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녀랑군千女郞君 - 1부 3장
본문
그렇게 어수선하게 떠드는 혜련과 태경을 멀리서 지켜보는 눈이 있다. 나이를 잊은 듯 주름 하나 없는 곱디고운, 황색 승포에 붉은 가사를 걸친 중년의 비구니들. 가운데 서 있는 비구니는 그 가운데서도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인다. 그래봐야 주름 하나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이제 때가 된 것 같군요.”
목소리 또한 맑다. 한여름 한가로운 풍경소리를 듣는 듯. 깊은 산 계곡으로 밤새 맺힌 이슬이 떨어지는 듯. 그러면서도 조금도 삿되거나 탁하지 않은 힘이 느껴지는 것이 분명 범상한 신분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장문인 말씀대로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아미파 모든 비구니들의 가장 웃어른인 장문인이다. 법호 가양. 속성은 홍(洪). 역시나 전전대의 장로 홍해(洪解)의 딸로 태어나면서부터 아미파 제자였던, 정무각을 나온 이후 스승인 전대장문인 절진과 함께 아미파의 삼대절기를 더욱 깊이 갈고닦아 완성한 일대의 무승. 불덕의 깊음은 알 수 없지만 불문의 공부에 대해서는 소림의 당대장문인 공료(空瞭)조차 따를 수 없을 것이라던 그녀다.
“오랜 기다림이었습니다.”
“예, 오랜 기다림이었습니다.”
그녀의 주위에 둘러서 있는 8명의 승려들은 당대 아미파의 장로들과 그녀들의 제자들이다. 가자 항렬과 정자 항렬의. 정도가 쇠락해 그 앞날을 알 수 없는 지금, 하지만 도리어 가양과 함께 아미파의 전성기를 위한 토대를 닦아가고 있는 동량들이다.
“항자배까지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다음 해(解)자배부터는 다시 정무각에 드는 일이 없을 겁니다. 그래야 하구요.”
단아하기만 하던 가양의 얼굴에 살기와도 같은 차가운 결의가 맺힌다. 그것은 주위에 둘러서 있는 다른 비구니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들의 눈은 다시금 알몸인 채로 장난치고 있는 혜련과 태경 그리고 다른 여자아이들을 본다. 서로의 성기를 만지고, 알몸을 쓰다듬으며 엉기고 있는 모습은 여염의 아이라면 차마 부끄러워 하지 못할 것들이다. 그럼에도 저리 해맑게 웃고 있으니 그것이 더욱 슬프다.
“수모가 너무 길었습니다. 수모를 수모로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말이죠.”
그 모습을 보는 그녀들의 눈빛이 더욱 굳어진 결의로 차갑게 가라앉는다.
“하지만 덕분에 마음의 공부들이 깊어졌습니다. 전 같으면 작은 수치에도 슬퍼하고 분노하고 좌절했을 것을, 비록 체념이라고는 하지만 이제는 담담히 웃어넘길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그러나 가양의 표정은 오히려 밝은 웃음과 함께 부드럽게 풀린다. 나이조차 느껴지지 않는 주름 하나 없는 얼굴에 그녀의 목소리마냥 맑디맑은 보살과도 같은 해맑은 웃음은 역시 그녀의 말처럼 마음의 공부의 끝없는 깊이를 보여준다.
“어쩌면 이것은 부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자만하지 말고 방심하지 말라 내려주신 시련인지도 모릅니다. 보다 마음을 깊이 하고 보다 행동을 무겁게 하며 보다 생각을 넓게 가지라 하는 가르침이실 겝니다,”
“하긴 아미삼절기도 아미파 비구니들의 아픔과 수치과 분노와 슬픔이 없었다면 세상에 나올 수 없었겠지요. 그때의 패배로 인한 좌절과 지금의 수모가 아미파로 하여금 모든 것을 벗어던져 버리고 새로운 옷을 찾아 입을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 부처님의 뜻이지요. 따라서 지금의 어려움만 이겨낼 수 있다면 부처님의 음덕이 우리 아미파에 미칠 것입니다.”
“아미타불...”
어쩌면 그것은 자기기만인지도 모른다. 스스로 지금 겪고 있는 수모와 수치를 감추기 위해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속여서라도 저리 맑고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마음의 공부를 알 수 있다.
동문과 제자들의 그런 모습을 보며 가양은 자랑스런 표정을 짓는다. 이들이다. 이들이 있음으로써 아미파는 전에 없는 성세를 누릴 것이다. 불문의 성지로서만이 아니라 무림의 정종으로서 모든 이들이 우러러보는 존재가 될 것이다.
가양의 눈이 정화에 이르러 따뜻한 빛을 띈다. 사문의 법도로는 자신의 제자이고, 사적으로는 스승인 진절의 딸이기에 자매와도 같은 그녀. 얼굴을 붉힌 채 다소곳이 허리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곱고 단정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정화에게 무척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아...!”
