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야설

향기에 취하다 - 13부

본문

부드럽고 달콤한 그녀의 향기에 취하다...




<전쟁 통에도 꽃은 핀다>




인생은 치열한 경쟁과 방어의 공방을 펼치는 전쟁이다. 그리고 그 삶속엔 여러 가지들이 공


존한다. 일, 사랑, 때로는 질투에 이글거리는 증오까지..... 하지만 속으로 파고들어 곪아가는 


사랑의 굴레에는 정작 답이 없다. 


신의 눈엔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한 그들의 모습이다.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들의 사랑이야기며 그저 기우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들과 가장 친밀한


관계의 샛별, 그리고 그들이 모르는 다른곳에선 이기적인 마음에 행복한 울타리를 짖밟으려


는 두 남녀의 의기투합은 누군가의 인생에서 가장 큰 고비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신이 아닌 이상 알아차릴 재간이 없다. 




[어? 형부~]


[처제.. 바빠?]




운전병인 재용을 막 부르려던 찰라 걸려온 준석의 전화에 화색을 띠는 여울은 얼른 거울앞


으로 다가선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얼굴 면면히, 그리고 잘 다려진 군복을 살피며 준석


과 통화를 나눈다.




[아뇨.. 이제 집에 가려던 참이예요 얘기하세요~]


[그래? 내가 태우러 갈까?]




[에이... 형부 피곤 하잖아요~ 나야 덜덜거리는 짚차보단 승용차가 더 편하기 하지만..]


[10분정도 있다가 슬슬 내려와~ 지금 가고 있는 중이니까]




준석은 이미 여울의 부대를 향하고 있었다. 이미 출발했다고 하면 다시 차를 돌리면 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의 행동은 거칠것이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아직 출발전인 것을 알고 나


서는 휘파람까지 기분 좋게 불어낸다.




전화를 끊은 여울은 군복의 옷깃을 들어 혹여 땀냄새는 나지 않을까 킁킁거린다. 그리고 서


랍속에 넣어둔 파우더를 꺼내 기름진 피부를 뽀얗게 고쳐나간다. 매일은 아니지만 종종 부


대로 태우러 오는 준석을 기다리는 이 시간이 가장 좋은 그녀이다.


군인답게 빠르게 준석을 맞을 채비를 마친 여울은 지휘통제실에서 막 나가려는 상현을 붙잡


는다. 




“상현아~”


“병장 정상현”




“재용이한테 내일 늦지 말고 오라고 하고. 너도 이제 좀 쉬어라”


“알겠습니다!”




여울이 간결하게 말을 맺고 지휘통제실을 빠져 나와 부대 입구로 향한다. 어느 부대나 그렇


듯 많은 나무들이 잎사귀를 부대끼며 잔잔한 선율을 흘려낸다. 아직도 곳곳에서는 제초작업


을 하는 사병들과 그들을 지켜보고 앉아 게으름을 피우는 부사관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뭐라고 한마디 하려다 한껏 오른 기분이 상할까 관둔다.


퇴근을 하는 여울을 알아보고 경례를 올려붙이는 사병들을 뒤로하고 언덕받이를 걷는다. 파


란 하늘이 높아진 것을 보니 곧 가을의 문턱도 머지 않았음을 느끼면서 말이다.




“어? 1중 퇴근하나?”




1중대장을 줄여 1중이라고 부르는 그의 버릇은 여전하다.


당직완장을 찬 3중대장인 형오가 언덕받이를 오르고 있다. 늦게까지 이어지는 제초작업의 


상황을 둘러 본 것으로 보인다.




“충성! 선배님 오늘 당직이십니까?”


“하아... 새까만 후배도 퇴근하는데 말이야...”




“저는 내일입니다. 그럼 수고하십쇼! 충성!”


“아! 1중!!”




“예.. 선배님!”


