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天上)의 향기 - 20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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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天上)의 향기 204(여리박빙(如履薄氷))-2
아침이 밝자 풍운이 이막수를 불렸다. 이막수와 유미림은 식사를 마치고 풍운을 찾아왔다.
“저를 보자고 하셨습니까?”
“오셔오세요. 미림님도 오셨군요. 자~ 앉으세요.”
풍운이 자리를 내주자 이막수와 유미림이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로 보자고 하셨습니까?”
“어제 밤에 조노인이 찾아왔어요. 어제 회의에 참석했던 노인 기억하시죠.”
“예! 알고 있습니다.”
“조노인이 림산의 지하에 대륙상회가 만들어놓은 비밀통로와 대전이 있다고 하더군요. 만일 금산반이 살아있다면 지하대전에 있을 것이니 자신과 함께 가보자고 하더군요.”
“그래요. 하긴 대륙상회가 림산을 근거지로 사용한지도 오래되었으니 그런 것이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죠. 그래서 조노인과 함께 가보시기로 하신 겁니까?”
“예! 대륙상회의 상황도 알아보아야하니 한번 가보려고 합니다.”
“.................”
“제가 이사님을 보자고 한건........이사님께 부탁이 있어서 보자고 했어요.”
“부탁은 무슨?........말씀만 하세요.”
“제가 없는 사이 이사님께서는 혁린무일행을 찾아보세요. 어제 조노인이 몇 군데 놈들이 숨을 만한 장소를 말해주었으니 그곳을 중심으로 찾아보면 어렵지 않을 겁니다. 이번 일은 다른 사람은 어려워요. 이사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미림과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풍운은 어제 조명국에게 들었던 장소를 이막수에게 말해주었다. 사실 림산일대에서 일천 명이 넘는 인원이 숨을 만한 장소는 그리 많지 않다. 조명국은 숲이 우거진 산과 계곡 그리고 넓은 갈대밭이 우겨진 강가를 말해주었다. 이막수와 유미림이 나가자 풍운은 옷을 걸치고 일어났다.
“다녀올게.”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특별한 위험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
풍운은 무경의 뺨에 가볍게 입맞춤을 하고 군막을 나서니 조명국이 미리 군막 앞에서 풍운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시죠. 안내하겠습니다.”
“잠깐만........어제 함께 회의에 참석하셨던 분은 누구죠.”
“풍하상단을 이끌고 있는 임상염이라고 하며, 저가 속해있는 림산연합의 대표 중 한명입니다. 그런데 왜 그걸 물어보시는 겁니까?”
“그분으로 역용을 할까 합니다.”
풍운이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다시 고개를 드니 30대 중반의 사내로 변해있었다. 조명국은 풍운의 모습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쳤다.
“세.......세상에 어떻게.”
“천면역용술이라는 겁니다. 얼굴뿐만 아니라 골격이나 목소리까지 변하기 때문에 쉽게 알아보기 힘들죠. 제가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여기계신 분들 외에 다른 분들께는 제가 은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비밀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금산반이나 대륙금위들에게도 비밀입니다.”
조명국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풍운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본다. 풍운의 모습은 임상염과 얼굴뿐만 아니라 목소리까지 똑같아 살이 맞대고 사는 부인이라도 임상염으로 착각할 정도다.
“보고도 믿을 수가 없군요. 하여튼 대단하세요.”
“방금 제가 했던 말은 드으셨습니까?”
“아예~ 알겠습니다. 비밀로 해야죠. 자~ 가시죠.”
임상염으로 역용한 풍운과 조명국은 흑도연합군이 있는 야산을 벗어나 림산으로 들어갔다. 림산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거리에 개미새끼 한 마리 찾아볼 수 없다. 조명국은 이층건물들이 즐비한 골목길로 들어가더니 허름한 건물로 들어갔다. 풍운은 건물로 들어가기 전에 천이통과 천안통으로 주위를 살펴보았다. 멀리 지붕위에 인기척이 들린다. 풍운은 수라기를 끌어올려 음양비로 순식간에 지붕위로 올라가보니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도망치고 있었다. 풍운의 손가락이 튕겨지자 하얀 강기(剛氣)가 사내의 등에 파고들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두시진 정도 지나면 혈도가 풀리니 그때까지 잠이나 한숨 자고 있게나.”
