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소리 - 7부
본문
바람소리-
제 7 부 : 뽕녀의 애원
중천으로 떠 버린 햇살이 문제가 아니었다. 창밖에는 있어야 할 자신의 승용차도 사라지고, 무엇보다도 윤서의 소리없는 잠적은, 현석을 패닉의 상태로 빠뜨리기에 충분한 직격타 였다. 그러나, 아무런 계획도 없이, 현석은 현실로, 가정으로, 직장으로 복귀하는 길만이 수순이라는 생각을 한다. 언제나 그랬듯이, 일탈의 과정에서 느끼는 짜릿한 쾌감을 쫓다가도, 다시금 아무런 의심의 시선조차 없이, 안착할 수 있었던, 자신의 주변머리를 감사했던 것처럼, 그는 또다시 그 과정을 답습하는데, 익숙한 모습을 보였다. 팬션에서 멀리 떨어진 대로변으로 나와, 택시를 잡아타려 했지만, 쉽사리 서울행을 결정하는 기사는 없었다. 모두가 왕복 요금을 내야 갈 수 있다는 대답 뿐, 몇대를 놓치고서야, 현석은 그렇게 해서라도 돌아가야 한다고 느꼈다.
‘서울 가시게요?’
‘네, 요금은 따블로 드릴께여.’
‘통행료는 별돕니다. 어서 타세여. 이렇게 외진 곳에 어떻게 차도 없이 오셨남?’
‘누굴 좀 만나려고요.’
백미러로 힐끔대는 기사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흐른다.
‘뉴스 보셨어여?’
‘뭔 뉴스여?’
‘아니, 딴 나라에서 살다 오셨나? 아무리 맨날 같은 소리나 지껄이는 신문, 방송이라지만, 뉴스는 들으셔야 될 분 이신 거 같은데….’
‘어제 술을 너무 퍼 재끼다가니….’
‘그러셨구나. 어제 밤, 아니, 새벽에 엽기적인 살인 사건이 있었다지 뭡니까?’
‘아니, 엽기적이라녀? 어디서 또 연쇄살인범 이락두?’
‘아니여. 여자 하나가 고층 아파트에서 투신 했는데, 그게 투신이 아니라는가 봐여.’
‘투신이 아님 뭐져?’
‘글쎄, 앞집 사는 유남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가 그게 들통이 나면서리, 셋이서 열나 싸웠는갑죠? 그래서 어찌어찌 하다보니, 그 내연의 관계에 있던 여자가 깩 하니 죽어버렸겄다? 그 사이, 그 악랄한 부부가 글쎄, 그 불쌍한 여자를 냉큼 아파트 밖으로 던졌다네여. 방송에서 들으니깐두루, 여자나 남자나 꽤 똑똑한 모냥 이던데….똑똑허면 뭘 허겠어여? 사람이나 죽이고 토끼는 인물들 인데, 으이그 그런 인간들도 지 애비, 에미들이 세상 까고 나왔다고 미역국 처먹고 그랬을 꺼 아니우? 내 참, 어이가 없어서…..아니, 죽이긴 왜 죽여? 잘 달래서 셋이서 알콩달콩 씹빠빠나 허지. 요즘들 툭하면 그런다고들 허잖수? 이 놈이, 저 년이랑 들러붙고, 저 년이 왠 잡놈들이랑 떼사리로 몰켜 댕기고…하여튼 말세는 말세야.’
혀를 차는 기사의 푸념을 듣고 있는 현석은, 가시방석 위에 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자고 깨니, 세상이 변했다는 말이 하나도 틀린 것 같질 않았다. 아마도 죽은 여자는 어처구니 없이, 윤서가 누른 초인종 소리에 놀라 주섬주섬 옷을 끼워 입고 나오다가, 윤서를 만나지 못했던 것일테고, 무심코 열어버린 현관을 통해, 벼락같이 달겨드는 그 인간들의 손에 아작이 났던 것으로 상상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는 베란다를 통해 던져지고, 그들은 윗선에 자신의 임무를 보고하고, 그 사이 밝혀진 자신과 윤서의 도주를 눈치챈 나머지, 전화 추적에 들어간 것 하며, 그 사이의 일이 환하게 영사기 처럼 훑으며, 눈 앞을 지나쳤다.
