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성기숙사 - 1부 5장
본문
한바탕 웃음으로 상황이 끝난 줄 알았지만 그것은 내 오산이었다. 은호 선배는 옷장 위에 놓인 구급함을 가져왔다.
“자. 이리와.”
“에? 나 안 아픈디.... 괜찬해라...”
막상 은호 선배가 구급함을 꺼내들자 몸을 움츠리며 조금 뒤로 물러났다. 은호 선배는 눈을 부라리며 내 손을 힘껏 잡고 잡아당겼다.
“오메!”
갑작스럽게 힘껏 잡아당기는 바람에 나는 은호 선배의 몸에 쓰러지듯 안기게 되었다. 아까도 조금은 느꼈지만 편안한 분위기에서 안겨보니 은호 선배의 가슴은 넓고 포근한 느낌을 주었다.
“너 지금 뭐하고 있어?”
“에?”
은호 선배의 말에 깜짝 놀라며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뒤통수를 누르는 은호 선배의 손에 눌려 꼼짝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은호 선배의 힘에 눌려 점점 더 가슴에 얼굴이 파묻히는 꼴이 되었다. 너무 심하게 눌리는 바람에 숨을 쉬기가 거북할 정도였다.
“켁! 켁!”
거의 비명에 가까울 정도로 ‘켁켁’하는 소리가 나오자 은호 선배의 힘이 조금 약해졌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머리를 들기 위해 두 손을 이용하여 은호 선배의 몸을 짚었다. 손바닥으로 물컹한 느낌이 전해졌다. 머리를 들기 위해 손을 짚은 곳이 하필이면 얼굴 바로 옆 은호 선배의 가슴이었다. 순간 눈앞이 캄캄하고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이런 씨벌 좆됐네. 아까침에 자지 보지 소리만 냈어도 디지게 팼는디.... 이 가시내 유방을 만져부렀응께 인자는 참말로 디져 부렀네. 니기미 씨발’
아까처럼 무수한 매질을 상상하며 몸이 바짝 긴장을 하고 있었지만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은호 선배의 손이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머리를 들어 은호 선배의 눈치를 살폈다.
‘응? 머여? 이 가시내가 지금 머한디 나를 요로코롬 야시꾸리허게 쳐다본당가? 씨벌... 설마? 니기미 좆됐네!’
설마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마음 한 쪽에서는 기우이길 바랐다. 그러나 역시 ‘설마가 사람을 잡을’ 것 같은 느낌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강하게 솟구쳤다.
“선배?”
내가 부르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은호 선배는 여전히 그윽한 눈길을 주고 있었다. 잠시 그렇게 있던 은호 선배의 손이 내 머리를 벗어나 아직도 유방위에 올려진 내 손을 잡았다.
“문아.”
“.......”
“남문!”
“예?”
은호 선배의 그윽한 눈길에 잠시 넋이 빠진 듯 바라보던 나는 은호 선배의 첫 번째 부름을 놓쳤다. 두 번째 부름에 다급하게 대답을 하자 은호 선배가 내 두 손을 꼭 잡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니?”
“암껏도 아니어라.”
“얘기해봐. 무슨 생각했는지....”
“........”
아까 한 번 혼이 난 경험이 있는지라 난 쉽사리 말을 할 수 없었다. 은호 선배는 그런 내 마음을 읽은 듯 먼저 조용히 얘기했다.
“문아.”
“예.”
“일단 차분히 좀 얘기를 하자.”
은호 선배가 의외로 침착함을 찾고 손을 놓아주자 나도 정신이 돌아왔다. 우리는 방 한가운데 서로 마주 보며 앉았다.
“잠간만....”
은호 선배는 출입문을 잠그고 다시 돌아와서 자리에 앉았다.
“모처럼 너하고 둘이서 마음속에 있는 얘기를 하고 싶은데, 혹시나 누가 방해하지 않을까 싶어서.....”
“예.”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은호 선배가 먼저 말을 꺼냈다.
“넌 어떻게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난 처음 너하고 기숙사 한 방을 사용하기 시작한 날부터 마음속으로 한 가지 결심을 했어.”
난 묵묵히 은호 선배의 말을 듣고 있었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지?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어찌 되었든 너하고 나는 당분간 이 방에서 같이 생활을 하기로 결정이 난거야. 그래서 난 너를 남학생이라 생각하지 않고 그냥 동생으로 생각하기로 했어. 실제로 내 친동생이 있는데 그 얘도 남자야. 지금 고3이지만 내가 작년에 이 학교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우린 같은 방을 사용하는 사이좋은 남매였어. 우리 집이 넉넉하지 못해서 부모님 방하고 우리 방. 이렇게 방 두개 밖에 없는 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집안 사정을 얘기하던 은호 선배의 눈에는 눈물이 맺힌 것처럼 보였다. 전라도 한 쪽의 작은 도시지만 그래도 부족함을 모르고 자란 내가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은호 선배는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다시 씩씩하고 쾌활한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미안. 내가 괜한 얘기를 했네.”
“.......”
“내 동생도 너 정도 체구를 지니고 있어. 그래서 너를 동생으로 생각하기가 쉬었는지 모르지. 아무튼 우린 같은 방을 쓰면서 서로에게 좋은 동생이고 좋은 누나였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까 너도 나를 단순히 룸메이트로 생각하지 말고 그냥 친누나로 생각해주면 좋겠다.”
“그래라? 그라믄 그럽시다.”
“정말이니?”
