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天上)의 향기 - 197부
본문
천상(天上)의 향기 197(칠백년의 약속)-30
밤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더욱 활기가 넘치는 곳이 있다. 오색(五色) 등(燈)으로 치장한 칠층 건물의 곳곳에서 풍악(風樂)소리가 그치질 않고 여인들의 간드러진 노래와 사내들의 음탕한 눈빛이 번듯이는 이곳은 중원제일의 기루라고 불리는 천상루였다. 천상루의 7층 창가에 아래층의 요란한 불빛과 시끄러운 소리를 뒤로하고 촛불하나만 밝힌 어두운 방에서 창밖으로 바라보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멍한 눈빛으로 밤하늘에 빛나는 달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달이 아니라 달과 겹쳐진 한 사내의 얼굴이었다.
천상루의 천급기녀라는 자신조차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
인세(人世)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절대 아름다움을 가진 남자.
너무나 아름답기에, 너무나 많은 여인들이 그를 사모(思慕)하며 그의 겉에 있기에 감히 다가갈 용기조차 나지 않는 남자..........그녀가 보고 있는 남자는 풍운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였다.
“삐걱”
방문이 열리며 한 여인을 들어와 창밖을 바라보는 여인을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이게 뭐니. 꼭~ 귀신 나올 같다.”
방에 들어온 여인이 탁자에 있는 나머지 촛불에 불을 밝히니 어둠이 물려나며 방안이 환해하게 밝아온다.
“야밤에 무슨 일이야. 특별한 일이라도 있어.”
“일은 무슨?.........꼭 일이 있어야 오니. 청승은 그만 떨고 이리 와서 앉아. 차라도 한잔 하자.”
방에 들어온 여인이 탁자에 있는 잔에 향긋한 차를 따르며 창밖을 바라보는 여인을 부른다. 창밖을 바라보던 여인은 창문을 닫고 여인의 앞에 앉았다. 두 여인모두 월궁항아 같은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이다. 바로 천상루의 천급기녀이자 북해빙궁의 사군자(四君子)들인 다정화와 해어화였다.
“아침에 본궁으로부터 연락이 왔어. 배화교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니 유심히 살펴보래.”
“림산에서의 일을 제외하면 특별한 일도 없잖아. 그런데 무슨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거야.”
“저번에 배화교에서 출발한 무사들이 옥문관을 넘어 중원에 들어왔다는 소식은 들었지.”
“그거야 혁린무를 돕기 위해 들어온 무사들이잖아.”
“알고 있구나. 본궁에서도 대륙상회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야. 대륙상회가 배화교에 넘어가는 것은 본궁도 원하지 않잖아. 너는 어떻게 될 것 같아.”
“뭐~ 대륙상회?...........글쎄...........혁린무공자가 대륙상회를 장악하기는 힘들어. 장강수로십팔채일과 비슷하게 흘려가지 않을까?”
“대륙상회도 장강수로십팔채처럼 십이사수중에 넘어간단 말이야.”
“그건 모르겠어. 하지만 최소한 배화교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야.”
“너는 십이사를 믿고 있구나.”
“지금까지의 결과가 말해주고 있잖아. 십이사들은 우리가 상상하던 것보다 더욱 대단한 사람들이야.”
“치~ 십이사가 아니라 마수마랑이 대단하겠지. 평생 남자보기를 돌같이 하던 너의 마음을 단번에 빼앗아 버렸으니 말이야. 안 그래?”
해어화의 말에 다정화는 피식 웃고 만다.
“내가 그분을 흠모(欽慕)하는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그건 남다른 의지를 가진 영웅에 대한 환호와 성공담 그리고 쾌감도일 뿐이지 남녀간의 사랑 따위는 아니야.”
“어라~ 이 계집애가 어려운 말까지 쓰네. 흠모? 환호?.......그게 남녀간의 사랑과 무슨 차이가 있어. 결론은 내가 그놈을 그리워하며 사랑하고 있다는 거잖아.”
“그분은 높은 곳에 계셔.......사모(思慕)하며 따르는 여인도 많아. 나 같은 계집 따위는 감히 사랑을 들먹일 자격도 없는 분이지.”
