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야설

감기 - 2부 29장

본문

감기 - 36 개미의 날개 23




11층에 도착해 코트를 벗자 알몸에 목도리만 한듯 목에 감겨진 목도리가 유난하게 느껴졌


다. 조금 지나친 장난에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던 그녀가 차안에서 목도리를 감아줄 때의 표


정이 떠올랐다. 그녀와의 거리는 이 정도의 관계가 적당하다고 혼자만의 선을 그어 본다. 더


이상 내 몸을 감싸고 있는 거미줄을 건드린다면 어디로 흘러갈지 종잡을 수 없을 것 같아 두


려웠다. 혼자만의 착각이라면 좋으련만, 안 좋은 예감이라는 것은 불안할 수록 잘 들어 맞는 


야누스 같은 놈이기에 더욱 그랬다.




감기 기운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한 손으로 감싸고, 그녀의 체향이 스며있는 목도리 냄새를 


맡으며 탕비실에 발걸음을 옮겼다. 열려진 탕비실에서 오전에 눈여겨 보았던 유자차병을 찾


아 종이컵에 넣고 있을 때, 오후의 시작을 알리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몇 명의 여직원들이 


담배 냄새가 너무 난다고 투덜거리며 탕비실에 들어섰다. 




"실내에선 금연이라는 것도 모르나.. "


"그것도 여기서. 아 정말 짜증나! "


"옷에 냄새 다 베이겠어요. 빨리 가요. 언니. "




이제는 연기가 거의 다 빠져나가 거의 냄새도 안 나는데 유난을 떠는 여직원들에게 "여기서 


담배핀 게 나야!"라고 말을 해줄려다가, 그녀들의 다리에 눈길이 가며 입술이 굽게 다물어 


졌다. 한 겨울인데도 펄 샤이닝 스타킹을 신은 한 여직원의 다리가 클로즈 업이 된 카메라처


럼 망막속에 자리잡혀 왔다. 창문을 통해 스며들어온 오후 햇살에 빤짝거리는 펄 스타킹은 


마치 갓 잡아 올린 싱싱하고 늘씬한 은갈치를 보는 듯 군침을 돌게 만들었다. 밝은 스카이 


블루로 곱게 칠해진 그녀의 발톱에서 부터 천천히 쓰다듬으며 탄력넘치는 허벅지까지 올라


간다면 그 느낌이 기가막힐 텐데라는 상상을 하다 고개를 흔들며 머리속에 떠올랐던 영상을 


애써 지웠다. 




더이상의 상상은 "신입 지원팀장이 사실은 변태래!"라는 악소문을 퍼트리는 원흉이 될 것 같


아 불안했다. 커밍 아웃은 이곳에 자리를 잡은 몇 년 정도 후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때


는 마음 놓고 점수를 메겨주마 라는 미소를 지으며 종이컵에 뜨거운 물을 붓고 사무실로 향


해 걸어갔다. 두 잔의 종이컵과 벗은 코트를 들고 조심스럽게 사무실로 들어가자, 한 명의 


여직원이 고개를 삐쭉 내밀었다가 숨어들며 소리치는 것을 복도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왔다! 왔어! "




내가 너희들보다 나이도 많은데 오셨다도 아니고 왔다냐? 어릴적 고등학생때 담임 선생님


이 오면 반 녀석들 중 한 명이 "온다!"라고 소리지르는 듯한 말에 나도 모르게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그 소리의 흔적을 쫒아 사무실에 들어가자 지금까지 무슨 대화를 하고 있었는지 여


직원들이 날 바라보며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웃기 시작했다. 자기들끼리 웃으며 떠들고 있는 


미운 오리새끼들 사이에는 조금전의 감정이 아직 풀리지 않은 듯 째려보고 있는 백조가 함


께 하고 있었다. 뭔가 화를 내고 싶은데 아직 입밖으로 꺼내지 못 하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


가서 양손에 들고 있던 종이컵 중에 하나를 내밀었다. 그녀의 반응은 역시나 뻔히 알면서도 


톡톡 쏘아붙이며 물어왔다. 




