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야설

향기에 취하다 - 15부

본문

부드럽고 달콤한 그녀의 향기에 취하다...




<그녀.. 싹을 자르다>




설레임과 다시 찾아온 설레임.


풋풋함과 익어가는 농염함.


준석의 마음속에 들어온 두명의 여자, 그녀들이 핏줄을 나눈 자매라는 사실을 서서히 잊어


가는 준석이었다. 다른 외모 뿐 아니라 다른 여자로 각인되어 있는 준석의 머릿속의 여울과


샛별은 그의 고심과 다짐, 그리고 생각 자체를 헷갈리게 하고 있었다.


여울에게 가면 황홀한 그 향기와 숨결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샛별에게 가면 그녀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이 들어 또 다시 지키지 못 할 다짐을 하게 했다.


하지만 그런 기분이 싫지 않았다. 높은 곳에 매어진 외줄을 건너는 것처럼 위태롭고 그 위


태로움에서 전해져 오는 짜릿한 쾌감은 준석을 지배해 나갔다.


다만, 홀로있을 때 전해져오는 허망함에 그리고 미안함에 자책할 뿐이었다.




“여보~ 다녀올게~”




“언니! 나두 가~”




여유로운 한낮의 일이십분은 그렇게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하지만 출근을 준비하는 아침엔 그


별것도 아닌 시간은 엄청난 차이를 가져다 준다. 10분 늦게 나옴으로 30분이 늦어질 수도 


있고 5분 빨리 나옴으로 평소보다 훨씬 빠른 시간을 단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준석에게 


10분의 미묘한 차이는 단지 출퇴근 시간과 맞물리는 교통체증을 벗어나기 위함은 아니었다.




먼저 현관을 빠져나온 준석은 언제나처럼 얼룩무늬로 도색된 군용짚차를 보고 구석진 곳으


로 몸을 숨긴다. 사각지대, 현관문과 정원으로 이어지는 곳에 위치한 은밀한 공간, 준석은 


굳이 그곳을 키스존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쿵쾅거리는 발소리, 넘어질 듯 위태롭기까지 하게 들리는 요란한 소리와 미닫이문이 힘차게


젖혀진다. 짧은 단발머리가 굳게 묶인 채 허둥지둥 걸어나오는 여울의 손목을 잡아채자 그


녀는 힘없이 준석의 품으로 안겨왔다.




“혀.. 형부!”




현관문이 닫힌 것을 확인하고 여울의 입을 자신의 입으로 틀어막는 준석이다. 한껏 긴장된


여울의 몸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것이 느껴지고 곧 자신의 허리를 안아오는 여울의 손을 느


낀다. 달콤한 향내가 코를 자극하고 그 자극은 아랫도리를 아침부터 우뚝 솟아오르게 했다.


군복의 거친 느낌과는 다르게 걷어올린 소매로 나온 보들거리는 여울의 피부가 아찔하게 느


껴지고 곧 입안으로 밀려들어오는 말랑한 혀의 감촉에 빙긋 웃음을 짓는다.




“오늘은 껌 안씹었어?”




출근마다 이뤄지는 진한 키스, 첫날은 정신없이 덮쳐오는 준석이었기에 미처 준비를 못했던


여울은 다음날이면 포도향이 물씬 풍기는 껌을 씹었었다. 




“헤헷! 요깃지롱!”




어금니 구석으로 몰아둔 껌을 혀로 부드럽게 꺼내 입술로 물어 내보이는 여울의 입을 다시


준석이 덮친다. 포도향이 풍기기는 했지만 흔적을 찾기 힘들었던 그 흔적을 찾아 다시 혀를 


굴리는 그였다.




“쪽! 쪼~옵!... 쪽!”




뺏으려는 자와 뺏기지 않으려는 여울의 키스는 한치도 물러섬이 없어 보인다. 결국 강한 흡


입력으로 껌을 자신의 입으로 빨아들인 준석은 여운을 남기는 키스를 쪽 해준다.




