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한소설] 슈퍼맨 - 4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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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부-
“어머! 오빠, 지금 나오시는 거예요?”
“아니, 아까 와서 황부장하고 볼 일 좀 보고 오는 중이야. 보라야, 교육은 다 끝났니?”
“아니요, 점심 먹고 한두 시간 더 할 것 같은데요.”
“뭐가 그렇게 오래 걸려?”
“호호...... 여기 점장들이 희숙이한테 말을 거는 게 재미있는지 질문을 많이 해서 길어졌어요. 아유...... 희숙이 계집애, 제법이던데요.”
“허허허...... 그래? 야...... 그거 생각 외로 호응이 좋으니 다행이다.”
“저...... 이사님, 이것 좀 봐 주십시오.”
부소장이 전산출력 받아 온 자료를 내밀며 강주에게 의아스런 표정을 짓는다.
“뭔데 그래?”
“네, 이 매장은 매출이 좋긴 한데...... 그래도 매출에 비해서 재고가 엄청 많은 것 같은데요?”
“다른 곳은 어때?”
“다른 곳은 대체로 적절한 수준입니다. 유독 이 매장만 타 매장에 비해서 재고가 많이 있네요.”
“그동안 점장들도 자주 바뀌었다고 하던데 보나마나 책임 질만한 놈도 없을 거고, 꼴에 점포 간에 매출 경쟁들은 했을 테니 제 값 안 받고 싸게 팔아서 장부상 재고액수만 많아진 거겠지. 음...... 그래도 무작정 의심만 할 수는 없으니까 전 점포 재고조사를 해서 기초재고를 다시 잡는 수밖에 없을 거야. 저...... 김과장님, 여기 재고조사 마지막으로 한 게 언제였습니까?”
“기록으로는 작년 연말인데요?”
“에이그...... 분기마다는 못해도 육 개월에 한 번씩은 해서 털어 줘야지. 황부장님, 재고조사를 할 때는 아침부터 했습니까?”
“아니오, 보통 폐점 후에 남아서 하곤 했습니다.”
“아주 죽여주는구먼...... 아, 그래가지고 숫자가 정확하게 나오면 그게 더 신기한 일이지요. 애들은 빨리 집에 가고 싶어서 발을 동동 구를 텐데......”
강주의 손짓에 사람들이 하나 둘 강주의 자리로 모여든다.
“우선...... 하루 영업을 안 하면 자금이 어떻게 돌아가게 되는지 경리파트에 가서 확인해 보고 얘기하는 게 좋겠는데 황부장이 알아볼래요?”
“아, 이사님...... 그건 사장님이 직접 관리를 하시기 때문에 저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황부장이 머리를 긁으며 강주에게 대답을 한다. 속속들이 드러나는 허점에 그간 관리를 맡아 온 책임자로서 면목이 없다는 뜻일 게다.
“허허...... 참, 이게 무슨 구멍가게도 아니고 사장님이 돈주머니를 꿰차고 다니시나. 그래?...... 음...... 김과장님, 지금 준비하고 있는 기안 속에 경리파트도 과로 승격시키고 경리과장 맡을만한 분도 한 번 물색해 보세요. 전결규정도 새로 작성하시고......”
“네, 알았습니다.”
“지금, 사장님 사무실에 계신가요?”
“회장님 연락 받고 나가셨는데요.”
“그래요? 이거 전화로 물어 볼 수도 없고...... 어디 계신지 황부장이 전화 한 번 넣어보세요.”
잔뜩 늘어졌던 회사 분위기가 뭔지 모르게 다시 활기차게 돌아가는 모습에 직원들의 표정도 밝아진다. 요즘처럼 불투명한 경제현실에 그들이 정작 원하는 건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쉽고 편한 일자리도 아니고 떼돈을 버는 것도 아니며 그저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보금자리를 꾸며갈 수 있는 기반이 되어 줄 안정된 직장일 것이다. 우리만큼은 평생직장을 보장해준다며 전 세계를 향해 까불어 대던 일본 사회에서도 직장 폐쇄며 대량해고로 전전긍긍하는 것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니 하물며 회사의 뼈대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작은 일 조차도 콩나물 심부름 가는 아이처럼 상사의 눈치를 보아가며 하던 일에 전결의 확대며 부서의 개편이란 것은 꿈도 꾸지 못한 일이었을 것이다.
