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기와 친척 일가 - 9부
본문
아직 좀 더 기다려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일단 타박상은 그렇게 심하지 않습니다만.. 글
쎄요. 워낙 골절된 부위가 많고 광범위해서.. 오늘밤이 고비일 듯 합니다만.. 마음 단단히 먹
고 기다리세요. 의료진들은 최선을 다 할겁니다. "
늦은 밤, 대구 중앙 병원.
친척 일가가 모두 보호자 대기소에 모여앉은 가운데 중년 의사의 무뚝뚝한 설명이 이어졌
다. 예익이의 신원 파악이 늦어져 사고 소식은 저녁때가 되어서야 민기들에게 전해졌고, 예
리는 곧 온천에 가 있던 집안 어른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 그럼 이만.. 나가봐야겠습니다. "
예익이의 상태에 대한 설명을 마친 의사는 그대로 휙 돌아 대기실을 나갔다. 새하얗게 칠
해진 병원 대기실 안에는 적막만이 흘렀다.
" .. 이런 판국에 애새끼 부모란 것들은 어디엘 가서 처박혀 있는 거야!? "
민기의 할아버지가 적막을 깨고 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주름진 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그
렁거렸다.
" 그러게 말입니다.. 분명히 온천에서 저녁 드실때까진 함께 계셨는데.. 지금은 연락도 안되
니.. 이것 참.. "
민기의 아버지가 말했다. 민기의 큰삼촌과 큰숙모의 행방이 묘연했다. 예리는 자식이 생사
를 오가는 가운데 행적을 감춰버린 부모님에게 심한 원망을 느끼고 있었다.
" 흐흑.. 예익아.. "
예리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조용히 예리를 품에 안았다.
" 울지 말그라 얘야.. 다 잘 될끼다.. 예익이 고놈.. 쉽게 죽을놈이 아이다.. 울지 마라카이..
"
예리를 달래는 할머니의 눈가에도 어느덧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대기소 안은 온통 친척
일가의 흐느낌으로 가득 차 오르고 있었다.
" 젠장.. 내가 예익이를 잡았어야 했는데.. "
민기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민기의 마음속은 온통 종전의 후회로 가득찼다. 그때 좀더 말
로 달래볼 수 있었지 않은가, 예익이가 도망가기 전에 잡을 수 있었지 않은가.. 민기는 심한
자괴감에 몸을 떨었다.
" 오빠.. "
상아가 걱정스러운 듯이 민기 옆에 다가와 앉았다. 상아의 눈가에도 눈물 자욱이 선명했다.
" 상아야.. 넌 절대로 죄책감 같은 거 느끼면 안돼.. 다 오빠가 잘못한 거니까.. 그러니까..
넌 이따위 빌어먹을 느낌 같은 거.. 절대로.. 절대로 느끼면 안 된다.. "
민기가 상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민기의 두 볼을 타고 후회의 눈물이 흘렀다.
예익이가 집을 나간 후, 수현이의 질문공세에 마지못한 민기는 상아와 예익이 사이에 있었
던 일을 수현이에게 털어놓았지만 정작 민기자신과 상아 사이에 있었던 일은 언급하지 못했
다. 민기가 무언가 감추려 한다는 느낌을 받은 수현이었지만, 굳이 그에 대해 캐묻지는 않았
다. 수현이는 민기를 믿었다.
슬픔에 휩싸여 경황이 없어진 친척 일가의 그 누구도 상아를 감싸안은 민기의 모습에 신경
을 쓰지 않고 있었다. 단 한사람, 수현이만을 제외하고는.
" 째깍 째깍.. "
시계가 어느덧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슬픔과 초조함에 지친 사람들이 하나 둘씩 잠들고 있었다. 어른들은 할머니를 제외하곤 모
두 잠들어 있었고, 아이들도 거의 모두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 .. .. .. "
민기의 할머니는 계속해서 속삭이듯 염불을 외고 계셨다. 합장한 그녀의 손에서는 작은 염
주가 쉴새없이 원을 그리고 있었다. 민기는 아직 깨어있었다. 자신의 어깨를 기대고 잠든 상
아를 의자에 편하게 눕혀 둔 민기는 답답한 심정에 대기실을 빠져나와 병원의 주차장 옆 벤
치에 가 앉았다. 가을의 새벽 공기가 차가웠다. 귀뚜라미들은 풀섶에서 울어대었고 민기는
꽉 찬 달 아래에서 멍하니 앉아 찬 새벽공기로 폐를 채우고 있었다.
" 오빠. "
수현이가 어느새 다가와 민기의 옆에 앉았다. 민기는 수현이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았다.
" 오빠.. 요즘 오빠 참 이상한 거 알아? "
" .. "
" 오빠.. 예익이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
" .. "
" 뭐라고 말 좀 해봐! "
민기가 계속해서 대답이 없자 답답해진 수현이가 소리를 질렀다. 고요한 새벽의 병원 한
구석에서 수현이의 앙칼진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행히 주차장 근처에는 인적이 없었다.
