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물

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 - 4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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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 - 41








태환은 반쯤 타들어간 담배를 재떨이에 톡톡 털어내고는 다시 입에 물었다. 그의 눈은 선영이 띄워보낸 채팅귓속말에 고정되어있었다. 메시지는 항의하는 듯한 내용을 품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환의 눈동자는 담담하기까지한 빛을 띠고 있었다.




입으로 말하지 않고 손으로 타이핑해서 의사를 전달하려니 담배를 물고 있어도 아주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군. 태환은 그러한 사실에 새삼스레 묘한 기분을 받으며 키보드에 얹혀진 손가락들을 움직었다.




「미적지근하다라… 그런 표현이 적합할 수도 있겠군」




「오빠, 나 사랑했던 것 맞아?」




태환은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 ‘나’라는 것은 보편적으로 지칭되는 ‘나’가 아니겠지. 그럼에도 그런 방식의 항의는 그녀에겐 어색하지 않아 보였다. 태환은 이 특이한 상황을 머리로 느끼면서, 몸으로는 이미 담배연기를 깊게 들어마시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타들어가고 있는 심정을 그녀에게 굳이 내비치지는 않기로 했다. 대신 그는 참으로 생뚱맞은 메시지를 하나 띄워보냈다.




「재미있는 것 하나 알려줄까, 선영아?」




「뭐…?」




「네가 MV에서나 볼듯한 황금마차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며 전국의 이상형들을 손바닥안에 쥔 것마냥 찾아다니다가, 아침에 눈을 뜨고 그런 간밤의 꿈에 대한 황홀감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상태로 핸드폰을 열어보았을 때 부재중 표시란 낯선 번호가 떠있을 거야. 세 번 정도면 한낱 광고라는 의심도 들지 않으려나?」




선영은 뒤에 이어진 그의 ‘본래의 너라면 참으로 어울리지 않을 꿈이겠지만’ 같은 메시지는 거의 읽어보지 못했다. 그녀는 약간 긴장하여 조금 거칠다싶은 손놀림으로 타이핑을 했다.




「하긴 프라이버시 따윈 스티로폼 울타리로 보호되어있다고 여겨질 만한 현대니까. 창오빠도 내 연락처를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것도 없겠지」




물론 태환은 애써 침착하게 맞받아치는 그녀의 메시지도 한 눈으로 흘러버렸다.




「스티로폼까지는 아니고 나무벽 정돈 되겠지. 그리고 아무리 비밀이 없는 인터넷 바다라곤 해도 실질적인 연락처를 알아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기 마련이야. 선영 네가 의도적으로 인터넷 한 구석에 연락처 등을 직접 기입해놓지 않은 이상」




「그럼 뭐가 오빠를 자신만만하도록 하는 거지?」




「내 예전 특기 중 하나가 보안 시스템을 뚫는 자신의 능력에 쾌감을 얻는 타입의 구성원이기도 했으니」




선영은 ‘흥!’하고 어이없는 코웃음을 치고는 그 메시지에 대한 화답을 간략하게 보냈다. 그리고 그것은 태환이 원하는 화답이기도 했다.




「오빠가 해커? 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고?」




「이런이런, 여기서부터 벌써 믿지 못하면 다음은 더 힘들어지는데. 네가 만일 본래의 너 자신이 가졌던 암적 전적들 중 하나를 알고 있다면 좀 더 흥미로워질 거야」




태환은 이어서 그녀가 궁금해할 만한 메시지를 띄워 올렸다. 하지만 잠시란 사이를 두었고, 그것은 선영과의 예전 추억을 떠올려보는 데에서 나온 일종의 부산물과도 같은 지체였다.




