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들의 교향곡 - 50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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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들의 교향곡 50부
다음날 선규는 학교에서 멍한 상태로 있었다. 태수가 말을 걸어도 건성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칠때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선생님은 여전히 수척해 보였지만 그외에는 아무런 점들을 발견할수가 없었다. 어제 선생님남편이 들어갔나를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으나 계속 선생님의 사적인 일을 물어본다는것은 예의가 아닌것 같아서 꾹 참았다.
[내가 선생님일에 왜 이리 신경을 쓰지? 우리집같은 상황을 내눈으로 직접 보게되서 그러나?]
더욱 이상한것은 어제밤 엄마와 있을때 선생님이 머리속에 떠올랐다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엄마몰래 바람을 피웠다는것이 자꾸만 생각나서 엄마를 똑바로 쳐다볼수가 없었고 섹스를 할때도 집중이 되지를 않았었다. 더군다나 엄마의 얘기를 들어보니 너무나 괴로워서 억장이 무너지는것만 같았다.
[믿고있었던 아빠때문에 그렇게 괴로웠었다니. 그러면 나의 일을 알고는 얼마나 참담해 할까? 아무래도 무슨수를 써서라도 마담과의 일을 하루빨리 끝내야 하겠어]
방과후에 태수와 교문을 나서던 선규는 마담의 차를 보고 얼굴빛이 변했다. 무시해버릴까 했지만 어차피 그런다고 끝날 문제는 아니어서 일단 만나기로 했다.
[여기서 얘기를 하지 않으면 정말로 집에까지 찾아올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생각한 선규는 얼굴표정을 바꾸고 태수를 돌아보았다.
"먼저 가라, 태수야. 나는 잠깐 볼일이 있어"
태수도 마담의 차를 봤는지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저번에도 왔었던 사람 아니니? 누구냐?"
"그냥 우연히 알게된 사람이야"
"혹시 무슨 문제가 있는거 아니니?"
"문제는. 아무일도 아니니까 어서 가. 나중에 보급소에서 보자"
태수가 차쪽을 다시한번 바라보다가 이윽고 사라지자 선규는 무표정을 짓고 마담에게로 다가갔다. 창문이 내려지자 그녀의 차가운 얼굴이 나타났다. 그런 그녀를 보고 순간적으로 겁이 났으나 마음을 가다듬고 함께 노려보았다.
"어제는 어떻게 된거야? 그때 메모지를 받았었잖아"
"....."
그녀의 목소리는 어느때보다 더 냉랭했다.
"차에 타"
"....."
"말 안들을거야?"
"....."
꿈쩍도 하지않는 선규와 노려보고 있는 마담사이에는 무거운 긴장감이 돌았다. 그러는데 별안간 뒤에서 낯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선규 아니니? 집에 안가고 거기서 뭐하고 있어?"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본 선규는 저쪽에서 쳐다보고 있는 담임선생님을 보고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자신과 마담과의 일을 떠나서 선생님의 남편과 바람을 피고있는 마담을 그녀에게 보여줄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급히 마담을 보니 그녀도 호기심어린 얼굴로 선생님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이게 무슨 난리야? 잘못하면 드라마같은 일이 일어나겠네]
등에서 식은땀까지 나는 선규는 얼른 마담에게 다급히 사정했다.
"차에 탈테니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그의 얼굴을 살펴보던 마담은 이윽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망갈 생각은 하지마"
"안그래요"
그리고는 선생님에게 부리나케 달려갔다.
"지금 댁에 가시는 길이세요?"
"응. 몸이 아직 다 낫지를 않아서 집에 일찍 가서 쉴려고. 그런데 얼굴이 왜 그러니? 무슨 문제가 있어?"
"아니에요. 이렇게 일찍 선생님이 가시는걸 보니 놀라서 그런가봐요"
"그런데 태수가 안보이네. 먼저 갔니?"
"네"
선규의 말을 듣고 선생님은 다시 마담의 자동차쪽을 바라보았다. 그걸 보자 선규는 마음이 조마조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저분은 누구시니?"
"아는 친척분이세요"
"그런데 왜 여기까지 오셨어? 집에 무슨일이 있니?"
