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리로리 - 15부
본문
(… 여성사의 관점에서 프랑스 혁명을 다시 살펴본다면, 루이 16세가 아닌 마리 앙트와네트에게 쏟아진 성적인 비난이 갖는 의미를 통해…)
싸늘한 연구실에서 무심하게 강의노트를 작성하고 있다. 아, 왠지는 알 수 없지만 연말에는 이상하게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 이렇게 퍼져서 봄부터 어떻게 강의를 할 지… 누가 나한테 배울 지는 몰라도 인생이 불쌍쿠나. 허허.
애꿎은 마우스 휠만 열심히 굴려대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어, 한석이냐?”
“뭐하냐?”
“연구실인데, 왜?”
묻는 순간 느낌이 왔다. 다 같이 한 번 보잔 얘기겠지.
음, 슬슬 망년회의 계절인가.
“영철이랑 용주랑 봐야지?”
“뭐 그렇지… 언제?”
“야, 오랜만에 남자들끼리 연말 보내보자. 12월 31일에.”
“뭐, 말일에 니들이랑? 됐다 됐어.”
2년 전인가.
남자 넷이서 케익에 촛불까지 꽂고 새해를 맞던 일이 떠오른다. 그 때는 어디까지 망가지나 끝까지 가 보자면서 나름대로 재미있었는데, 끝나고 나선 만장일치로 다시는 이딴 짓 하지 말자고 했었지.
…아, 그 때 생각을 하니까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내 방 올 생각은 아예 말아라, 응…?”
“왜 그래, 여친이랑도 깨졌는데 우리의 서른 되는 순간을 함께 해야지.”
“아이씨… 니들 또 술처먹고 ‘서른 즈음에’ 부를 거냐? 아서라…”
으… 우리 집이 무슨 여관방도 아니고.
혼자 살면 좌우간 대목마다 고생이다…
“야, 어쨌거나 그 때 보는 거다?”
“안돼, 나 분당 집에 가기로 했어.”
“어, 뭐야…”
“이런 때나 어른들 뵈어야지 언제 뵙겠어.”
핑계가 아니라 사실이다.
그 동안 혜경이랑 만나고 다니느라 소홀했던 식구들하고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어머니는 특히 혜경이랑 헤어진 게 서운하신지 상태가 안 좋으셔서, 풀어드릴 필요도 있다.
“정말이냐?”
“야 그럼 정말이지. 30일에 저녁이나 같이 먹자.”
“에이… 그래 그럼 그 때 보자.”
“미안.”
사실 시간 비어도 니들이랑 ‘서른 즈음에’는 차마 부르고 싶지 않구나.
……
……
이 기간에는 학교나 직장이나 별 일 하는 것도 없이 시간이 간다.
은행 다니는 양반들한테 돌 맞을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대개는 망년회 몇 번 하고 나면 어느새 ‘아듀 2003년’… (왜 언론에서는 매년 꼭 이 프랑스어를 쓰는지 모르겠다) 어쩌고 하는 그 날이 온다.
분당 집에 가기 전에는 꼬맹이와의 식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오빠 여기이~”
“어, 일찍 왔네.”
멀리 신촌역 맥도날드 구석에서 손 흔드는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그 때, 크리스마스에 우리 집에서 본 다음엔 처음 보는 것인가.
어쩐지 그 날 저녁의 일이 생각나서 조금 민망하다.
“잘 있었어?”
“뭐 그냥 그렇지.”
“오늘도 학교에 있다가 온 거야?”
“으음.”
약간 어색한 듯한 나와는 달리 여고생은 멀쩡하다. 모자가 달린 밤색 코트 사이로, 삭풍을 맞은 약간 발그스름해진 하얀 얼굴이 생글생글 웃고 있다.
“얼마나 기다렸어?”
“으음~ 글쎄. 15분쯤? 차가 빨리 오더라구.”
“…추운데 안에서 기다리지 그랬어.”
몇 발짝 걸어가다가 멈추고,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본다.
“흐음…”
“뭐…뭐야.”
“지금… 나 걱정해 준 거야?”
“어…? 어… 뭐.”
“히히. 오늘은 웬일로 상냥하네? 지난번엔 무섭더니.”
