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친사랑 세 이야기 - 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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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친사랑 세 이야기
첫 얘기
그 당시엔 환경이 그랬다. 내 방, 네 방, 따로 따로 하나씩 갖고 문 잠그고 자기 사생활 지키며 산다는 건 그림도 그리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6.25 난리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방 한 칸에서 부모 자식은 물론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3대가 엉켜 사는 집도 비일비재했다.
우리 집은 아들 둘에 딸이 셋이었는데 형님은 일찌기 서울 유학 중이었고 남자인 나 하나에 누이 셋이 한 방을 썼다. 나야 어렸으니까 큰 불편을 몰랐지만 누이들의 불편이 오죽 했겠나.
우리 집에서 겨우 몇 백 미터 거리에 이모네 집이 있었다. 우리나 그쪽이나 전쟁통에 가장이 사망하여 홀어머니에 자식들 뿐이었는데 이모 님 댁은 딸만 셋이었다. 둘은 장성하여 직장을 다녔는데 직장이 있는데서 생활을 했는지 집에는 가끔씩 왔고 그 큰 일본식 집에 이모와 막내딸인 당시 나보다 한 살 위인 고1의 이종누이 둘이서만 덩그러니 살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자주 놀러 갔고 나중에는 이모의 권유에 따라 나는 이모 님 댁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이모는 내가 누이보다 한 살 아래라 그랬는지 어린애 취급을 하여 누이와 같이 자는 것을 전혀 개의하지 않았다.
누이인 나영이와 나는 아주 뽕짝이 잘 맞아 재미있게 잘 지냈다. 학교에 갔다 오면 서로 학교에서 재미 있었던 이야기에 열을 올렸고 사춘기였던 우리는 서로 관심을 가졌던 남녀 학생에 대해서도 감춤 없이 얘기를 하곤 하였다. 그때 우리가 살던 안양은 아주 작은 도시였기 때문에 어느 학교 누구하면 다 알 정도였었다.
그때 나영이가 나보다 한 살 위였지만 성적으로는 내가 위였다. 순진했던 그녀에 비해 나는 그 나이에도 자위행위의 경력이 5 년쯤 된 조숙아였던 것이다.
그 나이에 어떻게 5 년 전부터 자위를 할 수 있느냐? 남자의 자위는 누가 가르쳐서 배워지는 게 아니고 자연적으로 알게 또는 하게 되는데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자위를 했다. 처음엔 손으로 자지를 자극해서 한 게 아니라 새벽녘에 자연스레 조조발기가 된 상태에서 엎드린 채로 발기된 자지를 이불이 깔린 바닥에 비벼서 오르가즘에 오르곤 하였던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정액을 최초로 분출한 게 중1 말이었으니까 4학년 때부터 근 3년간 정액을 분출함이 없이 마른 오르가즘에 올랐었다는 사실이다. 신기한 건 정액이 쏟아지느냐에 관계없이 절정의 기분은 똑 같다는 거였다.
새벽엔 바닥에 자지를 비벼서 했고 낮엔 책상이나 옷장 등의 모서리에 비벼서 절정에 올랐다. 하루에도 수도 없이 그 짓을 했다. 많게는 하루에 열 번도 더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니 같이 잠을 자면서도 나영이(그때는 서로 이름을 불렀었다)는 나를 의식 않고 편하게 잠에 들곤 했는데 나는 그렇지가 않았다. 여자가 옆에 있으니 자꾸 자지가 서서 잠을 잘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처음 얼마간은 나 딴에는 나영이 모르게 자위(당시엔 핸드플레이라고 했음)를 해서 까부러지고 난 다음에야 잠을 자곤 했다. 나 딴이라고 한 것은 나는 나영이가 모를 줄 알았는데 나중에 듣고 보니 그녀는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다 알았다는 것이다. 단지 나한테 방해가 될까봐 자는 척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옆에 실물이 있는데 어찌 계속 자가발전만 하겠는가. 조금 지나서는 자다가 뒤척이는 척 하며 잔뜩 꼴린 자지를 나영의 손에 비비기 시작했고 조금 더 있다간 그녀의 손을 오무려 주며 내 자지를 쥐게 했다. 내가 그렇게 해도 그녀는 숨을 고르게 쉬며 자는 척 했지만 영악한 나는 그녀가 자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내 자지를 쥐고 있는 손의 미세한 경련과 배어나오는 땀을 어이 내가 몰랐겠는가.
남산 오르면 그 다음은 청계산 아닌가. 그녀의 손에 내 자지를 쥐어주곤 내 손은 슬슬 그녀의 보지 쪽으로 옮겨갔고 처음엔 팬티 위로 만지다 그 다음엔 팬티 속으로 기어들 게 되었다.