“지랄을 해라?.........그럼 궁아라는 뭐야? 벽궁수혜는 뭐야? 그년들은 고귀하고 성스러운 여자들이라 그놈과 놀아났어. 그년들과 내가 뭐가 틀려. 다 똑같은 여자잖아.”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아라는 우리 동생이고 수혜님은 그분이 모시던 아가씨야. 더구나 그녀들은 그분이 아파하실 것을 염려하여 천려빙백강시가 되면서까지 그분을 기다리기로 한 여인들이야. 그녀들의 사랑은 내가 감히 흉내조차 낼 수없는 고귀한 사랑이란 말이야.”
“웃기네. 사랑에 눈이 멀면 그렇게 되니. 모든 것이 좋게만 보여. 나는 그놈이 싫어. 그놈만 아니었다면 아라는 지금도 우리 겉에 있을 거야. 그리고 내가 이렇게 변하지도 않았겠지.”
해어화가 흥분하며 풍운을 욕하자 다정화는 씁쓸하게 웃으며 앞에 있던 차를 한 모금 마신다.
“해어화~ 알아. 네가 왜 흥분하는지, 네가 왜 그분을 싫어하는지 알아.........하지만 그분을 욕하지는 말라. 그리고 잠시만 더 시간을 줄래. 잊을게. 고이접어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절대 티내지 않을게. 예전의 다정화로 돌아갈게. 그러니까 시간을 줘~”
“휴~ 답답한 계집애.......사랑해선 안 될 남자를 사랑해서 어떻게 하자는 거니. 차라리 미친년처럼 달려가 사랑을 고백하고 매달리던가? 그럴 용기도 없는 년이 무슨 사랑을 하겠다는 거야.”
“알고 있다고 했잖아. 그래서 잊겠다고 했잖아. 우리 이제 다른 이야기하자. 배화교의 움직임은 어때. 본궁에서 특별한 소식은 없니.”
“미친년! 듣기 싫다 이거지. 알았다. 그만할게 그 대신.........잊어. 꼭 잊어야 해.........다른 이야기하자 배화교 놈들도 강시제련이 끝났다고 했어. 다만 본궁의 천려빙백강시에 필적(匹敵)하는.........무슨 강시라고 하더라........하여튼 그 강시의 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데.”
“그럼 모든 준비가 끝난 건가?”
“대부분 끝났다고 보아야겠지만 아직은 아니야.........아참~ 제2의 십이사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말 들었어?”
“제2의 십이사? 그게 무슨 말이야.”
“모르고 있었구나? 잠마동은 폐쇄(閉鎖)된 것이 아니야. 십이사가 출관(出官)한 이후 대대적으로 보수공사를 거쳐 또다시 2천명의 소년, 소녀들을 훈련시키고 있었는데 출관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정보야.”
“배화교가 한번 실패한 십이사를 다시 만들고 있다니........그놈들이 재정신이야.”
“이번에는 틀려. 아예 인간의 감정을 말살(抹殺)하고 살인기계를 만들고 있데.”
“그럼 강시를 만들었다는 말이야.”
“강시는 아니지. 희노애락(喜怒哀樂)같은 감정(感情)이 없을 뿐이지 살아있는 사람이야.”
“그게 뭐가 틀려. 감정이 없는 사람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
“그만하자.........흥분할 필요는 없잖아.”
다정화와 해어화가 한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여인 한명이 들어와 쪽지를 전해주었다. 해어화가 쪽지를 펼쳐보니 림산에서 벌어졌던 일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야산에 고립되어 있던 육철량을 혁린무가 구출하고........마양이 금이장군을 찾아갔다. 혁린무가 마지막 발악을 하는군.”
해어화는 쪽지를 다정화에게 전해주었다. 다정화도 쪽지에서 십이사의 움직임이 기록된 부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십이사가 이상한데........왜 움직임이 없지.”
“무림군 눈치를 보는 모양이지.”
“무림군?.......하긴 그들도 림산에 있지.”
“난 이만 일어나야겠다. 본궁에 림산의 상황을 보고해야지.”
