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등남매 - 5부
본문
찬성의 생각처럼 성희는 그냥 물러나지 않았다.
찬성과 사귀자고 말을 꺼낸 이후 공개적으로 들이대는데 그 집요함에 찬성은 기가 질릴 정도였다. 수업이 끝나 집으로 돌아갈 때면 찬성의 앞을 막고 사귀자며 시간을 뺏기 일쑤였고 시도 때도 없이 찬성에게 말을 걸며 정신을 분산시켰다.
견디다 못해 찬성이 담임에게 상의하자 담임까지 나섰다.
그러나 담임도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성희는 담임에 대해 강한 적개심마저 드러내며 반항했다.
그러지 않아도 성희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담임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성희의 부모님을 호출했다.
재벌인 아버지가 학교에 찾아오는 소동까지 벌어진 이후에야 성희의 찬성에 대한 스토킹이 멈췄다.
그리고 여름방학이 다가왔다. 한 시름 놓게 된 것이다.
찬성은 방학이 시작되는 날 가벼운 마음으로 교문을 나섰다.
“김찬성!”
교문 옆 길가에서 성희가 찬성을 부르고 있었다. 이젠 목소리의 첫 마디만 들어도 찬성은 성희라는 걸 안다.
‘그래. 이제 방학인데 네가 뭘 어쩌겠냐?’
찬성이 뒤를 돌아보자 성희가 다가왔다. 찬성이 쳐다보자 성희가 말없이 그를 노려본다.
‘......!’
왠지 섬뜩한 기분이 들었지만 찬성은 태연하게 먼저 말을 꺼냈다.
“방학 잘 보내라.”
그러자 성희가 피식, 웃으며 찬성에게 말했다.
“너도 즐겁게 보내. 아마도 방학이 끝나면 상황이 조금 달라져 있을 테니까.”
성희가 뜻 모를 말을 지껄였지만 찬성은 귀담아 듣지 않았다. 녀석의 간섭을 받지 않고 녀석의 얼굴도 보지 않고 마음껏 공부만 할 수 있는 방학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여름방학이 끝나고 찬성에게 혹독한 시련이 찾아왔다.
2학기가 시작된 일주일 후였다.
학교가 파한 후 집에 간 찬성은 일찍 집에 와 있는 엄마를 보고 놀랐다. 장사를 시작한 이래 엄마가 집에 먼저 들어온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몸이 아파도 엄마는 장사를 쉰 적이 없었고 술에 만취가 되어도 그 다음 날은 어김없이 시장에 나가서 장사를 했으니까.
엄마의 얼굴을 보는 찬성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엄마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 있었는데 그것은 집에 심각한 상황이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엄마 옆에 찬주가 있어 동생의 얼굴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찬주가 살며시 고개를 옆으로 흔든다. 아직 동생도 무슨 일인지 모르고 있는 표정이다.
“엄마! 무슨 일 생겼어?”
찬성이 묻자 지연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후우! 찬성아. 어쩌면 좋냐? 아빠가......”
“아빠가 왜?”
“아빠가 지금 교도소에 있단다.”
“뭐라고?”
찬성과 찬주가 동시에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체 무슨 일로 아빠가......”
찬성은 이해할 수 없었다. 돈을 벌 능력도 없지만 대신 남하고 말다툼 벌인 것도 본 적이 없는 아빠인데 교도**니. 도무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엄마. 자세하게 말 해봐. 아빠가 왜 교도소에 있는 건데?”
찬성이 답답해 목소리를 높이자 지연도 목이 탄 듯 물을 한 컵 마신 뒤 입을 열었다.
“나도 자세하게는 몰라. 그런데 네 아빠가 아마도 무슨 사업을 한 모양이야.”
“사업? 아빠한테 돈이 어디 있다고 사업이야?”
