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섬 - 단편 3장
본문
은 소리를 반복하는 강의가 지겨워진 나는 담배 생각이 났다.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숙이고는 조심스럽게 강의실을 빠져 나왔다. 오늘로 8주차의 선교여행 특별강좌의 마지막이기는 하지만, 늘 같은 소리를 반복하는 이런 모임이 무슨 필요가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지현이의 성화에 못 이겨 여행을 따라나서기로 작정했지만, 이렇게 오랜동안 강의를 들어야 하는 것인 줄 알았더라면 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의 두 달을 연속 매주 목요일 저녁 시간을 통째로 이런 지겨운 소리를 강사만 바꿔가면서 들어야 하다니..! 특히 오늘 강의는 그 중의 최악이다. 교회의 청년부를 담당하고 있는 오정현 목사는, 그래도 젊은 사람인데 어쩌면 저렇게 시대에 뒤떨어진 소리를 2시간째 해대는지... 듣는 사람으로서는 보통 곤욕이 아니다.
나는 교회 건물을 빠져 나와 이따금 담배생각이 나면 찾는 교회 주차장 뒤쪽의 작은 휴게실로 걸음을 옮겼다. 벌써 시간이 10시가 넘어갔고... 크고 잘 지은 교회 건물의 규모에 비해서 위치는 비교적 한갓진 곳이어서 사람이 별로 없는 휴게실 쪽으로 가면서 바지 주머니에서 라이터와 담배곽을 꺼집어 냈다. 아직 담배에 불을 붙이지도 않았는데, 이미 내 코끝에는 잘 타들어가는 담배의 고소한 냄새가 와서 닿는다. 이미 누군가가 먼저 와서 담배를 피고 있는 모양이다.
- 진짜 왕재미 없어..!
여자 목소리가 들린다. 전화통화를 하고 있는 것 같다.
- 그래, 오정현 목사. 그 사람 어떻게 우리 교회 부목이 된건 지 모르겠어... 재수 없어. 그래... 내 말이...! 그렇지..? 후흣..! 교인들이 자기 그런 소리 듣는거 아는지 몰라..?
전화가 끝나기까지 기다려주기에는 나도 담배 한모금이 절실했기 때문에 나는 약간의 인기척을 하고는 휴게실 쪽으로 들어갔다.
- 어멋...!
내 인기척에 전화통화를 하고 있던 여자가 놀래서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땅에 던지더니 밟아서 뭉갠다. 그리고 급하게 전화를 끊고는 내 쪽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 응, 응... 나 조금 있다가 다시 전화할께!
그러든지 말든지... 나는 담배 한 대를 꺼내서 입에 물고는 라이터로 불을 붙인다. 그 불빛에 토끼처럼 놀란 눈을 하고 서 있는 효미를 발견했다. 효미도 나를 알아본 모양이다. 해서는 안될 짓을 하다가 들키는 바람에 놀라 당황한 얼굴이 역력하다. 그렇지만 동시에 저도 아는 사람에게 들킨 것이라 어느 정도는 안심을 하는 것 같단 생각이 든다.
- 뭘 그렇게 놀래요...? 못할 짓 한 것도 아닌데...
- 아, 그게요... 저.
- 괜찮아요. 담배 필 수도 있는 거지... 아... 장초를 버렸네...
- ...
- 못 본 걸로 할 거니까... 걱정말아요... 효미 자매도 강의 지겨웠던 모양이네.
- ... 네...
- 앉아요. 담배 뭐 피나...? 내거 필래요...?
- 아뇨... 전 그냥... 제거...
그냥 자리뜨고 가버릴 줄 알았는데... 효미가 내 옆으로 다가와서는 맞은 쪽 벤치에 앉으면서 들고나온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낸다. 여자들이 좋아한다는 슬림형의 담배곽이 보인다..
- 저... 펴도... 돼죠...?
- 그럼요. 편하게 해요. 어차피 성인인데 뭘...
