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범의 변명 - 19부
본문
점심시간이 거의 다 될 무렵 휴대폰에 문자가 떴다.
(오빠 수영이야 잠깐 얘기 좀 하자)
그 동안 잘 참아오다 수영이가 드디어 한계에 온 모양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 피해서 될 일이 아니라고 판단해 문자를 보냈다.
(점심시간에 ‘미소랑’ 에서 보자)
(알았어)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니 수영이 먼저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맞은 편에 앉으며 내가 물었다.
“뭐 먹을래?”
“돈가스.”
“여기요.”
나는 종업원에게 돈가스와 생선가스를 시키고 수영에게 말했다.
“잘 지냈니?”
“아니. 잘 못 지냈어.”
수영이 부루퉁한 얼굴로 말한다.
“하하. 그래?”
나는 할 말이 별로 없어 입을 닫았다.
잠시 후 음식이 나오자 나는 먹는 일에 열중했다.
수영도 화는 나 있을지 몰라도 식사는 아주 맛있게 하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내가 자판기에서 커피를 두 개 뽑아 수영과 내 앞에 놓았다.
커피를 다 마시고 나자 수영이 내게 말했다.
“저번에 인혜 언니에게 오빠에 관한 말 다 들었어.”
“응.”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수영이 나를 똑바로 보며 묻는다.
“오빤 이제 어떡할 거야?”
“어떡하다니. 뭘?”
“인혜 언닐 택할 거야, 아니면 나야?”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너도 아니고 인혜도 아니다. 난 자유롭고 싶을 뿐이야.’
수영은 내가 전에 찌질하게 살 때도 사귀고 싶거나 그런 마음이 드는 아이는 아니었고 인혜는 결혼상대로 내가 줄기차게 꼬셨던 상대다.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당연히 인혜를 선택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누구에게도 관심을 두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수영은 진영의 언니이다. 내 속마음을 표현했다간 큰 일 난다.
나는 일부러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후우. 수영아. 난 누굴 선택하고 그런 생각 한 번도 안 해봤어. 옛날에 내가 암 선고를 받았을 땐 그저 세상이 원망스럽고 내 인생이 가여워서 그냥 기분 내키는 대로 일을 저질렀는데... 내가 죽지 않고 건강한 몸이 되리라곤 그때 당시 생각도 못했던 일이거든.”
“오빠. 한 가지만 물을게.”
“그래.”
“인혜 언니가 그러더라구? 자긴 오빠한테 첫 순결을 바쳤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야?”
“......!”
내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야.”
“......!”
이번엔 수영이 입을 다문다.
그때 내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나 민정이 언니 순정인데. 철수씨 맞죠?”
“예. 그런데요.”
순정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나는 아주 불길한 느낌이 들어 귀를 수화기에 바짝 붙였다.
“철수씨. 민정이가 일 하다가 쓰러졌어. 지금 병원 응급실에 있는데.”
“뭐라구요. 누나가 쓰러져요? 어디예요 거기가?”
내가 다급하게 묻자 순정이 나와는 정 반대로 차분하게 말한다.
“OO병원인데, 지금 민정이 의식이 없어요. 와도 만날 수가 없으니까 나중에 퇴근하고 차분하게 들러요.”
“아, 알았습니다. 퇴근하고 가겠습니다. 그런데 별 일은 아닌 거죠? 생명에 위험이 있거나 그런 거 아니죠?”
내가 빠르게 질문을 해대자 순정이 대답을 해 주는데 수화기 저편에서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의사 말이 생명에는 지장이 없대요. 지금 당장 어찌 되는 것은 아니니까 걱정 말고. 하지만 상황이 썩 좋지만은 않은가 봐요.”
“알았습니다. 될 수 있으면 빨리 가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휴대폰을 닫자 곁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수영이 묻는다.
“오빠한테 누나가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영에게 뭐라 말을 하는 것이 좋을지 궁리했다. 그러다 좋은 생각이 떠올라 그녀에게 말했다.
“전에 몰랐는데 나한테 친척 누나가 있었어.”
수영이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한다.
“친 누나?”
“아니. 친 누나는 아니지만 친 누나보다 더 가깝고 친한 친척이야.”
“어떻게 누날 찾았어?”
