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리로리 - 20부
본문
20. 띠동갑내기 과외하기
사람들은 흔히들 별 거 아닌 숫자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
뉴 밀레니엄도 그렇고, 아홉수라는 말도 그렇고. 선작수 1000이며, 대망의 20편째 연재라든가.
서른이라는 나이 역시 특히 그런 것 같다.
서른.
지금 생각하면 너무 우습지만, 나이 서른 되면 죽을 것처럼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서른 살까지만 살고 싶어요. 아니 이건 좀 슬픈 맥락에서 나온 건가. 거기까진 아니어도 뭔가, 다 지나가버린 느낌. 허탈감. 나이 서른에 우린. 서른 즈음에. 하하하.
하긴 요즘엔 세상이 변해서, 서른이라는 말에 예전 같은 위력은 없는 것 같다.
결혼이 늦어지고 (혹은 아예 할 생각이 없다거나) 전반적으로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예전에 애 둘 데리고 있는 피곤한 가장의 느낌이 꼭 일반적인 서른 살 청년(사실 예전에는 중년이라고 했지)의 이미지는 아닌 세상이다. 그래도, 서른이라는 말은 여전히 뭔가를 이루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뭔가를 잃어버린, 모호하고도 서글픈 위치를 뜻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으윽, 상큼하던 연애소설이 순식간에 칙칙해져 버렸다.
……
내 서른은 여고생과의 응응으로 시작되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더없이 사치스러운 새출발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사실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았다. 딱히 결혼을 서둘러야겠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여고생을 데리고 어쩌자는 것인가? 거기다가 내 코가 석 자인 마당에, 이 대책없는 불량 여고생의 대입까지 떠안게 되었으니…
…으윽, 이딴 생각을 하다 보니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진다.
“…우, 우우…”
“…….”
“…? 왜, 왜애…?”
내 침대 위에 누워서 파르르 떨던 노리가 잠시 딴 생각에 빠진 나를 본다. 알몸으로 눈을 꼬옥 감고 떠는 모습이 마치 작은 어린 양(사실 제대로 어린 양을 본 적은 없지만)을 연상시킨다. 난 짐짓 딴 소리를 둘러대었다.
“야야, 불쌍해서 못 하겠다.”
“어… 미안… 히잉…”
“…그렇게 아파?”
“으응… 아직 조금…”
사실 좀 불쌍하기는 하다. 기념비적인(?) 그날 밤 이후로 그녀를 세 번째 안는 거지만, 아무래도 아직까진 좀 아픈가보다. 난 즐겁기만 하지만… 아무래도 좀 걸리는군. 그것도 그렇고…
“괘, 괜찮아. 오빠 나 참을 수 있어…”
“…그게 말이다.”
잔뜩 성을 내다 반쯤 수그러든 내 물건을 추스리고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노리가 바로 이불로 하얀 몸을 가린다.
“네 성적표가 생각나서, 있던 흥분도 날아가 버린 거 알긴 아냐…?”
“…….”
이 말도 어느 정도 사실이다.
올바른 과외지도는 학생의 능력 측정에서부터 시작하는 법. 나는 노리에게 수험준비를 명한 다음부터 계속 지난 성적표를 보여 줄 것을 요구해 왔으나, 그녀는 부끄러운지 근 한 달을 안 주고 버텨 왔던 것이다.
결국 가져 온 것이 오늘이었다.
……
“도대체… 제대로 점수가 나오는 과목이 거의 없구만. 너 진짜 중학교 때 공부 잘 한거 맞아?”
“잘 했어. 요새 안해서 그렇지.”
“어… 그래도 영어는 좋네. 누가 보면 이것만 컨닝한 줄 알겠다.”
“커닝은 콩글리쉬래.”
“아, 그러세요… 영어 선생님이 총각이냐?”
“내 참… 아줌마야.”
“그래? 어쩐 일인지 모르겠지만 좌우간 영어는 됐고. 수학도 그냥 그럭저럭… 야 그나마 다행이다, 단위 높은 거 안 망쳐서. 국어 쪽이 절망적이긴 하다만.”
“…….”
“공교롭게도 내가 그쪽엔 일가견이 있으니… 몇 달 뒤면 네 점수가 거의 뻥튀기가 되는 걸 보게 될 거다. 사회과목들도 마찬가지지만.”
“정마알? (일가견이 머지…?) 근데 오빠 사탐강사 아니었어?”