"뭐예요? "


"이거 마셔. 따뜻해. "


"팀장님, 저희는요? "


"언니만 너무 챙기시는 거 아니예요! "




그녀의 변화와 함께 어느세 날 인정하고 부르기 시작한 여직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정식 명령서가 곧 나올 거지만, 다음주부터 대리 승진이 확정됐어요. 미리 축하한다는 의미


라고 할까요. 승진 축하해요. 김 대리. "




향긋한 향을 가득 풍기고 있는 유자차를 건내며 한 내 말에 미운 오리새끼들이 일제히 백조


에게 걸어가 한 마디씩의 축하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인사부 직원들에게 미리 언질을 받은 


사람은 그녀와 그것을 전해들은 나 밖에 없는 듯 보였다. 




"어머, 언니 축하해요. "


"언니 축하해요. 드디어 우리 부서도 대리가 생기네요. "


"이제 김 대리님이네요. 히힛! 축하드려요. 김 대리님! "




그녀들의 축하가 싫지 않은 듯 양쪽 이마쪽으로 힘껏 올라가 있던 그녀의 눈썹이 완만한 곡


선을 그리며 내려오기 시작했다. 옅은 원색의 립스틱이 곱게 발라져 있는 그녀의 입술이 오


른쪽으로 치우치며, 고양이 같은 눈빛이 날 향해 쏘아져 왔다. 




"정말 축하해 줄려면 이딴 거 말고 술사주세요! "




"호오, 먼저 분위기를 띄워주는 거야?"라는 흐믓한 생각으로 그녀를 쳐다보다 축하하기에 


바뜬 여직원들을 둘러 보았다.




"그럼 조만간 제가 회식을 추진하겠습니다. 처음으로 하는 부서회식이니 경비의 한계없이 


갈 때까지 가보도록 하지요. "


"와아~ "


"좋아요! "




그 말에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이는 백조에게 작은 끄덕임을 보여준 후 내 자리로 돌아가는


데 입술을 깨물며 무언가 생각하고 있는 듯한 한혜진의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녀를 


볼 때 마다 카르네아데스가 떠올라 기분이 더러워지는 느낌이다. 자신에게는 너그러웠던 이


성주의자이며 타인을 철저하게 사물로 객관화시켜 바라 보았던 카르네아데스가 던진 널판


지를 움켜쥐고 있는 한혜진이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쳐 왔다. 




침몰하고 있는 디자인 지원팀이라는 배에서 한 조각의 나무판을 몰래 숨기고 있는 그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단 한마디도 없지만, 내가 이 배의 새로운 선장이 된 이상 혼자 살아남기 


위해 모두의 죽음을 방관하는 것만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 그녀가 감성을 무시한 카르네아


데스의 추종자라면, 이성보다 감성을 의지하는 나로썬 그것과 똑같이 되갚아 주는 것이 최


선이다. 그 방법으로 차가운 바닷물이 끝없이 스며들어 오는 배의 구멍을 그녀의 몸뚱아리


로 틀어막아 이 풍랑을 헤쳐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재물삼아 거친 파도를 뚫어, 깊고 


어두운 바다속에 숨어 내가 물에 빠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사악하고 영리한 모비딕을 사냥


하는 피커드호의 선장 에이헤브가 되겠다. 




입술을 굳게 다물고 한혜진과 눈을 마주치고 있는 내 목을 부드럽게 잡아 당기는 손길을 느


낀 것은, 나만큼 입술을 힘껏 깨물고 내 눈을 뚫을 듯이 쳐다보던 한혜진이 몸을 돌려 자신


의 자리로 돌아갈 때였다. 힘주어 물고 있는 어금니탓에 턱에 경련이 날 지경이었다. 그만큼 


난 그녀에게 주체하기 힘든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자신 혼자 살기 위해 팀원의 피땀어린 기


획서를 훔쳐 달아났던 저주받을 놈과 겹쳐졌기에 더욱 그랬다. 그러나 이번에는 결코 놓칠 


수 없는 사냥감이 눈 앞에 있었다. 파티션 넘어로 몸을 숨겼지만 아직도 그녀의 자취를 뚫어


져라 쳐다보고 있는 내 시선속에 김유진이 고개를 내밀었다. 




"목도리 주셔야죠. 설마 제가 드린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 




부드럽게 웃고 있는 그녀의 눈을 보게되자 뜨거울 정도로 치밀어 올랐던 분노가 빠르게 식


어가기 시작했다. 더러운 도시를 항해하는 피커드호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일등항해사


가 지금 내 눈앞에서 사냥전의 긴장감을 애써 풀어주고 있었다. 