“어찌 하다 보니까 찾게 됐다. 그 사정을 얘기하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니까 그럴 수는 없고. 하여간 지금 세상에서 내게 남아 있는 유일한 가족이 바로 그 누나야. 그런데 그 누나가 방금 쓰러져 응급실에 있다고 연락이 왔다.”
“어쩌다가 그랬대?”
“원래 지병이 있어. 말기암 환자인데 내가 그 동안 쭉 돌보면서 큰 이상은 없었는데 오늘 갑자기 쓰러졌다는구나.”
“그럼 그 동안 오빠 퇴근하면 계속 그 누나에게 갔던 거야?”
“응.”
수영이 내가 그 동안 인혜를 따로 만난 것이 아니란 걸 알자 안심을 하는 눈치다.
“수영아. 나 앞으로도 계속 그 누날 돌봐야 하거든. 그러니까 지금 내 형편은 수영이 너나 인혜를 두고 무슨 사랑놀음할 처지가 아냐. 알겠니?”
수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응. 알았어.”
그렇게 수영의 일을 일단 마무리 한 뒤 나는 시청으로 돌아갔다.
퇴근시간이 되자 나는 바로 시청을 나와 민정이 있는 병원으로 갔다.
내가 도착했을 때 민정은 이미 한 고비를 넘기고 일인실에 입원해 있었다.
똑똑-
병실 문을 두드린 뒤 바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
민정이 코에 튜브 같은 것을 꼽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하지만 의식은 있는지 두 눈을 뜨고 있었고 나를 보더니 희미하게 미소까지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철수씨.”
순정이 나를 반갑게 맞아들이자 나는 그녀에게 먼저 인사를 한 뒤 민정에게 다가갔다.
“누나!”
내가 의자에 앉으며 민정의 손을 잡자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더 크게 걸렸다.
“의사가 아직 말을 하면 안 된다고. 절대안정을 취해야 한다니까 말은 시키지 말아요.”
“예.”
나는 민정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쥐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단 이틀 만에 놀라울 정도로 수척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순간, 내 손에 잡힌 민정의 손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끼고 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
희미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눈이 마치 ‘난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 말아.’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민정의 손을 잡고 나는 그녀가 잠들 때까지 곁에 있었다.
“철수씨. 나 좀 봐요.”
순정이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부르자 나는 민정이 잠든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순정의 뒤를 따라 병실 밖으로 나갔다.
복도에 비치된 의자에 앉아 순정이 내게 말을 꺼냈다.
“민정이 상태가 많이 안 좋아요.”
“......!”
나는 할 말이 없어 그녀의 말에 귀만 기울였다.
“오늘 아침 11시쯤 사무실에서 일하다 피를 토하고 쓰러졌대요. 나도 집에 있다가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온 건데, 의사가 응급조치를 하고 자세하게 검사를 했는데 아무래도 폐 쪽에 암세포가 이미 번질 대로 번져서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고......”
순정이 끝내 말을 잇지 못하자 내가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훔치고 물었다.
“수술도 안 된 대요?”
순정이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상태로 수술을 하면 오히려 수술 도중에 사망할 확률이 더 높다고 의사가 절대 못하게 하더라구요.”
“으음.”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으며 괴로운 신음소릴 토해냈다.
“왜 이렇게 갑자기...... 악화될 수가 있죠?”
“나도 의사에게 그렇게 물었어요. 그랬더니 자기들도 이런 경우는 어쩔 수가 없다고 그러네요. 환자 몸에서 반응하는 거라 도저히 막을 수가 없대요.”
“그러면 이대로 회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나도 잘 모르겠어요. 의사도 그냥 기다려 보자고만 하고. 어쩔 수가 없죠. 달리 할 일이 없으니까 기다리는 수밖에.”
“후우!”
내가 긴 한숨을 쉬자 순정이 내게 물었다.
“식사는 했어요?”
“아니오. 아직.”
“난 먹었는데. 철수씨 얼른 가서 먹고 와요. 아니. 그냥 집에 가서 쉬고 내일 오던지.”
“아닙니다. 그냥 밖에서 간단하게 먹고 다시 들어오겠습니다. 내가 오면 누님은 그냥 들어가서 쉬세요. 어차피 오늘 하루로 끝날 일이 아닌 거 같은데 누님도 몸 관리를 잘 하셔야죠.”
“그럴 게요. 일단 식사부터 하고 와요.”
“예.”
