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al! - 13부
본문
13부. 너에게 간다.
잠옷차림의 남희는 침대에 모로 누운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릴 적부터 그 남자와 함께 해 왔던 당당하면서도 똑 부러지는 하연과,
하연과는 정반대이면서 역시나 그 남자를 그대로 녹여버릴 듯한 애교 넘치는 수림에 비해,
남희 자신은 이렇다 할 장점이 없다는 사실이 긴긴 밤 동안을 뜬눈으로 지새우게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참여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복잡한 수식처럼 보이는 영후와 주변 여자들의 ‘관계도’ 덕분에,
문제를 풀기 위한 도전 조차 해보지 못하는 자신의 상황에 한숨밖에 내 쉴 수가 없었다.
‘머리 아파…’
마치 ‘리만 가설’ (1859년 독일 수학자 ‘리만’에 의해서 처음 제기된 미해결 수학 문제 : 작가 주) 을
처음 맞닥뜨렸을 때와 동일한 수준의 혼란스러움이 온몸으로 퍼지는 듯한 느낌에,
남희는 침대의 이쪽 저쪽으로 뒹굴 거리기만 하고 있었다.
-
윤지의 컴퓨터를 이용해 메일을 확인한 혜미는 윈도우를 종료하려다,
문득 윤지에게서 받은 ‘아이팟’ 속의 동영상이 생각났다.
하지만, 아이팟에 들어있는 것은 아쉽게도 연습경기의 후반전밖에 없었기에,
아마 전반전도 윤지의 컴퓨터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어디쯤에 있을까나.’
혹시나 컴퓨터가 잘못되지나 않을까 조심조심 하면서,
혜미는 탐색기를 열어 디렉토리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얼마나 찾아 다녔을까, 이내 년도와 월, 날짜 별로 구분되어 있는 디렉토리가 보였고,
대충 날짜를 가늠해본 혜미는 한 폴더 안의 동영상 파일을 선택하곤 재생시키기 시작했다.
“자, 나와라 얼른…”
손바닥을 비벼가며 잔뜩 기대하고 있던 혜미는 그러나 이내 실망하기 시작했다.
모니터에 보여지는 화면엔 초록색의 운동장이 아닌, 붉고 어두 침침한 조명만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캠코더가 계속 움직이고 있는 듯, 멀미가 날 듯 한 기분에 혜미는 창을 닫으려 했지만
이내, 캠코더가 한 곳에 자리를 잡은 듯, 화면이 고정되었고 혜미 또한 잠시 그대로 고정되어 버렸다.
그렇게 고정된 화면엔 하반신에만 수건을 걸친 채 침대에 엎드려 있는 늙은 남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남자에게서 수건을 걷어내는 낯익은 여자의 나신 또한 카메라에 잡히기 시작했다.
“어…?”
아는 여자였다. 분명, 혜미도 알고 있는 여자였다. 그것도 그냥 아는 여자가 아닌,
너무나도 잘 아는, 그래서 더욱 충격적일 수 밖에 없는.
“뭐가 그렇게 오래 걸리고 그러니?”
갑작스레 등뒤로 들리는 윤지의 목소리에, 놀란 혜미는
동영상이 재생되고 있는 창을 닫아보려 했지만 닫히기는커녕, 음성만이 증폭되었고,
들고 있던 맥주 캔을 떨어뜨린 채 원망스런 얼굴로 바라보는 윤지와
그런 윤지를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던 혜미 사이로
동영상 속의 남녀가 맞부딪히는 살들의 질퍽한 소리만이,
바닥에 떨어진 캔에서 흘러나오는 맥주처럼, 쉬지 않고 흘러 나오고 있었다.
-
이른 아침.
나란히 운동장 한 켠에 마련해 놓은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분명 같은 공간에 있긴 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만 같았다.
그 중 가장 먼 곳에 가있는 듯한 표정의 영후가 아침 잠에서 깨어났었을 땐,
수림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기에, 영후는 마음이 아플 수 밖에 없었다.
