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도 눈물을 흘린다 - 6부
본문
호태를 비롯한 20 여명의 9성 연합이 단 세 명의 사내에게 박살이 난 후, 호태는 깊은 시름에 잠겼다. 물론, 성인 조직에 대한 10대 조직의 한계인 것은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대 1에 대한 수적 우위임에도 불구하고 이길 수 없었던 것은 호태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렇게 큰 차이가 난 단 말인가?’
애초에 성인 조직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개개인의 싸움실력이 그렇게 차이가 난단 말인가? 이것이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인가? 자신은 7명의 9성 연합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까? 별 가지 생각들이 호태의 머릿속을 괴롭혔지만, 그 중에서 가장 고민이 된 문제는 자신에게 연락처를 남기고 사라진 사내의 말이었다.
‘프로의 세계라...’
대명파는 호태가 알기에도 분명 전국구 조직이었다. 이따금씩 TV 뉴스에도 나오는 그런 조직이었으니... 호태 역시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언젠가는 9성 연합을 대명파 못지않은 전국구 조직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물론, 여기에는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아직 성인 조직의 생리를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힘만 강하다면, 힘만 강하다면 반드시 9성 연합을 전국구 조직으로 만들 자신도 있었다.
‘훗... 망상이었단 말인가.’
그러나 이번 경험을 토대로 호태는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다. 분명 훗날 9성 연합의 힘이 강하다면 대명파를 꺾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10대 조직이 아닌 본격적인 성인 조직으로 거듭난다면 대명파가 9성 연합을 그냥 놔둘까? 힘이 길러질 때까지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방관을 할까? 그건 아닐 것이다. 아마 싹을 피우기도 전에 9성 연합을 지워져버릴 것이었다.
‘결국 우물 안 개구리였군...’
최근 몇 년간 호태는 자신의 세계에서는 절대 강자였다. 그 누구도 자신의 심기를 건들지도 않았고, 같은 나이의 친구들도 자신에게 깍듯한 자세로 대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호태 자신이 절대 1인자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미래를 생각 안 할 수야 없지...’
9성 연합은 10대 조직이었다. 하지만, 2년만 지나면 호태를 비롯한 9성 연합의 수뇌부들이 성인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성인 조직으로 재탄생할 수 밖 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직의 생존이 위협 받게 된다. 과연 2년 뒤에 전국구 조직인 대명파를 이길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힘의 차이가 극명했다. 호태는 더 이상 고민할 이유가 없어졌다.
‘그래... 들어가자.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면 될 일이지...’
자신이 왕으로 행세했던 우물에서 벗어나자고 결심한 호태였다. 어차피 조직을 만들어 외부에서 전국구 조직을 몰아낼 수 없다면, 내부에서 자신이 약자부터 시작해서 강자로 커서 조직을 잡으면 되는 일이었다.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불가능보다 나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믿었다.
‘그래 좀 더 큰물에서 놀아보지 뭐...’
호태가 큰 결심을 내린 후, 즉시 그는 9성 연합의 전체 조직원을 집합 시켰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조직원들에게 상세하게 설명을 했다. 모든 조직원들이 호태의 생각을 존중했고, 그 중 3명은 호태와 함께 대명파에 들어갈 것임을 결정했다.
“그동안 날 잘 따라와 줘서 고마웠다. 난 좀 더 큰물에서 놀아봐야겠다. 내가 얼마나 큰 물고기가 될지 모르겠지만... 사나이로 태어나서, 또 이 쪽 세계에서 놀면서, 한 번쯤은 큰 도전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우리 연합은 너희들이 리더를 뽑아서 잘 만들어봐라. 굳이 9성 연합이라는 이름을 쓸 필요도 없다. 건강하고 잘 지내라.”
마지막 말을 나긴 호태는 자신을 따르는 3명과 더불어 9성 연합을 떠났다. 그리고 자신을 제압한 사내가 알려 준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서 그와 접촉했다.
18살의 나이에 호태는 전국구 조직인 대명파의 조직원이 된 것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호태는 대명파에 들어가면서 가장 막내 역할을 해야 했다. 나이도 어렸고, 성인 조직 간의 암투에 대한 경험은 전무 했다. 다른 세계에 발을 담근 호태는 가장 힘이 없는 약자였고, 그는 자신의 지위에 맞게 약자처럼 행동을 해야 했다. 선배 조직원들의 심부름이 주로 하는 일이었고, 틈이 나면 운동을 하는 게 일상의 전부였다.
