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그룹

악연 -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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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기어를 넣고 리어미러를 보며 그녀는 천천히 차를 후진했다.


모나코 핑크를 칠한 자그마한 쉐보레 스파크가 좁아터진 주차장을 무당벌레처럼 이리저리 비집더니 이내 울퉁불퉁한 시멘트 도로를 따라 크게 커브를 돌며 교문을 통과했다.


계획서를 마저 작성하여 넘겨주고 밀린 약간의 잡무를 처리하자 벌써 저녁시간이었다.


"지겨워, 지겨워.."


일주일 후면 방학이 시작되고 계획대로라면 그 다음주부터 열흘간 영어마을이 시작될 것이다.


그 사이에 집에도 내려갔다 와야 할테고 방학전 마지막 시험을 본 학생들의 성적도 내야 할 터였다.


그녀가 한숨을 쉬며 손을 더듬어 미등을 켜자 둥글고 큼지막하게 센터페시아에 박혀있는 조작장치들과 트럼펫의 벨을 연상시키는 날렵한 계기판에 아이스 블루컬러의 조명이 들어왔다.


오늘따라 왠지 차가운 느낌이 도는 푸른 색감이다.


주차하기 전 라디오를 켠채로 시동을 껐던 탓에 자동적으로 라디오 전원이 들어오며 이전에 잡아놓았던 주파수의 방송이 시작되었다.


인기 디제이의 음성신호에 따라 LCD 이퀄라이저 그래프가 부드럽게 곡선을 그렸다.


그녀는 좌회전 신호를 받고 차들이 밀리기 시작하는 큰 길로 들어섰다.


앞 차와 간격을 맞추기 위해 브레이크를 밟으며 룸미러를 흘낏 보자 역시 신호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녀를 바짝 따르던 낡은 다마스 한 대가 추월을 주지 않으려던 옆 차와 전조등을 번쩍거리며 가벼운 실강이를 하는 것이 보였다. 




그는 숙소에 들어와 주머니에서 고감도 콘덴서 마이크가 달린 선형 PCM 레코더를 꺼냈다.


핀 마이크를 제거하고서 그는 레코더 전면에 장착된 되감기 버튼을 몇번 눌러 녹음된 내용을 확인하고는 뒷면으로 돌려 메모리 슬롯의 뚜껑을 열고 메모리 카드를 꺼냈다.


그리고 잠금장치가 되어 있는 서랍을 열어 손톱크기의 납작한 플라스틱 보관통을 꺼내 메모리 카드를 거기에 넣고 스티커 위에 날짜를 쓰기 시작했다.


잠깐 시계를 보며 생각에 잠긴 그는 서랍에서 다시 그닥 크지 않은 금속함을 하나 꺼냈는데 그 안에는 이미 스티커가 붙은 메모리 카드들 수 백장이 날짜별로 가지런하게 정렬되어 있었다.


메모리 카드를 함에 넣고 서랍을 다시 단단히 잠갔을 때 숙소의 문이 열리더니 터치다운 하려는 선수를 쫒는 라인배커들처럼 저돌적으로 생긴 검은 수트 차림의 조직원 셋이 들어왔다.


"그 새끼 있죠. 동양, 그..재무회계 하던 놈요."


파고다 공원 돌벤치처럼 단단하고 넓게 퍼진 조직원이 맨 앞에 들어오며 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가 눈을 치켜뜨며 그들을 바라봤다.


"계좌 먹고 튄 놈?"


"예..그 새끼요. 그 새끼 찾았어요."


"어디야?"


그의 목소리가 좀 커졌다.


숨어있는 곳을 찌르듯 숙소 벽 너머 어느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조직원이 말했다.


"상계동 쪽에 그 새끼 여자친구가 있더라구요. 거기 숨어 있었어요."


그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누구 붙여놨어?"


"대근이가 거기 있어요.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하라고 했습니다."


