀가 아니고 제왕성의 대부인 인 것을……’
고천성은 착잡한 심정을 되새기며 탁자위에 마련된 술을 비웠다.
‘그래 잊어버리자, 이미 철 없던 시절의 지난 일인데……’
‘어 벌써 술이 비었나?’
탁자위의 술은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거 참 제왕성도 째째하기 그지없군. 나 같은 귀빈한테도 술을 한병밖에 안 준비해 놓다니’
술이 어디있다냐? 음, 쿵
술을 찾으러 일어나던 고천성은 이내 바닥에 엎어져 인사불성이 되었다.
이미 환영회에서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그였지만, 화가희와의 재회로 너무충격을 받아
술이 취하는 줄도 모르다가 이제 좀 안정이 되자 술기운이 한꺼번에 올라와 거의 시체처럼넘어 간 것이다.
다음 날
해가 중천에 떠서야 천성은 잠에서 깰 수 있었다.
본능적으로 물을 찾던 그는 탁자에 놓인 주전자에서 물을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한 주전자의 물을 다 마신 그는 그제서야 어느정도 해갈이 되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찾기 시작했다.
‘음, 어제 분명히 탁자에 있는 술을 좀 먹은 거 같은데, 그 이후론 왜 기억이 하나도 안난다냐? 내가 요즘 술이 약해졌나? 아이구 골이야’
천성은 정신을 차린 후, 세수를 하려고 거울을 보니 누군가가 들어와서 세수를 해 준 듯이 온 몸이 깨끗한 것 아닌가?
‘흠, 이 정도면 죽이는 세숫대야란 말이야….. 흠흠흠’ 약간의 자기 만족의 시간을 갖은 천성은 천천히 문을 열고 나갔다.
영빈각의 정원 중간엔 탁자가 있는데, 사공혜는 거기서 황보승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혜매 걱정 많이 했어. 혜매 가문의 변고 소식을 듣고 제일먼저 달려갔는데, 혜매의 집안은 이미 잿더미로 변했더군. 불행 중 다행이라면 혜매의 시체가 보이지 않아서 혜매가 살아있기만을 바랬어. 이렇게 살아있는 혜매를 보게되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 더군다나 혜매는 내 정혼녀인데, 어느놈들이 장인어른의 가문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내 찾기만 하면 가만히 두지 않을거야.’
이공자는 뜨거운 눈길을 혜매에게 보내며 살며시 사공혜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혜매는 잡힌 손을 어찌할 줄 모르다 슬며시 빼려하는데, 이공자가 혜매의 손을 더욱 꼭 잡는 것이 아닌가?
‘혜매 3년 만인가? 내가 혜매를 얼마나 그리워 했는지 몰라. 그때는 그냥 이쁜 꼬마아가씨 같았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숙녀로 자라다니’ ‘혜매, 난 당신을
‘어, 오라버니 일어났어요?’
항상 사랑의 고백을 하려는 중요한 순간엔 웬 훼방꾼이 그리 많을까?
이번의 훼방꾼은 고천성이었다. 고천성이 문을 열고 나오는 소리에 혜매는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어 혜매, 벌써 일어났어? 안녕하시오 황보공자?’
‘어제 술이 과하셨나 봅니다. 고대협’ 황보승은 똥 씹은표정을 지었으나, 말에는 정중함을 잃지 않았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런 육시랄 놈 같으니, 늦지도 이르지도 않게 꼭 이때 나오는 건 뭐람? 이 놈 안에서 다 듣고 있다가 나 엿 먹이는거 아냐?
‘아니 뭐 과하게 먹은건 아닌거 같은데, 요즘 좀 술이 약해진 것 같소. 요즘, 뱀탕을 안먹어서 그러나, 이거 몸이 영 부실하네……’
‘허, 술을 그렇게 들이 붇고도 인사불성이 안되면 인간이 아닌데, 술이 약해지셔서 그렇다고요 고대협님? 혹시 오라버니 주대협 아니예요? ‘
혜아의 빈정거리는 말에 댓구 하기도 귀찮다는 듯 고천성은 탁자의 빈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혜매, 이건 확실히 느낀 건데 말이야, 불회곡을 나오면서 뱀을 좀 잡아 나올걸 그랬어. 여기 바깥음식이 말이야 기름지고 먹기는 좋은데 말이야, 아무래도 뱀탕만큼 양기 보충이 안되는 것 같애. 이정도 술에 취하기 까지 하고 말이야. 아깝다 쩝. 그때 그 10년묵은 복사만 먹었어도 한 1년 뱀탕 안 먹어도 되는데, 그 좋은 걸 어느 여자……’
‘야 고천성 너 죽을래?’ 혜매는 도끼눈을 뜨고 고천성을 노려 보았다.
