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 - 30부
본문
미선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번갈아가며 느릿하게 빨던 성진은 이윽고, 천천히 그녀의 입술에서 자신의 것을 떼어냈다. 의외로 미선은 눈을 꽉 감는다거나 하진 않았다. 그녀는 살포시 눈을 감은 채 성진의 입술을 느껴가고 있었고, 그가 입술을 떼자 역시 천천히 눈을 떴다. 차분하고 깊은 눈동자. 성진은 그녀의 눈동자가 미려한 구슬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고, 잠시 후 미선은 눈을 내리깔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놀랐어?”
“다… 당연하죠. 그렇게 갑자기 입을 맞추면….”
그녀는 히죽 웃으며 물어보는 성진의 말에 얼굴을 붉히면서 더듬거렸다. 하지만 그 말끝에는 미묘한 기쁨 같은 게 간직되어 있었고, 별 생각 없이 그녀를 내려다보던 성진도 얼굴이 슬쩍 붉어지는 느낌이었다. 하여튼 정말 귀여운 후배라니깐. 그는 약간 흐트러진 미선의 앞머리칼을 매만지듯 옆으로 쓸어주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잠시 후, 미선은 내리깔았던 눈을 반쯤 들면서 입을 열었다.
“…이것도 설렘이란 선물이겠죠?”
“뭐… 일단은.”
애매한 관계를 빗댄 미선의 말을 상기한 성진은 역시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둘 사이엔 한동안 어색한 침묵만이 흘렀다. 성진은 다르게 대답했어야 했나 하고 머릿속으로 고민해보았다. 그러나 이 이상 최선의 대답은 생각해낼 수 없었고, 사실 그건 미선도 마찬가지였기에 그저 말없이 서로의 눈치를 흘끗흘끗 살필 뿐이었다.
결국 먼저 입을 연 쪽은 성진이었다. 그는 짐짓 옆쪽 허공을 바라보며 지나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떨어? 아, 너 혹시… 이 선배가 첫키스냐?”
반 장난으로 물어보는 것이었지만 미선은 볼을 부풀리며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탁하고 쳤다.
“아, 무슨…! 선배도 참.”
“제대로 부정하지 못하는 걸 보니 첫키스 맞나 보네.”
성진은 낄낄거렸고 미선은 더욱 얼굴이 붉어진 채 그와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성진은 휘파람이라도 불 듯 두 손을 재킷에 다시 찔러넣은 후 몸을 한바퀴 빙글 하고 돌렸다.
“야, 요즘 시대에 무슨 스무 살 되도록 키스 경험 한번 없을까.”
어색해진 분위기를 타파하고 긴장을 풀어보려 건넨 말이었지만 성진의 말은 미선을 꽤나 자극시킨 모양이다. 그녀는 이번엔 눈을 치켜떠서 그를 노려보면서 각인시키듯, 또렷하게 한마디한마디 내뱉었다.
“저도 고등학생 때 이미 경험이 있다구요!”
“헉… 그래? 누구지?”
짐짓 놀란 척 하며 엄지와 검지를 턱에 갖다대곤 하늘을 올려다보는 성진.
“음… 누가 이 공주님의 순결을 빼앗아갔을까…….”
아무래도 놀림의 정도가 심했던 것 같다. 미선은 진지하게 골똘히 구상해보는 듯한 그의 모습에 갑자기 알 수 없는 울컥함이 치밀어올라 뭐라고 소리치려 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한가지 제대로 반격할 거리가 머릿속에 떠오르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흐음, 선배. 난 선배가 짐작하지 못할 만한 경험도 했지요.”
허공을 올려다보던 성진의 고개가 대번에 내려왔다. 정말로 놀란 듯한 음성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고, 그것은 미선을 상당량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뭐…? 짐작하지 못할 경험이라니?”
“저를 한낱 어린 동생이라고만 여기시면 곤란하죠. 훗훗훗.”
그리곤 성진이 멍청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틈을 타 그녀는 검지손가락을 자기쪽으로 뒤집어 세워 입술에 갖다 댔다. 나긋하게 늘어지는 그녀의 음성.