“아... 아니다~ 조심하라고... 조심해서 들어가라고”




뭔가 말을 숨기는듯한 느낌을 받은 여울이지만 기다릴 준석 때문에 발길을 돌린다. 싱겁게 


말끝을 흐린 형오의 말을 그저 무심코 지나치기엔 의구심이 들었지만 멀어지는 그의 등판을


힐뜸 바라만 볼 뿐이었다.




‘뜬금없이... 선배도 참~’




여울은 사뿐한 발걸음으로 부대의 정문을 빠져나간다. 위병들이 힘찬 경례에 웃음으로 답해


준 뒤 위병소를 지나 날창거리는 발걸음을 옮기는 여울의 눈에 비상깜빡이를 켠 채 도로 한


켠으로 서 있는 준석의 차가 보인다. 그리고 보닛에 기댄 채 담배를 문 훤칠한 사내가 뛰어


오는 여울을 반긴다.




“형부~~우~~~~~”




100m나 되 보임직한 멀찍한 곳에서부터 긴 팔을 허우적거리며 아이처럼 뛰어오는 여울이 


귀엽기만 하다. 군복만 입혀놓았지 마중 나온 아빠를 본 듯 뛰어오는 어린 초등학생의 모습


과 흡사하다.


여울이 가까워 오자 담뱃불을 밟아 끈 준석의 입가엔 너그러운 웃음이 한가득이다. 그리고


손 뻣으면 닿을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을 때 나지막하고 부드럽게 말을 건넨다.




“왜 뛰어~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피~ 내가 애긴가? 안 넘어져요~~~”




“그래도... 실수해서 넘어질 수도 있잖아”


“푸훗! 맨날 애기 취급한다니까~”




언제나 여울을 바라보는 준석의 눈빛은 어른스러웠다. 뛰면 넘어질새라, 혹여 급하게 먹으


면 체할새라 걱정을 한웅큼씩 꺼내놓는 그였다. 처음엔 철없는 자신을 놀리는 것만 같아 듣


기 싫었던 여울이었지만 준석의 마음을 알고 난 후 부터는 그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져 좋기


만 했다. 그런 자상함과 포근함에 빠져드는 그녀였던 것이다.


무뚝뚝하고 호랑이처럼 무섭기만 하던 아버지에게선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사랑과 관


심, 그리고 걱정과 염려였다.




“가자!”




여울에게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고 운전석으로 간 준석은 좁은 2차선 도로에서 차를 돌리기


시작했고 방향을 바꾼 차는 곧 부드럽게 미끄러져 나간다. 


에어컨으로 시원해진 차안이 조용하다. 어색함이 아닌 풍요로운 사랑이 가득 넘쳐나는 듯 


하다.




“처제~ 오늘 맛있는 거 먹고 들어갈까?”


“언니랑 같이?”




“샛별이 오늘 대학 동기 모임 갔어~”


“그래요? 그럼 집으로 가요! 내가 맛있는 김치볶음밥 해줄께요”




“왜~ 맛있는 거 먹자니까... 처제 귀찮아하는 거 싫어하잖아”


“피~ 내가 모처럼 솜씨 발휘를 좀 해 보겠다는데... 그래요 그럼! 우리 아~~~주 비싼 랍스


터 먹으러 가요”




“랍스터?”


“아님 그냥 집에 가서 김치볶음밥 해주는 대로 먹던지!”




준석은 볼풍선을 만든 여울의 볼을 살포시 꼬집는다. 말랑하고 여린 피부가 손 끝에 닿아 


으스러질 것만 같은 느낌이다. 연두부 같이 여린 피부가 너무도 보드랍다.




“아야! 이젠 허락도 없이 막 만지네? 형부! 우린 이러면 안돼는 사이잖아요~”




아프지도 않으면서 볼을 감싼 여울이 꼬집어 처제와 형부 사이라는 말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것이 장난임을 모르지 않는 준석은 다시 한 번 그녀의 손을 피해 볼을 잡는다.




“형부한테 버릇없이 구는 처제 혼내는 건데 안돼긴 뭐가 안돼?”