풍운은 다시 음양비로 밑으로 내려와 조명국을 따라 건물로 들어갔다.
“어딜 다녀오시는 겁니까?”
“우릴 감시하는 놈이 있더군요. 놈을 처리하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누가 우릴 감시하는 거죠.”
“글쎄요. 배화교일 수도 있고, 무림군일 수도 있겠죠. 하여튼 이제 미행하는 놈은 없으니 안심하세요. 그런데 이런 곳에 비밀통로가 있는 겁니까?”
“여러 곳에 입구가 있다고 알고 있지만 제가 알고 있는 통로는 여기밖에 없습니다.”
건물로 들어온 조명국은 몇 개의 문을 지나더니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제가 알고 있는 입구가 가까운 곳에 있었다면 저도 지하로 숨었을 겁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이런 곳에 있으니 지하로 숨을 시간도 없이 도망쳤죠.”
조명국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한쪽에 쌓아놓은 물건들을 치우고 작은 고리를 잡아당겼다.
“드르르륵~”
미세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갈라지며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난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풍운이 조명국보다 먼저 계단을 내려갔고, 조명국이 풍운의 뒤를 따라온다. 앞서가던 풍운이 벽에 걸린 횃불에 불을 붙여 조명국에게 주었다. 풍운이야 어둠에 구애받지 않지만 조명국은 아니지 않는가? 풍운의 앞에 두개의 갈림길이 나타났다. 조명국은 한쪽 길을 가르친다.
“왼쪽으로 난 통로는 무조건 림산 외부로 통하는 통로고 오른쪽은 내부로 통하는 통로입니다. 또한 내부로 통하는 모든 통로는 중안에 있는 대전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조명국의 설명을 들은 풍운은 오른쪽에 있는 통로를 따라가다 보니 다시 갈림길이 나타났다. 이번에도 풍운은 오른 통로를 따라가다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누군가 앞에 있군요. 조노인께서 먼저 가세요.”
풍운이 길을 비켜주자 조명국이 앞으로 나서서 가다보니 갑자기 금색무복을 입은 그림자가 조명국의 앞에 나타났다.
“누구냐?”
금색무복을 입은 사내는 허리에 차고 있는 검(劍)의 손잡이를 잡고 차갑게 물어본다. 당장이라도 발검(拔劍)할 자세다.
“림산연합의 조명국과 임상염이네.”
“조명국?”
사내는 조명국과 풍운을 살펴보더니 검(劍)을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죽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용케도 살아계셨군요. 그동안 어디 계시다 오신 겁니까.”
“난리(亂離)를 피해 옆에 있는 마을로 도망쳤다가 조금 전에 돌아오는 길이네. 다들 무사하신가?”
“따라오시죠. 가보면 아실 겁니다.”
사내는 조명국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자신이 앞서가니 조명국과 풍운도 사내를 따라갔다. 사내는 거대한 석문(石門)이 나타나자 석문에 새겨진 은자 중에 오른쪽에 있는 은자를 누르니 석문이 양쪽으로 갈라진다.
“들어가시죠. 저는 다시 가봐야 합니다.”
조명국은 풍운에게 눈짓하고 먼저 안으로 들어가니 풍운도 조명국을 따라 들어갔다. 사내는 풍운과 조명국이 안으로 들어가자 문을 닫고 본래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누구죠? 대단한 기도(氣度-몸에 도는 기운)를 가지고 있던데?”
“대륙금위입니다. 모두 돌아온 모양이네요. 자~ 가시죠. 자기 문만 통과하면 대전이 나올 겁니다.”
조명국이 통로를 지나 문을 열어보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거대한 지하대전이 나타났다. 조명국이 대전으로 들어서니 많은 사람들이 조명국과 임상염으로 역용한 풍운을 알아보고 달려왔다.