“그게 아닌 가봐. 아빠한테 누가 사업자금을 대주고 같이 동업을 하자고 했나봐. 아주 좋은 아이템이 있다고 말이야. 그래서 아빤 자기 자본 들인 것도 아니고 만약 망한다 해도 특별하게 손해 볼 것은 없겠다 싶어 그 사람과 공동 명의로 개업을 했단다.”
“......!”
“그런데 말과는 달리 사업이 잘 안 되니까 같이 사업을 하자고 꼬셨던 사람이 아빠한테 덤터기를 씌우고 도망을 가버렸다는구나. 그래서 공동으로 개원을 한 아빠가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쓴 상태고 빚을 갚지 못해 지금 교도소에 들어가 있단다.”
찬주가 물었다.
“그럼 아빠 어떻게 되는 거야?”
“엄마도 몰라. 채권자가 아빨 용서해주면 교도소에서 나올 수 있는데 채권자는 그럴 마음이 없나보더라. 갚아야 할 빚도 액수가 커 우리 형편엔 어림도 없는데 정말 큰일이다. 이제까지 한 번도 이런 짓은 하지 않던 사람인데 뭐에 홀렸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니까.”
엄마가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보고 찬성은 의외로 엄마가 아빨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약 돈을 갚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찬성이 묻자 지연이 눈물 글썽한 얼굴을 옆으로 흔들었다.
“법적인 문제라 엄마도 잘 몰라. 하지만 빚쟁이가 봐주지 않는다면 형은 형대로 살고 나중에 민사로 돼서 돈은 따로 갚아야 하나봐. 이 양반 마음은 착해서 어디로 도망가지도 못하는 사람인데 나중에 돈을 다 갚으려면 그것도 문제다. 하지만 당장 이 사람, 교도소에서 나와야 하는데......”
찬성도 한숨만 나올 뿐 뾰족한 방법이 없어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딩딩딩-
“여보세요?”
지연이 전화를 받다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러더니 지연이 전화기를 손으로 막고 찬성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 채권자야.”
찬성도 긴장하여 수화기를 응시했다.
“예? 누구요?”
전화기를 귀에 대고 무슨 말을 듣던 지연이 놀란 얼굴로 찬성을 바라보았다.
찬성이 엄마의 얼굴을 쳐다보자 지연이 찬성에게 말한다.
“찬성아. 이 사람이 너를 바꿔달라는데?”
“왜?”
“몰라.”
“이리 줘봐.”
찬성이 지연에게서 전화기를 받아 귀에 댔다.
“여보세요. 전화 바꿨습니다.”
“김찬성 학생인가?”
“예. 그렇습니다.”
“나. 학생 아버지에게 돈을 뜯긴 사람이야.”
“예.”
“아버지가 몹쓸 일을 저질렀으면 아들이 대신 해야 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는데. 어때? 영리한 학생이 설마 아버지의 곤란을 모른 척 하진 않겠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습니다만.”
찬성의 대답에 전화속 남자가 말했다.
“그럼 잠깐 나 좀 만날까?”
“좋습니다. 어디로 나가면 되죠?”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으니까 나와서 사거리 쪽으로 조금만 걸어오면 돼.”
“알겠습니다. 가죠.”
찬성이 일어서자 지연과 찬주가 동시에 일어서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찬성아. 널 보재?”
지연의 말에 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니까 나갔다 올게.”
“같이 가 오빠.”
찬주가 따라 나서려 하자 찬성이 제지했다.
“오지 마. 나 혼자 가야할 것 같으니까 너도 엄마도 집에 그냥 있어.”
찬성이 약속장소에 도착하자 한 중년남자가 그를 보고 손짓을 했다. 찬성은 그에게 다가가며 그가 자기를 이미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쪽에 앉지.”
찬성이 사내의 맞은 편에 앉으며 얼굴을 살폈다.
‘......!’
한 사십 대 초반 쯤 됐을까? 그다지 나쁜 인상은 아니었다.
그가 찬성을 보며 입을 열었다.
“학생 바쁠 테니까 본론만 말 할게.”
“예.”