신분이 낮을수록 고위층을 볼 수 없듯이, 대명파에 들어간 지, 한 달이 넘었지만 호태는 대명파의 수뇌부를 본 적도 없었다. 수뇌부의 얼굴은 물론, 같이 숙소에서 생활하는 선배들조차 호태에게는 큰일을 시키지 않았다. 18살의 어린 나이이기도 했지만, 성인 조직 생활에 조금은 적응하는 시간을 주는 뜻도 있었다. 물론, 이것을 알지 못하는 호태로서는 선배 조직원들을 대신해서 허드렛일만 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자, 속으로는 불만이 조금씩 쌓여갔다. 하지만, 성질을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여기에서 성질을 냈다가는 생사의 갈림길에 들어설지도 모른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호태 입장에서는 무료한 시간이 그렇게 흘러갔다. 그런데 며칠 뒤 호태에게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바로 호태에게 조직에 가입할 것을 권유 한 그 사내였다. 호태는 선배 조직원들로부터 그 사내의 이름 ‘준’이며, 조직의 행동 대장이자 서열상 7위 인 것을 이미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었다. 준이라 불리는 사내가 사실상 대명파의 핵심 일 만큼 싸움을 잘했고, 뒤에서 차기 보스라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었다.
“형님! 안녕하십니까!”
“됐고... 호태 너만 따라 나와.”
“네... 네.”
선배 조직원들과 우렁찬 목소리로 준에게 인사를 하던 호태는 그가 자신을 불러내자 어리둥절한 표정으 지었지만, 이내 곧 정신을 차리고 그를 따라나섰다. 준이 호태를 데려간 곳은 인근 포차였다.
“이모! 여기 소주 한 병이랑, 낙지 좀 팔팔한 걸로 한 마리 주소!”
얼떨결에 준을 따라나선 호태는 그가 술을 마시려고 하자 어안이 벙벙했다. 그런 호태를 보고 준이 말을 했다.
“앉지 않고 뭐하냐?”
“네... 넵.”
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호태는 그의 반대쪽에 자리를 잡았고, 준은 그 모습을 보며 빙긋 웃는다.
“왕 노릇 하다가 이제 하인 노릇 하려니 힘들지?”
“아... 아닙니다.”
“크크. 그럴까?”
사실 호태로서는 불편한 것은 맞았다. 더구나 졸지에 막내 생활을 해야 했기에 밥 먹는 것부터 시작해서 잠을 자는 것까지, 선배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이와 맞지 않게 술은 잘 마실 테고... 자 한 잔 받아라.”
“네.”
어느새 나온 소주병을 들고 준이 호태에게 소주 한 잔을 따라줬고, 자신의 잔에도 소주를 가득 채웠다.
“일단 한 잔 마시자.”
“넵.”
호태로서는 오랜만의 술이었다. 소주 한 잔이 몸속으로 들어가자 어디서부터 시작 된 지 모르겠지만 몸에 불기둥이라도 생긴 듯 뜨거운 열기가 돌기 시작했다. 호태는 이 느낌이 너무나 좋았다.
“어때 할 만 하냐?”
“네. 할 만 합니다.”
“조까 씨바. 하하.”
호태의 가식적인 대답을 눈치 챈 준이 크게 웃었다. 그런 준의 모습을 호태는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도대체 왜 웃는 거야?
“몸이 근질근질 할 터인데...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지도 모르겠고... 선배들이랍시고 시키는 것은 청소나 빨래, 뭐 밥이나 갖다 바치라는 것일 테니... 그래도 좋냐?”
“...........”
“좋으면 평생 그런 것만 하던가?”
“그건 아닙니다.”
“하하하. 그렇지 좋을 리가 없지. 호태야.”
“네. 형님.”
“다 한 때다.”
말을 잠깐 멈춘 준이 빈 잔에 소주를 다시 채우기 시작했고, 호태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으로 공손히 소주잔을 들었다. 준은 그 모습을 보고 다시 빙긋 웃는다.
“내 나이가 서른이야. 너도 이미 들어 알겠지만... 조직 내 서열은 7위이고... 이런 나도 18살에 시작을 했지. 호태 네 나이 때 말이야.”
“... 그렇습니까?”
“나도 선배들 속옷을 빨래하고... 그러면서 시작했지. 12년 만에 지금의 위치에 올라왔고 말이야. 다 한 때야. 조금만 참고 기다리다 보면 기회라는 건 반드시 오게 되지. 그 기회를 잡으면 조직 내 서열이야 수직 상승일 것이고...”