모두들 강주를 바라보는 눈빛에 기대가 가득하여 아이 같은 눈망울로 바라본다.
“저...... 이사님, 전화 연결되었습니다.”
“아! 네, 저...... 최이사입니다.”
“어머! 네, 이사님.”
“아니, 왜 회장님이 받으십니까?”
“호호호...... 저이가 지금 전화를 못 받아요. 여기 지금 병원이라......”
“왜요? 어디가 편찮으십니까?”
“호호호...... 그게 아니고......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이사님도 이쪽으로 오세요. 하실 말씀 있으면 여기서 점심이나 함께 하면서 하시고......”
“음...... 그러면 그렇게 하지요. 거기가 어디입니까?”
“네, 여기 구월동 농협 앞으로 오시면......”
“아, 민희씨네 병원......”
“아! 알고 계시네요? 호호호...... 아유, 계집애 벌써......이사님 약혼자는 어디 손 볼 데도 없는 미인이시던데......”
“허허허...... 네, 그럼 곧 가겠습니다.”
짐작이 된다. 회장 뿐 아니라 사장도 그렇게 젊어 보였던 것이 모두 약물의 힘인 모양이다. 틈틈이 주사를 찔러대고 온갖 영양제를 맞아대니 십 년씩은 젊어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닌 일이다. 민희를 만날지도 모르는 일이고, 혹 없더라도 민희의 남편 얼굴을 보게 된다는 생각에 공연히 마음이 심란해진다. 결국 한 처가를 두고 동서로 지내야 할 사람이니 반갑다기보다는 처해있는 현실에 답답한 마음뿐이다.
마침 강주가 도착할 즈음 사장은 처치가 모두 끝났는지 원장실로 강주를 불러들인다.
“아! 최이사님, 인사하세요. 여기는 강원장이고......”
“아! 네, 반갑습니다. 저, 최강주라고 합니다.”
“네, 저는 강민규입니다. 어서 오세요.”
뿔테 안경에 창백한 표정이 영락없이 공부를 많이 하느라 햇빛을 못 본 심약한 우등생 같은 얼굴로 강주를 맞아준다. 송희의 언니나 형부에게 들은 바로는 엘리트 의식이 지나치게 강하다고 하니 별로 사귀고 싶은 인물은 아니고 게다가 병원 칼잡이와 구멍가게 껌 장수가 대화를 하려 해도 공통분모를 찾지 못하니 할 얘기도 서로 없는 처지다. 식사를 하러 나서는 중에 사장에게 재고조사 건에 대해 보고를 하니 회장이 가로막고 나서서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대꾸를 한다.
“아! 그럼 해야지요. 그렇게 해서 정확한 관리가 가능하다면 하세요. 하여튼 황부장 순 엉터리 같은 게...... 아유, 당신은 돈 주머니만 차고 있으면 뭐 해요? 다 옆구리로 새는 줄도 모르고......”
“허허허...... 참, 그게 그러면 점장들이 물건을 빼돌릴 수도 있다는 얘기라는 거지요?”
“단지 그럴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점장들이 자주 바뀐다는데, 바뀔 때마다 재고조사를 해서 인수인계를 확실히 한 것도 아니니까, 누구 책임인지 모호한 상황 아닙니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겠지요. 꼭 물건을 빼돌린다기보다는 우리 점장끼리 경쟁이라도 할 것 같으면 제 값을 안 받고 싸게 팔아 매출액만 키울 수도 있는 거니까 정작 장사는 잘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뒤로는 밑지고 있는 빛 좋은 개살구일 수도 있다는 거지요.”
“허허...... 거 참......”
“이것도 다 관리자가 잘못한 겁니다. 직원들 탓이 아니에요.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것을 그렇게 안 해서 그런 거라고 봐야지요. 그나저나 회장님, 저 강원장은 왜 식사하러 같이 안 갑니까?”
“아! 놔두세요. 뭐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봐요. 공연히 식사 분위기 망칠까 봐 가자고 안 했어요.”
“아, 네......”
회장 부부와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중에 전화벨이 울린다.
“네......”
“응, 자기...... 나야.”
“어! 민희야. 어디니?”
“으응...... 우리 남편이 점심 먹자고 해서 지금 들어가는 중이야. 자기 이따가 형부한테 갈 거야?”
“그럼, 가야지. 약속했는데......”
“쿡쿡...... 그럼 나도 갈까? 그런데 저이가 같이 가려고 할지 모르겠네.”