“학생 아버지 이대로 두면 교도소에서 좀 오래 살 거야. 몸도 시원찮은 것 같던데 교도소 생활 이겨내려면 고생이 심할 거다. 그리고 출감해서도 내 돈은 다 갚아야 되고.”
“제가 아버지께 무슨 힘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 영리한 학생이라 내가 불러낸 이유를 즉각 알아차리는군. 좋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자네 유성희 학생 알지?”
“예. 같은 반 친굽니다.”
사내가 성희의 이름을 댄 순간 찬성의 머리에 한 생각이 스쳐갔다.
“나도 사실 성희 학생이 요구를 하면 뭐든 들어야 하는 입장에 있네. 그래서 학생에게 말하는데 내일 성희를 만나보고 그 학생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게. 난 자네 아버지에게 떼인 돈보다 더 많은 돈이 성희네 집안에 걸려 있기 때문에 만약 성희학생이 내 형편만 봐준다면 자네 아버지의 빚은 말끔하게 없애주고 당장이라도 교도소에서 나올 수 있게 해 주지.”
찬성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미 성희의 이름을 듣는 순간 모든 것이 그녀의 농간이란 걸 알았기 때문에 사내의 말을 새겨들을 필요조차 없었다.
다음날 찬성은 쉬는 시간에 스스로 먼저 성희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오늘 시간 좀 내 줄래?”
순간 그 주변에 있던 모든 학생들의 시선이 찬성과 성희에게 쏠렸다. 학생들도 1학기에 성희가 찬성을 집요하게 쫓아다니다 퇴짜를 맞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성희가 고양이같은 눈을 가늘게 뜨며 쳐다보는데 찬성은 녀석의 눈 속에서 큰 승리를 거둔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의기양양한 빛을 발견했다.
“나 오늘 바쁜데?”
성희가 튕기자 찬성은 속으로 어이가 없었지만 꾹 참고 입가에 미소까지 지었다.
“잠깐이면 돼. 너에게 할 말이 있으니까 시간 좀 내 주라.”
“정말 바쁜데...... 어쩔 수가 없구나. 같은 반 친구가 만나자는데 거절할 수도 없고 말이야. 좋아. 그 대신 시간 많이 뺏으면 안 돼?”
성희가 거만하게 말했지만 찬성은 어쩔 수가 없었다. 주위에서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고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지만 사정 상 자신의 자존심을 세울 형편이 못 되는 것이다.
“고맙다.”
찬성은 제 자리로 돌아와 책을 폈다. 하지만 글자가 눈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아 이를 악 물고 책에 시선을 주었다.
수업이 끝나고 찬성과 성희는 교실을 빠져나와 성희의 외제차 뒷자석에 나란히 앉았다.
아직 여름이 끝나지 않아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어 성희는 차의 시동을 켜고 에어컨을 틀었다.
위이잉-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만 부드럽게 들리는 가운데 성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찬성은 성희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이 녀석은 아직도 승리의 쾌감을 지속하고 싶은 가보군.’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있으면서도 성희는 아무 것도 모르는 듯 태연하게 찬성이 먼저 말을 하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아버질 풀어 줘.”
“응? 너 네 아버지?”
“그래. 네가 한 짓이잖아?”
“흐응.”
성희가 그제야 얼굴에 미소를 짓는데 그 얄미운 모습을 보자 찬성은 녀석의 뺨을 사정없이 갈기고 싶었다.
“네 아버지 교도소에 있지? 음. 내가 풀어 줄까?”
“그래. 부탁한다.”
“쉽지 않아.”
“물론 쉽지 않을 거야. 대신 네 요구 조건을 들어줄게.”
“찬성이 네가?”
“응.”
“너한테 쉽지 않은 요구를 해도?”
“너하고 사귀면 되잖아?”
찬성의 말에 성희가 피식, 웃는다.
“사귀면 된다고? 그건 옛날 말이지. 이젠 상황이 달라졌잖아?”
찬성이 긴장했다.
“그럼 다른 요구조건이 있어?”