"그냥 근처를 지나가시다가 제생각이 나서 들리셨데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선생님은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서 가봐라. 기다리시겠다"
"네. 살펴가세요"
"그래"
커다란 안도를 하며 마담에게 갈려던 선규는 다시 몸을 돌려 선생님을 불렀다.
"선생님"
"응?"
잠시 망설이던 선규는 나지막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
"혁재아버지께서 어제밤에 들어오셨어요?"
그러자 선생님의 얼굴은 금새 어두워졌다. 그녀에게서 아무런 말이 없자 선규도 대충 짐작이 되었다.
"너무 하신것 같네요. 선생님이 그렇게 아프셨는데....."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던 그녀는 이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너무 바쁘다보니 그랬을거야. 대신 네가 옆에 있어줬잖아"
그리고는 힘없이 몸을 돌려 가버렸다. 선생님의 쓸쓸하게 보이는 뒷모습을 지켜보던 선규는 이윽고 돌아서서 분노의 눈길로 마담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걸어와서 차에 올라탔다.
"가요"
아무런 표정없이 그를 바라보던 마담은 차를 몰기 시작했다.
"오늘은 보급소에 곧장 가야하니까 가까운 곳에 가서 얘기하세요"
여전히 말이 없는 그녀는 선규가 일러준데로 보급소쪽으로 운전하다가 어느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한적한 주택가골목을 찾아서 차를 세웠다.
앞을 보며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쌀쌀맞기 그지 없었다.
"어떻게 된건지 얘기해봐. 왜 안왔어?"
"어린애를 건드리는것까지 모자라서 가정이 있는 남자를 집으로 끌어들이나요?"
"뭐?"
냉정하게 있던 그녀도 그소리에는 놀랐는지 두눈을 크게 뜨고 선규를 쳐다보았다.
"왜 잘사는 남의 집에 불행을 주는거에요? 아주머니도 옛날에 남자때문에 불행하셨다면서요. 그러면 그게 어떤건지 잘 아실거 아니에요?"
"네가 뭘 알아?"
조금도 떨림이 없는 그녀의 두눈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어제밤에 남자와 집에 들어가는걸 봤어요. 보니까 저번에 술집에서 아주머니와 껴안고 있던 사람이더군요"
얼마동안 노려보던 마담은 갑자기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너 지금 내가 다른 남자를 만난다고 질투하는거니?"
"질투요?"
선규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아주머니께 질투를 할거 같아요? 착각하지 마세요"
그러자 마담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럼 뭐야? 네가 뭔데 내일에 참견이야?"
"....."
선생님얘기를 차마 할수가 없어서 선규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마담은 그의 머리카락들을 거칠게 잡고 얼굴을 그녀쪽으로 돌렸다.
"말해봐! 무슨 이유로 그얘기를 꺼낸거야?"
"....."
"말해두는데 내일에 참견하지마. 너는 내말만 들으면 돼. 어제같은 일이 또다시 일어나면 그때는 정말로 용서하지 않을거야"
그리고는 머리카락들을 놓았다. 헝크러진 머리들을 쓰다듬던 선규는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이제는 아주머니를 만나지 않을거에요"
"뭐?"
놀란얼굴로 쳐다보는 마담에게 선규는 지갑에서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뭐야?"
"한번 읽어보세요"
술집에서 받은 영수증을 복사한 종이를 읽던 마담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서?"
"미성년자를 유흥업소에 출입시키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아시죠? 거기다가 담배까지 판 증거도 있고요. 그걸 경찰이나 언론에 신고하면 아주머니는 복잡해 지시겠죠? 원본은 제가 따로 가지고 있으니까 그건 아주머니가 가지고 가시던지 마음대로 하세요"
놀란 얼굴로 종이와 선규를 번갈아 보던 마담은 알수없는 미소를 지었다.
"너 지금 나를 협박하는거니?"
"저도 이러고 싶지가 않지만 아주머니께서 자꾸 이런식으로 나오면 어쩔수가 없어요"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선규의 말을 듣고 마담은 다시 종이를 쳐다보았다.
"영수증을 갇고 갔다더니 이거 때문이었니? 맹랑한 놈이네. 이런 생각까지 하고. 너같은 애는 정말 처음이다"
"오늘은 아주머니께서 결정을 내리셔야겠네요"
마담은 종이를 선규에게 다시 주며 냉소를 흘렸다.
