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al! 그 남자의 하루 - 단편
본문
Goal! 단편 - "그 남자의 하루"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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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의 한 가운데에 길게 이어진 하얀색 실선과 거의 직각을 형성하며 완전히 멈춰 서있던 아우디 R8은,
곧이어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굉음을 내며 코너를 돌아 나오면서도 속도를 줄이기는커녕
무자비하게 가속하며 달려오고 있는 거대한 트럭과 비교하니 장난감 같기만 했다.
하지만 그 장난감 속에선 온통 찌그러져 있던 운전석 문을 끝내 열지 못한 근명이
안전벨트조차 다시 매지 못한 채 다급하게 소리를 지르며 클락숀을 죽어라 눌러대고 있었다.
“씨~바아알! 사람 있다고오!!!!!!!!!”
빠아아아아앙!!!!!!!!!!!!!!!!!!
하지만 25톤과 그 무게 이상의 가속력이 주는 거대한 위압감에
결국 근명은 모든 것을 포기하곤 나직하게 한 마디를 읊조려보았다.
“좆됐네…”
그리곤 눈깜짝할 사이에 코 앞까지 다가온 트럭의 모습에 근명은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고,
이윽고 엄청난 충돌음이 고막을 찢어버릴 것만 같았지만,
잠시 후 느껴질 고통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거란 것 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콰광!!!!!!!!!!!!!!!!!!!!!!!!!!!!
생전 처음 들어보는 엄청난 파열음과 함께 눈을 감고 있었음에도 근명은 온 세상이
뱅글뱅글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는데,
그 아비규환 속에서 근명은 몸 전체가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고, 그것으로 모든 게 끝나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순간 몸이 둥실 떠오르는 것 같더니 갑자기 그 소란의 소용돌이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뭐…야?”
벌써 천국이라도 온 건가 싶은 기묘한 느낌에 슬며시 눈을 뜨는 순간
눈 앞엔 잔뜩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하늘이 들어왔다.
천국, 혹은 지옥에도 저런 하늘이 있구나 싶던 그 순간,
잠시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만 같았던 몸은 중력을 고스란히 느끼며 그대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러자 근명의 몸은 그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 그대로 내동댕이쳐지고 있었고
다리와 어깨 그리고 뒷통수에 엄청난 고통을 느낌과 동시에 근명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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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아… 안돼!!!!!!!!!!!!!!! 헉헉…”
하연을 납치하는 차를 추격하던 날 이후, 하루도 거르지 않았던 꿈에서
또다시 힘겹게 빠져 나온 근명은 마치 바로 전에 사고를 당한 것 마냥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게다가 침대의 시트가 푹 젖을 정도로 식은 땀까지 흘린 터라 그렇게 잠에서 깨고 나자
결국 다시 잠들기는 틀렸다는 생각을 해봤지만, 그럼에도 근명은 침대 위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다.
교통사고로 인한 회복기간을 몇 개월이나 거친 후에야 가능했던 무릎 수술은 받은 지 벌써 며칠이나 지났었다.
하지만 어쩐지 겁이 사라져주지 않는 통에 혼자 있을 땐 차마 함부로 움직여볼 생각조차 못했던 것이다.
‘…’
때문에 근명은 조심스레 상체만을 반쯤 일으킨 채 창문으로 스며드는 달빛과 함께
아직도 낯설기만 한 방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간단한 원목 옷장과 스탠드, 그리고 일인용 소파 두 개가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것 말고는
그리 대단할 것도 없었지만, 몇 년 전에 ‘이영후’가 있었던 방이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알 수 없는 신비함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감상에 젖은 것도 잠시, 이내 문 밖에서 정적을 깨는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아, 네.”
근명은 노크소리가 들려오자 그제야 오늘도 또다시 잠결에 실수를 해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역시나 근명의 비명소리에 놀란 한일동 전 재독한인축구협회장이
문 밖에서 조심스럽게 노크를 하고 있었으니까.
