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야설

노리로리 - 16부

본문

16. 아프고 화나고 미안해






그것은 유난히 춥던 2월 어느 날의 일이었어요. 나의 중학교 졸업식… 찬 바람을 맞으며, 그 순간을 기다렸죠. 내 이름이 나오는 순간. 다음으론 표창이 있겠습니다. 우등상, 이노리 외 80명. 대표, 3학년 10반 이노리. 글쎄, 친구들과 헤어진다는 슬픔보다는 상을 탄다는 기쁨과 앞으로의 기대가 더 컸었던 것 같아요. 적어도 상을 받고 내려올 때까지는.




벅찬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가족들의 얼굴을 확인하려 했죠. 아빠, 엄마, 할머니…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느 분의 모습도 찾아볼 수가 없었어요. 이상하네. 당황하고 있는 내게 누군가—아마 담임선생님이었겠죠—황급히 다가와 말했어요. 노리야, 지금 아버님께서 전화 주셨는데, H병원으로 오라시는구나. 할머니께서…




……




그 다음부턴, 뭐가 뭔지 모르는 채로 시간이 흘러갔죠. 아마도 졸업식장을 박차고 나왔을 것이고, 병원에서, 우리 할머니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는 병원에서 몹시 울었을 테죠. 그래도 뭔가는 먹었겠죠? 언제 갈아입었는지도 모르는 하얀 옷을 입은 채로. 참 많이도 울었어요. 슬프고 야속해서… 마지막 말 한 마디 안 남겨 주시고 간 할머니가 미워서…




정말 껍데기만 남은 느낌이었어요. 이거 말 되나요? 껍데기. 괜찮아요? 응, 딱 그런 느낌이었어요. 그 상태로 집에 돌아오는데… 아빠랑 엄마는 돌아오는 내내 아무 말이 없으시더라구요. 뭐, 나도 그다지 할 말이 없었고. 할머니를 모신 곳—경기도 어딘가에요—에서부터 한 시간 정도 차를 타고 돌아왔는데, 정말 분위기 썰렁했어요.




방문을 여는데, 며칠 전에 마지막으로 입었던 중학교 교복과 상 받은 것이 내팽개쳐져 있더라구요. ……. 그게, 다 진정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거 보니까 또 눈물이 나오데요. 그날 생각이 나서… 얘기 했었나요? 할머닌, 거의 4년 가까이 내 유일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분이셨어요. 아빠 엄마는 두 분 다 일 때문에 언제나 늦게 돌아오시니까요. 꼭 할머니의 자랑스런 손녀가 되고 싶었어요. 하루만, 단 하루만 더 사셨어도 멋진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었는데…




…뭐라구요. 당신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죠. 미안해. 할 말이 없군. 




어라. 혼자 우느라 모르고 있었는데, 아빠랑 엄마 분위기가 굉장히 험악한 것 같았어요. 울음을 그치고 가만히 거실에서 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죠. 두 분 다 분명하게 말하셔서, 잘 들렸어요.




…오래 전부터 말하려고 했는데, 어머니 건강이 안 좋으셔서 차마 꺼낼 수가 없더군. 그래서, 이제 말한단 얘긴가요. 으음. 세상에, 이렇게 당당하게 나오니까 나야말로 할 말이 없네요. 이제 어쩔 건데요. …글쎄. 이혼하고 싶나요. 그건 아냐. 노리 장래 문제도 있고… 그러면요. 단지… 당신한테 솔직하고 싶었을 뿐이야. 이 상황을 얘기하고… 아, 계속 만나시겠다. …그래. 안된다면? …….




아빠가 불쾌한 표정을 하며 얼굴을 들어올리는 순간, 방에서 나와 있던 나와 눈이 마주쳤어요. 난감한 표정으로 뭔가 말하려다가, 아빠는 코트를 챙겨 일어시더군요.




…나갔다 오지. 늦을 거야. 하, 그 여자한테 가는 건가요. 쾅.




제법 큰 소리를 내며 대문이 닫히자, 그제서야 엄마는 나의 존재를 의식한 것 같았어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꽤나 견디기 힘들었어요. 생각해 보면 지난 몇 년간, 엄마와 단 둘이 있었던 적은 별로 없었거든요.