‘아, 미안미안, 나으 시~~~일 쑤……더 이야기 안할께.’
‘너도 자존심이 있는데, 하긴, 어떤 여자는 쪽팔리면 죽기도 한다더라.’
‘그래도 정말?????’
혜아가 주먹을 들어 치자 천성은 능글맞게 피하며 약을 올렸다.
‘아주 매를 벌어요 매를. 아휴 내가 저 인간이 뭐가 이쁘다고 아침에 땅바닥에 자빠져 있는거 낑낑대고 일으켜 침대에 뉘여놔, 물받아다 씻겨, 내가 무슨 지 엄마도 아니고, 넌 언제 철들래 이 철없는 오빠야!!!!!!!!’
‘그런일이 있었어? 애구 미안하다 이쁜 혜아야. 내가 우리 혜매의 이런 이쁜 마음씀씀이도 모르고 놀리기만 했으니’
‘알았으면 앞으로 잘 모셔 이 인간아. 이렇게 나가면 앞으론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이공자는 둘의 노는 꼴을 보다보니 걷 잡을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남자의 질투일까?
‘내 집처럼 편하게 쉬십시오. 저는 공무가 있어서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혜매, 저녁때 내 집무실로 오시오. 가문의 일로 상의할 것이 있으니……’
‘알겠어요. 승오라버니.’
황보승은 포권을 한 후 뒤돌아 섰다. 그의 얼굴엔 분노의 기색을 감추는 것이 역력했다. 제왕성의 이공자가 언제 이토록 비참해 본적이 있던가? 강호의 모든 여인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자신 아닌가? 그런데 몇년만에 다시 재회한 자신의 정혼녀는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서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귀왕의 전인을 대동하고서……
항상 자신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사람들위에 군림하던 입장에서, 갑자기 뚱딴지 같이 나타난 무림의 신성, 실력으로나 보나, 배경으로 보나 자신은 고사하고, 자신의 아버지인 제왕성주라도 가볍게 대할 수 없는 귀왕의 전인, 그런 사람이 기껏해야 자기보다 3~4 더 들어보이는 이 애송이에게, 자신의 정혼녀가 마음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말할수 없는 열등감과 질투를 느꼈다.
‘두고봐라. 애송이 놈. 내 어떻게 하던지 제왕의 유전을 얻기만 하면, 네 놈을 제일먼저 죽여버리겠다. 혜매, 흐흐흐, 두고봐라. 너는 반드시 내 여자가 될 것이니까 ㅎㅎㅎㅎ’ 황보승은 마음속으로 이를 갈며 장내를 벗어났다.
‘오라버니, 어제 제왕성 대부인 정말 이쁘지요? 여자인 내가 봐도 정말 죽이게 생겼더라.’
사공혜는 슬슬 천성의 속내를 떠보기 시작했다.
‘호 이것봐라, 단수가 많이 높아졌는데’
천성은 속으로 생각하며 대답했다.
‘그런 미인이 나왔었어? 난 왜 기억이 하나도 안 나지? 기억나는 거라고는 쉬어빠진 늙탱이들하고 술 푼 거밖에 없으니……, 제왕성에 그런 미인이 있었다니, 쩝 이제라도 볼 수 있을가?’