으윽. 역시 그 날 얘기인가…
왜 그냥 넘어가나 했다.
“야… 너 또 당하고 싶냐?”
“뭘 당하는데? 응?”
“…….”
“난 괜찮아… 상관없어. 하하하.”
나의 나름대로의 반격을 아무렇지 않게 튕겨내는 그녀.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은 내 팔을 잡아끌며 말한다.
“자자, 나쁜 짓 하려면 밥먹고 힘내야죠. 빨리 가요.”
…제가 졌습니다. 노리 아가씨.
……
문자로 오늘 오후 5시 반에 만나기로 한 것이 전부여서, 식당을 정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언제나 그렇지만 뭐 먹으러 갈 지 정하는 것은 골치아픈 일이다.
지겹게 돌아다닌 신촌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10여 분쯤 걷고 있는데, 노리가 어느 식당 앞에서 멈춰 선다.
“음… 여기. 나 설렁탕 먹을래.”
“어, 설렁탕? 올해 마지막 식산데?”
“뭐 어때. 새해 아침도 떡국인데 뭐.”
생각해 보니 그렇군.
“그리구 추워. 그만 걷자…”
“아, 그래…”
……
주문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설렁탕 두 그릇이 올라왔다.
캬~ 이 따끈따끈한 국물 맛… 그냥 들어온 거지만 정말 탁월한 선택이…
…어, 정작 설렁탕 먹자고 한 여고생은 수저도 안 들고 있군.
“안 먹냐?”
“…나 안 보고 싶었어?”
살짝 토라진 얼굴이다. 내가 밥 먹는 거 말고는 다른 얘기를 안 해서 그런가.
야, 그래도 너랑 본 지 일주일도 안 되었는데 좀 너무한다. 그리고 너 보기 좀 민망했다니까.
“만났으면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봐야 될 거 아냐. 오면서도 식당 얘기만 하고…”
“뭐… 그거야.”
“어떻게 전화 한 통도 안 해? 오늘도 내가 계속 문자 보내서 겨우 약속 잡구…”
“…알았으니까 좀 먹으면서 얘기하자. 이거 진짜 맛있네.”
“피이.”
노리는 입을 삐죽 내밀며 숟가락을 들었다.
……
…10분 경과.
(후루룩 짭짭…)
“…….”
”…푸아~”
거의 숨도 안 쉬면서 설렁탕 한 그릇을 해치우는 그녀.
“저기, 한 그릇 더 시켜 줘?”
“…응? 아, 아니…”
“어휴, 밥만 먹지 말고 얘기좀 하자던 사람이 누구더라…?”
“에헤헤.”
노리가 입을 닦으며, 계면쩍은 듯이 미소를 짓는다.
날이 찬데다 설렁탕이 맛있긴 했지만, 배도 좀 고팠던 듯 하다.
“너 점심은 먹었어?”
“응… 조금만. 보통 학교에서 사 먹는데, 오늘 보충 없는 날이라서 집에서 먹었어.”
“잘 먹지 그랬냐.”
“맛 없어. 혼자 먹는 거…”
혼자 먹는 밥이 맛없는 건 먹어 본 사람만 안다.
혼자만을 위해 밥하는 것 자체가 흥이 안 나고, 먹는 것도 재미없고, 먹고 나면 정말 허무하다.
지난 몇 달, 너무나 절실하게 느낀 것이었다.
“그거, 책이라든가 딴 거 보면서 먹으면 좀 낫다.”
“아, 난 영화 보면서 먹어.”
“영화?”
……
이후 1시간이 넘는 설렁탕집에서의 영화 이야기… 나도 수시로 영화를 보는 편이지만 그녀는 안 본 영화가 없었다.
…으음, 슬슬 식당 아주머니의 눈치가 느껴진다.
“…너 도대체 안 본 게 뭐냐?”
“뭐, 그냥… 헤헤. 작년부터 좀 많이 보긴 했는데.”
“너 다음 학기에 고3되는 애 맞어?”
“뭐 어때. 어차피… 대학 갈 것도 아닌데.”
그녀의 귀여운 얼굴이 가볍게 찌그러진다.
“왜, 그래도 갈 수 있으면 가야지.”
“나 별로 공부 더 하고 싶지 않아.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는데, 대학 가서 뭐하게.”