당연히 한회장의 집이었으니만큼 손님을 걱정하는 마음에 한달음에 달려왔겠지만
근명의 입장에선 그런 식의 친절함은 언제나 부담스러울 따름이었다.
"괜찮은 겐가?"
이윽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잠옷 차림의 키 작은 노인이 골동품 같은 서양식 램프를 들고 들어서자
근명은 조금쯤 눈을 찡그리기도 했지만, 이윽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또 꿈을 꾼 게로군.”
“죄송합니다 매번 이렇게… ”
본의 아니게 번번이 어르신의 단잠을 깨운 근명은 무척이나 미안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차라리 병원에 계속 입원해 있을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독일 의료 체계는 어지간한 중상자가 아니라면 수술을 마친 후엔 계속 입원해 있을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지근 거리에 숙소를 마련한 채 병원 및 재활센터를 왕래해야 했다.
때문에 영후의 소개로 이곳 한회장 댁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죄송스러웠는데,
예순을 넘긴 노인을 이렇게 밤낮을 안 가리고 귀찮게 해드리고 있었으니 차마 얼굴을 대할 면목조차 없었다.
하지만 한회장은 회장이라는 직함과는 달리 예의 옆집 할아버지 같은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테이블에 램프를 내려놓고는 소파에 앉았다.
“아픈 몸으로 타국에 나와있으니 좀 적적할 게요.
나도 하선수 나이 쯤 이곳 독일에 왔을 때 비슷하게 느꼈었으니까.”
“…”
근명은 한회장의 아들이자 이곳 현지에서 통역사 겸 에이전트로 활동하고 있는
‘마쿠스 한’에게 간단하게 이야기를 들어서 대충은 알고 있었다. 그전 까진 전혀 몰랐었지만
사실 전 재독한인축구협회장 한일동 씨는 국내 축구인 사이에서도 너무나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러고 보니 참, 긴 세월이 흘렀구먼…”
근명은 깊은 주름을 이마에 새기며 과거 속으로 회귀하고 있는 한회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찌 보면 한국 축구사에 이 남자가 없었으면 어쩔 뻔 했을까 하는 쓸데없는 상상도 해보면서.
“왜, 돌아가시지 않으셨나요?”
“음? 아, 조국에… 말인가요?”
근명은 한국이나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아닌 ‘조국’이란 단어가 한회장의 입을 통해서 흘러나오자
괜히 숙연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 어려웠던 시절, 국가는 힘들고 배고픈 국민들에게
그 무엇을 해주기는커녕 착취만 일삼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한창때의 청년이었던 자신을 외화벌이라는 명목으로
빈 몸뚱아리만을 생소한 외국으로 보내버린 나라를, 그리고 이제는 그런 나라에게 외면 당하고 있는 사람이
스스로의 입으로 ‘조국’이라는 말을 너무나 쉽게 내뱉자
그것 만으로도 근명은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가만있자… 내가 독일에 건너왔을 때가 1965년이었으니까, 참 긴 세월이 흘렀구려.”
한회장은 마치 그때가 어제 같은지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아직은 밤의 기운이 가득한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처음엔 그저 3년만 열심히 일해서 돌아가려고 했었지.
근데, 이 코쟁이 독일 놈들이 우리 같이 천한 것들을 사람으로 대해주는 거야. 사람으로 말이지…”
‘사람으로…’
근명은 그 당시의 우리나라 사정을 어림짐작해볼 수 밖에 없었지만,
지금도 눈에만 보이지 않을 뿐 극심한 계급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현실을 돌아보며
한회장의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언제나 일하는 시간은 일정했고, 조금이라도 몸이 아프다면 여지없이 병원에 보내 진료를 받게 해 줬지.
그때의 우리나라였다면 꾀병 부린다고 대번에 짤라 버렸겠지만 말일세.
그렇게 사람대우를 받으며 잠깐씩 일을 하고 나오면 또 빵과 고기는 차고 넘치도록 제공해줬었다네.