“야, 아직은 안 돼. 괜히 네 남편하고 같이 만나면 결국 회장이 우리 사이가 처형, 제부라는 걸 알게 될 텐데 그게 무슨 꼴이야.”
“우리 남편이 자기 아직 모르잖아. 나만 모른 척 하면 되는 거지.”
“야, 회장이 불러서 마침 금방 만났어. 네 남편 얼굴 보니까 완전히 재수 없게 생겼더라. 킥......”
“어머! 그랬어? 자기하곤 영 딴 판이지? 그래도 그런 소리 들으니까 별로 기분은 안 좋네.”
“쿡...... 미안...... 아임쏘리...... 올 거면 차라리 혼자 오든지......”
“으이그...... 저녁에는 혼자 다니는 꼴을 못 본다니까...... 생긴 거 봤다면서......”
“야! 나 처음에 만났을 때도 외박은 안 했지만 밤늦게까지는 같이 있었잖아?”
“그때야 회장 언니하고 같이 있었으니까 그랬지.”
“참 벨도 없는 인간들...... 마누라 길바닥에 내돌리고...... 너 그러지 말고 차라리 이혼해라. 내가 한 평생 예뻐해 주면서 살 테니까......”
“치...... 송희만 아니라면 나도 차라리 그러고 싶어. 요즘은 자기 만나고 나서 정말 조금씩 걱정이 되기도 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기도 하고......”
“정 곤란하면 내가 의왕에 관리하는 점포가 있는데...... 거기도 이층에 병원도 있고 그렇거든. 내가 자리를 만들 수 있는지 알아볼 테니까 너희 부부도 아예 회장하고 정리하고 그리로 옮기던지......”
“뭘 그렇게까지...... 호호호...... 그래도 말이라도 고마우이. 서방님......”
“그래, 차차 생각해 봐. 나도 네가 힘들어 하는 거 보기 싫어서 그러니까...... 그리고 결국은 회장하고 인연 끊어야 될 거 아냐? 나, 너 그러고 사는 거 정말 못 본다니까......”
“네, 잘 알았습니다. 호호호...... 그럼 내일 쯤 다시 전화할게.”
본사로 돌아오니 마침 식사들을 끝내고 다시 교육을 시작하려는 터라 강주가 교육장으로 들어선다. 교육을 보조하던 부소장과 보라가 주의를 환기시키고 희숙이가 강단에서 내려오자 어느새 숨소리도 들리지 않고 조용한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점장들도 이미 강주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으니 눈빛을 빛내며 마른 침들을 삼킨다.
“음...... 제가 최이사입니다. 이미 들어서 아시겠지만 그간 경영상태 악화로 인해서 이 사업을 접을 것인가, 다시 살릴 것인가에 대해서 경영진에서 갈등이 많이 있어 왔습니다. 그래서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그 실태를 파악하고 제가 슈퍼바이저 역할을 자임하면서까지 여러분들과 함께 이 회사를 살려보고자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 지금 교육중이신데, 지금은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때입니다. 이 빗물을 잘 받아둬야 여러분은 가뭄에 유용하게 갈증을 해소할 수 있을 겁니다. 빗물은 사방 어디나 고르게 쏟아지지만 여러분이 준비한 그릇이 얼마나 크고 작은가에 따라 나중에 담긴 물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부디 교육을 잘 받으시고 이제 점포로 돌아가시면 내일은 영업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재고조사를 하게 될 것입니다. 이건 그 결과를 두고 여러분들을 문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자료를 백지화시키고 새로이 그 기초가 되는 숫자를 알기 위한 것이니만큼 조금의 숫자조작도 있어선 안 됩니다. 그리고 며칠 후 전체 점장들의 인사이동을 단행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다시 재고조사를 할 것인데 그때 조사한 것과 일치가 되지 않는다면 숫자를 조작한 것으로 알고 해당 점장은 업무방해로 고발조치를 할 것이니 이 점 참고하시고 정확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재고조사 요령과 기준에 대해서는 강사로부터 설명이 있을 겁니다.”
강주는 희숙이에게 다시 교육장을 맡기고 사무실로 돌아온다. 실제로 점장들의 인사이동 계획은 없지만 돌아가는 회사의 분위기가 얼마든지 그럴 법한 일이니 사전포석으로 숫자조작을 못 하게 하려는 의도로 그저 던져 둔 말이었다. 늦게까지 술을 마신 탓에 잠도 부족하고 저녁에는 약속도 있으니 일찌감치 주변을 정리해 수원으로 갈 채비를 한다.
