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SF

천상(天上)의 향기 - 185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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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天上)의 향기 185(칠백년의 약속)-19




냉하상은 다른 오영(五影)들보다 후미(後味)에 있었다. 귀선선랑과 광도묵랑 그리고 활의 고수라는 여인을 죽이러 갔던 3영(影)이 모두 부상을 당했다. 특히 이영(二影)과 삼영(三影)의 부상이 심각하기 때문에 혼자 이동하기도 버거운 상황이다. 아직 결과를 듣지 못해 정확한 것은 모르겠지만 3영이 모두 부상을 당한 것으로 보아 살행(殺行)이 순탄치 않았다는 것이며 최악의 경우 모두 실패했다고 보아야 하며 3영이 모두 실패했다면 자신도 실패했으니 이번 살행(殺行)은 완전히 실패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다. 성난 멧돼지처럼 무시무시한 기세(氣勢)로 자신들을 쫓아오는 혈부광랑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세 명은 부상자(負傷者)들이고 두 명은 부상자들을 보호해야 한다. 더구나 부상자들 때문에 이동속도가 현저히 떨어져 혈부광랑의 추적을 뿌리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냉하상은 인가(人家)에서 멀리 떨어진 들판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오영(五影)!...........먼저가라. 나는 혈부광랑을 처리하고 가겠다.” 




냉하상이 멈추며 앞서가는 오영(五影)에게 말하자 오영도 급하게 발걸음을 멈춘다.




“제가 남겠습니다. 막주님이 먼저 가세요.” 




이영(二影)을 부축하고 있던 사영(四影)이 자신이 남겠다며 냉하상의 앞으로 나선다. 자신들만 살겠다고 막주를 버리고 갈수는 없다. 일, 이, 삼영은 부상이 심해 혈부광랑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럼 자신이 나서야 한다. 자신이 남아 냉하상 대신 다른 사람들이 도망갈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어야 한다. 




“비켜........당장 출발해.” 


“막주님........제가 남겠습니다. 막주님이 가세요.” 


“너는 혈부광랑의 적수(敵手)가 못돼.” 


“시간만 끌면 되지 않습니까? 제가..........제가 남겠습니다. 막주님은 먼저 가세요.”


“명령이다. 출발해라. 당장 가지 못해.”




냉하상이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하자 사영(四影)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못한다. 천인살막에서 냉하상은 하늘이기에 그녀의 명령은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절대권위를 가지고 있다. 




“아.........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들이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막주님........조심하세요.”




사영(四影)은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냉하상에게 인사하며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옮겼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오영(五影)은 복잡한 표정으로 냉하상을 바라보다가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고 다른 사람들의 뒤를 따른다.




냉하상은 멀어지는 오영(五影)을 바라보다가 등에 있던 광풍혈도을 뽑았다. 혈부광랑은 사호팔랑 중 광도묵랑과 더불어 가장 패도(覇道)적인 무공을 사용한다. 그리고 혈부광랑에게는 혈부광랑이라는 별호 이외에 또 다른 별호가 있다. 백도 무림인들은 ‘붉은 도끼의 미친 늑대’라는 뜻으로 혈부광랑이라는 별호를 지어주었지만 흑도무림인들을 혈부광랑을 전신(戰神)이라는 별호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전신(戰神) 도치”




도치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싸움에 미친놈이다. 전투가 벌어지면 미친놈처럼 날뛰며 적진(敵陣)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다. 군산해전에 참가했던 사해방 무사는 피를 뒤집어쓰고 붉은 도끼를 휘두르며 적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는 그의 모습을 보고 다시는 그를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하늘에 빌었다고 한다. 




냉하상이 일점홍 대신 광풍혈도를 선택한 이유는 일점홍은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공격하는 무공이다. 암살(暗殺)을 하거나 쾌(快)나 변(變)을 중시하는 무공을 사용하는 상대에게는 효과적이지만 힘을 앞세운 패도적인 무공을 사용하는 혈부광랑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패도적인 무공은 정중동(靜中動)처럼 움직임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미세한 변화로 움직이는 상대를 제압한다. 즉 기교로 승부하는 적(敵)을 힘으로 제압해버리는 것이다. 