그리고 일 끝나고 가끔 사먹던 맥주 맛은 또 왜 그렇게 좋던지. 그래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 보니
3년이 5년으로, 또 5년이 10년으로 눈깜짝할 사이에 늘어나버렸다오. 게다가 그 중간에”
“절 만나셨구요.”
순간 한회장의 말에 끼어드는, 한회장만큼이나 연륜이 묻어나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한회장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하얗게 바랜 머리칼 사이를 손가락으로 긁적이며 말했다.
“이런, 당신… 또 나 때문에 깬 거요?”
“어쩜? 당신만 젊은 척 하기에요? 어차피 당신이나 나나, 이제 새벽잠은 없을 나이면서~”
역시나 한회장의 부인 이영숙은 짐짓 토라진 척하며 나이트가운을 입은 채 근명의 방에 들어섰는데,
그러나 소파에 앉기 전 근명을 바라보며 물었다.
“남자들끼리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저도 잠시 끼어들어도 될까요?”
“아, 물론입니다. 거기 앉으셔도…”
당연히 노부부의 집이었으니 근명은 침대에 어정쩡하게 앉은 채 두 손으로 남은 소파를 가리켰고,
그제야 영숙은 나이트 가운을 조금쯤 여미며 한회장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리곤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눈으로 한회장을 넌지시 바라보며 근명에게 말했다.
“잠도 못 자고 이이 얘기 듣느라 곤욕이죠?”
“아, 아닙니다.”
“이 사람, 난 그저 선수 보호차원에서 걱정스러워 와 본거라오. 집 떠나면 누구나 힘들고 외롭지않소?”
영숙의 인사치레에 한회장은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근명을 돌아보며 절대로 동의해 주길 바라며물었지만,
영숙도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그거야 우리 때 얘기고요. 요새 젊은 사람들이 우리같이 나이든 사람들 얘기 듣는 거 어디 좋아하는 줄 아세요?”
“아, 그렇던가?”
부부싸움을 가장한 부부금슬을 왜 이 야심한 밤에 그것도 여기까지 와서 자랑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근명은 어쩐지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보고 앉아있는 모습만으로도 왠지 모를 위로가 되는 것 같았다.
또한 지금의 이 노부부처럼, 자신도 누군가와 단란한 가정을 꾸릴 수 있을지도 조금은 궁금해졌고.
하지만, 머릿속에 어김없이 떠오르는 한 여자 때문에 근명은 괜히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지고 말았다.
그러자 이런 근명의 마음을 들여다 본 것인지, 영숙이 더욱 부드러운 목소리로 근명을 깨웠다.
“이이가 또 광부로 일했던 얘기를 하던가요?”
“아, 아뇨. 그냥.”
“흠, 그럼 아직 저와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또 어떻게 결혼하게 됐는지는 아직 못 들었겠군요?”
영숙은 그나마 자신의 몫이 남아있다는 것에 무척이나 기뻐하는 얼굴이었는데,
그에 한회장이 조금 거들고 나섰다.
“내 안 그래도 지금 막 그 얘기를 하려고 그랬다오.
이 사람은 그때 간호사로 독일에 와 있었는데, 그땐 참 꽃 같았지.”
“어머? 지금은 아니구요?”
“응? 아, 지금도 꽃은 꽃이지, 할미꽃! 크하하하!”
점점 창문 밖에선 세 사람 몰래 동이 터오고 있었지만, 한회장도 한회장의 와이프도 어쩐지
근명의 방에서 나가려 하기는커녕, 서로의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한없이 그리울 나라의 진한 내음을 간직하고 있는 자신이
노부부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근명은 아침이 올 때까지 이야기를 계속 들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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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잠들어 있었을까. 근명은 저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듯한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그제야 자신이 어느새 잠들어버렸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근명씨, 근명씨.”
“으음… 예에…”
“아이고, 또 저희 어머니 아버지께서 밤새 괴롭혀드린 모양이군요?”
하지만 노부부들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고, 그들의 아들인 마쿠스 한(Markus Han)이
조심스럽게 잠든 근명을 흔들어 깨우며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근데 벌써 시간이…?”