이윽고, 영후는 천천히 문을 열고 나갔었고, 계단을 하나 하나 올라 그녀의 집 앞에 다다랐었지만,
차마 문을 두드리지도, 벨을 눌러보지도 못했었다.
그저, 영후는 문에 등을 기댄 채, 천천히 무너지듯 앉아 수림의 이름을 불러 보았었다.
“수림씨…”
나직이 한숨을 내쉬는 영후 옆으로 혜미 또한 간밤의 윤지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메일만 본다더니…다른 것도 봐 버렸구나…”
혜미로서는 그야말로 처음 보는 윤지의 표정이었다.
그것은 마치, 얼음 송곳으로 가슴을 찔린 직후의 고통과 차가움을 동시에 내보이는 듯한 복잡한 얼굴이었다.
“윤지야, 나는…”
“괜찮아. 혜미 네가 본 건 사실일 뿐이고, 난 그런 아이일 뿐이니까.”
심각한 두 사람의 대화와는 반대로, 모니터 속의 남녀는 점점 높은 소리를 질러대며,
살끼리 맞부딪히는 소리를 저만치 뒤로 밀어내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살기 위해서였었어.”
윤지의 고백은 진정 사실이었다.
그녀의 부모들이 사업에 실패한 채 사채업자들에게 쫓기며 어디론가 사라졌을 무렵,
윤지는 부모들 대신 하루가 멀다 하고, 고등학교로 찾아오는 사채업자들에게 시달리다 결국
그나마 착한(?) 사채업자에게 소개받은 업소에서 일을 하면서 그 많은 빚을 청산 할 수 있었다.
물론, 처음엔 빚만 갚고 나면 절대로 이런 ‘개 같은’ 생활을 계속 해 나갈 마음은 정말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너무나 쉽게 돈 맛을 알아버린 윤지는 너무나 사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은 나이였기에, ‘이번만, 단 한 번만…’ 하며 차일피일 미뤄왔던 일이
어느덧 하루 일과가 되었고, 윤지의 생계수단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한편 혜미는 지금 자신이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하는 건지, 결정짓지 못하고 있었다.
여지껏 윤지에게 받은 선물들을, 윤지에게 돌려주며, ‘더러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라고 말하며
대뜸 먼저 화를 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저 친구의 일기장 정도를 몰래 훔쳐 본 직후처럼, 헤헤 웃으며
‘미안하다"고, "그러니 어서 나가서 마시던 술을 마저 먹자’고 해야 하는 건지
쉽사리 마음 속으로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 했다.
“그래도 우린… 친구 맞지?”
눈물이 고여있는 눈으로 애써 웃어 보이며, 혜미는 윤지에게 물었었지만,
무표정한 윤지는 혜미의 물음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모니터 속의 남자 위에서
가식적인 교성을 내 지르고 있는 낯설어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윤지의 비밀을 본의 아니게 알아버린 후, 혜미는
또 보자는 말도 해보지 못한 채, 멍한 얼굴로 윤지의 집을 나설 수 밖에 없었기에
바보 같았던 그때의 자신을 돌아보며 한숨 지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운동장에 놓인 의자 맨 끝에 앉아있던 남희 또한, 하연 한 명으로도 족했거늘,
영후의 옆에서 떨어질 줄 모르던 수림의 모습을 목격한 어제 밤 내내 잠을 이루지 못했었기에,
아직까지도 그 여파가 가시지 않은 듯 연신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에휴…”
약속이나 한 듯, 셋이 동시에 한숨을 내 쉬게 되자
그 모양이 웃겨 세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릴 수 밖에 없었다.
순간, 그런 세사람들을 질투하듯,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침부터 뭔 한숨들을 그렇게 쉬는 거에요? 예?”
아침햇살보다도 훨씬 밝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한 혜미는
놀란 얼굴로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유…윤지야…”
그런 혜미의 표정에 개의치 않으며 심드렁하게 의자에 앉고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스포츠 신문을 책상에 툭 내려놓으며 윤지의 입이 열렸다.