…아버지가 좀 늦으실 것 같구나.




하지만 그 이후로 한 번도 엄마 아빠가 함께 있는 것을 보지는 못했어요.




……


……




새로 시작한 고등학교 생활은 엉망이었어요. 원래 좀 먼 곳에서 중학교를 다녀서, 알던 친구들은 하나도 없었고… 공학 다니다가 여고를 가니까 좀 분위기도 다르고… 그냥, 친구도 안 생기더라고요. 담임이 좀 이상한 사람이어서, 입학 성적순으로 자리를 앉혔는데, 주변에 앉은 애들은 책만 들여다 보고 있고… 학교 끝나고 집에 가 보면 아무도 없고, 가끔 밤에 아빠나 엄마 오시면 인사하러 나가고… 뭐 그랬어요.




사실 공부가 재미있어서 했던 게 아니라, 열심히 하면 할머니가 이뻐해 주시고, 성적표 가져오면 좋아해 주시니까 열심히 했던 것뿐이었어요. 애기? 뭐, 애기 같다고 해도 할 말 없죠. 사실이 그랬으니까. 아니, 누가 좋아해 줘서 열심히 했던 일 없어요? 어, 있나 보다. 있죠? 어쨌거나 그랬어요. 그러니까, 아무도 봐 주지 않는 내 고등학교 성적 따위는 내겐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단 말이죠. 말하자면. 세상에 공부하는 게 좋아서 대학 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에이, 거짓말 마요. 어, 진짜에요? 이상한 사람이네.




때때로 옥상에 올라가서 하늘을 보곤 했어요. 수업시간에 창문을 통해서 보는 하늘하고는 또 다른 느낌. 바람의 느낌도 좋았어요. 오빠 학교 다닐 때 옥상에 올라가 본 적 없어요? 없구나. 역시 범생이… 아야얏… 응, 그 느낌은 설명하기가 참 힘들어요. 뭔가로부터 해방된 느낌. 할머니를 납골당에 모시지 말고 뿌려드렸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거 있잖아요. 바람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거. 아유, 남친소 얘기 말구요. 나 그 영화 시러. 생각해보니 비슷하긴 하지만… 좌우간 그 땐 그런 기분이었어요.




그렇게 한 학기가 가고, 학교에선 담임이 갈구고 집에 오면 혼자서 노는 지리한 나날들이 계속되었어요. 학교, 창 밖 구름, 옥상 하늘, 어두운 우리 집, 그런 것들이 매일 매일.




……




그러다가, 같은 반 애랑 우연히 클럽 같은 데를 가게 되었는데—걔들은 그걸 ‘모임’이라고 했어요—재미있더라구요. 잘은 몰라도. 그러니까, 혼자 집에서 뒹구는 것 보다는 훨씬 편안하더란 말이에요. 나쁜 친구? 에에이, 걘 아녜요. 언제 한번 보여 줄게요. 정말 멋지고, 좋은 애거든요. 오빠보다 키가 더 크려나? 정말이에요. 걔랑 가끔 ‘모임’에 갈 때는 뭔가 내가 있을 곳에 가는 거 같았어요. 뭐, 하는 건 그냥 술먹고 노는 거였지만. 가끔 춤도 추고… 나 춤 좀 춰요. 히히. 어, 정말인데… 그냥 그런 거였어요. 한 번은 걔가 벽에 기대서 담배 피는 게 잠깐 멋있어 보여서 가르쳐 달라고 한 적도 있는데, 안된다고 그러면서 담배 버리더라구요. 어떤 때는 언니같기도 하고. 날 애 취급하는 느낌도 조금… 생각해 보니까 오빠랑 비슷하네요.




올해 2학년 되구 반 달라진 담에두 자주 전화하고 같이 놀러 갔어요. 전처럼 자주는 아니었지만… 근데 1학기 말 ‘모임’에 나갔는데 얘가 없는 거 있죠. 그런 일은 처음이어서 굉장히 놀랬어요. 생각해보니 항상 걔 옆에 붙어 있었는데, 혼자 있으려니까 영 뻘쭘한 거 있죠. 나중에 몇 번 통화했는데 뭔가 굉장히 바쁜 모양이었어요.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얘기 안 해 주더라구요. 방학하고 나서, 언젠가 학교 근처에서 걜 봤어요. 반가워서 아는 척 하려구 그랬는데 굉장히 무서운 얼굴을 하고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는 거에요. 차마 말을 붙이지 못했어요. 요샌 걔랑 다시 만나고 있지만, 아직도 그 날 걔가 뭘 하러 가고 있었는지 굉장히 궁금해요. 걔 이름이요? 은진이라고 해요. 