“오늘은 오래 버텼네?”


“칫! 내일은 안 뺏길꺼야!!”




여유롭게 껌을 씹어보이는 준석은 바닥에 놓여진 가죽가방을 집어들고 약을 올리듯 해보인


다. 손 끝에 위태롭게 걸린 전투모를 굳게 고쳐 잡은 여울도 눈을 한 번 흘기고는 투박한 


군화소리를 선보이며 준석의 뒤를 따른다.


정원에 놓인 널찍한 돌을 밟으며 대문으로 향하는 둘은 짜기라도 한 것처럼 유리로 된 베란


다를 통해 샛별의 모습을 훑어본다. 


이른 아침임에도 단정한 머리와 단정한 옷차림을 한 샛별은 한껏 늘어진 식탁을 치우며 출


근하고 있는 남편과 동생을 눈인사로 배웅하고 있었다.




대문을 나서면서도 서로의 눈빛을 나누며 교감하던 준석과 여울은 각자의 자동차에 나눠타


면서도 서로에게 눈을 떼지 못한다. 운전병인 재용은 관심 없는 투로 먼저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었고 곧 군용짚차 특유의 음색을 뽐내며 도로를 미끌어져 나간다. 


씹던 껌으로 풍선을 크게 불어 부풀린 준석은 후르릅거리며 커져버린 풍선을 씹어 다시 입


안으로 우겨넣으며 시동을 걸었다. ‘띵동’ 소리가 들려오고 준석은 휴대폰의 메시지함을 뒤


적인다.




-형부! 이따 봐요~-




조용히 턱을 움직이며 껌을 씹던 준석은 삭제버튼을 누르며 입가에 미소를 번진다. 그리고


는 천천히 가속을 하며 좁은 골목을 벗어난다.




“좋은 아침~ 도린씨도 일찍 나왔네?”




유연하게 껌을 씹으며 사장실로 향하는 준석은 꾸벅 허리를 숙여 정중히 인사를 하는 도린


에게 들떠있는 마음을 표현한다. 그녀 곁을 스치자 그윽한 향수냄새가 코를 자극했지만 그


저 여인의 향기라고만 생각할 뿐이었다.


언제나처럼 수트를 옷걸이에 걸어두고 책상에 앉아 결재서류를 펼치자마자 도린은 앙증맞은


찻잔을 들고 준석의 방으로 들어온다.


정갈한 머리, 고운 화장, 그리고 세련된 옷차림의 도린은 도시적인 이미지를 담고 있다.




“고마워요... 오늘 따라 더 예뻐 보이네요?”




준석의 눈에 무엇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하다못해 집 어귀 공터에 던져진 쓰레기


들 조차도 아름다워 보일 정도로 준석의 기분은 연일 들떠있었다. 비단 스킨십으로 가까워


지고 있는 여울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이 얘기를 꺼낼 때 마다 난색을 표하던 샛별도 아이를 갖길 원하고 그렇게 되면 자신에게


처한 조금은 엉뚱하고 부적절한 관계들이 자연스레 해소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무


리 좋아하고 사랑한다 해도 아닌 건 아닌 것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문제인 것은 머리보


다 육체의 달콤함이 훨씬 강하다는 것이었다.




“저... 사장님...”




준석이 연신 웃는 얼굴로 차를 한모금 들이키려는데 표정없는 얼굴로 준석을 부르는 도린이


다. 틀로 찍어낸 것처럼 빈틈없는 생김새가 표정을 없애니 되레 차가워 보이기까지 하다.




“얘기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언가를 폭로할 것처럼 비장함이 감돌던 표정이 조금씩 풀려나간다. 그리고는 이내 미소를


머금는 도린이었다. 




“무슨 말을... 후훗! 아~~”




준석은 너털웃음을 지어내지만 도린이 말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바로 여


울과의 관계를 물으려 했던 것인 줄 알고 주저리 말들을 늘어놓는다.




