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 - 2부 3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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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 - 39 개미의 날개 26
유경과 내가 탄 차가 동대문에 다다를 즈음, 손에 쥐어져 있는 핸드폰에서 롤러코스터
의 "힘을 내요 미스터 김"의 멜로디가 나지막히 울려 퍼졌다. 이 멜로디라면 누군지 확
인하지 않아도 뻔하지만, 파블로프의 종소리처럼 습관적으로 고개를 숙여 핸드폰을
바라보았을 때 작은 액정에 뜬 세 글자는 "씨발놈"이었다. 통화버튼을 누르고 핸드폰
을 귀에 가져다 대기가 무섭게 녀석의 구수한 입담이 차안 실내 가득 울려 퍼진다.
"야 이 개새끼야! 얼굴 보기 왜 이리 힘들어? "
"뭐 씨발놈아. 아쉬우면 니가 연락하던가. 요즘 정신없이 바빠. "
"지랄한다. 바쁘지도 않은 놈이 바쁜 척은.. 얘기할 게 있으니까 제이로 와라. "
"지금 경이랑 아버지 만나러 가는 중인데.. "
"아.. "
다른 이유였다면 별 욕을 다 하면서 당장 나오라고 지랄했을 녀석이지만, 나와 아버지
의 사이를 유경이 만큼 잘 아는 녀석이 알겠다는 뜻의 나지막한 소리를 한동안 내질렀
다.
"씨발. 간만에 얼굴이나 보고 이야기 좀 할려고 했더만.. "
"급한 거야? 아버지 뵙고 나면 11시쯤 될 건데 그때라도 갈까? "
"됐어. 옆에 제수씨도 있을 건데 나도 눈치가 있지. 아 맞다. 제수씨! "
굳이 핸즈프리나 스피커폰을 쓰지 않아도 조용한 실내에서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상
진과 나의 욕설 반, 대화 반을 유경은 웃음소리를 애써 삼키며 재미있다는 듯이 구경
하고 있었다. 그러다 큰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자 내 얼굴을 쳐다본다. 운전하느라 전
화를 받을 수 없는 유경을 대신해서 상진에게 대답했다.
"경이 운전 중이야. 그냥 말해. 니 목소리 다 들리니까. "
"제수씨. 결혼식때 내가 축가 불러줄께요. 그렇게 알고 계세요. "
"웃기지 마. 씨발놈아. 노래도 못 부르는 놈이 무슨 축가를 부른다고? "
이 녀석이 그때 내가 부른 축가 때문에 단단히 벼르고 있는 건 알고 있지만, 결코 승낙할
수는 없었다. 확실하게 거절할려고 말할려는 찰라, 유경이 무척 재미있다는 목소리로
내 귓가의 핸드폰에 대고 말을 했다.
"상진씨, 어떤 노래 불러 주실려구요? 설마 또 힘을 내요 미스터 선? 후훗.. "
"제가 그딴 노래 부를 것 같아요? 요즘 연습하는 곡이 있으니까 기대하세요. 결혼식
축가로 딱 어울리는 곡으로 불러드릴게요. "
"킥킥, 그럼 기대하고 있을게요. 연습 많이 하세요~ "
"경아! "
유경을 다시 한번 만류할려고 할 때 상진이가 먼저 자기 할 말만 하고 끊어 버린다.
"결정됐으니까 옆에서 초치지 말고, 내일 일 끝나면 얼굴이나 보자. 새끼야. "
상진의 전화가 끊기고 잠시동안 난 황당한 표정을 짓느라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고,
유경은 웃음을 참느라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상진이가 축가를 부른다면 분명 정상
적인 노래는 절대 아닐 건데, 유경을 다시 한번 말려서라도 녀석이 노래를 부르지 못
하게 하고 싶었다.
"경아. 상진이가 어떤 놈인지 알잖아. "
"상진씨가 왜? 둘도 없는 자기 친구라며? 큭큭.. "
"친구 뒷통수나 치는 개새끼는 아니지만, 평범한 축가는 아닐 거야. 우리 결혼식때 노
래 부를려고 전부터 벼르고 있었다구. "
"큭큭.. 그럼 자기가 상진씨 결혼식때 부른 노래는 평범하고? "
유경과 결혼식 축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어느세 신설동에 도착하고 있었다.