“아, 이사님 퇴근하실 겁니까?”
“네, 먼저 갈 테니까 교육 마무리 잘 하시고 내일부터는 업체 불러들여서 계약 재조정 할 거니까 황부장도 저 친구들 잘 도와줘야 합니다.”
“아...... 네, 알았습니다.”
“자, 그럼 나중에 봅시다.”
차를 움직여 수원으로 향한다. 간밤에 박부장에게 부탁해 둔 일이 떠올라 전화를 걸어본다.
“네, 처남...... 접니다.”
“아! 매부...... 안 그래도 전화 하려던 참인데...... 그게 좀 이상한 게 차주가 여자로 나오던데요. 어제 매부한테 들은 느낌으로는 남자인 것처럼 말씀하신 것 같은데......”
“아! 그래요?”
“네, 차주가...... 여기 어디 적어 뒀는데...... 아, 이미경이라는 여자고......”
“아, 그 사람은 내가 아는 사람입니다. 야...... 그러면 알 길이 없다는 말인가요?......그건 명의만 그렇게 했다는 얘기 같은데......”
“하하하...... 곧 알 수는 있을 겁니다. 차주가 여자로 나오는 게 이상해서 제가 발 빠른 애들 몇 명 붙여 뒀습니다. 그 여자한테 붙어 다니다 보면 눈에 띄게 마련 아니겠습니까?”
“아이고, 뭐 그렇게까지...... 하하하...... 아무튼 대단하십니다. 내가 우리 처남들을 보면 마치 무슨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아서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참, 그리고 술은 납품하셨나요?”
“네, 매부 덕분에 다행히 숨통이 트였습니다. 하하하......”
“다음에 또 필요하면 말씀하세요. 뭐, 저도 좋은 일이니까요. 그리고 그 일은 소식 들어오는 대로 좀 알려 주시고요.”
“네, 제가 한 밤중이라도 전화 드리겠습니다.”
창고로 돌아오자마자 샤워도 않고 바로 침대에 쓰러진다. 매장 일도 다소 궁금했지만 가보면 또 길어질 것 같아서 휴가 중임을 핑계로 차를 바로 아파트로 집어넣어 버렸다. 후줄근한 집이라도, 기다려주는 이 없어도 피곤이 무기인지 역시 내 보금자리가 좋다는 느낌이다. 여기에 여우같은 마누라와 퇴근한 아빠에게 놀아달라고 팔 다리 하나씩 붙들고 늘어질 토끼 닮은 새끼들만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아쉬움도 잠깐이고 이내 잠 속으로 빠져든다.
전화벨 소리에 눈을 뜬다.
“나야.”
“응, 민희야......”
눈을 비비며 주위를 둘러보니 잠을 제법 잔 모양이다. 한껏 기지개를 켜며 피로를 떨쳐 버린다.
“지금 어디야? 나, 수원에 왔는데......”
“뭐?...... 혼자?......”
“응......”
“그럼 어디 있는데?...... 언니 집이야?”
“아니, 언니 집 근처에 있는데...... 자기부터 볼까 싶어서...... 흑......”
“야, 야...... 왜 그래? 민희야. 너 어디야?”
“여기...... 자기가 관리하는 슈퍼 앞인 거 같아.”
“그래, 거기 그대로 있어. 금방 나갈게......”
울먹이는 민희의 목소리에 잠을 떨친다. 정신없이 옷을 갈아입고 주차장으로 나가니 선글라스에 챙 넓은 모자를 쓴 예쁜 모습의 민희가 손을 흔든다. 금방 흐느낀다고 생각했던 것은 착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공연히 상인들을 마주치면 인사 받기도 불편할 것 같아 길 건너에서 그저 손짓으로 부르니 민희가 천천히 건너온다.
“어쩐 일이야? 혼자서......”
“으응, 우리 어디 좀 들어가자.”
“그래, 이리 들어 와. 내가 이렇게 산다. 허허허...... 보고서 웃지나 마라.”
창고로 들어서며 두리번거리는 민희를 앉히고 음료수를 꺼내준다.
“어머! 자기 이렇게 해 놓고 사는 거야? 안 불편해?”