“아니 이사람........죽었는지 알았는데 살아있었군. 반갑네. 반가워~”
“어딜 갔다 지금 오는 건가? 우린 자네가 죽은 지 알았네.”
“하하하~ 운이 좋았지. 그런데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인가?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갔지”
“회의실에 또 있어. 다른 분들은 회장님과 회의 중이네요.”
“회장님?..........아니 회장님이 살아계셨던 말인가?”
“우리도 돌아가신 줄 알았는데 살아계시더군.”
풍운에게도 많은 사람들이 와서 인사를 했다. 모두 임상염으로 알고 인사를 하는 것이다. 풍운은 대충 인사만하고 주위를 돌아보니 대전은 수백 명을 수용할 정도로 넓었고, 벽면 곳곳에 통로와는 별개로 많은 문들이 달려 있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음식창고와 약품창고 등을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일단 회장님께 인사라도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풍운이 오랜만에 만나 친우(親友)들과 정담을 나누고 있는 조명국에게 말했다.
“그래야죠. 나는 회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오겠네.”
조명국은 사람들 틈을 빠져나와 풍운을 한쪽 벽으로 안내했다. 벽에 대회장(大會場)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고, 그 밑에 커다란 문이 있다. 조명국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직사각형의 긴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많은 사람들이 앉아있는데 상석에는 금산반이 앉아 있었다.
“아니 자네도 살아 있었나. 반갑네.”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나 조명국에게 달려와 손을 잡았다.
“자네도 용케 살아 있었군. 반갑네. 인사는 나중에 하세. 우선 회장님께 인사부터 드려야지.”
조명국은 사내의 어깨를 두드리고 상석에 있는 금산반에게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회장님께 인사드립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자네도 무사해서 다행이네. 저기 빈자리가 있으니 자네도 앉게. 림산연합의 지회장이니 회의에 참석할 자격이 충분하지.”
“알겠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죠.”
조명국은 풍운을 데리고 물려나더니 한쪽에 있는 빈자리에 앉았다.
“잠시 회의가 중단되었는데.........계속하겠네. 아침에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사해방의 사해맹룡이 무사들이 이끌고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하네. 그리고 상관장로로 보이는 사람이 무사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정보도 있네.”
“회장님..........과연 우리가 그들을 물리칠 수 있는 겁니까?”
“대륙금위들이 있으니 사해맹룡 정도는 걱정 할 것도 없네. 문제는 상관장로야. 우리가 먼저 찾아서 목을 따버렸으면 걱정할 것도 없었는데 끝내 우리의 우려대로 그동안 비밀리에 키운 무사들과 함유한 모양이야. 더 큰 문제는 배화교 놈들도 우리 뒤통수를 노리고 있다는 거야.”
“회장님!........회장님 말씀대로라면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에게 승산(勝算)이 없습니다. 무슨 대책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냉정하게 말해서 없네. 그나마 한 가지 방법이라면 도망치는 거네.”
“예? 도망이요? 림산을 버리고 어디로 도망친다는 말씀입니까?”
“육철량이나 상관장로가 우릴 살려줄 것 같은가? 우리가 항복한다고 살려줄까? 아마 한사람도 남김없이 모두 죽이려고 할 거야.”
“관(官)에 도움을 청해 보시죠. 악양왕님께서 부탁하면 되지 않습니까?”
“늦었네. 관군(官軍)이 지금 출발한다 해도 이곳에 도착하려면 족히 삼일이상은 걸려. 더구나 이민 한번 도와주셨는데 또 도움을 청하기는 어렵네.”
“그럼 어떻게 하시겠다는 겁니까? 이대로 죽자는 말씀입니까?”
“도망치는 방법이 있다고 했네. 모두 오늘 중으로 짐을 챙겨서 떠나게. 자네들에게 이 말을 하려고 보자고 했네.”
“떠..........떠나다니요. 저희들 보고 어디로 가라는 말씀입니까?”