「내가 본래의 네게 알려주었던 건 ‘카잔 전쟁’ 게임뿐만이 아니지. 해커의 능력 또한 나를 통해서 알게 되었으니」




- 그런데 네가 해커였다면 믿겠어? -




시르 병원에 입원해있었던 당시, 성진을 통해 들었던 자신의 예전 정체를 떠올리게 된 선영. 그녀는 점점 더 태환과 예전의 ‘나’에 대한 과거가 궁금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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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유리벽은 3층의 높이에서 아래쪽을 훤히 볼 수 있는 전망을 제공하고 있었다. 밖에서는 안을 잘 볼 수 없지만 안에서는 밖을 잘 볼 수 있는 일종의 썬팅 유리이다. 그것은 커피숍의 한 켠을 장식하고 있었고, 성진은 그 벽을 가장한 창가에 앉아 테이블에 턱을 괸 채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밑의 도로에는 자동차들이 느릿하고 질서있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으나 성진은 도심지 한가운데를 증언하는 움직임들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그의 시선은 맞은편 건물 혹은 그 사이로 보이는 하늘로 향하여져 있었다.




선영은 오늘 아침도 식사를 마치자마자 전날과 비슷한 화장을 유지한 채 다시 어딘가로 나갔다. 그리고 성진 역시 마찬가지로 그녀를 따라가보긴커녕 어디로 가는지조차 알아낼 수 없었다. 물론 오전 강의가 그의 행동을 붙들고 있었지만 사실상 강의가 없었다 할지라도 그녀를 붙잡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해는 느지막한 오후를 알리듯 서서히 기울어졌다. 간만에 따스한 날씨다. 성진은 슬쩍 시선을 아래쪽으로 돌려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나 차의 움직임에서 보여지는 그림자들을 감상했다. 녀석은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성진은 어제도 비슷하게 궁금했지만 역시 집에 늦게 들어갔고 이미 자고 있었던 선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요새 점점 늦게 들어가거나 아예 외박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고 자각하던 성진.




“오빠,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맞춰볼까?”




성진은 시선을 창 바깥 밑쪽에서 자신의 앞쪽으로 들어올렸다. 아메리카노를 마시던 자신과는 달리 오늘은 상큼한 것이 끌린다며 키위주스를 시켜놓고 홀짝거리던 혜진. 그녀는 최근 구입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별 흥미가 없는지 성진에게 그렇게 말을 걸었다.




“맞춰봐.”




성진은 간단하게 대답하며 커피컵에 꽂힌 빨대를 한모금 쭈욱 빨았다. 이미 다 생각을 마쳤을 텐데 혜진은 볼에 손가락을 갖다 대서 잠시 고개를 다른 곳으로 향한다. 그렇게 ‘음….’하고 생각하는 척 하다가 생긋 웃으며 곁눈으로 그를 보곤 비밀스럽게 낮추어 말하는 그녀.




“예전 여자친구.”




성진도 피식 웃고는 빨대에서 입을 뗐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사랑스러운 후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니.”




“으음? 이상하네…. 내 직감은 틀린 적이 거의 없는데. 특히 오빠한테는.”




니트의 긴 소매 바깥으로 빠져나온 그녀의 고운 손가락이 이번엔 입술 쪽으로 이동했다. 뭔가를 좀 생각하는 듯 입술 아래쪽을 손톱으로 콕콕 찝어보는 혜진. 성진은 그 모습을 보며 요즘 늘어나는 외박의 이유를 그녀에게서 상기해가기 시작했다.




성진의 시간을 뺏지 않으려 될 수 있으면 그와 함께하는 시간을 줄이려던 혜진이었지만 사실상 그건 한계가 있었다. 안 만나려면 안 만나려 할수록 더 같이 있고 싶었고, 자신은 현재 딱히 하는 일이 없으며 혜진과 같이 있는 시간을 더 가치 있게 여긴다는 성진의 끈질긴 설득 하에 그들은 점차 리밋트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혜진은 늘 성진과 함께 있으면 행복해했고 성진도 그런 혜진의 모습을 보며 설레는 마음을 느꼈다. 그들은 공공연히 CC를 드러내며 학교에서 틈만 나면 같이 다녔고 강의가 끝난 후에도 해가 지고 별빛이 반짝거릴 때까지 붙어다니곤 했다.




“혹시… 요즘 신경 쓰이는 다른 여자?”




그의 생각을 흐트러뜨리듯 튀어나온 혜진의 말. 성진은 조금 많은 양의 아메리카노를 목구멍 속으로 넘긴 후에 쓴웃음을 지으며 테이블 맞은편의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 참 그런 말을 잘도 태연하게 한다?”