"후우.. "




깊은 한숨으로 지금 몸안에 남아 있는 감정의 찌꺼기를 뱉어낸 후 그녀에게 살짝 웃음을 지


어 보였다. 고맙다는 단순한 말로 지금을 대신하기에는 오늘 하루 종일 그녀가 챙겨준 것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백조와 하이에나의 사이가 묘하게 보였는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던 미운 오리새끼들이 하나둘씩 나름의 말을 던지기 시작했다. 




"어머, 팀장님이랑 너무 가까운 거 아니예요. 킥킥. "


"이러다 국수를.. "


"이게! "




벌써 앙칼진 고양이로 변신한 백조의 짧은 외침에 미운 오리새끼들의 짖궂은 웃음소리가 흘


러나오다 곧 업무에 집중하며 만들어지는 소음이 사무실을 채우기 시작했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김유진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본 후 나 역시 내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리고 손에 


쥐고 있던 이미 식어 버린 유자차를 입안에 흘려 넣었다. 온기는 이미 잃어버린 채였지만, 


달콤하고 향긋한 향만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유자차를 마시자 조금전까지 미친개처럼 뛰


던 심장이 점점 잦아드는 것이 느껴진다. 그때 켜져있던 모니터의 한 쪽 구석이 일정한 빠르


기로 반짝거리는 것이 보였다. 사내망에 연결된 메신져의 메세지 도착 알림이었다. 마우스


를 가져가 창을 열어보자 백조가 보낸 몇 자의 텍스트가 눈에 들어왔다. 




[변태 팀장님. 기분은 좀 괜찮으세요? ㅋㅋㅋ ]


[챙겨줘서 고마워.]


[뭘요. 그런데 걔 표정 보니까 뭔가 할 모양이던데요.]


[나도 그런 느낌이야. 회식을 앞당기자.]


[언제로요? 저야 상관은 없지만.. 그럴 만한 장소를 찾는 것도 쉽지 않을 건데요?]


[장소는 생각해 둔 곳이 있어. 언제가 좋을 거 같아?]


[술을 많이 먹을 텐데.. 아무래도 금요일이 좋겠죠? 다음날 쉴 수 있으니까요.]




책상위 한 켠에 놓여진 달력을 보며 한혜진이 기획실장의 도움으로 내 함정을 벗어나기 전


에 잡을 수 있는 날짜를 고르기 시작했다. 




[원래 다음주 수요일 쯤에 할려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번 10일 어때?]


[좋아요. 그럼 애들한테는 그날 회식한다고 말해 놓을게요.]


[표안나게 조금씩 입단속 시키는 거 잊지말고. ]


[그건 어렵지 않은데, 이번 일 끝나고 애들 꼭 챙겨주세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자 피티션 넘어로 머리꼭지만 보였지만, 텍스트에 가득 묻어있는 


동료에 대한 마음 씀씀이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미 오리가 오리새끼들을 볼


보듯이 품안에 있는 여직원들을 생각하는 그녀의 마음에 짧은 글자로 대답했다. 




[너한테 한 말은 안 잊어.]


[알아요. ^^* ]




그녀의 이모티콘이 약간 부담스러웠지만, 여직원들이 흔히 사용하는 그것이라 단순하게 치


부하기로 했다. 한번 색안경을 쓰고 바라보기 시작하면 세상은 한가지 색으로만 존재할 뿐


이고, 혼자만의 착각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기 때문이다. 시계를 바라보니 어느세 1시를 훌


쩍 지나 반이 넘어가고 있었다. 밤에 일하는 사람이라면 지금쯤 자고 있을 수도 있을 건데 


하는 걱정이 좀 들었지만, 생각이 났을 때 바로 행동하는 것은 편집증 환자에겐 몸에서 떼어


낼 수 없는 집착중에 하나이다. 책상 한 켠에 던져놓은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으며 그녀


에게 메신져를 보냈다.




[나 잠시 회식 예약때문에 전화 좀 하고 올께. 혹시 나 찾는 전화오면 부탁해.]


[설마 제가 또 그럴까 봐요? 걱정마세요. ㅋㅋㅋㅋ]




그녀의 대답을 확인한 후 모니터를 끌려고 할 때 다시 메신져 창이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팀장님..] 


[응? ]


[아직도 제 이름을 안 불러주시네요. 예?]