그가 책상 위에 걸터앉으며 손가락으로 아랫입술을 천천히 문질렀다.


"아직 서울에 있었어? 간도 크네, 그 새끼..어떻게 찾았어?"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장승빼기처럼 키 크고 어깨가 다부진 조직원이 말했다.


"그 새끼 아파트 찾아간 적 있었잖아요. 처음에.. 한 사나흘 뒤집어 놨었죠. 왜,걔네 엄마랑 살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특별한 거 찾지는 못했는데 이 새끼가 나중에 연말 정산하려고 그랬는지 영수증 모아놓은게 있더라구요. 대부분이 어디 놀러가서 쓴 거던가 회사 근처에서 쓴 거였는데 좀 이상한 데가 몇장 나왔어요."


키 큰 조직원은 명칭이 잘 생각이 나지 않는지 제사에 쓰이던 놋촛대 마냥 꼿꼿하고 날카롭게 생긴 조직원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식당이었는데..수..뭐..였지?"


"수락산 한정식집."


뒤에 있던 조직원이 말하자 키 큰 조직원이 손뼉을 쳤다.


"아,맞아. 수락산 한정식. 그래서 혹시나 해서 대근이랑 몇명 보내가지구 계속 거기 죽 때리게 했었죠. 근데 오늘 점심에 거기 밥 먹으러 온 거예요. 지 깔치랑."


그가 알았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수고했다. 당장 그 새끼 잡아서.."


말을 하려다 말고 그가 턱을 손으로 감싸쥔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조직원들은 가만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벽에 매달린 육각형 프레임의 싸구려 목제 벽시계가 힘겹게 탈진 바퀴를 돌리느라 헤어스프링을 튕기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그가 모서리를 짚으며 걸터 앉아있던 책상에서 내려왔다.


"아니다. 잠시 대기시켜. 너희 그 새끼가 눈치채게 한거 없지?"


맨 앞에 있던 조직원이 그럴리가 있겠느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유. 행여나 튈까봐 그 새끼 10미터 안 쪽으로는 접근하지도 않았어요."


그가 고등어를 잡아먹으려는 상어같은 눈빛으로 말했다.


"좋아, 이거..잘됐어. 며칠 놔둬. 감시만 해. 이 새끼랑 같이 처리할 일이 있어."




그녀가 차를 댄 곳은 보금자리주택지구의 재건축 소형 임대아파트 단지였다.


채소와 찬거리들로 수북한 비닐봉투를 무겁게 든 그녀가 아파트 입구로 사라지자 학교에서부터 그녀를 뒤따라 다녔던 낡은 다마스가 듬성듬성 차들이 들어찬 주차장을 한바퀴 돌다가 승합차와 RV차량 사이 맨몸으로도 끼어들기 힘들어 보이는 그 틈으로 어깨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곳은 그녀의 아파트 베란다가 잘 보이는 곳이었다.




집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찬거리들을 차곡차곡 냉장고에 집어넣고는 폴리우레탄이 섞여 평소 편하게 활동할 때 입는 에어셀 소재 런닝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침대에 누웠다.


젖은 나뭇잎처럼 엉덩이부터 살갗에 밀착되어 내려간 팬츠는 무릎 밑 정강이에서 테이프를 붙인 듯이 감겨 끝났다.


눈을 감으며 하루종일 쌓였던 긴장을 잠시 이완시키고 있을 때 그녀의 핸드백 속에서 전화가 울렸다.


그녀는 귀찮은 표정으로 한참을 꿈지럭 댔지만 밀린 이자 재촉하듯 몰아세우는 벨소리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응, 엄마야?..응, 지금 들어왔어요."


그녀는 전화를 귀에 대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한 일주일 쉴거 같은데..응, 그때 내려갈께. 새로 맡은게 있어서요."


그녀는 간단하게 자신이 방학 동안 맡아야 할 업무에 대해 설명했다.