“오늘 저녁이면 사해맹룡의 무사들과 상관장로의 무사들이 도착할 거네. 그럼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갈 길이 없어.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모두 짐을 챙겨서 가란 말이야. 나는 회장으로써 이곳에 뼈를 묶을 수밖에 없지만 자네들은 아니지 않는가? 육철량이나 상관장로도 나를 죽이고 림산만 장악하면 굳이 자네들을 쫒지는 않을 거네.”
회의장에 모인 사람들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서로의 눈치만 본다. 대륙금위들만으로 사해방 무사들과 상관장로의 무사들을 물리치기라 사실상 어렵다. 거기다가 배화교잔당들도 사해방을 돕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들이 이길 확률은 백에 일도 되지 않는다. 불가능에 가깝다는 말이다. 회장은 승산 없는 싸움이니 도망치라고 한다. 그렇다고 ‘예! 알겠습니다.’하고 당장 도망치는 것도 눈치가 보일 것이다. 그때 잠자고 듣고 있던 조명국이 입을 열었다.
“회장님. 처음부터 안 된다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안되는 겁니다. 대륙금위들이 비록 오백 명밖에 되지 않지만 모두 무림일류고수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겉에는 지금 당장이라도 도움을 청하면 흔쾌히 도와줄 분들이 있습니다. 회장님께서는 왜 그분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조명국이 답답한 듯이 말하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조명국에게 집중되었다.
“방금 우릴 도와줄 분들이 있다고 하셨습니까? 누구죠. 어떤 분들이죠.”
조명국의 겉에 있는 사람이 답답하다는 듯이 물어보자 조명국은 뒤에 있는 풍운을 돌아보았다. 풍운에게 이야기해도 되는지 물어보는 눈치다.
‘은자 이야기만 빼고 말씀하셔도 됩니다.’
풍운의 전음이 조명국의 귀에 파고들자 조명국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금산반을 돌아본다. 금산반은 딱딱하게 굳는 얼굴로 말없이 조명국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그동안 어디에 있었는지부터 말씀드리는 것이 순서 같군요. 저는 그동안 흑도연합군과 함께 있었습니다. 사해방 무사들에게 쫒기고 있을 때, 흑도연합군이 나타나 저를 구해주었고 지금까지 그들의 보호를 받고 있었습니다.”
“웅성~ 웅성~”
조명국의 말에 장내가 술렁거린다.
“모두 조용히 해. 흑도연합군이란 누구를 말하는 거냐.”
“자세한 것은 그분들의 허락을 받지 않아 말씀드릴 수 없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천마마련, 사사천교, 배교 등에서 나오신 분들이었다는 것은 말씀드리죠. 그리고 그분들과 함께 사호팔랑님들도 함께 계십니다.”
“끙~ 우리 일에 무림인들을 끌어들이자는 말이군. 더구나 무림공적인 사호팔랑까지 함께 있는데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자........그게 얼마나 위험한 발상(發想)인지 알고나 있는 건가? 지금 세상은 누가 뭐라 해도 구파일방과 칠대세가의 세상이다. 물건 하나를 팔려고 해도 그들의 눈치를 보아야하는 세상인데 흑도 나부랭이들의 도움을 받아?...........구파일방과 칠대세가가 눈에 불을 키고 못 죽어야 안달하는 사호팔랑의 도움을 받아?.............아예 대륙상회를 말아먹자는 말이냐?”
“지금 우리가 찬밥, 더운 밥 가릴 때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당장 죽는 것보다는 낮지 않습니까?”
“닫쳐라. 차라리 육철량과 상관장로의 아가리에 대륙상회를 처넣는 일이 있어도 그놈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상관장로와 육철량도 대륙상회가 망하는 것은 원치 않으니 우리가 죽어도 대륙상회는 남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흑도 나부랭이들과 사호팔랑 놈들의 도움을 받으면 어떻게 될 것 같아. 바로 대륙상회 전체가 망하는 거야.”
(배화교의 주구(走狗-사냥개의 뜻으로, 남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사람을 비유(比喩)해 이르는 말)가 되어 중원의 역적(逆賊)이 되어도 살아남기만 하면 된다는 말인가?)