“네, 예약 시간에 늦지 않게 가려면 슬슬 준비하셔야 되거든요.”
마쿠스 한이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역시나 미안하단 표정으로 말하자
근명은 떡진 머리를 한 채로 여전히 떨어지지 않는 잠 기운을 떨치려 눈에 힘을 주어 부릅 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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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쿠스 한의 부축을 받으며 흰색 아우디 Q5의 조수석에 몸을 싣고 나자
근명은 완벽하게 박살 난 자신의 애마 R8이 생각나 자신도 모르게 온 몸이 경직되는 것 같았다.
이윽고 운전석에 탄 마쿠스 한은 시동을 걸기 전 무척이나 굳어져 있는 근명을 바라보더니
그제야 어렵지 않게 이유를 깨닫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미안합니다. 공교롭게도 제 차가…”
“네? 아, 아닙니다.”
“그래도, 독일 사람들이 차 하나는 정말 잘 만들어서 말이죠.
아버지께서 항상 말씀하시는 애국심만으론 한국 차를 사기가 쉽지 않더라구요.”
하지만 근명은 여전히 국적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마쿠스 한이야 말로
어지간한 애국심을 초월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해합니다. 덕분에 저도 이렇게 살아있으니까요.”
“그래도 참 생각할수록 아이러니합니다.
안전벨트를 다시 못 매서 차에서 튕겨져 나온 덕분에 살 수 있었다니요…”
마쿠스 한의 덧붙임 말에 근명도 그 당시의 상황이 아직도 믿겨지지 않았지만,
응급실에서 깨어났을 때야 말로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나중에 보험사 직원이 보여준, 휴지조각처럼 구겨져 있던 차량의 사진을 본 이후엔 더더욱.
어쨌든 곧바로 마쿠스 한이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키자, 여전히 익숙지 않은 차창 밖의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근명은 문득 생각이 났는지 센터페시아에 있는 엘씨디 화면에서
시간을 확인하고는 조금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근데, 오늘은 다른 날보다 좀 일찍 가는 거 아닌가요?”
“아, 오늘은 레하 센터(주석 참고) 직원들이 조금 바쁜 날이거든요.”
(독일 Reha-Training 주식회사. 레하 트레이닝은 한국선수들이 가장 많이 찾고 있는 재활센터로
김동우, 양희승, 김일두 등 농구 선수를 비롯해 축구 선수 김남일, 야구 선수 박경완 등이 거쳐 간 곳이다.)
근명은 마쿠스 한의 말을 듣고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는 다시 시선을 창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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쾰른의 한회장 집에서부터 40분 정도 달리자, 이윽고 레버쿠젠에 위치한 레하 센터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그러자 마쿠스 한은 그제야 생각난 듯 조금은 미안한 얼굴로 근명에게 말했다.
“참, 오늘은 죄송하지만 치료를 혼자 받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볼일이 있어서 잠시 어딜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아서 말이죠.”
“아, 네. 신경쓰지 마세요. 대단한 걸 하는 것도 아닌데요 뭐.”
“하지만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올 테니까, 걱정하실 필욘 없어요.”
“걱정은요.”
근명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하고는 있었지만 솔직히 마쿠스 한의 통역 없이 재활 치료는커녕
진료실에서의 상담을 제대로 할 수나 있을지 걱정이 앞서기만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미리 영어라도 익혀놓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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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시간에 맞춰서 모시러 오겠습니다.”
이윽고 마쿠스 한이 매끈한 흰색의 Q5를 돌려 사라지자 근명은 목발을 짚으며
마치 가정집 같은 모습의 레하 센터의 입구에 들어섰다. 그리곤 작지만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선 근명은 역시나 하얀 색 벽에 가득 붙어있는 사진들을 바라보았다.
그 사진들은 그간 이곳을 거쳐간 사람들 중 유명한 선수들을 기념하기 위해 붙여놓은 것이라고 했다.