병원 밖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들어온 나는 순정을 집으로 보내고 밤새워 민정을 간호했다.
민정은 몇 번을 깨다 자다 반복했고 그때마다 나는 그녀의 몸을 가볍게 주무르며 부드러운 말로 그녀를 위로했다.
그렇게 지극 정성을 쏟은 때문인지 날이 밝자 민정의 몸이 놀라울 정도로 회복이 됐다.
나는 병원에서 바로 시청으로 출근을 했고 오후에 민정이 퇴원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퇴근해서 민정의 집으로 갔고 그녀가 잠이 들 때까지 입 안의 혀처럼 시중을 들었다.
그렇게 이틀이 또 흘렀다.
사무실로 오라는 민정의 호출을 받고 나는 퇴근 후 강남으로 갔다.
사무실로 들어가니 역시 서린이 나를 보며 반긴다.
“어서 오세요. 철수씨는 보면 볼수록 멋지게 변해가네요.”
“그렇습니까?”
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하지만 서린은 더욱 살갑게 굴며 내 곁에 다가와 애교를 떨었다.
“아이.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말고 앞으로는 나하고도 친하게 지내요. 참. 철수씨 나이가 몇이에요?”
“스물여섯입니다.”
“난 서른여섯인데 딱 십 년 차네? 앞으로 나에게도 누나라고 불러줄래요?”
“그러죠. 서린 누님. 됐습니까?”
내가 웃으며 말하자 그녀가 내 품에 곧 안길 듯이 몸을 붙이며 내게 말했다.
“철수씨. 앞으로 잘 부탁해요.”
“예?”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두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호호. 나중에 무슨 말인지 알게 될 거예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민정의 방으로 들어갔다.
“어서 와.”
소파에 앉아 있던 민정이 나를 보고 활짝 웃는다.
“몸은 어때?”
“아주 좋아.”
민정이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얼굴이 전보다 말이 아니었다. 뼈에 가죽만 걸친 듯 해골처럼 말라버린 그녀의 얼굴을 보며 가슴 속으로 울고 있을 때 그녀가 내게 다가와 내 몸을 끌어안았다.
“우리 철수. 내 귀염둥이.”
“귀염둥이는 누나지. 어디. 입술 맛 좀 볼까?”
내가 민정의 얼굴을 잡고 키스를 하자 그녀가 가볍게 입술을 내밀다 떼었다.
“자. 일부터 하자.”
“오늘 뭐 할 건데?”
“가봉할 거야. 오늘 한 번만 치수 더 재면 완성품이 나온다?”
“그래? 정말 기대 만땅이다.”
내가 환하게 웃자 민정이 재단이 된 옷 조각들을 내 몸에 붙여가며 신중하게 치수를 쟀다.
이번에는 처음보다 훨씬 시간이 더 걸렸다.
세 번에 걸쳐 휴식을 취하면서 일을 진행한 결과 민정이 파김치가 된 몸을 소파에 길게 누이며 헐떡였다.
“후우! 다 끝났다.”
“수고 했어 누나!”
내가 민정의 곁에 앉아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중간에 힘들어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몇 번이나 그만두게 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생전에 마지막 작품을 만들고 있는데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숨을 몰아쉬던 그녀가 내게 말했다.
“이번에 만든 작품은 총 세 벌이야.”
“세 벌? 하나가 아니고?”
“응. 애초엔 두 벌만 할 생각이었어. 한 벌은 평상시 외출복으로 입을 정장이고 다른 하나는 파티에 입고 갈 수 있게 고급 벨벳으로 만들었지. 그런데 마음이 바뀌어서 턱시도를 하나 더 만들고 있는 중이야.”
“턱시도? 그건 결혼할 때나 입는 거잖아?”
“그래. 그래서 처음엔 안 만들려고 했는데...... 내가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서. 아무래도 우리 철수 결혼식을 못 볼 거 같아 미리 만들어두려는 거야. 나중에 우리 철수 결혼 할 때 꼭 내가 만든 턱시도를 입고 결혼해야 해?”
“누나!”
나는 한 순간 격정에 사로잡혀 말을 하지 못했다. 나를 지극정성으로 생각해 주는 그 마음에 나도 모르게 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아이 씨. 왜 이러지?’
이번엔 눈물이 금방 그치지가 않았다.
내가 하염없이 울고 있자 민정이 내 몸을 살며시 감싸 안았다.