재미있는 건 맨 처음엔 여자가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로 꼴려서 자가발전을 하여 쌌고 그 다음엔 내 자지를 그녀의 손에 비비기만 해도 쌌고 또 그 다음엔 내 손이 그녀의 보지 그것도 팬티 혹은 고쟁이 위로 만지기만 해도 꼴려서 쌌는데 그게 자꾸 진행될수록 싸기 위해 보다 큰 자극을 필요로 하더라는 것이다.
손으로 진짜 보지를 만지고 나니 그걸 눈으로 보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자는 척하며 하던 애무가 이미 상당히 많이 진척되었음에도 팬티를 벗기는 일은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팬티를 벗기려 하니 그녀가 자는 척 하며 내가 못 벗기게 자기 팬티 끈을 움켜쥐는 것이다. 나는 잔뜩 발기된 내 자지를 팬티끈을 쥐고 있는 그녀의 손등에 비비며 입에 키스를 하곤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보기만 할 게, 보고 싶어 미치겠어"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오물대더니 팬티를 잡았던 손을 풀었다. 나는 잽싸게 팬티를 내리고 머리를 보지 앞에 대고 그렇게도 보고 싶던 보지를 눈이 뚫어지게 꼬나봤다.
솔직히 내가 그렸던 모양과 많이 달랐다. 나는 보지가 여자 얼굴처럼 예쁘게 생기고 구멍도 입처럼 뻥 뚤렸으려니 생각했는데 의외로 너무 단순하게 생기고 구멍도 보이지가 않았다. 그래도 신기한 건 두덩에 난 무성한 털과 위에서부터 상당히 길게 찢어진 계곡이었다. 색깔도 의외로 거무티티한 게 이상했다.
나는 먼저 손가락으로 계곡을 벌려 보았다. 속도 생각보다 간단한 구조였다. 혀를 대 봤다. 찌릿한 맛이 들었다. 밑에 구멍이 작게 벌어져 보였다. 혀를 댔다. 그러자 나영이가 두 손으로 자기 보지를 가렸다. 나는 몸을 올려 그녀를 껴안고 자지를 그녀의 보지 위에 막 비볐다. 순식간에 정액을 쏟았다. 그녀가 당황하며 돌아누우며 자기 팬티로 정액을 닦았다. 정액이 보지 속으로 흘러 들어갈까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 전까지는 그녀의 손바닥이나 허벅지에 싸곤 했다. 사실 싸고난 정액을 처리하는 것도 큰 일이었다. 그땐 크리넥스도 두루마리 화장지도 없었던 시절이라 기저귀나 걸레 같은 헝겊으로 닦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것도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나영이가 자는 척 하기는 그때까지도 계속 되었다. 우리는 낮에는 전혀 밤의 얘기를 하지 않았고 온전히 그녀는 누나였고 나는 착하고 순진한 동생이었다. 서로 어색함도 없었고 깜찍하게도 우리는 애무를 시작하기 이전과 똑같이 킬킬대며 지냈다.
그러다 밤이 되면 나는 다시 짓꿎은 남자로 화해 그녀를 벗기고 키스하고 애무하고 자지를 몸 전체에 비비고 그리곤 몸 위에 싸고 했다. 그녀도 나의 그런 행동을 기다린다고 나는 내 멋대로 생각했다. 언제 박았을까?
끝까지 나영이가 자는 체 했지만 우리 둘의 대화가 그녀의 주도로 매일 같이 이어졌다. 그녀 책상의 오른 두 번째 설합 맨 밑바닥에 그녀가 편지를 써 두면 그걸 내가 보고 답장을 써서 그 밑에 놓곤 했던 것이다.
나영이는 그 편지에 거의 매일 같이 박는 건 절대 안 된다. 그러다 애라도 배면 너하고 나하고 둘 다 죽는다라는 말을 써서 나를 세뇌시켰다. 그래도 한 살이라도 많다고 철이 들었던 것이다.
그녀의 애절한 호소가 나의 저돌적인 도발을 애무에서 그치게 했다. 아니 그녀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몇 번인가 내 좆을 그녀의 구멍에 박으려고 용을 썼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녀는 참으로 의지를 갖고 내 좆의 삽입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그 대신 당시로서는 어른들도 하지 않던 오랄을 해 주었고 나에게도 자기 보지를 빠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너무 박고 싶으면 그녀를 엎드리게 해 엉덩이 사이에 내 자지를 박는 형상으로 펌핑 동작을 해 사정을 했다. 가끔은 그녀의 크지 않은 젖에다 비벼서 싸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남녀가 잠자리에서 할 건 다 한 것 같다.