해어화는 자리를 털고 있어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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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은 밤이 깊은 시간에 악무룡과 도치가 있는 방으로 갔다. 악무룡의 내상을 치료해주기 위해서다.
“일사님 오셨어요.”
풍운이 말없이 방문을 열자 침상 옆에 앉아있던 곽지향이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급하게 일어난다.
“죄송해요. 지향님이 계신 줄도 모르고..........”
“아니에요. 방금 일어나려던 참이었어요.”
곽지향은 얼굴이 붉어져서 총총걸음으로 풍운을 옆을 지나간다.
“지향님 잠깐만.......할말이 있어요.”
“무슨 말씀이죠?”
“아까 회의에서 제가 좀........”
“그 말씀이라면.........모두 잊었어요. 악무룡님도 잊으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모두 잊었으니 일사님도 마음에 두지 마세요.”
곽지향은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빠져나간다. 풍운은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무룡과 도치가 누워있는 침상으로 왔다.
“네가 잊으라고 했냐.”
풍운의 말에 무룡이 힘들게 고개를 끄덕거린다.
“도치 때문이라 걸 알고 있어요. 도치가 말해주더군요. 그래서 지향에게도 잊으라고 했어요.”
풍운은 도치와 무룡의 눈을 살펴보다가 빙긋 웃고 말았다.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서로의 눈빛으로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가 있다. 무룡은 도치와 풍운을 세상 누구보다 신뢰한다. 도치가 살수들의 말을 믿는다고 했다. 풍운은 도치를 믿겠다고 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왜 믿느냐? 이런 구차한 이야기는 필요 없다. 풍운과 도치가 믿는다면 믿으면 되는 것이다.
“도치는 외상(外傷)이 문제지 내상(內相)은 거의 치료되었을 거야. 이번에는 무룡의 내상을 치료해 줄게.”
“지향이 약을 주고 갔으니 먹으면 좋아질 겁니다.”
“약은 약이고........내가 해주고 싶어서 그래.”
풍운은 무룡을 안아 바닥에 앉힌 다음 등에 손바닥을 붙였다.
“지금부터 시작할게.”
풍운은 무룡의 내상이 깊기 때문에 처음에는 수라마령신공의 수라기로 치료를 시작했다. 무룡은 등을 통해 노도(怒濤)같은 수라기가 들어오자 내공구결에 따라 기(氣)를 인도(引導)하니 경락을 막고 있던 탁한 기운들이 물려나며 기(氣)의 흐름이 원활해진다. 풍운은 무룡이 내공을 일주천시키자 이번에는 선천강기를 끌어올려 무룡의 몸속에 불어 넣었다.
“끙~”
무룡은 엄청난 힘의 선천강기가 몰려오자 온몸이 찢어지고 오장육보가 끊어지는 것 같은 고통이 밀려왔다. 하지만 풍운은 선천강기를 거두지 않고 계속해서 선천강기를 불어넣어주니 무룡은 이를 악물고 선천강기를 온몸의 경략으로 인도했다.
“휴~ 이제 끝난 것 같군.”
풍운은 치료가 끝나자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닫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자신이 할일은 끝났다. 나머지는 무룡이 알아서 해야 한다.
“도치.........무룡의 내상치료가 끝날 때까지 지켜줘~ 나는 이만 일어날게.”
“수고하셨어요.”
풍운은 내상치료에 전념하고 있는 무룡을 보다가 무경이 기다리는 방으로 갔다. 풍운이 방으로 들어가자 무경이 반갑게 맞이한다.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먼저 자라고 했잖아.”
“운랑이 돌아오시지 않았는데 어떻게 자요. 그건 그렇고........무룡님의 치료는 끝났어요.”
“내가 해줄 일은 끝났어. 그런데...........이상하네.”
“뭐가 이상하다는 말씀이죠?”
“아직 겉옷도 벗지 않았잖아.......뭐~ 어디 가려는 거야.”
풍운의 질문에 무경은 빙그레 웃었다.
“운랑! 피곤하세요.”
“약간 무리를 하기는 했지만 피곤하지는 않아.”
“그럼 저랑 잠깐 나가요.”
“야밤에 어딜 가자는 거야.”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요.”
“그래?........알았어 무경이 가고 싶다는 데 가야지.”