도치는 이를 갈며 오영과 냉하상의 뒤를 추적하고 있었다. 도치는 단순한 놈이다. 남들처럼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한번 마음먹으면 누가 뭐라고 하든 만든 온몸이 부셔져도 끝까지 밀어붙인다. 악무룡이 자기 때문에 죽을 뻔했다. 자기만 아니었으면 악무룡이 저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치는 악무룡이 잘못된 것이 모두 자기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악무룡을 저렇게 만든 놈들을 용서할 수 없다. 악무룡의 복수해야 한다. 도치의 머릿속에는 오직 그 생각밖에 없었다. 




“빌어먹을.........경공이 조금만 빨랐어도.........빌어먹을........바보, 멍청이.......”




도치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욕을 하고 있다. 자신의 경공이 조금만 빨랐어도 벌써 놈들을 따라 잡았을 것이다. 도망가는 놈들이 눈앞에 있는데 뒤만 쫓고 있는 자신이 한심해서 돌아버릴 지경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놈들과의 거리가 조금씩 좁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놈들 중에 한 놈(?)이 남고 나머지 놈들이 도망친다. 도치는 남은 놈(?)을 무시하고 도망치는 놈들을 추적하려 했다. 한 놈(?)은 나중에 와서 죽어도 된다. 도망친 놈들부터 죽어야 한다. 




냉하상은 도치가 속도를 줄이지 않고 돌격해오자 광풍혈검에 내공을 불어넣었다. 




“광풍천인도 천인섬” 




냉하상의 도(刀)가 붉게 변하더니 번개 같은 도영(刀影)이 도치를 향해 날아간다. 도치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도영(刀影)을 보았지만 달리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도끼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열십자(十)로 배어간다. 




“저.........저런 무모(無謀)한 놈~” 




냉하상은 도치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광풍천인도의 천인섬은 번개 같은 속도와 바위도 부셔버리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혈부광랑은 천인섬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치려 한다. 냉하상의 눈에는 도치가 자신이 죽는지도 모르고 불속으로 뛰는 드는 나방처럼 보였던 것이다.




“콰아아앙~” 


“끙~” 


“헉~ 이럴 수가”




밤하늘을 울리는 폭음과 두 마디 짧은 신음소리가 들리더니 냉하상의 몸이 빙판(氷板)에서 미끄러지듯 주르륵 밀려나고 있고, 도치는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냉하상에게 돌격한다.




“말도 안돼.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이냐? 빠드득~” 




냉하상은 이를 악물었다. 조사에 의하면 도치는 혈무도부(血舞刀斧)의 부법을 익혔다. 혈무도부는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에 혼자서 화산파 제자 일천을 도륙한 전설적인 사파인물로 그가 남긴 혈무부법은 강호(江湖)에서 가장 패도적인 부법(斧法)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냉하상 자신이 익힌 광풍천인도는 일점홍과 더불어 천인살막 최고의 무공으로 사막의 용권풍도 베어버리는 전설적인 도법(刀法)이기 때문에 중원의 혈무부법 따위에 밀릴 무공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밀리고 있다. 어떻게 천인살막 최고의 무공을 익힌 자신이 혈무부법 따위를 익힌 혈부광랑에게 밀리고 있단 말인가? 냉하상은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건 개인의 자존심을 넘어 천인살막의 명예에 걸린 일이기 때문이다.




“광풍천인도 천인나환” 




냉하상의 도(刀)가 부채가 펼쳐지듯 여러 개로 변하더니 돌격하는 도치의 전신(全身)을 향해 날아간다. 




“흥~! 이따위 공격으로 날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혈파~!” 




도치가 한 자루 도끼에 내공을 불어넣어 날아오는 도영(刀影)을 향해 던지자 도끼는 붉은 안개에 쌓여 도영((刀影)들을 향해 날아가고 이와 때를 같이 하여 도치의 거대한 덩치가 하늘로 날아오른다. 