“왜 그렇게 놀라? 하근명 스캔들 기사보다 더 놀랄 일이라도 있는 거야?”
“뭐?”
윤지의 말에 놀라, 신문을 집어 든 영후는 순간, 얼굴이 굳어질 수 밖에 없었다.
기사의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신문에 실린 사진만으로도 영후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저 업혀있는 뒷모습 일 뿐 이었음에도, 영후는 근명의 등에 업혀 있는,
한 여자가 누구인지는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하연아…’
영후의 가슴은 저릿해지기 시작했다.
이 저릿한 느낌은, 마치 누군가 영후의 심장을 꼭 잡은 채 천천히 움켜쥐는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영후의 뜨거운 심장을 잡고 있는 그 손은 절대 이 고통을 쉽게 잊게 하지 않겠다는 듯,
점점 손에 힘을 주고 있었고, 절대 영후는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만,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들, 영후는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만일 이것이 감내해야만 할 고통이라면, 그렇다면 어떻게든 참아내겠다고,
하연을 내버려둔 죄로 평생 이렇게 아파야 한다면 그렇게 하겠다며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삼키며 영후는 다짐하고 있었다.
순간, 영후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려대기 시작했지만,
영후는 신문을 꼭 쥔 채로 그 어떤 다른 것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충격을 받은 듯한 그의 모습에 남희는 영후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흔들어 보았다.
“감독님, 전화가…”
남희의 말 덕분에 겨우 꿈에서 깨어난 듯한 영후는, 그래도 여전히 멍한 얼굴로 전화를 꺼내 받았다.
“여보세요…”
‘흑흑, 영후야!’
또, 울고 있는 하연이 있었다. 언제나 영후로 하여금 눈물짓게 만들었던 아이…
언제나 다시는 울게 만들지 않겠다고 했었는데…언제나…
“하연아! 너…”
‘흑…나 좀… 데리러 와주라…응? 흑흑…’
흐느끼듯 말하고 있는 하연 덕분에 영후는 아직,
여전히 자신이 하연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것에 감사하며 생각할 것도 없이 빠르게 대답했다.
“기다려! 지금 바로 간다!”
전화를 끊음과 동시에 그야말로 벼락처럼 달려 나가는 영후를,
남은 세 사람은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잠에서 깨어난 하연은 그야말로 패닉 상태였다.
속옷만을 입고 잠들어있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도 그랬지만,
겨우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방을 나서려는 순간, 문이 열리는 틈을 놓치지 않고,
하연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소음과 플래시 불빛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에게 인터뷰의 대상이 되는 상황은 전혀 익숙하지 않았음은 당연지사였다.
“하근명 선수와는 어떤 사이 입니까?”, “문 좀 잠깐 열어주세요!” ,
“오늘 있을 A매치에서 하근명 선수가 제외된 것과 관계가 있는 건가요?”,
“하선수의 전 여자친구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겨우 1센티미터 정도의 문틈 사이로, 엄청난 질문들이 쏟아져 들어왔었고,
결국 힘겹게 문을 걸어 잠근 하연은 그야말로 호텔방에 감금되고 말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져 버린 하연에게는 오직 한 사람의 이름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도와줘, 영후야…’
-
아침부터 스포츠와 연예기자들에게 시달리다 들어온 노감독은 그야말로
노기가 뻗친 얼굴 그대로 근명의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이 놈! 고작 이러라고 외출 허가를 해 준 줄 아느냐!”
잠에 취한 근명이 침대에서 엎드린 채 꿈쩍도 안 하자,
노감독은 근명이 덮고 있던 이불을 단번에 걷어내 버렸다.
“아이 또 왜 그래요…잠도 못 자게…”
상황 파악이 안된 근명은 노감독 앞에서 여전히 응석을 부리고 있었다.
짝!
불이 날 정도로 근명의 등 짝을 후려치는 노감독 덕분에 그제야 근명의 잠은 훌쩍 달아나 버렸다.
“앗 따거! 아 진짜 왜 그러는데요!”
머리에 까치집을 지은 채로 일어나 앉아 근명이 툴툴댔다.
