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 - 2부 35장
본문
감기 - 42 개미의 날개 29
회사에서 청담동까지 가기 위해 472번 버스를 타려다가, 이 시간이면 차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지하철을 타긴 했지만 압구정역에서 내려 한동안 걸어가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상진을 만나기 위해 몸을 실은 지하철에는 아침 출근시간의 지하철
에는 덜 깨인 졸음을 이기기 위해 멍한 표정의 긴장감이 아닌, 전쟁같았던 하루를 마감한
몸에 베인 나른함이 가득 묻어나고 있었다. 녀석과의 약속만 아니라면 뜨거운 물속에 몸
을 담그고 하루동안 몸속에 스며든 피로를 풀어버리고 싶었다. 감기에 이어 몸살까지 올
려는지 온 몸이 떨리는 것이 오래전 엄마와 단 둘이 살 때 연탄불의 뜨끈한 온돌방이 그리
웠다.
겨울이면 유독 병치례가 심한 하나뿐인 아들 걱정에 감기에 걸릴 때면 진한 유자차에 두
터운 밍크 담요를 덮어주시던 엄마의 모습이 떠오른 것은 압구정에 내려 길을 걷자 말자
내리기 시작한 하얀 눈 때문일 것이다. 지나간 과거를 되세김질하게 만드는 하얀 눈을 맞
으며 한잔 술이 고플때 자주 찾아가던 청담동 제이로 발걸음을 옮겼다. 눈 때문에 예상보
다 늦게 도착한 제이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방울 소리와 함께 유리잔을 헝겊으로
닦고 있던 형이 눈인사를 한다. 모처럼 편안한 공간에 들어선 여유로움을 느끼며 형의 맞
은 편에 앉아 한 개피의 담배를 꺼내 물었다.
"여, 오랜만인데.. 회사 옮기고 계속 바쁜거야? "
"술도 못 마시는데 자주 오면 화낼 거잖아요? "
"자주 오던 놈이 뜸하니까 얼굴 보자고 하는 거지. 뭐 줄까? 홍차? "
오늘 모처럼 홍차를 마련한 듯한 형의 기대를 깨고 이곳에 오면서 계속 먹고 싶었던 것을
주문하기로 했다. 상대방의 기대를 무참하게 밟아주는 것은 몸이 안 좋을 때의 안 좋은 습
관중에 하나라고 할까.
"감기가 심해서 홍차말고 뜨거운 유자차로 주세요. "
그런 내 말에 유리잔을 깨끗한 천으로 닦고 있던 형이 어처구니 없는 표정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야! 술 안 먹는 건 알겠는데 제발 적당히 좀 시켜! "
"왜? 겨울인데 유자차도 팔고 좋잖아요? "
"막걸리도 팔라고 하지? 파전도 팔고? "
"그거 좋네. 큭큭.. "
"너 임마, 다치고 나서 엄청 삐딱해진 거 알아?"
"크로스오버가 세계적인 추세라니까요. 그걸 모르네. "
"지랄한다. "
닦고 있던 유리잔들을 정리한 형이 포트에 물을 붓고 차를 준비하는 동안 또 한번의 방울
소리가 울리고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상진이가 들어왔다. 내 옆자리에 앉자 아무런 말
도 없이 한 손을 펴서 내게 내미는 녀석에서 얄미운 감정을 담아 한소리를 했다.
"새끼야. 담배 맡겨 놨냐? "
"그거 얼마한다고.. 오다가 다 폈어. 꺼내 봐. 씨발놈아. 꼭 욕해야 주지? 변태같은 새끼. "
입안에 가득 머금은 담배 연기를 녀석의 얼굴에 힘껏 뿜으며 담배갑을 꺼내 상진이에게
내밀었다. 그런 내 행동에 녀석이 눈을 부릅뜨며 한대 칠 것 같은 표정으로 으르렁 거린
다.
"이 새끼가.. "
"뭐 새끼야? 얻어 피는 놈이.. "
상진이와 내가 만나면 별 이유없이 싸우고 금방 풀리고, 그러다가 또 싸우는 것을 잘 아는
형이 향긋하고 뜨거운 김이 나는 머그컵을 내게 내밀며 우리 둘 사이에 끼어 들었다.