“네.”
“우리 대명파 식구들이 100명이 넘어가지만... 대부분 서열 정리가 확실하지. 아까 숙소에서 나에게 인사한 녀석들... 너랑 평소에 같이 생활하는 녀석들 절반이 나보다 나이가 많지. 조직의 생리는 곧 힘이야. 힘이 있으면 나이와 상관없이 위로 올라 갈 수 있는 것이고... 그 기회는 반드시 너에게도 올 거야... 내가 왜 이 말을 너에게 하는 줄 알아?”
“모... 모르겠습니다. 형님.”
“풋.”
준이 소주 한 잔을 다시 들이켰고, 이번에는 호태가 즉시 소주병을 들어서 준의 빈 소주잔을 가득 채웠다. 준은 호태의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옛날에 내가 너 같았으니까. 12년 전의 나를 보는 것 같단 말이야. 크크. 창고에서 호태 너의 한 마디... ‘죽여’였던가? 크크. 그 말 한 마디에 30명의 아이들이 나에게 죽자 살자 달려 들더군. 어린놈들을 이끌었지만... 멋있더라. 여기 대명파에서 10대 시절 호태 너 같은 경험을 한 녀석들이 누가 있을까?”
“과... 과찬이십니다. 형님.”
“아니. 농담이 아니야. 그 날 독기어린 너의 행동을 봤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 호태 너란 녀석 놔두면 반드시 호랑이로 큰다. 그런데 그 호랑이가 우리 반대 세력에 가면 어떻게 될까? 내심 두렵단 말이야. 그렇다고 이제 18살인 너를 내가 죽여 버릴 수도 없고... 크크.”
“............”
“그래서 내 울타리 안에 너를 키우는 것이 낫다고 순간 판단했지. 언젠가는 너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래도 같은 편인 게 더 낫다라고 생각해서 제안을 했던 거였어.”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형님.”
“그런가? 호태야.”
“넵.”
지금까지 웃으며 말을 했던 준은 갑작스레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 준의 모습을 보며 호태는 긴장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 대명파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겠지?”
“대충 선배들 이야기 들으면서 알고 있습니다.”
“그래 결국 돈이야. 돈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죽이려고 애를 쓰지. 우리 대명파가 자리를 잡고 있는 서울... 이곳에는 우리 대명파만 있는 게 아니지.”
호태도 선배 조직원들로부터 들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대명파는 전통이 있는 조직이었다. 한 때는 서울 전 지역을 잡고 있었다. 나이트클럽, 주점, 성 매매 업소, 도박 등 각종 유흥 문화를 대명파가 관리하고 있었지만, 약 20년 전 대명파에서 반란을 일으킨 일부가 강북을 거점으로 강북파를 만들면서 대명파의 이권이 많이 줄어들었다. 한 때는 피 흘리는 혈투를 벌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의 이권을 서로 나눠먹으며 서로 견제를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이곳 서울에 또 하나의 변수가 생겼다. 호남 지역을 제패한 범서창파가 서울로 진출한 것이었다. 대명파와 강북파는 범서창파의 서울 진출에 대해 극히 불쾌함을 느껴야 했다. 또 다른 조직이 생기면서 그만큼의 이권이 줄어들기 때문이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범서창파와 맞붙을 수는 없었다. 범서창파와 누가 맞붙든지 가만히 있는 다른 한 쪽이 이득을 보는 것을 자명했다. 물론, 범서창파가 서울 진출을 하면서 노린 것도 그것이었다.
3개의 세력 간의 이권 다툼은 먼저 움직여서 피를 보는 쪽이 지는 게임이었다. 대명파와 강북파는 어쩔 수 없어 범서창파에게 어느 정도의 이권을 넘길 수 밖 에 없었다. 피 비린내가 나는 전쟁을 하다가는 조직의 와해라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보더라도 우리 대명파가 가장 힘이 좋아. 그 다음이 범서창파이고... 강북파는... 곧 무너질 거야.”
“그렇습니까?”
“애초에 대명파에서 배신자들이 뛰쳐나가서 만든 조직이라... 모래알 조직이지. 들리는 말에 의하면 내분을 겪고 있다고 하더군.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겠냐?”
“혹시... 아까 기회라는 것이...”