‘근데, 부부라고 하셨는데, 부부가 함께 그 여자를 죽인 게, 확실 하답니까?’
‘아직은 모른다고 하는데, 검찰에서 허는 짓 보면 모르겄어여? 출국정지에다, 전국수배령…..보통 사람들이야, 평소에 외국 여행, 꿈이나 꿀 수 있겠수? 다 그렇고 그런 종자들이니, 외국으로 튈 수도 있기에, 그런 조치가 떨어지는 거지. 에이 몹쓸 것들….죽였으면 죽였지, 도망은 왜 가?’
‘아니, 그럼 남편도 사라졌다는 말인가여?’
‘그럼 이 판국에 난 안죽였네, 난 완전 결백혀요 허면서 설레발 떨어봐야, 좇되는 건 매한가지 인데, 지라고 튀지 별 수 있수? 에라 모르겄다 하면서, 냅다 대가리 숨기려 날랐겠지. 지들이 무슨 꿩인감? 이 대한민국 천지에 도망갈 데가 어드메 있다구, 대가리만 가리고, 꽁지 뺀 채로 어딜 가, 가긴? 미친 지랄이지.’
‘민기도…..’
‘손님, 뭐라굽쇼?’
‘아,아,아닙니다. 그냥 혼잣말을…..그 부부가 그 여자를 죽인 증거가 확실 하답니까?’
‘아니, 집 안 개판 만들어 놓은 뒤에, 신발로 버적대며 들어 온 게, 그 앞집 유남의 신발 족적 이라잖수? 집안에 온통 그 남자 지문 투성이 라는데, 범인이 아니고서야, 아무리 가까운 이웃이기로 서니, 한밤중에 어떻게 그 안에 쉽게 들어갈 수 있었겠느냐 이거져, 지 마누라가 벌거이 눈뜨고 있는 자기 집을 뻔히 놔두고….그러니 종적을 감춘 부부가 의심을 받는 건 당연허지. 아니, 한 밤중에 씹빠빠 하려고 도둑괭이처럼 이부자리 빠져 나가는 남편 꼬랑지를 몰래 밟아 보니, 그게 앞 집이렸다? 이거 완전 쎗트로, 뚜껑 팍 열리면쎠, 돌아버리는 씨츄에이숑 아니겄수?’
현석은 그 얘기를 들으며,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윤서야 그렇다 치더라도, 민기까지 그렇게 잠적할 필요까지는 없었지 않겠느냐는 생각 때문이었다. 만일 윤서의 메모를 보았다손 치더라도, 자신은 이 일과 관련이 없다고 경찰에다 얘기 했더라면, 더 그림이 좋질 않았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서울은 누가 뭐래도 흔들림이 없어 보였다. 누가 죽건, 누가 쫓김을 당하건 간에, 길가를 가득 메운 차량의 행렬은 어제와 다름 없었고, 무어가 그리도 할 일들이 많은지, 사람들은 길거리에 큰 일이라도 난 것처럼 복작이게 하고 있었기에……
‘아까 행선지가 어디라고 허셨죠?’
‘제가 알려 드릴께여. 00타워 아시져?’
‘네, 거기까지 가시면, 그 근방 이니까, 제가 알려 드리져.’
현석은 우선 회사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밤 사이, 연락이 두절된 자신을 찾기 위해 날이 밝자 마자, 회사로 전화를 걸었을 아내 때문도 그랬지만,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직장으로 먼저 나가는 것이 의심을 덜 살 수 있다는 판단에서 였다.
‘이거 뭬이야?’
자신의 부서로 향하는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보이는 광경은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인정머리 없게 생긴 사람들이, 줄지어 사무실을 들락이며, 무언가를 열심히 나르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팀장님! 이제 오시면 어떡해여? 전화를 백통은 했는 갑네. 아침 부터 난리도 아니에여. 이사님, 완전 뿔 났다니깐여!, 알기나 허세여?’