“불편할 게 뭐 있어? 물 나오겠다. 화장실 가깝겠다. 민생고 다 해결 되는데...... 하하하......그나저나 이리 와라. 좀 안아보자.”
“아이, 싫어. 저리 가......”
강주를 떠미는 손길에 언뜻 푸른빛이 비친다. 조금 전 흐느낌이 착각이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에 미치자 강주는 빠른 손길로 민희의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겨 버린다.
“어머! 아이, 왜 이래? 빨리 줘......”
“야, 너 얼굴이 왜 그래?”
황급히 가려 봐야 시퍼런 눈두덩은 이미 눈에 들어왔고, 자세히 보니 얼굴을 가리는 팔뚝에도 군데군데 멍 자욱이 선명하다.
“누가 그랬어? 강원장이야? 응? 네 남편이 그런 거야?”
“흑......”
민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흐느끼기 시작한다. 의도적으로 제 마누라를 시정잡배들 노리개로 내굴리는 놈이 무슨 이유에서 민희를 때렸을지 궁금해진다. 더군다나 그렇다면 민희를 이렇게 만들어서 상품가치를 떨어뜨려서도 안 될 것인데 얼마나 대단한 잘못을 했기에 이 지경이 되었는지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아까 자기도 다녀갔다면서?......”
“으응, 그런데?......”
“요즘 내가 회장 언니를 며칠 피하고 안 만나니까 아까 와서 되게 뭐라고 했던 모양이야.”
“뭐야? 그럼 회장이 시킨 거야?”
“설마 그러기야 했겠어?...... 내가 이제 사람들 만나는 거 싫다고...... 살림이나 할 테니까 차라리 건물 비워주고 병원에 취직하자고 했더니...... 그냥 그러다가 싸운 거야. 그런데 막상 어딜 가려고 해도 갈만 한 데도 없잖아. 그래서 그냥 자기 보러 온 거야.”
민희야 설마라며 회장에게 최소한의 신뢰를 실어주지만 강주가 보아 온 회장은 아직도 알 수 없는 구석이 있는 사람이다. 황부장의 부인 미경이를 보고 나니 친위대를 이끌고 다니면서도 마치 각각의 쓰임새를 달리한다는 느낌을 받게 되어 서로가 서로의 진면목을 알 수 없는 점조직처럼 운영해 왔을 거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집에는 들어가야 되잖아?”
“피...... 내가 너한테 들어붙을까 봐 겁나니?”
“야, 어디 밥이나 먹으러 가자. 너, 그 얼굴로 언니나 형부도 못 볼 거 아냐?”
“밥 생각도 없는데......”
“그래도 따라 와. 무조건 먹어 둬. 인마. 싸움도 힘이 나야 싸울 거 아냐?”
“푸훗...... 꼭 부부싸움 많이 해본 사람처럼 말하네?”
“야, 인생이 다 싸움의 연속 아니냐?”
상가 삼층의 식당에 자리를 잡으니 주인이 반겨준다. 아무래도 민희의 얼굴 꼴이 말이 아니라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꼭꼭 닫는다. 주문한 음식이 다 들어오도록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지 못하는 민희를 보니 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달려가 강원장을 두들겨 패 주고 싶은 심정이다.
부부란 함께 부대끼고 크고 작은 산과 골을 건너며 정을 쌓게 마련이지만 의외로 가장 가까이 살면서 가장 말이 통하지 않는 것도 또한 부부 사이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서로 다른 나라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손짓 발짓을 동원해 조금만 노력하면 의사소통이 가능한 일인데 부부간에는 이 또한 통하지 않는 일이다. 이미 돌처럼 굳어진 마음으로 자신만을 고집하면 또 다른 돌덩이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으니 정한 이치일 것이다. 부부간에도 마치 흐르는 물처럼 겸손이 자리할 수 있다면 작은 물방울 둘이 뭉쳐 더 큰 물방울 하나로 남을 수도 있을 것인데 차라리 고개를 돌려 이미 돌처럼 굳어진 세태를 탓할 일이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안을 들여다보고 깜짝 놀란 민희가 황급히 모자를 들어 얼굴을 가린다.
“여긴 아무도 없는데......”
아마 일행을 기다리는 손님이었던 모양이다. 미안한 듯 고개를 꾸벅이고 문을 닫아주니 그제서 민희는 모자를 내리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다.
“킥......”
“아유...... 웃지 마. 남은 창피해 죽겠는데......”