"이게 나에게 통할거라고 생각했니? 경찰? 언론? 웃기고 있네"
마담이 동요하는 빛을 조금도 내보이지 않자 선규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네가 생각하는것 만큼 세상이 그렇게 순진한줄 아니?"
"....."
"내가 세상사는법을 가르쳐줄까?"
"....."
선규가 아무말도 못하고 있자 그녀는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세상을 살려면 힘이 있어야돼. 그러면 누구도 못건들이지. 내가 그런 힘을 가지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줄 알아? 제법 머리를 썼다만 헛수고했어. 이런거 가지고 경찰이나 언론들 입막는건 아무것도 아니야. 전화 한통이면 돼"
얘기를 듣던 선규는 점차적으로 겁이 들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빛이 변하는걸 보고 마담은 득의에 찬 미소를 지었다.
"이리와봐"
더이상은 반항할 생각이 엄두도 안나서 마담의 벌린 팔안으로 저도모르게 안겼다. 그녀는 방금전에 거칠게 잡았던 그의 머리카락들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조용하게 말했다.
"이번은 처음이니까 용서해줄테니 다음부터는 그러지마"
마담의 인형처럼 가만히 안겨있는 선규는 자신의 무능력과 어리석음을 통탄했다.
[이제는 이여자에게서 빠져나올수가 없는건가?]
"아까 그여자는 네선생님이니?"
그소리에 선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냥 과목을 가르치시는 선생님이세요"
"그래? 그런데 너와 친한것 같더라. 학교에서 네가 나를 만나고 술집에 드나든걸 알면 퇴학이지?"
그말에 선규는 절망감으로 두눈을 질끔 감았다. 이제는 도리어 그가 협박을 당하고 있었다.
"네가 하기에 달렸어. 부모님께도 걱정을 끼치지 않을려면 내말을 잘 들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선규는 눈물이 나올것만 같았다. 그가 굴복을 한것을 보고 마담도 냉정한 모습을 모두 버리고 손을 내려 그의 몸을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내가 어떡하다 이렇게 됐지?]
"왜 하필 저에요? 저보다 그걸 더 잘하는 아이들이 많을텐데"
"처음에는 단순히 즐길려고 했는데 왠지모르게 너에게서 모성본능이 느껴져. 아마 내가 아이를 낳아보지를 않아서 그런가봐"
선규는 마담의 말이 이해가 안되어 고개를 들었다.
"저같이 다 큰애한테 모성본능이라니요?"
"글쎄. 너한테 자꾸 그런게 느껴지네. 너를 보면 품안에 안고싶고 그리고 어린아이가 아니라서 그것도 즐길수 있어서 좋아"
[엄마도 아니면서 무슨 모성본능이야?]
멍한 눈으로 허공을 쳐다보던 그녀의 말은 계속 되었다.
"여자에게는 안기고 싶은 남자가 있고 안아주고 싶은 남자가 있거든. 그게 바로 남편과 자식이겠지. 그런데 나는 결혼을 안했잖아"
"그럼 안기고 싶은 남자는 어제밤에 같이 있었던 그사람이에요?"
그러자 마담은 아무말없이 선규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애틋하게 변하고있는 그녀의 얼굴표정을 보고 선규는 몹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남자를 사랑하세요?"
"....."
그녀에게서 계속 대답이 없자 얼른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마담은 그를 잡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걸 보고 선규의 몸에서는 작은 경련이 일어났다.
"저번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시냐는 질문에 대답을 안하셨는데 그럼 그게 바로 그사람이었어요?"
"....."
"대답해주세요!"
"그사람이야"
그녀의 조용한 대답을 듣고 선규는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되었다.
"그사람은 아주머니를 사랑해요?"
"응"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냥 재미로 만나는걸수도 있잖아요"
"재미로 만나는 사람이 사랑한다며 동거를 하니?"
"도..동거요?"
"그래. 우리 얼마전부터 동거에 들어갔어"
"그럼 그사람의 아내는요?"
"내가 알게뭐야"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있어요?"
"나라고 그런 행복을 가지면 안되니?"