“여기뿐만이 아니라….”
이어서 슬쩍 밑으로 내려가는 손가락. 그 손가락이 가리키듯 갖다 댄 곳은 미니원피스의 치맛자락이었고, 그녀는 다른 쪽 팔로 자신의 가슴을 끌어안으며 유혹적인 눈빛을 보내었다.
“여기도 경험이 있거든요.”
성진은 그 밑으로 뻗어나온 그녀의 검은 스타킹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오늘 특별히 예쁘게 꾸미고 나온 것은…. 미선은 치맛자락을 손가락으로 살포시 붙잡더니 성진에게 한걸음 다가갔다. 성진은 흠칫 하고 놀랐고, 미선은 그런 선배가 귀여운 듯 킥킥하고 웃었다.
“보고 싶어요, 선배?”
“어? 어…. 뭐… 뭘?”
“싫다아…. 모르는 척 하긴.”
“미… 미선아. 이제 슬슬 들어가봐야….”
“선배. 나 오늘 시간 많아요.”
다시금 치마를 슬쩍 들어올리면서 한걸음 다가오는 미선. 성진은 그녀가 밀착하는 걸 회피하기라도 하듯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다가 뭔가에 등을 걸치게 되고는 기겁해버렸다. 하필이면 내 쪽이 담을 등지고 서있었을 줄이야! 순간 미선의 두 손이 성진의 양 어깨를 지나쳐 뒤쪽 담벼락에 착 달라붙듯 갖다댄다. 그녀의 양 팔 사이에 끼게 된 성진.
“헤에. 이젠 도망칠 수 없겠다.”
“그… 그러니까 미선아. 내가 잘못했으니까 이거 좀…….”
“뭐 어때요. 내일 수업도 없는데. 여기서 해버려요.”
“뭐? 여기서?”
“전 괜찮아요.”
성진은 그녀에게 ‘여기서 뭘’ 할건지는 되묻지 않았다. 어쩐지 스위치가 올라간 듯한 그녀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당연하게 ‘섹스’라고 대답할 게 뻔한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미선은 한 팔을 내려 대담하게 미니원피스를 걷어 올렸다. 그리고는 치맛자락을 붙잡은 손가락 중 하나를 내어서 아래를 가리켜보였다.
“선배. 혹시 팬티스타킹 취향 있으세요?”
“그러니까 미… 선아. 여기서는 좀…….”
“흐음….”
미선은 자꾸만 머뭇거리는 선배가 이젠 갑갑해졌는지 눈을 치켜떴다. 그리고는 똑바로 뜬 눈으로 불과 몇 센티도 안 되는 거리까지 얼굴을 마주 갖다댔다. 급작스럽게 자신의 앞에 밀착해온 미선의 모습에 성진은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진 것마냥 허둥거리는 그를 보면서 미선은 강압적인 분위기로 또박또박하게 입을 열었다.
“이것 봐요, 선배. 설마 키스만 하고 돌아갈 생각은 아니었죠? 제 마음을 설레게 했으면 이 순간만큼은 끝까지 책임을 지라구요!”
“아… 알았으니까 일단 좀 떨어져서…….”
“흐음…?”
미선은 그의 부탁은 듣지도 못한 것처럼 한동안 바라보기만 했다. 성진은 그녀와 시선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며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고, 미선은 그만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픽하고 웃고는 치마를 도로 내리었다. 어쨌거나 제대로 된 반격을 취하게 된 그녀의 입장에선 고무적인 현상이라 생각하며 미선은 즐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뭐야, 선배. 이제 보니 선배가 더 숙맥이네.”
성진은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그녀의 감옥(?)에서 빠져나와 옆으로 비켜섰고, 미선은 두 팔로 자신의 가슴을 끌어안으며 그의 앞에서 원을 그리듯 통통 걸었다. 한 손을 입가에 갖다댄 채 헛기침을 하는 성진을 곁눈으로 바라보던 그녀는 약간 더 도발을 가해보기로 했다.