"그래서..방학이래두 뭐..계속 나가야 될거야. 응,응..아빠는 어떠세요?"




다마스 안에서는 헤드셋을 쓴 남자가 지름이 넓은 파라볼라 안테나를 갖춘 강력한 초지향성 건마이크를 그녀의 아파트 쪽에 겨냥하고는 주파수 에널라이저로 왜곡된 위상을 조정하고 있었다.


"뭐..재밌는거 들리냐?"


운전석 의자를 뒤로 젖히고 뒷통수에 깍지를 낀 채 편한 자세로 널부러져 있던 사내가 물었다.


그러나 헤드셋을 쓴 남자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운전수는 몸을 뒤로 돌려 그의 머리를 후려쳤다.


헤드셋을 쓴 남자는 한쪽 하우징을 벗고 귀를 내놓은 채 운전수에게 소리쳤다.


"왜그래, 이 새끼야."


"뭐 들리냐구 임마."


"아이..씨발."


헤드셋을 쓴 남자가 궁시렁대며 담배를 하나 물었다.


운전수가 미안했는지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대답을 안하니까 그러지,이 쌍놈아."


"씨발 놈아, 이거 쓰고 소리가 들리냐."


그는 헤드셋을 가리키더니 이내 둥근 반사경 촛점에 맞춰져 있는 길쭉한 피드안테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구 저건 지향성이 좆나 좋아서 각도가 장난 아니게 좁단 말야, 새끼야. 저 년 입에다 조정하는게 쉬운 일인줄 알아?"


"그래서 아직도 못 했단 말야?"


운전수가 저도 담배를 하나 물었다.


철컥, 라이터의 불이 올랐다.


"했지, 임마."


헤드셋을 쓴 남자가 연기를 내뿜으며 씩 웃었다.


"이 새끼가 말이 많아, 근데."


운전수가 또 한대를 칠 것처럼 손을 올리자 그가 얼른 몸을 피했다.


"그년 뭐하는데?"


"전화한다, 새끼야. 지 엄마랑."


"줘봐, 나도 함 들어보자."


운전수는 그의 머리에서 헤드셋을 벗겨 넓적한 자기 머리 위로 눌러 썼다.


"오..완전 죽이네. 바로 옆에서 얘기하는거 같은데.."




그녀는 전화를 끊고 간단한 저녁을 만들어 먹기 위해 거실 한 구석에 마련되어 있는 주방으로 나갔다.


스티로폼 팩에 담긴 오징어를 냉장고에서 꺼내 물에 씻고는 다듬기 위해 고탄소강을 단조한 날카로운 부엌칼을 꺼내들었다. 


일본 여행을 갔을 때 산 칼이었는데 데바라고 불리는 일본 전통의 주방용 칼이었다.


다듬기가 끝나자 그녀는 고추장과 고춧가루를 넣어 양념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양념장을 야채와 볶기 전에 그녀는 리모콘을 들고TV 전원을 눌렀다.


방 안에서 다시 전화가 울렸다.




갑작스런 하울링이 생기자 다마스에서 도청을 하던 남자는 헤드셋을 벗어던지며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그는 헤드셋을 살짝 귀에 대고 공명주파수를 제거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때 녹음내용을 돌려 듣던 운전수가 그를 불렀다.


"야야..이 날이 어떠니?"


되감기를 하여 그녀의 통화내용을 다시 들은 남자가 운전수를 쳐다봤다.


"이 날짜, 괜찮겠는데.."


"사라져도 며칠 간은 찾는 사람이 없을 테고."


"그렇지."


운전수는 다이어리를 펴서 날짜를 확인했다.


그는 달력을 콕콕 찍으며 말했다.


"주말도 끼어있고.."


"그럼 됐나?"


그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남자의 손에 들려있던 헤드셋의 다이어프레임에서는 저녁을 차려먹고 이제 목욕을 하는지 톱질을 하는 듯한 TV 잡음과 함께 샤워기의 물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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