경리파트의 미스주가 울먹이면서 달겨 들었다. 그와 동시에 곁에서 그 난리 북새통을 노려 보던 조 이사가 현석을 노려 보면서,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고는 그 자리를 떠 버렸다.
‘나, 이사님 방에 쫌 갔다 올께.’
사람들은 이 난리를 뒤로 하고, 이사에게 불려가는 현석에게 애원의 얼굴을 날리고 있었지만, 우선 급한 불은 꺼야 했다.
‘선우팀장님, 하실 말씀이 아주 많을 것 같은데……’
그녀는 현석과 나이 연배가 비슷했지만, 대주주의 직함을 등에 업고 이사직을 승계한 이른바, 예약된 낙하산 이었고, 회사의 계열사 사장의 장녀 였다.
‘저 사람들은 도대체 누군지?’
현석은 시간을 끌면서, 윤서와의 관계에 뜸을 들이는 것이 현명하다고 여겼다.
‘모르세여?’
‘저는 잘…..무슨 의도로 그러시는지….’
‘민윤서 씨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사내에 소문이 파다한대도, 이 난리를 해명할 변명을 하나도 댈 일이 없다, 이 말이에요?’
‘저만 모르고 있었나요? 그런 소문?’
현석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손짓과 표정을 내어 보였다.
‘그럼, 사내에서 서버 사용권을 제어할 수 있는 인물이 누군지는 아시겠죠?’
‘그거야, 저를 비롯해서, 회장님 그리고, 시스템 어드민 말고는 없져.’
‘그런데, 어떻게 서버 사용기록에, 선우팀장님의 사용권 허가를 이용해서, 민윤서 씨의 터미널에서 서버를 이용한 흔적이 남아 있느냐 이 말이에요. 이 회사가 그렇게 보안이 허술한 회사에요? 그런 거에요?’
‘그건 저도 모르져. 민윤서 씨야, 우리 부서가 내노라 하는 시스템 엔지니어 출신인데, 맘만 먹으면 그거 하나 못 뚫을까 싶은데여….’
‘아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그럴 거면 우리가 뭐 말라 비틀어진 용빼는 재주 있다고 외국에서 비싼 서버 사다가 들여 놓게여? 아무 시스템이나 들여다, 죽밥처럼 지지고 볶지. 저 시스템, 한두 푼 짜리 아니란 거 잘 아시져?’
‘네.’
‘저 시스템에 포팅된 암호와 방어 운영 체제, 열나 딴딴한 것도?’
‘그야 그렇져.’
현석은 바보처럼 보여야 된다고 생각했다. 자기는 그저 열쇠 꾸러미 쥐고 있는 사람에 불과한데, 어떻게 창고를 털어간 잡인과 같은 부류로 볼 수 있느냐는 항변쪼로 일관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을 해오고 있었다.
‘그 년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다가, 서버 사용 권한에 대한 비밀이 자연스럽게 새어 나간 거 아니냐구? 내 말은? 원, 말귀를 못 알아들어?’
갑자기 터져 나온 야자지경.