“우르르르 꽝~” 




내공을 머금은 도(刀)와 도끼가 출동하자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폭음과 함께 주위에 있던 흙과 돌들이 사방으로 날아오른다. 도치는 허공에서 도끼를 잡은 상태에서 냉하상의 머리를 향해 수직으로 떨어진다. 냉하상은 도(刀)가 혈부광랑의 도끼와 충돌하자 다시 한발자국 밀려났는데 하늘에서 엄청난 살기(殺氣)가 느껴져 하늘을 올려다보니 혈부광랑이 자신을 향해 수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냉하상은 도(刀)을 잡은 양손에 내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천인살막의 명예가 걸린 일전(一戰)이기 때문에 도망이란 있을 수 없다. 상대가 죽던 자신이 죽던 끝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언제까지 혈부광랑에서 밀릴 수는 없다. 냉하상의 도(刀)가 반원을 그리듯 천천히 도치를 향한다. 




“천인사도~” 




천인사도라는 초식은 광풍천인도의 최후 3절초 중 첫 번째 초식으로 지금의 냉하상이 있게 만들어준 무공이다. 그런데 육안(肉眼)으로 보기에 반원을 그린 도(刀)는 도치를 향한 상태에서 미세하게 떨리기만 한다. 화려한 도영(刀影)들이 피어나는 것도 아니고 내공에 의해 도(刀)가 거대하게 변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도치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수많은 살기(殺氣)를 느낄 수 있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전신의 모든 세포들이 위험하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치는 냉하상의 머리를 내리찍던 도끼를 회수하더니 자신의 가슴위로 살짝 던진다.




“혈망(血網)” 




허공으로 떠오른 도치의 도끼가 허공에서 팽이처럼 돌기 시작하더니 도치의 전신(全身) 주위를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혈망은 검(劍)으로 펼치는 검막(劍幕)처럼 도끼로 펼치는 필사의 수비 초식이다. 




“캉~..........카카카카카카아아앙~” 




도치의 주위에 처음에는 편경(編磬)소리처럼 맑고 청명한 금속음이 났더니 곧이어 고막이 찍어질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수많은 불꽃이 피어난다. 천인사도는 찰나(刹那)의 순간에 적(敵)의 모든 전신혈맥을 끊어버리는 초식으로 육안(肉眼)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거미줄 같은 도기(刀氣)를 뿌리는 초식이다. 도치의 허벅지와 어깨에서 핏방울이 피어오른다. 혈망이라는 초식으로 천인사도의 모든 공격을 막지는 못한 모양이다. 도치는 부상에 굴하지 않고 회전하던 도끼를 잡고 냉하상에게 떨어진다.




냉하상은 도치의 모습에 등줄기가 싸늘해지며 온몸에 부르르 떨리는 전율(戰慄)을 느꼈다. 천인사도는 지금까지 한번도 냉하상을 실망시키지 않았던 필사의 초식이었다. 그런데 도치는 가벼운 부상을 당했을 천인사도를 막아냈을 뿐만 아니라 반격(反擊)까지 하고 있다. 냉하상의 도치의 공격에 무의식적으로 도(刀)로 커다란 원을 그리며 빠르게 회전시킨다.




“콰아아아앙~”


“하아악~”


“음~”




지축(地軸)이 흔들리는 거대한 충격과 함께 냉하상의 몸이 주르륵 밀려났고, 도치는 땅에 착지하며 두 자루 도끼를 회수하자마자 냉하상에게 돌격하다가 멈칫거린다.




“뭐........뭐야. 여........여자였어.”




도치가 멈칫거린 이유는 냉하상의 얼굴을 갈리고 있던 천이 풀어지며 은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이 파도처럼 출렁거리고 있었으며, 백지장처럼 창백한 얼굴과 대조적으로 입가에 붉은 피를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술에 취해 있었고, 다음에는 끓어오르는 분노(忿怒)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져 있던 도치는 지금까지 냉하상이 여자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가 냉하상의 머리카락과 얼굴을 보고서야 그녀가 여자라는 것을 알았다. 도치는 복잡한 표정으로 비틀거리는 냉하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냉하상은 전력(全力)을 다한 공격을 도치가 막아내고 반격까지 하자 또다시 무리하게 내공을 끌어올려 도치의 공격을 막는 과정에서 내상을 입어 피를 토한 것이다. 냉하상은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하고 입가에 흐르는 피를 손매로 훔쳤다. 그런데 이상하다. 성난 멧돼지 같던 도치가 곧바로 공격할지 않았는데 공격을 멈추고 이상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냉하상은 도치의 복잡한 눈빛을 보고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전신(戰神)불리는 사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적진(敵陣)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는 사내.........