“도린씨... 걱정하지 말아요. 도린씨가 생각하는 것만큼 심각한 게 아니라니까?”


“.............”




“그저 친한 형부와 처제 사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사장님, 저는 그게 아니라 요즘 일이 많이 밀려있는데 예전하고 틀리게 너무 노시는 게 아


닌가 해서......“




준석은 가슴이 뜨끔했다. 어느새 여울과 일들을 말하려던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조금


이라도 도린이 긍정의 얼굴을 했더라면 자랑스레 그간의 일들을 말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에 다시 정신을 가다듬는다. 모르긴 몰라도 도린을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


라고 생각을 했던 그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도린의 입에선 업무적인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에서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은 준석이었다. 생활 면면히 여울의 향기가 베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집에


서건, 차안이건, 준석은 시도 때도 없이 여울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제는 회사에서까지 무의


식적으로 그녀를 떠올리는 것에 익숙해져버린 준석은 그의 생활자체가 이미 엉켜져 가고 있


음을 깨달았다. 




‘엉망이로군.. 내 머릿속도, 회사도...’




평온하듯 보이지만 결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준석이었다. 처


음으로 사장자리에 올라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그저 철부지 사장을 바라보던 시선은 뜨


드미지근 했었다. 준석은 그 반응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지만 이내 이사진들이 들고 일어


서 큰 곤욕을 치뤘었다. 그때 힘이 되어주고 구심점을 잡아 업무를 가르쳐 준 사람이 바로 


김실장과 도린이었다. 선친의 경영방식을 준석 나름대로 발전시키고 정착시킬 수 있었던 큰 


원동력도 분명 그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도린의 말이 비수가 찔러 들어오듯 아린 이유기도 했다.




“현재 폭풍전야처럼 조용하긴 하지만 규정이 언제 바뀔지도 모를 일이고 또 회사 내부적으


로도 큰 움직임은 없지만 잦은 인사이동과 경쟁업체간의 경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금 더


회사일에 신경을 쓰셔야 할 것 같습니다.“


“.........”




“저야 뭐... 한 낱 일개 사원이라 잘 모르겠지만 김실장님 같은 경우 벌써 ‘태강’쪽에서 스카


웃 제의도 들어왔다고 합니다. 물론 사장님과의 의리 때문에 단호하게 거절을 했다고는 하


지만 사장님이 흔들리시면 사실 저희도 불안해지기는 마찬가지거든요“


“.........”




준석은 머릿속이 하얀 백짓장으로 변해 버리는 것만 같았다. 업무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회


사를 이끌어온지 2년여가 다 되어가지만 막힘없이 질타를 쏟아내는 도린의 말에 아무런 변


명도 할 수 없었다. 명백한 사실이었고 그만큼 회사일을 뒷전으로 밀어둔 자신의 탓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냉철한 판단과 기지로 사장에게 조언을 서슴치 않는 도린이 있


다는 것이 준석의 마음을 든든하게 만들어 준다.




“아... 그동안 내가 너무 신경을 못 쓴 것 같군요. 미안해요”




잠시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긴 준석은 머리를 지긋이 누르며 다시 고개를 든다. 도린의 말


이 잔소리처럼 들리기는 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의 자신을 돌아볼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었다.




“저한테 미안하실 것 까지는 없죠~”




그제서야 다시 미소를 보여주는 도린이었다. 하지만 그 미소가 무섭게 느껴지는 준석이다.


도린이 나가고 나서도 준석의 머릿속은 그저 하얗기만 했다. 원인도 알고 결론까지 훤히 보


이는 상황이지만 딱히 해결방법이 없는 상태, 그런 어처구니 없는 상태를 떠안고 하루를 보


내야만 했다. 점심도 거른 채 그간 있었던 서류들을 꼼꼼히 체크하며 도린의 말을 마음속에


새겨 넣는 그였다.