그녀에게 어떤 대답을 할까 하다가 메신져를 로그아웃시켰다. 대답이 곤란할 때는 피하는 


것이 늘 상책이었다. 적어도 실수를 해서 나중에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남길 일은 없으니


까. 그런 내 행동에 파티션 넘어로 그녀의 웃음소리가 크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깔깔깔.. "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사무실을 빠져나와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지하 2층에서 담배를 


펴야 했지만 그곳까지 내려가기가 너무 귀찮았다. 그리고 지끈거리며 아픈 머리와 나른하게 


둔해지는 몸놀림이 그런 마음을 더욱 잡아끌고 있었다. 명함지갑에서 홍보부장과의 술자리


에서 받았던 명함을 꺼내 그곳에 적힌대로 번호를 하나씩 눌렀다. 




모든 번호를 다 누른 후 다시 한번 확인하고 통화버튼을 누르자 수 초의 시간이 지나고 연결


음과 함께 상당히 밝은 곡이 핸드폰을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노래는 오래전 캐나다


에 살 때 이 신비한 가사의 뜻이 무엇인지 한참 생각하게 만들었던 Eye In The Sky 이었다. 


뭔가 철학적인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나름 해석하고 있던 나에게, 함께 일하던 프랑


스계 캐나다인 녀석이 가르쳐 준 가사의 진실은 차라리 몰랐으면 하는 허탈함이었다. 가끔


은 모르는 것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보여준다던 녀석의 장난섞인 말이 함께 생각났다. 




"I am the eye in the sky            난 하늘에 떠 있는 눈이예요.


Looking at you                당신을 바라보면


I can read your mind             당신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요.


I am the maker of rules dealing with fools   바보들을 다스리는 규칙을 만들어요.


I can cheat you blind and           당신의 눈을 속일 수 있고


I don"t need to see any more         더이상 당신을 볼 필요도 없어요.


To know that I can read your mind"      이제 난 당신의 마음을 읽을 수 있으니까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웃으며 노래를 따라부르고 있을 때 핸드폰을 통해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


"남해무역 홍보부 선우영입니다."


"안녕하세요? 선 팀장님." 




남자들끼리 룸을 빌릴 것이라면 이런 고민따위를 하지도 않을테지만, 여직원들만 모아서 데


려 갈 거라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런 내 마음을 느꼈는지 그녀가 


먼저 말을 꺼내왔다.




"뭔가 따로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것 같은데 밖에서 만나시겠어요? 제가 이대앞에 갈 일이 있


거든요. 회사에서 가까우실 건데 퇴근하시고 어떠세요? "




그녀의 반가운 제안에 을지2가에서 이대가 있는 신촌까지의 동선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


다. 퇴근시간이면 갑자기 쏟아져 나온 차량들로 도로가 분주할 시간. 버스보다는 지하철 2


호선을 타고 이대역에서 내려 걸어가는 것이 빠를 것이다. 




"어디에서 뵐까요? "


"하나은행 신촌지점이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


"국민은행 옆에 있는 곳 말씀이군요. "


"예. 하나은행 골목으로 들어오시다 보면 Crepe De Chine이라는 옷가게를 찾기 쉬울 거예


요. 그곳에서 뵐께요. 추우시니까 도착하시면 바로 들어오세요. 5시 이후에 그곳에서 기다


릴게요. 후훗. "


"그럼 거기서 뵙지요. "




가식적인 그녀의 웃음과 함께 전화를 끊고 한 개피의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남자를 잘 안다는 


듯 자신감 넘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 오래전의 장미향수가 떠올랐다. 세상의 모든 


남자들을 자신의 가녀린 두 다리에 가두고 군림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던 암캐들의 여왕이 


생각났다. 무지개 연못에서 만난 그녀와 나의 게임은, 언제든 그만둘 수 있는 단순한 장난에


서 시간이 갈수록 양쪽 모두의 패배를 강요하는 레밍의 딜레마로 바뀌어 갔다. 무엇을 위해 


달리는 것인지, 그리고 우리들의 눈앞에 무엇이 기다리는 것인지 구분하지도 못 한채 우리


는 서로에게 단 한가지만 요구하며 달리고 또 달렸다. 그것만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을 증


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듯이 더렵혀진 육체에 메달려 숨막히는 경주를 끝낸 후 정


