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의 눈물 - 2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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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은 머리를 쓸어올려 손에 끼워놓은 곱창을 두 번 돌려 말총머리를 만들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사람 사는게 정붙이고 살면 못살것도 없겠지만 붙어있던 정이 떨어져 나간 마당에 아쉬워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텅빈 집안을 둘러보던 지연은 왠지 모를 허탈함에 서둘러 가방을 메고 등을 돌렸다.
입구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엘리샤가 안경 너머로 눈물을 훔쳤다.
“또..또 우리 엘리샤~ 알고보니 눈물공주였네? 호호~”
“영영 못 보는 것도 아닌데 그만울어~ 나 마음 아프잖아”
엘리샤의 눈물은 자신을 알아봐준 고마움보다 친가족처럼 대해준 지연에 대한 인간적인 슬픔이었다.
공항에 도착할때까지 엘리샤는 지연의 손을 잡고 있었고 지연이 떠나는 순간까지 가슴 아파했다.
지연의 떠나는 모습을 엘리샤만 지켜본건 아니었다.
기둥 뒤에 몸을 숨긴 남자가 회한에 젖은 눈으로 지연을 떠나보내고 한참동안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뒷좌석 자매의 재잘거리는 수다소리와 웃음소리는 운전석에 앉은 규빈도 절로 웃음이 나오게 만들었다.
“아~ 이제야 제 자리를 찾은 기분이야~”
“호호~ 지야, 어머니 종합건진 금방 끝나신다니까 들렀다 가자”
”그래~ 나도 엄마 빨리 보고 싶어~“
“그나저나 이제 돌아왔으니 속 시원히 얘기좀 해봐”
해연이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자 지연은 규빈의 눈치를 살피려는지 룸미러를 힐끗 바라봤다.
지연은 규빈과 눈이 마주치자 목소리를 낮추고 해연에게 눈치를 줬다.
“언니~ 나중에..”
분위기가 가라앉자 규빈이 너스레를 떨었다.
“이모~ 어디 가고 싶은곳 있으심 말씀하세요. 이번주 내내 저 휴강이거든요”
“호호~ 우리 자기가 데이트 신청 해주는데 무조건 가야지~”
잃어버렸던 뭔가를 다시 찾은 기분, 한국에 돌아온 지연은 감회가 새로웠다.
많이 변해버린 서울의 풍경도 그리 낯설지가 않았다.
저녁을 먹고 거실에 모여 앉은 가족들은 추억을 끄집어내고 웃음꽃을 피워냈다.
그 일면에 아쉬움과 서글픔도 없지 않았지만 모두의 표정은 그런대로 행복한 모습이었다.
“지야~ 나 때문에 그런 결정을 한거니?”
“아니에요~ 엄마, 독일에서도 전원 주택에서 살았어요.저도 아파트는 싫어요”
“내가 아파트 답답하다고 한건 아직 적응이 안되서 그런거야. 난 괜찮으니까 너 편할대로 해”
“엄만 아니래두요, 한국 오기전부터 생각했던 거에요”
“언니~ 그럼 살거야? 아님 새로 지을거야?”
“음.. 이왕이면 짓고 싶어. 엄마, 너, 나 이렇게 셋이 지낼거니까 2층으로...마당도 좀 넓게~”
“시간이 꽤 걸릴텐데.. 그럼 그 동안 당신하고 규빈이가 한방 쓰고....”
“아휴~ 불편하게 그럴 필요 없어.. 임시로 오피스텔 하나 얻음 되지”
“돈 아깝게 뭐하러~”
“내가 불편해서 그래. 엄마도 수랑 방 같이 써서 불편하실텐데...수야~ 이참에 언니랑 같이 있다가 나중에 집 마련되면 같이 들어가자”
“응?”
어찌하다 보니 지연의 생각대로 결정이 나는것 같아 해연은 못내 서운했다.
