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 - 65부
본문
일반적으로 옷장 속에는 옷이 들어있기 마련이다. 간혹 이불도 옷장 속에 넣기는 한다. 그리고 보편적인 용도에서 약간 벗어난, 즉 각종 잡다한 물건을 보관하는 곳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옷장 속에 사람의 시체가 거꾸로 걸려있다고는 생각지도 못할 것이다. 따라서 열어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비명을 지르더라도 그 사람을 탓할 수는 없다. 더욱이 채 눈을 감지도 못해서 부릅뜬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모습이라면.
“꺄악-!”
따라서 그런 무시무시한 영상을 보게 된 순간 선영이 째지는 비명을 지른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순리였다. 물론 영화관에는 선영뿐만이 아니기에 그녀의 비명은 다른 사람들의 비명 속에 묻혀서 이상할 것 없이 넘어갔다. 하지만 그건 선영의 상태를 모르는 일반인들에 한정한 것. 바로 옆에 앉아있는 기식은 곁눈으로 그런 선영의 상태를 관찰하고 있었다.
‘요조숙녀하곤 거리가 먼 차갑기 그지없는 녀석이 이렇게 감정이입을 하며 영화를 본다? 이건 단순한 기억상실증이 아니라 인격 자체가 뒤바뀐정도의 수준이군. 그렇다고 일부러 오버하며 연기하는 것 같지는 않고….’
그 때 기식의 시선을 느낀 선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기식이 아차 싶은 순간, 선영 쪽이 도리어 곧바로 허둥대며 침을 삼키곤 진정하는 시늉을 했다.
“아, 죄… 죄송해요. 제가 너무 크게 소릴 질렀죠?”
“아뇨.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기식은 살며시 한 손을 들어 의자 팔걸이에 얹혀있는 선영의 손등을 감싸쥐었다.
“무서우면 이렇게 누군가의 손이라도 잡으세요. 한결 나아진답니다.”
“아…….”
선영은 얼굴을 확 붉혔다. 하지만 곧 그녀는 어두운 영화관이 자신의 붉어진 볼을 감춰줄 거라 안심하며 작게 헛기침만 했다. 문득 선영은 뭔가가 생각난 듯 다시 기식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기식… 씨는 이런 거 보면 안 무섭나요? 나… 남자들은 원래 멘탈이 좀 강한가?”
“예에…?”
기식은 이 순진무구한 질문에 하마터면 폭소할 뻔하다가 간신히 능숙하게(?) 추스르고는 빙긋 웃어보였다.
“그렇진 않죠. 무서운 것에 남녀 구분이 어딨나요? 단지 똑같이 무섭더라도 저까지 허둥대면 선영 씨가 더욱 불안해질 것 같아서 참고 있는 것뿐이죠.”
“저… 전 그렇게 약하지 않아요. 단지 좀 신선한 자극이라 놀란 것뿐….”
하지만 진정하려 하는 그녀의 말투 속엔 자신을 생각하는 기식의 배려에 대한 고마움을 담고 있었다. 기식은 별말 없이 자신도 다시 영화에 집중하는 척 고개를 앞으로 돌렸지만 속으론 느글거림을 느꼈다. 참 이런 닭살 돋는 멘트도 다해 보는군.
무섭기는 무슨. 이 나이 되면 저런 영상을 봐도 ‘꽤나 기술적으로 잘 연출했군’이란 감정이 들기 마련이지. 네 녀석은 어디 머리에 꽃 꽂고 다니는 열여섯 살 고딩녀인가? 하긴 아직 이십 대 초반이긴 하지만. 그쯤 생각하던 기식은 옆에서 들려오는 또 다른 소리에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선영이 가슴에 안아 쥔 팝콘 - 그것도 라지 사이즈 - 을 손으로 한껏 퍼다가 와작와작 씹어먹고 있었다. 물론 옆에 콜라도 꼴깍꼴깍 들이키면서. 그다지 여성의 몸매 관리에 참견하지 않는 기식의 입장에서도 ‘저렇게 먹어도 괜찮나?’라는 어이없는 우려가 들기 시작했다.
영화는 계속되었다. 절정 부분에서는 주인공을 집 안에 가두고 죽이려고 했던 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주인공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음이 드러났다. 선영은 그 장면을 보며 의자 손잡이를 손바닥으로 탁하고 내리쳤다.
“저… 저런 나쁜 자식…!”