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난 후였다. 고요한 안식을 맞이한 레밍과 달리, 난 죽음


보다 더 한 영혼의 부서짐을 겪어야 했고, 그녀는 정글을 떠나버렸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경기가 끝난 후 그녀와 나의 행동은 각기 달랐다. 그 시간에 대한 혐오


와 후회로 모든 기억을 하나씩 지워가는 나와 달리, 그녀는 이 잔인한 경주를 아직 끝내지 


않고 있었다. 결코 돌아가서는 안 되는 누리콤으로 그녀가 제발로 걸어갔다는 것은 이 어리


석은 질주를 하기 전 그녀가 내게 한 말, "약속은 깨라고 있는 거고, 룰은 어기라고 있다"는 


말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한 방법일 것이다. 




어느 한 쪽이 거부할 때 까지 우리의 관계가 지속될 거라는 그녀 자신이 한 약속을 스스로 


어기는 것으로 시작된 레밍의 질주는, 절대 남자를 사랑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자신의 룰을 


깨는 것으로 모든 것이 송두리채 어긋나고 말았다. 단 한 번도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잃어 


본 적이 없는 그녀이기에, 지금 그녀가 느끼고 있을 감정은 자신을 거부한 장난감의 존재를 


이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것으로 그 누구도 소유하지 못 하게 하는 지독한 불쾌감과 분노일 


것이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남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그 유아기적 심리가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지 잘 아는 나로썬 언젠가 사라진 암표범이 나타날 그때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녀가 웅크리고 몸을 숨긴 곳에서 모든 준비를 다 마치고 다시 사냥을 하기 위해 모습을 드


러내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를 생각해 보았다. 길어야 5년, 어쩌면 3년안에 그녀


는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개미지옥을 만들어 날개가 사라진 내 몸뚱아리를 노리고 다가 올 


것이 분명했다. 시간이 없었다. 그 치명적인 첫 번째 공격을 피하기 위해 내가 준비한 새로


운 두 날개는 김유진과 심유경, 그녀들이었다. 이제 서서히 백조의 우아한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한 김 대리를 잠시 떠올려 보다, 마지막 한 장의 날개에게 전화를 걸었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누를 수 있는 단축 버튼 1번을 오랫동안 누르고 있자 그녀의 컬러링이 부드럽게 귀


로 파고들어 왔다. 




"But when I dream, I dream of you.   (하지만 꿈을 꿀때면, 난 당신을 꿈꿔요.)


Maybe someday you will come true." (언젠가 당신은 현실이 되어 나타나겠죠.) 




"몸은 어때? 괜찮아? "




통화가 연결되자 말자 바로 내 몸부터 걱정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암표범에 대한 걱정으로 


차갑게 식어있는 심장에 뜨거운 온기가 스며들었다. 내 영혼이 어두운 터널속에서 길을 잃


고 방황하지 않게 밝은 빛을 보여주는 그녀가 곁에 있기에, 어제와 오늘만 존재했던 나에게 


내일이라는 것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자고 났더니 많이 좋아졌어. 경이는 밥 많이 먹었고? "


"갈치 조림이 나왔는데 맛 없더라. 킥킥.. "


"큭큭.. 그럼 내가 해줄까? "


"어머, 자기는 그것도 할 줄 알아? 이야~ 다시 봤는데! "




그녀와 몇 가지를 장난을 치며, 담배 한 개피를 또 꺼내 물었다. 주머니에서 낡고 오래된 지


포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인 후 차가운 공기가 가득 차 있는 복도에 연기를 채워 넣었다. 




"오늘 저녁에 약속있어? "


"없는데. 왜? 나 데리고 어디 가게? "


"오늘 소개해 줄 분이 계신데.. 저녁에 만나서 같이 가고 싶어서. 시간되지? "


"자기가 가자면 상관없는데. 누군데? "


"비밀. 나중에 만나뵈면 알게 될 거야. "


"자기가 조심스럽게 말하는 거 보니까 대충 알겠는데? 히힛.. "


"큭큭.. 나 퇴근하고 이대에 갈 일이 있거든. 일 마치면 신촌으로 와줘. "




내 일기장을 다 읽어 본 그녀였기에 오늘 누구를 만나러 가는지 한번에 눈치를 챈 그녀가 수


화기를 두 손으로 감싸고 말을 하는지, 나지막한 숨소리와 함께 가느다란 목소리가 핸드폰


에 가득 울리며 들려왔다. 