“어머니 생각은 어떠세요?”
“글쎄다..지연이 생각이 좋을듯 하다만..”
“수 넌?”
“그 동안 큰언니 고생 많았잖아. 작은언니 생각에 찬성~”
옆에 앉아있던 병호가 해연의 마음을 알아채고 해연의 손을 지그시 잡았다.
“알겠어요.. 그럼 그렇게 해요”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은 수연은 침대에 누워 마스크팩을 하고 있는 지연의 눈치를 살폈다.
아까부터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규빈이 눈에 어른거려 더 이상 머뭇거릴수가 없다.
“언니~”
“으응?”
“나...”
[뚜리리리~]
지연에게 무슨 말을 하려던 수연은 전화벨 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설마?)
“수야~ 전화 안 받고 뭐해?”
다행히 지연을 찾는 병호의 전화였다.
“언니~ 형부~!!”
“응? 아~ 맞다.. 전화좀 갖다줄래”
전화기를 지연에게 건네며 수연이 말을 섞었다.
“나 잠깐 바람좀 쐬고 올게”
“으응..그래”
팩을 떼어내고 수화기에 귀를 기울이느라 지연은 수연의 외출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네~ 형부~, 네..네.. 아~ 그래요? 잘됐네요.. 네..네..그러께요”
집을 지을 부지는 양평쪽에 마련이 되었다.
설계부터 건축까지 책임질 적임자를 병호에게 부탁했는데 일이 잘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내일 오후 미팅장소와 시간을 메모하고 전화를 끊은 지연은 그제서야 수연이 외출하고 집에 없다는걸 알았다.
(응? 이 시간에 애는 어딜 간거야?)
지연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던 그 시각.
호수공원 뒤쪽 어느 곳 차안에 규빈과 수연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언니 눈치 보여 혼났어..이런 복장에 차가지고 나온거 알면 이상하게 생각할거야”
“미안해, 자기 너무 보고 싶어서..”
“언니랑 따로 나오니까 좋긴 한데.. 날마다 자기 못보니까....”
“양평에 집 지으면 더 힘들건데..”
“나 양평 안들어 갈거야”
“응?”
“지금 오피스텔 내가 쓴다고 할거야”
“그게 말이 돼? 할머니랑 지연이모가 그러라고 하겠어?”
“그럼 어떡해..우겨 봐야지”
“...........”
“무슨 생각해?”
“아니..아무것도.. 참, 이번 토요일에 동해쪽으로 바람 쐬러 가자”
“응, 자기랑 하룻밤 자고 오면 좋을텐데..”
“그러고 싶지만.... ”
“키스해줘”
수연이 눈을 감고 입술을 내밀었다.
규빈의 입술이 수연의 입술에 포개지고 뜨거운 키스가 한동안 이어졌다.
XX호텔 커피숍에 들어선 지연은 만나기로한 상대방의 이름을 웨이터에게 전해주고 시계를 보았다.
저쪽에서 웨이터가 손짓을 하고 웨이터 바로 옆좌석에서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젊은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안녕하십니까? 김철민입니다”
“네~ 좀 늦었어요. 죄송합니다. 주지연이라고 합니다”
남자가 시계를 보더니 환한 웃음을 내비쳤다.
“하하~ 제 시계는 이제 정각인데요?”
“훗~ 후배라 해서 같은 연배인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이 젊으시네요”
“하하~ 까마득한 후배죠..그나저나 정말 미인이시네요”
“호호~ 고마워요.. 형부한테 대충 들으셨죠?”
“네.. 전원주택을 생각하고 계신다고요?”
“비용은 상관없으니 예쁘게 부탁드려요”
“그게...장담할수 없습니다.”
“네?”
“하하..제가 맡을 일이 아니라서요.. 전 아직 수습이라고 생각하심 되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철민은 XX이라는 회사에 속한 초보 건축가라 했고 메인은 따로 있다고 했다.