‘오빠 정말 기억 안나요? 어제 오빠가 대부인을 뚫어져라 쳐다 보고 있었는데, 사람 민망하도록, 난 그래서 혹시 그 여자가 오빠의 죽고 못사는 첫사랑의 화가희 아닌가 했는데요? 성씨도 같은 화씨이고’
‘이게 웬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여기서 화가희가 왜 나오냐? 그리고 생각을 해봐라. 아무리 내 첫사랑이라고 하지만, 오강현 촌 구석에서 한 미모 해 봤자 군계일계인데,날고 기는 미녀들이 주변에 널린 대공자한테 그런 촌닭이 눈에나 들어오겠냐? 니가 보기에도 죽이는 미인이었다며, 화가희가 이쁘기는 했어도 그렇게 죽일 정도로 미인은 아니었거든……’
항상 이 인간하고 말을 섞으면 딱, 뭐라고 꼬집어 말을 하진 못하겠지만, 뭔가 모르게 속고있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여자의 천부적인 육감이 무언가 있다고 말을 하지만, 상대방의 논리가 워낙 정연하기 때문에 뭐라 반박할 수 없었다.
‘음, 그럼 오빠 심심한데 화가희 와 오빠의 이야기좀 해 줘봐요.’
‘음, 그당시 나는 오강현의 잘나가는 신동 이었고, 화가희는 주저리주저리……’
…… 뒤지게 맞던 나는 영감탱구한테 구함을 받아, 지금까지 그 치사한 영감탱구의 빚을 대신 갚아주고 있는 거라고’
혜아는 고천성의 이야기에서 별로 건질것이 없자, 짜증이나서 비비꼬기 시작했다.
‘뭐 별것도 아니네. 그냥 뭐 그렇고 그런 삼류 연애소설 이구만. 그런 걸 가지고 남자가 술먹고 질질 짠다냐? 가희야, 날 떠나지마, 가희야 가희야’ 아주 지난번에 가관이었는데’
‘사공혜 너 죽을래? 이게 요즘 오라버니가 좀 풀어놓으니까, 아주 상투끝까지 기어올라와요? 니가 사랑을 알아? 내 목숨까지 주어도 아깞지 않을 사랑을 해봤어?’
고천성의 진짜로 화난 표정을 보자, 사공혜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안해 오빠, 난 그냥 농담한건데, 오빠가 그렇게 화를 낼 줄은 몰랐어. 용서해 줘……’
‘흥,’ 고천성은 자리를 박차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공혜는 천성의 문닫는 소리에 심장이 철렁 내려 앉는 것을 느끼며, 안절부절했다.
천성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다시 생각하게 되자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방에 틀어 박혀서 술을 마시고 있었을까, 돌연 문을 뚫고 날아오는 화살의 기척을 느끼고 몸을 피하자 화살은 천성의 뒷편 벽에 박혔다. 비수의 끝에 묶여 있던 종이를 펼쳐 든 천성은 이내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동쪽 10리 밖 관제묘’
아주 간단한 글씨였지만, 고천성을 떨게 만든 건 글씨체였다. 10년을 보지 않았건만, 눈을 감아도 기억할 수 있는 그녀의 글씨체……
천성은 주저없이 창을 박차고 날아나갔다. 이제 어둠이 덮일 무렵이고 자신의 경공으로 반각이면 관제묘에 도착할 것이다. 그러면 꿈에도 그리는 그녀를 만날 수 있다. 이것이 꿈이 아니기를 천성은 달려 나가며 빌고 또 빌었다.
혜아는 방안에서 안절부절 하고 있었다. 천성의 첫사랑에 대한 질투심도 있고 해서 속을 좀 긁었는데, 천성이 그렇게 화를 낼 줄을 몰랐던 것이다.
‘오라버니 들어가도 되요? 저녁 먹어야지요. ‘
저녁때가 되어 화가 좀 풀렸겠지 하고 천성의 방문을 두드리는데 천성의 방문이 그냥 열리는 것이 아닌가? 어, 천성의 방에 들어간 혜아는 천성이 없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늘 싸우고 장난치고 욕하고 해도 그가 자신의 옆에 없다는 사실이 그렇게 공포스러울수가 없었다. 곁에 있을 땐 몰랐지만, 옆에 있으면 태산이 무너져도 아무런 걱정이 안되게 해 줄 사람, 잠시라도 없으면 마음이 뻥 뚤린 것 같은 허전함을 주는사람, 그런 존재감을 주는 사람이 잠시라도 자신의 옆에 없다는 사실이 혜아의 마음에 지극한 불안함을 주었다.
