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야설

비밀의 방 - 10부

본문

잠시 후 세면장에서 나온 현우에게는 술 냄새와 함께 아직도 역겨운 피비린내가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알몸으로 나와 후들후들 떨면서 옷을 걸쳐 입은 그가 대뜸 내 앞에 주저앉는다. 그리고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더듬거린다.




“그, 그 놈을 죽였어.”


“뭐라고! 누굴.......?”




그의 말을 듣고 온몸이 오싹하였다. 그러나 설마하고, 믿고 싶지 않았다. 결코 그가 사람을 죽일 성품이 아니라고 알고 있었다. 내 믿음이 깨지지 않기를 바라며 대답이 흘러나올 그의 입술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떨리는 그의 입술이 움직인다.




“은석, 그놈. 은정 오빠.......”


“정말이야? 싸우고 하는 말이지? 내가 희생 됐는데. 무슨 말이야......”


“그, 그놈이 한번만으로 안 된데.......나쁜 놈! 필요할 때마다 만나게 해달라는 거야. 아니면 흔적도 없이 기철이와 나를 죽인데.”


“........!?”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별안간 구역질이 나고 소름이 돋았다. 저주와 분노가 다시 되살아났다. 어쩌면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은 내 자신일지도 모르고, 나의 허기짐을 채워주던 그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자업자득으로 돌리고 싶다.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배구부 동료들이 알고 그놈들 패거리에 도전하기로 했어.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결국은 이 일이 아버지 귀에 들어가면 안 될 것 같고, 동료들도 피해를 입을 것 같았어. 그래서 내가 혼자처리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그놈들과 만나기전에 그 놈을 불러내어 죽여 버렸어.......”


“바보, 미친........”


“동료들을 만나기전이니까, 아무도 내가 죽인 것을 몰라. 다만 누나가 말하기에 달렸어. 내가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고 하면, 아마도 믿을 거야. 경찰에서 찾아오면 집에 있었다고 누나가 말해 줘. 그럴 수 있지? 그럴 거라고 누나를 믿어........사랑해.”


“.........!?”




나는 말을 잃고 앉아 있었다. 현우는 모든 것이 끝났다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불안한 모습이다. 방안을 맴돌며 안절부절못한다. 그가 방구석에 놓인 검은 비닐봉지 앞에 멈추어 섰다. 봉지를 집어 들고 망설인다. 방문을 나서며 혼잣말처럼 읊조린다.




“이걸 없애야 돼........! 없애고 올게.”


“.........!”




그가 방을 나가고 잠시 앉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할지 막막하다. 두렵고 겁에 질린 상태에서 방을 나와 집 모퉁이를 돌아 현관으로 들어왔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외길로 접어든다. 어디까지 가야지만 수습될지도 안개 속으로 향하는 길과 같다.




나에게 치욕을 안겨준 그놈이 죽었다는 소식에는 희열을 느낀다. 하지만 그 것으로 현우가 곁에서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놈이 죽었다는 것이 사실이 아니었으면 한다. 현우와의 인연이 악연으로 끝내고 싶지 않다. 나의 잠재된 본능을 일깨우고 황홀한 희열을 안겨준 그가 필요하다.




남편이 사실을 알면 어찌해야하는지를 모른다. 그때는 이혼을 해줄 것이다. 문득 나는 정말 이혼을 원하는지 의문스럽다. 이혼을 감당할 자신이 있는 것인가. 현우가 정말 남편과 이혼할 정도로 귀중한가를 자문한다. 내 몸속 세포 세포마다 그의 체취로 가득하다. 그에게 안겨 쾌감에 젖어있는 순간만은 남편을 기다리느라 허기졌던 아픔도 잊을 수 있다. 




밖으로 나갔던 현우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와 뒤편으로 돌아간다. 빗방울이 또다시 후드득 떨어진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비바람이 복잡한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혼란스러움이 지워지고 상쾌해지는 이유를 모르겠다. 창문으로 불어 들어온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을 잡아매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인터폰 액정 화면으로 보니 두 사나이가 대문 앞에 서 있었다. 현우의 말을 떠 올리며 긴장이 된다. 우산을 받고 정원을 지나 대문 앞에 섰다. 대문의 쇠창살을 마주하고 두 남자가 서 있다. 앞선 사나이는 점퍼를 뒤편의 체격이 큰 사나이는 티셔츠를 걸쳤다.




“누구세요?”


“시경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잠시 협조하여 주십시오.”




대문을 열고 나선다. 점퍼를 입은 사나이가 신분증을 꺼내 보인다. 그리고 신분증을 확인 할 사이도 없이 집어넣는다. 내가 신분증을 읽는 시간이 늦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점퍼를 걸친 사나이의 성씨가 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 때문이신데요?”