“선배. 혹시 여자 경험 많다는 것도 다 거짓말 아녜요?”
상진은 다시 재킷 주머니에 두 손을 집어넣고는 그 말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아리송한 미소만 지었다. 미선은 고개를 갸웃해 보였지만 성진은 역시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녀는 김빠진 한숨을 폭하고 쉬었다. 여기까지인가. 그럼 슬슬 들어가봐야 할까나. 미선이 그렇게 생각하며 돌아왔던 담 모퉁이 쪽을 슬쩍 바라본 찰나였다. 그의 음성이 툭하고 귓가에 꽂힌다.
“좋은 데 보여줄까, 미선아?”
그녀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성진을 돌아보았다.
“좋은 데요?”
“내가 여기서 너랑 하지 않는 이유는 단순해. 장소의 협소함 때문이지. 추운데 길바닥에서 하는 건 모양새가 별로 좋지 않거든. 게다가 너희 부모님이 나왔다가 맞닥뜨릴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성진은 핸드폰을 꺼내서 시간을 확인해보았고 곧 그의 입에서 의미모를 말이 다시 한번 흘러나왔다.
“이왕 할거면 즐겁게 해야지. 아직 한창 시작했을 때겠군. 오늘 좀 늦게 들어가도 되지?”
“즐겁게…? 시작…? 그게 무슨…….”
“돼, 안 돼?”
미선은 그의 말 속에 담긴 의미를 추리해보려다가 그의 물음에 대답해야 한다는 걸 깨닫고는 더듬거렸다.
“아, 저…….”
성진은 물끄러미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 한 손을 빼어들어 그녀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그리고는 어딘가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안 된다고 해도 오늘은 그냥 따라오라는 것처럼. 졸지에 그런 성진에게 끌려가게 된 미선은 당황스럽게 반쯤 뛰며 간신히 물어보았다.
“서… 선배. 도대체 이 시간에 어디로 가겠다는 거에요?”
“네 내성적인 성격에 한줄기 임팩트를 가해줄 수 있는 곳.”
마치 시적인 표현을 하는 그의 말에 미선은 더욱 당황했고, 그녀는 내키지 않는다는 의지를 완곡히 표출했다. 미선은 있는 힘껏 성진의 팔을 뿌리쳐서 그의 손과 자신의 손목을 분리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성진은 별로 동요하지도 않고 슬쩍 그녀를 돌아보았을 뿐이었다.
“그냥 집에 가려고?”
강제적인 기세에 비해 그의 물음은 허무하리만큼 원점으로 돌려놓는 뉘앙스를 띠고 있었고, 그래서 미선 쪽이 오히려 뻘쭘해져 버렸다.
“아…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어딘지 모르니 무섭다는 거야? 흐음, 이 선배를 못 믿나 보네.”
“그런 게 아니라구요!”
그녀의 외침이 밤공기를 갈랐지만, 몇 걸음 떨어져있는 성진은 몸을 돌리지도 않고 고개만 돌려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미선은 한 손을 가슴폭에 갖다댄 채 나지막이, 하지만 또렷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것처럼 얘기했다.
“거기… 거기서 왜 제 성격 얘기가 나와요? 선배가 데려갈 곳이 어딘지는 전혀 짐작할 수 없지만… 제 성격에 반하는 거라면 저는 가고 싶지 않다구요. 그건… 아무리 선배라도 용납할 수 없어요. 저도 저 나름대로 견지하고 싶은 영역이 있고, 그래서…….”
감정의 기복이 심해져 약간 정리되지 않은 말들의 연속이었으나 성진은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방어기제를 확고히 하는 사람을 강제로 끌어가고 싶은 생각 따윈 눈곱만큼도 없었다. 대신 그는 터벅터벅 미선에게 걸어와서, 고개를 반쯤 숙이고 있는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침묵 속에 파문을 그리듯 툭하고 던져지는 그의 말.