“그렇지. 넌 역시 달라. 조폭이라고 해서 머리를 쓰지 않는 놈은 도태 될 뿐이야. 때로는 주먹보다 머리가 더 강한 모습을 보이지. 곧 심각한 전쟁이 일어날 거야. 강북파가 지닌 이권... 아주 매력적이지. 겨우겨우 쓰러지지 않고 버티는 강북파를 놓고 우리 대명파와 범서창파가 가만히 놔 둘리도 없으니... 크크.”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호태의 질문을 받은 준이 소주 한 잔을 마신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너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네가 호랑이가 될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호랑이가 되려면 준비를 해야겠지. 매일같이 술이나 퍼먹고 있는 선배들은 쳐 다 보지 말 아라. 그놈들 따라가면 결국 똑같은 놈들이 될 뿐이니까. 결국 전쟁이 일어나면 전 조직원이 움직여야 할 것이고... 네가 활약할 기회는 많다. 그런데 능력이 없으면 활약은 무슨... 크크.”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호태 너에게 하나 더 알려줄 게 있는데... 전쟁이 시작되어서 강북파가 무너지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범서창파도 무너질 것이다.”
“그건 왜 그렇습니까?”
“호태야. 너 삼국지 읽어 봤냐?”
“유비, 관우, 장비 나오는 거 말입니까?”
“그렇지.”
갑자기 준의 입에서 삼국지라는 말이 나오자, 호태는 의아했다. 도대체 준이라는 사람이 의도하는 건 무엇일까? 도대체 삼국지와 조작간의 경쟁이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삼국지에서는 위, 촉, 오의 세 나라가 등장하지. 위가 가장 강하고 촉나라가 가장 약하지.”
“아...”
“이제야 눈치 챘냐? 우리 대명파가 위나라이다. 범서창파가 오나라, 강북파가 촉나라 쯤 되겠지.”
호태는 준이라는 사람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을 해야 했다. 단순히 싸움만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마치 그가 하는 말은 조폭이 아니라 대학물을 먹어서 공부 좀 한 사람의 말과 같았다. 도대체 이 사람의 정체는 무엇일까? 왜 이런 사람이 조폭이나 하고 있을까?
“소설 속에서는 촉나라가 정의니 뭐니 나오지만... 그건 소설일 뿐이고... 실제로 제일 약한 나라가 촉나라였지만... 꽤 많은 시간 위나라가 정복을 하지 못했지. 그 이유는 딱 하나야. 오나라의 존재 때문이지. 반대로 오나라 역시 위나라에게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촉나라의 존재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촉나라가 무너지고 오나라는 어떻게 됐지? 위나라에 꿀꺽... 크크. ”
“대명파, 범서창파, 강북파의 파워 게임과 비슷하군요?”
“그렇지. 우리 대명파가 제일 강하지만 공교롭게도 3개의 조직이 미묘한 힘의 균형을 만들면서 범서창파나 강북파와 전쟁을 할 수가 없지. 그런데... 강북파가 곧 내분 때문에 무너질 것 같단 말이야. 그러면 그 이권의 일부는 우리 대명파가... 또 일부는 범서창파가 흡수할 것이고... 그렇게 된 후에는 어떻게 될까?”
“일대일 구도가 되겠군요.”
“그렇게 되면 시간문제야. 단지 시간 싸움일 뿐... 범서창파 역시 와해를 시킬 수가 있지.”
호태는 준이라는 사람의 머리가 비상함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이 생각... 우리 대명파에서는 아무도 하지 않고 있다. 다들 주먹으로 먹고 살던 사람들이라 어디 가서 악만 지르며 힘만 쓸 줄 알지. 머리는 쓰지 못해. 호태 너에게 이 말을 하는 건...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왜 조직원들에게 미리 말씀을 안 하시는지...”
“훗. 그건 말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 대명파가 반드시 승리하겠지만... 재밌는 사실은 피가 흘리지 않고는 이길 수 없다는 뜻이다. 흐흐.”
준의 웃음은 호태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오싹했다. 그랬다. 준은 대명파의 승리 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열상 7위인 준, 대명파가 전쟁에서 승리한 후 그의 위치는 어떻게 될까? 전쟁이 일어나면 이등병도 소위가 되고 대위가 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어떻게 보면 준이라는 사람은 참 무섭다고 생각을 한 호태였다.
“전쟁이 끝나고 호태 너의 위치는 어떻게 될까? 궁금하지 않나?”
“네. 형님, 열심히 준비해 보겠습니다.”