“아따 맨나 속고만 살었다요? 기냥 학교 선배보다 누나라고 허는 거이 더 편할꺼 같은께 그런 것이요.”
“고마워. 정말 고마워.”
은호 선배 아니 누나는 다시 눈물을 글썽이면서 나를 껴안았다. 갑자기 힘껏 껴안는 바람에 또다시 숨이 멈추는 고통을 경험해야 했다.
“켁! 켁!”
“미안. 미안.”
누나는 나를 풀어주고 미안해서 어찌할 줄 모르는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했다. 동동대학 남학생들에게 염라대왕으로 군림하며 여학생들의 수호천사가 된 강은호. 이른바 여장부라는 은호 누나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
“아따메 그라고 느닺없이 보둠아불믄 어째라고 그란다요. 숨이 맥혀가꼬 디져분지 알았소.”
“미안해. 미안해.”
연신 내게 미안함을 표시하는 누나를 보며 순간적으로 장난기가 발동했다.
‘누나라고 허는 것은 좋은디.... 앞으로 사사건건 간섭헐라고 달라들믄 골치께나 아플거인디... 첨부터 확 잡아둬야제....’
난 속으로 누나를 골탕 먹일 생각을 하면서 희미한 미소를 얼굴에 떠올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은호 누나는 연신 미안하다고 하면서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는 바람에 내 표정의 변화를 볼 수 없었다.
“누나!”
“........”
내가 누나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깜작 놀란 눈으로 누나가 나를 쳐다보았다.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처음에는 그냥 ‘누나’라고 불렀었다. 그렇지만 우리방을 기숙사 여학생회장 선거캠프로 사용하면서부터 다른 사람들과 형평성을 생각해서 ‘선배’라고 불렀다. 몇 번 다시 ‘누나’라고 부르라며 회유와 협박이 있었지만 계속해서 ‘선배’라고 부르는 게 좋을 것 같다며 호칭을 바꾸지 않았다. 그렇기에 누나에 대한 호칭이 ‘선배에서 누나’로 바뀌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눈을 했다.
“선배하고 누나는 쪼까 다른디.... 누나가 해줄 수 있을랑가 모르겄네?”
“그거야 당연하지. 나도 내 친동생과 다른 남자 후배들은 역시 다르게 대하고 있으니까.”
“그래라? 어쩌코롬 다른디라?”
“설명하기가 조금 어려운 부분도 있고, 남들이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어. 아무튼 피를 나눈 남매와 단순히 선후배는 남녀간에도 확실하게 다른 부분이 많아.”
“머가 틀린디라?”
“그게 좀.....”
은호 누나가 망설이며 말을 흐리고 있었다. 순간 나는 은호 누나와 동생 사이에 특별한 일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나와 우리 누나 사이에 있었던 특별한 일처럼....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기어이 은호 누나와 동생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약간 심통을 부리는 것처럼 말했다.
“아따메. 언제는 친누나 맨이로 가찹게 지내자고 허드만.... 인자 봉께 그거이 다 머시기 같은 거였구만이라?”
“아니야. 그냥 해본소리가 결코 아니었어. 다만.....”
“다만..... 머가 어쩐다고라? 근께 마음은 친동생 맨이로 생각헐라고 헌디 진짜로 친동생허고 똑 같지는 않다고라?”
“그게....”
“돼얐소. 그라믄 그라제. 니미랄 기냥 선후배믄 된 거이제 어쩌케 친누나 친동생이 될 수 있겄소? 그거이 다 헛소리지라. 씨발 기냥 서로 편하게 선후배로 헙시다.”
“야!”
내 말에 서운함을 느꼈는지 은호 누나의 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왜라?”
난 뜨끔하기도 했지만 의도한데로 흐른다는 생각이 들어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속마음을 들킬 것 같아 역시 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너 정말 이럴 수가 있어?”
“아따 내가 멋을 어쩼가니 그라요?”
“너? 이 나쁜 새끼...”
“머라? 말 해보쑈. 내가 머 잘못했소? 아- 씨....”
난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은호 누나의 눈에 눈물이 맺히더니 곧바로 볼을 타고 흘러내려 버렸다. 어렸을 적에 아버지가 ‘여자의 눈물은 남자의 무덤’이라고 일러주신 말이 생각났다. 그때는 별 생각 없이 흘려버렸지만 지금 이 순간 또 다시 그 말의 숨은 뜻을 실감하게 되었다. 은호 누나의 눈물을 보고 더 이상 장난을 치거나 심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그저 가만히 보고 있는 것만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계속 소리 없이 우는 누나의 모습이 측은해 보였다. 학교에 알려진 ‘여장부 강은호’의 모습이 아니라 ‘연약한 여자 은호’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누나에게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누나의 손을 잡았다. 손을 들어 볼에 난 눈물자국을 닦아주었다.
“엉... 엉.... 엉....”
“누나. 미안해. 울지마.”
갑자기 얼굴을 내 가슴에 파묻고 큰소리로 울어버리는 은호 누나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고등학교 때 경험했던 여고생들의 등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크고 널찍한 등이 한없이 작아보였다. 짧은 순간이지만 내가 오빠로서 보호해 주어야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후후. 니미랄 어쩌면 그라고 똑 같냐? 그때나 지금이나 어째 한나도 틀린 것이 없냐? 은호 누나나 우리 선이 누나나 똑 같당께...’
은호 누나의 등을 토닥여 주면서 둘이 비슷하다는 생각에 ‘선’이 누나의 얼굴이 떠오르며 우리 남매만이 간직한 아주 특별한 경험이 떠오르더니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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