‘지금쯤 처제는 퇴근 준비를 하겠구만!’




준석은 시계를 바라보며 또 다시 여울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벌써 퇴근길을


자처하고 여울의 부대로 향할 그였지만 도통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문 하나를 열면 도


린이 차가운 웃음을 머금고 앉아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느껴졌다. 마치 감시 당하는 것 같


은 느낌을 받는 준석이었다. 학생시절 하기 싫은 공부를 하라는 엄마의 말에 그저 책 하나


달랑 펴놓고 책상서랍만 정리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자신


을 발견하자 한심스런 한숨이 붉어져 나온다.




‘후우~~ 마음을 못잡겠어’




괜시리 마음이 무거워지는 그였다. 심지어 자신의 그릇의 크기 마저도 의심스레 가늠해보고


있었다. 단순히 여울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 덕분에 자신의 삶


이 더욱 즐거워지고 행복해지는 것을 거부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준석은 출근할 때 보내온 여울의 메시지를 떠올렸다. 일에 관심이 없고 할 일이 딱히 없음


에도 보여주기 위함이란 본인 스스로의 판단아래 메시지를 작성해 나간다. 


샛별이 아닌 여울에게...




메시지를 전송하자마자 문에서 들려오는 노크소리에 얼른 휴대폰을 닫은 준석은 시선을 문


으로 향했다. 어김없이 도린이 문을 열며 자신에게 시선을 보낸다.




“사장님 퇴근 안하시나요?”


“버..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먼저 들어가요... 나는 그동안 소홀했던 일 좀 더 봐야 할 것


같은데...“




“야근 하시게요? 야근 할 정도로...”


“아니예요.. 여전히 금융시장도 불안하고, 지진 같은 천재지변 같은....”




준석은 자신이 말을 이으면서도 무언가 허술하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었다. 상관여부가 아


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천재지변까지 들먹이며 일을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을 도린에게 털어


놓는 것이 자신 스스로도 우습기만 할 뿐이었다.




“그럼, 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죄송해요~ 오늘은 제가 약속이 있어서 사장님 못 도와 


드릴 것 같습니다.“


“아아~ 괜찮아요. 이젠 나 혼자도 할 수 있어요... 오늘 수고 많았어요~ 조심해서 들어가


요~”




도린은 속으로 웃고 있었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퇴근까지 미뤄가며 야근을 자처하는 준석


의 모습이 순진해보였다. 준석같은 사장의 얘기는 어디서 듣도 보지도 못한 그녀였다. 그만


큼 책임감도 있고 순수하고 순진한 착한 사장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그에게 끌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곧장 집으로 향한 도린은 시원하게 사워를 마치고 나와 발가벗은 채로 화장을 고친다.


분홍빛의 유두가 여전히 순결해 보이고 군살 하나 없는 빛나는 몸매가 해가 지는 석양에 비


쳐 붉은 빛을 반사한다.


짙은 아이라인, 조금은 날카롭게 그려 올린다. 전체적으로 투명한 피부톤을 역동적으로 고


쳐 나가는 도린은 누가 봐도 다른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다. 술집여자처럼 고혹한 매력을 풍


기는 화장법이지만 결코 싸보이지 않았다. 되레 모델처럼 섹시하고 세련된 느낌의 그녀였


다. 일명 스모키라고 하는 화장법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도린은 시계를 물끄러미 바라보


다가 다시 옷을 챙겨 입는다. 




호피무늬가 수놓여진 브라와 팬티, 역시 티팬티였다. 짙은 화장과 호피무늬가 만나 이질적


인 섹시미가 물씬 풍겨나오는 그녀의 황금비율 몸매위로 황금색 민나시 원피스가 올려진다.


밤무대 의상처럼 화려하고 빛나는 황금빛이 아닌 빛나는 소재에 짙은 노랑의 느낌이었다. 


