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나락 속에서... - 11부
본문
“아 짜증나, 아직 냄새가 남은 것 같아.”
“기분 탓일 거야. 그 사람들 락스 뿌려가며 열심히 청소했잖아?”
내 옆에 앉은 지수는 오늘 그 일로 하루 종일 기분이 언짢다.
“그래, 그랬지. 날도 추운데 환기시킨답시고 창문도 확 열어 재끼고.”
다시금 달래보았지만 그다지 효능은 없는 것 같다. 별로 새삼스럽지는 않다. 그녀는 1교시의 사건 이후 계속 불만에 차있었고 나는 그것을 경청하는 역할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별로 즐거운 역할은 아니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것을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그녀가 그런 불만을 내게 표하는 것은 단지 옆에 앉아있다는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그녀뿐만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그런 문제나 불만을 내게 말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집에서 조차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부유층에게 서로가 평등해지는 학교란 익숙하지 못했던 것이겠지. 물론 그런 단순한 이유만은 아니겠지만 분명 아이들은 자신의 문제를 이해해주고 능동적으로 해결해줄 능력을 가진 누군가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머슴 같은 직원이나 교사들과는 다른 개념이다. 그래, 그것을 다른 말로 의지한다고 해도 되겠다.
“다 그년 때문이야. 이름이 뭐였지?”
“율희”
“그래, 걔. 다음에 걸리면 다신 그런 짓 못하도록 만들어주겠어.”
지수가 주먹을 힘주어 쥔다. 이 불만의 종점은 확실히 재미있다. 그녀는 조금도 나나 혜지를 원망하지 않는 것이었다. 모든 것은 율희의 잘못이었고 그녀로 인해 불거진 문제라는 논리. 어째서, 왜, 그런 의문은 추호도 존재하지 않는다.
“후훗 그래. 나도 벼르고 있던 참이야.”
“잘됐다~ 수현아. 다음에 혹시라도 나 모르고 있다면 꼭 불러줘.”
“응. 그럴게.”
오늘 직접 때리지 못했다는 것이 아쉬운 것일까. 그녀가 흘린 눈물과 굴욕, 고통에 일조하지 못했다는 것이 그렇게 아쉬웠을까. 정답은 간단하게도 ‘그렇다’가 될 것이다. 벌래 하나 못 죽이던 공주처럼 자라난 아이들이 그토록 학대에 열을 올리는 것은 그 대상이 율희였기에 납득할 수 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
지수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조심스럽게 속삭인다.
“저기… 나, 걔 안 때려서 혜지가 섭섭해 하지는 않았을까?”
“설마~ 혜지 그렇게 속 좁지 않아.”
“헤헤 그렇지? 다행이다.”
나는 속으로 유쾌한 웃음을 품는다. 아이들은 어느 때부터인가 혜지에 관한 일이라면 내게 묻게 되었다. 혜지는 율희를 소유한 주인이자 이 학교에서 최고의 힘을 가진 아이. 막상 가까이하기 힘들뿐더러, 자신보다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는 그녀를 대하는 대신 가까운 나를 통하는 것이다. 반대로 나를 통하지 않고는 혜지에게 가까이 가기 어려워졌다. 같은 논리로 내 눈밖에 난다는 것은 혜지의 눈밖에 나는 것이라고 암묵적으로 받아드려지고 있었다. 난 혜지에 이르는 쌍방향 통로 역할을 한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내 견해가 곧 혜지의 견해가 된다는 그녀들의 생각을 굳이 틀렸다 지적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 진실이야 어떻든 나는 분명 혜지가 학교에서 접근을 허락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뭐 전혀 다른 이야기가 돼버리지만.
그때, 5교시 수업 시작을 알리는 멜로디가 울려 퍼진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그럼 슬슬 가볼까.”
“수현아, 너 수업 째게? 어디가려고?”
“응. 잠시 볼일. 선생한테는 알아서 말해줘.”
“으응…”
지수가 비교적 수업에 잘 빠지지 않던 나를 의아한 눈길로 바라본다. 하지만 혜지 역시 자리에 없음을 눈치 채고는 납득한 눈치다. 뭐 아주 혜지와 연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오해되는 것도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난 혜지가 아니라 율희에게로 가는 것이다. 문득 율희를 떠올리며 잠시 짜릿한 흥분에 몸을 떤다. 나는 즐거운 기분으로 교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간다. 분명 한껏 미소를 품은 얼굴이었을 것이다.