이번엔 조금 세게 꼬집은 손을 오래도록 놓지 않는다. 준석에게 볼을 잡힌 여울은 고개를 


흔들기도 하고 집게손가락을 벌려보기도 하지만 절대 벌어지지 않는 손이다. 집게손가락을


벌리려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놓치지 않으려 힘을 준 준석의 손은 고통까지 줄 만큼 강하


게 쥐어진다.




“아~ 아... 혀..형부! 지..진짜 아파..”


“까불거야.. 안까불꺼야?”




“형부~ 안까불께요... 진짜... 멍든단 말이야~”


“거짓말...”




진짜로 아파하는 여울의 볼에서 천천히 손을 떼자 손바닥으로 볼을 부비는 여울의 눈이 가


자미처럼 길게 찢어진다. 그리고 햇빛가리개를 내려 작은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는 여울은 


준석의 팔을 세게 꼬집는다.




“아야!....아파라~”


“형부! 책임져~”




“뭘?”


“멍들었잖아~ 이씽...”




준석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돌려 여울의 볼을 바라본다. 점점 어둑해지는 하늘과 창


문이 있긴 하지만 사방이 막힌 차안은 멍을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준석의 눈엔 멍자욱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던 것이다.




“뻥치네! 멍 안들었구만!”


“진짠데... 형부 미워!”




잔뜩 볼멘소리를 뱉어내는 여울은 계속해서 거울에 볼을 비쳐본다. 행동 하나하나에서 풍겨


져 오는 느낌이 정말 멍이라도 든 느낌이다. 뒤늦게 멍자욱을 남긴 것이 미안해진 준석은 


도로 한켠에 차를 세운다. 그리고 여울의 얼굴을 바라본다.




“어디 봐봐... 멍 많이 들었어?”


“요기... 요기...”




여울이 손가락으로 왼쪽 볼을 가리킨다. 광대뼈 아래 살집이 가장 많은 곳엔 여린 피부만큼


이나 여린 멍자욱이 보인다. 시퍼렇진 않지만 분명히 멍자욱이었다.




“진짜네... 처제, 미안해... 장난 친다는 게 그만”


“헤헤헤... 괜찮아요!! 뭐 며칠 지나면 없어지겠죠!”




울상일 것 같았던 여울의 얼굴은 금세 환하게 용서의 뜻을 내비친다. 하지만 여울의 얼굴에


아니 여자의 몸에 처음으로 상처를 낸 것이 미안한 준석은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물씬 맞으


면서도 흘러나오는 땀을 닦아낸다. 




언제 뾰루퉁했냐는 듯 집으로 향하는 내내 연신 조잘거리는 여울의 입이다. 맑은 피부막에 


비친 빠알간 입술이 무척이나 탐스럽게 보인다. 중대원들과의 면담을 통해 알아낸 것들이며


상현의 조언, 때로는 부사관의 게으른 모습들까지 그림을 그리듯 생생하게 묘사를 해낸다. 


그런 여울의 얘기를 들으며 맞장구를 치는 준석은 그 이야기가 지루하거나 따분하게 느껴지


지 않는다. 온통 일방적인 여울의 이야기지만 그녀의 직장생활을 면면히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였기에 한 글자라도 놓칠까 귀를 기울이고 있다.


집에 거의 다다랐을 때 쯤 숨을 고르는 여울을 바라보며 멍들게 한 볼을 매만져본다.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러워진 손길이었다. 그리고 볼을 내밀고 있는 여울의 모습도 태연하다. 그


녀 역시 그의 손길에 마음은 평안하고 들뜰 뿐이었다.


부적절한 그들의 행동을 떼어버리기라도 할 듯 시끄럽게 준석의 전화벨이 차안을 수놓는다.


매만지던 볼에서 손을 뗀 준석은 발신번호를 확인하고 나서 여울을 바라본다. 그런 여울도 


전화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눈치를 채고 일부러 티나게 어깨까지 돌려 창밖을 내다본다.




[여.. 여보세요?]


[저예요... 집이예요?]