“이집에 장현우라는 분이 살고 있지요?”


“네, 그런데요?”


“장현우씨에 대해 잘 아십니까?”


“잘 모릅니다. 한집에 살아도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니, 잘 볼 수 없어요.”


“지금 집에 있습니까?”


“네, 있는 것 같은데요. 무슨 일이시죠?”


“사건을 수사 중입니다. 만나 볼 수 있을 가요?”




문 형사의 시선이 내 몸을 아래위로 훑어보는 것 같다. 니트웨어를 여며 가슴을 가리면서 두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아무런 감정 표현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마치 세 들어 살고 있는 사람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표정을 한다. 




“그러세요. 들어오세요.”


“감사합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서 정원을 지나 집 뒤로 향한다. 공연히 뒤를 따라오는 형사들의 시선이 엉덩이에 쏠리는 것 같았지만 품위를 잃지 않는 발걸음을 옮긴다. 현우의 현관 앞에 다가서서 문을 톡톡 두들겼다.




“학생! 안에 있어?”


“........”


“학생, 손님이 찾아 왔어.”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분명히 피 묻은 옷이 단긴 봉투를 없애고 온다면서 나갔던 현우가 뛰어 들어오는 것을 보았는데 대답이 없다. 뒤로 돌아보니 형사들은 다시 시도 해보라는 눈치다. 문을 다시 두드리려는데, 현관문이 스르르 열리고 그의 모습이 들어난다. 연극배우처럼 그도 나처럼 연기를 하고 있었다. 자고 일어난 것처럼 게슴츠레한 표정으로 묻는다.




“네, 아주머니! 무슨 일이시죠?”


“손님이 오셔서.......”




태연한 표정을 짓지만 현우의 얼굴에 두려움이 스친다. 그가 나의 뒤편에 선 형사들을 의아스런 눈빛으로 바라본다. 형사가 내 앞으로 나서는 것을 보고 나는 슬그머니 뒷걸음해서 선다. 그가 무슨 말인가 하려고 하기 전에 형사가 신분증을 꺼내 보인다.




“시경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장현우씨 맞으시죠?”


“네, 그렇습니다만.......”


“사건을 수사 중인데 협조하여 주십시오, J대학교 학생이시죠?”


“네.”


“같은 대학을 나온 역도선수 출신 박은석을 아시죠?”


“네, 그런데요?”




그들의 말을 듣는 나는 다리가 후들거리고 떨렸다. 지금까지도 현우의 말이 조금은 믿어지지 않았었다. 아니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현우는 냉정함을 잃지 않는 모습이다. 문형사가 수첩 하나를 꺼내 살피면서 현우를 예리하게 바라본다.




“오늘 새벽에 박은석씨가 자신의 집 앞에서 피사체로 발견 되었습니다.”


“네.......! 왜요?”




현우는 몹시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현우의 냉정함은 연극배우의 연기를 떠나 간사하게도 보였다. 어쩌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할 수 있는지 그를 다시 쳐다보게 된다. 두 형사의 시선도 그의 표정과 태도를 놓치지 않으려고 날카로워진다.




“박은석씨의 사망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수사 중인데, 박은석씨와 후배들 간에 문제가 있었던 정보를 확인했습니다. 오늘 배구선수 동료들이 박은석씨와 만나기로 약속한 것은 알고 있지요?”




“네, 오늘 점심시간에요.”


“장현우씨도 약속장소에 갔습니까?”


“아뇨! 저는 몸이 안 좋아 집에 있었습니다.”




대답을 하는 현우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힐끔 나를 바라보는 현우의 표정은 자신감에 차있어 보인다. 이미 나에게 언질을 하였고 자신의 대답을 증명해 줄 것이라는 확신이다. 그러나 문형사의 표정은 그의 말을 믿으려하지 않는 것 같다. 두 형사의 태도가 그를 제압하려는 것처럼 한걸음 다가선다.




“그런 게 아니고 이미 박은석이 약속장소에 나올 수 없는 것을 알고 있던 것 아닙니까?”


“무슨 말 입니까?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약속장소에 나왔던 동료들은 지금 경찰서에서 수사를 받고 있습니다. 사건 발생시간인 오늘 새벽 다섯 시경에 어디 있었습니까?”


“집에 있었다니까요.”




현우가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마치 몸이 아픈데 와서 귀잖게 한다는 표정이다. 그러나 형사들은 여전히 그의 말을 신임하지 않는 표정이다. 마치 현우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막아서는 것처럼 형사들이 현관 문 앞을 막고 다가섰다.




“집에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 하지?”


“집 주인 아주머니도 알고 있어요.”