이미 그 전의 복선으로 하여금 어느 정도 예상했던 기식은, 꽤나 전형적인 전개에 피식하고 웃음이 나올 뻔했다. 하지만 선영이 그를 돌아보며 “저… 저럴 수가 있어요?”라고 따지듯 말하자 그도 어쩔 수 없이 한 손을 턱에 갖다대곤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일 수밖에 없었다.
- 네… 네가 그래서 나를…… -
- 미안해. 이제 나는 속죄의 대가로 스스로 목숨을 끊을 거야 -
- 괜찮아! 너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잖아! 죽지 마! 내가 모두 용서하겠어! 제발… 제발 죽지 말라고! -
결말이 다가오는 부분에서 배우들의 처절한 목소리가 극장을 가득 메웠다. 그 혼신의 힘을 다한 연기에 관람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물을 글썽이거나 훌쩍거렸다. 그리고 그건 매우 당연하게도 선영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녀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계속해서 훔쳐내고 있었다. 기식은 할 수 없이 윗호주머니에서 티슈 몇 장을 꺼내 선영에게 건네었다. 선영은 무의식적으로 그걸 낚아채듯 잡아서 자신의 눈물을 닦다가 문득 기식이 건넸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를 돌아보았다.
기식은 모른 척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집중하는 시늉만 일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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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둑어둑해져가는 밤의 공격으로부터 주황빛 불빛이 안락하게 보호해주고 있었다. 영화관 근처의 식당이니만큼 사람이 많았지만 부산스럽지는 않았고, 그래서 기식과 선영은 분위기 있는 저녁 식사를 함께할 수 있었다. 물론 평범한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의 얘기지만.
스테이크를 앞에 두고 선영은 조금 전에 본 영화의 여운이 아직도 가시지 않는 듯 조용하게 분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기식에게 낮게, 하지만 감정이 실린 목소리를 토해내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죠? 현실이었다면 저는 너무도 어이없는 상황에 주저앉고 그냥 눈물만 쏟았을 것 같아요.”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자르던 기식은 그 자세 그대로 잠시 동안 선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간신히 아까의 영화 얘기를 하고 있음을 깨닫고는 한숨을 쉬며 자신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는, 마음에도 없는 대응을 해주었다.
“하아…. 그러게 말이에요. 하지만 저는 주인공보다는 친구 쪽이 더 불쌍하더군요. 그로서는 달리 더 나은 선택을 할 수가 없었잖습니까.”
“그렇죠? 하, 정말…. 저도 그 친구 때문에 더 슬펐던 것 같아요.”
기식의 반응에 힘입어서 선영은 자신의 감상평을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가며 그 자리에서 수많은 말들을 쏟아냈다. 왠지 감정이 마구 부풀어오를 것 같았다. 신선했다. 이런 컬쳐적 느낌 때문에 사람들이 영화를 보는 건가? 선영은 스테이크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어떤지도 모르는 것처럼 꾸역꾸역 삼키면서 정신없이 많은 말들을 쏟아냈다. 이전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아드레날린이 한꺼번에 분비되는 기분이었다.
기식은 선영의 입에서 약간의 침이 튀고 있다는 사실도 묵인한 채 진지하게 경청하는 자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따금씩 고개를 끄덕이거나 미소짓거나 그 내용에 관련한 자신의 생각도 밝히거나 하면서. 기식의 입장에서는 그런 인내심 있는 시간을 보내면서 그도 왜 자신이 이렇게까지 곤혹을 치르고 있는지를 마음 한 구석으로 따져볼 수밖에 없었다. 탐색을 나왔다가 내가 오히려 이 여자한테 휘둘리는 형국이 되고 있는 것 아닌가?
한참이란 시간이 흐른 후 기식이 ‘정말 엄청나게 말이 많은 여자군. 도대체 이 녀석 주변에는 변변한 대화상대 하나 없는 것 아냐?’라는 기분을 받을 때쯤 선영이 갑자기 하던 얘기를 중단했다. 기식은 스테이크를 오물거리며 고개를 갸웃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고기는 아직 많이 남았지만 그 식성 좋은(?) 선영도 포크와 나이프질을 멈춘 채 가만히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그녀는 문득 툭하고 말했다. 마치 겨우 자신의 상황을 자각한 것처럼.
“아, 저어… 죄송해요. 제가 너무 말이 많았죠?”
그걸 이제 알았냐? 라고 반문해주는 대신 기식은 자신의 본분(?)을 그대로 유지했다.