[아니, 이제 거의 다 왔어~ 재밌게 놀고 있어?]


[네~ 식사는요? 냉장고 열면 반찬 덜어서 랩으로 싸놨으니 국이랑 덥혀서 드시면 돼요]




[샛별이도 참... 내가 어린앤가? 걱정 말고 재밌게 놀다 와]


[또 라면 먹을까봐 그러죠]




[걱정 마~ 처제하고 잘 차려서 먹을테니까]


[알겠어요. 조금만 더 있다 들어갈께요~]




이미 저녁시간이 지났음에도 일찍 들어오라거나 의심 따윈 하지 않는 준석에게 항상 고마운


샛별이다. 자신을 존중하는 만큼 그녀의 주변인들에게까지 언제나 신사적인 모습만 보이는 


준석은 만남의 자리마다 빠지지 않는 화젯거리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화제도 점점 무뎌


졌지만 커피숖에 앉아 후식을 즐기는 샛별의 친구들은 부러움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들도 알다시피 언제나 새침한 샛별이었다. 우아하게 커피잔을 들어 가볍게 한모금을 넘기


고 잔을 내려놓을 때는 손에 쥐고 있는 화장지로 잔에 묻은 립스틱 자국을 지운다. 




“샛별아~ 준석씨는 잘 지내?”


“그럼, 잘 지내지...”




“지지배! 처음엔 준석씨 싫다고 그렇게 도망만 다니더니... 살아보니까 그만한 남자도 없다


는 거 알겠지?“


“얘도 참....”




대학시절 가장 절친했던 은미가 먼저 준석을 물어온다. 소개팅부터 결혼전까지도 준석에 대


한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걱정해주고 조언해주던 친구였다. 지금은 어엿한 모회사 디자인


실의 차장을 맡고 있는 은미는 유일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그런 친구였다.




“근데 결혼한 지 꽤 지났잖아... 왜 아기 안 갖어?”


“응.. 그이도 좀 바쁘고~”




“오호라~ 아직도 신혼인 사이를 방해받고 싶지 않다 이거지?”


“아.. 아니야~”




별것도 아닌 말에 얼굴을 붉히는 샛별이다. 주위의 동기들도 부러움 반, 시기 반의 눈초리


로 쳐다보며 웃음을 짓는다. 놀리는듯 한 느낌에 부끄러웠던 것이다. 




“아니면? 호.. 혹시~”




은미가 동기들의 눈을 피해 조용하게 묻는다. 혹시 라는 의구심은 서로의 몸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물음을 모를 리 없는 샛별이었고 그녀의 걱정스런 물음에 빙긋 웃으며 손사


레를 친다.




“아니야~ 아무렇지도 않아”




자신이 괜한 걸 물었다는 듯 은미는 조용히 찻잔을 들어 목으로 넘긴다. 저녁을 먹자마자 


남자들은 뭐가 그리 바쁜지 자신들끼리 떨어져나갔고 8시가 조금 넘자마자 여자동기들도 


이런저런 핑계들을 대가며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원래 단합과는 거리가 먼 동기모임이었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파장의 분위기는 시간을 앞당


기고 있었다. 이번은 8시경이라면 다음 모임은 이보다 훨씬 빨리 파장을 면치 못할거라는 


생각이 들 때 쯤 커피숖에는 샛별과 은미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요즘 하는 일 잘 돼? 차장 진급해서 이젠 어깨에 힘 좀 넣고 다니겠는데?”




원래 샛별과는 정반대로 밝고 사교성 짙은 은미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주위 테이블에서 


눈총을 받을 정도로 시끄럽게 웃고 떠들던 그녀는 어느새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뭐... 내 능력인가... 너도 알잖아~ 우리 이모부 회사인거”


“그래도~ 능력이 있으니까....”




“사실은 나 요즘 너무 힘들어. 부하직원들은 무시하고, 상사들은 낙하산이라고 색안경끼고 


바라보고......“


“..........”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는 은미는 찻잔의 손잡이만 만지작거린다. 그 밝고 활기차던 그녀


의 모습이 너무도 어두워져 버린 것을 보자 그녀가 얼마나 마음적으로 고생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것만 같았다.