“당연하지. 너 세상 일이 그렇게 쉽게 되는 건 줄 알아? 그러게 내가 처음에 사귀자고 할 때 사귀면 아무 일이 없었잖아? 내 제안도 무시하고 나에게 죽고 싶을 만큼 모욕까지 준 너를 그냥 사귀는 걸로 끝낼 것 같아?”
성희의 웃음기 가득하던 얼굴이 일순 표독하게 변했다.
“그,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니?”
성희가 찬성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넌 내 노예가 되는 거야. 내가 하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는 노예 말이야. 그러면 내가 아버지를 풀어주지.”
찬성이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말이 되는 소릴 해라. 내가 왜 네 노예가 돼야하는데? 내가 네 노예가 될 바엔 차라리 아버지가 교도소에서 그냥 사는 게 낫겠다. 자식으로서 아버질 구해주진 못해도 아버지도 내가 네 노예가 된 조건으로 풀려난다면 절대로 교도소에서 나올 분이 아니니까.”
“너 불효막심한 놈이구나. 아들이 아버지를 교도소에 그냥 처박아 두겠다고? 역시 공부 좀 하는 놈들은 자기 살 궁리만 하는 이기적인 놈들이 전부라니까?”
성희가 냉소적으로 말하자 찬성이 거칠게 소리쳤다.
“말이라고 아무 말이나 내뱉지 마라. 네 조건이 너무 터무니없는 거니까 말야. 나는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교도소에 가는 것을 택하겠다. 혹시 모르지, 하루만 노예로 사라면 그건 못해줄 것도 없지만 언제까지 네 노예 생활을 하란 말이냐?”
성희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평생을 그럴 수는 없지. 이번 학기만 내 노예로 살면 돼. 겨울방학하기 전까지. 어때? 그 정도면 할 만하지 않아?”
“그것도 너무 길어.”
“나도 더 이상 양보 못해.”
성희가 더 이상 타협하지 않겠다는 듯 정면을 응시하고 입을 닫자 찬성은 갈등했다.
‘4개월이다. 그 동안 저 사이코 같은 녀석의 노예가 돼야 하나?’
잠시 동안 머릴 맹렬히 굴려봤지만 결국은 성희의 말대로 될 것 같았다. 그렇다면 최대한 얻을 수 있는 것은 얻어야한다.
“성희야.”
찬성이 조금 풀어진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성희가 고개를 돌려 찬성을 쳐다보았다.
“왜? 결정했어?”
“나는 어렸을 때부터 계속 세워 온 계획이 있어.”
“무슨 계획?”
“공부 열심히 해서 S대 법대 수석으로 입학하고 사법고시 수석으로 패스해서 우수한 법관이 되는 계획.”
“정말 꿈 한 번 화려하군. 내가 보기에 넌 못될 것도 없겠다.”
성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찬성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 이 중요한 시기에 네 노예로 4개월을 허송세월한다면 어떻게 내 꿈을 이루겠니? 네가 조금만 봐주면 안 되겠냐?”
순간 성희의 얼굴이 조금 변했다. 하지만 이내 제 얼굴색을 회복하고 고개를 옆으로 흔든다.
“안 돼. 하지만 나 때문에 네가 인생 망쳤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으니까 너 공부할 시간은 충분히 주도록 하지. 필요하면 충분하게 과외 받을 수 있도록 경제적인 지원도 하고 말이야. 그럼 되잖아?”
“왜 나에게 집착하는 거니? 찾아보면 다른 좋은 사람도 많을 텐데.”
“너 같은 남자 찾아보기 힘들어. 그리고 그 동안 너에게 받은 수모도 잊기 힘들고.”
‘그건 전부 네가 억지를 부려서 된 거잖아?’
찬성은 속으로 외쳤지만 겉으로는 절대로 말 할 수 없었다. 이제부터 성희의 비위를 건드리는 말은 해선 안 되는 것이다.