"저기 육교 밑에 세워줘. 금방 갔다 올께. "
유경이 차를 세우자 잽싸게 초밥집으로 뛰어가 형이 쇼핑백 두개에 가득 담아준 도시
락을 들고 다시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안전벨트를 다시 메며 조금전 끊겼던 말을 다
시 이었다.
"내가 부른 노래는 그 녀석한테 딱 어울리는 거고.. "
"어차피 축가는 재미있으라고 부르는 건데 그냥 상진씨 믿고 부르라고 해. 정말 엉
뚱한 노래 부르면 잊지 못할 결혼식도 되고 좋잖아. "
"상진이를 너무 무척 좋게 보는 것 같은데.. "
"자기 친구니까. 그리고 자기도 상진씨한테 한 게 있는데 갚을 기회를 줘야지? "
아버지 공장이 있는 남양주에 도착해 도로 한 켠에 차를 세우고, 늦은 밤에도 불을 밝
힌 채 기계가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는 공장으로 들어섰다. Hobbing Machine이라는
큼직한 기계가 만들어 내는 소음과 기름냄새가 좁은 공장안에 가득차 있다. 어수선한
공장 분위기에 다소 서먹해 하는 유경의 손을 이끌고 아버지가 계실 좁은 사무실로 향
하자 몇 명의 직원들과 공장장님이 아는 척을 하며 다가온다.
"사장님 뵈러 온 거야? "
"안녕하셨어요? 공장장님. 아버지 계시죠? "
"응. 근데 옆에는? "
"비밀이예요. 아버지께 먼저 말씀드려야 하거든요. "
그 말속에 무슨 뜻이 있는지 바로 눈치를 챈 나이 지긋한 공장장님이 환하게 웃으며
축하를 해 주셨다.
"이야. 이 녀석.. 아무튼 축하한다. 어서 들어가 봐. "
"예. 잠시 후에 식사하러 오세요. 먼저 아버지랑 이야기 좀 하고 있을게요. "
"그래. 우선 여기 대충 정리 해 놓고.. 어여 들어가. "
"예. "
시끄러운 공장의 구석에 있는 간이 사무실에 들어서자 아버지께서는 장부를 뒤적거리
며 연신 한숨을 쉬고 계셨다. 멍하니 무언가를 고심하시던 아버지께서 우리가 들어오
는 인기척을 느끼시고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여긴 왠일이냐? 그리고 너도.. "
"안녕하셨어요? 아버님. "
"식사나 같이 할까 해서요. 드릴 말씀도 있구요. 초밥 사왔어요. "
유경과 함께 작은 탁자에 초밥을 꺼내 놓으며 아버지의 눈치를 살펴보니 이마에 가득한
주름살 만큼이나 수심이 가득하셨다.
"그런데 공장에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
"니가 신경쓸 게 아니다. 밖에 있는 직원들도 불러서 함께 들자. 아, 너도 편하게 앉
아. 좀 지저분 하지? "
"아니예요. 아버님. 먼저 앉으세요. 제가 물 가져다 드릴게요. "
공장에서의 고민을 가족들에게 잘 털어 놓지 않는 아버지의 옆에 앉아 외소하고 축 쳐
진 아버지의 어깨를 주물러 드리기 시작했다. 내가 그러는 동안 유경은 사무실 구석에
놓여진 정수기에서 사람 수 만큼의 물잔을 준비하고 있었다.
"말씀해 보세요. 무슨 일인지.. "
"후우.. 납품 대금을 몇 달째 4개월짜리 어음으로 받고 있어서.. 이번 달은 어떻게 넘
어 간다고 하지만, 연말이라 안 그래도 빠듯한데.. "
기어를 생산해 납품하고 있는 아버지의 작은 공장은 인천에 있을 때 부터 대기업의 횡
포에 휘둘리며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공장을 꾸려가고 계셨다. 그러다 제작년에 발주
처에서 생산설비 실사를 나오며 추가 발주를 위해 특정한 장비와 인력을 갖추라는 지
시를 받고 이곳 남양주로 이전을 하셨는데, 그 후 납품에 대한 대금결제로 터무니 없
는 장기 어음을 받으셨던 것이다. 어쩌다 한 번 정도 장기 어음을 받는다면, 해당 어음
을 할인을 받거나 자금을 융통해서 회전시킬 수 있다지만, 계속적으로 대금을 어음으
로 지급한다는 것은 막말로 물건은 받고 돈은 안 준다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어음의
발행시기와 결제시기만큼 납품한 생산업체는 돈이 묶여 버리기 때문이다. 하청 업체
는 아버지 공장이 아니더라도 많으니, 자금 회전이 안 되서 아버지께서 부도가 나더라
도 그들이 신경이나 쓰겠는가.