형사들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그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송곳처럼 파고든다. 내 가슴의 심장박동 소리가 우산위에 떨어지는 소리보다 크게 들리는 것 같다. 나를 바라보는 현우의 입가에는 득의의 미소가 흘렀다. 그러나 나는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그때서야 나는 나의 대답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의식한다. 미간을 찡그린 문 형사의 얼굴에 곤혹스런 표정이 흐른다. 




“주인아주머니는 장현우씨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하셨는데, 오늘 새벽에 장현우씨가 집에 있었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까?”


“........!?”




나는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형사들은 아마도 내가 기억을 떠올리려고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사실 그 순간 나는 갈등을 느끼고 있어 판단할 시간을 벌고 있었다. 사건의 심각성을 고려해서인지 문 형사가 재차 나에게 물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불행하게 사망한 한사람의 사인을 밝히는 일입니다. 그만큼 주인아주머니의 말이 사건을 밝히는 단서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어제 저녁부터 지금까지 장현우씨가 집에만 있었습니까?”


“아뇨!”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간단한 내 대답에 형사들도 현우도 몹시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만만하게 집에 있었던 것을 내가 알고 있다는 말투를 던진 현우의 눈동자가 일그러졌다. 실망스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현우가 나를 향해 고개를 가로저어 보인다. 그들의 순간적으로 변화하는 시선에도 나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냉정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문 형사가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내 대답을 확인한다.




“그렇다면......?”


“저 학생은 어제 저녁에 나가서 들어오지 않았고, 오늘 저녁 무렵에 들어 왔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절망적인 표정을 지은 현우가 원망스럽게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부정하는 대답을 하는 나를 믿지 못하겠다는 표현으로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현우와 나를 번갈아 보던 형사들이 재빨리 현우의 양팔을 붙잡는다.




“사건현장에서 장현우씨 소지품으로 보이는 손목시계가 발견 되었습니다. 당신을 사건용의자로 체포합니다. 변호사를 선임할 권한이 있고 묵비권을 행사할 권한이.........”




순식간에 현우가 범죄 용의자로 체포되어야 하는 사유를 문 형사가 말한다. 어느 사이에 현우의 손목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다. 절망과 원망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현우는 순순히 형사의 체포에 응한다. 나는 망부석처럼 서서 그들을 바라보며 열정적이던 내 몸이 차갑게 식어가는 느낌에 젖어든다.




오랫동안 내린 비로 질척거리는 땅위에 다시 굵어진 빗방울이 떨어진다. 빗방울 속으로 수갑이 채워진 현우와 형사들이 사라진다. 대문을 닫고 돌아서는 나는 한없는 고독과 번민 속에 잠긴다. 한편으로는 현우가 수사를 받는 동안 그놈과 같이 나를 유린한 사실을 말하려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나는 품위가 있는 가정주부일 뿐이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해도 나는 모른다고 할 것이다. 사건의 중심에는 은정이 있을 뿐이기에 사건과 무관한 나에 대한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사관들은 없다. 만약 현우가 나에게 앙심을 품는다면 그를 영원히 저주하고, 강간을 자행한 파렴치범으로 몰아세울지도 모른다.




다음날 형사들이 와서 현우의 방을 수색하였다. 그리고 그가 피를 닦아내었던 세면장에서 혈흔을 채취해 갔다. 그리고 이틀 후 텔레비전 사건사고를 알리는 뉴스에 그의 모습이 비추었다. 애인의 오빠인 박은석을 살해한 대학 후배를 검인으로 체포하여 자백을 받아 검찰로 넘겼다는 짤막한 소식이었다.




사건이 정리되어 안심을 하기보다는 내 가슴은 허전하였다. 모든 것이 떠나버린 공허감을 느끼며 마치 동굴 속을 헤매는 심정이다. 남편을 기다리는 허기짐은 다시 되살아나고, 남자의 손길에 길들여지던 육체는 끝없는 방황을 한다. 더욱이나 밤이면 처절한 고독과 본능의 불길 속에 몸부림친다.




십여 일이 지나 현우의 어머니와 남동생이 찾아왔다. 미안하다고 하면서 그의 물건들을 정리해 가지고 갔다. 서글퍼지려는 감정을 삼키며 전세보증금을 돌려주었다. 그가 쓰던 침대를 처분해 달라면서 내놓기에 되돌려 주었다. 그의 가족들이 사라지고 썰렁하게 빈 방 한가운데 놓인 침대위에 웅크리고 앉았다.




길지 않은 시간동안 본능의 회오리 속에 묻혔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현우의 체취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다. 욕정을 견디지 못해 흘리던 그와 나의 숨소리가 환청으로 들린다. 한편으로는 치욕덕인 순간들이기에 분노를 느낀다. 여자의 자존심과 존엄성을 짓밟고 내 몸 속에 욕정의 분비물을 쏟아낸 그들과 모든 남자들을 원망한다.