마담의 어처구니없는 말에 선규는 기가 막히기만 했다.
[선생님은 그럼 지금 별거중이시구나.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한 이혼만 남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자 가슴에 울분이 쌓였다.
"왜 하필 가정이 있는 사람이에요? 남에게 불행을 주는게 미안하지도 않으세요?"
"그여자도 나중에 저행복을 찾겠지. 하지만 이건 그여자 잘못이야"
"예?"
"그사람이 그러더라. 아내하고는 잠자리도 재미없고 정이 계속 떨어진다고. 그여자가 애초부터 잘 했다면 그사람도 바람을 안피웠을거 아니야"
당당하게 말하는 마담에게서는 죄의식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수가 없었다.
"그럼 그사람의 자식들은 어떻게 되는거에요? 그애들은 아빠없이 자랄거 아니에요?"
"부모를 잘못 만난탓이지. 나도 아버지없이 자란 사람이야. 그래서 그런거에는 조금도 동정심이 안가"
선규는 더이상 마담과 얘기하는것을 포기했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가 않아 그녀를 설득할 틈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남편이 마음을 돌리는수밖에 없구나. 그런데 이여자에게 빠져있고 선생님한테는 그런 안좋은 감정을 갖고 있으니.....]
씁쓸한 표정을 짓는 선규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머니도 언젠가는 그사람에게 배신당할수가 있어요. 한번 배신했는데 또 그러지 않겠어요?"
"그거야 나중에 생각할 일이지. 하지만 그남자만은 그러지 않을거야"
[이여자도 단단히 빠졌군]
그러는데 마담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런데 왜 자꾸 그사람에 대해서 물어보니? 질투 안난다고 아까 큰소리 칠때는 언제고"
"....."
선규가 아무말없이 먼곳에 보이는 집들을 쳐다보고있자 그녀는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사람에 대해서는 신경쓰지마. 낮에는 집에 없으니까 너를 만나줄수 있어"
그말에 선규는 또한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착각도 가지가지네. 누가 저를 만나고 싶어 이러나?]
"저 이제 그만 가야해요"
그말을 듣고 마담은 시동을 켜고 골목에서 빠져나왔다.
"가게에 갔던 일은 아무에게도 말 안했지?"
"네"
그러자 마담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남자나 여자나 입이 무거워야 성공하는거야"
이제는 마담이 끔찍해 보여 그녀의 웃음소리나 손길에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한동안 말없이 운전하던 마담은 다시 입을 열었다.
"미스성이 너에게 좋은 인상을 받은것 같더라. 그때 무슨일 없었지?"
그소리에 선규는 흠짓 놀라서 마담을 쳐다보았으나 그녀는 기분이 좋은듯 입가에 연신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아무일 없었어요. 미스성누나는 잘 있어요?"
"요놈봐라. 암만 얘기해도 나에게는 누나란 소리를 잘 안하더니 미스성은 그새 누나라 부르네. 나도 그애와 똑같이 미혼이야"
안에서 마담의 웃음소리가 가득 울리는 자동차는 혼잡한 도로를 자연스럽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랜드 레스토랑을 찾는 명숙은 시내한복판에서 라이터를 들고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선규에 대한 걱정이 떠나가지를 않아서 일이 손에 잡히지가 않았었다. 얼굴을 아는 선규의 친구도 없고 태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대답만 해서 속이 답답할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라이터생각이 나서 일찍 약국문을 닫고 시내로 나섰다. 선규가 밖에서는 어디를 가는지가 궁금했고 또한 남방에 묻었던 분자국때문에 그의 말이 석연치가 않아서 두눈으로 직접 확인해봐야 안심이 될것 같았다. 한참을 찾던 그녀는 마침내 그랜드 레스토랑이라고 쓰여있는 간판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가보았다. 주위를 보니 전부 회사빌딩들이었다.
[선규친구네가 돈이 많나보네. 여기는 땅값이 상당할텐데]
입구를 살펴보다가 계단을 내려가서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내부는 어두웠고 아직 저녁시간이 되려면 한참 있어야 되서 그런지 조용하기만 했다. 입구앞에 아무도 없어서 잠시 기다리고 있는데 저쪽에서 양복차림의 유니폼을 입은 남자가 다가왔다.