……




그래서 1년만에 다시 혼자가 되었어요. 그렇게 돌아다니다 보니 2학년 같은 반엔 친구가 없었거든요. 굉장히 힘들었어요. 알죠? 나 아무도 없는 우리 집에 얼마나 돌아가기 싫어하는지. 어쩌다 쉬는 날에 아빠 엄마랑 같이 있게 되더라도—두 분이 짰는지, 같이 계실 때가 한 번도 없더라구요—엄마랑은 여전히 어색했고, 아빠는 가끔 내게 말을 걸어 왔지만 왠지 얄미웠어요.




몹시 후덥지근한8월의 어느 날이었어요. 정기 ‘모임’이 있는 날이었죠. 학교를 나오다,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애랑 같이 가게 되었어요. 아까 얘기하던 걔랑 같이 있던 앤데… 친구요? 모르겠어요. 은진이는 친구 맞는데… 얜 좀… 언제나 은진이랑 같이 있을 때 만났거든요. 좌우간 좀 어색하게 같이 지하철을 탔죠. 몇 정거장인가 지나가는데 낯익은 얼굴들이 지나가는 거에요. 중학교 때 친구들이었죠.




…이노리? 어머, 너희들 오랜만이다~. 집에 가니? 어, 으응… 어? 니네 집 이쪽 아니자나. 그게 좀… 


…아이 시끄러.




옆에 같이 가던 애가 불쾌하다는 듯이 다 들리게 짜증을 냈어요. 중학교 때 친구들이 쫄더군요. 갑자기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데요.




…노리야, 네 친구니. 으응. …우리 갈게. 그래. 나중에 또 봐.




아쉬웠지만 그렇게 보낼 수 밖에 없었어요. 일단 지금은 얘랑 ‘모임’에 같이 가는 중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얘가 어디선가 온 문자를 받더니만 내린다는 거에요.




…너 모임 안 가? 아, 지금 중요한 게 생겨서. 어디 가는데. 몰라두 돼. 왜애, 나도 가면 안 돼?




피식 웃더군요. 이윽고 문이 열리고, 그 애가 내리면서 말했어요. 야, 나 지금 원조하러 가는 거야. 갈래. 너무 당황해서 잘 가라는 말도 못 했어요. 원조, 원조교제라. 주변 사람들이 걔 말을 들은 것 같아서—창피하죠 아무래도—다른 칸으로 옮겼어요. 그런데 사람들 사이로 아까 제 중학교 친구들 교복이 보이는 거에요. 사실 아까 얘기하고 싶었는데 못 한 거였자나요. 반가워서 인파를 헤치고 아는 척을 하려는 참에. 




…야 걔네 아빠가 돈 찔러줘서 걔가 대표로 상 탔자나. 그런 거였어. 하긴 1학년 때 우리말도 제대로 못하던 애가 무슨 수로 상 탔나 했네. 애구 이뇬아 돈이 원수다. 까르르.




온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어요. 아빠가 돈을? 몰라요. 난 굉장히 열심히 했고, 그만큼의 성적도 나왔기 때문에 제겐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뭐 그거야 어쨌든, 내가 친구라고 생각했던 애들이 절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고 나니까 너무 슬퍼지는 거에요. 그래요. 은진이 말고는 지금 나한테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없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게 된 거죠.




……




그날의 ‘모임’은 취소되었어요. 장소를 잡는 데 문제가 있었나 봐요. 원래 약속장소 앞에 모여 있던 애들은 저마다 친한 애들끼리 흩어져 가는데, 은진이 없는 난 낄 곳이 없었어요. 걔가 나 과보호한 게 이런 때는 원망스럽더라구요.