“나 사실, 어제 고민 많이 했다. 아버지를 구해야 하지만 내 인생이 더 중요한데. 네가 정말로 무리한 요구를 하면 나 아버지도, 이 학교도 포기하고 다른 데로 이사할 생각까지 했어. 최악의 경우 외국으로 유학을 갈 까도 생각했어. 나 혼자라면 미국을 가도 충분히 견뎌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고.”
찬성의 말에 성희의 안색이 변한다.
“너 그렇게 이기적인 애였니? 그렇다면 내 생각을 말해줄게. 난 네 아버지로 안 되면 네 엄마를 손 볼 생각이다. 네 엄마 시장에서 고생하며 너 가르치는 것 같던데 사람 사서 몸의 어디 하나 부러뜨리는 거, 일도 아니지. 네 엄마 몸이 불편하면 너 네 집 누가 돈 버냐? 그리고 네 동생 하나 있다며? 여자라던데 어린 것이 어디서 불량배들 만나 집단 성폭행이라도 당해봐. 너 네 집 콩가루 되는 거 시간문제니까.”
“너 정말?”
찬성은 기가 막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이런 악독한 생각까지 하고 있는 녀석 앞에서 더 이상 버틴 다는 것은 무리다. 혹 떼려다 혹 하나 더 붙이게 생긴 찬성은 최대한 부드럽게 성희에게 말했다.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거지, 내가 실제로 그렇게 한다고 했냐? 나도 네 요구 조건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테니까 너도 내게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도록 서로 절충하잔 말이다.”
“좋아.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네가 내 말만 잘 듣는다면 너에게 이익이 있으면 있었지 손해는 가지 않도록 할 테니까 정해진 기한 동안 내 말만 잘 들으면 되는 거야. 어려울 것도 없잖아? 넌 내가 요구하는 대로만 하고 남은 시간에 공부 열심히 하면 된다니까. 뭐가 어렵냐?”
“그럼 한 가지만 부탁하자.”
찬성의 말에 성희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미 성사된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는지 녀석의 얼굴이 환해졌다.
“학교에서는 내가 너와 그런 관계라는 걸 몰랐으면 해.”
“왜? 자존심 상해?”
“당연하지. 그런 일이 알려지면 내가 어떻게 계속 학교엔 다니겠니? 전학을 가는 수밖에 없지.”
“하긴 그렇겠다. 좋아. 그 대신 우리 둘만 있을 때는 내 말에 절대 복종하는 거다?”
“알았어.”
찬성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우리 계약서라도 쓸까?”
성희가 환호성이라도 지를 것 같은 표정으로 묻자 찬성이 고개를 흔들며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럴 필요 없어. 우리 둘이 나눈 얘긴 모두 여기에 녹음이 돼 있으니까.”
성희가 찬성의 손에 들린 소형녹음기를 보며 놀라다 이내 웃음을 터뜨린다.
“호호. 정말 머리 좋은 녀석이라니까? 야. 앞으로의 4개월이 정말 기대가 된다.”
“그럼 아버질 풀어줘. 그때부터 우리 관계는 시작되는 거니까.”
찬성이 말하자 성희가 손을 뻗어 찬성의 뺨을 어루만졌다.
“걱정 마. 오늘 당장 연락할 테니까. 그럼 내일 아침이라도 네 아버진 집으로 올 수 있어.”
“고맙다.”
고마울 것 하나도 없지만 찬성은 성희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
“자. 너도 얼른 집에 가서 이 기쁜 사실을 가족에게 전해야지? 이대로 집에 데려다 줄게.”
“응. 고마워.”
찬성은 성희의 차를 타고 집으로 왔다.
집에 돌아온 찬성은 엄마와 찬주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엄마! 왜 또 벌써 왔어?”
아침에 시장에 나간 엄마가 또 집에 와 있었던 것이다.
엄마의 기색은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늘은 어제보다 더욱 상태가 안 좋았다.
찬성을 보자 지연이 울먹, 하더니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엉엉!”
“엄마!”