"무슨일로 오셨읍니까? 아직 영업은 시작하지 않았읍니다만"
"이곳의 사장님을 뵐려고 왔어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공손하게 인사를 한 종업원은 왔던 방향과 반대쪽으로 사라졌다. 미성년자에게 술을 줘서 처음에는 별로 안좋게 생각했던 명숙은 깔끔하고 예의바른 종업원때문에 적잖이 놀랐다. 생각보다 수준이 있는곳으로 느껴져 옷깃을 바로하는데 곧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남자가 부드러운 미소를 띄며 왔다.
"이곳의 지배인입니다. 지금 사장님께서 자리를 비우셔서 제가 대신하고 있읍니다. 어떻게 오셨읍니까?"
아까 종업원보다도 더욱 예의를 차리며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남자를 보고 명숙은 잘못 찾아왔나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호감이 가는 인상을 가진 남자는 여전히 웃음을 띄며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자 선규가 어떤곳을 가는가를 확인하고 아들에게 술과 담배를 준것을 따질려고 했던 명숙은 마치 어려운 사람을 대하는듯 저도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저..저기, 제자식이 이곳 사장님의 자제분과 친구라서 며칠전에 여기서 대접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감사의 말씀을 드릴려고 찾아왔읍니다"
그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하던 지배인은 곧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아드님께서 지난주 일요일에 오시지 않으셨읍니까?"
"그렇읍니다"
그러자 지배인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이 납니다. 가끔가다 사장님의 자제분님께서 친구분들을 데려오셔서 식사를 대접하십니다. 사장님께서도 그러는걸 좋아하시고요. 그러니 부담을 가지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제자식이 폐를 끼친건 아닌가 해서요"
그말에 지배인은 황급히 두손을 내저았다.
"절대 그렇지가 않읍니다. 사장님의 자제분님의 친구분이시라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나중에 사모님께서도 아드님과 함께 저희 가게에 꼭 들러 주십시오. 저희들이 정성껏 모시겠읍니다"
지배인의 정중한 태도를 보고 할말이 없어진 명숙은 그냥 나올려다가 확인은 해야 할것 같아서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 한가지 여쭤봐도 되겠읍니까?"
"말씀하시죠"
"제자식이 사장님의 자제분과 함께 여기서 술과 담배를 한 모양인데 여기서는 미성년자들에게 그래도 되는지요?"
따지듯이 말할려고 했지만 마치 어려운 질문을 하는것 같아 그녀모르게 난처한 표정이 나오며 말을 꺼내기조차 어려웠다. 그러나 지배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곧 매우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생각이 납니다. 그때 사장님께서 출타중이셔서 제가 이곳을 보고 있었읍니다. 그런데 제가 잠시 자리를 비운사이 들어온지 얼마 안되는 종업원 한명이 자제분님의 요청을 거절하기가 어려워 그랬나 봅니다"
"....."
"물론 그런일이 일어나서는 안되죠. 사모님께서 하시는 걱정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나중에 그걸 듣고 그종업원에게 단단히 주의를 시켰읍니다. 사장님께서도 많이 언짢아 하셨고요. 사모님께 심려를 끼쳐드려 제가 사장님을 대신하여 정중히 사과드리겠읍니다"
지배인이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사과를 하자 당황한 명숙도 함께 허리를 굽혔다.
"이..이러시지 않으셔도 되는데..... 저는 다만 부모의 입장이 되다보니 걱정이 되어서요"
지배인은 그녀의 말이 수긍이 가는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모님의 심정을 충분히 압니다. 부모님들뿐만 아니라 저희들도 주의를 기울어야 하는데 책임을 소흘히 해서 부끄럽습니다. 앞으로는 이런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겠읍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지배인의 정중한 사과를 듣고 그녀의 가슴속에서는 그동안 레스토랑에 대해 좋지않게 여겼던 감정들이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오히려 지배인의 점잖은 태도와 친절함에 몸들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지배인은 여전히 미안한 기색으로 말했다.
"이왕 여기까지 오셨는데 안으로 드시지요. 사모님께 뜻하지않은 심려를 끼쳐드렸는데 저희들이 식사를 대접해 올리겠읍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명숙이 황급히 손을 내저았다.
