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녀랑군千女郞君 - 프롤로그 1
본문
무림의 역사는 마교의 역사라 할 수 있다. 먼저 마교가 있었고, 그 마교를 견제하기 위해 역대 황실과 조정이 민간의 무력집단을 전면에 내세우는 과정에서 무림이라고 하는 것이 생겨났으니까. 따라서 마교가 성하면 무림도 성하고, 마교가 쇠하면 무림도 쇠하는, 마교의 흥망성쇠에 따라 무림의 운명이 결정되어지는 것이 이제까지의 이른바 무림의 역사였다.
마교와 무림의 최초의 충돌은 북송 말. 마교의 8대 호법사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방랍이 절강에서 일으킨 난을 당시 녹림도를 이끌던 양산박의 호걸들이 진압하면서부터였다. 이때 양산박 호걸들을 회유하기 위해 조정이 내세웠던 조건, 즉 이제까지의 모든 죄를 사면해준다고 하는 조정의 약속이 이후 녹림과 구분되는 무림이라는 존재의 시작이었다.
이후 마교와의 싸움은 조정으로부터 이권을 약속받은 강호의 무리들이 떠맡게 되었고 그 결과 수백년에 걸친 마교와 무림 제세력간의 싸움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것은 금이 침략하고 북송이 남송으로 밀려나던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몽골의 침략에 중원에 사는 모든 이들이 일치단결하여 일어났을 때에도 그들은 서로를 증오하고 경멸하며 끊임없이 공격했다.
원말명초. 방국진이 일어나고, 서수휘가 세를 얻고, 장사성이 천하를 논하고, 진우량이 웅심을 펴던 그 모든 혼란은 그들의 싸움의 결과였다. 때로 마교가 흥하고, 때로 무림이 흥하면서 소금장수가 영웅이 되고, 왕을 칭하던 자가 수하에게 모살당하는 연속이었다. 그러한 속에서 마교에 뿌리를 두고, 유림의 지지를 확보한 주원장이 천하를 얻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할 수 있다. 두 세력 모두 주원장을 자신의 편으로 여기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주원장이 선택한 것은 북송의 황실과 이어진 무림의 세력들이었다. 마교는 그 세가 다른 모든 정파를 합친 것만큼이나 강하지만 그래봐야 그것은 무언가를 부수는 힘이지 지키는 힘은 아니었다. 반면 명문정파는 그 뿌리가 남송 황조와 잇닿아 있어 새로운 황조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지배권력을 굳건히 하는 데에 있어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가난한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먹고 살기 위해 출가했다가 파계한 전력까지 있어 누구도바 정통성에 목말라 했던 주원장에게 있어 그것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결국 명 황조가 시작되고 그 첫 황제로서 등극한 주원장은 황제로서의 가장 첫 일성으로 마교 토벌을 명령했다. 가장 가까운 측근들까지 포함해 마교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새로운 황조에서 말끔히 지워버림으로써 유림과 무림의 지지를 끌어내려 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의도는 성공했다.
십 년의 전쟁이었다. 십 년간 그야말로 끔찍한 혈전이 이어졌다. 황하가 피로 물들고, 장강이 시체로 덮였다. 명의 건국공신이던 남옥이 죽고 서달이 죽었다. 명문정파에 속한 무가들조차 마교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다면 마도로 몰려 멸문지화를 당했다. 물경 십 만. 그 사이 죽어간 사람의 수다.
당시 마교는 몽골과의 전쟁으로 원기를 크게 상한 상황이었다. 원래 비밀결사로서 유지되어 오던 조직은 몽골에 대한 조직적인 항쟁을 위해 중원의 군웅들에게 거의 공개되었다. 심지어 마교의 절기들조차도 한 손이라도 늘이겠다는 일념으로 재능이 있는 자들에게 아낌없이 전수되었다. 그 결과 중원의 힘은 강해져 몽골을 북원까지 몰아낼 수 있게 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중원이 강해짐으로 해서 마교는 더이상 절대적인 강함의 존재가 아니게 되어버린 것이다.
홍무 2년 당시 마교교주이던 화양신검 묵청이 본산을 옮기던 도중 소림과 무당의 매복에 걸려 목숨을 잃은 이후 마교는 그야말로 지리멸렬했다. 대명의 천하에서 마교가 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저항하려 해도 마교의 힘은 더 이상 최강이 아니었다. 죽음과 도피의 대장정. 십만 마교는 거의 구만의 교도를 잃고서야 겨우 서장과 청해의 경계로 숨어들 수 있었다. 이것이 마교를 중원에서 완전히 몰아낸 이른바 제 1차 마교대전이다. 정파의 명숙들은 이것을 일컬어 정명대전이라 부르며 정파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꼽았다.