내가 손으로 괜찮으니 얼마든지 피라는 제스츄어를 보내자, 효미가 쑥스러운 듯... 담배를 한 대 꺼내서 조심스럽게 불을 붙여허 한 모금을 빨고 내어뱉는다...
- 저, 지현이 언니 남편분 되시죠...?
- 아, 예...
- 언니하고 나하고 같이 2부 성가대 서거든요. 말씀 들었었어요.
- 예에... 지현이가 혹시 내 욕을 하진 않구요?
- 천만에요. 그럴리가 있겠어요..?
- 하하. 괜찮아요. 뭐 다른 데에서 남편 욕이라도 하는 재미라도 있어야죠...
- 호홋... 재미있으시다.
- 아, 그런데... 오늘 강의는 왜 이렇게 늘어지고 사람 진을 빼는지...
- 그죠...? 정말... 오 목사님은...
- 어떤 사람이에죠, 지금 저 강사?
- 아... 우리 교회 부목이잖아요. 청년부 담당하구 있구요.
- 아...
- 설교도 설교지만... 사람이 조금 이상한 면도 없지 않구... 좀 재수 없어요.
- 이상한 면...? 무슨...
- 아, 아뇨... 그냥 좀... 확인이 안된 소문이라서... 전하기가 좀...
- 확인 안 된 소문이라... 뭔가 추문 같은 느낌이 드네요... 뭐 말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 아, 아뇨... 추문은... 아니구...
지현이를 안다고 하니, 지현이에게 내 이야기도 조금 들었을 것이고... 다른 것도 아닌 이렇게 교회 프로그램 중에 살짝 빠져 나와서 담배를 물고 있는 사람인 것까지 봤으니... 내게 그렇게 쉽게 뭔가를 이야기해주기는 힘들 것이다. 뭐, 나도 지현이 따라 다니면서 이 교회 사람들의 성향은 대충 파악했기 때문에 그냥 궤념하지 않기로 했다.
- 그게... 오정현 목사가 설교나 그런 것은 잘 못 하는데요...
- ...
- 좀... 간지나는 면이 있잖아요. 그래서 청년부 자매들의 우상이에요.
- 아, 그렇군요.
- 그런데... 그러면 안될 것 같은데... 오정현 목사가 자매들이 오해하게 해요.
- 오해, 무슨 오해요?
- 왜 그런거 있잖아요. 딱 끊고 맺지 않으면서... 이상하게 여지를 주는...
- 아... 뭔 말인지 알겠네요.
- 유부남이기까지 하면서... 그래서 약간 뒷말이 좀 있는 편이에요.
- 네.
- 그런데, 워낙에 교계에서 유명한 목회자 집안의 출신이라서... 그냥 그러려니 하는 거 같아요.
- 아, 그래요...?
- 그냥... 아직 뜬 소문이니까...
- 그래요. 걱정말아요. 뭐 어차피 난 그런데 관심이 없으니.
좀 가소롭다는 생각이 든다. 교회 목사라는 작자가, 자신의 지위와 인기에 관해서 분명하게 행동하지 못하고... 이렇게 어린 친구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이나 떠돌게 만들다니... 역시... 강의가 지겹고 재미없는 이유가 달리 있는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 그런데 어떻게 이번에 선교여행에 가시게 된거에요?
- 아... 나 말이에요?
- 네.
- 뭐... 지현이가 같이 가자고 하도 졸라서...
- 아, 그러시구나...
- 소원 들어주는 셈 치고 나서는 거에요. 그런데 이런 번거로운 걸 이렇게 오래 해야는 줄 알았으면 안했을 거에요.
- 후훗... 알아요. 그냥 대충 하시면 되요. 저처럼...
- 서효미 자매죠...? 아... 나는 이 자매, 형제... 아직도 잘 익지 않아서.
-호홋... 그냥 효미라구 부르세요, 한참 형부 뻘이신데.
- 그건 뭐 나중에 천천히... 그런데 효미 자매는 선교여행은 왜...?