“너는 어때? 하긴 잘나가는 사장님 사모님인데...”


“사실은 나도 좀 답답하긴해... 몸은 편한데 너무 도태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




“넌 다시 일 시작해도 되잖아~ 경력도 좋고 뭐 스펙도 되니까”


“근데, 솔직히 겁이 나기도 해... 언젠가 임신을 하면 또 그만 둬야 하고...”




시아버지가 살아생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이었다. 아주 능력 있는 커리어 우먼이 되기


를 바랐던 반면 시부모와 남편을 잘 내조하는 현모양처의 꿈도 가지고 있던 샛별이었다. 하


지만 현모양처라는 것이 스펙을 쌓고 고급 경력을 쌓는 것 보다 더욱 힘들다는 것을 서서히


느끼는 그녀였다. 




“왜 그만둬? 그냥 출산휴가로 때우면 되지~”


“아니! 그건 내 스스로가 용납되지 않는 핑계야... 분명 그렇다 치더라도 나는 결국 이도저


도 아닌 아줌마 사원으로 전락해버릴걸? 그러느니 관두는 게 낫지“




샛별은 확실한 성격에 맞게 자신의 생각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은미 역시 샛별의 말에 크게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다시 한 번 손목시계로 눈을 맞추는 샛별은 다시 찻잔을 집어 


들어 입으로 가져간다.




“하긴... 샛별이 니 말도 맞는 말이다...”


“기지배. 근데 갑자기 왜 그렇게 얼굴이 무거워졌어? 너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거야?”




좀처럼 펴지지 않는 은미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말 못할 고민을 가지고 있는 듯 한 표정을


해서는 여전히 안절부절이다. 가끔씩 넋을 놓기도 하고 싱겁게 샛별을 불렀다가도 서둘러 


화제를 바꿔놓기도 한다. 그런 은미가 이상하게 보이는 샛별이다.




“은미야! 너 왜 그래~ 진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거야?”




하지만 은미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여간 해선 꼬치꼬치 캐묻는 성격이 아닌 샛별이지만


힘겨워하는 그녀의 얼굴에 초점을 맞추고 말을 기다린다.


은미는 조용히 창밖을 응시한다. 어느새 까맣게 드리워진 어둠으로 무언가를 본 듯 눈동자


도 움직임을 멈추었다. 깊은 생각에 빠진듯한 그녀는 다시 찻잔을 테이블에 올리며 빙긋 웃


음을 지어 보인다.




“사실은 나 요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답답할 정도로 막힌 숨을 틔워주는 은미의 한마디에 샛별은 환하게 웃음을 지으며 축하의 


말을 건넨다. 이제 노처녀의 반열에 오른 그녀들의 나이인 만큼 마음에 든 남자가 생겼다는


말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듯 했다.




“어머! 축하해~ 그게 뭐 못할 말이니? 그렇게나 뜸을 들이게?”


“그..그게....”




하지만 기쁨의 얼굴도 잠시였다. 은미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지며 눈물을 흘릴 듯 울상으로 


변해갔고 샛별은 애써 놀란 눈을 감춘채 나긋하게 말을 전한다.




“샛별아~ 나 어떡하지? 나 어떡해야 해?”




앞뒤 다 자른 은미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는 샛별이다. 이내 눈물방울을 뚝 하고 흘린 은미


는 냅킨을 접어 눈가를 닦아낸다. 머리와 꼬리를 다 자른 그녀의 말에 그녀가 얼마나 가슴


을 앓고 있는지 내심 짐작하는 샛별이었다. 




“왜~ 그래... 그 사람은 네가 별로래?”


“아니~”




도리질을 치는 은미이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녀의 속마음에 애가 닳는 샛별이었다.




“그럼?... 말해 봐... 왜 그러는지”


“그 남자......... 유부남이야....”