“어, 과외는 주로 국어랑 논술을 하지. 사탐과외 누가 받냐. 너 같은 애 빼고.”
“……진짜…”
“그러니 걱정 마라… 단, 오늘부터 내가 내주는 숙제 다 해와야 돼. 자 여기 문제집.”
“어 학교 다니면서 어떻게…”
“너 어차피 학교 수업 안 듣는 거 알아.”
“…….”
“그리고 너 너무 쳐져서 따로 해야 돼. 지금 고3인데 이게 뭐하는 짓이냐…”
“우엥…”
“…….”
“…….”
“…가만, 오늘 우리 만나서 뭐 하기로 했더라…?”
“히잉…그러게…”
……
… 15분 전까지의 대화 내용은 이와 같았다.
사실 ‘그 날’ 지나갔다고 해서 몇 주만에 ‘그걸’ 하기로 하고 내 방에 찾아왔던 것인데…
얘나 나나 앞으로 가르칠 (공부할)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져 흥이 안 났다.
게다가 바들바들 떨기까지…
“…내가 안 섹시해서 그런 거 아니지?”
“…뭔 말이냐 그건 또.”
안도감과 불만이 묘하게 섞인 얼굴을 하고 있는 노리.
머리만 내놓은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침대 구석에 웅크린 모습이 귀엽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진짜 덮쳐버리는 수가 있다 아가야…”
“아, 아가아~?!”
“그럼 아직도 바들바들 떠는 애가 애기지 뭐냐.”
”우우우….”
노리는 바로 부루퉁해졌지만, 뭔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꿍해 있다.
야, 나도 울고 싶다. 서랍 속 파랑색 베네통 콘돔에게 면목이 없구나.
또 언제나 이런 기회가 올 지… 애혀.
“역까지 바래다 줄 테니까 빨랑 옷 입어.”
“어 벌써?”
“음, 원래 나 오늘 학원 가야 되는데 너 땜에 일정 바꿨었어. 근데 얘기가 빨리 끝났으니… 지금 가면 예정대로 수업할 수 있을 것 같다.”
…원장 아저씨가 한소리 하시겠지만.
“그래…”
“아, 그리고 자료 같은 거 보내 줄 테니까, 이메일 불러 봐.”
“웅… 여기. [email protected]”
노리…로리?
로~리?
“오빠두 지멜 써? 편하지이…”
“어…어. 근데 노리야, 이거… 네 아이디 말인데…”
“응?”
“아니다, 옷이나 입어라.”
그녀의 청순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넉넉한 브라를 집어주면서, 난 속으로 몇 번이고 외치고 있었다.
(…이거 봐, 난 로리콘이 아니야아~!)
……
……
2년째 다니고 있는 소규모 보습학원.
아는 사람 소개로 하게 되었는데, 부담도 적고 나름대로 보수도 좋아서 꽤 오래 하고 있다.
다만, 컨디션 안 좋은 날에 목이 좀 아픈 건 어쩔 수가 없다…
“여기 19번 문제는 형태만 달리해서 거의 매년 출제되고 있는 문제니까, 꼭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야 거기 민아, 너 지금 내가 무슨 얘기 했는지 들었어?”
“선생님~ 눈 밑에 다크서클 생겼네요~.”
거기다, 짖궂은 애들 장난질도 가끔 힘들다.
오래 봐서 친해진 애들한텐 이제 겁을 주고 싶어도 씨도 안 먹힌다…
“…으이그, 니들이 이딴 식으로 수업하니까 그렇지.”
“애인이랑 올나잇해서 그런 거 아니구요~?! 키히히히~”
“……야.”
“야아, 선생님 작년에 깨졌자노…”
“어머 어떻게 해~”
“선생님 그 이쁜 누나랑 왜 깨져요~ 에에이~”
“야야, 니가 좀 위로해 드려. 선생님 민아가 즐겁게 해드린데요~”
“얘가 미쳤어 미쳤어~ (까르르르…)”
“…….”
아~아, 역시 소규모 학원은 힘들어.
그나저나, 내 여친이 지금 이것들이랑 똑 같은 나이란 말이지.
나야말로 미친 게 아닐까…?
……
……
노리는 앵앵거리면서도 숙제를 꼬박꼬박 해 왔다.