- 재밌잖아요.
- 재미..? 무슨 재미...
- 전 남태평양 쪽은 한 번도 못가봤거든요. 이런 기회 아니면 언제 가겠어요?
- 아...
- 말이 단기선교지, 가는 사람 절반 이상은 나랑 비슷한 생각일걸요, 아마...?
- 하하.
- 어쨌든... 저 담배 피는거 비밀로 해주시는거에요. 우리 아빠 아시면 나 죽어요.
- 뭐 내가 자매 아버지를 어떻게 알아서 이르겠어요. 걱정말아요.
- 고맙습니다.
효미가 담배를 끄더니... 다시 핸드백 안에서 검을 꺼네면서 내게 건넨다...
- 씹으실래요...? 담배 냄새 가시는데 효과 만점인데..
- 아, 난 됐어요...
- 네. 전 그럼 먼저 들어갈께요... 안에서 뵈요...
- 그래요. 들어가요...
* * * * * * * * * *
나는 아예 강의가 완전히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천천히 들어갔다. 강의실 안을 들여다보니... 강의는 진작에 끝난 것 같고, 잠깐 기도회를 가진 다음 늦은 다과를 나누고 있는 것 같다.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지현이가 나를 바라보고는 눈을 흘기더니 자기 있는 쪽으로 오라고 손짓을 한다.
- 어디 갔던거야... 이리 와서 인사드려.
지현이는 오정현 목사와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지현이의 손에 이끌려 오정현 목사와 인사를 나눴다.
- 아, 지현 자매... 아니 이제 집사님이죠. 하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 아... 예. 저도 목사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오늘 강의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 아, 예..? 아하하하하... 감사합니다.
방금 전 효미의 이야기를 들은 다음이라 그런지, 이 목사라는 작자의 표정이며 웃음소리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사회생활이라는게 어디 상대방에 대한 호불호를 대놓고 들어내는 것도 아니고... 나는 그저 웃으면서 이런 대단히 사교적인 상황을 대처한다.
- 이번에 단기선교 가시는 것... 정말 잘하신 결정이십니다.
- 아... 뭐 전 아무것도 모르고요. 집사람이 가자고 해서 그냥 나서보는 것이라...
- 아뇨... 단지 그것뿐만이 아닐 겁니다.
- 예?
- 지현 자매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형제님의 마음을 움직이신 것이지요.
- 아, 예...
- 이번 단기선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형제님께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전.
- 아... 그러시군요...
- 그럼요.
왠지 이런 종류의 대화는 늘 불편하다. 어서 오 목사와의 대화를 끝내고 싶었는데...
- 아... 제 집사람입니다. 이번에 같이 단기선교를 가지요. 여보... 이리 와서 인사드려.
아... 이분이 오정현 목사의 사모였구나...! 이 단기선교 준비 모임에서 여러 번 보기는 했지만 한 번도 인사를 해본 적이 없었던 분인데...
- 안녕하세요..?
- 아, 예... 안녕하세요.
작고 아담한 키의 다소 세련된 외모의 여자가 나에게 반가운 눈웃음을 지으면서 인사를 건넨다. 문득, 왜 이 사람이 하필이면 오정현 목사의 아내란 말인가 싶은 생각이 스쳐지나 간다.
- 지현이 남편 분이신데, 인사가 많이 늦었어요.
- 아, 지현이랑 아시는가 보네요.
- 네. 지현이랑 같은 교회 다녔었어요. 고등학교 때.
- 아... 왜 말 안했어?
내가 지현이에게 물었다.
- 오 목사님 우리 교회 부임하신 지 얼마 안되셨잖아. 말할 기회도 없었구.
지현이 그냥 무심하게 대답한다. 그 사이 오정현 목사는 또 다른 성도들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자리를 뜬다.
- 대학 가고, 그러면서 지현이랑 연락이 끊겼었다가... 이번에 우리 목사님 이 교회로 부임하시면서 다시 만났어요.