그러나 정신은 남자들을 저주하지만, 남자들의 손길에 예민해진 육체는 감각의 늪에 빠져 허덕인다. 남편을 무의미하게 기다리는 시간들은 나의 정신마저 피폐하게 만든다. 기다려야하는 이유도 잊혀져가고 스스로를 가두는 자폐증 환자처럼 현실감각도 잊어버린다. 때로는 기억상실을 회복한 사람처럼 집안에만 맴도는 자신을 발견하고, 밖으로 튀어나간다.




유일하게 내 곁을 지키는 민호를 데리고 집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난다.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것을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고 민호였다. 그렇기에 주로 가는 곳은 어린이 놀이터나 공원, 쇼핑을 할 수 있는 백화점등이다. 하지만 너무 외롭고 초라해 보이는 내 자신을 되돌아보며 숨어들듯이 집으로 되돌아온다.




기승을 부리던 무더위가 한 풀 꺾이고 아침저녁 나절에 부는 바람이 서늘하게 느낀다. 이따금 하숙생처럼 들어왔다가 나가는 남편은 점점 생기가 돌고, 나는 바람도 없는 들판의 허수아비처럼 빈 껍질로 변해간다. 나 혼자만의 동굴 속에서 오직 꿈틀거리는 본능의 불씨를 살려 어둠을 밝히려 한다.




낙엽이 한잎 두잎 떨어지기 시작하기 계절에 남편이 태어난 생일이 찾아온다. 남편의 생일 때마다 시댁식구들이 방문을 했었다. 그러나 남편의 생일이라는 것도 잊고 있었다. 사실은 안다고 해도 남편을 축하해 주고 싶은 마음도 생일을 준비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남편의 생일 전날 시어머니와 시동생 태호, 그리고 결혼해서 서울에 올라와 살고 있는 사촌 여동생유나가 찾아왔다. 예기치 않은 그들의 방문에 어리둥절하였다.




“웬일이세요........?”


“.........웬일이냐고?”




시어머니는 남편의 생일도 모르고 있었다는 나의 표정에 어처구니가 없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자신의 아들이 가정에 충실치 못한 죄책감 때문인지, 이내 정색을 하며 밝은 표정을 지으며 내 손을 덥석 잡는다.




“그래 얼마나 고생스럽니? 민호 애비 생일도 됐고, 네가 걱정 되어서 왔단다.”


“........!?”




그때서야 나는 남편의 생일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달력을 쳐다본다. 하지만 나는 즐겁지도 않을뿐더러 모르고 있었다는 미안함을 표시하고 싶지 않는다. 그들에게 며느리이거나 여자로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침묵하는 나의 탓인지 분위기가 서먹서먹하였다.




시어머니와 사촌동생 유나는 내 눈치를 살피며 남편의 생일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시어머니와 유나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가서 음식장만을 한다.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 같이 일에만 집중한다. 단지 거실을 지날 때, 민호를 데리고 놀기 시작한 시동생 태호가 넌지시 말한다.




“형수님 몸매는 아직도 처녀 같아요.” 


“.......!”




나는 말없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 몸을 훑고 지나는 태호의 눈길을 의식하며 새삼스럽게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날이 어두워지고 모습을 보기 힘든 남편이 집으로 들어왔다. 시댁식구들이 남편에게 연락을 한 모양이다. 오래간만에 집으로 들어온 남편은 나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남편이 들어오고 나서야 시댁식구들의 분위기가 밝아진다. 그들끼리 주고받는 대화를 들으며 나는 식물인간처럼 움직인다.




사전에 준비를 하지 않고 있었기에 음식 만드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밤이 늦어서야 케이크와 장만한 음식들을 식탁위에 올려놓았다. 식탁을 주변으로 식구들이 모여 앉았다. 나는 남편과 시선을 마주치기도 싫었다. 남편 옆으로 가서 앉으라는 시어머니의 말을 들은 척도 안하고 멀리 떨어진 시동생 태호 옆에 앉았다.




생일 케이크의 촛불을 같이 끄라는 시어머니의 말도 나는 무시해버린다. 시댁식구들이 술잔을 서로 권하면서 식사를 해도 나는 타인이 되어 앉아있었다. 곁에 앉았던 시동생 태호가 나에게 술잔을 권하고 술을 따라준다.




“형수님! 한잔 하시고 기분 푸세요.”


“.........!”




누구도 나를 진심으로 대하지 않는데, 시동생 태호의 말에 친근감을 느낀다. 말없이 잔을 받아 들고 단 숨에 들이킨다. 나를 바라보던 식구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본다. 식구들이 마시고 있는 술은 양주였다. 나는 별로 술을 즐기지 않는다. 그러나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들이킨 독한 양주가 목구멍으로 삼켰다. 숨을 멈추고 목줄을 타고 내려가는 짜르르한 느낌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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