그러나 마교가 중원의 서쪽으로 도망쳤다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십만대산이라 부르게 된 산림 속으로 숨어든 마교는 끊임없이 재기를 노렸다. 물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은밀한 시도였다. 제 1차 마교대전에서 워낙에 많은 본산의 고수들이 죽어나간 터라 명문정파와 정면으로 부딪히기엔 이미 그 세가 너무 미약해졌기 때문이다.
마교는 숨을 죽인 채 기회를 기다렸다. 십만대산에 숨어든 마교 교도들 가운데는 여자와 아이들이 많았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남자들이 죽어간 결과였다. 얼마 안 남은 마교의 수뇌부는 이들 여자와 아이들에 주목했다. 그들에게 미래를 걸자. 그들에게 복수를 맡기자. 그렇게 결심한 수뇌부는 본산의 비전절기까지 이들에게 아낌없이 전수했다. 심지어 교주들에게나 전해지던 호교무공도 능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익힐 수 있었다.
이십 년. 길다면 긴 시간이었지만 복수를 노리는 마교도들에게는 결코 긴 시간이 아니었다. 아비를 잃고 남편을 잃고 자식을 잃고 정랑을 잃은 여자들과 아이들의 뼈에 사무친 원한에 비한다면 오히려 짧은 시간이었다. 갓 태어난 아이들이 청년이 되고 겨우 주위를 알 나이의 아이들이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을 무렵에도 그들은 끊임없이 원한을 되새겼고 중원을 바라보며 복수를 다짐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회가 왔다.
홍무제가 죽고 건문제가 즉위하자 마교 수뇌부는 그것이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다. 명문정파의 세력과 유림의 영수들이 건문제 주위에 포진해 새로운 황제의 권력을 굳건히 하려 하자 마교는 그로 인해 지위가 불안해진 번왕들에 접근했다. 그때 염두에 두었던 것이 제왕과 연왕이었다.
이후 건문제와 그 신하들에 의해 제왕은 죽었지만 연왕은 분노와 복수심을 가슴에 품은 채 살아남았다. 건문제만을 싸고도는 명문정파에 대한 원한까지 겹쳐 연왕은 마침내 마교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 댓가는 연왕의 군대의 가장 선두에서 가장 앞장서서 건문제의 군대와 싸우는 마교도들이었다. 연왕을 암살하려는 명문정파의 고수들을 막아서는 마교의 고수들이었다. 연왕 주체와 건문제 주문윤간의 황제의 자리를 둔 싸움은 어느새 마교의 정파에 대한 복수전의 양상을 띄게 되었다.
결국 연왕의 군대는 압도적인 전력을 보유하고 있던 건문제의 군대를 무너뜨리고 남경으로 입성했다. 이 싸움의 혼란 속에서 마교도들은 연왕의 명을 받아 건문제를 소리소문 없이 시체도 남기지 않고 죽였다. 그것은 이후를 생각한 연왕의 고도의 정치적인 선택이었다. 그리고 연왕은 홍무연간 마교 탄압에 압장섰던 유림과 무림의 인사들을 철저히 말살함으로써 마교의 노고에 보답했다. 단. 그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마교를 노골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아직 권력기반이 취약한 연왕, 이제는 영락제가 되어버린 그에게 있어 크나큰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그 뒤는 마교의 몫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주문윤의 곁으로 보내진 정파의 정영들은 영락제의 즉위에 반대했다는 죄목으로 거의 처형당했고, 마교는 오히려 내전을 통해 실전경험을 쌓아 한결 더 예리하게 다듬어진 상태였으니까. 이러한 상황에서 싸우게 된다면 백전불태, 필승이다. 그것을 마교도 알았고 정파무림도 알았다. 흔히 생사평 싸움이라 일컬어지는 마교와 정파연합간의 싸움은 그렇게 서로 이미 알고 있는 결과를 확인하는 과정에 불과했다.
생사평은 서안 서쪽 종남산과 화산 사이에 있는 그리 넓지 않은 초원의 이름이다. 한때는 꽤나 기름진 농토였을, 그러나 이제는 황토에 묻혀 사람조차 살기 힘들어진 거친 벌판. 그곳에서 십만대산을 떠나 중원으로 향하던 마교도와 더이상 그들의 싸움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영락제의 약속을 얻어내고 그들을 저지하기 위해 기다리던 정파무림이 맞붙었다.