그녀와의 근 1년에 걸친 아름다운 관계는 내가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을 해 서울로 이사를 함으로 써 끝이 났다.
두 번째 얘기
고등학교엘 들어와 시작하게 된 서울생활도 옹색하기 짝이 없었다.
금오동 산동네는 지금도 작은 집들로 빼곡하지만 그 때는 대충 못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산동네였다.
우리가 세 들어 살던 집은 그래도 2 층집이었는데 그 동네가 다 그렇듯이 화장실이 없고 동네 전체가 쓰는 공중변소를 이용해야 했다. 아침에 일을 보려는 사람들이 줄을 선 풍경은 티비 연속극에서 가끔 소개가 되어 여기선 언급을 안 한다.
변소가 머니 다들 요강을 썼는데 건물이 엉성해 위층에서 여자들이 요강에 오줌을 누면 그 소리가 바로 옆 주전자 물을 컵에 붓드시 그렇게 자세히 들리곤 했다. 나중에는 오줌소리만 듣고서도 첫째 딸이 일을 보는지 둘째 딸이 일을 보는지 알 정도였다.
사는 사정이 비슷해도 막내고모가 사는 동대문 밖의 숭인동은 금호동보다는 조금 나았다. 고모부가 신사복을 만드는 기술이 있어 셋집에 양복점을 내고 계셨으며 그 안에 작은 방 한칸과 옹색한 부엌이 살림집 구실을 했다. 그 집엔 고모 내외와 나하고 동갑인 사촌과 한 살 아래 여동생 네 식구가 살고 있었다.
사촌과 나는 아주 친하게 지냈는데 여름방학이라고 내가 그 집으로 놀러를 갔다. 고3 때였다. 그런데 가보니 사촌이 학교에서 강원도로 농촌계몽을 떠났다는 것이다. 당시엔 전화가 부자집에만 있어 연락 없이 찾아가는 게 흔한 일이었다. 그 날로 돌아올까 하다가 온 김에 며칠 놀다 가라고 해서 그냥 머물기로 했다.
밤이 되니 고모 내외는 양복점의 재단대 위에서 주무시고 나와 여동생이 안에 있는 방에서 자게 되었다. 재단대와 방까지는 대여섯 발자국 정도의 거리였다.
여동생과 학교 얘기, 대학 얘기 그리고 약간의 이성 얘기를 재미있게 하다가 잠이 들었다. 잠결에 여러 사람들이 몰려 두런대는 소리에 잠이 깼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깜감한 속에 바로 방 밖에서 고모와 고모부가 낮은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예사 이야기가 아니었고 말소리 숨소리가 섞여 들리는 게 심상치 않았다. 나는 즉시 두 어른이 섹스를 하신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누군가. 왕년에 이종누이와 거의 1년에 걸쳐 사랑을 했던 유경험자 아닌가. 순식간에 자지가 용트림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얼마 만인가. 그 달콤한 소리. 별안간 누이의 나신이 눈에 어른거렸다. 옆에 있으면 올라타는 건데. 그런 생각을 하고 옆을 보니 아 글쎄 여동생이 이불을 걷어차고 허연 허벅지를 내 보이고 자고 있는 게 아닌가.
평소 나이보다 어려 보이고 귀여워 여자로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허벅지와 반쯤 드러난 가슴을 보니 다 큰 처녀였다. 그녀를 쳐다보며 입맛을 다시는데 아무래도 그녀의 모습이 조금 어색해 보였다. 고개는 반대쪽인데 왼 무릎을 올려 거의 팬티가 보이게 했고 오른 손은 내 몸에 닿을 정도로 손금을 보라는 듯 펼쳐져 있었다. 난 혹시 그녀가 나처럼 잠이 깨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밖에서는 아까보다 조금 더 높은 톤의 숨소리가 전해져 왔다. 몸을 그녀 쪽으로 돌리며 슬그머니 손을 잡았다. 내가 조금 힘을 주어 잡는 순간 그녀도 내 손을 잡은 부분에 힘을 가하는 게 느껴졌다.
그녀도 깨어 밖에서 들려오는 자기 부모님의 예쁜 소리에 나처럼 흥분을 느낀다고 생각을 했다. 하기사 남자가 바로 옆에 누어 있으니 그럴 수도 있으려니 생각했다.
잡은 손을 끌어 다짜고짜 내 발기물 위에 놔주었다. 그녀의 손이 떨렸다. 나는 주저 없이 내 자지를 팬티에서 꺼내 그녀의 손을 벌리게 하고 내 것을 쥐게 하고 내 손을 그녀의 손위에 얹고 꽉꽉 눌렀다. 그녀가 고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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