찬성이 다가가 지연의 몸을 안자 지연이 더욱 서럽게 운다.
“흑흑! 찬성아. 엄마 너무 힘들어 못살겠다.”
“너무 걱정하지마. 다 잘 될 거야.”
찬성이 다정하게 위로하자 지연이 찬성의 품에서 벗어나더니 갑자기 찬주의 뺨을 사정없이 때렸다.
철썩-
“엄마! 왜 찬주를......”
찬주는 뺨에 손자국이 나도록 맞으면서도 가만히 있었다. 그것을 보고 찬성은 또 찬주가 일을 저질렀다는 걸 알았다.
“이 애물단지가 또 학교에서 사고쳤다. 오늘 시장에서 장사하는데 학교에서 그쪽까지 찾아왔더라. 이 아무 짝에도 쓸 모 없는 것이 같은 반 남자 애를, 그것도 두 명씩이나 두들겨 패서 학교가 발칵 뒤집혔단다.”
“엄마! 진정해. 찬주도 아빠 때문에 속이 상해 그랬겠지.”
찬성이 대신 변명해주자 지연이 찬주를 노려보며 말했다.
“아무리 속이 없어도 그렇지. 지금 지 아빠 때문에 집이 난리가 났는데 혹을 하나 더 붙여? 정말 내가 어째서 저런 애물단지를 자식이라고 기르는지 모르겠다.”
“엄마. 진정해.”
“아무리 진정하려고 해도 진정이 안 된다. 술이나 한 잔 마셔야지. 야. 너 냉장고에 가서 소주 한 병 꺼내 와.”
지연이 말하자 찬주가 말없이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 와 식탁에 놓았다.
지연이 의자에 앉더니 소주를 물컵에 따라 단숨에 마셔버린다.
“크으!”
찬주가 김치를 놓자 지연은 김치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씹다 다시 컵에 소주를 따랐다. 그러자 소주 한 병이 금방 바닥을 드러낸다. 지연은 다시 한 컵을 단숨에 마시고 김치 한 조각을 씹었다.
“한 병 더 가져와.”
찬주가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더 꺼내 식탁에 놓았다.
찬성도 찬주의 행동을 말리지 않았다. 엄마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있어 이렇게라도 풀지 않으면 배겨내기 힘 들 것이기 때문이다.
꺼억-
한 병을 급하게 마셔 취기가 오르는지 지연은 잠시 트림을 한 번 하더니 컵에 다시 술을 따랐다. 이번엔 단숨에 마시지 않고 잠시 뭔가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그 모습을 보고 찬성은 주방에서 작은 소주잔을 찾아 지연의 앞에 앉았다.
“엄마. 나도 한 잔만 줘봐.”
찬성이 잔을 내밀자 지연이 아들의 얼굴을 쳐다보다 소주를 잔에 채웠다.
“건배!”
찬성이 잔을 내밀자 지연도 찬성이 내민 잔에 물컵을 가볍게 부딪혔다.
쨍-
“우리 가족의 행복을 위하여.”
찬성이 크게 말하고 잔을 입에 가져가 단숨에 비웠다.
“엄만 천천히 마셔. 내가 할 말이 있으니까.”
찬성은 지연에게 말한 뒤 동생을 쳐다보았다.
“찬주야. 너도 이쪽에 앉아라. 오빠가 할 말이 있다.”
찬주가 찬성의 옆에 앉았다.
“엄마. 찬주가 때린 애들은 많이 다쳤어?”
“응. 하지만 남자 녀석들이고 먼저 찬주에게 시비를 걸었으니까 치료비만 물어주면 넘어갈 것 같긴 해. 학교에서는 다시 한 번 이런 일이 생기면 태권도고 뭐고 정학처분을 시키겠다고 했는데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진짜 문제는 네 아빠다. 휴우. 몸도 약한 사람이 교도소에서 고생을 하고 있을 생각을 하면......”
지연이 넋두리 하듯 말하자 찬성이 지연의 손을 잡았다.