그가 공격을 멈추었다. 무엇 때문일까? 무엇 때문에 공격을 멈추고 이상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그때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낀다. 냉하상은 깜짝 놀라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니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이 벗겨져 있다.




“십팔!...........여자라니?.......개 좆이나!..........허허 참~ 어휴~ 십팔~”




도치는 냉하상에게 시선(視線)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며 욕을 한다. 도치는 지금까지 수백의 사람을 죽었지만 여자는 단 한명도 죽인적은 없다. 예전의 도치에게 여자란 그저 남자 시중이나 들어주고 남자가 원할 때 가랑이나 벌려주는 장난감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잠마동에서 풍운이 수혜를 대하는 것과 십이사들의 일원인 다른 여자들을 보며 여자도 남자와 똑같은 인간이며 사랑하고 아껴주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여자는 절대 장난감이 아니며 아끼고 사랑하며 자신이 보호(?)해 주어야 대상이라고 생각이 바뀐 것이다. 




냉하상은 도치가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욱하고 감정의 덩어리가 올라왔다. 냉하상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자신을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은 여자이기 이전에 천인살막의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냉하상은 어릴 적부터 천인살막의 막주가 되기 위해 뼈를 깎는 수련을 하였으며 나이 15살 때, 돌아가신 아버님을 대신하여 천인살막의 막주가 되었다. 그녀가 막주가 되고 이년도 지나지 않아 신강 무림에는 피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해 신강에 있는 무림세력들이 배화교의 막강한 힘 앞에 차례차례 무릎을 꿇거나 멸문(滅門)의 화를 당했다. 하지만 냉하상은 삼백년을 이어온 천인살막의 역사에 오점(汚點)을 남기지 않기 위해 배화교에 항복하기 보다는 배화교에 맞서 싸우다 후일을 도모하며 중원으로 들어왔다. 




다시 말해............냉하상은 지금까지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망각(忘却)하고 앞만 보고 살아왔다. 자신의 어깨위에 천인살막의 운명이 걸려 있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스스로 여자이기 전에 막주의 삶을 강요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전신(戰神)이란 불리는 사내가 적(敵)을 앞에 두고 망설이고 있다. 자신이 여자이기 때문에............공격을 멈춘 것이다. 이건 냉하상의 자존심이 커다란 상처를 주었다.




“내가 여자라서 망설이는 거냐?”




냉하상의 말에 도치는 입술을 깨물고 냉하상을 바라보니 냉하상은 차가운 눈길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치는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자신과 악무룡을 죽이려 했던 냉하상이 아름답게 보인다. 




은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


중원인들과는 다르게 눈처럼 하얀 피부........


약간은 차가워 보이는 눈...........


오뚝한 코........


그리고 가름한 달걀형에 얼굴에 붉은 입술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보인다. 특히나 상대를 내려보는 듯한 도도한 눈빛과 말투가 도치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도치는 냉하상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자신이 궁금한 것을 질문을 한다.




“몇 가지 물어보자........네가.......아니 낭자가 나와 악무룡을 죽이려 했던.........사람인가?”


“그래!.........아깝게 실패했지만 내가 죽이려 했다.”


“왜?..........왜~ 우릴 죽이려 했지. 무림군 보낸 건..........가?”




도치는 자꾸만 말끝을 흐린다. 평소 당당하고 속에 있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도치답지 않은 모습이다. 도치는 냉하상의 이국(異國)적인 외모와 차가운 인상에 마음이 흔들려 한마디 하는 것도 조심스러운 것이다.




“후후후~ 질문할 것을 질문해야지. 의뢰자의 비밀을 지켜주는 것은 살수의 기본이다.......그건 그렇고? 왜 답을 안 하는 거지.........왜 갑자기 공격을 멈춘 거냐?”




도치는 역시 냉하상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복잡한 눈으로 냉하상을 바라보다가 도끼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아무리 상대가 여자라도 악무룡과 자신을 죽이려 한 이상 이대로 그냥 보내줄 수는 없다. 더구나 다른 놈들이 이미 도망쳤기 때문에 냉하상을 생포해야 도망친 놈들의 위치를 알아내고 일망타진(一網打盡)할 수 있다. 




“지금까지 여자와 죽인 적이 없어 망설였다. 하지만 나의 친구를 죽이려 한 이상 용서할 수 없다. 너와 놈들의 목을 친구에게 받치겠다.”