“…….”
“글구 대학생들 비싼 등록금 내고 맨날 노는 거 같던데 뭐. 낭비 같아.”
헉, 내가 민감한 건가? 왠지 주변의 학생들이 째려보는 것 같다는 느낌이…
“그래도 다들 가잖아. 공부 안 하더라도… 뭐, 자격증 같은 거지. 별 건 아니어도 나중에 쓸 만한. 아마 평생…”
“오빠도 그렇게 간 거야?”
“아니, 난 공부가 재미있어서 가긴 했지만… 요샌 잘 모르겠다.”
……
양쪽의 눈치가 보여서 더 이상은 못 있겠다.
우린 말라붙은 설렁탕 사발을 뒤로 하고 거리로 나왔다.
“그건 그렇고, 그거 전부 보려고 영화관 돌아다니느라 힘들었겠다.”
“영화관? 아니… 집에서 DVD로 봤어. 전부.”
아, 맞다. 밥 먹으면서 영화 본댔지.
“그걸 전부 구워서 본 거야…?”
“굽다니?”
“아니, 인터넷에서 다운로드 받아서 DVD로 만들었냐구.”
“에이, 귀찮게 뭐하러. 알라딘이나 그런 데서 걍 사.”
“…….”
…허걱. 이래서 부자집 딸내미는…
“그리구 그거 불법복제잖아. 불.법.”
“…그건 그렇다만.”
“공짜로 영화 보구서, 감동했다고 말하는 거 좀 쪽팔리지 않아?”
…으음, 뭐라 할 말이 없다.
29세(아직까지는) 대학원생, 17세 여고생에게 영화감상의 자세 및 지적재산권 침해에 대한 뼈아픈 충고를 듣게 된 하루였다. 크흐흑.
“어쨌거나 영화관엔 거의 안 가. 성인영화 보다가 학주한테 걸리면 괜히 골치아프니까. 그리고…”
그녀가 슬며시 고개를 돌린다.
“나 정학 먹는 것보다… 엄마가 왜 학교 못 오는지 설명하는 게 더 짜증나거든.”
“…….”
“…….”
“…그러냐.”
“좌우간, 올해 영화관에 간 건 전에 오빠랑 간 게 다야. 그 땐 정말 좋았어.”
음, 그 때 그 영화. 너 좀 닮은 여자 배우 나오던…
노리가 새삼스럽게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가, 가끔 최신 영화는 DVD 나오기 전에 보고 싶기도 하거든.”
……
걷다보니 어느새 신촌로터리까지 와 버렸다.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라.”
“…들어가라니?”
여고생은 갑자기 웬 뜬금없는 얘기냐는 눈초리로 날 쳐다본다.
“뭐, 설렁탕 한 그릇 먹고 보내긴 좀 그렇다만, 나 오늘 집에 들어가기로 했거든.”
“집이라니?”
“아, 분당 부모님 집. 내가 작년까지 살던 데. 새해는 가족과 함께 맞아야지.”
…물론 그렇다고 작년 요맘때 내가 가족과 함께였던 것은 아니다. 말해놓고 나니 좀 찔리는군.
“그래…?”
“응, 너도 이제 어머니랑 잘 지내야지. 아님 아버지를 만난다거나…”
“…….”
얘가 갑자기 말이 없다. 왜 이러지?
“저기, 여보세요?”
“…….”
“…….”
“…오늘 우리 집에 나 혼자란 말야.”
어허, 예나 지금이나 이 대사는 좀더 분위기 있게 말하면 남자를 KO시킬 수 있는 여자의 무기~!!
…라지만 이건 뭔가 상당히 침울하다.
“언젠 안 그랬냐?”
“아니, 오늘 밤 내내 혼자라니까.”
“이런, 어머니 어디 가셨어?”
“일본 출장… 내년에나 오실 거야.”
뭐 내년이래 봤자 오늘 하루 지나면 오는 거지만.
그래도 너무 하시는 걸. 저 집 어머니는.
“좋겠다. 오빤… 연말에 온 가족이 함께 새해 맞고… 난 일찌감치 혼자 쓸쓸히 울면서 자야겠네…”
“…….”