한껏 틀어 말아올린 머리로 날렵하게 뻣은 목이 시원해보인다. 살짝 흘러내린 머릿칼은 아


찔했고 허전한 목 위로 검은 흑진주 목걸이가 매치된다.


그리고 콤팩트 하나와 휴대폰 하나만 간신히 들어갈만한 작은 핸드백을 집어 들고 스틸의 


느낌이 풍기는 높은 굽의 샌들을 신고 아파트의 문을 나선다.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뭇남성들의 시선이 따가울 정도의 도린이다. 자신도 거울에 비친 자신


을 보고 한동안 빠져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하이얀 어깨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원피스, 맵시있게 올라선 가슴선이며 가늘게 굴곡진 허리


와 엉덩이선을 따라가다 끊어지는 짧은 치마길이에 여자들마저 시기의 눈초리를 보낸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는 듯 철저히 그들의 시선에 아랑곳 않고 가볍게 손을 흔들어 택시를 잡


아탄 도린은 약속장소로 향한다.




크지는 않지만 어둠이 드리운 고급스러운 바에 들어서자 일순간 남자들의 시선이 꽂혀들어


오는 느낌에 가슴을 더욱 내밀어 걷는 도린이었다. 두리번거릴 새도 없이 멀찍이 손을 흔들


어 보이는 남자 곁으로 다가간다. 겉보기에도 고급스런 이미지가 물씬 풍기는 곱상한 남자


가 음흉한 눈빛으로 도린을 맞이한다.




“이야~ 이게 누구야! 최도린! 오늘 스타일 죽여주는데~~~”




천천히 남자곁으로 다가간 도린의 몸매를 위아래로 훑던 그는 끈적하면서도 장난기 서린 말


을 뱉어내며 비아냥대고 있었다. 종착지를 찾아간 도린에게 머물었던 뭇남성들의 시선도 이


윽고 뿔뿔이 흩어져버리고 구석진 공간에서 발렌타인을 마시던 그는 얼른 잔을 내밀어 도린


에게 건넨다.




“왠일이야? 한동안 연락도 없더니...”


“왠일은 서방이 마누라 찾는데 이유가 있겠냐?”




“치~ 미친놈! 누가 니 마누라야?”


“튕기니까 오늘따라 더 이쁜데?”




둘의 대화는 마치 부부의 대화처럼 끈적하고 도발적이다. 사납게 쏘아대는 도린의 말투에 


그저 실실거리는 그는 도린의 말투가 그리웠다는 듯이 씽긋 눈웃음을 지어내며 잔을 들어 


술을 넘긴다.




“근데 정말 왠일이야? 왜.. 요즘은 레이더망에 걸리는 여자들이 별로 없나보지?”




도린과 남자, 재원은 대학시절 학교에서도 유명한 연인이었다. 얼굴, 몸매, 그리고 성적까지


월등했던 퀸카와 부잣집 아들이란 명성에 걸맞게 외제 스포츠카에 귀티나는 외모의 재원의


만남은 말그대로 이슈였다. 학과 내에서만이 아닌 학교 전체가 떠들썩할 정도로 그들의 만


남은 무수한 말들과 소문을 자아내기도 했었다.


하지만 재원의 바람기와 여성편력 덕분에 그들의 공식적인 만남은 1년을 채우지 못하고 갈


라서게 됐고 아이러니하게도 편한 친구처럼 지내온 것이 벌써 7년이란 세월을 지나고 있었


던 것이다. 




“큭크... 오늘따라 우리 도린이가 너무 보고 싶더라~”




처음과는 달리 낮아진 음성에 눈망울을 번뜩이는 도린이다. 단 한번도 자신앞에서 어두운 


얼굴을 한 재원을 본적이 없었다. 언제나 밝고 생각없이 활발한 그의 모습과는 대조적인 심


각한 얼굴이 적응이 되진 않았지만 그저 묵묵히 지켜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싱겁긴... 취했냐?”