방금 뱉고 지나간 말이 맴돌며 귀에 어린다. 안다고 다 아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분명히 방 안에는 두 사람이나 있었지만 그걸 보고서도 아무도 없다고 말을 하니,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은 내가 찾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이미 있어도 없다는 것이다. 부부간에도 그럴 것이다. 이미 말을 해도 말이 통하지 않고, 곁에 있어도 내가 아는 그 사람이 아니라면 이미 두 사람은 생면부지 남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노릇이다. 볼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문을 두드릴 때 나야...... 한 마디에 문을 열고 맞아들일 수 있다면 그 ‘나’라는 말 한 마디 안에 들어 있는 내가 진짜 나인지 쉬지 않고 돌아봐야 할 것이다. 그 내가 온전한 나여야만 비로소 내 가족도 온전한 가족일 것이다.
“아! 전화 왔다. 여보세요?”
“네, 매부...... 접니다.”
“네, 말씀하십시오.”
“아...... 그 자식들, 인천에 조직 애들도 아니고 그냥 양아치 같은데요? 도대체 그건 왜 알아보신 겁니까? 혹시 매부한테 무슨 골치 아픈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아! 그래요? 그럼 뭐 썩 걱정할 일도 아닌 것 같네요. 난 혹시라도 주변 사람들한테 피해가 생길지도 몰라서 그저 노파심에 물어본 겁니다. 그 정도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아! 매부, 매부......”
“네.......”
“그게 그렇지가 않은 것이 조직 애들 같으면 차라리 상대하기가 깔끔하고 쉬워요. 거래를 할 수도 있고...... 그런데 그런 놈들은 덩치가 작아서 치고 숨으면 찾기도 어렵고 또, 애들이 어리다 보니까 철이 없어서 한 번 사고를 치면 대형 사고를 친단 말입니다. 다른 차가 또 한 대 접수 돼서 조회를 해 보니까 이 자식은 전과가 많아요. 혹시라도 매부한테 위협이 되는 녀석들 같으면 사전에 손을 쓰는 게 좋을 겁니다.”
“아! 그런 겁니까? 아...... 그러면....... 일단 알았습니다. 제가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뭐야? 무슨 일인데......”
“으응, 아니야. 민희 너...... 혹시 미경이가 젊은 애들 데리고 다니는 거 알고 있니?”
“으응, 말은 들었어.”
“솔직히 말해 봐. 만난 적은 없어?”
“없다니까...... 한 번 언니가 그 애들 데리고 같이 놀러가자고 했다가 회장 언니한테 크게 혼나서 그냥 그런 줄만 알고 있어.”
“그 애들 뭐 하는 애들인데?......”
“에이그,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아? 자기는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돼.”
“에헤이...... 말 해 보라니까......”
“푸훗...... 진짜 모른다니까? 그냥 미경이 언니한테 놀아주면서 관리나 잘 하라고 하는 것만 들었어. 이것도 나한테 들었다고 말하면 안 돼. 알았지?”
“내가 무슨 바보냐? 그런 소리를 하게......”
“이제 그만 나가자. 나, 그냥 집에 가기 싫단 말이야.”
“그냥 안 가면...... 어쩔 건데?......”
“이 씨...... 다 알면서......”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는 민희의 얼굴을 보니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어 어정쩡한 표정으로 식당을 빠져 나온다.
“네......”
“응, 동생 어디야?”
전화를 받아들고는 민희를 바라보며 조용히 하라고 시킨 후 말을 잇는다.
“네...... 지금 수원으로 가는 중인데 차가 많이 막히네...... 한 시간 정도 걸리겠는데......”
“응, 그래 조심해서 와. 송희도 조금 전에 출발한다고 전화 왔었어.”
“네......”
상인들을 피해 상가 뒤를 돌아 창고로 들어간다.
“쿡쿡...... 야, 재미있다.”
“야, 뭐가 재미있냐? 나는 누님한테 들킬까 봐 아슬아슬한데......”
민희는 침대 곁에 서서 원피스 지퍼를 내린다. 심하게 맞았는지 몸 곳곳에는 시퍼런 멍이 들어 있어 더욱 처연해 보인다. 그럼에도 강주를 바라볼 때는 애써 웃어주는 표정이 강주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다. 강주도 서둘러 옷을 벗고 다가가 허리를 끌어안아 입을 맞춰준다.
“쭈우웁...... 후루룹......”
“아야야...... 허리 잡지 마......”