“아니야? 그 비슷한 종류의 상념에 젖어있는 듯한데, 오빠는.”




성진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는 혜진을 바라보면서 이번엔 자신 쪽이 좀 궁금해졌다는 투로 말을 건넸다.




“그래, 그 비슷한 상념이라 치자. 경멸까지는 아닐지언정, 나를 좀 실망스런 눈으로 바라봐야 정상 아니냐? 넌 네 남자친구가 양다리 걸치는 것에 대해 아무 느낌이 없는 것 같아.”




“아무 느낌이 없지는 않아.”




“그럼 왜 그렇게 관대하게 말하는 건데?”




혜진은 시선을 주스컵으로 옮겨갔다. 그리고는 키위주스를 쪽쪽 빨면서 한 손으로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돌돌 말았다 풀었다 했다.




“오빠를 믿고 있으니까. 그런 질문도 별로 무서워하고 싶지 않아서야. 설령 오빠가 다른 여자를 신경 쓰고 있다고 해도 거기에 무슨 피치 못할 사정이나 특별한 이유가 있으리라 여기고, 놀라고 싶지 않아서이지.”




성진은 한 팔을 의자 등받이 너머로 넘기고 다른 손으로는 커피컵을 쥔 자세에서 입을 다문 채로 가만히 혜진을 바라보았다. 이런, 20대 후반쯤의 여자에게나 느껴질 법한 평온하게 자신을 다스리는 마인드. 이제 막 대학교 신입생을 벗어나는 그녀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기에 성진은 문득 눈앞의 혜진이 자신에게 너무 과분한 여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그는 짧은 한숨을 쉬며 시선을 재차 창밖으로 향하였다. 사실 그런 염려까지도 쓸데없을 것이다. 이 녀석은 날 좋아하고 있으니까. 겉으로는 평범하게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내가 모르는 온갖 잡상까지 들이쳐대며 날 좋아하고 좋아하고 좋아하고 좋아할 테니까. 감정에 장막을 칠 필요가 없는 섹스에서 그녀가 나를 어루만지는 손끝을 통해 느낄 수 있다. 성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만일 혜진에게 헤어지자고 할 때 가장 실효성 없는 발언을 꼽는다면 ‘자신이 그녀에게 실망을 안겨줄 것 같아서’가 될 것이라 확신했다.




자신의 어떤 행동도 타당한 행동으로 비추어질 혜진을 바라보며 성진은 나지막하게 말을 건넸다.




“넌 내 여자친구야. 솔직히 너도 알다시피 나는 지금까지 적잖은 여자들을 만나오긴 했어. 실제로 그녀들과 ‘사귀기’도 했지. 내가 왜 이런 얘기를 하는지 알지? 지금 너와 사귀는 감정을 놓고 봤을 때 그녀들과 비교해서 결코 뒤처지지 않기 때문이야. 그런 얘기까지도 거리낌없이 할 수 있을 만큼 널 좋아해. 사랑해. 혜진아.”




그리곤 커피숍 내부에 흐르는 음악이 잠깐 귓가를 맴돈다 여겨질때즘 성진은 맺음말처럼 툭 내뱉었다.




“이 정도면 네 대답에 걸맞은 답말이 될까?”




“고마워, 오빠.”




혜진은 두 팔을 테이블에 대고 모아든 손에 턱을 괴고는 성진을 바라보며 가볍게 미소지었다. 성진은 어쩐지 그 미소가 혜진 자신보다 그를 더 안심시키려는 것 같다고 생각되어 기분이 꺼림칙해졌다. 역시 너무 예리한 여자다. 성진은 좀 더 신뢰를 주기 위해서라도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녀 옆으로 의자를 옮겨 앉았다. 그리고는 한 팔로 혜진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느릿하게, 하지만 멈칫거림없이 자연스럽게 키스했다. 은은한 달콤함을 주는 커피향과도 같은 키스. 설렘을 동반한 약한 숨결이 맞닿은 입술 사이로 서로를 향해 교차한다. 조용한 사랑의 확인.