대답 없이 고개만 가로젓는 재원은 도린의 손움직임을 따라 잔을 기울인다. 그리고 가득 차


자마자 한잔을 또 들이킨다.




“천천히 마셔~ 뭐가 그리 급하다고...”




다시 빙긋 웃는 재원의 모습에 도린은 심장이 멎을 듯 설레였다. 풋풋한 학생시절 자신에게


자주 보여줬던 순진무구한 얼굴표정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흔들리게 했던 


그 담백한 웃음, 고독함에서 묻어나는 그 표정에 지난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도린


이다.




비록 재원의 바람기 때문에 헤어지게 됐지만 도린은 난생처음 남자의 사랑을 받아봤던 기억


을 떠올렸다. 분명 재원보다 자신이 그를 훨씬 좋아하고 사랑했지만 그것따윈 중요치 않았


다. 언제나 예쁘다고, 귀엽다고, 쓰다듬고 보듬어주던 재원의 따스했던 손길이 기억난다. 어


릴때의 풋풋한 사랑 놀음이었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이 주는 그 기억만큼은 결코 어리지 않았


다. 




순진했다. 그리고 순수했다. 재원을 만나기 이전의 도린의 모습은 그러했다. 여느 여학생들 


처럼 떡볶이를 좋아하고 작은 선물에 설레던, 여리고 착했던, 세상의 더러운 때가 묻기 이전


의 그녀의 모습은 글래머러스한 몸매가 부각되지도 않았고, 도자기처럼 빛나는 피부도 그저


뻘속에 파묻힌 조개처럼 모습을 드리워내지 않았었다.




공식적인 연인선언 첫날... 아꼈다기 보다는 개척되지 않은 순결함을 재원에게 주었다. 실제


로 살이 찢어지는 고통이지만 도린은 떨리는 입술을 깨물며 재원에게 웃음을 보내주었다. 


그의 배경이 좋았다기 보다는 처음으로 건네준 사랑에 대한 보답이었다. 흐르는 눈물이 야


속하기만 했던 도린이었다. 그땐 왜 눈물이 터져 나왔는지 가늠할 수가 없었지만 아픔보다


는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다는 착각이 들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순수한 도린의 마음에 대한 재원의 대답은 사랑 대신의 물질이었다.


대부호의 아들이기도 했지만 학생의 신분으로 사주기엔 비싼 가방이며 옷들이 데이트날 마


다 도린의 손에 쥐어졌다. 그것이 싫지는 않았지만 그것보다 더욱 부드러운 손길을 더욱 바


라던 도린이었다. 그러나 한사코 거부를 해도 재원의 대답은 언제나 한가지였다. 




‘내가 너한테 줄 수 있는 건 이런 거 밖에 없어...’




재원의 옷 선물에 남들보다 부각되는 몸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의 선물 덕


분에 친구들 사이에서 부러움의 눈초리를 따갑도록 받기도 했다. 원래부터 이상형이 돈 많


은 남자였지만 그것은 그저 장난반 농담반의 대답들이었다. 하지만 돈이라는 족쇄에 서서히


수갑을 차고 발목을 붙잡힐수록 그 굴레는 벗어나기 힘들었다. 


그리고 곧 그것은 생활이 됐다.




“재원아~”




재원은 말없이 고개를 들어 눈동자를 빛냈다. 




“니가 예전에 나한테 명품백 대신 사랑을 줬으면 어떻게 됐을까?”


“..........”




첫인사 후 재원도, 그리고 도린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래서 기억하지 않아도 될 옛기억


을 떠올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말없이 다시 고개를 살짝 수그린 재원은 말이 없었다. 옛


기억을 더듬던 도린도 언젠가는 물어보고 싶은 것이었지만 이리도 늦게 묻게 될 줄은 몰랐


다. 




“바보... 지금에서야 말이지만 너랑 다시 잘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으니까 편하게 얘기


해봐~“


“..........”