샛별은 너무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은미가 유부남에게 마음을 뺐겼다는 사실 자


체가 충격적이기도 했지만 샛별의 머리와 가슴으로는 이해하지 못 할 사랑이었다. 자신의 


것을 확실히 구분하고 그 범위를 침범하거나 침략당하는 법이 없는 그녀로서는 앞에 있는 


은미가 한심스러울 뿐이다.




“어...어쩜.... 어떡하려고 그래?”




너무 놀란 나머지 다그치고 보는 샛별이다. 분명 은미도 마음으로 많은 갈등과 후회, 그리


고 선택이라는 기로에서 고민을 했겠지만 그보다 먼저 다그침이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이다.




“몰라... 나도 처음엔 아닐꺼라는 생각을 했었어. 분명히 잘못됐다고도 생각했고.... 근데 자


꾸 생각나고 마음이 가~“


“그래도... 어쩌려고....”




샛별은 진심으로 은미를 걱정한다. 다시 터져 나온 눈물을 닦아내는 그녀에게 마음을 돌리


라 재고를 바라지만 은미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어 보인다.




“그 사람이 조금만 기다리랬어... 이혼하고 같이 살자고”




욕이 튀어 나올 것 만 같은 샛별이다. 하지만 그저 은미의 말을 듣고 있을 뿐이다. 은미 같


이 유부남에게 빠지는 경우를 종종 전해 들었지만 자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런 일이 벌


어지자 황당하다 못해 기가 막힐 뿐이다. 




“나 사실은 그 남자 아이가졌어... 그리고 그 남자가 우리 언니 남편이야....”




충격으로 말을 잃은 샛별이었다. 그러나 굳어버린 몸과는 달리 은미와 그 남자와의 관계도


가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떠오른 두 명의 얼굴, 바로 여울과 준석이었다.




“어.. 어떻게 그... 그럴수가 있어?”




말까지 더듬는 샛별은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킨다. 자신의 일이 아니긴 했지만 소름이 키칠


정도의 충격은 여전하다. 물을 마실수록 막힌 가슴은 더욱 답답해졌다.




“나... 어떡해야 돼? 응? 정말 미치겠어... 그 남자 없인 못살 것 같고 그렇다고 내 욕심만 


채우기엔 너무 걸리는 것들이 많아“




은미의 말들이 귀에 송곳처럼 아프게 파고드는 샛별은 머리가 깨질 듯하다. 가뜩이나 너무


도 친해 보이는 준석과 여울의 얼굴이 떠올라 그 충격과 공포는 배가 되어 돌아오고 있었고


온갖 못 된 상상이 머릿속 안을 빼곡이 메우고 있을 뿐이었다.




“미친년! 당장 거기서 그만 둬!”




샛별은 자신도 모르게 욕이 터져 나왔다. 모르긴 몰라도 은미는 샛별이 욕을 하는 모습을 


처음 접한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치켜 뜬다. 




“그치? 나 미친년 맞지?”


“그래!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순 없지.. 그냥 아이 지우고 다른 남자 사귀어~”




“근데 너무 힘들어...”


“만약에 니네 언니가 이 사실을 알면? 언니는 아마 너보다 더 힘들거야”




친구인 은미보다 그녀의 언니가 불쌍하게 느껴지는 샛별은 차분하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한


다. 그럴리는 없다고 자신을 타이르는 샛별이지만 머릿속을 빙빙도는 준석과 여울의 얼굴에


자꾸만 신경질이 인다. 




‘저런 일은 흔치 않으니까... 그리고 난 준석씨를 믿으니까... 우리 여울이도 믿으니까’




은미도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정리하는 듯 말이 없다. 서먹한 기운이 샛별과 은미 사이에서 


웃음 짓고 떠돌아 다닐 뿐이다. 결론과 생각이 옳지는 않지만 조금의 동정이라도 원했던 은


미는 자신의 상황을 전혀 이해 못하는 샛별이 원망스러웠고, 조금이나마 의심 아닌 의심을 


부추기게 만든 은미의 말에 그저 한낱 기우라고 생각했던 의심을 다시 펼치게 된 것이 짜증


나는 샛별이었다.