“철수야. 울지 마.”
“누나. 난 누날 위해 뭘 해 주지?”
“이미 충분히 받았어.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죽는 거니까 조금 일찍 간다고 너무 슬퍼할 것 없어. 다만 그 사람 마음 속에 누군 가가 간직돼 있으면 누군 가는 그 사람 안에서 영원히 살아 있는 거라 생각해. 철수야.”
“응.”
내가 울먹이며 대답하자 민정이 편안한 음성으로 내게 말했다.
“누나가 이 세상에 없어도 끝까지 날 기억해 줄 거지?”
“응. 그럴 거야. 얼굴도 보지 못한 부모님 이름을 걸고 맹세할게. 누나가 해 준 옷도 닳아 없어질 때까지 입을 거고 누날 죽을 때까지 절대로 잊지 않을 거야. 누난 내게 처음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뭔지 가르쳐 준 사람이니까.”
“철수야.”
민정도 기어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서로를 부둥켜안고 한참 동안 울다가 민정이 먼저 내게서 몸을 떼었다.
며칠 후에 완성된 옷이 나왔다.
민정 앞에서 세 벌을 번갈아가며 입어보는데 옷이 어찌나 매끄럽게 잘 빠졌는지 그녀의 실력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하하. 옷이 날개라더니. 내가 이렇게 잘생긴 남자였나?”
마지막으로 검정 색 턱시도를 입어보며 내가 거울 앞에서 웃자 민정이 그 옆에 서서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다 좋은데 머리 스타일이 좀 마음에 안 든다. 미용실에 가서 옆머리를 조금 더 쳐달라고 그래. 그리로 앞머리는 이 상태에서 조금 더 길고. 파마를 해도 괜찮긴 하겠는데, 아무튼 좋은 미용실에 가서 상담을 좀 받고 머리 스타일을 바꾸면 옷이 확 살겠다.”
“알았어. 나중에 누나 말대로 할게.”
“그래. 이제야 내 모든 할 일을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죽어도 난 여한이 없어.”
“누나! 또 그런 소리.”
내가 눈살을 찌푸리자 민정이 희미하게 웃는데 기력이 딸려 이젠 웃는 것조차 힘이 들어보였다.
옷을 받아 들고 온 그 다음 날.
민정은 다시 응급실에 실려 갔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퇴근 후 병원에 달려갔을 때 순정이 내게 의사의 말을 전해 주었다.
“이제 마지막 준비를 하라고 하네요. 이대로 영 의식이 안 돌아올 수도 있고 만약 깨어나더라도 얼마 못 간다고...”
“대체 왜 이렇게 진행이 빠른 거죠?”
내가 항변하듯 묻자 순정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사실 암이 재발한 순간부터 의사는 가망이 없다고 말했어요. 의사 말로는 1년 전 유방암 수술을 하고부터 암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신으로 더욱 급속하게 퍼져갔다더군요. 아무리 조심해서 약을 먹고 식이조절을 했지만 이렇게 몸에서 암을 이기지 못하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안 되는 경우가 있다더라고요.”
“그럼 누나가 일본 여행을 간 것도...”
“그래요. 그때 이미 암세포가 전신에 가득 차서 수술도 할 수 없는 상태였어요. 하지만 동생에게 사실을 말하면 충격으로 더 빨리 세상을 등질 까봐 말을 해 주지 못한 거죠. 오히려 의사는 이렇게나마 남은 시간을 즐겁게 보낸 것이 당사자에겐 다행이었을 거라고 해요.”
순정의 말을 듣자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민정의 병실로 들어갔다.
민정의 팔엔 링거가 여러 개 꽂혀 있었고 얼굴과 몸은 가시처럼 말라 이미 살아있는 사람의 형상이 아니었다.
“누나!”
내가 민정의 손을 잡고 조용히 불렀다. 순간, 기적과도 같이 민정이 두 눈을 떴다.
“누나! 정신이 들어?”
내가 손에 힘을 주고 그녀를 부르자 곁에 있던 순정도 놀라 그녀를 불렀다.
“민정아! 정신이 드니?”
“철수. 내...”
민정이 입을 열어 말을 하는데 잘 들리지가 않자 나는 귀를 그녀의 입에 댔다.
“내... 귀염둥이.”
“누나. 누나가 귀염둥이지.”