“야, 이래 가지고 어떻게 해? 괜찮겠어? 병원에 안 가도 돼?”
“괜찮아. 견딜 수 있어.”
“자, 그럼 조심해서 누워 봐.”
어린아이 다루 듯 조심조심 민희에게 다가간다. 아무래도 체중을 싣는 것이 무리일 것 같아 뒤로 끌어안아준다. 민희는 강주의 발기한 좆을 쥐어 몇 번 주무르고 자신의 비경으로 인도하여 길을 낸다.
“흐으응......”
“후욱, 후욱......”
전신이 아파 보여 애무도 해줄 수 없으니 그냥 밀고 들어가 삽입을 한다.
“gm으으...... 흐으윽.”
“많이 아파?...... 후욱.”
“괜찮아. 빨리 해 줘...... 흐윽, 흐윽.”
마치 의식을 치르듯 조심스럽게 허리를 흔든다. 마땅히 쥘 곳이 없어 두리번거리다가 골반에도 멍 자욱이 있지만 할 수 없이 쥐고 흔들기 시작한다.
“아야...... 하악, 하악, 하악......”
강주에게 엉덩이를 내맡긴 채 힘이 드는지 고개를 옆으로 뻗어 강주의 팔을 베고 기댄다. 머리에서 나는 향수 냄새는 전처럼 여전한데 힘이 들어 쩔쩔매는 민희를 어찌해 줄 수 없는 자신의 부족함이 원망스럽다. 잔뜩 뒤로 내민 엉덩이에 화풀이라도 하듯 더욱 몰아쳐 만족하지도 못한 채 사정을 해 버린다. 신경이 다른 곳에 있으니 몰입하지 못하는 탓일 게다.
“어흐으윽...... 울컥...... 울컥...... 크윽......”
“아흐으으응......”
“에이 씨바...... 미안해......”
“아니야...... 난 좋았어...... 괜찮아......”
민희는 더욱 옆구리가 결리는지 앓는 소리를 내며 조심스럽게 돌아누워 강주의 입술을 찾아 부딪쳐 오고 강주는 어쩌지 못하고 받아 주기만 한다.
“아야야...... 흐으읍...... 쭈우웁...... 후루룹...... 아으흐흥......”
한동안 그렇게 말없이 부둥켜안은 채 질에서 흐르기 시작하는지 민희가 엉거주춤 일어선다.
“아야야...... 아유, 부축 좀 해줘...... 어머나! 깜짝이야. 아유...... 언......니......”
“뭐야? 아!...... 누님......”
민희는 쩔쩔 매며 옷을 찾아 몸을 가리고 강주는 멍청히 반쯤 일어서 부녀회 총무를 바라본다.
“너희들...... 도대체 뭐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아! 누님 일단 앉아서 얘기합시다.”
부녀회 총무는 마침 베란다에 나와서 전화를 하고 있었고 그걸 모르는 강주는 민희를 데리고 창고로 들어갔으니 그 모습을 위에서 모두 지켜보던 총무가 약이 올라 내려왔는데 동생의 목소리가 들리니 귀를 의심하고 처음부터모두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민희는 몸 밑으로 흐르고 있는 것에도 신경을 쓰지 못하고 쭈그리고 앉아있고 민희의 얼굴을 본 총무는 아연실색 이유를 묻는다.
할 수 없이 그간의 사정을 모두 말하니 고개를 끄덕이지만 송희만 모를 뿐 세 자매 모두 강주를 사랑하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언니...... 미안해......”
“그게 무슨 네 탓이니? 다 그 망할 놈 때문이지. 어떻게 할 거야? 차라리 이혼 해. 동생, 네가 좀 어떻게 해 봐. 아유...... 얘, 이 꼴이 뭐야? 도대체......”
두 자매는 끌어안고 한동안 눈물을 흘리고 민희는 진정시키는 강주를 따라 욕실로 들어간다.
“우선 집으로 가자.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얘기하자.”
“안 돼. 언니...... 집에 가야지.”
“집은 무슨 집. 일단 여기서 자. 형부도 만나보고...... 동생, 넌 뭐해? 빨리 데리고 올라가.”
신경이 있는 대로 곤두선 총무를 자극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민희를 설득한다.
“아! 으응...... 알았어. 자, 민희야. 일단 올라가자.”
“아이 참...... 알았어.”
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초인종을 누른다.
“누구세요?”
“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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