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SF

천녀랑군千女郞君 - 1부 1장

본문

아미파의 소동.




“6년... 만이구나...”


하늘마저 굽어보려는 듯 가파르게 높이 솟아있는 잿빛 벼랑들. 나무는 차라리 검은 숲의 바다를 이루고 있다. 저 아래 산기슭은 그 숲의 바다에 잠겨있는 채다. 벼랑의 저 위 봉우리도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하늘을 꿰뚫고 땅을 덮는 기세. 


아미산이다. 사천제일의 대산. 불문 사대 명산 가운데 하나. 천하무림의 정종 아미파가 자리한 바로 그 아미산이다. 높이만 수천 장. 넓이가 수천 리. 그 규모와 위세만으로도 가히 천하제일이라 할만한 대산.


“하아...”


바로 어제 떠나온 것만 같다. 6년이라는 시간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닐진대 꿈에서 보았던 모습 그대로다. 6년 전 그녀가 보았던 계곡과 숲과 봉우리가 그때 그 모습 그대로 그녀를 맞아주고 있다. 잘 왔다며 아미산의 숨결이 서늘하게 보듬어 안아주고 있다.


“돌아왔구나...”


눈시울이 뜨겁다. 눈앞이 흐리게 일렁인다. 이제야 돌아왔음을 느낀다. 13살 어린나이에 떠나 19살 다 자란 처녀가 되어 돌아왔음을 스스로 느낀다. 언제나와 같은 아미산의 모습에. 언제나와 같은 아미산의 숨결에.


“혜련(慧蓮) 사매!”


그리움은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로 인해 현실이 된다. 


“혜란(慧蘭) 사저!”


2년.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이건만 하마터면 그녀의 목소리마저 잊을 뻔했다. 다시 듣자며 다짐하던 목소리였건만. 꿈에서라도 다시 보고 싶었던 그녀의 목소리였건만.


노란색 승복을 입은 그녀가 보인다. 정무각에서 나오던 차림 그대로 알몸인 그녀와는 다른 노란색 엄숙하고 단정한 승복 장삼을 걸치고 서있는 그녀가. 파르라니 깎은 이마에는 하얀 계인이 찍혀 있다. 그사이 계를 받은 것이다. 


“왔구나.”


“네, 왔어요.”


다른 말은 필요 없다. 지금 혜련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가 바로 혜란일 테니까. 2년 터울의 사형제로 무려 4년간이나 같이 정무각에 있었었던 그녀이기에 말하지 않아도 혜련이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자기 일인 양 느끼고 있을 것이다.


“예뻐졌구나.”


“원래 예뻤어요.”


“비쩍 마른 꼬맹이였는데.”


“그래도 지금은 사저보다 키가 크다구요.”


“한 마디도 지지 않다니.”


“이제 다 자랐는걸요.”


서안의 마교 총단 내에 설치된 정무각에서의 생활은 여자로서 차마 견디기 힘든 것이다. 매일같이 하루 평균 한 사람 이상의 사내를 상대해야 했고, 사내를 상대하지 않을 때에도 알몸으로 뭇사람들의 눈요기거리가 되어야 했다. 더구나 그녀들은 비구니였다. 비록 계는 받지 못했지만 출가한 불문의 승려였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죽고 싶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죽고 난 뒤 돌아올 후환이 두려워 죽지조차 못했다. 그곳에서 4년을 같이 보냈다. 서로의 가장 비참하고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보아가며, 체온과 마음을 나누며 4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 사이가 일반 사형제와 같을 리 없다. 아니 같을 수 없다.


“그러고 보니 고리가 꽤 많구나. 20개는 넘어 보이는 걸?”


“정확히 21개에요.”


혜련의 알몸에 꿰인 고리를 보며 혜란이 짐짓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인다. 젖꼭지에 각각 하나. 음핵에 또 하나. 어린아이의 그것인 양 매끈한 계곡 사이로 머리카락 만큼이나 가는 손가락 하나 들어갈 정도의 고리가 빼곡이 매달려 있는 것이 모두 18개다. 5월의 따사로운 햇살이 유난히 밝은 산길이라 고리들은 춤을 추듯 화려한 빛을 뿜어내고 있다.


“21개? 나 나올 대까지만 해도 13개였잖아?”


“2년 동안 죽는 줄 알았어요. 하루에만도 대여섯 번씩, 어떤 때는 하루에 열 명 이상도 상대해야 했으니.”


“하긴 그동안 몰라보게 예뻐졌으니까. 그나저나 2년 사이 1600명이라니 정말 대단했겠구나.”


“천하제일미라는 남궁옥지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확실히 깨달았다니까요?”


“후후훗... 남궁옥지의 어머니인 화산일봉 악무영(岳懋瓔)은 그보다 5개나 많은 33개였다잖니?”


“33개요? 그럼 6600명? 매년 1000명 이상을 상대했다는 거에요?”


“후후훗... 그녀의 아름다움이 꽃피기 시작한 것이 15살 때부터라는 것을 감안하면 아예 상상조차 되지 않지?”


저자에서 몸을 파는 창녀라도 감히 부끄러워 하지 못할 차림. 더구나 그녀가 서 있는 곳은 불문의 사대명산인 아미산을 찾은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산길이다. 그 오가는 말의 내용 또한 차마 남이 듣기 민망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녀의 표정은 조금의 어색함도 없이 해맑다. 아니 오히려 당당하다. 그러는 것이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의 앞이기 때문이다. 그녀를 믿기 때문이다. 그녀가 자신을 이해해 줄 것이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이다. 지난 4년 간 가장 굴욕적이고 가장 비참했던 모습을 서로 보고 보이며 마음을 나누었던, 어쩌면 친자매보다 더 가까울 그녀이기에 다른 사람에게라면 결코 할 수 없는 이야기조차도 일상처럼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는 것이다. 