“아뇨. 흥미롭습니다. 저도 오래간만에 영화에 관한 심도 있는 감상평을 나누어볼 수 있어서 좋은 시간이 된 것 같아요.”
“아니에요. 저도 알고 있어요. 너무 제 기분대로만 행동하고 있다는 걸… 그리고 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또한.”
그리고 선영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원래는 이런 내가 아니었는데. 아니, 아니었을텐데…….”
기식은 그 대목에서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하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기식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샐러드를 입에 넣어 오물거리면서 접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어서 그는 어쩌다가 위화감을 느낀 것처럼 자연스럽게 물어보았다.
“마치 다른 사람 얘기를 하는 것 같군요. 아니었을텐데라니. 자신에 대해 잘 자각하지 못했던 과거에 대한 회상법인가요?”
선영은 기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기식은 여전히 남은 고기를 써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선영은 식사를 할 생각도 않은 채 한동안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이 남자라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아도 기식이라면 따뜻하게 자신을 이해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얼굴도 모르는 넷상으로만 만났던 태환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어두운 기억. 선영은 인연이 조금이라도 닿았다면 그 누구에게서라도 위로받고 싶었다.
감정이 복받치는 것을 억누르면서, 선영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요. 또 다른 나에 대한 얘기죠.”
기식은 그제서야 선영을 마주보았다. 선영은 잠시 말문이 막히는 것처럼 주춤하다가 곧 쉴새없이 쏟아내기 시작했다.
“저는 사실 이 세상을 살아가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요. 정확히 말하자면 1년도 채 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중간에 태어났기 때문이죠. 그게 무슨 뜻인지는 나중에 알게 되실 거예요. 물론 본래의 나란 존재가 이 몸 안에 잠식해있기 때문에 그 기억이 연결되어서 갓난아기보다는 수십 배로 빨리 세상에 적응할 수 있긴 하지만… 어쨌거나 저는 아직 미숙한 인간에 지나지 않아요. 감정도 제대로 컨트롤할 수 없어서 조금만 자극적인 영화나 외부의 충격에도 쉽게 흔들리죠. ‘카잔 전쟁’ 대회 같은 건 예외에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그 게임을 모종의 계기로 접했던 터라 익숙해요.”
보통 사람이라면 정신적으로 약간의 문제가 있거나 은유적인 표현을 좋아하는 감성 짙은 소녀 정도로 치부해버리겠지만 기식의 경우에는 달랐다. 그는 이미 형준의 데이터를 통해 그녀의 특이한 ‘기억상실증’이 전제가 되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웃어넘기지 않고 진지한 표정으로 슬쩍 고개를 갸웃하며 물어보았다.
“왜 그렇게 된 거죠?”
선영은 그런 그의 반응에 더욱 힘이 나는 걸 느꼈다. 역시 이 사람은 달라…. 선영은 그의 물음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천재였기 때문이에요.”
“천재요?”
“예. 세상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천재요. 이렇게 말하니 뭔가 이상하네요. 천재라는 단어보다는 ‘지나치게 두뇌활동이 높은 인간’이거나 그 비슷한 무언가의 지칭이 상황 표현에는 적합할지도요. 어쨌거나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도 천재였으면 좋겠다고 동경을 품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 나름대로 괴로워하게 되는 문제가 있죠. 그 중 하나가 세상을 살아가는 의미를 찾지 못한다는 거에요.”
선영은 자신도 잘 이해할 수 없지만 성진에게서 들었던 ‘본래의 자신이 했던 말’을 조합해나가기 시작했다.
“뭐 이것도 일반인들이라면 한번쯤 품게 되는 문제긴 하지만 그녀, 그러니까 본래의 저의 경우에는 그것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알아내려 파고들고 자신을 괴롭혔죠. 그 결과 세상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즉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 그녀에게는 아무런 느낌이나 의미로 와닿지 않게 되죠. 그것이 쌓이고 쌓이고 쌓이고 쌓여서 결국에는 자살… 로 도달하게 돼요. 그녀는 그것을 단순한 자살로 생각지 않고 ‘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로 표현하긴 했지만요.”
“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
“끝나지 않는 의문과 공허함, 그리고 괴로움으로부터 타파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영원의 안식처로 의식을 던진다는 거죠. 뭐 저도 잘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녀는 그랬다는 거예요. 그리고 실제로 그것을 실행에 옮겼어요.”