절망적인 얼굴을 늘어뜨리고 있다가, 슬며시 날 쳐다본다.
애혀…
“나… 그럼 갈게…”
지하철 계단을 타박타박 내려가는 밤색 두건.
계단 구석으로 천천히 내려가는 그녀의 등에만 칠흑 같은 어둠이 얹혀 있는 것 같다.
중간쯤 내려가다가 다시 슬몃 고개를 돌려 나를 보는 하얀 얼굴.
“…….”
으이그…
……
……
“…저기, 좀 일이 생겨서요. 늦게 내려가기 좀 그러니까 내일 아침에 들어갈게요. 예. 죄송해요.”
결국 분당 집에 전화했다.
“고마워~ 이히히”
“…….”
전화를 끊고 뒤를 돌아보니, 꼬맹이는 아까 보여주던 자살할 듯한 표정을 완전히 날려 버린 채 희색이 만면하다. 어이, 혹시 연기였나?
……
결국 내 방에 와 버렸다.
“너 오늘, 늦게라도 집에 들어가는 거지?”
“에에~?!”
“뭐가 에에~야. 다 큰 처녀가 남자 집에서 자고 갈 셈이냐?”
“…다 큰 처녀? 꼬맹이라며…”
“아니, 그건…”
아 씨, 쓸데 없는 데서 예리하네.
“좌, 좌우간 이따가 보낼 테니까 그리 알어.”
“흠… 하는 거 봐서.”
……
(…올해의 10대 뉴스를 선정해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번째로…)
뉴스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다사다난했던’ 운운하며 별 것도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고작 두 번째 오는 (그것도 남자 혼자 사는) 집에서 제 집인 양 비비적대고 있는 여고생.
가만 있자… 그냥 둘이 앉아 있기엔 심심하니 차라도 타 볼까.
커피… 이건 오늘 두 잔 마셨고… 이런, 코코아는 떨어졌군.
“녹차 마실래?”
“아니~ 나 녹차 시러…”
…녹차 아이스크림은 잘만 먹더니만.
가끔 여자애들은 이해가 안 될 때가 있다.
맞다. 냉장고에 유자차가 있긴 한데… 전에 누군가가, 감기 들면 마시라고 가져다 준.
…누군가가.
“오빠 뭐 해? 냉장고 문 열어놓고.”
“아, 아니. 유자차 마실래?”
“응!!!!”
… 반색을 하는 그녀.
예상치 못한 열렬한 반응에 하마터면 병을 떨굴 뻔 했다.
……
“유자차, 그렇게 좋냐?”
“응…”
“신기하네.”
노리는 황홀한 눈빛으로 유자차를 마시고 있다.
별일이네. 어린 애가 감기 걸린 것도 아니면서 유자차를 좋아하다니. 탄산음료에다 코코아만 찾는 애가… 뭐 다행인가. 혜경이한텐 괜히 좀 미안하군.
“역시, 오빠로 결정했어.”
“뭘?”
“헤헤.”
그녀는 날 보면서, 알 수 없는 말을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다.
한 모금 마시고 웃으면서 날 보고, 또 한 모금 마시고선 날 쳐다본다.
“야야, 사람 그만 좀 쳐다봐라. 닳겠다.”
“히히, 미안.”
“…애혀.”
……
“그게 말이지, 그 여주인공이 남자를 자기 기숙사에 데려다가 이렇게 옷을 벗기는데…”
“어어어~ 어. 너 지금 어디다 손 대…”
갑자기 다가와서 내 셔츠 단추 한 개를 푸는 여고생을 황급히 제지하면서, 약간 나른한 기분이 확 깨졌다. 아마 그녀가 지난주에 본 영화 이야기를 하다가 야시시한 장면을 설명하는 중이었을 것이다. 하필 이런 장면을 재현하고 그러나…
“히히… 뭐 어때.”
“그, 그래서…?”
“응?”
“그 다음에 어떻게 됐냐구. 말로 설명해라. 말로.”
“뭐, 윗단추 두개 풀고, 어두워지고. 그게 다야.”
“…….”
“…뭔가 기대했어?”
“야, 뭘…”
“헤헤… 더 해주까?”
장난꾸러기 같은 얼굴로 생글생글 웃고 있는 여고생. 어른이 참아야지 별 수 있나.