"아..아닙니다. 보니까 아직 영업을 시작하지 않으신거 같은데 저때문에 폐를 끼칠수는 없죠"
"그래도....."
"정말 괜찮읍니다. 말씀만 들어도 감사한데요"
"그럼 다음번에 꼭 찾아와 주십시오. 그때는 저희들이 정성을 다해 모시겠읍니다"
지배인의 공손한 말에 황송해진 명숙은 그만 나가야겠다고 생각하여 인사를 하고 나가다가 다시 돌아섰다.
"이곳은 어떤 종류의 음식을 합니까? 아까 들어오다 보니까 아무것도 쓰여져 있지 않은것 같던데요"
그말을 듣고 지배인은 한순간의 동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저희들은 동양식과 서양식 모두를 취급합니다. 그중에서 일식이 특히 뛰어나죠"
"그렇읍니까?"
다시 인사를 하고 나가는 명숙의 뒷모습을 보던 미스터박은 싱긋 웃고는 사무실로 가버렸다.
거리로 나온 명숙은 달아오른 얼굴을 두손으로 감싸쥐었다. 내부안까지는 들어가보지 않았지만 입구에서 느꼈던 고급스러운 분위기와 지배인의 신사같은 친절한 태도를 생각하며 레스토랑을 의심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꼭 호텔 레스토랑같네. 이럴줄 알았으면 옷을 좀더 잘 차려입고 올걸. 저런데서 그런일이 일어날수가 없겠지? 종업원이 실수한것 같은데 아마 분자국도 음식을 잘못 놓다 그랬나보다]
여자문제도 생각해보니 그것도 그녀가 틀린것 같았다.
[학교와 배달을 마치고 곧장 집에 들어오고 일요일에는 선생님댁과 기타를 배우러 가느라 여자만날 시간도 없잖아. 공연히 선규를 의심했네. 아무래도 엉뚱한 애다보니 그런말을 했나보다. 자식을 안믿으면 누굴 믿겠어?]
그렇게 생각하니 선규가 왠지 고맙기만 했다. 레스토랑과 아들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털어버리자 그동안 천근같이 무거웠던 그녀의 가슴은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집으로 가는 명숙의 심정은 날아갈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선규는 낮에 만났던 마담때문에 매우 심란했다.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었어. 그런 술집을 경영하는데 그런 협박같은건 그여자에게는 아무것도 아니겠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니 눈앞이 그저 캄캄하기만 했다.
[이제는 집뿐만 아니라 학교까지 찾아가겠다하니 이일을 어떡하면 좋지? 정말 만나기 싫은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선생님남편과 관계를 맺는 여자와 어떻게 그런짓을 해?]
땅이 꺼질듯이 한숨을 쉬며 집에 들어가자 저녁을 짓던 엄마는 냉큼 달려와서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엄마가 마치 죽었던 사람이 돌아온듯이 너무나 반갑게 맞아주어서 선규는 어리둥절 했다.
"숨막혀, 엄마. 갑자기 왜 그래?"
"보고 싶었던 아들이 돌아와 기뻐서 그래"
한참후에 포옹을 푼 엄마는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짓고 그를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오늘 기분좋은일이 있었어? 평소에는 이러지 않았잖아"
"난 너를 보면 언제나 기분이 좋아"
다정하게 말하는 그녀의 입가에서는 행복한 미소가 그칠줄을 몰랐다.
"어서 옷갈아 입고 와. 네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만들어 놨어"
얼떨결에 함께 웃음을 짓던 선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안으로 들어갔다. 뭔가가 이상했지만 어쨋든 엄마가 저렇게까지 좋아하며 반겨주니 그도 기분은 무척 좋았다. 샤워를 마치고 거울앞에 선 선규는 머리를 빗다가 문득 마담이 했던 말이 떠올라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모성본능? 우리엄마도 아니면서 난데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어리다고 깔보는 소린가?]
그런 생각을 하자 은근히 화가 나는데 별안간 밖에서 엄마의 소리가 들렸다.
"빨리 나와. 음식 식는다"
"지금 나가"
화장실을 나온 선규는 식탁앞에 차려진 음식들을 보고 눈이 휘둥그래졌다.
"오늘 무슨날이야? 왠 진수성찬이야?"