‘그래, 나 윤서랑 좇나게 쑤셔대면서 뒹굴어 봤다. 근데 왜? 니년 콧대 높아서리, 눈에 차는 쇄끼들 없는 거, 내 다 알고는 있는데, 잠든 사자좇은 왜 건드려? 왜 딴 년들은 그 코끼리 좇으로 벌창나게 쑤셔주는데, 왜 나만 쏙 빼놓았냐 그 말 아냐? 이사? 좇까지마! 내 쒸발, 여기 아니면 일할 데 없는지 알어? 내가 사내에서 까쳐먹은 보지들 한테, 용돈만 순서대로 받아도, 니 월급보담 많을 껄? 너 솔찍히 깨놓고 얘기해서, 이사 취임식날 회식 자리에서 나한테 꼬리친 거 한번 까발려 봐? 내가 여자 머리 냄새만 맡아봐도 꼴렸는지, 아닌지 대번에 감별되는 인간이야, 이거 왜 이러셔? 윤서? 아무리 나랑 씹빠빠 하고 돌아댕겼어도, 그렇게 나쁜 년 아니다!, 너 사람 그 딴데 취직 시키려고 이사질 하고 있을 참이면, 오냐, 그래, 내가 이 방에서 아예 보지 죽 째지게 올려 처박아서리, 똥꾸녕까지 한번에 가루지기 대짜로 맹글어 주께. 아니, 가만 가만 숨죽이고 있으니깐, 누가 가마니로 보이나? 이런 뉘기미, 화가 치미니까, 개그도 좇나게 촌시런 것만 튀어 나오고 지랄이야. 너! 조 이사! 앞으로 윤서 어쩌고, 서버 어쩌고 들먹거리면, 그 날 내가 남겨 놓은 사진들, 사내 인터넷에 확 뿌려 버릴테니까 알아서 해. 그 날은 너 제삿날이 아니라, 보지 구녕이랑, 똥꾸녕이랑 길쭉허게 하나로 한일합방 되는 날인 줄 알어, 어따대고 이사 나발통으로 으름짱이야, 으름짱은……’
‘쾅!’
입을 쩍 벌리고, 꺽꺽대는 조 이사를 뒤로 하고, 문을 닫고 나오는데, 현석은 온 몸이 덜덜 떨리고, 등에서는 식은 땀까지 화끈하게 솟고 있었다. 결코 사내에서 욱 하는 모습도, 쌍욕도 해 본 적이 없는 점잖은 현석 이었지만, 윤서를 기어이 나쁜 년으로 고양이 쥐 몰듯, 몰아가는 조 이사의 비아냥에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많이 까이셨어여?’
‘아니….근데, 저 사람들 뉘기야?’
‘검찰에서 압수수색 영장인가 뭔가 들고 들어와서, 아침부터 지금까지 윤서 언니 책상부터 시작해서, 사물함, 시스템, 그리고, 이제까지 윤서 언니 손으로 작성되었던 서류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탈탈 털어가는 중이에여. 아침부터 지금까지 사내 인터넷에서는 검찰의 조사에 하나라도 거르지 말고, 도움을 주라는 사내 엄명이 내려져 있구여. 무서워 죽겠어여. 진짜루 윤서 언니가….사람을…..사람을 죽였을까여?’
‘너 미쳤니? 민윤서씨가 어떤 사람인 줄 니가 몰라서 그러는 거야? 너 상고 나와서, 몸매 죽이게 푸대짜루라고 총무과에서 면접보고 나서 안 뽑으려는 걸, 민윤서씨가 니 학교성적 짱짱한 걸 들고 나와서 가까스로 붙은 거, 알어 몰라?’
울먹이는 경리파트 미스주에게 현석은 호통을 쳤다. 그 소리를 듣고 있던 주변의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사내에서 여직원 뿐만이 아니라, 남자 직원들 사이에 있어서도, 선후배를 가릴 것 없이, 화통하고, 뒤끝이 없는 윤서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고 봐야 했다. 업무면 업무, 대인관계면 대인관계, 어느 하나 빠질 것이 없었던, 남자 열곱은 한다고 불리우던 그녀……현석은 한마디 해야만 했다. 그것도 그녀를 책임지고 있던 수장의 직책을 걸머지고 서라도….
‘거 쫌 조심해서 수거 하시져? 만일에 용의자가 범인이 아니라는 게 밝혀지기라도 하면, 그 물건들 도로 원위치는 해 주시는 건가여? 그럴 값에라도 그렇게 쓰레기통에 먹다남은 닭다리 내 떤지듯이, 쑤셔박지 마셨으면 하는 작은 바램이 있네여.’
‘아니, 도대체 뉘기셔? 공무집행 방해로 엿을 자셔야 알겄나?’
‘용의자는 아직 범인이 아니라는 의민데, 개인의 사유 재산을 그것도 조사목적으로 강제로 가져가는 걸, 쫌 조심해서 허시라는데, 뭐 잘 못 된 거 있으쇼? 나중에 파손된 부분에 대해서 자연인으로 누명을 벗은 용의자가 부주의한 증거물 수거에 대해서 손배소송이락두 걸면 어쩌시려나?’