풍운은 무경의 손을 잡고 폐가(廢家)를 빠져나왔다.
“저기.........저쪽으로 가면 평원이 있지 않았나요.”
“평원이라고 부르긴 좁지만 넓은 평지가 있지는 하지.”
“우리 그곳으로 가요.”
풍운은 무경과 함께 무경이 말한 평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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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산에 도착한 무림군은 넓은 들판에 군막을 치고 경공이 빠른 무사들을 림산전역으로 보냈다. 림산 어딘가에 숨어 있을 배화교잔당들과 십이사들을 찾기 위해서다. 란은 커다란 천막에 홀로 앉아 있었다. 다시 림산에 돌아왔다. 림산에는 자신이 존경하며 사랑하는 무경과 무경이 사랑하는 마수마랑이 있을 것이다. 란은 무경을 생각하자 마음이 심란해져서 두꺼운 외출복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배화교잔당들을 쫓아 섬서성에서부터 쉬지도 못하고 달려온 무사들은 군막을 치자마자 모두 곯아떨어진 모양인지 군막주위에는 무사들의 코고는 소리만 요란하고 간간히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경계무사들만이 보인다. 란은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누구냐?”
란이 군막하나를 돌아가자 경계무사가 란의 앞을 막는다.
“저에요. 수고가 많네요.”
란이 조용히 말하자 경계무사는 란을 알아보고 들고 있을 무기를 내렸다.
“군사님이시군요. 어디 가시는 길입니까?”
“주위를 한번 둘려보고 싶어서 나왔어요.”
“아~ 그렇군요. 그럼 제가 호위하겠습니다.”
“저하나 지킬 능력은 있어요. 혼자서 돌아보고 싶어요.”
란은 무사의 호의(好意)를 거철하고 혼자서 군막 주위를 돌아보다가 군막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으로 향했다. 언덕 위에서라면 림산의 변화가가 한눈에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경과 풍운은 무림군의 군막들이 한눈에 보이는 언덕위에 있었다.
“깃발들을 보니 무림군의 군막들이군. 무경은 무림군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제가 무림군의 군사라면 어디에 군막을 설치할까 생각해 보았죠. 림산의 번화가와 가깝고, 어느 곳에서 일이 터지듯 즉각적으로 출동할 수 있으며, 대단위 무사들이 주둔할 수 있을 만한 곳을 찾아보니 이곳이 나오더군요. 아마 란도 저랑 비슷한 생각을 했을 거예요.”
풍운은 무경의 말에 군막이 설치된 장소와 주위를 돌아보고 무경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오자고 했어. 무림군에게 볼일이라도 있어.”
“없어요. 무림군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죠. 이제 보았으니 가요.”
무경이 돌아서려는 순간 풍운의 무경의 손을 잡고 조용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누군가 오고 있어.”
풍운은 무경의 허리를 잡고 주위에 있던 나무위로 날아올랐다.
란은 언덕에 올라 무림군의 군막들을 둘려보다가 눈길을 돌려 림산 번화가를 바라본다. 림산에 보낸 무사들의 말에 의하면 십이사는 객점에 없다고 한다. 아마 자신들이 온다는 것을 알고 미리 몸을 숨긴 모양이다.
무경은 언덕으로 올라온 여인의 발걸음과 복장만으로도 그녀가 란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20년 가까운 세월동안 친자매처럼 붙여 지냈으니 첫눈에 알아보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운랑........란이에요.’
무경의 전음에 풍운이 란이 자세히 살펴본다.
‘란이 확실하군........잠깐만.’
풍운은 천이통과 천안통으로 주위를 살펴보았다. 혹시 란이 외에 다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위 백장이내에 사람의 인기척은 들리지 않는다. 아무래도 란이 온 모양이다.
‘혼자야.........어떻게 할 거야. 만나볼 거야.’
풍운의 전음에 무경은 고개를 끄덕거린다. 무경도 란이가 보고 싶은 모양이다. 풍운은 무경을 안은 상태에서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란은 갑자기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자 재빨리 고개를 돌려보니 환한 달빛에 꽃처럼 아름다운 여인과 30대 중반의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설마.........아가씨?”