"무슨날은. 그동안 너를 잘 못먹인거 같아서 그래"
"무슨 소리야? 매일 잘 차려주잖아"
"글쎄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거니까 어서 앉기나 해"
앞치마를 두룬 엄마가 웃으면서 그를 의자에 앉히자 선규는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엄마 오늘 이상하다. 어디서 돈 줏었어?"
"내자식한테 맛있는거 먹이겠다는데 이유가 꼭 있어야 하니?"
여전히 입가에 행복한 웃음을 띄는 엄마가 그의 손에 수저를 쥐어주자 선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녀는 젓가락으로 반찬까지 잡아 그의 입안에 넣어주었다.
"이것도 먹어"
"그..그래. 엄마도 어서 같이 먹자"
엄마에게 왕처럼 극진한 대접을 받으니까 당황하고 머리가 혼란스러워서 밥이 어떻게 넘어가는지도 몰랐다.
[갑자기 왜 이러지? 정말로 무슨일이 있었나? 이거 불안하네]
먹지도 않고 계속 그를 행복한 눈길로 지켜보는 엄마를 보다가 문득 그나름대로 짚이는게 있었다.
[가만. 혹시 어제밤일때문에? 섹스하다가 내가 중간에서 그만뒀다고 이러는거 아니야? 그래서 좋은거 먹여 정력을 보충하라고 이러는건가? 이제보니 우리엄마 진짜 귀엽네]
그런 생각을 한 선규는 엄마를 보며 장난기가 가득 담긴 웃음을 짓고는 열심히 밥을 먹기 시작했다.
음악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긴장이 되어있는 태수는 초조하고 가슴이 떨렸다. 점수를 잘 받을까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평소 유진과 연습을 하다가 처음으로 남들앞에서 연주를 한다는것과 실수를 해서 그동안 그를 열심히 가르쳐준 유진에게 실망을 주는건 아닌가 해서 두려움이 들었다. 어찌나 긴장되었는지 음악이 잘 생각나지 않을 정도였다. 옆에서 기타케이스를 들고 음악실로 함께 걷는 선규는 놀랍게도 여유있는 표정이었다.
"넌 안떨리니?"
"아니. 가서 그동안 연습한걸 한번 치기만 하면 되는데 왜 떨리냐? 오히려 매번 시험을 이렇게 봤으면 좋겠다. 넌 떨려?"
"이런식으로 시험을 본적이 없어서"
"긴장하지마. 체육시험처럼 연습한걸 하는거야. 자꾸 겁을 먹으면 시험볼때도 긴장되서 틀릴수가 있으니 느긋하게 마음먹어"
무슨 기대감마저 서려있는 선규의 얼굴을 보니 부럽기만 했다. 얼마후에 음악실에 앉아있는 태수는 그의 차례가 점점 가까와질수록 두근거림이 심해져 갔다. 손가락들까지 떨려서 모든생각들을 떨쳐버릴려고 머리속에서 쇼팽의 "이별의 곡"을 처음부터 다시 떠올려 보았다. 한동안 상상속의 음을 소리내던 머리속에서는 별안간 엄마가 떠올랐다. 그러자 그의 입가에서는 그도모르게 미소가 지어지며 떨리던 가슴은 차차 진정되어 갔다. 계속해서 엄마만 생각하다가 이윽고 그의 차례가 되자 마음은 평온할 정도로 많이 가라앉이 있었다. 천천히 걸어나가 피아노의자에 앉고 건반들을 보자 이번에는 엄마와 함께 유진도 떠올랐다. 그녀와 단둘이서 피아노를 칠때를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손가락들을 건반위에 올려놓고 연주하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악보와 곡의 전개를 주의깊게 더듬으며 피아노를 치는 태수의 머리속에는 두려움은 사라지고 엄마와 유진밖에 없었다. 그것은 마치 그들이 그의 바로옆에 있는것 같은 느낌이었다. 연주는 생각했던거보다 훨씬 더 잘되고 있었다. 마지막 건반을 누르고 손을 건반위에서 조용히 내려놓자 그제서야 그의 입에서는 안도의 한숨이 길게 나왔다. 얼굴을 든 그의 이마와 손에는 땀이 조금도 베어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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