민기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 그래.. 예익이가 걱정돼서. "
민기의 입가에는 쓴웃음이 가득했다. "넌 알 것 없다."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 한, 수현이는
민기의 웃음 속에서 자신이 무시당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 거짓말! "
" .. 수, 수현아? "
수현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 오빠.. 이상해.. 요즘 상아를 대하는 오빠의 태도가.. 모습이.. 너무 상냥한거.. 오빤 알고
있었어..? "
" .. 수현아.. "
" 오빠.. 오빠, 역시 상아가 좋아진 거야? .. 나 같은 건.. 이제 오빠 맘속엔 없냐구?! "
" .. "
수현이는 이내 울먹이기 시작했다.
" 요 며칠동안.. 상아만 신경 쓰는 오빠 보면서 내가 얼마나 가슴 아팠는지 알기나 해? 흑
흑.. 오빠.. 오빠가 나.. 사랑한다는 것도 다 거짓말이었어..? "
" 수현아.. 그건.. "
민기가 변명을 꺼내기도 전에 이미 수현이의 커다랗고 맑은 눈에서는 눈물이 방울져 흘러
내리고 있었다. 수현이는 벤치에 주저앉아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는 이내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 으아아앙.. "
" .. "
확실히 예익이의 일도 있었지만 지금 민기의 머릿속을 헤집고 있는 또 다른 일은 자신의
고모와 큰삼촌 사이의 관계였다. 게다가 큰삼촌과 큰숙모마저 종적을 감추자 민기는 직감적
으로 집안에 무슨 일이 벌어질 것 만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이었다. 민기는 조금 전, 대기실
안에서 내내 불안에 몸을 떨던 고모를 떠올렸다.
민기는 결심했다.
" 수현이도 이제 곧 알게 될 일을.. 괜찮겠지. "
" 수현아.. "
민기가 자신의 옆에서 흐느끼고 있는 수현이의 등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수현이의 작은
등뒤에서 브래지어의 가느다란 끈이 얇은 면티 위로 느껴졌다.
" 오빠.. 흐흑.. "
수현이는 민기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민기는 잠시동안 아무 말 없이 수현이를 꼭 안아주었
다.
그대로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민기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 수현아.. 오빠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니, 아무 것도 모르겠어. 우리가 서로에
게 느끼고 있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그것이 사랑인지 조차도.. "
" .. "
수현이는 마치 새끼고양이처럼 민기의 품에 안겨 웅크리고 민기의 다음 말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흐느낌은 어느새 그쳤다.
민기가 말을 이었다.
" 우리가 만약 진짜 사랑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너와 나는 사촌지간이잖아.. "
" 하지만.. "
" 하지만 수현아.. "
민기가 수현이의 말을 끊었다.
" 만약, 지금껏 내가 살아오면서.. 내 나름대로 정의한 사랑의 의미가, 만약 그 의미가 진짜
사랑이라면.. 난 지금 이것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 수현아.. 사랑해.. 너만. "
수현이는 민기의 고백에 뺨이 붉어졌다. 행복에 젖어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수현이가 다
시 민기에게 물었다.
" .. 오빠.. 그럼.. 상아랑은? 왜 상아한테만 그렇게 상냥하게.. "
" 수현아.. 지금부터 오빠가 할 말 듣고 놀라지 마.. 사실은.. "
민기는 수현이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찬찬히 들려주었다. 산소에서 있었던 일이며 그 일로
인해 상아가 얼마나 힘들어했었는지도..
이야기가 끝나자 수현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이는 이제서야 지난 며칠간의 민기의
행동과 상아의 안색에 대한 의문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 고모랑 큰 아빠가.. "
수현이는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언뜻 불결하고 비도덕적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으나 자신
과 민기의 일을 되짚어 보자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수현이는 이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한참을 곰곰히 생각하던 수현이가 문득 민기를 불렀다.
" 오빠. "
" 으, 응? "
달을 바라보고 있던 민기가 아직도 자신의 품에 꼭 안겨 있는 수현이의 얼굴을 쳐다보았
다. 수현이의 뽀얀 얼굴이 달빛에 비쳐 더욱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탐스
러운 생머리는 찰랑거리며 민기의 볼을 간지럽혔다. 수현이의 얼굴이 점점 민기의 동공 속
에서 확대되고 있었다. 민기는 얼굴이 후끈 달아오름을 느꼈다.
" 키스해줘. "
수현이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민기는 잠시 망설였으나 천천히 수현이의 작은 입술에 자신
의 입을 포개었다.
" 으음.. "
두사람의 혀가 엉키어 갔다.
이른 새벽의 병원 벤치. 오직 보름달만이 두 사람의 시작을 은은히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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