열심히 일하시고도 제대로 돈을 받지 못해 힘들어 하시는 아버지의 어깨가 한없이 작
아 보이고, 결혼 이야기를 꺼내려 철없이 달려왔던 내 모습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속은 지금 까맣다 못해 재처럼 타들어 가고 계실 텐데, 난 지금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던 걸까. 아버지를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는 유경의 얼굴을 바
라보았다. 비록 말은 안 했지만,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눈치를 챈 그녀가 부
드러운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떡인다. 지금껏 효도 한 번 제대로 못한 못난 아들이
모처럼 아버지께 무언가 해드릴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기로 했다. 모자라는 결혼예산은
오피스텔을 정리해서 메꾸면 대충 될 것 같았다.
"아버지.. "
"이런, 밥 앞에 두고 이 무슨 짓인지. 어서 들자. 밖에도 다 들어오라고 하고.. "
"1억이면 급한 건 막을 수 있을까요? "
"니가 무슨 돈이 있다고. 그리고 그건 네 결혼할 돈 아니냐? "
"우리 결혼은 그렇게 큰 돈이 들지 않아요. 집은 작은 전세 하나 구하면 되는 걸요. "
"예, 아버님. 저희는 걱정마시구요. "
무언가 말을 하고 싶으신데 아버지의 굳게 닫혀 있는 입에서는 아무런 말씀도 나오지
않으셨다. 다만 날 쳐다보시는 눈빛만이 백 마디의 말보다 더 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
을 뿐이다. 잠시 후 아버지의 시선이 유경을 향해 옮겨 가시며 미안함과 고마움을 한
껏 담아 바라보신다. 그동안 한번도 가족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던 아버지
께서 돈 몇 푼에 어깨가 쳐지신 듯 보여 눈가가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힘드신 줄 몰랐어요. 죄송해요. 유경이는 걱정 마세요. 이젠 남도 아닌 걸요.
그렇지? 경아. "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유경을 돌아보며 장난을 치자, 유경이 다가와 아버지의 손을 잡으
며 미소를 짓는다.
"허락은 받은 게냐? "
"예. 아버님. "
"이제 아버지만 허락하시면 하나뿐인 노총각 아들이 딱지 떼는 거죠. 큭큭.. "
"애비가 돼 가지고.. "
그 후에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약
해지신 아버지의 어깨를 힘껏 주물렀다가 일어났다.
"아버지! 아들이 처음으로 효도 한번 하겠다는데.. 다른 분들 모시고 올게요. 경이는
잠시만 기다려. "
잠시 후 좁은 사무실안에서는 아버지와 직원들의 떠들썩한 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려
퍼졌다. 이렇게 좋은 날 술을 안 가지고 왔다고 타박하시는 공장장님과 내가 잠시 사
무실 밖에 나간 사이에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조금전과는 확연히 달리 며느리처
럼 편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아버지와 유경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초밥 중에
장어만 골라 먹었다. 그런 내 모습을 눈치 빠른 직원중에 한 명이 벌써부터 몸 챙기기
시작했다고 놀리는 바람에 한바탕 웃음이 터져나왔다. 나도 먹고 싶어서 먹는 게 아니
라구.
식사를 마치고 아버지와 주말 상견례 이야기를 한 후, 아버지의 배웅을 받으며 공장을
나섰다. 차가 주차되어 있는 도로 한 켠에서 오늘 처음 뵈었을 때 보다 한결 밝아지신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짧은 인사를 나누었다.
"내일 점심때 전화드릴게요. "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는 아버지께서 말없이 내 어깨를 묵직하게 쓰다듬어 주셨다.