‘어디갔을까? 고천성 어디간거야? 어디갔을까?’
혜아는 매우 불안한 눈빛으로 방안을 서성 거리 길 반 각여, ……
‘아씨, 주인님이 식사 같이하시자고 하는데요……’ 시녀가 황보승의 전갈을알려왔다.
혜아는 시녀의 말을 듣고 이내 이공자와의 약속이 생각났다.
혜아는 가문의 멸문 이후로 혼자 있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그 동안은 줄곳 고천성과 함께 있어 몰랐는데, 그가 순간적으로 안보이자, 지극히 불안정한 심사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 그럼 어서 가자꾸나’ 혜아는 아무런 생각도 할 필요가 없다는 듯 바로 시녀를 따라 이공자의 집무실로 갔다.
‘안녕? 혜매……이리와 앉아’ 이공자는 아주 반가운 표정으로 혜매를 맞으며 혜매의 손을 잡아 끌었다.
‘안녕하세요? 승오라버니’
혜매는 감정이 실리지 않은 어조로 인사를 하며 앉았다.
‘자 우선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 하자구’
이공자는 혜매의 식성까지 고려해서 평소에 혜매가 즐겨먹는 요리들로 음식을 준비했다.
그러나, 천성에 대한 걱정으로 입맛이 없는 혜매는 깨작깨작 먹으며 술잔을 비워 나갔다.
이공자는 일부러 혜매와 자신의 어린시절 같이 놀던 이야기로 화제를 삼아 이야기를 하였다.처음에는 그냥 건성으로 맞장구나 치던 혜아는 어린시절 이야기를 하게되자 자신도 서서히 주제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때 마지막으로 혜매를 본게 삼년 전인데, 난 그때 한눈에 반해서 아버지에게 혜매와 결혼하게 해달라고 떼를 썼다구. 그래서 우리가 서로 정혼하게 된거구.’
이공자는 은근한 눈길을 보내며 혜매의 손을 잡았다.
‘혜매…..’
혜아가 아무리 어려운 들 어찌 황보승의 말뜻을 모르랴……혜매는 살며시 손을 빼 내며 말을 했다.
‘제가 뭐 어디가 이쁘다고, 저도 아버지의 정혼 이야기를 듣고 좋았어요. 아직 철없던 시절이라서 결혼이 무언지 잘은 몰랐지만, 오라버니처럼 잘생기고 무공도 강하고 나한테 잘해주는 자상한 남자들은 모든 소녀들의 백마탄 기사니까요. 그런데 그땐 너무 어렸던 것 같아요. 결혼이라는 건 일생을 함께 할 사람과 해야 하는 건데, 아직도 전 너무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게다가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아직 부모님의 복수를 갚지 못한 상태에서 더욱 결혼을 생각할 수도 없고, 아무래도 우리의 정혼은 파기 하는 것이 낳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혜매, 부모님의 복수 때문이라면 그건 내가 어떻게 든지 해 줄수 있어. 단지, 너무나 완벽한 사건이기에 흉수를 찾는데 시간이 걸리겠지만……, 나를 믿어. 내가 반드시 부모님의 복수를 해 줄께. 정혼을 파기하자는 말은 못들은 것으로 하겠어. 나, 혜매를 사랑해. 이공자라는 불리한 신분을 뛰어넘어, 제왕성주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다 사랑하는 혜매에게 성주 부인이라는 신분을 선물로 주기위해서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해. 혜매’
황보승은 열정적인 열변을 토하며, 혜아의 손을 잡아 끌었다.
혜아는 그의 힘에 이끌려 중심을 잃고 그의 품에 안겼다.
‘안돼요 오라버니 이러지 말, 흡’
혜아는 몸부림치며 그의 품을 벗어나려 했으나, 순식간에 그의 억센 힘에 의해 자신의 입술을 뺏기자 어쩔 줄 모르고 멍해졌다. 이윽고 정신을 차려 그의 몸을 벗어나려 했지만, 그의 강인한 두 팔은 혜매를 꼭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자신의 입술을 벌리고 이빨을 두드려대는 그의 설육을 느끼는 순간, 혜아는 서서히 입술을 열었다.