- 아 그러시군요.
- 난 도연이가 목회자 가족이 되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었지 뭐야.
- 호홋...
- 이것봐...! 풋... 너 제법 사모님같이 군다...? 호호홋...!
오정현 목사가 자리를 떠나버리는 바람에, 지현이와 나, 그리고 지현이의 옛 친구라는 도연 사모 세 사람이 서 있는 자리가 나로서는 좀 어정쩡한 자리가 되어 버렸다. 어차피 여자 둘이 이야기하도록 내버려둘 밖에 나는 달리 끼어들 이야깃거리도 없다. 옆에 마련된 다과에서 쥬스잔을 하나 들어 마시면서 한 쪽에 와서 서 있는데... 반대쪽에서 젊은 친구들끼리 모여서 깔깔대고 웃는 자리에 효미도 끼여 있는 것이 보인다. 효미가 내 쪽으로 눈이 마주치자, 아주 가볍게 목례 같은 것을 내게 보낸다. 왠지 담배에 관한 신신당부를 한 번 더 부탁하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지현이와 도연 사모 자리에 같이 끼어 있는 것이 불편한 이유가 사실 따로 있다. 내가 이 8주간의 길고 지리한 선교준비 모임에 그나마 빠지지 않고 나올 수 있었던 계기가 다름 아닌 바로 저 여자... 오늘에서야 오정현 목사의 사모이고, 내 아내 지현이의 옛 친구인 것이 드러난 저 전도연이라는 이름의 여자 때문이다.
지현이 때문에 억지로 시작하게 된 단기선교 모임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내 눈에 들어온 사람이 다름 아닌 도연 사모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아내가 있는 남자라고 하더라도 다른 여자에게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첫모임부터 내 눈길을 사로 잡은 것은 도연 사모였다. 왠지 알 수 없는 어떤 특별한 기운이 이 여자에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어떤 여자인가 궁금하긴 했지만, 줄곧 이 기독교 신앙과 교회를 다니는 모든 종교적인 행위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냥 너를 따라 가는 것에 불과하다는 시위를 해왔던 나로서는 지현이에게 갑자기 교회 사람 누군가에게 관심을 보일 수가 없었다. 어찌 생각하면 그것은 내 작은 자존심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눈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현이와의 결혼 생활이 4년이 넘어가면서,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도 약간의 권태감이 들기 시작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지현이를 사랑하고, 지현이와의 결혼생활에 충실하는 것과는 별개로 나는 또 다른 것에 관심을 주게 되었다. 사실 나는 여자에 대체로 무심한 편인데... 이상하게, 이 단기선교 모임에서 보는 저 여자... 도연 사모에게는 묘한 관심이 끌리는 것이 사실이다. 언제나 모임의 가장 앞자리에 앉아서 매우 진지하게 강의를 듣고 때로는 성경의 한귀퉁이에 무엇인가를 메모하는 도연 사모에게서는... 왠지 모를 매력을 느꼈다. 나는 그런 내 마음을 나와 나란히 같이 앉아서 강의를 듣는 지현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다.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에게 단지 눈에 보이는 매력만으로 관심이 가는 것은, 나로서도 대단히 오랜만에 경험하는 묘한 감정이었다. 게다가 내가 이미 유부남이라는 사실도 그런 감정을 조금더 부추킨 것이 아닌가 싶다. 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저 여자도 싱글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런 모든 상황이 나로 하여금 도연 사모에게 더 끌리게 만든게 아닌가 싶다. 아담한 키, 보는 사람에게 안도감을 주는... 선한 눈웃음... 이제 보니 그가 목사의 아내였기 때문에 그런 면이 있었던 것이었나 보다 싶다.