군데 군데 사진이 붙어있던 자국만 남아있는 공간이 조금은 이상하긴 했지만, 그보다는
어디서도 영후의 사진을 찾을 수 없었기에 근명은 매일같이 이 벽을 지나며 피식 웃을 수 밖에 없었다.
‘하긴, 그 선배도 여기 사람들에겐…’
언제부턴가 마음 속으로 가장 존경하게 된 남자였지만,
이곳은 한국이 아닌 독일이었다는 걸 확실하게 깨닫곤 하는 근명이었다.
“하근명 선수?”
“?”
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겨있다가 자신을 부르는 "한국어" 소리에 놀란 근명은,
그러나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곤 더욱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우선은 예상치 못했던 미모를 소유한 여자였기에 그랬기도 했지만,
미모에 버금갈 정도의 탐스러운 가슴이 먼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초면에 자신도 모르게 가슴부터 뚫어지게 바라보다 멋 적어진 근명은
그녀의 왼쪽 가슴에 붙어있는 명찰을 바라본 척 해 보았다.
“소…”
“‘소피(sophie)’에요. 반가워요. 전 오늘 하근명 선수의 마사지와 통역을 담당할 겁니다.”
소피.
이름은 분명 독일인 같았지만, 어쩐지 똑 부러지는 한국말을 하는 것만큼이나
한국 사람 같은 느낌도 느껴졌기에 근명은 그녀가 악수를 청하며 내민 손을 잡으면서도
여러 가지 궁금한 것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박사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이 쪽으로 가시죠.”
하지만 자신의 일을 해야 한다는 양 다소 사무적인 억양으로 안내하자 근명은 여전히 어색한 목발을 짚으며
그녀가 열고 서 있는 문의 안쪽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근명의 무릎 수술을 집도한
파이퍼(Thomas Pfeifer)박사가 예의 반짝거리는 민머리를 자랑하며 반가운 얼굴로 맞아주었다.
“미스터 하! 기분은 어떤가요?”
역시나 간단한 박사의 물음도 쉽게 이해하지 못하던 근명은 결국 소피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기분 어떠냐고 물으시네요.”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습니다. 빨리 나아지기만을 바랄 뿐이죠.”
이내 소피가 다시 근명의 말을 독일어로 통역하자 무표정한 근명을 바라보던 파이퍼 박사는
충분히 이해한다는 얼굴이었다.
고정운, 김남일, 송종국, 박동혁 등 자신이 집도한 한국의 스포츠 스타들의 얼굴 또한
지금의 근명의 표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었으니까. 게다가 그때의 ‘이영후’ 도.
때문에 파이퍼 박사는 언제나 그랬듯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아시다시피 인대가 완전히 붙는데 만도 6주가 걸리는데다가
손상된 연골에 물이 차오르지 않게 하려면 최대한 무리하지 말아야 하니까요.
오늘도 마사지나 트레이닝을 하면서 세심하게 본인 몸의 느낌을 살피도록 하세요.”
한국 같았다면 길어야 3분 정도면 끝날 진료 상담은 그러나 거의 15분이 넘도록 끝날 줄을 몰랐는데,
이윽고 모든 상담이 끝났는지 파이퍼 박사는 소피를 돌아보며 말했다.
물론 그 말조차도 무척이나 지루해하던 근명은 알아듣진 못했지만 충분히 기다리고 있던 말이었다.
“소피, 그럼 부탁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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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지루했던 상담을 뒤로 하고 2층으로 오른 근명은 각종 헬스 기구들이 즐비한 가운데
삼등분으로 나눠져 있는 검은색의 얇은 침대에 소피의 도움을 받으며 누웠다.
그러자 숙련된 소피의 손길이 근명의 왼쪽 다리에 와 닿았다.
“림프 마사지 시작하겠습니다.”
림프 마사지란 수술부위와 함께 평소보다 부어 오른 다리의 붓기를 빼기 위한 일환으로
치유작용의 속도를 빠르게 하고, 림프의 흐름을 개선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소피가 아닌 다른 피지컬 트레이너에게 들었던 기억이 났다.