“엄마. 아빠 일은 해결이 될 것 같아.”
그러자 지연과 찬주가 놀라 찬성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응. 알고 보니 아빠를 고소한 사람이 우리 반 친구네 집안과 잘 아는 사이야. 더구나 친구네 집에 크게 신세를 지고 있는 사람이어서 친구가 말을 잘 해준다고 그랬거든.”
“그런다고 해결이 되겠니? 돈이 걸려있는 문젠데.”
지연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자 찬성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라니까. 오늘 고소한 사람과 친구와 만나 모든 일을 매듭짓고 왔어. 그 사람이 고소를 취하한다고 했으니까 잘하면 오늘 저녁이나 내일 아침이면 아빠가 풀려나올 수 있어.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믿어도 돼. 엄마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돼.”
찬성이 재삼 다짐하듯 말했지만 지연은 그래도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엄만 잘 믿어지지가 않는다. 아무리 어떤 대가도 없이......”
“대가는 있어.”
“뭐야 그게?”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지연이 묻자 찬성이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친구네 집에서 친구 공부를 좀 도와주기로 했어. 그 애 집은 부잔데 공부는 못하거든. 말하자면 고액과외를 하는 셈이지.”
“그래. 너 시간 많이 뺏길 텐데.”
지연이 이제 아들을 걱정하자 찬성이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걱정 마. 내 시간 봐가면서 할 거고 그 집에서 공부를 가르친다고 해도 가르치면서 나도 같이 공부할 수 있으니까. 엄마 나 믿지?”
“그럼. 이 세상에서 딱 한 사람, 내 아들만은 이 엄마가 믿지.”
찬성의 말을 듣고 한 시름 놓이는지 지연이 소주를 단숨에 마신다. 물컵으로 세 잔째다. 그러나 세 잔을 마시고 나자 지연의 혀가 드디어 꼬이기 시작했다. 평소 주량보다 약간 빨리 취한 셈이다.
찬성은 찬주에게 이부자리를 준비하라고 한 뒤 지연을 부축했다.
“엄마. 다 잊어버리고 푹 쉬어. 내일부터는 모든 일이 다 잘 될 거야. 내 말 믿지?”
“그래. 내 아들. 딸꾹! 난 너 없었으면 진작에 죽어버렸을 거야. 도대체 세상 사는 재미가 있어야지.”
“그래. 엄마. 엄마 맘 다 알아.”
찬성이 지연을 부축하고 다정하게 말하자 지연이 몸을 펴고 얼굴을 세우더니 찬성의 입에 입술을 들이 댔다. 찬성은 피하지 않고 엄마의 입술을 받아주었다.
‘......!’
술 냄새와 김치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찬성은 그것도 좋았다. 내일부터 성희에게 어떤 수모를 당할지 모르는데 엄마의 이 정도 주정쯤은 얼마든지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쪽-
“우리 아들. 장한 내 아들.”
뭐라 계속 중얼거리는 지연을 안방에 눕히자 그녀는 잠시 더 의미모를 말들을 중얼거리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
엄마가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 찬성과 찬주는 거실로 나왔다.
“오빠 배 고프다.”
찬성이 말하자 찬주가 밥을 차렸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식사를 했다.
식사가 끝나자 찬성은 방으로 들어가 공부를 했고 찬주는 뒷정리를 한 뒤 마당에 나가 샌드백을 치며 저녁운동을 했다.
달칵-
찬주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찬성은 책을 보고 있던 시선을 동생에게로 돌렸다.
‘......!’
샤워를 마치고 들어오는 동생의 얼굴을 보니 전과 다름이 하나도 없다. 남자 애 두 명과 꽤 격렬하게 싸운 것 같은데 긁힌 자국 하나 없었다.
찬주가 이불을 펴고 찬성을 쳐다본다. 찬성이 보니 아직 동생의 얼굴엔 자려는 기색이 없다.
“오빠한테 할 말 있어?”