"자기야 이쁘게 해서 갈께. 킥킥.. "


"우리 아버지를 꼬실려고! 안돼. 큭큭.. "


"왜 안돼~ 킥킥. 그럼 일 마치고 봐. 가면서 전화할께. "




사무실로 돌아와 밀린 업무에 집중하고 있으니 시간이 얼마나 흐른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눈 앞에 펼쳐져 있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무의식적으로 마우스 커서를 가져가서 클릭하고, 


확인한 후 저장하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다람쥐만 있을 뿐이었다. 다 마시고 말라버린 종이


컵안을 바라보며 점심때 마셨던 향긋한 유자차가 그립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모니터의 


구석이 빤짝거리며 메세지 도착을 알려왔다.




[변태 팀장님! ]


[변태라니. 이거 왜 이래? 순수한 도시 남자가 바로 나야! -_-; ]


[ㅋㅋㅋㅋㅋㅋㅋㅋ ]




단 한개의 초성만이 메신져 창에 가득하게 전해져 오며, 동시에 파티션 넘어에 한 여직원의 


웃음소리가 사무실을 채우기 시작했다. 




[웃지마. 정들어. -_-; ]


[ㅋㅋㅋㅋ 아 미치겠다. 그만 좀 웃기세요! 전직이 개그맨이예요? ]


[근데 왜?]


[시계를 보세요. 저 지금 배고파요! ㅠ_ㅠ;;]




그녀의 말에 모니터 오른쪽 구석의 컴퓨터 시계를 그제서야 확인했다. 벌써 시간이 6시를 


막 넘어서고 있었다. 




[설마 오늘도 야근인가요? ]




창밖의 도심 풍경은 겨울이라 빨리 떨어지는 해거름이 주는 그림자속에 묻혀가고, 하나 둘


씩 밝혀지는 네온사인들이 밤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작업 진도를 볼 때 굳이 


야근을 하지 않아도 금요일까지 모든 과정을 끝마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두 눈


만 파티션 넘어로 내밀로 내 눈치를 살피고 있는 백조에게 답장 메세지를 보냈다.




[그만하고 집에 가자.]


[정말?]


[나 믿는다고 안 했어? -_-; ] 


[장난일 줄 알았죠. 변태가 소심하기는.. ㅋㅋ] 




점점 철부지 여동생을 닮아가는 그녀의 행동에 잠시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지금 퇴근해서 


신촌에 가면 7시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계산을 하며, 지금까지 확인하던 파일들을 


모두 저장한 후 자리에 일어나 여직원들을 바라보았다. 




"오늘 업무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피곤하더라도 내일은 조금 일찍 출근해서 못 다한 작


업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시고, 지금 작업은 모두 저장한 후 퇴근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팀장님! "




가장 큰 소리로 내 말에 대답을 한 백조의 말에 여러 여직원들이 한마디씩 인사를 던지며 아


주 빠른 손놀림으로 퇴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수고 많으셨어요."


"내일 뵙겠습니다. 팀장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라지기 시작한 미운 오리새끼들을 바라보다 컴퓨터를 끄고 코트와 


가방을 챙겨서 사무실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때 두터운 겨자색 목도리로 목을 칭칭 감은 


백조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점심때의 일이 떠올라 한 팔을 굽혀 팔장을 낄 수 있


게 내밀자, 내 구두를 지그시 밟고 지나가며 한 마디를 내뱉고 복도를 빠져나간다. 




"아프잖아! "


"또 그 말 해보시죠? 킥킥.. "




엘리베이터로를 향해 나란히 걸어가며 조금전 내 발을 일부러 밟았던 그녀에게 복수를 하기 


시작했다. 




"남자친구가 아무 말도 안 하든? 이상한데. 취향이 독특한가? "


"참네. 모든 남자가 팀장님 같은 줄 아세요? "


"결혼하고 나서 말할려고 참고 있나보네. 큭큭.. "




내 말에 다른 쪽 구두를 또 밟은 그녀가 엘리베이터의 내려가는 버튼을 누른 후 혀를 살짝 


내민다. 




"아야! 자꾸 그럴래? "


"맞을 짓을 자꾸 하니까 그런거죠. "




그때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다른 부서 직원들과 함께 타고 내려가며 그녀가 고개를 돌려 말


을 했다.