“후후후~ 네놈 눈에는 내가 여자보이는 모양이지? 그래서 망설였단 말이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놈이군? 네놈을 꼭 죽이고 말리라.”




냉하상은 마치 남자처럼 웃으며 도치를 향해 돌격하며 도(刀)를 휘두르니 냉하상의 도(刀)가 수많은 도영(刀影)을 만들어내며 도치에게 날아온다. 도치는 밤하늘의 별처럼 솟아지는 도영(刀影)들을 바라보다가 두 자루 도끼를 도영(刀影)을 향해 던져버린다.




“혈파(血破)~”




혈파는 혈무도법 중에서 가장 강맹하며 패도적인 초식으로 지금까지 혈파에 죽어간 사람의 수가 족히 수백은 넘은 것이다. 도치의 도끼가 바람개비처럼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니 도끼 주위가 붉게 물들며 냉하상이 만들어낸 도영(刀影)들에게 날아가니 도영(刀影)들은 회오리바람에 희어지는 낙엽처럼 사방으로 날아가며 냉하상의 머리와 가슴을 향해 날아간다. 냉하상은 붉게 변한 도끼가 자신에게 날아오자 이를 악물고 내공을 극한(極限)까지 끌어올렸다.




“천강파망(天剛波網)~”


“우르르르~ 콰콰콰콰쾅~”


“아~~~~~~~악~”


“음~”




냉하상의 도(刀)가 거대한 도영(刀影)이 만들더니 도영(刀影)이 파도처럼 물결치며 촘촘한 그물을 만들며 무섭게 회전하는 도치의 도끼와 충돌하니 지축이 흔들릴 정도의 폭음과 함께 겉에 있던 초목(草木)과 바위들까지 사방으로 날아가며 자욱한 흙먼지가 피어난다. 그리고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과 묵직한 신음소리 들리고............잠시 시간이 지난 후 자욱하게 피어났던 먼지들이 가라앉으며 도치와 냉하상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냉하상은 도(刀)를 의지하여 힘들게 서 있는데 핏기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에 계속해서 피를 토하고 있었고, 도치는 입고 있던 옷이 붉게 변하고 몸의 여기저기에 커다란 상처들이 입을 벌리고 있으나 무덤덤한 표정으로 냉하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냉하상은 피를 토하면서 머리를 세차가 흔들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어떻게 천인살막 최고의 무공인 광풍천인도가 혈무도법따위에 밀린단 말인가?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한 법이다. 자신은 지금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없지만 도치는 부상을 입기는 했으나 너무나 태연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도치는 마음이 복잡했다. 육체(六體)의 고통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몸의 여기저기에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도 아픔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이 아프다. 냉하상이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 한쪽이 아련하게 아파온다. 왜일까? 무엇 때문일까? 상대는 친구의 원수이다. 그런데 마음이 아프다. 이런 경우는 한번도 없었다...........어떻게 된 일일까? 왜? 분노(忿怒)가 눈 늦듯 사라지는 것일까? 도치는 하늘로 눈을 돌리며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왜?..................무엇 때문에?.........광풍천인도가...........혈무도법 따위에 밀리는 거지.”




냉하상은 스스로에게 질문 한다.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광풍천인도 최후 3절초 중 천인사도와 천강파망까지 사용했다. 그런데 자신이 밀린다. 천인살막 최고의 무공인 광풍천인도의 최후 3절초 중 두 가지를 사용하고도 도치에게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도치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이를 악물어 보았다. 그런데 냉하상을 보자 마음이 약해진다. 이런 경우는 한번도 없었는데............생각해 본적도 없었는데.........냉하상을 보자 자꾸만 마음이 약해진다. 도치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을 정리했다. 눈앞에 있는 놈(?)은 악무룡의 원수다. 죽어야 한다. 놈의 머리를 악무룡에게 가져가야 한다. 하지만 놈만 죽이는 것으로 끝낼 수는 없다. 모두 죽어야 한다. 눈앞에 있는 놈과 도망친 놈들을 모두 죽어야 한다.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엉뚱한 말이 튀어 나왔다.