‘잘현다!’
좌중에서 현석의 용기에 환호를 올렸다.
‘그래, 김형사, 이 분 말씀이 옳아. 좀 조심들 허지.’
현석의 뒤통수에서 거룩한 목소리로 거친 형사들의 행동을 나무래는 사람은, 체구가 딴딴해 보이기는 했어도, 작은 키의 중년신사 였다.
‘누구시져?’
그는 대답 대신에 웃으면서 가슴에 패용한 ID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검사 진유영이라고 적혀 있었다.
‘실례지만, 선우현석 팀장님 이시져?’
‘네.’
‘아까 아침부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좋은 회사는 출근 시간이 이렇게 늦어도 잘 돌아가는 모양이져?’
‘아니, 뭐 그렇게 까지야…..’
‘말씀드릴 것도 있고 해서 그런데, 어디 조용히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방이 있을까요?’
찬찬한 그의 말투에, 현석은 다분히 경직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현석은 회의실로 진검사를 안내했다.
‘앉으시져.’
‘차는 됐습니다. 윗분들을 차례로 뵙고 오면서, 하도 물들을 먹여서, 괴기가 퉁퉁 뿔었습니다. 하하…’
‘그런데, 무슨 이유로 저를…..’
‘민윤서씨 아시죠?’
‘제 부하 직원인데, 그걸 모를 리 있겠습니까?’
‘그럼, 그 부하 직원과 깊은 관계에 있다는 사람을 혹시 아십니까? 이건 심문도, 어떤 것도 아닙니다. 저희 측에서 필요로 하면, 검찰로 출두하셔서 참고인으로 진술 하시기 전까지는 그 어느 것도 수사에 사사롭게 이용되지는 않으니 걱정 마십시오, 오프더 레코드라고나 할까여?’
‘………’
현석은 잠시 망설였다. 어차피 나중에서라도 알 게 될 것은 뻔한 이치였고, 이 자리에서 굳이 모른다고 했다가 검찰에 불려가서 치도곤을 맞느니, 아예 입을 여는 것도 나쁘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배 태우시겠습니까?’
‘이 안은 금연 빌딩 아닌가여?’
‘회의실은 외부로 통하는 환풍작동이 강제적으로 되는, 인정된 흡연실 입니다. 태우셔도 무방하져.’
담배를 꺼내 두 사람은 천천히 불을 붙여갔다.
‘후…..제가 그 당사자 라고 하면 얘기가 너무 쉽나여? 민윤서 씨와 가장 가깝게, 그것도 바로 오늘 새벽까지 같이 있었던 사람이 접니다.’
‘그래서여?’
검사는 모두 알고 있다는 듯한 눈초리로, 다그침이 없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라녀?’
‘오늘 새벽에 가정이 있으신 두 냥반이 만나서, 도대체 뭘 하셨는가 하는 겁니다. 혹시 뉴스는 보셨나여?’
‘네, 서울로 오는 도중에 택시 안에서 들었습니다. 윤서가 살인용의자라니, 말도 안 됩니다. 바닥에 기어 다니는 바퀴벌레 한 마리도 못 죽이는 사람인데….’
그 말을 하다가, 갑자기 콧등이 치미는 바람에, 눈시울이 붉어지고야 마는 현석……
‘외람된 질문 입니다마는, 깊은 정도가 대체 어디까지…..’
‘많이 사랑하는 그런 사이였다고 말씀 드리죠, 뭐.’
‘오늘 새벽에는 어떤 업무차 ,그렇게까지 같이 있으시게 됐는지, 여쭈어 봐도 괜찮겠습니까?’
‘윤서와 할 말이 있었습니다.’
‘그 밤에요?’
‘네.’
‘무슨 말 이었죠?’
‘이제 이쯤에서 우리들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어떠냐고요. 너무 서로가 밀착되어 가는 분위기가, 도저히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정리가 불가능한 시점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냐고, 두 사람, 평소에 느끼고 있었거든여.’
‘그래서 그러자고 그러던가여?’