서로 같은 마음이었다. 친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래서 마음을 공유했지만 샛별과 은미 사이


의 벽은 이해라는 녀석이 찾아오기도 전에 이기심과 원망으로 굳게 가로막혀 버린다.




샛별은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을 뿐이다. 은미의 말을 듣고 나니 단 둘이 집에 남


은 준석과 여울이 의심되기도 했지만 적절치 못한 관계를 잇고, 그것이 잘못된 걸 알면서도


사랑이라는 오묘한 감정을 앞세워 합리화 시키려는 은미의 말과 생각이 짜증을 불러 일으키


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냉정하고 결단력이 강한 샛별도 쉬이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지 못하고 있다. 이해


가 안갈 정도로 바보같이 보이는 은미지만 그녀에게 꼭 묻고 싶고 그리고 듣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그만 둬... 지금이야 좋지... 나중에 은미 니가 더 후회할거야”


“..........”




“근데 어쩌다 그렇게 좋아진거야?”


“어? 그... 그게...”




자신의 상황까지 주저리 벌여놓고 싶은 생각은 없는 샛별은 은미가 자신의 형부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여자의 마음은 거기서 거기라지만 꼭 그녀의 답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은미의 대답은 샛별의 궁금증을 말끔이 씻어내기엔 부족했다. 지극히, 그리고 지독


히도 일반적이고 상투적인... 그냥 서서히 좋아졌다 라는 대답만을 뱉어내는 그녀였다.


서서히 가방을 챙기는 샛별을 따라 은미도 자리를 뜰 준비를 한다. 그리고 싸운 사람들처럼


말없이 샛별의 뒤를 따른다. 각자의 자동차에 올라 시동을 걸때까지도 두 사람은 전처럼 밝


은 얼굴로 눈을 맞추지 못하고 결국 뻘쭘한 인사를 나눈 뒤에 각자의 길을 향한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깔끔하게 샤워까지 마친 여울과 준석은 한창 드라마 시청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무늬가 같은 커피잔이 테이블 위에 나란히 올려져 있고 먹다 남은 몇점의 과일들이 


벌써 시들해진 느낌이다. 어색한 느낌의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초등학생 시절 처음으로 이


성과 짝꿍이 된 아이들처럼 그저 앞만 보고 앉아있을 뿐이었다.


소파가 그것 하나밖에 없는 것도 아닌데 어쩌다 그렇게 앉게 됐는지 두 사람도 모를 일이지


만 어색함과 민망함속에 피어오르는 묘한 감정은 결코 나쁘지만은 않다.




괜히 더워지는 준석은 창밖을 내다보기도 하고 슬쩍 여울을 쳐다보기도 한다. 그리고 시계


를 바라보며 샛별이 돌아올 시간을 가늠해본다. 솔솔 피어오르는 여울의 은은한 향기가 신


체의 모든 감각을 마비 시킨 것 같다. 보이는 것은 여울의 얼굴이고, 들리는 것 또한 쌕쌕


이는 여울의 숨결이었다. 그녀 특유의 달콤한 향내음만이 풍기고 그 냄새는 부드러운 초콜


릿을 입에 담은 것처럼 녹아내리는 듯했다. 




여울 역시 텔레비전에 눈을 맞추고 드라마를 바라보지만 그것의 내용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


았다. 거친 숨소리를 뿜어내는 준석의 호흡에 자신의 숨까지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간간이 


눈이 마주칠 때 마다 떨리는 심장이 박동을 빨리하고 엉덩이부터 척추의 길을 따라 오르는 


뜨거움이 몸을 긴장하게 만들고 있었다. 괴로웠다. 하지만 준석의 옆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고요하고 침체된 분위기지만 결코 평온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뜨거움을 


담은 두개의 활화산처럼 곧 터질 듯이 심장을 쥐락펴락 하고 있는 준석과 여울이었다.