내가 눈물을 흘리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순간, 민정의 마른 손이 내 눈가로 와 눈물을 닦아주었다.
“울지 마.”
그녀의 말대로 눈물을 그치려 하는데 그게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민정이 손으로 눈물을 닦으면 그 자리에 새로운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우리 철수. 울보가 됐네.”
민정의 목소리가 점점 더 뚜렷해지며 힘이 실리자 나는 그제야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그녀에게 물었다.
“좀 괜찮아?”
“응. 기분 좋아.”
“다행이다.”
“아. 일본 가고 싶다.”
민정을 보니 그녀가 두 눈에 몽롱한 빛을 발하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일본. 일본 그 호텔에 다시 가서 우리 철수랑 섹스하고 싶다.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었는데.”
“그래. 가자. 누나 몸 좋아지면 또 가자.”
내가 고개를 강하게 끄덕이며 말했다.
“그땐 철수하고 나. 이렇게 둘만 가자.”
“그래. 그렇게 하자. 누나.”
민정이 순정에게 말했다.
“언니. 언니는 나가서 좀 쉬다 와. 나 철수랑 얘기 좀 할 거니까.”
“응. 알았다.”
순정이 나가자 민정은 내 손을 잡고 이런저런 얘기들을 시작했다.
어렸을 때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얘기, 성공하기 위해 결단하고 노력했던 것들, 그리고 기회를 잡고 눈부시게 성장해 나갔던 것들. 마치 자서전을 쓰듯 모든 얘기들을 끊임없이 해 나갔다.
그렇게 얘기를 다 하고 나서는 내 얘기가 듣고 싶다며 말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도 기억이 날 때부터 지금까지의 얘기를 간추려 들려주었다. 서로 얘기를 하다 보니 둘 다 정말 어렵고 힘들게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 두 사람 더욱 서로에게 끌렸는지도 모른다.
내가 얘기를 다 마치자 민정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정말 재미있다. 철수랑 얘기하니까 시간 가는 줄 모르겠어. 하음. 이제 좀 자야겠다.”
민정이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을 한 뒤 나를 불렀다.
“강철수. 내 귀염둥이.”
“누나.”
그녀가 한참 동안 내 얼굴을 뚫어져라 보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우리 다음에 또 보자.”
그녀의 눈을 보는데 순간, 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말할 수 없었지만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는 그녀와 눈을 맞추며 나도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누나. 우리 또 만나자.”
민정의 두 눈이 서서히 감기자 나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맞췄다.
입술을 떼고 보니 민정의 두 눈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로부터 두 시간 후에 민정은 숨을 거두었다.
장례가 끝난 뒤 민정의 유언에 따라 그녀의 시신은 화장을 했다.
그녀의 유언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화장을 하고 남은 유골을 나에게 맡긴다는 유언을 했다는데 나는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여 유골을 납골당에 안치했다. 아마 민정은 죽어서도 나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으로 그런 유언을 한 것 같은데 나도 그녀가 보고 싶을 때면 언제든 보러 갈 수 있으니까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모든 절차가 끝나고 또 한 번의 놀라운 사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뭐라구요?”
놀라는 나를 보며 순정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민정이가 그렇게 결정했고 또 변호사 공증까지 된 상태라서 어쩔 수가 없어요.”
내심 서운한 것을 참느라 안간 힘을 쓰고 있는 그녀의 표정이 내 눈에 훤히 다 보였다.
“으음.”
한 번 들었으면서도 나는 그것이 믿기지 않아 다시 물어보고 싶었다.
‘도대체 그 건물이 시가로 얼마야?’
민정이 세상을 뜨면서 내게 강남에 있는 그 사무실을 유산으로 남기고 간 것이었다. 사무실이 있는 그 건물은 총 3층짜리로 외양은 그다지 볼품이 없었지만 제법 목이 좋은 곳에 위치해 있어 모르긴 몰라도 땅값이 꽤 나갈 것이었다.
순간, 사무실에서 일하던 민정의 후배 서린 생각이 났다.
‘그때 나보고 잘 부탁한다고 하더니 바로 이런 일을 두고 한 말이었구나.’
그렇다면 민정이 내게 사무실을 준 것은 즉흥적인 생각이 아니라는 말이다.
“모든 절차는 변호사가 알아서 해 줄 거니까 철수씬 그냥 받기만 하면 될 거예요.”