“나 어제두 여섯시간 밖에 못 잤어~ 히잉… 힘들어~”
“야, 지금껏 놀았으니까 좀 힘들게 해야지… 너 새 학기 시작되면 더 힘들어, 하, 하암…”
“에, 오빠두 피곤해?”
“으음, 좀.”
정말이지, 다크서클이 낄 정도로 피곤하다. 학원 일에다가 대학 강의 준비, 내 공부… 거기다 이 개념없는 여친 과외까지 시켜 주려니 장난이 아니다. 학원 애들 말마따나 얘랑 올나잇하느라 눈이 퀭하면 억울하지나 않지.
“어 진짜 피곤해 보여… 오빠도 여섯시간 잤어?”
“난 요새 그것도 못 잔다…”
“어 왜애?”
“너 가르칠 걱정 하느라…”
“저, 정말…?!”
“하하, 농담이야. 근데… 좀 바쁘긴 해.”
난 무심코 솔직히 상황을 털어놓았다.
“사실 다음 달부터 강의 나가니까 그것도 준비해야지.”
“그럼 학원 그만두면 안 돼?”
“야, 먹구 살아야지… 대학 강의는 거의 교통비 정도밖에 안 돼.”
“정마알?”
노리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사실 일반인이 들으면 놀랄만도 하지.
“아니 왜 대학 강의가 고등학생 가르치는 것보다 돈을 덜 줘?”
“그러게 말이다.”
“흐음…”
“그러니까, 네가 공부를 열심히 해야 오빠가 덜 힘들지.”
“으응… 열심히 할게.”
피곤하다고 징징대던 애가 어느새 진지한 얼굴로, 주먹을 볼끈 쥐고 있다.
이거 이거, 학원 애들보다 너무 순진한 거 아냐.
뭐, 어쨌든 귀엽군… 아유… 앗.
…나, 난 로리콘이 아니란 말이다~!!!
……
……
“원장 선생님, 제가 지지난 달에 말씀드렸잖습니까. 저 다음 달부터 대학 강의 시작해서 화목 시간엔 힘들게 될 거라구요.”
“아니 대학 강의는 낮이잖아?”
“저, 아무리 낮이라고 해도 오후구요, 거기서 여기까지 시간도 꽤 걸려서… 거의 저녁도 못 먹고 해야 된다니까요. 제가 그래서 미리 말씀을…”
“그럼 못 하겠다는 거야?”
“그게 아니라 시간대를 좀…”
“아유, 그렇게 대학 강의가 소중하면 그것만 하지 왜 이거 할라구 그러나 그래… 좌우간 이거 못 바꿔. 알아서 해.”
“…….”
나하고는 거의 상의도 없이 3월 시간표가 나와 버렸다.
조정을 해 보려 했지만 안 될 거 같다. 요새 뭐가 안 좋은지 원장의 떽떽거림이 도를 넘어선다. 아오, 진짜 그만둬 버려? …아서라, 밥줄이다 밥줄…
(삐리리링~)
원장실 밖 벽에 기대어 꿀꿀한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음…노리의 문자다. 전화하라고?
“여보세요… 어, 나야. 왜?”
“아, 오빠? 있지… 나 오빠랑 정식으로 과외하고 싶은데…”
“? 무슨 얘기야…? 지금도 정식으로 하고 있는데.”
“저기… 오빠 나한테 돈 안 받잖아.”
…아, 그런 얘기였나.
“야야, 대책없는 여친 대학 보낼라고 하는 건데 돈을 어떻게 받냐.”
“모야? 아,아니, 좌우간… 나 엄마한테 과외하게 해달라고 했으니까, 낼 울 엄마랑 만나. 응?”
“…너 벌써 얘기했단 말야?”
“웅. 오늘 아침에.”
가끔 생각하는 거지만, 얜 진짜 한번 생각하면 바로 저질러 버리는 경향이 있다. 어려서 그런가?
음… 어쨌거나, 문제의 노리 어머닐 드디어 뵙게 되는 건가.
“안 그래도 되는데.”
“오빠 지난번에 보니까 너무 피곤해 보여서… 미안해. 나 두 달 가까이… 오빠랑 공부하면서 그런 생각은 하나도 안 했거든. 나랑 과외해서 돈 벌면 조금 쉴 수 있겠지? 헤햇.”
“……야아.”
“와~ 오빠 감동했다 감동했다아~!! ㅋㅋ”
“…어휴.”