내가 율희를 처음 본 것은 그러니까, 혜지가 율희를 처음 학교에 데리고 왔던 그날이었다. 약 3개월 정도 이전일까.
처음 그녀를 본 순간 나는 전율했다. 같은 여자가 바라보기에도 절대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있다면 아마 그것일까. 슬퍼 보이는 눈동자와 표정은 어쩐지 조금은 겁에 질린 행동과 더불어 무척 매력적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미인형이고 몸매가 좋다는 것이 아닌 조금 더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지금도 잘 설명할 수 없지만 그 특별함은 확실히 존재했다.
물론 그녀의 작지도 너무 크지도 않은 키와 얇은 선, 큰 눈, 날씬하면서도 풍만한 몸매. 무엇 하나 빠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보다는 그 속에서도 어쩐지 불안하고 가냘프게 보이게 하는 어긋남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그것은 흔히 생각하는 모성본능을 유발시키는 그것과도 달랐다. 비속에서 떨고 있는 새끼 고양이 같은 느낌. 그러나 그 자체로 너무나 안쓰럽고 귀여워서, 그것으로 너무나 완벽했기 때문에- 절대 손을 내밀 수 없는 그런 존재. 아니, 오히려 괴롭혀주고 싶은 그런 존재가 바로 율희였다.
그녀를 만나기 이전의 나는 학기 초에 누구의 접근도 허락 하지 않던 혜지와는 달리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오히려 깔보는 경향이 있을 정도였고, 그것은 그녀들의 사고방식에 근거하면 딱히 틀린 취급은 아니었다. 쟁쟁한 명예도 재력도 권력도 없던 집안. B고에 입학한다는 것조차 무리수를 둔 행위인지라 등록금 감당하기도 벅차하던 우리 집 형편은 빠르게 파악되고 또 선별되었다. 때문에 딱히 누구도 말을 시키지 않고 말을 걸어도 시큰둥했다. 나는 반에서 전혀 돋보이지도, 그렇다고 아예 없다고 하기에도 어중간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부지 내에 부속 초등학교부터 쭈욱 다녀온 아이들 속에 느닷없이 낀 것도 문제였지만 그보다는 배경이 없다는 것이 더욱 치명적이었다. 아무도 친구가 되어주지 않았다. 이전 평범했던 중학교에서 내가 중심이 되던 인간관계와 나름대로 미인 축에 끼던 프라이드는 그렇게 산산조각이 났다.
하지만- 뭐 이미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지. 그런 의미에서라도 율희는 내게 각별한 존재다. 나의 율희. 사랑스러운 율희. 이후의 시간을 생각하니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이야.”
“꺅!”
생각에 몰두했기 때문에 미처 예상하지 못한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버렸다. 혜지였다. 조금 전 양호실에서 나온 모양이다.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치려 했던 것이 머슥해졌다.
“아, 미안해. 잠시 다른 생각을 했어. 놀랬어.”
“응.”
딱히 기분이 상하지 않은 모양이다. 여느 때처럼 명랑한 표정.
“저기, 뭐라고 했어?”
“다행이야, 라고 했어.”
“다행이라니?”
“즐거워보여서.”
이상한 말. 혜지는 종종 이렇게 뜬금없는 말을 한다. 혹시나 해서 그녀의 눈치를 보았지만 딱히 다른 의미는 있는 것 같지 않다. 사실 오늘 아침의 제안은 꽤 용기를 낸 것이었다. 내가 혜지에게 다가갈 수 있던 배경에는 율희가 있다. 그것을 제외하면 나는 혜지와 딱히 가까운 친구라고 할 사이는 아닐 것이다. 그녀는 나를 의존하지 않았고, 그런 거리감이 내가 의지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학교 외의 장소에서 만나기는커녕 연락도 하지 않는다. 이런 불안정이 내 의존을 막고 있었다. 비록 다른 아이들에 비해 가까운 사이라고는 하지만 혹이나 거절당하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함.
----<11장 end>
정말 면목 없습니다. 반년이었습니다.
따뜻한 계절이 왔기에 다시금 고개를 내밀어 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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