순정의 말에 가시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얼굴도 옛날 민정이 살아 있을 때와 달리 완전히 사무적인 표정이었다. 나는 그녀와 한 시도 더 있기가 싫어 간단하게 목례만 하고 그녀를 떠났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건물은 현재 시가로도 30억이 넘는 가치를 갖고 있었고 순정이 물려받은 아파트보다 훨씬 더 값이 나가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순정이 그런 표정을 지었던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민정에게 하나 더 있는 친척인 남동생은 순정보다 더 작은 액수의 유산을 물려받았으니 민정의 유산 중 가장 큰 덩치가 내게로 들어온 셈이 됐다.
나는 한 동안 내가 몇 십억 대의 부자가 됐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없었다. 현재 가게에서 들어오는 월세만 해도 천오백만 원 정도가 되는데 시청에 나가지 않고 월세만 받아서 생활해도 충분한 인생이 된 것이다.
나는 다시 한 번 민정에 대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그녀가 그 정도 되는 재산을 모았을 때는 실로 엄청난 노력과 땀을 들였을 것이고 어쩌면 그런 스트레스로 인해 병을 얻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자기는 피땀 흘려 번 돈을 써보지도 못하고 남 좋은 일만 하고 가다니. 누나. 보고 싶다.’
내가 평생을 벌어도 벌지 못할 거금을 남기고 간 민정 누나.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내가 처음으로 이 세상에서 누군 가를 위해 사랑해 주고 싶은 마음, 불쌍한 마음을 갖게 해준 여자였다.
이제껏 살면서 나는 항상 내 만족, 내 부의 축적을 위해 살았지, 한 번도 다른 사람을 위해 뭔 가를 해보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고아로 살아서인지 남들보다 피해의식이 많아 항상 내가 다른 사람보다 손해를 보고 살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뿌리박혀 좀처럼 남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민정을 만나서 그녀가 안됐고 불쌍하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갖게 됐다. 사람을 향한 긍휼을 처음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긍휼을 베푼 대가는 상상할 수 없는 재산으로 다시 내게 돌아왔다.
나는 그렇게 가버린 민정을 추모하며 며칠을 보냈다.
세월은 사람의 감정이나 기분 따위를 고려하지 않고 자기 할 일만 묵묵히 하는 기계처럼 쉬지 않고 흘러간다.
민정이 세상을 떠난 지도 어느새 일주일이 지났다.
세상은 신년을 맞은 지 며칠이 지나 있었고 오늘은 밤새 내린 폭설로 인해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다.
간만에 많은 눈을 보니 마음은 푸근했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 또한 있는 법, 시청 앞 도로는 눈길로 인해 거의 마비가 될 정도로 혼잡했다.
나는 업무를 하다 잠시 손을 놓고 자판기에서 커피를 빼 창문가에 섰다.
‘아. 오늘은 왠지 술이라도 진탕 마시고 싶은 날이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에 눈까지 겹쳐 사람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에 문자가 떴다.
(나 지수야 잘 지내?)
‘지수?’
나는 놀라 두 눈을 크게 뜨고 문자를 다시 확인했다.
‘......!’
틀림없는 지수였다. 나는 얼른 문자를 보냈다.
(잘 지내고 있지 당신은?)
(나도... 오늘 시간 돼?)
(퇴근하면 언제든지)
(함 볼까?)
(오케이 몇시?)
(내가 시청으로 갈게 퇴근하고 기다려)
(알았3)
퇴근 후 차를 타고 시청 지하철역 출구에서 기다리다 지수를 발견한 나는 운전석 창문을 내리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여기야.”
“오!”
나를 발견한 지수가 얼른 조수석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찬 공기가 훅, 하고 들어오더니 신선하고도 향긋한 냄새가 뒤를 이어 내 코로 들어왔다.
“오랜만이야.”
내가 차를 출발시키며 인사하자 지수가 얼굴을 쭉 빼고 나를 정면으로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린다.
“철수씨. 한 달 정도 밖에 안 떨어져 있었는데 그동안 몰라보게 달라졌네.”
“왜? 내가 많이 변했어?”
“응.”
“좋은 쪽, 나쁜 쪽?”
“좋은 쪽. 너무 멋있어졌다.”