서른 넘어서도 철없이 굴던 아들이 오늘은 조금 대견해 보이셨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만 가봐라. 피곤할 건데.. "
"아버님 또 인사드릴게요. "
"그래. 주말에 보자꾸나. "
오피스텔이 있는 상도동으로 향하는 유경의 차안에는 Michael Jackson의 You Are
Not Alone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Everyday I sit and ask myself. 매일 난 앉아서 스스로 되물었어요.
How did love slip away 어떻게 사랑이 사라질 수 있는지.
Something whispers in my ear and says 무언가 내 귀에 다가와 속삭이네요.
That you are not alone 당신은 혼자가 아니예요.
For I am here with you 내가 당신 곁에 있으니까요.
Though you"re far away 당신이 멀리 떠나 있어도
I am here to stay 난 여기에 머물러 있을게요.
You are not alone" 당신은 혼자가 아니예요.
오늘 세삼 가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
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실거라 생각되던 아버지의 힘없는 어깨를 보았을 때의 울컥
하는 기분은 비록 피 한방울 이어지지 않았지만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확인
하게 했다. 그리고 말없이 내 결정을 따라 준 유경에게 고마움과 함께 깊은 애정을 다
시 한번 가지게 한다. 그런 마음을 담아 운전하느라 스틱을 잡고 있는 그녀의 오른손
위에 내 손을 겹쳐 올렸다.
"경아.. "
"응? "
"고마워. 정말.. "
"훗.. 자기가 말했잖아. 이젠 남이 아니라고. 당연한 걸 가지고 고맙다고 하긴.. 이젠 자
기 아버님도 내 아버지인 걸. "
오피스텔에 도착해 문을 닫자 말자 유경이 뜨겁게 안겨왔다. 서로 구두를 어떻게 벗었
는지도 모르게 부둥켜 안고 침실로 향했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은 채로 오직 코로만 거
칠게 숨을 쉬자 서로의 뜨거운 숨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녀의 입안에 고인 침을
한껏 삼킨 후 곱게 정리된 그녀의 눈썹에 혀를 가져다 대며 나지막히 말했다.
"집에 들어가야지. "
"안 가도 돼. "
"그래도 걱정하실 건데.. "
감겨있던 그녀의 눈이 살포시 떠지며 그녀의 두 손이 분주하게 내 옷을 벗기기 시작했
다.
"엄마도 알아. "
"뭐? 아무리 결혼할 사이라지만 딸이 남자 집에 자고 오는 걸 아시는 게 말이 돼? "
"나이 든 딸 가진 엄마는 자기가 생각하는 거랑 달라. 바보야. "
내 옷을 다 벗기고 침대에 누워있는 그녀의 곁에 나도 함께 누웠다. 보라색 쉬폰 재질의
부드러운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며 봉긋한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두근거리는 유
경의 심장소리가 내 머리를 울리기 시작하고, 그녀의 몸에서 가득 퍼져 나오는 짙은 체
향이 내 심장도 함께 울렁거리게 만든다. 따뜻한 봄날 미류나무처럼 곧게 뻗은 그녀의 다
리를 감싼 회색 스타킹을 벗기며 그녀의 몸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오늘 우리 애 만드는 거야? "
"응. 자기가 만들어 줘. "
스스로 속옷을 벗은 그녀의 두 다리가 내 몸을 감싸기 시작하고, 그녀의 한 손이 스스
륵 내려와 길을 잃고 헤메는 내 몸의 일부를 천천히 인도하기 시작했다. 유경의 몸 깊
숙히 파고들 수록 감겨있는 그녀의 눈가에 잡힌 주름이 진하게 자리 잡았다가 서서히
풀리기를 반복한다. 내 얼굴을 손으로 그리듯이 쓰다듬던 그녀가 살포시 눈을 뜨며 부
드럽고 깊은 애정의 입맞춤을 해온다. 그 충만한 그녀의 사랑에 오늘 하루종일 느꼈던
감정까지 실어 단 한마디의 말로 내 모든 것을 대신했다.
"사랑해.. "
"자기야. 나도.. "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그녀의 몸과 마음에 내 사랑을 담아 가기 시작했다.
감기 40편 개미의 날개 27에서 계속됩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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