“…….”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하기 어려운 행위에 전념하던 둘은 이윽고 입술을 뗐다. 혜진은 볼을 약간 붉힌 채 바닥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눈을 내리깔았고 성진은 그런 그녀의 머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살짝 갈색빛을 띠는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참으로 곱다고 생각하던 성진은 자신도모르게 손을 들어서 혜진의 머리를 쓰다듬어 내려갔다. 그 손길이 싫지 않은 듯 혜진은 눈동자를 들어 성진을 올려다보면서도 가만히 있었다.




성진의 손끝이 혜진의 머리칼을 타고 내려가 턱선에 머무를 때 혜진은 미소지었다. 그리고 이번엔 그녀쪽이 성진을 감싸안으며 그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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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홍준석이란 평범한 세 글자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그 이름이 사람들에게 특이하게 각인되도록 전파시킬 사명감 따윈 갖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프로게이머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당연히 자신이 프로게이머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카잔 전쟁’ 실력에 무한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물론 그에 걸맞은 수준을 자랑이라도 하듯 결승까지 올라올 동안 단 두 번만 패배했다. 덧붙여서 그 패배 또한 나름대로의 이유를 구축할만한 별 것 아닌 실수였기에 그의 자부심에 흠집을 내지 못했다.




하지만 준석은 현재 자신의 자부심이 여타 일반인들이 늘상 저지르는 자만심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 물론 준석은 마지막 결승전 진출자를 뽑는 오전의 경기에서도 무패의 전적을 기록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현 상황을 수용하기 어려울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더군다나 상대는 참으로 몇 년에 한 번 본선에서 볼까말까한 여성 아닌가. 선영이 결승전에 진출해서 자리에 앉아 그와 대결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준석은 뭔가 신이 가호할만한 요행이나 꼼수가 있어서 여기까지 왔으리라 짐작했다. 혹은 선영의 상대자가 그녀의 미모 등에 혹해서 일부러 봐주다가 지게 되는 양상을 띠었다거나.




그리고 준석은 그런 예상밖의 상대자에게 ‘철저히’ 무너졌다. 그것은 준석이 고등학교 3학년 때 수능을 때려치우고 프로게이머의 길로 들어서겠다며 부모님 앞에서 책가방을 내팽개치고 가출한 이후 처음으로 맛보는 쓰라린 패배였다. 결승전 특성상 게임은 다섯 판으로 진행되었고 첫 번째 패배 때만 해도 그는 어쩌다가 지게 된 실수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두 번째 판은 그야말로 잔뜩 긴장해서 총력을 다하는데도 밀리는 전세에 당황하고 말았다.




준석에게 그나마 위안이 될 것은 선영이 최선을 다하고 있으리라 착각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당연하다. 이런 작은 규모의 경기라 할지라도 결승전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을 이유는 보편적으로 없으니까. 그러나 준석이 만일 선영의 현 상태를 알았다면 자신이 살아온 삶에 지독한 회의를 느끼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자신의 모든 실력을 남김없이 쏟아붓는 준석과는 달리 선영은 느긋하게 상대를 교란시키고 적당히 유닛들로 맞받아치며 어제 채팅으로 나누었던 태환과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 아니… 그건 창오빠가 말한 대로 내게 해커에 관한 걸 가르쳐준 사람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 -




- 음…? 의외로 그건 순순히 인정하는군. 어쨌거나 선영아. 나는 네 연락처나 행방 등을 아는 데는 크게 문제되지 않아. 네가 무슨 작정하고 산 속 같은 데 숨어버린 것도 아니고, 현대의 전산망을 통해 특정인의 정보를 뽑아내는 작업은 약간의 노력과 기술만 갖추어지면 가능하니까 -




- 결국 원점의 질문을 안 할 수가 없네. 그럼 오빠는 그냥 그 잘난 해킹 실력으로 내 연락처를 알아내면 되잖아? 그런데 왜 나한테서 그렇게나 핸드폰 번호를 알아내려고 하는 거야? -




콰쾅-!