“그나저나 사람이 꽤 많네요?”


“그렇지?”


그녀의 말처럼 주위에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의 시선이 끈적거리는 것이 그대로 느껴질 정도로. 멸시와 혐오와 탐욕의 표정이 한 눈에 들어온다. 당연하다. 그들에게 정파니 마교니 하는 것은 남의 나라 이야기일 테니까. 중요한 것은 지금 눈에 보이는 모습. 성스러운 아미산에서 비구니인 양 머리를 깎은 채 은밀한 부위에 고리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모습일 테니까.


“역시 불문의 성지라는 건가요?”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그런 시선들이나마 많다는 사실일 게다. 불문의 사대명산이라는 명성 때문일 것이다. 제아무리 마교와의 싸움에서 패퇴하여 그 성세가 예전만 못하다고는 하지만, 무림과는 상관없는 일반인들에게 있어 아미파는, 아니 금정사는 여전히 법력 깊은 스님들이 머무는 불문의 고찰일 테니까.


“어차피 정무각은 무승들이 가는 곳이지 학승과는 전혀 상관이 없으니까.”


“그렇겠죠?”


하긴 마교라 할지라도 오로지 불법 하나에 매진하는, 그저 건강을 위한 도인술이나 겨우 익혔을 뿐인 학승들에게 정무각에 들 것을 강요할 수는 없다. 그녀들은 비록 아미파에 몸을 담고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무림과는 상관없는 불문의 승려일 뿐이니까. 무림인의 행사에 무림인이 아닌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 하물며 비정상적으로 긍지가 높은 마교임에야.


“덕분에 갈수록 무승의 수가 줄고 있기는 하지만 말야.”


“몇 명이나 돼요? 4대 제자는?”


“8명?”


“8명?”


“응. 모두 사숙들의 아이들이야.”


“쯧...”


“어쩔 수 없잖아? 누가 요즘같은 세상에 무승을 하겠어?”


“하긴...”


문제는 그로 인해 아미파의 무공을 익히는 무승의 수가 지속적으로 줄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누가 정무각에 들어 연인원 수천 명 이상의 사내들을 상대하고 싶겠는가? 비구니라 하지만 출가하기 전까지는 사가에서 일반적인 상식을 교육받으며 자라온 그녀들이 말이다.


혜란과 혜련이 속한 3대 제자 혜자배만 하더라도 제자의 수가 모두 12명에 불과하다. 전성기 한 배만 30명이 넘었던 것을 감안하면 절반에도 못 마치는 숫자다. 그나마 마교도에게 범해져 낳은 아이를 뺀다면 서너 명 정도가 겨우 출가하여 입문한 제자다. 불문의, 그것도 비구니의 문파인 아미파가 마교도들에게 범해져 낳은 아이들로 겨우 무문의 맥을 이어가는 형편인 것이다.


“그나저나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산으로 올라가자. 장문인께서 기다리시겠다.”


“장문인께서?”


“그래. 정화 사숙이랑 얼마나 걱정하셨다구.”


“사부님도?”


“같이 계실거야.”


“아...!”


그리운 이름이다. 그녀의 스승인 정화. 그리고 사조이자 장문인인 가양(袈讓). 가양은 또한 혜련의 친어머니이기도 하다. 20년 전 아미파에 파견나와 있던 마교의 고수들에게 범해져 그녀를 낳은. 속세의 연을 인정하지 않는 불문이지만 혈연은 곧 천륜이라 그립고 애닲은 마음은 어찌할 수 없다.


“어서 가요.”


“음?”


“어서 뵙고 싶어요.”


“후후...”


“사부님이랑 장문인이랑...”


잠시의 간격. 주저주저 말을 잇지 못하는 혜련의 두 뺨이 발그레하니 물들어 있다. 혜란은 그녀가 저리 망설이는 이유를 안다. 아니 이제껏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다.


“태경 사제?”


“네?”


“태경 사제 보고 싶은 거 아냐?”


“아... 아니에요. 그... 그런 건...”


“후후훗...”


저리도 붉어진 얼굴로 아니라고 해봐야 믿을 사람 없다. 하긴 혜란 또한 태경을 직접 보지 못했다면 결코 믿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고작 10살짜리 아이에게 얼굴을 붉히다니. 그녀가 정무각으로 떠날 무렵이라면 4살에 불과했을 것 아닌가.


그러나 혜란은 그녀의 마음을 이해한다. 태경에게는 나이를 뛰어 넘어 여자에게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느끼게 하는 힘이 있으니까. 사랑이든. 연민이든. 동경이든. 태경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혜란의 사타구니가 욱신거리며 펑하니 젖어온다. 


“어서 서두르자. 태경 사제를 보려 해도 먼저 장문인과 정화사숙을 뵈어야 하니.”


“예...”


혜란의 한 마디에 마음이 급한 것인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잰 걸음으로 산길을 올라간다. 제법 살집이 오른 엉덩이가 이리 실룩 저리 실룩거리는 것이 우습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것이라 사타구니로 늘어진 작은 입술과 금빛 고리가 살랑거리며 맑은 쇳소리와 함께 부딪히는 것이 또렷이 보인다. 조금은 젖어 있는 아랫입술이 실룩이는 것도.


“후후훗...”


역시 어린 사매다. 키도 그녀보다 훌쩍 크고, 6년간의 마음고생으로 정신적으로도 꽤나 자라 있지만, 아직은 그녀에게 있어 어리고 귀엽기만 한 사매다. 혜란은 웃으며 서둘러 그녀의 뒤를 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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