란은 품속에서 암기를 꺼내려다 말고 미심쩍은 눈으로 무경을 바라본다. 향상 병약(病弱)하기만 하던 무경이 밝고 건강하며 세상 누구보다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했으니 란이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더구나 향상 하고 다니던 면사도 보이지 않지 않는가? 무경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느린 발걸음으로 란에게 다가갔다. 란은 사실 풍운과 마찬가지로 제6차 차크라를 각성한 이후 제3의 눈이라 불리는 신안(神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둠에 구애받지 않는다. 란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무경과 무경의 뒤에 팔짱을 끼고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사내를 번갈아 바라본다.
“란아. 모르겠어. 무경이야. 설마 내가 변했다고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겠지.”
“아가씨가 죽어 뼈만 남는다고 해도 알아볼 수 있는데 제가 어떻게 못 알아보겠어요. 다만........저기 있는 남자는 누구죠.”
란의 말에 무경이 뒤를 돌아본다. 풍운은 습관대로 천면역용술로 역용을 하고 있기 때문에 란이 알아보지 못하는 모양이다.
“인사해........운랑이야.”
“운랑?”
란은 운랑이라는 간단한 말에 다리에 힘이 빠져 휘청거린다.
운랑?.........운랑?........
아가씨가 뒤에 있는 남자를 운랑이라 불렸다. 랑(郞)이란 말을 글자대로 풀이하면 ‘사나이, 젊은 남자’ 등으로 풀이할 수 있지만 여자들이 남자의 이름 뒤에 랑을 붙여 부르면 자신의 연인(戀人)이거나 남편이라는 뜻이 된다. 그럼 아가씨는 뒤에 있는 남자랑 결혼이라도 하셨단 말인가? 또 있다. 아가씨는 분명 운랑이라했다. 그럼 사내의 이름이 운이란 말이며 아가씨가 알고 있는 사내 중에 운이란 이름을 가진 사내는 마수마랑 풍운밖에 없다. 아가씨가 풍운을 구해주고 그와 함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어쩌면 풍운의 여인이 되었을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다르다. 무경은 비틀거리는 란의 손을 잡아주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아........아니에요.”
란은 무경에게 잡힌 손을 빼고 자세를 바로 했다.
“추.........축하드려요. 드디어 사랑하시던 마수.......아니........풍운님과 하나가 되셨군요.”
“고마워~..........운랑..........운랑도 인사하세요.”
풍운은 무경의 말에 한걸음 다가와 란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풍운입니다.”
“아........안녕하세요.”
란은 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풍운을 피하며 인사했다.
“소식은 계속 듣고 있었지만 이렇게 만나니 너무 반갑다. 그동안 잘 지냈지.”
“그.......글쎄요. 저야 뭐~.......그런데 아가씨........많이 변하셨네요. 얼굴에 혈색이 돌고 몸도 건강해지시고...........정말 예쁘세요. 예전에는 걷는 것도 힘들어하셨는데.........어떻게 된 거죠?”
“아 이거~.......운랑께서 치료해 주셨어.......지금 있는 나는.........새로 태어난 사람이야. 운랑께서 새로운 생명을 주셨어.”
“새로운 생명?.........혹시 칠음절맥을 치료하신 겁니까?”
“응~ 맞아.”
“어떻게 그럴 수가? 철음절맥은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병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마수........아니다. 풍운님이 치료해 주신 거죠?”
“나도 믿지 않았는데.........세상에 기적이라는 것이 있더라. 운랑께서는 생명을 걸고 나를 치료해 주셨어. 위험한 도박이었지. 만일 잘못되었다면 나뿐만 아니라 운랑까지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었어. 그런데도 운랑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나를 치료해 주셨어. 그래서 나는 새로운 삶을 살수 있게 된 거야.”
무경은 마치 꿈꾸는 듯한 얼굴로 풍운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란은 걱정했던 무경이 무사할 뿐 아니라 병까지 치료하여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한 것이 기쁘면서도 마음 한 칸이 아련하게 아파온다. 왜~일까? 축하하고 기뻐해야할 일이건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송곳처럼 삐죽 튀어나오는 아픔은 무엇이란 말인가? 풍운은 란과 무경의 이야기에 듣고 있으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무림군이 있으니 언제, 어디서 무림군이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란.........만나서 반가웠어. 이제 그만 가야겠다.”