이 교회 사람들은 모임 끝의 마지막 나눔의 시간이 언제나 늘어지는 편이다. 선교 여행을 떠나기 직후 마지막 준비모임이었던 이날... 모임이 끝나고 서로 친교를 나누는데 한 시간이 넘어 걸렸다. 그렇지만, 여전히 겉도는 나로서는 그 한 시간이 대단히 지리했고... 아내와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도연 사모를 멀찌기서 바라보면서 나는 그 지리한 한 시간을 극복했다. 도대체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것일까...? 지현이가 이따금 혼자 있는 내가 신경이 쓰이는지 나를 한 두어 번 쳐다 보는 것 말고는 나는 이 모임에서 그냥 관망하고 서 있는 사람에 불과하다... 다시 담배가 생각나서 나는 아까 그 휴게실로 나선다.
* * * * * * * * * *
- 당신 아직도 많이 불편해...?
- 응? 뭐가...?
- 단기선교 가는 거 말이야.
-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지현이가 나에게 갑자기 이런 말을 한다.
- 아니... 다른 사람들 하고 아직 서먹한 거 같아 보이니까...
- 괜찮아. 알잖아. 원래 내가 사람들하고 쉽게 친해지는 스타일 아닌거.
- ...
- 괜한 소리 하지 말구... 그럼 이제 다들 공항에서 보면 되는건가?
- 아니... 다음 주 예배 시간에 파송받는거 같이 해야잖아.
- 아, 그래..? 하긴 그 다음 화요일이 출발이니까...
- 자기야..!
- 응, 왜...?
- 고마워.
- 뭐가?
- 이렇게 애써주는 거.
- 너 오늘 자꾸 왜 이러냐...?
어차피 내가 좋아서 지현이를 따라다녔고, 지현이와 사귀고 결혼하기 위해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언제나 이 종교나 신앙이라는게 문제가 되는 것은 오직 이 기독교라는 종교 뿐이다. 지현이는 몇 번이고 나의 구애를 내가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들어서 거절했었다. 그렇지만, 나는 지현이를 얻기 위해서 개종을 하고... 이렇게 지현이가 원하는 것들을 모두 군소리 없이 빠짐없이 따라하고 있다. 이제 같이 살을 맞대고 산 지 4년이 넘어서, 지현이도 나의 그런 노력을 모르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노력이 쉽지 않다는 것을 최근에 들어서야... 조금씩 알아 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한 편으로는 나도 이러다보면, 지현이나 처가 사람들처럼 나도 어느 순간에 믿음 좋은 신앙인이 되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 따라하고 있는 것이다.
결혼하고 몇 년이 지났는데도 아이가 생기지 않자, 지현이는 더욱더 신앙생활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 같다. 나로서는 아직 아이에 대한 욕심이 많지 않았는데... 그래도 아이를 만들겠다고 생각을 한 뒤로 몇 번 실패를 하게 되자... 지현이는 초조해하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철야나 새벽기도도 열심히 다니곤 했다. 그렇지만 아이는 여전히 생기지 않았다. 이번에 단기선교를 가는 것은 어찌보면,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다보면... 아이를 선물로 주시겠지 라는 지현이의 순진한 생각때문인 것을 내가 모르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신앙이 좋아지기 보다는, 신앙에 대한 회의와 의심이 더 많이 들었다. 뭔가 어디 하나가 빠져 있는 것 같은 그 무엇을... 어떻게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이런다고 뭐가 나아지는가 싶은 생각만을 늘 확인했던 것 같다. 결국... 나로서는 이 신앙 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나의 신앙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 아내의 절실한 마음에 초를 치지 않기 위해서 따라가는... 그저 내 아내를 위한 행위가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지현이도 나의 그런 노력을 이제는 알기 시작하는 것 같고 말이다. 어쨌거나... 나는 이번 단기선교를 다녀 온 다음... 지현이와 이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에 관해서, 신앙생활와 우리 부부생활에 관해서 조금더 깊은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얻을 것이라는 기대감 외에는 단기선교에 대한 다른 기대감이 없다.
- 아까, 도연이 말이야.
- 응..? 누구...?
- 도연이. 오정현 목사 사모. 내 친구.
- 아...