준석의 마지막 부대가 처참하게 궤멸되는 모습은 ‘카잔 전쟁’ 결승전의 두 번째 판도 선영의 승리가 확정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았다. 적어도 그들의 경기를 바라보던 관객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준석은 가슴 한구석이 같이 부서져내리는 듯한 기분을 받았고, 반면에 선영은 여타 수많은 대전이나 경기 때와 별 다를 바 없는 덤덤한 승리를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그보다 선영은 어젯밤 자신의 질문에 대답했던 태환의 메시지가 목소리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 네가 원하지 않으니까 -




선영 자신이 연락처를 알려줘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까진 언제까지고 기다리겠단 의미. 그러한 태환의 메시지를 상기하며 선영은 선수용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는 강당 천장을 올려다보며 긴 숨을 내쉬었다. 경기 직후의 휴식 시간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강당에 울려퍼진다. 그녀의 섬세한 무늬를 간직한 아름다운 눈동자는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한 것처럼 허공 이곳저곳을 비춰보고 있었다.




‘이런, 김성진하고는 완전히 반대된 성향을 지닌 창오빠 같으니라고.’




그래. 그 오빠는 그런 타입이야. 상대의 의사를 그 무엇보다도 가치 있게 여기지. 성진이라면 절대로 그렇게 하진 못할걸? 때문에 내가 그에게 죽음을 의뢰한 것이기도 하고.




두 팔을 늘어뜨리고 의자에 편안히 기댄 상태로 허공을 응시하던 선영은 눈을 크게 떴다. 내면의 목소리를 들은 듯한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본래의 나’가 의식을 되찾았을 리는 없으니, 그것은 본래의 자신을 완전한 1인칭처럼 지칭해서 내린 결론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리고 선영은 태환에 대한 생각을 거듭할수록 자신의 현 상태가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을 자각해갔다. 그 정도로 침착한 창오빠가 자신의 연습을 방해할 정도로 다급하게 찾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선영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두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나 자신이다. 그녀를 대신해서 새 삶을 살고 있는 자신. 하지만 언제 다시 본래의 내가 끌어올려져 위험하게 될지도 모르는 불안정한 상태. 그런 긴박함을 창오빠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 그 따위 절차는 다 건너뛰고 얼른 와서 나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든지 해야 할 것 아냐? 도대체가… 그 상황에서도 상대의 의지만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본래의 나한테 죽여달라는 부탁이나 받게 되지. 이쯤 되자 그녀는 ‘연락처를 직접 알려줄때까지 기다리겠다’는 태환의 발언이 못 견디게 우유부단하게까지 느껴졌다




가만… 창오빠는 히키… 뭐라 했던가?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질환이라 했으니 실제로 날 찾는다든지 하는 행동에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는 건가? 그렇다면 본래의 내가 위치 전송을 하면 어떻게 찾아가서 죽인다는 거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선영은 머리가 아파옴을 느꼈다. 하긴 그건 ‘본래의 나’가 알아서 할 것이지 ‘현재의 나’가 걱정할 문제는 아니다. 나는 그저…….




- ‘카잔 전쟁’ 결승전 세 번째 경기. 곧 시작합니다. 관객분들 모두 자리에 앉아주시고 진행자분들도 선수들의 경기 준비를 점검해주시기 바랍니다 -




안내 방송이 강당을 울렸지만 선영은 쉽사리 안정을 찾지 못했다. 그녀는 옆에서 기기를 점검하던 진행자가 말을 걸어올때까지 석상처럼 자신의 두 손바닥만 내려다보며 일련의 생각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다.




“괜찮으십니까?”




자신에게 건네는 듯한 목소리를 겨우 인지한 선영. 그녀는 고개를 들었고 안경을 낀 진행자가 염려스런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선영은 능숙하게 미소를 지어 괜찮다는 의사를 밝혔다. 물론 진행자는 결승전의 긴장감에 따른 부담 심리라 넘겨짚고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였다.




“세 번째 시합 시작 1분 전입니다. 은선영 씨는 상대와의 공방 타이밍을 거의 완벽하게 읽고 주도하고 있으니, 분명 승리하실 겁니다.”




“아, 네에…….”




선영은 머릿속에 몰려드는 상념을 일순 떨쳐버리려 애쓰며 조심스레 마우스를 붙잡고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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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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