모셔오고 싶었지만 사정이 있어 혼자 나오게 됐고 일을 맡아줄지도 아직은 모른다고 했다.
물론, 전원주택 한 채 짓는것이야 자신이 맡아도 그닥 어려운게 아니었지만 평소 존경하는 대선배의 부탁인지라 특별히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저희 사장님께 부탁을 드렸거든요. 저희 사장님이 이쪽 방면에선 제법 유명하신 분이라 이런 사소한 일은.... 아, 죄송합니다..기분 나쁘게 듣지 마십시오”
“아니에요, 말씀 계속하세요”
“그래도 저를 이뻐하셔서 제가 부탁을 드리니까 거절은 안하셨는데, 그게 승낙을 한것도 아니라서...”
“.... ???”
“이 분 철칙이 의뢰인과 꼭 저녁식사를 해보고 일을 결정하시거든요. 지연누님.. 하하.. 누님이라고 불러도 되죠?”
“편할대로 하세요”
“지연누님도 아실거에요. 방배동에 있는 영화배우 고** 건물~”
“고** 씨도 사장님과 저녁식사를 했다는 건가요?”
“네..만약 저희 사장님이 해주기만 한다면 아마 대한민국에서 제일 멋진 집이 될겁니다. 그건 제가 장담합니다”
“후후~ 꼭 그럴필요까진 없는데.. 철민씨가 이렇게까지 말씀 하시니까 흥미가 생기긴 하네요”
“여기 저희 사장님 명함입니다. 제가 이야기 잘 해놓을테니 꼭 전화 해보세요.”
철민이 건네준 명함에는 <XX, 건축가 우영찬> 이라고 씌여 있었다.
“응???”
“왜 그러세요?”
“아니..아니에요”
“엄청 미인이라고 말씀드리면 우리 사장님도 솔깃하실거에요..하하..아직 총각이거든요”
철민과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지연은 핸드백에서 명함 한 장을 찾아냈다.
같은 명함임을 확인한 지연의 입가에 알수 없는 미소가 희미하게 걸렸다.
각자 맡은 업무에 몰두하고 있는 직원들의 모습이 여느 사무실과 다름없다.
부하직원이 올린 보고서를 검토하던 병호는 키폰이 울리는 소리에 아무생각없이 수화기를 들었다.
“네~ 한병홉니다.”
<...........>
“여보세요??”
<한병호씨 맞습니까?>
수화기를 통해 중후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그렇습니다만..”
전화를 받는 병호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는가 싶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신 누구야?”
<전화로는 그렇군요. 만나 뵐수 있을까요?>
직원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자 병호는 자리에 앉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당신이 누군지부터 밝히시요”
<........생각할 시간을 좀 드려야겠군요.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세...”
수화기를 내려놓는 병호는 심장이 두근거리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가득 번지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일이..)
“최대리~ 나 일이 생겨서 먼저 갈테니 무슨일 생기면 휴대폰 해요”
병호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마자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차 있는곳으로 빠르게 뛰었다.
시동을 켜자마자 안전벨트를 맬 생각도 않고 가속페달에 발을 올렸다.
“여보, 나야”
<어머, 당신 어쩐일이에요?>
“응, 몸이 좀 안좋아서.. 퇴근하는 길이야. 과일좀 사가려구.. 뭐 사가지?”
<자기 어디 아파요?>
“아냐...감기기운이 좀 있나봐.."
<딸기만 좀 사와요. 따뜻한 생강차 준비 해놓으께요>
"알았어.. 참, 규빈이는?”
“학교에서 아직 안왔죠~ 왜요?”
“아니 그냥..”
병호는 머릿속이 실타래가 엉킨것처럼 복잡했다.
자신도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그 일을 아는 그 남자는 누구란 말인가?
와이셔츠 윗 단추를 열고 넥타이를 한껏 느슨하게 풀어 헤친 병호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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