그런 근명의 얼굴에 노감독은 손에 들고 있던 스포츠신문을 던져주었다.
근명은 자신의 얼굴에 부딪히고 바닥에 떨어진 신문을 느릿느릿 집어 들었다.
“졸려 죽겠는데, 뭐요…제 기사라도 났어요? 선발에서 제외돼서 불쌍하다고?”
“그래 났다. 그것도 아주 대단하게!”
비단 농으로 하는 얘기가 아니라는 게 느껴져 그제야, 근명은 신문을 펴 보았다.
‘하근명, 선발제외 반발? 묘령의 여인과 심야 호텔 데이트!’
근명이 바라본 신문의 지면엔, 엄청난 크기의 제목과 함께,
어젯밤의 근명과 근명이 업어준 하연의 모습이 흐릿한 화질로 실려있었다.
다행이 하연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쉽게 알아볼 수 없었지만,
투덜대는 듯한 표정의 근명은 너무나 확연하게 드러나 있었다.
“어? 아잇! 이게 뭐야…!”
제자의 놀라는 표정에, 노감독은 더 황당하다는 듯 호통을 쳐댔다.
“그게 뭔지는, 네놈이 더 잘 알 것 아니냐!!”
“아이씨! 아무 일도 없었다구요! 이건 그냥, 그냥 취해있길래 업어다가 준 거라구요!
술 한잔 얻어 먹을라다가 옴팡 뒤집어 쓴 게 누군데…”
답답하다는 듯 근명은 변명을 늘어놓아보았지만, 노감독에겐 별 소용없었다.
“어쨌든, 경기 앞두고 좋은 선물 해줘서 고맙구나. 쯧!”
‘쾅!’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고 노감독이 사라지도록, 근명은 억울해하기만 했다.
“아 젠장, 어차피 이럴 거면 뭐라도 해볼걸, 썅!”
노감독이 닫고 나간 문을 향해 신문을 집어 던지며, 이른 아침부터 욕을 해보았지만
이내 근명은 어제밤을 떠올리며 그래도 잘한 거라며 스스로를 다독거리고 있었다.
-
어느덧 브래지어와 팬티만 남은 것도 모른 채 침대에 누워있는 하연의 모습은
더 이상 근명을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여태껏 호텔에서 벗겨봤던 그 어떤 여자들 것 보다
전혀 야하지 않은 그저 순백색의 속옷들을 입고 있음에도, 너무나 야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그저 브래지어를 튕겨내 버릴듯한 가슴의 크기 때문도 아니었고,
팬티 위로 비치는 검은 수풀들의 풍성함 때문도 아니었다.
어쩌면, 근명의 것이 아님에도 취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넘쳐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맛있게 먹겠습니다아~”
어디를 먼저 만져봐야 할지 갈피를 못 잡으면서 침대로 올라간 근명은,
우선은 가슴부터 만져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손을 가져가고 있었다.
순간, 하연이 몸을 돌리며 잠꼬대하듯 도톰한 입술을 움직거리며 중얼거렸다.
“으응…영후야…”
근명으로선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이름을,
그녀는 하필 지금 힘겹게 내뱉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름만으로도 근명의 몸은 순간 싸늘하게 식어버렸고, 이내 ‘훗’하고 웃어버려야만 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하연이 누워있는 침대에서 물러나 근명은 이내 냉장고 문을 열고
생수 하나를 꺼내 마개를 열고는 바닥이 보일 때까지 쉼 없이 물을 들이켰다.
이내 더 이상 자신의 입으로 물이 흘러 들어오지 않자,
근명은 페트병을 바닥에 힘껏 던져버리곤 의자에 털썩 앉더니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 날’ 이후…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이영후에게 패배감을 갖게 되었던 것도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그 남자를 이겨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지금의 상태로는 절대로.
하지만, 적어도 이 여자를 갖게 되면, 그렇게 되고 나면,
그래도 어느 한 부분은 그 남자에게 이겨볼 수 있는 부분이 될 것만 같았었나 보다.