"저 놈은 신경 끄고, 뭐 줄까? "
"발베니로 줘요. "
익숙한 솜씨로 하얀 라벨이 붙어있는 유리병 뚜껑을 따고 호박색 발베니를 글라스에 부은
형이 미끄러지는 듯한 솜씨로 상진이 앞에 놓아준다. 한동안 그렇게 자신의 눈 앞에 놓인
가을 단풍처럼 샛노란 술을 바라보던 녀석이 술 한모금, 담배 한모금을 번갈아 마시다 이
내 깊은 한숨을 쉬며 바텐더에 고개를 숙인다.
"후우... "
뭔가 깊은 고민이 있는 것 같은데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녀석을 위해 앞에서 나와 같이
눈치를 살피고 있는 형에게 장난을 걸었다.
"형, 레몬에이드에서 유자차 냄새가 나네. 이거 유자차 아냐? 큭큭.. "
눈치가 빠른 형이 내 말에 발끈한 표정으로 대꾸할려다가 방울 소리를 내며 들어온, 연인
인 듯한 남녀가 적당한 분위기의 어두운 2층으로 올라가자 그들을 따라 자리를 비운다.
텅 빈 바텐더에 녀석과 나란히 앉아 한동안 따뜻한 머그컵에 담긴 레몬에이드를 입안에
넘겼다. 비록 녀석의 별명이 양념 반 후라이드 반이라고 할 정도로, 말을 꺼내기만 하면
욕설이 반 이상 섞이는 놈이지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자신의 형에게도 말 못하는 것을
내게 곧잘 털어 놓던 것을 생각하면 오늘 행동은 결코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손
에 메달려 있는 담배가 필터끝에 다달아 가느다란 연기를 이어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머리를 감싸고 있는 녀석의 손에서 거의 다 핀 담배를 뺏어 비벼끄고 새 담배 한 개피를
말없이 내밀었다.
몇 모금 남지 않은 술잔을 입에 털어 놓고 내가 건낸 담배를 입에 물고 또 다시 가슴속 깊
은 곳에서 세어나오는 한숨을 뱉어내는 모습을 난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 또한 한 개
피의 담배를 더 꺼내 불을 붙이고 있을 때 2층에 올라갔던 형이 내려오며 내게 무언의 눈
짓을 해온다. 내가 고개를 끄떡이자 형은 내게 발베니가 가득 든 병을 내밀고 바텐더의 한
구석으로 자리를 비켜준다. 그리고 잠시 후 Bar안에는 지금과 다른 노래, Flying without
wings가 조용히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Everybody`s looking for that something 누구든 그 무언가를 찾고 있죠
One thing that makes it all complete 모든 것을 채워줄 단 한 가지를
You find it in the strangest places 당신은 낯선 곳에서 그 무언가를 발견하죠
Places you never knew it could be 존재할 수 있을 거라고 결코 생각할 수 없었던 곳
Some find it in the faces of their chidlren 어떤 사람들은 아이들의 얼굴속에서 그것을 발견하죠
형의 그런 마음 씀씀이에 고마워 하며 상진이의 앞에 비워진 술잔에 술을 채워주고 녀석
이 스스로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 머그컵에 담긴 레몬에이드를 반 정도 마셔갈 때 한숨을
담배 연기에 숨겨 내뿜던 녀석이 지나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결혼 준비는 잘 되가냐? "
"니가 축가만 안 부르면 문제없어. "
이 말을 하면 분명 욕을 하면서 기운을 차렸어야 할 상진이가 아직 다 피지도 않은 담배를
급하게 비벼 끄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장난칠 분위기가 아니기에 말없이 담배를 건내주
고 불을 붙여 주었다. 그리고 술을 입안에 털어 넣은 상진이가 반쯤 빈 술잔을 한동안 바
라보다 간신히 입술을 열었다.
"이혼할까? "
"뭐? 결혼한지 얼마나 됐다고! "
술잔에 남은 술을 입안에 붓고, 내가 채워준 술을 급하게 또 마시는 동안 말이 없던 상진
이는 세번째 술잔을 마실때 까지 다시 닫혀진 입술은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다.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멍하니 진열되어 있는 수 많은 술병들을 바라보던 녀석이 네번째 술
잔을 마시고 나서야 답답했던 가슴이 진정되는지 그동안 묻어 두었던 말을 꺼내기 시작했
다.