기식은 물컵을 한잔 들이키면서, 하지만 집중은 흐트러뜨리지 않으려 노력하는 표정을 유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점에서 현재의 선영 씨가 탄생하게 된 거군요.”
“예. 추측하시는 것 그대로예요.”
“결론에는 의심을 품지 않지만 과정이 궁금하군요.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선영은 눈을 살짝 내리깔고 식탁 위의 음식들을 내려다보았다. 기식은 절대로 재촉하지 않고 하염없이 그녀가 생각하도록, 시간이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이윽고 살짝 떨리는 입술을 천천히 열어젖히는 선영.
“그녀 내부에… 너무도 오랜 시간 배제하고 있었기에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던 모든 생물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 살고 싶다는 욕망. 어째서라는 의문에 근거하지 않는 순수함 그 자체. 그런 본능이 죽음 직전에 튀어나와 신체를 컨트롤했고 낙하 지점에서 최대한의 충격 흡수를 발동하는 데에 이르렀죠. 예, 저는 투신자살을 시도했지만 그렇게 의도치 않게 실패했어요. 하지만 폭발과도 같은 각성이었기에 본래의 그녀를 밀어내고 내부에 있던 본능만이 재구성되어, 또 하나의 인격과도 같은 제가 나타난 거에요.”
“그런… 믿을 수 없는 기이한 일이군요.”
“믿지 못할 거에요. 하지만 모두 사실이고요. 그리고… 아, 하긴… 제가 이렇게 말해봤자 신빙성은 없겠죠. 너무 터무니없이 빠르게 말했는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기식은 결과를 미리 알고 있었기에, 그리고 이 여자가 거짓말은 하고 있지 않다는 것쯤은 판단할 수 있었기에 그녀의 말 또한 사실일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완전히 겉으로 멀쩡하게 미치지 않은 이상 그런 말을 이런 상황에서 늘어놓을 수는 없다. 단지 기식의 입장에선 불가사의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필요할 뿐. 그래서 그런 시간을 벌어들이기 위해 기식은 손을 입에 가져갔다가 턱을 조금 매만졌다가 하기를 반복했다.
선영은 정말로 이 남자가 내 얘기를 받아들이려 하는 건가 라는 희망 아닌 희망을 안은 채 그의 표정만 면밀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쯤 기식은 생각을 정리한 듯 서서히 입을 열었다.
“아뇨… 선영 씨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건 아닙니다. 단지 죽지 않아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저 나름대로는 판단이 서지 않아서 생각의 시간을 좀 가졌습니다만… 어쨌든 부모님께서도 상심이 크시겠네요.”
선영의 얼굴이 대번에 어두워졌다. 당연하게 이 부분도 형준의 정보를 통해 알고 있었기에 기식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인 것은 역시 연기였음이 물론이다.
“전 부모란 존재가 없어요. 자세한 사연은 본래의 제가 알고 있겠지만 별로 좋은 과거는 아닐 거라는 정도는 짐작할 수 있어요.”
“그렇습니까…. 그럼 자살에 실패했다고는 해도 부상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이만큼 회복되기까지 곁에 있어준 사람이 누구라도…? 혹시 친척?”
선영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가까운 친척 하나 없다는 것까지도 이미 알고 있는 기식은 그녀의 고개짓의 의미를 더욱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결국 그럼 그 녀석밖에 남지 않았군. 형준이 말했던, 그녀와 동거한다던 남자. 김성진.
“있기는 했죠…. 엄밀히 말하면 지금도 절 돌봐주고 있긴 하지만…… 음….”
“남자인가요?”
“예. 그 녀석은… 아, 아! 남자긴 하지만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저도, 그리고 예전의 나란 존재하고도요. 동거한다고는 해도….”
“동거요?”
“아… 그…… 제가 신체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으니까 어쩔 수 없이… 그리고 제가 기억상실로 인해 현실에 적응하기까지 혼자서 있을 수가 없어서… 가… 같이 있었다고는 해도 정말 저랑 김성진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어요! 한 이불 덮은 적도 단 한 번도 없었다구요. 그저 철저하게… 부상자와 간호자 사이로…….”