아마도 마사지가 끝나면 전기치료가 시작될 것이었다.
물론 치료가 끝나면 지옥 같은 상체와 복근 위주의 트레이닝 메뉴가 기다리고 있겠지만.
하지만, 근명은 소피에게서 지금까지 만나봤던 이곳의 트레이너와는 조금 다른 것 같은 느낌을
어렵지 않게 받고 있었다. 뭐랄까, 조금 화가 나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때문에 평소엔 마사지를 받는 것 자체로 몸과 마음이 이완되는 기분이었다면
오늘은 어쩐지 마사지를 받는 것 자체가 어색하기만 했기에 근명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요… 혹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네? 아, 아니요.”
“그럼, 제가 뭐 실수한 거라도…?”
설마 근명은 초면에 가슴을 넋 놓고 바라본 것 때문에 이러는 건가 싶어 재차 물었지만
돌아오는 건 소피의 한숨뿐이었다.
“그쪽 때문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아니, 뭐… 걱정한다기보다 마사지 해주는 당신이 그런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받는 나까지 마음이 불편한 것 같아서 그럽니다.”
“…”
그러자 연신 부드럽지만 바쁘게 근명의 다리 위를 오가던 그녀의 손길이 잠시 멈췄다.
“미안해요.”
“아, 아뇨 미안하단 얘길 듣자고 한 건 아니고”
순간 너무나 쉽게 사과를 하는 소피의 모습에 근명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근명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소피는 그제야 속 마음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했다.
“실은…”
“?”
“오늘 중요한 시합이 있어요. 근데, 하필 오늘 대신 근무해주기로 한 친구가 일이 생겨서…”
“시합…이요? 무슨…?”
“축구 시합이요. 오늘 이곳 레하 식구들하고 크랑켄 하우스 병원 사람들하고 축구 시합이 있는 날이거든요.”
“그럼, 가면 되잖아요?”
“네? 참나, 난 지금 직장에서 일을 하는 중이라구요.
아무리 축구가 좋다지만, 내 할 일을 미뤄 둘 정도로 정신 나간 짓은 하지 않는다구요.”
“뭐, 그러시다면야… 근데 어디서 시합하는데요? 여기서 멀어요?”
“멀진 않아요. ‘바이 아레나’도 여기 레버쿠젠에 있으니까요.”
“아, 멀진 않군요… 자, 잠깐?! 어디… 라구요? 바이…?”
“’바이아레나(BayArena)’요…”
“그… 그러니까 그 바이아레나가 설마 독일 레버쿠젠팀의 홈 경기장, 바이아레나를 말하는 건 아니겠죠?”
“거기 맞는데요?”
“헉!!”
근명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소피의 얼굴에 더욱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소피를 비롯한 아마추어 동호회 팀들간의 경기를 독일에서,
아니 세계에서도 유명한 구단의 홈 경기장에서 한다니 어찌 놀라지 않았을까.
하지만 소피야 말로 눈 앞의 근명보다 더 눈이 휘둥그래지며 놀랐던
몇 년 전의 남자를 떠올리자 묘한 그리움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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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는 지금껏 이 남자가 이렇게나 반응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자신이 뭔가 잘못 말한 건가 싶을 정도였다.
때문에 괜히 겁먹은 얼굴로 영후를 바라봤지만, 이미 그의 눈엔 그녀가 들어있지 않았다.
“정말… 바이아레나에서 경기를… 한단 말인가요?”
“영후씨…?”
더 이상 기대감이 높을 순 없을 정도로 귓불까지 달아오르던 남자는,
그러나 이윽고 자신의 왼쪽 무릎을 바라보고서야 현실을 깨달은 듯,
눈동자에 서리던 기쁨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자 아무 상관도 없어야 했을 소피의 마음마저 더할 수 없이 무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소피는 영후에게 조심스럽게 권유를 해 보았다.