그러나 의식을 잃고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저 여자는 여전히 그 남자를 찾고 있었기에,
지금 이 순간 또한 완벽한 근명의 패배나 다름없었다.
“하여간 오늘 완전 병신 짓만 하는 구나.”
이내 볼일은 다 끝났다는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렇게나 바닥에 널려있는
자신의 옷들을 천천히 입고 나서, 근명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하연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저녁때 영후와의 전화 통화내용이 생각나는 근명이었다.
“쳇! 어차피 말해줘도 모를텐데…”
하지만 자신의 말과는 달리 근명은 마지막으로 하연의 얼굴 가까이로 다가가
귓속말로 무언가를 조용히 말을 해 주고는 출입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문을 열려다가, 하연에게 한마디를 더 말해주었다.
“알고나 있으라고요.”
이내 문을 열고 나가버린 근명이 해준 귓속말 때문이었을까,
하연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기분 좋은 꿈을 꾸듯 웃으며 더욱 깊이 잠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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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더 빨리 갈 수 없을까요?”
택시에 몸을 실은 채로 기사를 재촉하고 있던 영후는 답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하연이 부르고 있었다. 그럴 땐 어떻게 해서라도 가장 빨리 그 아이에게 달려가야만 했다.
하지만 교통상황은 이 남자의 마음은 애써 모른 척 하듯, 너무나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래도 어느덧 저 멀리에 하연이 갇혀 있을 요새 같은 모습의 호텔이 어슴푸레 보이기 시작했고,
그에 더이상 참을 수 없었던 영후는 기사에게 던지듯 돈을 지불하고는 다짜고짜 문을 열고
차들이 서있는 도로 사이로, 차들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달려나갔다.
“하 고놈 참, 더럽게 바쁜가보네…”
그래도 돈을 집어 들어 계산해보더니 나름 희희낙락 거리던 기사는
또다시 손님을 태우러, 움직이지도 않는 차들을 비집고 인도 가까이로 이동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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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로비로 거친 숨을 몰아 쉬며 들어서던 영후는 순간 멈칫할 수 밖에 없었다.
이미 로비에는 냄새를 맡고 모여든 취재진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각자 좋은 자리를 선점하는 작업은 이미 끝났는지, 옹기종기 모여
열심히 수다들을 떨고 있는 기자들을 모른 척 하며, 영후는 귀를 쫑긋 세운 채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몇 층이래?”
“17층. 12호라는데, 문도 안 열고 꼼짝 않고 있나 봐.”
“하근명은, 같이 있나?”
“뭘, 아까 확인해보니까 새벽에 숙소로 돌아와 있었다던데.”
“그 새끼, 또 지만 쏙 빠져 나갔구만? 재미 볼 거 다 봤다 이건가?”
기자들의 수다를 들으며, 영후는 입술을 꾹 깨물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어떤 것’을 우연히 바라보고는 잠시 환한 표정이 되었지만, 여전히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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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림은 마치 움직이지 않는 석고상처럼 문의 안쪽에 기댄 채, 영원히 앉아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이른 아침에,
영후가 그녀의 대문 앞까지 왔었을 때, 어쩌면 수림은 그가 문을 열고 들어와주길 바랬었는지도 몰랐다.
그랬기 때문에 잠기지도 않은 그녀의 대문에 그저 등을 기댄 채 영후가 앉아 버렸을 땐,
수림은 자칫 스스로 문을 열고 뛰어나가 그의 품에 안길 뻔도 했다.
하지만 나직하게 영후의 입이 열리기 시작했을 무렵, 수림은 행여,
울음이 터질까 자신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영후의 등에 자신의 등을 맞대고 앉듯,
문을 사이로 그렇게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화 많이 났죠? 나 때문에…”
수림은 여전히 착한 그의 독백에 숨죽인 채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왜 화가 나겠는가…왜 그의 탓이란 말인가…
그저 자신이 영후의 여자가 될 수 없음을 이제야 알아버렸을 뿐이었는데…
“저는 지금도…아무것도 모르겠네요…”
수림은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 버린 어떤 바보 같은 ‘여자’ 때문에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어차피 모든 것은 수림으로부터 시작되었을 뿐이었기에,
어쩌면 그가 알 수 있는 것은 애초에 하나도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그래도 그거 하나는 알 거 같아요.”