‘아니, 뭐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그냥 잠이 들었는데, 깨어 보니까, 벌써 자리를 비우고 먼저 떠났드라구여. 저는 그래서 먼저 회사로 온 줄 로만 알고, 부리나케 달려 왔는데,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더군요. 윤서가 살인자라니…….,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어제 저녁 내내 저랑 같이 있었는데, 살인자라니요? 이건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된 스토리가 분명합니다.’
‘그냥 밤을 이런 저런 얘기만 하다가 보냈다? 만일에, 만일에 말입니다. 선생님도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기미가 포착되면, 아주 어려운 지경에 처해지시게 될 거란 사실을, 미리 알려드리고 싶네여. 저희들 끼리는 미신이나, 사사로운 감 같은 것을 평소에 철저히 배제하려고 애 씁니다만, 그게 그렇게 쉽진 않죠. 게다가 이렇게 위에서 물밀듯이, 밥상에 뭐놔라, 뭐 올려라 하는, 엿같은 주문식단제가 같이 첨부될 때는, 특히나 더 그렇습니다. 쫌 냄새가 나긴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선생님도 이 사건과 결코 자유롭다고 보이진 않습니다.’
진검사의 어조는 매우 단호했지만, 이제까지 이루어 지던 일들에 대해, 현 시점에서 털어 놓는다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현석은 판단했다. 윤서도 잠적한 이 마당에, 사실여부의 확인을 하려면, 자신의 손을 거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키를 쥐고 있기에, 어느 정도 승부수에는 자신이 있는 현석 이었다.
‘실례지만 부인도 두 분의 관계를 알고 계십니까?’
‘…..이젠 알겠죠. 어제 밤에 윤서와 서울 근교로 빠져나간 사실을, 은연중에 짐작하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작금에 벌어진 상황으로 미루어, 저에게도 용의자 선상에 오를 수 있는 빌미를 충분히 갖고 있게 됐다는 어렴풋한 판단도 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미안한 마음이지만…..’
‘조사가 진행되더라도 그 점만은 각별히 유의하져. 아직 조사가 틀을 잡은 것도 아니고….너무 부담 갖지 마십시오. 실적에 연연해서, 죄없는 사람을 가두고 족치던 예전의 고리타분한 정부의 시녀는 아니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여. 곧 잡히겠죠. 아,아, 오해 마시고 민윤서씨가 아니라, 살인자 요…..말씀 감사 했습니다. 근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사라지는 진검사의 뒷 모습은 그의 키 답지 않게 바위덩어리를 연상시키고 있었다. 그의 말 속에서 그 자신 스스로, 이 사건의 배후가 조금은 의심스럽다는 얘기가 비추어지고 있어서, 현석은 내심 안심하고 있기는 했다. 만일 윤서의 결백이나 알리바이의 성립이 무너질 경우, 적군의 편이라고 판단되는 진검사가 도리어 아군의 수장이 되어 줄 수도 있질 않을까하는 작은 바램과 기대 때문 이기도 했기에…..
‘대충 알아서들 치우자구.’
수색영장 조들이 물러가고, 어수선 해진 사무실을 치우라고 명령해 놓고, 현석은 창가에 있는 자신의 의자에 앉아, 물끄러미 창 밖을 내다 보았다.
‘윤서는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머릿속이 도통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고,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 집사람의 얼굴을 또 어떻게 대할런지, 그것조차 현석은 자신이 없었다. 깊은 시름에 잠긴 현석의 앞에 초조한 모습으로 미스 주가 다시 서 있었다.
‘저…저…..팀장님…..피곤해 보이시기는 허는데, 조 이사님 깨서 또 찾으시는데여? 어쩌죠? 자리 비우셨다고 하까여?’
‘아니야. 갈께. 가구 말구. 백번이락두 못 갈 꺼 없지.’
벌써 직원들 끼리는 이사실 안에서 들려오던 악다구니와 현석의 으름장을 전해 듣고, 삼삼오오 모여 입방아를 찧고 있던 중이었다.
‘똑똑…’
‘들어오세여.’