“그래야지. 조직 세계는 나이가 중요한 게 아니다. 미래를 보고 준비한 자, 그래서 살아남은 자, 그가 강한자이고, 그가 큰형님이 되는 것이다. 당장 위를 볼 수 없다고 준비하지 않는 자는 언젠가는 도태되고, 천금같은 기회가 오더라도 잡지 못한다.”
말을 마친 준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호태는 준의 말에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뒤늦게 준이 사라진 것을 눈치 챈 호태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포차 밖으로 나갔지만, 준은 없었다. 마지막 말을 들은 후, 호태는 준이 자신을 찾아 온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 준은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고, 호태에게 그 기회를 주고 있었다. 자신을 도와 대명파의 한축이 되어 보자라는 뜻, 즉 자신의 사람이 되어주길 바라는 것이었다.
이 만남을 계기로 호태는 묵묵히 자신의 일만 해나갔다. 선배들의 허드렛일과 잔심부름은 계속됐고, 그들을 따라다니며 조금씩 일을 배우기도 했지만, 준이 말한 그 기회가 오는 날을 기다리며 몸을 단련해 나갔다. 그 후 준이 따로 호태를 찾은 적은 없었지만, 호태는 여타의 조폭과는 분명히 다른 준을 믿었다.
그리고 결국 준이 말한 그 기회가 찾아왔다. 준이 호태를 직접 부른 것이었다.
호태가 19살이 되었고, 준과의 대화를 한 지, 정확히 1년이 되었을 때, 결국 내부 권력 싸움에 지친 강북파가 스스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것을 기회로 삼아 대명파는 물론 범서창파까지 강북파의 이권 지역을 야금야금 잡아먹기 시작했고, 조직의 머리를 잃은 강북파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강북파의 조직의 주축들 몇이 발악을 했지만, 한 번 무너진 댐은 복구할 수 없었다.
정확히 일주일 만에 강북파는 대한민국의 조직 역사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그 일주일동안 준의 옆에서 호태는 맹활약을 했다.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강북파를 깨부수고 있었는데, 그 옆에서 지켜 본 준 역시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호태가 스스로 열심히 준비한 것도 있었지만, 1년 만에 준이 놀랄 만큼 엄청난 성장을 한 것도 사실이었다.
‘지독한 녀석이군... 내 눈이 틀리지는 않았어. 흐흐’
성장한 호태를 바라보는 준의 눈빛은 흐뭇함이 서려 있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무언가를 감춘듯 한 무서움도 내포하고 있었다. 준의 기대 이상으로 호태는 과감했고, 잔인했다. 그리고 준은 그것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강북파가 와해가 된 후, 서울 지역 조직의 경쟁 관계는 대명파와 범서창파의 일대일 구도로 흘러갔다. 그리고 대명파 내부에서도 대대적인 조직 개편이 이뤄졌다. 서열 7위였던 준이 서열 3위로 급부상을 했고, 조직 내에서 준의 목소리는 그만큼 힘을 받았다. 이와 더불어 준의 옆에서 활약한 호태 역시 어린 나이였지만, 다른 어떤 조직원에게도 무시 받지 못할 위치가 되었다. 비록 10위까지 있는 서열에는 들 수 없었지만, 호태 뒤에 준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직 내에서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되었다.
짧지만 또 잔인했던 전쟁이 끝나고, 대명파 내부 조직 개편까지 끝나자, 준은 호태를 불러 이전의 포차에서 소주를 마시며 대화를 했다.
“정말 형님의 말씀대로 되는군요.”
“풋. 그러한가?”
“사실 설마 설마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형님의 말씀대로 될 줄이야.”
“그건 그렇고... 너도 준비를 참 잘했더구나. 생각해 보면 1년 전보다 등치도 더 좋아졌고....”
“열심히 운동도 하고... 기술도 배우고... 뭐 그랬죠.”
준은 호태의 그런 준비성이 마음에 들었다. 호태를 처음 봤을 때부터 준은 느낄 수 있었다. 호태는 조직 내 누구보다 어렸지만, 조직 내 그 누구보다 야심이 많은 남자였다. 그의 야심을 살살 긁어주니 급성장하는 모습도 보지 않았던가.
“다 좋아. 그건 그렇고 난 호태 너의 과감한 모습이 좋단 말이야. 크크.”
“그렇습니까?”
“때론 잔인할 수도 있지만, 남자라면 과감하게 행동을 해야지. 나를 보면 알 것 아닌가?”