‘윽,’ 황보승은 자신의 입을 두손으로 막으며 놀라 떨어져 나갔다. 혜아가 그의 혀를 물은 것이었다. 인체의 가장 약한 살 중에 하나가 혀가 아닌가? 다행히 혜아는 황보승을 해칠 생각은 없었기에 그의 혀를 너무 심하게 깨물지는 않아, 큰 상처는 없었으나, 고통을 주기엔 충분했다.
‘흑,흑,오라버니가 이렇게 파렴치한 줄은 몰랐어요. 나를 어떻게 보고, 이렇게 강제로 흑흑,’
혜아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 하자,
황보승은 재빨리 문앞을 막아서며, 말을 이었다.
‘혜매, 미안해. 내가 혜매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이성을 잃었어. 나를 용서해줘.’
‘알았어요. 실수로 인정할 테니, 그만 비켜주세요. 저 가보겠어요.’
‘안돼. 혜매, 혜매가 간다는 이야기는 나를 용서안한다는 거지, 제발 여기 남아서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줘. 응?’
간절하게 애걸하는 황보승을 보자 혜매는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예전에 내가 좋아했던 오빠이자 정혼녀가 아닌가?
‘’다시 이상한 짓 하면 그땐 오빠얼굴 다시 안 볼줄 알아요.’ 다짐을 하며 혜아는 자리에 주저 앉았다.
‘고마워 혜매.’
‘혜매, 일단 우리의 정혼이야기는 혜매 말대로 뒤로 미루기로 하지.’
‘그 대신에 혜매에게 부탁할 것이 하나 있어.’
‘무슨 부탁이요?’
‘혜매도 알다시피, 비록 형님이 백치가 됬지만, 그는엄연한 대공자고, 나는 2공자라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거든’
‘그리고 멍청한 대공자라는 것은 수렴청정을 하기엔 더 없이 훌륭한 꼭두각시지’
‘혜매도 알다시피 대공자를 이용해 권력을 장악하려는 세가군에서 이미 형수를 포섭한 상태이고, 난 오직 황보세가의 가신들로부터 지지를 받는상태이고, 현재까지는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지만, 실제로 세가군들이 모두 결집되면 결국 우리 황보세가는 외인들에게 제왕성을 내주는 꼴이된다구.’
‘예, 오라버니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죠?’
‘혜매가 제왕성의 안식구가 되는 것은 나중일 이지만, 우리가 피땀흘려 이룬 제왕성을 남궁준 나부랑이한테 고스란히 바친다는 건 생각하기도 싫다고….. 그러니 혜매가 나를 좀 도와줬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내가 무엇을 도와줄 수 있나구요?’
‘아버지가 실종된 후, 난 아버지만이 들어갈 수 있는 성주의 밀실에 몰래 들어간 적이 있지.난 어려서부터 기관진식등을 연구하기를 좋아해서 그쪽관련 대가들에게 많이 배웠는데, 아버지의 실종 후 단서를 찾기위해 아버지의 처소로 갔다가, 교묘하게 설계된 밀실을 발견하게 되었지. 거기서 난 아주 귀중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어.’
헉, 사공혜는 안색이 침중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제왕밀부에 관한 것, 난, 혜매도 알 거라고 생각해. 아마, 혜매의 가문도 그것 때문에 멸문지화를 입지 않았을까?’
‘당신이 그걸 어떻게 흡….’혜매는 자신이 말 실수를 한 것을 알았지만, 이미 주워담기엔 너무 늦었다.
‘역시 혜매도 알고 있었군. 그럼 간단하게 이야기 할께.’
‘제왕성주만 알고 있어야 할 제왕밀부의 이야기가 어떻게 외부로 유출되었는지 나도 모르지만, 혜매와 내가 힘을 합해 제왕밀부를 열어야만 해.’
혜아는 두려움에 떨며 뒤로 물러났다.
‘당신이 가문의 흉수가 아니라고 어떻게 증명하죠?’
‘생각해봐 혜매. 난 지금 제왕성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라구. 내가 움직일때마다 수많은 첩자들이 들러 붙는다구. 지금 내가 혜매를 만나고 있는 사실까지 아마 낱낱이 세가측에 보고되고 있을 껄?’