그러더니 얼굴을 가까이 붙이고 내 입술에 자기 입술을 갖다 댄다.
쪽-
지수가 가볍게 키스를 하고 물러나자 내가 웃으며 말했다.
“지수도 더 예뻐졌는데? 그런데 지수, 치열하게 사는 가 보다.”
“왜?”
“눈매가 더 날카로워진 거 같아.”
“그거 별로 듣기 좋은 말 아닌데. 사람들이 그러더라고 내 얼굴에서 유일한 흠이 눈매 날카로운 거라고.”
“하하. 흠이랄 정도는 아니고 개성이지.”
“호호. 우리 철수씨 유머도 늘고 아주 좋아. 바람직하게 변하고 있잖아? 아. 오늘 기대 된다. 철수씨. 나 오늘을 얼마나 기다린 줄 알아?”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칫. 철수씬 나 별로 생각 안 했나보구나?”
“말로만 그러면 뭐해? 지수도 그 동안 연락한 번 안 했잖아?”
“나야 연락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지. 그래야 만날 때 더 짜릿할 거 같아서.”
“나도 그랬네요. 그나저나 지수씨 요즘은 뭐하고 지내는데?”
“요즘 논문 쓰느라 정신없었어.”
“박사논문?”
“응. 이제 거의 다 마무리가 돼 가는데, 완벽하지 않으면 잠을 잘 못자는 내 성격이다 보니 요즘 내 스스로를 달달 볶아대서 좀 피곤하긴 해.”
“내가 오늘 피곤을 풀어줘야겠네?”
“으응. 나 엄청 기대하고 왔으니까 실망 시키면 안 돼?”
“아이고. 부담 돼서 어쩌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섹스라면 자신이 넘쳤다. 민정과의 일 때문에 그 동안 쭉 금욕해 와서 내 불알엔 지금 농축된 엑기스들이 발광을 할 지경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차가 막힌 구간을 벗어나자 이젠 제법 속도를 냈다.
“어디로 갈까?”
내가 묻자 지수가 곧바로 대답한다.
“강화도 가자.”
“강화도?”
“응. 나 1박 가능하니까 강화도 가서 하룻밤 자고 오자. 철수씬 어때? 내가 너무 일방적인가?”
“나도 오늘은 시간 있어. 하지만 다음엔 1박 예정이면 미리 서로 연락은 하고 만나자.”
“미안. 다음부턴 꼭 그렇게 할게.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줘. 응?”
지수가 아기처럼 아양을 떠는 게 귀여워 나는 그만 웃고 말았다. 서울대 출신에 곧 박사가 될 여자다. 그런 엘리트가 고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나에게 애교를 떠는 모습에 나는 짜릿한 카타르시스마저 느꼈다.
“알았어. 용서는 해 주는데 거기는 용서 못해.”
“거기? 거기가 어딘데?”
“지수 보지.”
“아아. 미치겠다. 하고 싶어서. 철수씨 지금 여기서 해 버릴까?”
“안 돼.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우선 가는 도중에 저녁부터 먹자.”
“알았어. 자기 하자는 대로 해야지.”
마치 소풍을 가는 초등학생처럼 들 떠 있는 지수를 보자 나도 덩달아 마음이 가벼워졌다.
강화로 가는 도중에 차가 막히자 우린 아예 느긋하게 저녁을 먹고 천천히 차를 몰았다.
밤 10시가 넘어 강화도에 도착했지만 급한 볼 일이 없었던 우리는 서로에 대한 근황을 묻고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느라 지루한 줄 모르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미 날이 어두워진지 오래라 바다는 다음 날 보기로 하고 우리는 모텔부터 찾아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으로 들어가 외투를 걸자 지수가 대뜸 내게 다가와 바지 혁대를 풀었다.
“철수씨. 나 철수씨 거 좀 먼저 보자.”
“뭐가 그렇게 급해?”
내가 웃으면서 그녀의 손길을 도왔다. 바지가 내려가고 팬티까지 끌어내리자 이미 자지는 야구방망이처럼 단단하게 서 있었다.
“아아. 정말 우람하고 멋있는 자지. 이거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네.”
지수가 내 자지를 두 손으로 움켜쥐자 나는 그대로 침대에 앉았다. 그러자 지수가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귀두를 입속에 바로 넣었다.
“아아!”
귀두가 지수의 축축하고 따뜻한 입속에 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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