그저 빙긋 웃고 마는 재원을 바라보던 도린은 연거푸 술잔을 기울인다. 성격상 누구의 탓을


하지 않지만 괜시리 앞에 앉은 재원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저 보듬어주던 손길에 자신


의 모든 것을 주었을 뿐인데 돌아오던 것은 값비싼 선물들뿐이었다. 더 뜨겁고 부드러운 손


길을 원했지만 결국 돌아온 것은 물 흐르듯 유연한 이별뿐이었다.




“왜? 혹시 너 나한테 미안하냐?”


“........도린이... 너.. 많이 변했다~”




재원은 무겁도록 닫혀있던 입을 힘들게 열었다. 순차적으로 조금씩 변해온 도린이었지만 그


녀의 옷차림새가 하루아침에 이리도 야하게 변해버린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그였다.


셀 수 없이 많은 여자들을 만났고 상처도 많이 주었던 재원이지만 눈에 보이도록 타락해버


린 도린의 모습에 괜시리 미안함이 들었던 것이다.




“미안해... 도린아~ 사실은 오늘...”




도린은 재원의 말을 막아서며 말을 잇는다. 그의 속을 훤히 꽤뚫어 보고 있는 듯하다.




“미안하긴... 그리고 알아.. 무슨 말 하려는지... 가자! 나도 모처럼 백하나 생기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눈물이 솟아 오르려는 도린은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아련함을 누르고 눌러야만 했


다. 작은 추억에 얽매이고 있는 자신이 싫어 이제는 그 추억을 놓아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자신을 버렸다. 자신을 가방하나에 팔아 먹은듯한 느낌에 자존심도 상하고 불쾌했지만 지금


까지의 행동과는 다를 게 없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대놓고 밝힌 것, 그뿐이었다.


평소처럼 싫은척, 튕기는척, 호텔방으로 따라 들어가 하룻밤만 보내면 될 일이었지만 이제


는 자신 스스로가 그 끈을 잘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뭐해? 싫어?..... 싫으면 간다~..........그리고 앞으로 연락하지 마!”




말없이 앉아있는 재원에게 도도하게 마지막 말을 건네고는 멋진 걸음으로 바를 빠져나간다.


‘다른 여자에겐 상처주지 마.. 너 그 따위로 살지 마~.. 행복해라! 잘 먹고 잘살아라!’ 해주


고 싶었던 말들이 뒤늦게 머릿속에서 엉키고 엉킨다. 그리고 바보같이 뒤를 돌아본 자신을


발견한 도린은 돌아보지 말자는 다짐과 함께 밤거리를 활보한다.




어쩌면 그가 다시 곁으로 돌아올 수도 있을거라 생각했다. 방황이 끝나면 자신에게 돌아올 


수도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즐기는 만큼 자신도 즐기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만약


돌아온다면, 다시 재원을 받아준다면 스스로가 억울하지 않게 말이다.


하지만 그 싹과 끈을 모조리 잘라내고 말았다. 기다리기 지쳤다기 보다 훨씬 좋은 남자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시원섭섭하다’ 라는 말이 어떤 기분인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 많이 마시지는 않았지만 잘게 퍼지는 술기운에 노곤해지기도, 기분이 좋


아지기도 하는 도린은 애써 밝은 표정을 지어낸다.




돈도 좋다. 그리고 그것으로 살 수 있고 마련할 수 있는 큰 집과 좋은 자동차, 그리고 옷가


들이며 먹거리까지... 분명 간과할 수 없는 행복의 척도에 들어있다. 하지만 도린이 바라고 


원하던 것은 비단 그런 물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준석이 그녀의 마음에 들어온 것, 그것은 그의 재력 뿐 만이 아닌 그의 사랑관이 도린의 마


음을 흔들어 놓은 것이다. 자상함, 그리고 애정이 듬뿍 담긴 그의 말투가 수년을 바라며 기


다려온 재원을 잘라내기엔 전혀 부족함이 없는 이유였다. 유부남이라는 결정적인 것을 포함


해도 재원은 준석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도린의 마음을 훔쳐간 남자였다.