아까의 서슬과 달리 얌전을 떠는 조 이사의 목소리.
‘부르셨습니까?’
아직 분이 삭혀지질 않은 탓인지, 부릅뜬 눈은 그대로 였다.
‘선우 팀장님, 서로 성가신 발언은 피했으면 해여. 내일까지 서버 사용권한 유출에 대한 보고서 쫌 부탁드릴께여. 저도 회장님께 보고를 드려야 할 의무가 있어서….감사실에도 올려야 하니까, 수신부서를 회장 비서실과 감사실 두 곳으로 해 주시고여.’
‘네 알았습니다. 그럼 나가 봐도….’
‘아니, 잠깐만, 지금 많이 바빠여?’
‘뭐 그렇게 까지야….오늘 분위기상 개점 휴업인데여 뭘…..’
‘저 그럼, 아까 그 사진 이란 거…..’
‘아, 그 사진이여? 보실래여? 벌써 카피 떠서, 포샵으로 주변 배경 똑똑허니 나오게 시리, 작업 끝냈으니, 더 선명한 화질로 즐기시고 싶으시면, 언제든 연락 허세여. 요즘 핸카도 꽤 잘 나오거덩여?’
하면서, 현석은 조 이사 옆에 있는 모니터로 향했다. 조 이사의 ID를 LogOff한 뒤에 자신의 네트워크 접속 아뒤로 들어간 자신의 가상저장 장소에는, 비표가 붙어 있는 폴더들이 즐비했다.
‘제 네트워크 패스워드는 제가 들어가고 나오는 순간, 제가 만든 알고리즘에 의해서. 저만의 공식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 난수표의 공식을 모르고서는 지금 열나 패스워드 외우셔도, 제가 로그오프 하고 나면 말짱 꽝이니까. 딴 데 신경쓰덜 마시고, 사진이나 감상 하세여. 이건 원본 이거덩여, 보다 확실하고 선명한 사진은 관계개선 쫌 되고 나면, 보여 드리져 뭐. 새로 찍어주셔도 무방하구여.’
현석이 열어 준 폴더에는 그야말로 저 신참 이사가 그럴 수 있느냐고 물어 볼만한 장면들이 찍혀 있었다. 현석은 자신의 핸카 화소가 만만치 않은 기종임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후레쉬 없이 찍어도, 포샵처리만 잘하면 왠만한 배경은 깨끗하게 건져 낼 수 있기에, 그 회식날 초장부터 조이사가 질러대던 음란한 고갯질을 간파하고, 나중에 써 먹을 날이 있겠거니 하면서, 조이사 몰래 스리슬쩍 찍어둔 것들 이었다. 이 사람, 저 사람의 취임 축하주로 인해 자신의 손장난이 어느 지경까지 갔는지, 도통 기억에 없다는 그녀가, 눈이 똥그래 질 만도 했다. 완전 풀린 눈으로 옆 자리에 앉은 현석의 불뚝 선 바지 섶에 손을 슬며시 올려 놓고 은근히 그 튼실함을 즐기는 음탕한 눈빛 하며, 사람들이 춤을 추러 플로워로 나간 사이, 우연 찮게 단 둘이 남은 방안에서 치마를 들추고, 보지털을 까내어 보이고, 현석의 앞에 서서 뒤로 팬티를 훌렁 까내리기도 한 그녀의 적나라한 모습…..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울먹였다.
‘소문만 믿고 그렇게 들이대면, 까 잡술 줄 아셨나 본대, 저 그렇게 또라이 아니거덩여? 제 신조가 뭔지 아세여? 안전 제일주의 아닙니까? 폭탄이나 지뢰보지는 근처에도 얼씬 안해여, 모르셨어여? 상관 보지 낼름 쳐 드셨다가 좇된 선배들 많이 봤걸랑여. 조직 사회에는 계급의 힘이 섹스의 기득권을 좌우한다는 말, 아세여? 제가 직급으로 누를 수 있는 상대를 무릎 꿇리고 아가리에다, 씹구녕에 좇대를 열나 박아 넣어야, 뒷 탈이 없다는 말씀. 아주 단순한 이치라구여, 아셨어여? 혹시나 모르져, 이사님께서 계급장 떼고 한판 거하게 떡쳐보자 허면 모를까? 그러나, 그래도 변하는 건 없어여. 왠 줄 아세여? 계급장을 떼도, 국방부 시계는 제대할 때까지 빨리 돌아가는 법이 없거덩여. 다시 계급장 붙이고설랑, 빰빠라에, 원산폭격으로 주구장창 세월을 보낸다?….미친 지랄 났다고 똥통에 스스로 기어 들어가나여? 제 말 뭔 말인지 모르시져? 빠다에 베이콘만 쳐 드셨을 테니, 짠빱 스토리야 까까 무식이시겄지…..’