‘그런 내가 제왕성을 나가 그것도 하룻밤새에 강남제일가를 쥐도새도 없이 무림에서 지워버릴 수 있는 능력이 있을꺼 같애? 설령 있다고 쳐도 아마 나는 세가군들의 첩보로 인해 무림에서 제명될거야. 그리고, 어차피 혜매는 내 아내가 될 상황인데, 내가 무엇이 아쉬워서 혜아의 가문을 없앨까? 오히려 내게는 가장 든든한 원군이 될 강남제일가를?
혜아는 그의 말에 침묵으로 수긍을 하며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그럼 도대체 누가 그랬을까요? ‘
사실 혜아가 이공자의 약속에 순순히 응한 것은 그를 통해 단서를 얻을까 하는 계산도 서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혜매의 도움이 필요한 이유야. 적들이 왜 강남제일가를 노렸는지 혜매는 알 테니까……’
좋아요 사실대로 말하지요.
‘확실히 적들은 제왕밀부를 노리고 왔어요. 나도 천성 오라버니가 아니었으면, 제왕밀부도 잃고 몸도….’ 혜매는 말을 이어가려다 처녀로서 부끄러워 못할말이 있는지라 말꼬리를 흐렸다.
‘후후, 천성 오라버니라, 혜매는 그 사람과 무척 다정한 것 같군.’
‘나를 죽음의 위기에서 몇 번이나 구해준 사람이니까요. 그가 없었다면 오늘 내가 이자리에 서 있지도 않았겠지요’
혜매는 몰랐지만, 천성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눈에서 생기가 도는 걸 보는 황보승은 분노의 감정을 느꼈다. 자신과 혜아사이에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일을 훼방하는 죽일 놈, 뭐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혜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 하지. 제왕밀부를 내게 빌려줘.’
‘예???’
‘현 시점에서 혜매의 힘으로 흉수를 찾아내거나 복수한다거나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란 걸 혜매도 알꺼야. 제왕밀부를 열어 제왕성의 진정한 힘을 이용해, 내분을 잠재운 후, 흉수를 찾으면 좀더 쉽지 않을까? 혜아의 아버지도 황보세가의 가신으로써 제왕성이 지금처럼 내분에 싸여 있는 건 좋아하시지 않을걸? 장인어른도 미래의 사위인 내가 제왕성의 성주가 됨으로서 현재의 어지러운 무림을 정리하는 걸 원하신다는 생각 안해봤어? 그렇지 않다면 제왕밀부를 열수있는 막대한 권력을 쥐고 있는 아버님이, 내게 혜매를 정혼시키지는 않았을 거라고……그래서 무림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혜매는 나와의 정혼을 이행해야만 한다구’
혜아는 고민에 빠졌다. 그의 이야기에는 하나도 틀린 구석이 없었던 것이다.
황보승은 혜아의 침묵을 즐기고 있었다. 그것은 곧 자신의 말에 마음이 무너지고 있다는 무언의 반증이니……
‘역시 아버지를 들먹이기를 잘했군. ㅎㅎㅎㅎ’ 황보승은 속으로 생각했다.
‘설령 제왕밀부의 장진도가 있다고 해도, 거기는 파진도가 없이는 들어갈수 없는 무시무시한 기관과 진식이 있을텐데,그건 어떻게 할거죠?’
‘자랑은 아니지만, 나의 기관진식에 대한 조예로 열수 없는 기관은 없다고 생각해. 그건 귀왕의전인의 파진도가 없더라도 다소 시간이 더 걸리는 문제일 뿐 근본적으로 제왕밀부를 열지 못한다고 믿지는 않아’
‘혜매, 나를 믿고 제왕밀부를 내게 넘겨줘’
황보승은 사공혜의 손을 잡고 간절히 말했다.
‘혜매에 대한 내 마음은 영원히 변치 않을거야 혜매, 우리의 미래를 생각해 봐 제왕성주와 제왕성주 부인이 되어 무림을 다스릴 미래 말이야’ 혜매!!!!!!…….
혜아는 혼란스러웠다.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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