어이, 우리랑 안 놀래? 재미있는 데 갈 건데, 어? 야~야, 쟤 건들지 마라. 왜. 홍은진한테 죽고 싶어? 아이쒸, 맞다. 잘가라~




낯익은 남자애들이 뭐라뭐라 떠들더니 지들끼리 뜨데요. 이상한 애들.




……




그러던 중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고, 난 혼자 근처의 지하철 역으로 도로 터덜터덜 걸어갔어요. 그런데, 아까 원조하러 간다고 가 버린 걔가 ‘모임’의 딴 애—얘도 은진이 있을 때 같이 놀던 애에요—랑 같이 역 앞에서 뭔가 얘기하고 있더군요.




…야이씨, 그래서 오늘 안된다고? 그래. 나도 몰랐다니까. 야 어쩔거야 한 명 새로 데려간다고 말해 놨는데. 오늘 뭐 안되는 날이네.




멍하니 그 애를 바라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쳤어요. 가로등 불빛 사이로 어색한 미소가 오고 갔죠. 




…아, 안녕? 아까 어디 간다더니 안 갔네. 어엉, 뭐. 




그 애가 슬쩍 같이 있던 애를 쳐다보더니 내게 물었어요.




…야 너 오늘 생리 아니지? 야, 야아~ 아이씨 가만 있어봐. 그날이냐고. 아, 아니… 아~ 아니다. 관두자. 하긴, 너한텐 좀 아닌 것 같다. 야, 가자.




뭔가 무시당하는 느낌.


돌아서려는 그녀들에게, 난 내 자신도 놀랄 대답을 던져버렸어요.




…원조 말야? 왜, 내가 못 할 것 같애?




그녀들이 흠칫 놀란 듯 했어요. 




…야, 너 남자랑 해본 적은 있냐. 응. 뭐…? 아이씨, 그거 말야 그거.




순간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이상한 호승심이 나를 부추겼어요. 




…다, 당연하지. 야, 안 해본 것처럼 보이니. 진짜? 으응. 못 믿겠냐? …흠. 하긴, 우리 멤버 된 지 1년이 넘었으니. …. 원조는 첨이지? 어? 어…. 따라와.




그녀는 짧게 몇 마디 하더니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어요. 딴 애가 걱정스런 얼굴로 그녀를 쫓아가서 뭐라고 얘기하더군요.




야, 너 어쩔려구 그래. 왜 뭐가… 아니, 노리 쟤 거기 데려갔다간 나중에 은진이년 지랄할 텐데… 아이 썅, 지가 제 발로 가겠다는데 어쩔거야. 뭐, 그건 그렇지만. 너 오늘 그날이었으면 미리미리 말해줄 것이지 개뇬… 미안허다. …저기, 은진이뇬한텐 비밀이다. 그래야지.




……




그녀와 내가 당도한 곳은 어느 작은 모텔이었어요. 혼란스러운 마음이 진정되기도 전에, 멀쩡해 보이는 마흔 정도의 중년 아저씨가 들어오더라구요. 그 아저씨는 들어오자마자 싱글벙글 웃으면서 그녀에게 말했어요.




야, 오늘은 예쁜 친구 데려왔네. 그럼요. 제 친구들 다 이쁘죠 뭐. 노리야 잠깐 일루 나와 봐.




그녀는 방에서 날 데리고 나오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어요. 알겠지만 콘돔 꼭 끼우도록 해. 신세 조지지 말고. 저치 가끔 안 끼려구 그러거든. 난 약 먹지만… 돈은 내가 알아서 받으니까 신경 안 써도 되고. 소개비만 조금 떼고 줄게. 자 들어가봐.




정미가 뭐라구 그러디? 아, 저기 콘돔 꼭… 아이고 참, 어련히 안 챙길까봐. 이런 거 처음이니? 예? 예에. 그렇게 보이네. 너처럼 순진해 보이는 애가 어쩌다가 이거 할 생각이 들었니. 저기… 그래, 여러 가지 사고 싶겠지. 부모님은 이러는 거 아시면 별로 안 좋아하실 텐데. 그렇지 않니? 