장장 칠주야의 싸움.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도록 싸움은 그칠 줄 몰랐다. 이십년 간 가슴 깊이 불씨를 지펴 온 마교의 복수심이 그토록 처절했기 때문이었고 이대로 마교의 중원진입을 방치할 경우 정파로서는 후환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사부가 죽으면 제자가 뒤를 이었고, 사형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며 사제는 검은 휘둘렀다. 시체가 쌓이고 그 위에 어느 순간 자신의 몸이 시체가 되어 누웠다. 피와 죽음이 난무하는 그 전장을 그래서 생사평이라 불렀다. 생과 사가 갈리는 벌판이라는 뜻에서였다.
미리 예견했던 것처럼 싸움은 마교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아니 오히려 그러한 상황에서도 무려 칠주야나 마교의 공격을 버텨낸 명문정파의 저력에 감탄해야 할 것이다. 승리를 위해 마교 또한 이십 년간 길러온 고수 가운데 상당수를 잃어야 했으니까. 그러나 과정이야 어쨌든 싸움은 마교의 승리였다. 드디어 마교는 숙원이던 중원으로의 진출에 성공한 것이다.
이제 마교가 복수를 위해 이십 년간 칼을 갈았던 것처럼 이번에는 정파무림이 복수를 위해 칼을 가는 입장이 되었다. 무림의 은원은 칼과 피로써 해결하는 것. 그것은 정파라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마교의 눈을 피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무림맹을 결성했고, 그들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강남에서는 정무십육문이 일어나 정무맹을 결성했다. 모두 마교에 대한 피의 복수를 외치며 일어선 정파무림인들의 단체였다. 워낙에 저력이 있던 명문정파들이다보니 오 년이 채 지나기 전에 그들은 마교를 위협할 수 있는 집단으로 성공했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였다. 명문정파의 세력이 너무 강하다는 것이 도리어 그들의 목줄을 죄었다. 그들 가운데는 건문제를 지지하고 영락제를 반대하던 무리들도 포함되어 있었고, 시체조차 남기지 못한 건문제의 죽음은 그들로 하여금 건문제의 죽음을 부정하고 영락제에 맞서게 했다. 그만한 충분한 힘이 있다고 믿었기에 그들은 더욱 노골적이 되었다. 절강의 무벌과 유림 또한 그들에 호응함으로써 마교와 정파무림간의 싸움은 영락제와 정파무림의 싸움의 양상이 되어 버렸다.
무림맹과 정무맹의 수뇌부들의 우려와 만류에도 불구하고 복건성에서 스스로 건문제라 칭하는 자가 나타나면서 상황은 급진전되었다. 영락제는 분노했고 마교는 호기로 여겼다. 덩달아 반발한 정파무림은 자칭 건문제를 앞세우고 노골적으로 영락제와 적대했다. 절강성 포정사사가 이들에 가세함으로써 정파무림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결국 제 3차 마교대전은 말 그대로 제 1차 복수전이 되어버렸다.
당시 홍무제를 등에 업고 마교를 추살하던 것이 명문정파였다면 이번에 영락제의 지지를 얻어 명문정파를 압살하는 것은 마교였다. 그때 시체의 산과 피의 강을 건너 처절한 도주의 길에 올랐던 것이 마교였다면 이제 시체의 산과 피의 강 속에서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은 명문정파였다. 고작 일 년. 일 년만에 모든 것이 끝났다. 영락제의 지원과 마교의 철두철미한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건문제라 철썩같이 믿고 있던 자가 영락제가 숨은 건문제의 지지세력을 끌어내 제거하기 위한 함정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명문정파는 절망을 넘어 허탈함마저 느껴야 했다. 철저히 당한 것이다. 마교와 영락제에게.
다행히 마교는 피의 보복을 자제했다. 이미 오 년 전의 생사평 싸움으로 인한 상흔이 가시지 않은 상황이었다. 힘을 모은 무림맹과 정무맹의 힘은 마교로서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어서 이대로 죽기살기로 싸운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결국 마교는 피의 보복 대신 정파무림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주기로 했다. 백 년을 지나도 다시 스스로 일어설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철저하게 그들을 모욕하고자 했다. 마침 명분은 그들에게 있었기에 그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처음 마교가 각 정파에 딸을 요구했을 때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정파의 영수들을 선헌히 그 제안에 응했다. 단순한 인질이 아님을 알면서도 자신의 문파를, 가문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가기 싫다며 울부짖는 딸들을 윽박질러 강제로 장안에 본산을 둔 마교로 보냈다. 딸들만 희생한다면 언젠가 다시 기회가 찾아올 것이라고. 그렇게 몇 년을 계속 마교의 요구에 따라 딸을 제자들을 마교로 보냈다.