현석은 자신의 속에서 어떻게 이런 막말이 술술 쏟아져 나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가 그렇게도 매력이 없어여? 저 외국에서 뽕이란 한국영화 본 적 있어여. 마님배우라는이대근 씨가 그러잖어여? 사방에 오줌 내갈기면서, 왜 난 안돼, 왜 나만 안돼 라고 말이져. 저 그런 심정 이에여. 저 섹스 무척 좋아해여. 남 못지않게 잘해여, 잘 해 왔구여. 그런데, 회사에 들어오기 전에 팀장님의 얘기를 듣고는, 도대체 잠을 잘 수가 없었어여. 직급으로 누를까, 어떻게 할까 고민 많이 했어여. 누군가 몰래 찍어 놓은 팀장님의 그 페니스…..그 사진, 보면 볼수록 아랫도리가 질질 새서 미쳐 돌아가실 지경 이었다구여. 그러니, 제발 그 사진, 지우는 조건으로 우리 딱 한번만, 아무도 모르게….절대로 얘기 안 할께여. 의미는 잘 모르지만, 계급장 떼고 씹떡 한번 진하게 하져, 네?’
현석은 어째야 좋을지 감이 서질 않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시계를 쳐다 보았다. 오후 4시 45분….
‘그럼 지금 갑시다.’
‘지금이여?’
‘싫음 말구……나야 급할 거 없지.’
‘아니에여, 가여, 가!’
현석은 그 길로 조 이사와 업무차 외출하는 것처럼, 승강기를 올라섰다. 1층까지 가는 동안, 흥분해서 얼굴이 불그락, 푸르락 하는 조 이사의 표정과 계속해서 호흡이 곤란한 듯이 들썩이는 그 풍만한 가슴으로 인해, 현석은 복잡했던 머릿속이 조금은 안정되어 가는 느낌 이었다.
‘수고하십니다.’
1층의 주차담당 경비 아저씨의 인사가 이어졌다.
‘팀장님, 벌써 퇴근 하시게여? 회식 있으신가 보져? 차도 놓고 가시는 걸 보니…..’
조 이사와 현관의 회전문 쪽으로 걸어가던 현석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 맞은 것 같았다.
‘아저씨, 방금 뭐라고 하셨어여?’
‘벌써 퇴근 하시냐고여…’
‘아니, 그 다음 말…..’
‘차 놓고 가시는 게, 회식이 있으신가 보다 하고여.’
‘차요? 제 차여?’
‘네, 새벽에 입고 되어서, 팀장님 자리에 그대로 있던데여?’
현석은 몸속에서 불길이 치미는 것 같았다. 악에 받쳐 등뒤로 돌아오라며, 소리치는 조이사의 째지는 목소리도 들리질 않았고, 번개 같이 승강기를 잡아타고, 다시 사무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누구에게 쫓기듯이 자신의 책상으로 달려갔다. 책상 위에는 자신의 차 키와 함께, 윤서가 좋아하던 캔 커피가 따뜻함이 사라지지 않은 채로, 메모지와 함께 놓여 있었다.
‘차 잘썼어여.
커피는 따뜻할 때 드세여.
-못난이로부터-‘
현석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거, 이거, 이 캔 커피, 누,누,누가 갖다 놓은 거지?’
그러나, 사무실에서 그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해도, 윤서가 지금 이 빌딩 안에 있는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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