"아침에 출근할 때 걔가 자고 있는데.. "
"임신했으니까 다 그런 거 아냐? "
"웃긴 건 내가 퇴근해도 자고 있거든. 결혼해서 지금까지 깨어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
지가 무슨 잠자는 숲속의 공주야? "
"그럼 제수씨한테 키스라도 해주지 그래? 혹시 알아, 깨어날지.. "
"지랄 옆차기 하네. 신혼여행때 내가 몸부림 좀 쳤다고 각방까지 쓴단 말야! 그런데 뭐?
키스하라고? 씨발.. "
그동안 쌓인 게 많았던지 상진이는 한바탕 큰소리로 화를 낸 후 급하게 술을 들이키기 시
작했다.
"냉장고 문 열면 엄마가 가져다 준 김치랑 내가 사 놓은 참치 통조림 밖에 없어. 씨발. 밥
통에 밥도 없어서 저녁에 배고프면 라면 끓여 먹는다구! 차라리 내가 좋다고 따라 다니던
여자가 결혼해서 그런다면 어느 정도 이해나 가지.. 이건 뭐, 빈 방있다고 하숙 준 것도 아
니고. "
"그래도 니 애 가졌는데, 애 낳고 살다보면 달라지겠지. "
아직은 결혼을 한 것도, 아이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요즘 유경이 탓에 아이에 대해 부쩍
관심이 많아지다 보니 그렇게 말을 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상진이의 화에 기름을 부은 꼴
이 되었다.
"씨발, 그게 문제라고. "
"그게 뭐? "
"나도 내 애 새끼가 태어난다는데, 인간 김상진 정신차리고 열심히 살려고 했지. 엄마도
그러더라. 애 낳고 살다보면 부부라는 거 별거 없다고.. 큭큭. 씨발. "
급하게 마시는 것 같아서 빈 술잔을 보고도 일부러 채워주지 않았는데, 말을 하면서 속이
타들어가는지 내 손에서 술병을 뺏어 든 상진이가 글라스에 술을 가득 부워 마신 후 길게
담배 연기를 마시기 시작했다.
"지난 주에 일하고 있는데 문자가 왔어. 전화도 아니고.. 문자가 왔다구! 씨발.. 애 낳을
동안 친정에서 보낼 거라고 그렇게 알라고.. "
"유경이도 애 가지면 친정에 보낼건데.. "
"새끼야. 끝까지 들어! "
다 식어버린 레몬에이드를 한모금 마신 후 담배를 하나 꺼내 피워 물었다. 녀석의 화가 어
느 정도 가라 앉을 때 까지 나도 뭔가 다른 것을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극도로 흥분
한 녀석의 비위를 맞춰주는 것은 아무리 하나뿐인 친구놈이라고 해도 화가 나는 것은 어
쩔 수 없었다.
"걔 그렇게 친정가고 나서 달라진 게 없어. 딱히 걔가 집에서 한 게 하나도 없으니까. 밥
은 라면 끓여먹고, 옷은 세탁소 맡기고.. 씨발. 내가 자취생도 아니고. 그런데.. "
"그런데? "
"그래도 내 애새끼 가졌는데 친정에 과일이라도 사들고 가야겠다 싶어서 선물 사들고 걔
네집에 갔었거든. 큭큭.. 크하하하하.. "
말하다가 갑자기 미친듯이 웃던 상진이가 술잔을 깨버릴 듯 움켜쥐다가 고개 숙여 한숨을
쉰후 나지막히 말하기 시작했다.