뜨겁게 몸을 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뜨겁고 황홀한 감정이 서로를 보듬고 


있던 것이다.


텔레비전의 화면마저도 그들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다. 자동차에 나란히 앉은 남녀주인공은


어색한 모습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장소만 다를 뿐이지 준석과 여울의 모습과 닮았다.


살짝 고개를 숙인 여주인공, 그리고 떨리는 심정으로 운전대를 잡은 그들 역시 적절치 못한


관계이다. 소위 말하는 막장드라마의 주인공들.. 유부남과 그를 사랑하는 여자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심장이 터질듯한 준석이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이 곧 이어질 화면에서는 무엇을 할지 


충분히 짐작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의 입술을 훔친다. 다각도로 편집된 그들의 성애


가 다 큰 성인인 준석에게도 낯뜨거울 정도로 진하고 야하게 느껴진다.


도저히 그 화면을 바라보지 못한 준석은 이미 묵직해진 아랫도리도 무시한채 소파를 짚고


일어서려 한다.




‘헛!’




흠칫 놀라는 여울이다. 키스장면을 보고 있자니 민망함과 부끄러움이 온몸으로 퍼져 일어서


려는데 준석의 두툼한 손이 자신의 손을 감싸자 몸이 녹아 내릴 듯 다시 소파로 허물어진


다. 머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려 했지만 어쩌면 몸은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도 모를일이었다. 놀라고, 부끄럽고, 민망한 여울은 마주친 준석의 눈길을 피할 수 밖에 없


었다. 피하려면 대차게 피했어야 할 것을 부끄러운 소녀처럼 그저 고개만 살짝 수그릴 뿐이


었다.




보드라운 팔과 팔이 부벼지고 여자치곤 조금은 거친 손이지만 가냘픈 손이 준석의 손 안에 


부끄럽게 웅크리고 있다. 살짝 눈을 피한 여울의 선홍빛 입술만이 준석의 시야에 들어와 그


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고 있다. 심장이 두근거리다 못해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이 


세찬 요동을 쳐댄다. 미쳐 버릴것만 같은 준석이었다. 몸도 마음도...




준석이나 여울이나, 갈등이 아니었다. 그저 살결이 스치고 손과 손이 맞닿은 그 느낌만으로


이성과 몸이 마비되었을 뿐 형부와 처제라는 관계 따위에 얽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드라마의 화면은 바뀌어 있었지만 그것들이 눈에 들어올 리 없는 두 사람이다. 감추고 숨겨


두었던 끓어오르는 감정이 드디어 폭발한다.




준석이 여울의 어깨를 감싸자 작고 동근 어깨가 파르르 떨려온다. 그리고 그 날 밤과 같이 


짙고 긴 속눈썹은 내려 앉는다. 자신의 상체가 소파위로 눕혀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른하


고 황홀한 느낌에 거부하고 싶지 않은 여울이다. 팔받이에 목과 머리가 닿고 감은 두 눈위


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며 뜨겁고 떨리는 숨결이 불어온다. 규칙적이지 못한 그 숨결이


더욱 몸을 애닳게 만들고 있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아무 생각도 없는 준석이었다. 그리고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샘솟았는


지 자신의 행동을 깨달았을땐 이미 여울은 눈을 감고 자신의 몸 아래에서 아득한 광채를 뿜


어내고 있을 뿐이었다. 


심장이 뛴다. 그리고 괜시리 자신을 피할 것만 같아 겁도 났다. 하지만 오묘한 자세에서 오


는 확신은 준석의 행동을 저지 시키지 못했다.




나시티로 감춰지지 않는 뽀얀 여울의 속살이 느껴지자 머릿속까지 그 하얀 광채가 가득 차


는 것 같은 준석은 가늘게 떨며 눈을 감은 여울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고 서서히 입술과 


입술을 맞춘다. 




“흐읍”




여울의 콧바람 소리가 작게 들려온다. 코와 코가 맞닿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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