그리고 마교로 갔던 딸들은 오래지 않아 다시 돌아왔다.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딸들은 매우 멀쩡한 모습이었다. 비록 수 년 동안 마교의 뭇사내들에게 정액받이 노릇을 강요받았다고는 하지만 겉보기로는 무척이나 멀쩍한 모습이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마도 그녀들이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알몸으로 중원을 활보하지 않았다면 그녀들의 집안과 사문에서도 아무 일 없었다 믿었을 것이다.
그녀들은 자신들을 그 치욕의 장소로 강제로 보낸 아비와 사부들에게 마교에서 보낸 한 장의 서신을 내보였다. 그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마교로 갔던 딸들을 제자와 자식들의 배필로 맞이하라는 것. 마교에 보내진 딸들 이외의 다른 여자와의 통혼은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정파무림은 마교가 뜻하는 바가 무언가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정파무림으로 하여금 당당히 세상에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도록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정파무림은 처음 저항하려 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연했다. 처음엔 그들의 딸이고 제자였다 할지라도, 마교에 갔다 온 이상 그녀들은 창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마교의 뭇사내들의 정액받이가 되어 가랑이를 벌리던 더럽고 천한 것들에 불과했다. 여염에서라 할지라도 반발이 작지 않을텐데 하물며 명문으로 자처하던 정파들에 있어 그것은 결코 감내할 수 없는 치욕이었다.
결국 다시 제 4차 마교대전이 일어나려는 듯했다. 정차의 명숙들이 모여 마교의 횡포를 성토하면서 5년만에 다시 마교와 정파가 다시 맞붙는 듯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그러한 정파의 움직임은 그들이 마교로 보냈더 딸들에 의해 좌절되었다. 그녀들은 자신들을 누가 마교로 보냈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이 어떤 생각으로 자신들을 보냈는지도.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위해 마교와 싸우려 하는지도. 그녀들에게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정파가 승리할 경우 그녀들은 마교에 몸을 판 더러운 창녀로서 평생을 손가락질 받으며 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교가 살아야 그녀들도 살 수 있었다. 결국 마교에 보내졌던 정파의 딸들은 자신들을 버린 정파를 버렸다.
싸움은 마교대전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지리멸렬하게 진행되었다. 정파무림인들의 모든 계획은 사전에 낱낱이 마교에 알려졌고, 마교는 그러한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를 벌레를 잡아 죽이듯 눌러 진압했다. 물론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 오히려 살렸다. 살려두고 마교로 보내졌던 그들의 딸과 여제자들과 결혼시켰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난 아이로 하여금 문파를 잇게 했다. 철저한 모욕. 정파는 그저 절망한 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마교대전 아닌 마교대전이 끝났을 때 더이상 정파무림은 없었다. 때가 되면 마교에 가서 정액받이 노릇을 하다가 다시 문파로 돌아와 안주인 노릇을 하는 여자들과 그 여자들의 무력한 남편들뿐이었다. 그리고 어느샌가부터는 그들의 자식들이 문파의 주인이 되었다. 세상 사람들의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이던 명문정파는 그렇게 사람들의 비웃음과 손가락질 속에 내던져졌다. 그것이 70년 전. 영락 12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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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카페에는 설정 게시판이 따로 있어서 거기에 설정으로 따로 빼두었던 부분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게시판에서는 설정을 따로 찾아 읽거나 할 수 없으니 이런 상황설정 같은 것은 같이 올려둘 필요가 있겠더군요. 그래서 프롤로그2로 덧붙입니다. 프롤로그라기보다는 배경설정으로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하여튼 거진 일 년 넘게 카페를 주로 해서 글을 쓰다 보니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카페에서는 굳이 친절하게 글을 쓸 필요 없이 그때그때 설정이나 잡담 등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두면 되거든요. 게시판에서는 그랬다가는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하는 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리죠. 그걸 잊고 있었습니다. 쩝...
일단 천녀랑군의 배경설정은 이렇게 됩니다. 마교천하가 시작되고, 마교에 의해 정파의 여자들이 마교 정무각에서 강제로 위안부노릇을 하는 상황에서 그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여자들이 움직이면서 이야기는 시작되죠. 초반 혜란이 알몸으로 정무각을 나온 것도 그렇게 이해해 주시길.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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