“멍청한 년!.........나도 무식하지만 너는 더 무식하구나? 도(刀)는 무거운 병기(兵器)야. 여자보다는 남자에게 어울리는 병기라고 할 수 있지. 마찬가지로 도(刀)를 사용하는 도법(刀法)도 여자보다는 남자에게 적합하기 때문에 여자가 익히기는 한계(限界)가 있는 법이다. 너는 처음부터 도(刀)보다는 검(劍)으로 날 상대해야 했어. 그렇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너는 무식하게 도(刀)로 나를 상대했다. 그래서 네가 패한 것이다.”


“닫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마라. 난 여자이기 이전에 천인살막의 막주이며 광풍천인도는 천인살막 초고의 무공이야. 너 따위가 무얼 안다고 지껄이는 거냐?”




도치는 냉하상이 피를 토하며 열변(熱辯)을 토하자 냉하상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냉하상은 도치가 다가오는데도 손가락하나 까닥할 힘이 없어 멍하니 도치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도치는 냉하상의 바로 앞에 와서 천천히 손을 들었다. 




“짝~”




냉하상의 얼굴이 돌아가며 창백한 얼굴에 붉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생긴다. 도치는 옆으로 돌아가 냉하상의 얼굴을 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가시나가 남자가 말씀하는데 어디서 꼬박꼬박 말대꾸야. 지금 내말이 틀렸다는 거냐? 결과가 말해주고 있잖아. 너는 졌고 나는 이겼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지.”


“흥~ 운이 좋았어. 네놈은 절대 나의 상대가 아니야?”




냉하상은 내공이 뒤틀린 상태에서 억지로 내공을 끌어올려 완벽하게 익히지도 못한 천강파망(天剛波網)을 사용했기 때문에 내상을 입었다. 덕분에 온몸의 뼈가 어긋나고 창자가 뒤틀리는 고통이 엄습했지만 지금은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혈무광랑 따위에게 뺨을 맞았다. 태어나서 이런 모욕감(侮辱感)은 처음이다. 한번도 자신을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번도 남에게 패(敗)한 적이 없다. 아니! 자신은 절대 패하면 안 되는 사람이다. 여자이기 이전에 천인살막의 막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패했다. 더구나 상대는 자신을 여자라는 이유로 무시하고 있다. 냉하상은 심리적인 고통이 너무 크기에 육체적인 고통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도치는 독기(毒氣) 가득한 냉하상의 눈을 바라보다가 손으로 냉하상의 목을 잡으니 가느다란 냉하상의 목이 도치의 거대한 손에 힘없이 잡힌다. 도치가 조금만 힘을 주어도 냉하상의 목이 부려져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도치는 손을 잡아당겨 냉하상의 얼굴을 자신의 코앞으로 다가오게 만들었다. 




“억울해?.........억울해서 미치겠니? 내말이 틀린 것 같아?............그래! 나는 무식한 놈이니까 틀릴 수도 있을 거야. 좋아! 그럼! 다시 한번 기회를 주겠어. 내 말이 틀렸다는 걸 증명해봐~. 하지만 조건이 있다. 내말이 틀리지 않았다면 순순히 다른 놈들이 어디 있는지 말해. 이런 말 하면 어떻게 생각하지 모르겠지만................내가 여자를 상대로 험한 짓을 하지 않게 해주면 고맙겠다. 멍청한 년은 아닌 것 같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지.”




도치의 말에 냉하상은 그나만 남아있던 자존심이 우르르 무너진다. 상대는 자신을 죽이지 않고 기회를 주겠다고 한다. 다른 이유도 아니다. 




자신이 여자이기에........


자신이 말을 걸 증명하기 위해.............


.좋게 말할 때(?) 부하들이 어디로 도망쳤는지 말하라고........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다. 놈은 마지막 자존심까지 짓밟고 있다. 냉하상은 이를 악물었다. 




“좋아.........내가 죽던 네가 죽던 끝을 보자.”


“멍청한 년! 누가 네년보고 죽으라고 했어? 내가 네년 맘대로 죽게 내버려 둘 것 같아? 네년은 다른 놈들을 다 죽일 때지 살아 있어야 해.”