“태경이 아니었다면 그 모든 계획은 불가능했을 테니까요.”
“장문인...”
처음 정화가 정현과 함께 만신창이가 되어 산문을 들어섰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하지만 정현과 정화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충격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임신이라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에게 겁탈당해 아이를 배다니. 그녀들의 친어미이던 절양과 절진은 그만 정신을 놓고 말았다.
다행히 그들은 아미파이기 이전에 생명과 인연을 중요시 여기는 불문의 금정사였다. 금정사는 여인들의 한이 맺힌 금정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저자에서 몸을 팔던 홍루의 창기도 인연이라 여기면 제자로 받아들이는 그네들이다. 하물며 정화와 정현은 그들의 딸이며 제자다. 결국 아미파는 자연스럽게 알 수 없는 사내의 씨를 받은 아이들을 아미파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그때 가양이 받은 정화의 아이가 저기서 혜련과 놀고 있는 태경이다.
“석년 정사의 뭇문파들이 전설색마를 추살할 때 당시 복호사를 대신해 막 아미파의 이름을 이었던 본파도 참가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세가 다른 문파에 미칠 정도가 아니었던 터라 다른 대문파에서 차지하고 남은 찌꺼기나 겨우 나눠받을 수 있었죠. 그것이 바로 색마역골세혈대법이라고 하는 일종의 벌모세수대법입니다.”
“당시 장문인이시던 해강(解綱) 태사조께서 도대체 불쏘시개로도 쓸 수 없는 이런 걸 가지고 뭘 하라는 거냐며 한탄했다고 하셨죠. 아미타불.”
한숨까지 내쉬며 짐짓 고개를 저어보이는 이는 가양의 사제이며 계율원주인 가홍(架烘)이다. 심각한 표정가지 지으며 불호까지 외는 그녀의 모습에 좌중은 잠시 즐거운 웃음에 잠겨든다.
“호호호홋... 그렇습니다. 참으로 쓸모없는 물건이었습니다. 비구니 사찰에 색마역골세혈대법이라니요?”
“오죽하면 여장을 시켜 남자제자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겠습니까?”
“해강 태사조 다음으로 장문인에 오른 이가 경여(敬如) 태사조가 아니었다면 아마 본파에서도 남자 제자를 받아들였겠죠.”
“그랬다면 아미파에 입문하는 제자들도 더 많아졌을텐데요.”
“호호호홋... 왜 아니겠습니까? 색마역골세혈대법을 시술받은 남자제자를 두었다면 천하의 모든 여인들이 머리를 깎고 아미파 제자가 되려 했을 겁니다.”
“참 아쉬운 일입니다. 천하제일문파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렸으니요.”
“호호호호홋...”
물론 진담은 아니다. 그녀들은 어디까지나 불문의 비구니들이니까. 그저 웃자고 하는 소리들일 뿐이다. 색마역골세혈대법을 전설색마 추살의 전리품으로 분배받은 이후 이어져 오던 자조적인 우스개들을 다시 한 번 되새길 뿐이다.
“어쨌거나 그 불쏘시개로도 쓰지 못할 대법 때문에 10년 전 그들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웃음은 이내 그치고 가양의 눈은 벼리어진 칼날과도 같은 섬뜩한 눈빛으로 멀리 아미파에 주둔중인 마교 고수들의 숙소인 마존각(魔尊閣)이 있는 방향을 본다. 에일 듯 싸늘하게 일어나는 살기에 다른 비구니들 또한 얼굴을 굳히고 그녀가 보는 방향을 노려본다.
“아마 저들은 모를 겁니다. 자신들이 얼마나 약해졌는지를. 그리고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강해졌는가를. 70년 전 그때의 영광에 안주하여 스스로를 잃어가는 저들은 그래서 마교라는 거대한 성을 무너뜨릴 작지만 큰 틈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틈을 노리는 것이 바로 본파의 태경이 될 테구요.”
그녀의 눈이 다시 따뜻한 웃음으로 바뀌어 정화를 본다. 그리고 다소곳이 고개를 숙여 보이는 정화를 뒤로 하고 다시 태경을 본다. 철벽과도 같은 결의를 담아서.
“정확히 열흘 뒤. 태경에게 색마역골세혈대법을 펼칠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교라 하는 저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은 철옹성을 무너뜨릴 것입니다. 그리할 것입니다. 아미파의 이름으로 반드시!”
석년 생사평의 싸움에서 아미파 장문인 회절(悔切)은 복호권 하나로 마교의 장로 둘을 석패시키고 아미산에 엎드린 암호랑이가 있음을 천하에 알렸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엎드린 암호랑이들이 일어나려 하고 있다.
“장문인!”
“장문인!”
격동을 이기지 못한 아미파의 비구니들이 분분히 몸을 앞으로 내던진다. 부들부들 떨리는 것은 그녀들의 안에서 폭풍처럼 일어나고 있는 아미파 암호랑이들의 기세일 것이다. 이제 다시 일어날 때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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