“그 남자 이름이 김성진인가 보군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이 새빨개진 채 횡설수설하는 선영. 기식의 입장에서야 그녀가 알아서 사실적인 부분을 다 말해주었기에 매우 수월한 탐색이 되었지만, 선영은 이미 다른 문제로 어쩔 줄 몰라하며 난처해하고 있었다. 이 멍청한 맹숭덩어리! 아무리 이제 막 연애에 대해서 알아가는 과정이라곤 해도 동거한다는 사실까지 조심성없이 다 까발리면 어쩌겠다는 거야? 저 남자가 날 어떻게 보겠냐고…!
조금 후, 기식은 그녀가 지금 당장 곤혹스러워하는 문제는 신경 쓸 필요 없다는 의미로 살짝 웃어보였다. 그리고 그런 안심시키는 미소를 보고도 불안함을 떨치지 못하는 선영에게 그는 넌지시 목소리를 전했다. 조용하게, 낮게. 하지만 또렷하게.
“힘드셨겠어요.”
“아…….”
쿵.
선영은 그 말 한마디에 가슴 속이 울리는 것을 느꼈다. 그래…. 다른 건 다 필요 없어. 난 누군가에게 이렇게 진심어린 위로를 듣고 싶었던 거야. 긴 말도 필요 없어. 해결 방안을 모색하자는 말도 필요 없어. 오늘은 이걸로 됐어…. 선영은 자신의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주고 그 사정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한 명 있다는 사실에 그야말로 전율하듯 가슴 속을 긁어주는 것 같았다. 응어리진 무언가를 풀어주는 것만 같았다.
선영은 갑자기 눈시울이 저릿해졌다. 동시에 차오르는 묽은 액체 또한 느껴졌다. 그렇게 생성된 눈물은 순식간에 커지며 비좁아진 자리를 이기지 못하고 한두 방울씩 뺨으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끝내 소리내어 울지는 않았다. 그녀는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기식을 바라보았다. 기식은 미소띤 얼굴을 유지하면서도 약간 의아하다는 듯 그녀를 마주보았다. 이윽고 선영은 목소리를 내었다. 진정시키려 하지만 그 무언가를 감추지 못한 격앙된 음성으로.
“하지만 이젠 괜찮아요…. 저에게도 목표가 생겼고 기회가 왔으니까요. 이런 백치에 가까운 저도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세상은 그리 냉혹하지 않았던 거예요. 그러니까… 그…….”
선영은 말을 잇기 힘겨운 것처럼 입술을 계속해서 떨었다. 흘러내리는 눈물이 그녀의 입술을 타로 내리며 가게의 빛을 반사시킨다.
“그… 러니까…….”
결국 ‘당신이 만들어주신 것처럼’라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하고 목이 메이는 그녀. 하지만 선영은 대신 다른 말로 맺기로 마음먹었다. 이것만 해도 자신의 마음을 그에게 전달할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
“…고마워요…….”
“제가 선영 씨의 인생까지 책임져줄 수는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당신이 하기에 달렸고 이제 막 신설된 프로게임단이니만큼 부족한 것도 많을 겁니다. 이곳에 와서 실망할 수도 있고…….”
“아니에요. 그런 건 다 부차적인 거예요. 저는 단지… 그저 이런 기회를 준 기식 씨, 당신에게… 고마울 뿐이에요.”
그리고 선영은 웃었다.
환하게 웃어보였다.
기식은 잠깐 동안 멍하니 그런 그녀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물론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불러야한다고 ‘다그쳤다’. 그리고 그렇게 다그친 이유는 이 상황이 그가 원하고, 계획했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과거에 자신을 엿먹였던 여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희망’을 심어주고 철저하게 강간의 향연으로 짓밟아버리는 것. 비록 현재는 다른 인격일지라도 복수의 대상은 같은 몸에 존재하니까.
희망을 그녀가 가지면 가질수록 나중에 부수는 쾌감도 커진다. 또한 그것을 쌓아올리기 위한 목적 역시 오늘의 ‘탐색’에 포함된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방금은 참으로 기대 이상의 수확을 올렸다고 봐야 한다. 그녀가 좋아하잖아. 이것 봐! 네 계획은 착실히 진행되고 성공하고 있어. 전율은 그녀뿐이 아니라 네 마음 속도 다른 의미로 주체할 수 없도록 피어나야 정상 아냐? 그런데, 그런데…….
기식은 태어나서 그렇게 아름답게 웃는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
때아닌 정적.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선영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그녀로서는 의아한 시선으로 기식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밀려와야 할 환희와는 달리 알 수 없는 분노가 기식의 가슴 속을 메우면서, 그의 얼굴에 차츰차츰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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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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