“예? 가시다니요? 방금 만났는데 어딜 가시겠다는 말씀이죠?”
“운랑께서 기다리고 계시잖아. 너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다. 다음에 좀더 편안한 분위기가 되면 그때 다시 만나서 이야기하자.”
“풍운님이야 기다리라고 하면 되잖아요. 이대로 보내드릴 수는 없어요.”
“어떻게 서방님을 기다리게 하니. 말했잖아. 예전의 무경은 죽었고 지금 있는 무경은 새롭게 태어났다고.......나는 운랑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야. 운랑께서 주신 삶이니 운랑을 위해서 살 거야. 무슨 말이지 알지.”
무경이 란의 손을 잡아주고 돌아서라하자 란이 무경의 팔을 잡았다.
“이대로 가시면 어떻게요. 저는 어떻게 하죠? 본가에 있는 어르신들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죠. 무슨 말씀이라도 해주고 가세요.”
“할아버지나 부모님께는..........죽었다고 말씀드려.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으니 그리 슬퍼하시지는 않으실 거야. 그리고 너는........란이 아닌 제갈무경의 삶을 살아야겠지. 예전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었잖아.”
“아가씨기 이렇게 살아있는데 어떻게 제가 제갈무경이 될 수 있어요? 어떻게 어르신들께 살아있는 아가씨를 돌아가셨다고 보고합니까?”
“그게.......나와 너의 운명이야.”
무경의 차가운 말에 란은 자리에 주저앉으며 부르르 떨고 있다.
“무경........그만 가자. 누가 오고 있어.”
“알았어요........란.......잘 있어.”
무경은 바닥에 주저앉은 란을 뒤로하고 풍운과 함께 하늘 높이 솟구친다. 란은 솟구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무엇이 슬픈 걸까? 왜 눈물이 나는 걸까? 모르겠다.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자꾸만 눈물이 난다.
산책을 나온 화원명은 경계무사들로부터 란이 주위를 돌아본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란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군막을 모두 돌아보아도 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화원명은 란이 걱정되어 군막주위를 돌아보다가 언덕위에 있는 그림자를 발견하고 언덕으로 달려왔다. 화원명이 언덕에 도착해보니 란이 바닥에 앉아 울고 있었다.
“란님.........란님 아니세요. 무슨 일이죠? 왜 울고계시는 겁니까?”
란은 화원명의 목소리를 듣고 면사 안으로 손을 넣어 눈물을 훔치고 일어났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란은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화원명의 옆을 지나 군막으로 내려간다. 화원명은 란을 부축하려다가 들고 있던 손을 내렸다. 란을 부축하려면 란의 몸을 잡아주어야 하는데.......화원명과 란은 그렇게 각별한 사이가 아니지 않는가? 화원명은 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군막을 향해 내려갔다.
<<계속>>
--------------------- 작 가 주 ------------------------
** "청승"의 사전적 의미는 아래와 같습니다.
청승[명사] 궁기가 끼어 있어 애틋한 상태, 또는 궁상스럽고 처량한 듯한 태도.
"청승"의 어원은 현재 정확한 것이 알려져 있지 않으나 추측컨대"청상과부(靑孀寡婦)"
의 "청상(靑孀)"에서 나온 말로 여겨집니다.
"청상과부(靑孀寡婦)"는 "남편을 여읜 젊은 과부"로서 "청상(靑孀)"은 "푸를청(靑)+
홀어미상(孀)"으로 "청춘의(어린)과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젊은 "청상과부"의 시름에 잠긴 애틋한 모습을 가리키는 표현이 "청상 맞다"이고 이
"청상 맞다"가 음이 변하여 "청승맞다"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과거의 엄격한 유교윤리 하에서 헛된 명분의 구속 때문에 속절없이 청춘을 삭이며
수절을 할 수밖에 없었던 젊은 과부의 날개 꺾인 모습이야말로 "청승"그 자체가 아니었을 까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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