- 아까 이야기를 하는데, 걔도 나하고 같은 고민이 있더라.
- 어떤 고민...
- 애가 안 생긴데.
- 아...
- 걔도 나랑 비슷하던데... 결혼 생활...?
- 뭐가 비슷하단 말이야?
- 아... 4년 정도 되었다구. 기간이 비슷해.
- 응.
- 그런데 애가 안생긴다구... 그래서 우리 그런 이야기 많이 했어, 아까.
- 응.
- 근데, 잘은 모르겠는데... 걔가 애 안생기는 건... 우리하고 조금 다른 거 같아.
- 어떻게 다르단 말이야...?
- 오정현 목사가...
- 응? 오 목사가 왜...?
- 다른 사람한텐 이야기하지마, 알았지?
- 내가 이야기할 사람이 어디 있어, 이 교회에서.
- 오정현 목사랑 도연이랑 그렇게 금슬이 좋아 보이지 않아.
- 무슨 말이야...
- 도연이랑 오 목사랑 중매로 결혼을 했다는데.
- ....
- 둘 다 목회자 집안이거든...
- 아...
- 근데, 노력해도 애정이 별로 안쌓이는 거 같더라구...
- 그런 이야기도 했던거야, 둘이서.
- 직접 이야기하지 않아두 알 수 있으니까.
- 그래.
- 좀 불쌍하더라, 도연이...
- 그래도 그 사람 모임에서 늘 밝아 보이던데?
- 목사 사모니까. 걘 어려서부터 늘 목회자 사모는 그래야 한다고 배워와서 그래.
- 아, 그래..? 그래도 젊은 사람이 옛 어른들 시키는 대로 하는게 쉬울까..?
- 안 될 것두 없지. 걘 그냥 순진한 애니까.
지현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집으로 향해 가는데...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자유로가 왠지 다른 날보다 휑한 느낌이 든다. 둘이서 도연 사모의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시 말이 끊어졌는데... 시속 90Km 이상으로 달리고 있는 길에서... 늘 빠져나가던 램프가 보이지 않고... 갑자기 길이 완전히 깜깜해지면서... 사방이 완전히 불빛을 잃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어... 이상한데... 왜 화정 쪽으로 나가는 길이 안보이지..?
- ...
- 야, 지현아. 아무래도 차를 세워서 지도라도 꺼내봐야겠어... 이상한데...?
내 말에 지현이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는다. 나는 우리 차 말고는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자유로에서 차 속도를 줄이면서 갓길로 차를 가져갔다. 바깥에서부터 차 안으로 스며들어온 어둠이 헤트라이트가 비춰지는 길 말고는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만든 것 같다. 차를 세운 다음 나는 차 안의 등을 켰고... 옆자리의 지현이를 바라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방금전까지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지현이가... 비행기 사고에서 죽어서 섬의 백사장에 죽어서 누워 있던 지현이의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닌가...!!! 깊은 잠에 빠진 듯이 죽어 있던 지현이의 그 얼굴이... 눈이 감겨져 있는 그대로 운전석인 내 쪽을 향해서... 돌려져 있다. 순간 나는 내가 지금 다시 보고 있던 선교준비 모임의 마지막 날이... 현실이 아닌, 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꿈에 대한 자각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오히려 너무도 생생한 꿈이기에 나는 사지를 움직이지 못하고 꿈에 매여 있는 것 같다. 꿈에서 깨려고 노력하는 그 모든 순간에... 죽은 지현이의 얼굴이 나를 향해 돌려져 있다.
나는 겨우 밸트를 끌르고... 차 문을 열어 차 밖으로 나왔다. 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암흑이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사지를 움직이는 것이 천 근이 넘는 짐을 움직이는 것보다 힘들다... 겨우 차 밖을 나와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하는데... 보조석 쪽의 문이 열리더니 차 안에서 누군가가 나온다. 고함을 지르고 싶다... 그런데 목소리가 완전히 잠겼다...
- 왜 그러세요... 윤 선생님...?