“내성적인 성격을 견지하겠다고? 이해가 가지 않는군. 너는 그 성격을 싫어할 줄만 알았는데. 그걸 고치려고 편의점 아르바이트도 다니는 거 아니었니?”
“그렇긴 하지만… 최근에 생각이 바뀌어가고 있는 점도 있어요.”
성진은 설명을 요구하는 제스처로 고개를 갸웃했고, 미선은 한참동안 머뭇거리다 결국 자신이 혜진에게 들었던 조언을 그에게 말하였다. 그 내용은 남의 평이나 세간에서 지적하는 단점을 굳이 보완하려 하지 말고, 자유로운 대학생답게 그것을 자신의 스타일로 되살려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최근 자신만의 색감으로 다져진 길을 걷기로 결심한 것이기도 했다.
성진은 관심 없다거나 귀찮다는 표정 없이, 마치 상담사가 된 것처럼 미선의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이 끝났을 땐 단지 살짝 한숨을 쉬듯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웃었다. 그 반응을 본 미선은 의아한 시선을 던지기 시작했고, 그런 그녀 앞에서 성진은 넌지시 중얼거리는 듯한 음성을 내었다.
“그 녀석도 참… 가끔씩 너무 감당하기 어려운 조언을 건넨단 말야.”
“……?”
미선은 무슨 뜻이냐고 더욱 더 의혹적인 시선을 보냈지만 성진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몸을 돌렸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앞서 걸어갔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멈춰 서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네가 그 편이 좋다고 생각되면 그렇게 해도 돼.”
“성진 선배…?”
“어차피 우리는 누군가의 명령으로만 움직여야 할 시기는 지난 성인이니까. 혜진의 말마따나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는 것도 곧 답이라 할 수 있지. 그런데 미선아.”
성진은 그녀의 몇 발자국 앞쪽에 있는 가로등 밑에 서있었지만 고개는 여전히 전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허공으로 얘기하는 듯한 그 목소리는 밤바람에 실어지듯 조용히 미선에게로 다가와 안착한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는 답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이 정말로 답이라 단정지을만한 입지에 위치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건…….”
“대학생이라고 완전한 성인은 아니지. 어떻게 해야 된다고 결정하고 단정지을 수 있는 입지에 서기에는 불안정한 게 너무 많아. 학업쪽이면 몰라도 인생에 있어서 우리는 아직도 어린애일 뿐이야. 왜 세간에서 20대에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지 알아? 20대라는 위치는 학생과 사회인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자유를 어찌할 줄 몰라서 떠내려가는 존재와도 같거든. 그러나 누구도 ‘어떻게 해야 한다’는 답을 제시하지는 않지. 그건 성장을 위한 배려 차원에서 제시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들도 모르기 때문이야. 당연한 말이지. 말 그대로 어느 쪽에도 속해있지 않은 경계에 선 존재에게 해줄 수 있는 답이 있겠어? 하지만 그렇기에 하나만큼은 확고히 할 수 있는지도 몰라.”
성진은 그쯤에서 실어 보냈던 목소리들을 회수하는 것마냥 미선을 돌아보았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 위에서 짧지만 날카로운 앞머리칼이 바람에 살포시 미동한다.
“훗날 선택할 수 있는 답의 선택지를 늘려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입지일지도.”
미선 역시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마주보았지만 그녀의 마음 속은 한가지 종소리가 울린 것 같은 기분을 받았다. 그랬었나…. 그래서 우리는 잘 느끼지도 못하는, 왜 중요하다고 하는지도 모르는 자유를 끌어안고, 현재를 그저 보내고 있음에도 아무도 무어라 하지 않는 것. 그러나 이 순간은 사실 창창하게 남은 훗날의 인생 무엇과도 견주어서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중요한 시기를 보내고 있음을.
잠시 후 성진은 어쩐지 민망해진 듯 머리를 긁적이며 난처한 시선을 전방으로 보냈다.
“피곤한 사설이 길었네. 이런 말이 필요할 정도로 대단한 곳을 가는 것도 아닌데.”
“으응, 아니에요. 선배. 나 어쩐지 가보고 싶어졌어요.”