호태가 보기에 준의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래서 고작 31살의 나이에 대명파의 서열 3위까지 올라갈 수 있지 않았던가. 강북파를 와해시키는 건 여타의 생존 전쟁보다 비교적 쉬운 편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피를 흘리지 않을 수는 없었다. 조직 내의 말단부터 시작해서 서열을 가지고 있는 간부까지 총동원이 되었기 때문에 승자를 한 쪽도 누군가는 피를 흘려야 했다. 그리고 그 틈을 타서 살아남은 승자는 자신의 조직 내 입지를 다지기도 했으니, 그가 바로 곧 준이었다.
“이번 일로 우리 대명파는 30 여명의 식구들이 더 늘었지. 그만큼 거대해졌어. 힘이 붙었다는 뜻이지. 그런데 말이야.”
“범서창파도 그러하겠지요.”
“역시 호태 너는 머리가 나만큼 비상해. 범서창파에도 몇몇 애들이 들어갔겠지. 물론, 그래도 우리 대명파가 힘이 더 있는 건 사실이야. 내가 보기에는 6대 4 정도로 우리가 유리해.”
“쉽지만은 않게군요.”
“그렇지. 이번에는 피를 많이 흘리게 될 거야. 호태 너에게 하나 질문을 하지. 1년 전에 내가 했던 말을 기억을 할 터인데... 기회를 잡으려면 언제가 좋을 것 같나?”
비릿한 미소로 질문을 하는 준을 바라보며 호태는 머리를 굴렸다. 도대체 질문의 의도가 무엇일까? 그러나 호태는 지난 1년 간 많은 생각을 해왔다. 그리고 준의 질문에 채 몇 초가 되지 않아서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이 딱 좋겠지요.”
“이유는?”
“우리 대명파든, 상대인 범서창파든, 지금 승리에 자축을 하고 있습니다. 강북파를 와해시키면서 어느 정도의 이권을 서로 나눠 먹었지요. 물론, 그 와중에서 약간의 출혈도 있었지만, 또 반대로 강북파의 조직원들을 흡수하면서 조직의 개편이 이뤄졌습니다. 조직의 개편 초기에는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집니다.”
“흐흐.”
“오히려 이때 우리 대명파가 조직을 단합해서 범서창파를 치면, 승리의 확률이 높아진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는 어수선한 분위기에 자축까지 하고 있을 터이니... 설마 우리 대명파가 기습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겁니다.”
“하하하하하하. 그래. 그거야.”
준은 호태의 대답이 자신이 생각한 것과 그대로 일치해서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곧 한 편으로는 너무나도 씁쓸했다. 현재 대명파에서 이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신과 호태 둘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우리 대명파의 큰 형님은 이 생각을 못하고 있단 말이야. 내가 봐서는 천재일우의 기회인데...”
“그렇습니까?”
“호태야.”
“네. 형님.”
“넌 나를 따라 기회를 잡을 테냐?”
“당연한 말입니다.”
“흐흐.”
비릿한 웃음을 내보인 준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호태에게 건넸다. 신문지에 쌓여 감춰져 있는 그것은 굳이 보지 않더라도 호태는 알 수 있었다.
“조직의 서열 3위인 나는 입지가 나쁘지는 않지. 하지만, 내 입김으로는 전 조직원을 움직일 수가 없다. 조직에는 반드시 보스라는 존재가 있기 마련이니... 내 머리와 입으로만 이번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지.”
“그... 그렇습니다.”
“우두머리가 없이 전쟁을 일으키는 법은 단 하나야. 부하들이 명분을 얻으면 되는 거야. 반드시 전쟁을 해서 대서창파를 무너뜨려야겠다는 그 명분만 있으면 되는 것이지.”
“..........”
“그 명분이란... 우두머리가 없으면 되는 것이고... 흐흐.”
이제야 호태는 준의 의도를 이해했다. 머릿속으로 이해한 준의 의도는 무섭고 끔찍했다.
“이건 기회야. 이번 일만 잘 넘기면 난 대명파의 보스가 되는 것이고... 넌 내 오른팔이 되는 것이다. 어때? 기회를 잡을 만 하지 않나?”
어차피 이 세계에 발을 담근 이상 언젠가는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 호태였다. 호태는 말을 마친 준의 얼굴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리고 준이 건넨 신문으로 쌓인 그것을 두 손으로 받았다.
“잡겠습니다. 형님.”
“그래. 그래... 그래야... 호태지. 호태야.”
“네. 형님.”
준의 부름에 호태는 고개를 숙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귀에는 싸늘한 준의 음성이 들려왔다.
“죽여!”
... 계속
예전과는 전개가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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