차 안에서 나온 사람은 지현이가 아니라 도연 사모이다.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헤드라이트 불빛이 비치는 차 앞쪽으로 돌아 나에게로 다가온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온화하고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서는 도연 사모의 얼굴이 지현이의 얼굴과 교차가 된다. 나는 더욱 더 심하게.. 몸이 짓눌리는 기운때문에 공포에 빠진다...
* * * * * * * * * *
- 윤 선생님, 윤 선생님...?
누군가 내 몸을 흔들어 깨우는 것을 느꼈을 때... 나는 내가 힘든 꿈을 꿨던 것을 알게 되었다. 너무나 생생한 악몽이었다. 그렇지만, 깨어나 확인하는 이 현실도... 그다지 꿈보다 나을 것이 없는 것 같다. 몸이 흠뻑 젖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내가 생각보다 잠을 오래 잤다는 것을 알았다.
- 정신이 좀 드세요...?
눈을 뜨고 올려다 보니... 도연 사모가 몹시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내려다 보고 있다. 그리고 내 이마에 도연 사모의 손이 놓여 있는 것 같다. 이마에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 내가 어떻게 된거지요...
- 아, 깨어나셨어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묻는 내 얼굴 위에 뭔가 뜨끈한 것이 떨어진다... 나를 내려보던 도연 사모가 얼굴을 돌리면서 내 시야에서 벗어난다... 뭐야... 눈물이 떨어진건가...?
- 으...
- 안돼요! 일어나지 마세요... 아직 누워 계셔야 해요!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몸이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다... 그제서야, 내가 다쳤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야자열매를 따러 숲속에 갔다가... 그만 발을 잘못 딛여서 대단히 높은 야자나무에서 떨어졌었던 것이 기억이 난다... 떨어지면서 옆에 있던 다른 나무에 몸을 몇차례 부딪혔는데... 살이 터지고 피가 났었다. 나를 따라 나섰던 효미가 부축을 해줘서 움막으로 어떻게 돌아오기는 했는데... 그 다음부터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몸에 열이 심하게 나면서... 떨어지면서 나뭇가지에 부딪혀서 찢어진 상처에 균이 옮은 것이란 생각을 했었는데... 그러고는 내가 의식을 잃었던 모양이다...
- 물... 물 좀...
내가 물을 찾자 도연 사모가 내 고개만 겨우 일으켜서 입에 물을 가져다 줬다. 도연 사모의 눈에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이 고여 있었다. 겨우 목을 축이고 나서야... 나는 그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 내가 얼마나 이러고 있었던 거죠...?
- 사흘 이요.
- 아... 오래 누워 있었군요...
- 열이 심하셨어요. 다친 상처도 많이 부었었구요...
- 그랬군요...
- 전... 정말... 윤 선생님 돌아가시는 줄 알았어요...
- 아... 그랬어요...? 그 정도였나요...?
- 네...
도연 사모의 목소리에 울먹임이 젖어 있다. 나도 힘이 들어서 더 말을 이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가만히 누워 있었고... 엉성하게 얽어 만들어 놓은 움막의 천장 위로 하늘이 푸르게 보이는 것을 보면서.. 내가 다시 이 모진 목숨을 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꿈이 현실이고, 이 현실이 꿈이었기를 바랬는데... 나는 다시 이 섬에 갖힌 채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살아남은 안도감보다는 허탈한 마음이 더 컸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 차라리 이대로 일어나지 말았으면... 싶었는데..
- 안돼요. 왜 그런 말씀하시는 거에요?
- ...
- 윤 선생님이 가시면... 전... 저흰 어쩌라구요..!
- 하하...
- 두려웠어요... 그런데... 이렇게 일어나셔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살아남은 것이 더욱 심란하다. 결국... 내가 죽고 사는 것도... 도연 사모에게는... 자신의 생존과 관련이 되는 일이기에 무서운 것이었다는 것이... 내게는 이런 생존이 고통스러운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겨우 의식을 되찾은 내 앞에서... 자신의 두려움을 먼저 말할 수 밖에 없는 이 여자의 마음도 이해가 가기 때문에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다시 힘이 빠진다... 그렇지만... 살아났기에 또 이렇게 살아야 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 아저씨!!!!