풍운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을 억지로 참고 차가운 눈으로 금산반을 바라보았다.
금산반이 풍운일행이나 흑도연합군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세상은 누가 뭐라 해도 구파일방과 칠대세가의 세상이다. 대륙 어디를 가도 구파일방과 칠대세가의 영향력이 미치는 않는 곳이 없다. 대륙상회는 장사를 생업(生業)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만일 구파일방과 칠대세가가 장사를 방해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대륙상회가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회장님의 뜻이 그렇다면 할 수 없죠. 여러분........여러분도 회장님과 같은 의견입니다. 죽어도 흑도연합군과 사호팔랑님들에게 도움을 받으면 안 되는 겁니까?”
조명국이 사람들을 둘려보며 말하니 모두들 입을 다물고 조명국의 눈길을 피한다. 회장이나 조명국 누구의 편도 들기 어려운 입장이기 때문이다.
“다들 말씀들이 없군요. 좋습니다. 여러분께 한 가지만 물어보겠습니다. 만일 은자의 주인이 나타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조명국은 풍운이 밝히지 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은자 이야기를 꺼내고 말았다.
“은자? 칠백 전부터 전해오는 그 은자 이야기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바로 그 은자의 주인을 말하는 겁니다. 회칙에 은자의 주인이 나타나면 여러분의 재산뿐만 아니라 대륙상회 재산의 삼분의 이를 그분에게 드리기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가당치는 않는 소리.........지금 이 시점에서 왜 갑자기 은자 이야기가 튀어나와..........그리고 칠백년 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은자의 주인이 어떻게 갑자기 나타난단 말이냐.”
금산반이 차갑게 말하자 조명국이 금산반을 똑바로 응시했다.
“은자의 주인이 나타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기가 막히는군........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은자의 주인이 나타나면 재산을 주어야겠지.”
“림산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무슨 돈이 있어서 드립니까. 좋습니다. 돈이 있다고 쳐요. 가진 재산 중 삼분이 이를 그분께 드릴다고 쳐요. 점포는 박살나고 점원들도 뿔뿔이 흩어졌어요. 이런 상태에서 전 재산의 삼분의 이를 주면 대륙상회가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죠.”
“꽈아아앙~”
“더 이상 참겠군.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지금 상황에서 은자의 주인이 왜 나와!”
금산반은 짜증이 나는지 탁자를 치며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르니 장내가 사늘하게 변한다. 조명국은 입술을 깨물고 눈을 감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풍운을 향해 허리를 숙인다.
“마수마랑님.........죄송합니다. 더 이상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대로 대륙상회가 망하는 것을 지켜볼 수 없습니다.”
풍운은 쓰게 웃더니 품속에서 은자를 꺼내 탁자에 던졌다.
“드르르르르~”
횃불에 반짝거리는 은자가 탁자를 타고 굴려가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은자에 집중되었다. 조용한 실내에 은자 굴려가는 소리와 침 넘어가는 소리만이 들린다.
“또르르르~”
탁자를 굴려가던 은자가 금산반 앞에 멈추니 금산반은 떨리는 손으로 은자를 들어 이리저리 살펴본다.
“어..........어떻게 이럴 수가..........이게 어떻게 자네 손에 있는 거지.”
금산반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풍운을 바라본다.
“칠백년 전에 당신들 조상들이 은인에게 드렸던 은자가 확실한가요.”
풍운의 목소리는 어느새 본래의 목소리로 변해 있었다.
“화..........확실하네. 그런데 왜 하나지. 본래 두개가 아니가.”
풍운은 나머지 은자를 꺼내 조용히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잠깐 고개를 숙여 역용을 풀고 고개를 들었다. 금산반은 두 개의 은자를 바라보다가 풍운의 얼굴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의자에 주저앉았다.
“다.........당신이 어떻게........당신은 마수마랑 아닙니까?”