그녀가 바라는 단 한가지. 따듯한 손길과 사랑 넘치는 눈빛.. 그뿐이었다.




도린이 번뜩 정신을 차렸을 때는 자신도 모르게 이끌려온 회사 앞이었다. 혹시나 야근을 한


다고 했던 준석이 있을까 하는 기대감을 안고 유유히 흘러 온 것인지도 모를일이다. 서울시


내에선 그닥 높은층에 끼지도 못하지만 15층을 올려다보려니 목줄기가 뻐근할 정도이다. 


눈으로 층수를 세어 올라간다.




‘1,2,3,4......8층....9층.....10층’




사장실과 대회의실, 그리고 비서실이 위치한 10층의 한 구석에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전히 술기운이 만연한 그녀였지만 천천히 1층의 로비로 발길을 옮긴다. 날렵한 구두굽이


대리석 바닥과 닿으며 건물내에 또각이는 울림이 들려온다.




‘점심도 안 드셨는데... 저녁도 거른 거 아냐?’




조금은 알딸딸한 기운에 사로잡힌 도린이었지만 다시 몸을 돌려 근처의 상가로 향한다. 언


제나 야근을 할 때마다 사다먹곤 하던 초밥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도린은 초밥과 롤 셋트


를 사서는 다시 회사로 향한다.


자신도 물론 저녁을 먹지 못해 출출한 것도 있었지만 업무적이 아닌 순수하게 누군가를 챙


겨주기 위해 마음을 쓰는 것이 얼마만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생소할 따름이다. 사랑이란 


주는 사람이 훨씬 행복하다는 말이 도린을 두고 하는 말인 듯 했다.




엘리베이터가 멈춤 없이 10층으로 내달았고 언제나 가지고 다니는 카드키를 대자 문의 걸


림쇠가 찰칵 소리를 내며 해지가 된다. 벨을 누를 수도 있었지만 원래 이런 것은 예상치 못


하게 들이닥칠 때가 훨씬 쾌감이 큰 법이란 것을 모르지 않는 도린이었다.


그녀답지 않게 가는 다리를 조심스레 옮겨 사장실을 향한다. 구두굽이 큰 소리를 낼까 생각


같아선 벗고 들고 걷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지만 대신 발걸음을 조심스레 하기로 마음먹는


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재원과의 있었던 일도 어느새 새카맣게 잊고 온통 


머릿속은 준석의 놀란 표정을 기대하고 있었다. 


조심조심, 그리고 살금살금... 잔뜩 경계자세를 취한 한 마리의 암고양이가 독안에 든 쥐를 


사냥하는 모습이다.




“사장님!”




도린이 사장실의 문을 활짝 열며 외쳤을 때는 싸늘한 공기만 되돌아오고 있었다. 환하게 켜


진 불빛, 그리고 너저분하게 널린 각종 서류들, 그렇지만 도린이 가장 먼저 눈길을 가져간


곳은 준석의 양복상의가 걸린 옷걸이였다.




‘수트는 있는데... 화장실 갔나? 하필 이 타이밍에,,,으잇!’




계획이 틀어지자 가늘게 신경질 섞인 탄성이 도톰한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다. 그리고 접대


테이블이 있는 소파로 발걸음을 옮겨간다. 계획이 틀어지자 매끈한 양 어깨가 축 쳐져 내린


그녀였다.




“으악~~~!!!!!”




도린은 등뒤에서 어깨를 움켜잡는 거친 손이 느껴짐과 동시에 변태스럽기 그지없는 굵은 남


자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엉덩방아를 찧어버린다. 


차디찬 바닥과 탄력있는 도린의 엉덩이가 철퍼덕하는 소리와 함께 밀착되는 것은 그녀의 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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