효미가 내 움막 안으로 뛰어 들어오면서 나를 부르더니... 누워 있는 나를 안으면서 소리내서 울기 시작한다.
- 아저씨 죽을까봐 얼마나 걱정했는데...!!! 깨어났구나! 깨어났어!!!
- 효미야... 윤 선생님 힘드셔...
도연 사모의 만류도 소용없이 효미가 내 목을 끌어안고 하염없이 운다. 효미의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뜨거운 눈물이 내 목 쪽을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진다. 효미의 몸이 가슴을 눌러서 숨이 막히기는 했지만... 나의 생존을 어떤 이유로라도 이토록 반겨주고 기뻐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고맙다는 생각도 든다... 힘들게 한 손을 들어서... 나를 안고 엉엉 우는 효미의 머리와 등을 다독여주었다...
- 다시는... 아프지마... 아프면 안돼...!
- 그래... 알았다...
겨우 마음을 진정한 효미가 손으로 눈을 닦으면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제서야 나는 내 몸을 조금 추스릴 수가 있었고... 도연 사모는 우리가 주식으로 먹는 고구마를 가지고 어떻게 달여만든 것 같은 단맛이 가득한 죽 같은 것을 내게 먹여주었다. 몸을 일으키고 나서야... 나는 두 여자들 앞에서에 몸이 완전히 벗은 채로 놓여져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나무에서 떨어지면서 살이 찢어진 곳이 왼쪽 허벅지 안쪽으로 해서 사타구니 깊은 쪽이었던 것이다. 그 주위가 나무독으로 심하게 부어올랐었고... 의식을 잃은 동안... 도연 사모와 효미가 번갈아 가면서 끓여서 소독한 물을 소독한 천으로 계속 해서 닦아주었던 것이다... 덕분에 내 아랫도리가 의식을 잃은 기간 동안 두 여자에게 고스란히 다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정신을 차린 다음에야... 나는 두 여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바지를 다시 챙겨 입었다...
그리고 내가 의식을 잃고 나무의 독으로 죽어가는 동안에 도연 사모가 내가 절대로 손대지 못하게 했던 약품이 들어 있는 상자를 손을 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항생제의 1/3을 내가 복용해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바르는 항생제 연고도 하나를 내가 고스란히 다 써버렸던 것이다... 살아남은 것의 댓가로는 너무도 많은 것을 사용해버렸다. 아프지 않는 것이야 말로 다른 생존자들에게 폐가 되지 않는 유일한 길이라고 내가 그렇게 역설을 했었건만... 결국 귀중한 약품을 내가 가장 많이 써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 면목이 없었다. 왜 마음대로 내 허락도 없이 내 약을 써버렸냐고... 윽박지를 수도 없었다.
- 아저씨. 약 발라야 해.
도연 사모가 음식을 준비하러 나간 사이에 효미가 누워 있는 나에게 연고를 가지고 와서 말한다.
- 이제 괜찮아. 부은 것도 다 나았잖아.
- 안돼. 항생제는 쓰다가 말다가 하는게 더 위험한거 몰라? 상식이야!
- 난 되었어. 이제 열도 다 떨어졌고...
- 왜 이렇게 말 안들어...? 아저씨 죽으면... 우리 둘은 아저씨 가져다 묻을 힘도 없단 말이야!
효미가 몸을 일으키려는 나를 두 손으로 밀어 눕히고는... 내 바지를 벗겨서 허벅지 안쪽의 상처에 항생제 연고를 바르기 시작했다. 정신이 없었을 때야 모르겠지만... 멀쩡히 의식이 돌아온 상태에서 다큰 계집애에게 이런 꼴을 보이는게 아니다 싶어서...
-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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