그게 말이죠. 부모님 얘기 나오니까 뭔가 토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고, 순간적으로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깨를 어루만지던 아저씨의 손을 뿌리치고, 일어섰어요. 저기, 저 안할래요. 뭐? 아저씨 말대로 집에서 안 좋아하실 것 같애요. 고맙습니다. 어이, 이러면 곤란하지. 무슨 근엄한 신사처럼 굴던 그 중년 아저씨는 내가 간다고 하니까 돌변했어요. 가긴 어딜 가. 네? 벌써 돈 줬단 말이야. 죄송해요. 다시 드리라고 할게요. 어허, 간만에 이쁜 애 왔는데 놓칠 수야 없지. 이거 놔요. 안 한단 말이에요. 에이 씨발. 짝짝. 집에서도 한 번도 맞아본 적이 없었는데. 그 아저씨한테 뺨을 몇 대 맞고 나니 눈 앞이 하얘졌어요. 야, 너도 할 맘이 있으니까 왔을 거 아냐. 처음도 아닐텐데 튕기기는. 난 겁에 질려서 아무 말도 못하고 울기만 했어요.




그는 능숙하게 내 옷을 하나하나 벗겨내더니 팬티에 손을 댔어요. 아, 아저씨 안돼요. 야, 니네 학교에 이거 확 불어버린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문제가 되면 난처할 것은 그 자도 마찬가지였을 텐데, 그 때는 마냥 무섭기만 했어요. 아, 안돼요 흑흑. 그럼 얌전히 있어. 벗겨져 나가는 속옷과 함께 온 몸에서 기운이 확 빠져나가는 듯 했어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생살이 찢겨져 나가는 듯한 고통이 덮쳐 왔어요. 아흐흐흑, 아저씨 하지 마요. 헉헉.




……




…모르겠어요. 그 시간은… 꽤 길었던 것도 같고, 아팠던 거 말고는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 거 보면 짧았던 것도 같아요. 좌우간 그 아저씨가 피묻은 자기 물건을 꺼내서 제 몸 위로 이상한 액체를 쏴 대고 그 일이 끝났어요. 전 그 피가 저한테서 나온 줄도 모르고 무서워서 또 떨었더랬죠. 




내 울음소리가 잦아들자 방 안은 조용해졌어요. 그 토할 것 같은 정적은 정미, 나 데려온 걔 말이에요. 걔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면서 깨졌죠.




야, 좀 이따 들어와라. 에이 아저씨 또 할라구 그러죠. 어? 이거 머야. 씨발 너 처녀였자나. 어후 썅 말을 했어야지~ 아저씨, 아저씨 더 줘야죠. 아 뭔 얘기야 아까 계산 끝내놓고. 아저씨 이러심 곤란해요. 뭐가. 아이씨 처음인 애랑 했으면 그거 갖고 안되자나요. 내 참 돈 없다니까. 뭐라구요. 




난 찢어질 것 같은 가랑이를 추스린 채, 온 힘을 다해 짐을 챙겨 뛰쳐나왔어요. 금방이라도 드잡이할 것만 같은 두 인간들을 뒤로 하고… 장난 아니게 아팠지만, 그 자리에서 그 대화를 듣고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으니까요.




……


……




생각해 보면 우스워요. 난 아무도 없는 집의 정적이 싫어서, 원조하러 가는 애들 사이에 끼어서라도 혼자가 아니길 원했는데. 그런 일을 겪고 나니까 집 안의 어둠이 오히려 편안해지데요. 내가 어쩌다가 그렇게 많은 영화를 봤냐구요? 원래부터 자주 보는 편이었지만, 지난 8월 이후론 거의 매일 집에 오면 영화를 틀었어요. 비극을 원래부터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는데, 요샌 슬픈 영화를 보게 돼요. 나보다 슬픈 사람들이, 나, 나보다 슬픈 사람, 들이, 나한테 위로를 주니까…




어라라… 흑, 안 울려고 그랬는데, 바보 같이… 흐흑…




……


…저기, 이안 오빠, 내 얘기… 듣고 있어요? 










노리로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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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근데 너 갑자기 왜 존대말 쓰구 그래?”


“응? 아아, 그거? 재밌자나. 신선하지 않아요?”


“뭐야… 뜬금 없이.”


“그리구, 오빠 말구 듣는 사람도 생각해야지.”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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