꼬맹이가 어른을 배려해 주다니.
어쨌거나 이놈의 학원을 때려치워도 될 듯 하다. 야호.
난 기세 좋게 다시 한번 원장실 문을 열어젖혔다.
……
……
바로 다음날 저녁, 여의도 근처의 어느 패밀리 레스토랑. 노리와 함께 그녀의 어머니를 만났다. 여의도까지 온 것은 어머니 직장이 근처에 있어서라고 한다.
“안녕하세요. 딸애 과외 선생님이시라구요.”
“임이안이라고 합니다. A대학교 대학원생이고, 학원 강사 경력이 좀 있습니다.”
“올해부터 대학 강의도 나가신대요.”
첫눈에 모녀지간인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노리와 비슷한 용모를 지닌 여성이었다. 아니, 노리가 엄마를 닮은 거라고 해야 하겠지. 업무용 미소를 띄고 있기는 했지만, 약간 차갑고 이지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잡지 같은 데 나오는 ‘성공적인 캐리어 우먼’ 같다고나 할까. 가끔 노리가 보여주는 어둡고도 섹시한 분위기는 엄마 닮아서 그런 거였던가. 그래서인지 평소 꼬맹이의 몽실몽실한 분위기는 이 양반한테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군.
“어머, 실례지만 꽤 어려보이시는데, 대학 강의를 하세요…?”
“아, 박사과정에 있습니다.”
“저기, 그런데 대학 출강하시면서 학원에다 우리 애 과외까지 하실 수 있겠어요?”
“아, 따님 과외 시작한 다음에 학원은 접었습니다.”
“아니… 벌써 시작하셨나요?”
아차차.
노리 어머니를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방심했다.
“예에, 지난번에 안 계셔서 뵙지 못했는데, 한 번 만나긴 했습니다.”
“아 그러세요.”
“어, 엄마, 해도 되죠?”
“그래, 뭐. 해야지. 모처럼 공부하겠다는데. 무슨 과목인가요?”
“일단 언어영역이 제일 문제가 될 것 같은데, 사회탐구영역도 가끔 체크할 생각입니다. 국어, 국사 같은 학교 시험 대비도 같이 하구요.”
“저희 애가 아직 국어가 좀 부족할 거에요. 벌써 확인 다 하신 것 같아 마음이 놓이네요. 모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예에.”
의외로 선선한 대답에다, 평가도 대충 만족스러운 것 같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생각보다 편안하게 식사가 진행되었다.
……
대학 강의 준비랑 공부, 나머지는 어린 여친 과외인가.
일이 간단하게 정리되는 느낌에, 화장실에서 손을 닦는 느낌이 한결 상쾌했다.
자리로 돌아오자, 노리 어머니가 말을 꺼낸다.
“저기 얘한테 방금 얘기 들었는데요. 선생님 집에서 수업하신다고…”
“아…예. 뭐…”
옆에서 노리가 난처해진 얼굴을 하고 앉아 있다. 뭔 얘기를 한 거야 저 녀석.
사실 지금껏 전부 내 원룸에서 해 왔었지. 딱히 좋은 장소도 없고… 아니, 공부하려면 여기저기 많지만, 이것저것 눈치 안 보려면… 하하.
“저기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선생님은 나이에 비해 꽤 어려 보이시고…”
“예에…”
“아무래도 다 큰 여자애가 혼자 사시는 데 가는 건 좀 그래서요.”
“아, 그렇겠죠.”
뭐라 대답할 말이 마땅치 않아서 수긍해 버렸다.
“어디 사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 신촌에 살고 있습니다만…”
“그럼 그렇게 멀지도 않으니, 저희 집으로 와 주시면 안 될까요? 교통비는 따로 드릴게요.”
“아유, 아닙니다. 그럼…”
문득 노리의 어두워진 표정이 눈에 띄었다.
어두운 집. 아빠랑 엄마가 헤어졌다는 집. 더 이상 할머니가 안 계시다는 집.
어둠 속에서 혼자 영화를 보기만 했다는 그 집에, 날 만난 다음부턴 죽기보다 가기 싫었다는 노리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좋습니다. 제가 댁으로 가도록 하지요. 다만…”
“……?”
“제가 방문하는 날엔 어머님께서도 일찍 퇴근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니 저기…”
“오…(!) 선생니임…”
나의 뜬금없는 제안, 아니 요구에 노리 어머니는 물론이고 노리까지 당황했다.