금산반은 악양왕부에서 풍운의 진짜 얼굴을 보았기 때문에 풍운을 기억하고 있다. 풍운처럼 아름다운 남자를 어찌 잊어먹겠는가?
“맞습니다. 마수마랑입니다. 본래 은자의 주인이 제가 아니라서 끝까지 감추려 했지만 조노인께서 밝히셨으니 어쩔 수가 없군요.”
“다.........당신이 어떻게 이 은자를 가지고 있는 거죠.”
“칠백년 전에 당신들 조상들은 벽궁세가의 초대가주님께 이 은자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은자의 주인이 나타나면 은혜를 갖기로 맹세했습니다. 기억하고 계시겠죠? 하지만 제가 은자의 주인은 아닙니다. 아마 나중에 진정한 은자의 주인이 나타날 겁니다.”
“그럼 은자의 주인은 누구죠?”
“벽궁세가의 마지막 생존자인 벽궁수혜 아가씨입니다. 그분은 현재 배화교와 싸우시다 부상을 당해 북해빙궁에 계십니다.”
“벽궁수혜?........그럼 마검요호가 벽궁세가의 후손이었다는 말씀입니까?”
“잘 아시는 군요. 그럼 벽궁세가가 어떻게 멸문했는지도 아십니까? 벽궁세가는 배화교의 공격을 받아 멸문했습니다. 또한 저와 수혜아가씨를 훈련시켜 자신들의 사냥개로 만들어 이용만 하다가 죽이려 했죠. 저와 아가씨는 배화교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배화교가 대륙상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말이 길어지는데.........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
“여러분이 예뻐서 돕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은자의 주인으로써 여러분을 돕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배화교..........그놈들이 대륙상회를 장악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을 돕겠다는 겁니다.”
“.............”
“돈.........필요 없어요. 초대 벽궁세가의 가주님인 온시랑께서는 당신에게 군자금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패망한 백제의 부흥을 위해 싸우고자할 때, 그때 필요한 돈을 여러분께 받으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백제는 이제 없습니다. 백제의 백성들은 이제 백제라는 나라조차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에게 돈을 받을 필요도 없고........명분도 없습니다. 선택은 여러분이 하시는 겁니다. 끝까지 우리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하시면 이만 물려가겠습니다.”
풍운의 말이 끝나자 장내에는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정적이 흐른다. 사람들은 이제 모두 금산반을 바라본다. 금산반이 과연 어떤 결정을 할지 숨죽이고 지켜보는 것이다. 금산반은 호흡이 거칠어지며 가늘게 떨고 있다. 그는 은자가 손바닥을 파고드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어찌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상대는 무림공적 마수마랑이기 전에 은자의 주인이다. 은자의 주인에게는 자신의 재산뿐만 아니라 대륙상회 재산의 삼분지 이를 주기로 회칙에 명시되어 있다. 림산이 박살난 지금 상태에서 재산의 삼분지 이를 준다면 조명국의 말대로 대륙상회가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런데 은자의 주인은 돈을 바라지 않는다. 다만 자신들을 돕고자 할 뿐이다. 금산반의 가슴 밑바닥에서 울컥하는 감정의 덩어리가 올라왔다.
“음~”
금산반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의자를 한쪽으로 치우고 바닥에 엎드린다.
“도와주세요. 대륙상회의 운명을 당신께 걸겠습니다. 도와주세요.”
금산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더니 끝내는 울먹이는 소리로 변한다. 금산반이 엎드리자 장내에 모여 있던 사람들도 모두 바닥에 엎드린다.
“도와주세요.”
풍운은 주위를 살펴보다가 엎드린 금산반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양손을 내밀어 금산반을 일으켜 세운다.
“어렵겠지만 우리가 힘을 합치면 이 난국(難局)을 극복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한 마음 한 뜻으로 힘을 합치면 아무리 강한 적(敵)이라도 능히 물리치수 있을 겁니다.”
“흐흐흐흑~ 아아아앙~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금산반은 끝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엉엉 소리 내며 울며 다시 바닥에 꿇어앉았다. 지금 상황에서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풍운에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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