도치가 잡고 있던 손이 뜨거워지며 엄청난 기(氣)가 노도(怒濤)처럼 밀고 들어와 냉하상의 온몸에 펴지기 시작한다. 도치가 자신의 내공을 냉하상에게 전해주는 것이다. 냉하상은 멍한 눈길로 도치를 바라본다. 적(敵)에게 자신의 내공을 전해주니다..........이게 말이 되는가? 미치지 않고는 이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도치는 너무나 태평한 표정이다.




“ 멍청한 년! 뭐해? 빨리 치료나 해!”


“..............................”




냉하상은 할말이 잊어버렸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자존심을 생각한다면 혀라도 깨물고 죽어야 한다. 천인살막의 막주가 적(敵)에게 동정(同精)을 받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하지만 또 다른 감정이 있다. 




‘죽인다. 자신의 자존심을 짓밟고 천인살막을 무시(?)한 놈을........놈을 용서할 수 없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놈만은 죽이겠다.’




냉하상의 이빨이 입술을 파고들며 피가 솟구친다. 냉하상이 심적 고통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치는 냉하상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며 내공을 전해주는데 냉하상의 몸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냉하상은 도치가 전해주는 내공을 힘으로 막힌 경략을 풀어 주었다.




“됐어. 그만해!”




냉하상이 힘들게 입을 열었다. 도치는 피식 웃더니 냉하상의 목을 놓아주었다.




“다른 말은 필요 없겠지. 최선을 다해라. 대신.........약속은 충실히 지켜주기 바란다.”


“빠드득~ 이번에도 네놈을 죽이지 못하면 네가 네놈의 종이다.”


“하하하~ 네년 말을 믿어보겠다. 설마 주둥이가 두 개라고 두 말하지는 않겠지.”




도치의 모욕적인 말에 냉하상의 투지가 불타오른다. 온몸이 부셔져도.........이곳에서 뼈를 묻는 한이 있어도 도치만큼은 죽인다. 냉하상은 속으로 다짐하고, 다짐하며 남아 있는 모든 내공을 도(刀)에 몰아넣으니 냉하상의 도(刀)가 밝은 빛을 토하며 길게 늘어나기 시작한다.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것일까? 악무룡의 원수를 갚아야 하는데.............한가하게 계집이랑 노닥거리고 자신이 한심해서 미칠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의 선택을 후회하기에는 늦었다. 이미 선택은 끝났다. 자신이 할말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도치는 냉하상의 모습을 보더니 몇 걸음 물려나며 도끼에 내공을 불어 넣었다. 이번 한수로 냉하상과 자신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냉하상은 온몸의 찢어지는 것 같았다.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광풍천인도의 마지막 초식을 사용하기 위해 무리하게 내공을 끓어 올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죽는다 해도..........온몸이 찢어져도 멈출 수는 없다. 도치의 말이 틀렸다는 걸 증명해야 한다. 여자도 도(刀)로써 상승무공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천인살막의 광풍천인도가 최고의 무공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냉하상이 도(刀)를 하늘 높이 들어올리더니 한순간에 길게 내리 긋는다.




“광풍천인도..........환란연무(環亂演舞)”




냉하상의 작은 몸이 둔기(鈍器)에 얻어맞는 듯 공중으로 튀어 오르며 핏줄기를 토하다. 하지만 그녀의 도(刀)에서 하얀 백룡(白龍)이 튀어나와 도치를 향해 날아간다. 도치는 백룡의 형상을 보고 빠르게 물려나며 망설이고 있었다. 피하려면 피할 수도 있다. 냉하상의 초식이 완벽하지 않아 허점이 많고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에 이번 공격만 피해도 자신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피하는 것은 비겁하다. 자신은 냉하상에게 기회를 주었고 냉하상은 최선을 다했다. 여기서 자신이 피하면 손쉽게 승리할 수는 있겠지만 그건 비겁한 승리일 뿐이다. 도치는 한 자루 도끼를 하늘 높이 던져 올리더니 백룡(白龍)을 향해 돌격했다.




“혈무파천무(血霧破天舞)~”




붉은 혈무(血霧)에 쌓인 도치가 춤을 추니 하늘 높이 올라갔던 도끼가 도치의 춤에 장단이라도 맞추듯 낙엽처럼 빙글빙글 돌아가며 백룡(白龍)의 머리를 향해 낙하(落下)하고...........도치의 손에 있던 도끼가 회오리바람에 말려 올라가는 낙엽처럼 하늘로 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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