야, 너 오빠 소리 나왔으면 오늘 제대로 난리 났다 정말.
“어차피 제가 가더라도 따님과 저 밖에 없으면 의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
“너무 썰렁하구요. 하하… 가끔 일찍 들어와 주시면…”
난 웃고 있지만 고용주의 얼굴은 약간 굳어진 것 같다. 아, 내가 어쩌자고 이딴 얘기를 꺼냈을까.
“딸애한테 무슨 얘기를 들으셨는지는 몰라도, 그건 좀 약속드리기 힘들겠네요.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그렇습니까… 주제넘은 말씀을 드린 것, 죄송합니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럼, 바로 이번 주부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예, 부탁드려요.”
“…….”
막판에 약간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노리의 엷게 씁쓸해진 얼굴이 자꾸만 마음에 밟혔다.
……
……
바로 지방 출장을 간다는 노리 어머니를 태운 택시가 떠나고, 우리 둘은 황량한 여의도 밤거리에 남겨졌다. 이 동네는 왠지 정말 썰렁하다. 날도 아직 추운데.
“나… 바래다 줄 거지?”
“그럼.”
“손… 잡아주지 않을래?”
“아, 응.”
그녀의 작고 차가워진 손이, 어미닭 깃 속에 파묻히는 병아리처럼 내 손 안에 들어왔다.
잠깐 사이에 이렇게 차갑게 얼다니… 아직 봄이 오기엔 좀 이른 것 같군.
……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는 내내, 그녀는 이상하게도 말이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평소엔 그렇게도 이것저것 재잘대던 그녀였는데.
아까 일로 나한테까지 화가 났나…?
……
그녀의 집은 생각보다 지하철 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으음, 고등학생 주제에 가끔 택시를 타던 이유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군.
어둠을 헤치며 걷는 동안, 나는 뭔가 이야기하고 싶었다.
야, 괜히 세상 다 산 거 같이 그렇게 꿀꿀해 있지 마라.
엄마가 신경 좀 안 써 주는 게 그렇게 죽상을 할 일이냐?
부모님 이혼한 집이 요새 얼마나 많은지 알어?
…애혀, 안하는 게 낫겠다.
필사적으로 뭔가 말을 꺼낼 꺼리를 찾고 있는데, 갑자기 그녀가 발을 멈춘다.
“…다 왔어.”
“어…어. 여기야?”
그녀의 집… 밖에서 보기에도 꽤나 널찍해 보인다.
설계자가 복층을 싫어했는지, 주변의 다른 이층집들에 비해 이 집만 단층이다.
하지만 거의 이층집 수준의 높이로 올라간 것이, 천정이 꽤나 높을 듯 하다.
검정과 회색이 어우러진 현대적인 주택이군. 멋진데.
“멋있는데.”
“…….”
아, 잘못했나. 생각대로 말을 꺼내 버렸다.
내 앞에는 이 멋진 집에 들어가기 싫다는 아가씨가 서 계신 것을 모르고...
“……나 간다. 잘 자…”
“…아까.”
희미한 불빛 아래 그녀가 입을 떼었다.
안개라도 낀 듯한 분위기가, 무척이나 몽환적이다.
“아까, 날 위해 엄마한테 말해 준 거…”
“…….”
“진짜… 고마웠어.”
죽상인 줄 알았던 꼬맹이가 웃고 있다.
뭐야… 괜히 사람 걱정을… 아니, 자세히 보니 억지 미소로군.
아직 그녀는 어머니와 달라서 프로페셔널의 상업용 미소를 지을 수 없다.
난 그저…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토닥이며, 웃어 주었다.
“야, 뭘. 그 정도야.”
“아니, 고마워… 정말…”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는데, 어느새 그녀의 눈에 눈물 방울이 살짝 맺혀 있다.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어, 가만히 안아 주었다.
눈물을 보이기 싫었던지, 바로 안겨오며 얼굴을 감춘다.
“…괜찮아.”
“으응.”
“…….”
“오빠아…”
이제는 꽤나 능숙해진 노리의 입술이 가까이 왔다.
딸기 향기가 나는 도톰한 그 입술에 가만히 입 맞춰 주었다.
(쪼옥)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 그녀가 내 목 언저리에 대고 속삭였다.
“우리 집에… 들어왔다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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