“저… 괜찮다면, 경기장에 같이 가면 되잖아요.”
“하지만…”
“?”
차마 이런 모습을 한 채로는 신성한 경기장에 들어서고 싶지 않았던 영후의 마음을 소피는 짐작조차 못했지만,
그럼에도 가슴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남자의 식지 않은 열정이 뜨겁게 꿈틀대기 시작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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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1997년식 검은색 골프 Mk4를 타고 도착한 경기장의 주차장엔 벌써 꽤나 많은 수의 차가 주차되어있었다.
“벌써들 도착해서 몸을 풀고 있을 거에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소피는 경기장에 도착하니 더욱 조바심이 느껴지는 듯 운전석의 안전벨트를 바삐 풀고는 트렁크 쪽으로 향했다.
그리곤 영후의 휠체어를 꺼내어 익숙하게 펼치고는 한달음에 조수석까지 밀고 와선 조수석의 문을 벌컥 열었다.
“자, 여기 영후씨 전용 자가용 대령이요~”
영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재기발랄해진 소피의 얼굴을 보자 자신의 마음도 한결 밝아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경기장에 휠체어를 타고 들어간다는 것이 만만치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에
영후는 휠체어에 앉자마자 소피에게 말했다.
“늦겠어요. 여기서부터는 제가 알아서 들어갈 테니까, 소피는”
“아… 그러실래요? 그럼, 금방 오세요! 저는 그라운드에 있을 테니까 찾기 쉬우실 거에요! 그럼 이따 봐요~!”
마치 영후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소피는 작은 가방을 챙겨선 그대로 경기장으로 달려들어갔고,
결국 홀로 남겨진 영후는 픽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저 미안한 마음에 인사치레로 해본 말을 넙죽 받아 들고 사라져버린 소피를 바라보자
그제야 이곳이 한국이 아닌 독일이라는 것을 제대로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식 인사는 역시 안 통하는 군, 훗.”
-
하지만 영후는 바이아레나의 클럽하우스까지 생각보다 너무나 수월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장애우를 배려한 경사도 낮은 진입로엔 휠체어가 이동하기에 걸림돌이 될 낮은 턱조차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은 큰길에서부터 바로 입장해 안전시설이 있는 특별석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통의 장애우들이
이용하는 방법이었지만, 그런 것을 알 턱이 없었던 영후는 다른 장애우들 보다 힘들게
경기장에 들어서고 있었음에도 꽤나 문화적 충격을 받고 있었다.
“어…?”
하지만 놀랄 일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클럽하우스 입구에는 너무나 놀랍게도 유럽축구연맹(UEFA)컵을 치켜든 차범근의 사진이
큰 액자에 걸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경기장을 홈으로 사용하는 레버쿠젠 팀이 유일하게 들어올린
UEAF 우승컵을 그 누구도 아닌 차범근이 들고 있었다.
때문에 뭔지 모를 뜨거운 감정을 주체 못하며 사진을 향해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보고 있었는데,
순간 들려오는 걸걸한 목소리로 독일어가 들려오자 영후는 꽤나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자넨 뭔가? 감히 차붐의 사진에!”
“아, 그…”
영어 말고는 아직 자신이 없었던 영후는 더듬더듬 독일어를 해보려다,
결국 포기하고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영어로 이야기를 쏟아냈다.
“저 사진 속 주인공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축구 선수라서요. 저와 같은 나라 사람이기도 하고요.
그치만 사진을 손상시킬 마음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정말입니다.”
“오? 자네도 차붐의 나라에서 온 건가?”
이윽고 방금전까진 무척이나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던 엄청나게 뚱뚱한 남자는
그제야 얼굴을 온통 뒤덮고 있는 턱수염 하나 하나가 살아 움직일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한국에서 왔다는 영후에게 무척이나 관심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
“헤이, 소피! 어떻게 된 거야? 오늘 못 온다고 하지 않았어?”
바쁘게 유니폼을 갈아입고 그라운드의 벤치로 달려 나온 소피는,
무척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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