그의 어조와는 상반되게도 미선의 말은 한층 밝아져있었다. 그녀는 성진에게 한달음에 달려오듯 가볍게 발걸음을 놀리었고, 그도 그런 후배의 모습을 보며 씩하고 미소지었다.
“그래? 가서 놀라도 책임 못 져.”
“저 이래 봬도 나름 경험이 좀 있거든요? 게다가 선배가 데려가는데 뭐 이상한 데 데려가겠어요.”
“어이어이, 너 그렇게 남자를 쉽게 믿다가 쉽게 상처받는다?”
“혜진이랑 비슷한 말하네. 후후후후.”
성진은 무슨 비슷한 말이냐고 되물으려다 찰싹 달라붙으며 자신의 팔짱을 껴안아오는 그녀를 보고는 그냥 웃어버렸다. 다시금 가로등 너머로 걸어가기 시작하는 두 남녀. 자정에 가까워지는 시간인 만큼 거리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둘의 대화는 적막함 속에서 꽤나 또렷하게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그리고 그것은 한참이나 멀어진 후에도 아스라히 들릴 만큼 바람에 실려져 보내어졌다.
“그런데 선배. 말 되게 잘한다. 솔직히 나 아까 조금 감동 먹었어요.”
“감동이란 건 의외의 면모에서 빛날 소지가 많지. 그러니까 미선, 너는 이 선배를 여전히 날라리로 보고 있단 말이야.”
“부정하진 않아요~. 하지만 정말, 음… 뭐랄까. 역시 멋있다고나 할까요.”
“뭐가 자꾸 멋있다는 거야, 얘는.”
“저도 몰라요. 쿡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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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질 속을 메우는 정액을 첫번째로 느꼈다면 두번째로 그녀의 감각을 사로잡은 건 두통이었다. 대행하던 녀석이 뭘 처먹은 건지 머리는 제정신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끈거렸고,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그 원인이 술 때문이란 걸 자각했다. 선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비단 대행하던 선영이 아니더라도 본래의 그녀는 술 자체가 약했다. 전혀 즐기는 편도 아니었고.
선영은 누군가가 누워있는 자신 위에서 살결을 맞비비고 있다는 감각을 세번째로 느꼈다. 그녀는 가만히 자신의 가슴 위를 내려다보았다. 정신없이 젖가슴에 볼을 비벼대던 동혁은 문득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들어보았다. 그리곤 그녀가 멀쩡히 깨어있음을 알게 되자 경악하듯 입을 쩍하고 벌렸다.
“아… 그… 저… 어…….”
물론 깨어나든 말든 막나가겠다고 마음 먹었던 건 사실이었으나 그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한 사정 직전의 쾌감에 많이 기여한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 정신을 완전히 잃고 있었는데 이렇게 한순간에 또렷이 깨어날 수 있나? 하지만 선영은 늘상 그렇듯 별로 친절한 여자는 아니었다. 그녀는 동혁이 상황을 돌이켜볼 틈 따윈 제공하지 않은 채 강력한 일격을 선사해주었다. 정신이 바뀐 후로 자신의 질에 좆을 집어넣었던 모든 남자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사실 이번엔 그렇게 강한 일격도 아니었다. 그녀는 손날을 세워 뒤통수 급소 부분을 탁하고 내리쳤고, 동혁은 그녀의 몸 위에서 부르르 떨더니 깔끔하리만큼 바로 추욱 늘어져버렸다. 옷이 완전히 풀어헤쳐진 상태라 그가 엎어져있는 모습은 참으로 볼썽사나운 광경이었으나 선영은 웃지도 않고 그의 좆을 보지에서 뽑아낸 후 비척비척 일어섰다.