찬성이 묻자 찬주가 고개를 끄덕인다.
찬성은 책을 덮고 다가가 찬주가 깔아놓은 이불 위에 같이 앉았다.
찬성이 쳐다보자 찬주가 고개를 살짝 떨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아니야. 너도 힘들었지?”
찬성이 손을 뻗어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자 찬주가 몸 전체를 찬성에게 기대며 그의 품으로 들어왔다.
“오빠!”
“그래. 찬주야.”
찬성도 감정이 격해져 동생의 몸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러자 한 치의 틈도 없이 두 사람의 몸이 결합되었다.
찬성은 입술 바로 밑에 있는 찬주의 머리카락에 코를 대고 막 감은 머리카락에서 풍겨나오는 향기로운 냄새를 맡았다. 격해진 마음이 냄새를 맡자 왠지 모르게 편안해졌다.
그 상태에서 찬성을 손을 뻗어 찬주의 머리카락을 계속 쓰다듬었다.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이 밑으로 내려가 찬주의 등을 넓게 매만졌다.
한참동안 동생의 등과 머리카락을 애무하던 찬성은 손을 떼고 찬주에게 말했다.
“이제 잘 시간이지?”
“오빠!”
“왜?”
찬주가 찬성의 품에서 얼굴만 든 채 오빠의 얼굴을 마주보며 말했다.
“오빠도 오늘은 공부 그만하고 나랑 같이 자면 안 돼?”
“그러자. 마침 오빠도 오늘 하루는 농땡이 좀 부려보고 싶었는데 잘 됐다.”
찬성이 말을 하고 몸을 일으켰다.
“오빠 씻고 올게.”
“응.”
욕실에서 찬성은 양치와 샤워를 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찬주는 얼굴만 내민 채 이불 속에 들어가 있었다.
찬성은 잠옷으로 갈아입고 불을 껐다.
순식간에 어두워지자 찬성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자 금방 방안에 눈이 적응을 한다. 찬성은 이불을 들추고 찬주의 곁에 조심스럽게 누웠다.
‘......!’
찬성은 닿는 감촉에 약간 놀라 찬주의 옷을 살폈다. 여름에 입는 잠옷을 걸쳤는지 아주 얇고 부드러운 감촉이 동생의 옷에서 느껴졌다.
찬성이 동생을 보고 모로 눕자 찬주도 기다렸다는 듯 찬성을 보고 모로 누웠다. 그러자 서로 마주보는 자세가 되었다.
찬성은 찬주의 눈을 쳐다보았다. 찬주도 시선을 내리지 않고 오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찬성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볼 때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동생의 눈은 정말 아름답다.
눈동자는 흑진주처럼 검고 하얀 부분은 또 너무나 맑고 깨끗해 흑백이 분명하게 구분 되는 정말 아름다운 눈이다. 이제 중학교 1학년인데도 중앙을 향해 똑바로 솟은 콧날, 그리고 뚜렷하게 선이 그어진 도톰한 입술은 갸름한 얼굴과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아름다운 입술이 찬성을 향해 살짝 벌어졌다.
“오빠!”
“응?”
“오빠가 공부 가르치기로 했다던 그 사람, 혹시 전에 오빠 귀찮게 한다던 그 여자 아니야? 재벌집 딸이라는......”
순간 찬성은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찬성은 고개를 저으며 부인하고 말았다.
“아니야. 그 앤 이제 나에게 관심도 없어. 학기 초에 잠깐 그러다 말았는걸? 그보다 찬주 넌 이제부터 싸움은 그만 해. 엄마가 너무 걱정하잖아?”
화제가 자신의 싸움으로 돌아가자 찬주는 더 이상 찬성의 일에 대해 물어볼 기회를 잃고 말았다.
“알았어. 이제부턴 정말 조심할 게. 오늘은 아빠 때문에 너무 화가 나서 그랬는데 결과가 너무 좋지 않아서 이젠 자제하기로 결심했어. 오빠한테도 미안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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