"집에 걔가 없더라구. 장모님은 잠시 나갔다고 하지만 눈치가 그게 아냐. "
"제수씨 어디 갔던데? "
"큭큭.. 나보고는 몸부림친다고 각방까지 쓰자고 하던 년이 친구랑 여행갔더라. "
"전화는 해봤고? "
"씨발, 친정간다고 나한테 문자 준 년이 내 번호 뜨면 받을 것 같아? 나도 광고한다고 눈
치밥 먹은 게 한두 해가 아닌데 답 나오잖아. "
난 지금까지 살아오며 딱 두 번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한 번은 오래전 수
화를 가르쳐 준 여인이 처음으로 내 오랜 악몽을 따뜻하게 안아주었을 때, 그리고 거의 십
년이 가까운 시간이 흘러 유경과 모든 것을 함께 나누었을 때가 그랬었다. 결혼이라는 것
을 심각하게 생각해 본 것이 그 두 번뿐이기에 난 아직도 결혼이라는 것에 약간의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지금 유경이 나와의 결혼에 앞서, 앞으로 태어날 우리의 아이, 그리
고 그 아이들에 대한 교육과 양육에 대한 것까지 계획하는 현실적인 고민에 비해, 난 그저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에만 생각이 미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상
진이의 그간 숨겨두었던 고민에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에게 그렇
지 않으면서 타인에게 냉정했던 카르네아데스처럼 주제넘은 말을 하는 것을 혐오하기 때
문에 더 그랬다. 그저 이렇게 빈 술잔에 잔을 채워주고 그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는 것 뿐,
그 어떤 충고나 조언을 할 수가 없었다.
말없이 술잔을 비우는 상진이와 그의 옆에서 말없이 담배를 피고 있는 내가 몇 곡의 노래
를 더 듣고 있을 동안 그렇게 침묵이 우리 둘 사이에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술 병이 바닥
을 보일 무렵, 잔뜩 굳은 혀를 억지로 놀리는 녀석의 목소리가 세어 나왔다. 그 말을 듣자
마치 내 자신의 일인냥 가슴이 급격히 뛰기 시작했다.
"이젠.. 뱃속의 애가 내 아이라는 생각이 안 들어. "
"그래서? "
"이혼해야지. 내 새끼도 아닐건데.. "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고 토할 것 같아 미칠 것 같았다. 아주 오래
전 잊고 싶었던 것을 누군가 억지로 꺼낸 듯한 기분에 무언가 부숴 버리고 싶은 욕구만이
내 온 몸을 짓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내겐 뜨거워진 머리를 식혀줄 차가운 것이 절실
했다. 끈적한 이 공간의 공기가 아닌 맑고 차가운 공기를 마시기 위해, 쓰러진 듯 바텐더
에 머리를 묻고 있는 녀석을 두고 거리를 뛰쳐 나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아직도 하얀
눈가루가 날리고 있는 밤깊은 거리를 걸어가며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들에 온 몸을 내
맡겼다.
"왜? 책임이라고 지게? 낳아서 줄 걸 그랬나?"
"언니가 이렇게 된 것도 다 저 더러운 새끼 때문이야! "
"아아아아악! "
난데없이 소리지른 내 모습에 분주히 길을 가던 사람들이 마치 미친놈 쳐다보듯이 힐끗거
렸지만 그런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터질듯한 내 가슴속의 응어리를 이렇게라도 토
해내지 않으면 결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심장
을 진정시키기 위해 부들거리며 떨리는 손으로 입에 담배를 꺼내물자, 이 빌어먹을 도시
에 나란 존재가 처음부터 버려진 듯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걸어가다 죽어 버려도 그 누구
하나 신경쓰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다 불을 붙이기 위해 주머니에 넣은 손에 오래된 지포
라이터가 쥐어지자 이 칠흙같은 어둠속에서 한줄기 빛덩이가 쏟아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
었다. 하얀 눈이 내리는 어두운 길에서, 눈을 감고도 확인할 수 있는 핸드폰 단축 번호를
오랫동안 누르고 있자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따뜻한 목소리가 차가운 핸드폰을 통해
들려오기 시작했다.
"자기야, 괜찮아? "
내 걱정부터 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이 사람이 있기 때문에 지금은 내가 이렇게 살아
갈 수 있다는 생각이 가슴속에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코 단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은 그녀가 너무나 보고 싶었다. 오래전, 이제는 그 기억의 흔적마저 희미해진 엄마의 그
따스했던 품속을 유경의 가슴속에서 다시 느껴보고 싶었다.
"유경아. "
"응. "
"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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