"팀장님 집이 어디신데요? 태워드릴까요?"


"너네 집 군자잖아? 지금 이대에 가야하는데 반대 방향이야. 마음만 받을께. "


"아니, 변태가 이대엔 왜요! "


"야! "


"아, 실수. 킥킥.. "




내가 변태라는 것을 새로 입사한 회사에는 극구 숨기고 싶었건만, 그걸 다른 부서직원들이 


있는 곳에서 큰소리로 그녀가 떠들자, 안 들은 척 하면서 몇 명의 여직원들이 흘끔 흘끔 내 


얼굴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와 거리를 둘려고 조금씩 물러나는 모습이 보였다. 인


상을 잔뜩 쓰며 그녀의 허리를 손가락을 쿡쿡 찌르며 알아서 하라는 식의 메세지를 보내자 


그녀가 혀를 다시 내밀더니 나름의 수습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한번 총에 맞


아 쓰러진 내게 또 다시 가하는 확인 사살이었다. 




"팀장님은 변태가 아니예요. 절대 오해하지 마세요. "




"강한 부정 두 번이면 긍정이잖아!" 라고 그녀에게 쏘아 붙일려는데 이미 내 주위에는 혼자 


춤이라도 출 수 있을 정도의 넓직한 공간이 좁은 엘리베이터에 마련된 이후였다. "앞으로 회


사 생활에 지장있으면 다 니 책임이야!"라는 뜻의 눈빛을 그녀에게 보내자, 거의 감길 정도


로 눈웃음을 짓고 있는 그녀의 따뜻한 손이 뒤로 돌아와 내 오른손에 살며시 감싸왔다. 나만


큼 장난을 좋아하고, 주변시야가 무척 넓어 내가 보지 못 하는 곳도 볼 수 있는 백조의 손길


에 그녀의 손가락 하나를 힘껏 꼬집은 후 1층에 도착한 알림소리와 함께 문쪽으로 움직였


다. 몇 명의 여직원을 남기고 지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반쯤 닫혀갈 무렵 힘차게 


손을 흔드는 그녀가 내게 소리쳤다. 




"변태야 잘가! "


"깔깔깔~ 호호호, 킥킥.. " 




엘리베이터에 남아 있는 직원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 1층에는 그런 날 불쌍하게 


바라보는 몇 명의 남자직원들의 안쓰러운 눈길과 내가 어떻게 하지도 않았는데 나와 거리를 


두고 서둘러 건물을 빠져나가는 여직원들의 상반된 모습속에 남아 있었다. 그녀의 아킬레스


를 잘못 건드려 회사에서 신고식을 톡톡히 하게 된 것 같았다. 벌써 내 머릿속에는 여직원 


휴게실에서 사내 여직원들이 "신입 지원팀장이 변태가 맞데!"라는 루머가 급속히 퍼지고 있는 


착각이 그려지듯 보여졌다. 




기분 나쁘지만은 않은 그녀의 장난에 한 개피의 담배를 꺼내 물고 건물밖으로 빠져 나왔다. 


한겨울의 추위를 여실히 보여주는 매서운 바람이 트렌치 코트의 깃사이로 스며들어와 온 


몸에 소름이 돋게 하고 느슨했던 근육을 잔뜩 긴장시켰다. 유령같은 가로등이 밝히고 있는 


거리를 따라 무작정 걷고 있는 듯한 다른 도시인들과 함께 나도 그 흐름에 몸을 맡기고 흘러


가기 시작했다. 오래된 지포가 피워내는 불꽃이 세찬 겨울 바람에 사그라들 듯 춤을 추면서 


어렵게 담배에 불을 붙여준다. 내가 걸어가는 발걸음 뒤로 하얀 담배 연기가 자취마냥 서렸


다가 사라져 갔다. 그 연기와 함께 그녀에게 편지를 써볼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내 


연락과 함께 되새겨질 그녀의 상처가 결코 작지 않기에 그것이 너무나 두려웠다. 그저 이렇


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녀가 건강하기를 바라는 것 뿐, 약속을 지키지 않은 자가 할 수 있


는 행동이란 이런 때늦은 후회밖에 없었다. 그것이 지나간 과거를 바꿀 수 없는 부질없는 것


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감기 37편 개미의 날개 24 에피소드로 이어집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소중한 리플과 추천이 성실한 연재를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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