펜션 쪽방의 희미한 조명등만이 형형하게 밝히는 방. 그녀는 쓰러진 동혁을 뒤로한 채 자신의 팬티로 보지를 대충 닦고는 그것을 재킷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슬쩍 그를 돌아보면서 생각을 정리해나갔다. 1박 2일의 엠티를 왔다면 그녀 성격상 갈아입을 속옷 정도는 가방속에 있을 것이었지만 지금의 선영에게 있어서 사실 그 부분은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대행하던 선영 또한 자신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모든 경험을 ‘공유’한다. 그래서 그녀가 대행하는 동안 일어난 일들도 본래의 선영 또한 모두 ‘알고’ 있었다. 자신이 무의식의 세계에 잠겨있는 동안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모두. 그건 의식이 돌아옴과 동시에 섭렵하게 되는 기억과도 같은 것이었으며, 그래서 선영은 성진의 친구한테서 자신이 범해졌음을 쉽게 자각할 수 있었다.
단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만 문제가 된다. 무의식의 세계에서 느끼는 시간은 마치 꿈 속의 그것과 비슷한지라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를 제대로 가늠할 수 없다. 그래서 선영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열어보았고, 요 근래 한 달 만에 세 번이나 원치 않는 현실로 돌아왔음을 깨닫고는 기가 찼다.
‘아니지. 오히려 이 기회에 확실히 ‘나간다면’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겠지. 대행하던 녀석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것 또한 나로 인해 원치않게 태어난 녀석이니.’
그녀는 잠긴 방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곤 복도로 나왔다. 본체나 마찬가지인 본래의 선영은 대행하던 선영이 보고 경험한 기억을, 반대일 상황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빠르게 되찾았다. 그녀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한 손으로 부여잡은 채 복도 저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꺼질 듯 말 듯 계속해서 이어지던 술파티는 드디어 끝을 봤는지 조용했고 간간히 코고는 소리만 들려왔다. 보조등 외에는 모두 꺼놓아서 펜션 거실이나 복도나 모두 어두침침하기 그지없었다. 선영은 차라리 잘되었다 생각하며 그녀가 마음먹은 ‘일’을 치르기 위해 주방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거실 옆 복도를 지나칠 때쯤 문득 그 안에서 걸어나오는 누군가와 마주쳤다.
“선영 선… 아니, 선영아?”
“…….”
선영은 자신을 부르는 그 주인공이 누군지 알고 있었고, 그래서 별로 동요하지도 않은 채 고개짓으로만 복도 입구쪽을 가리켰다.
“네 서방님 저쪽 방에 잠들어있으니 가봐.”
워낙에 감정 없는 톤이라 윤지는 ‘서방님’이란 표현에 웃지도 못하고 고개만 까딱거렸다. 그녀는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선영을 보며 어디 가냐고 물어보려다 그것도 그냥 포기해버렸다. 뭐 마실거라도 찾아 다니는 건가?
그렇게 둘은 서로 반대방향으로 떨어졌고, 선영은 거의 다 나은 다리를 조금씩 절뚝거리며 주방 내부로 들어갔다. 펜션 주방은 간단한 간이 싱크대와 식탁 등이 구비되어 있었다. 주방은 보조등 하나 없이 어두침침했고, 그래서 선영은 창문으로 스며드는 도시 외부에서나 의지할만한 달빛에 목표물을 찾아나갔다.
곧 그것은 어렵잖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요리를 하는 데 쓰였을 부엌칼이 싱크대 한쪽에 놓여있는 것을 보고는 손을 뻗었다. 그리곤 자루 부분을 움켜쥐었다. 살아있는 자의 힘에 의해 일시적인 생명력이 부여된 것마냥 서서히 들려진 그 칼은 곧 선영의 눈앞에 수직으로 세워졌다. 잘 씻겨진 스테인리스 날이 달빛에 푸르스름하게 비쳐진다.
“…….”
선영은 칼날을 왼쪽 손목에 비스듬히 갖다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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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이어집니다.
개강하고 시간이 더욱 없어져버렸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처리해야 할 커다란 과제가 하나 있어서… 역시 소설 쓰는 게 쉽지만은 않네요. 훗날 취직하면 더 시간이 없어질 거 같아서 이런 시간이라도 소중히 생각하며 쓰고있는 중이긴 합니다만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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