“아이고… 어쩌다가 내가 이 녀석 장난감이 되었나 그래...”
“어쩌다가? 몰라서 물어?”
“…….”
음, 시작부터 나의 원죄가 있군… 역시 참는 수 밖에 없다.
이래저래 얘랑은 말싸움에서 이길 수가 없다.
“그 때… 혜경이 언니?”
“음?”
“그 언니…랑 헤어진 담에 원조하러 나왔던 거지…”
“…그 때 얘긴 또 왜 하냐.”
“아니… 어쩌다가 우리가 만났냐구 했자나… 우리 그 날 만났잖어.”
생각해보면 참 희한한 만남이었다.
내가 진짜 싫어하는 비 오는 날. 기분 나쁘게 서늘한 가을 날씨. 어두침침한 저녁 무렵.
모든 것이 참으로, 마음에 안 드는 날이었다.
…날씨 탓을 하고 있는 건가. 내가 한 범죄행위에 대해.
“…그 땐 미안하게 됐다. 정말.”
“아니 뭘… 강제로 한 것도 아니었는데 뭐.”
“그래도.”
“앞으로 잘 해 주면 되지.”
선심 쓰는 표정을 하면서, 노리는 티 포트에 남은 유자차를 마저 마셨다.
“그랬구나. 그 언니랑 헤어져서 기분 나빠서 했던 거구나.”
“뭐 꼭 그렇다고는… 뭐. 사람이 꼭 어떤 일을 할 때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니까.”
“여고생이 탐나서 그랬던 건 아니구?”
“야, 아니랬잖아. 넌 뭐 돈이나 중년 아저씨가 탐나서 원조하러 나왔어?”
아차.
순간 욱해서 민감한 얘기를 꺼내 버렸다.
“…듣고 싶어?”
“응?”
“저기… 내가 원조하게 된 얘기.”
노리는 의외로 민감하게 반응하진 않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다지 심문하듯이 알아내고 싶지는 않지만, 정말 궁금하기는 하다.
“음… 그건 몰라도, 그냥 네 옛날 얘기는 듣고 싶은데.”
“그래?”
노리는 가만히 리모컨을 들어, 보지 않고 있던 TV를 껐다.
무서울 정도로, 그녀의 표정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언제부터 얘기할까…?”
……
다소 두서 없는 그녀의 이야기는 꽤나 길게 느껴졌지만, 시계가 아직 10시를 조금 넘긴 것으로 보아 실제로는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은 것 같다. 중간중간 듣기가 괴로운 부분이 있어서였나. 아니, 나보다 이 아이가 훨씬 더 힘들었겠지.
“훌쩍… 그렇게… 된 거야.”
“…….”
“바보… 같지, 나…?”
뭔가 적당히 해 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괜찮아… 그거… 이제 잊어버려라.”
“…으…으흑…! 으아앙…”
가만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달랠 생각이었는데,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뭔가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던 것이, 내 손이 닿자 폭발해 버린 것 같다.
그녀는 내게 머리를 기댄 채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
“…….”
“…….”
그녀의 들썩임이 어느새 잦아들었다. 이제 좀 진정이 된 모양이다. 나 역시… 뭐라 할 수 없는 분노로부터 진정된 것 같다. 난 그녀보다 훨씬 어른이니까.
그녀의 머리를 매만지다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만 있자… 처음 만난 날 이후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긴 처음이군. 그녀의 머리에서 허브향 비슷한 내음이 느껴진다. 샴푸 냄새겠지. 음… 이거 좋은 걸.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야, 이제 괜찮지?”
“으응…”
갑자기 떼어놓자 노리가 약간 놀란 것 같다. 어쩔 수 없었다. 그 동안 심심찮게 꿈 속에 나타나던 이미지가 불현듯 떠올랐던 것이다. 그것도 실물이 눈 앞에 있는 상황에서.
…내 얼굴이 지금 빨개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제길.
“오빠…”
당황하고 있는 내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나에게 다시 다가왔다. 머리칼로 반쯤 가리워진 얼굴 위에, 처음 만나던 날의 차분하고도 어두운 회색 이미지를 짙게 드리운 채로.
그리곤 조용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오늘 오빠랑 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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