다행이었다. 정말…정말 다행이었다.
그가, 수림에 대해 하나라도 알게 되었다면, 그래서 이 남자가 자그마한 것 하나라도 추억해주며
자신에 대해서 기억해 준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수림에게는 너무나 가슴 아픈 거짓의 형상이었다.
“수림씬… 참 좋은 여자에요.”
그 말을 끝으로 이내 영후는 천천히 일어서서 뚜벅뚜벅 걸어가버렸지만,
그래서 멀어지는 그 남자를 어떻게든 문을 열고 뛰어가 잡아보고도 싶었지만,
그럼에도 수림은 문 너머로 전해지는 그 남자의 등의 체온이 점점 식어버리는 게 두려워,
조금도 움직일 생각은 해보지도 못한 채 여전히 그렇게 문에 등을 기댄 채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
“잠시만요, 잠시만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별 소득 없이 호텔 룸의 복도에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 사이로,
커다란 세탁바구니가 담긴 카트를 밀며, 청소부가 등장하자
기자들은 혹여 비싼 카메라 장비들이 부딪힐까, 주섬주섬 짐을 챙기느라 갑자기 분주해 졌다.
하지만 그런 기자들을 뒤로 하며, 청소부는 주머니에서 카드키를 꺼내
룸의 방문을 열며 카트와 함께 너무나 자연스럽게 들어갔다.
“실례합니다.”
순간, 기자들은 서로의 얼굴들을 바라보며 벙 찐 표정이었다.
“쟤는 저렇게 막 들어가도 되는 거야?”, “그럼 우리는?”, “문 다시 열어 보라구.”
그제야 몇몇 기자들이 문을 열어보려 했지만, 처음처럼 문은 굳게 닫힌 채 열려줄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
“누구…?”
갑작스레 문을 열고 들어온 청소부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며 굳어버린 하연은
그제야 구세주를 만난 듯 달려나오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영후야!”
“쉬…”
혹시나 밖으로 들릴까, 영후는 모자를 벗어 들며 손가락을 세워 자신의 입에 세워보였고,
그런 건 이제 아무 상관없다는 듯, 영후의 품에 꼭 안겨있는 하연은, 이대로 문을 열어
사실은 내가 좋아하는 남자는 바로 이 남자라고 말해버리고 싶을 지경이었지만 이내 그것도
별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 이 남자가 자신의 앞에 있어주었으니까.
그거면. 그거면 하연은 족할 뿐이었다.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영후의 가슴에 몸을 맡긴 하연은 그것만으로도 모든 게 해결된 것만 같은 희열을 느꼈고,
영후 또한 그저 친구인 줄로만 알았던 하연을 처음으로 안아보면서
이제야 길게 이어져 온 ‘친구란 이름의 벽’이 조금씩 허물어져 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였을까, 얼마의 시간이 걸리든지 간에 영후는 하연을 좀더 꼭 끌어안아 주면서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켜 주고만 싶었다. 하지만, 아직 모든 상황이 끝난 건 아니었다.
“이제…어쩌지?”
이제는 떨어질 만도 하건만,
하연은 영후의 가슴팍에 꼭 붙은 채 마치 가슴에게 물어보는 듯 속삭였고,
영후는 그런 하연의 물음에 안고 있던 팔에 더욱 힘을 주어 안아 주는 것으로 대답했고,
하연은 영후의 드넓은 가슴 속에서 이미 답을 들은 듯 희망에 젖은 얼굴로 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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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
“어? 열렸다!”
한 기자의 외침과 동시에, 청소부로 변한 영후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침대 시트가 가득 담겨있는 빨래 바구니 카트를 밀며 나왔다.
당연히 문은 언제나 그랬듯 자동으로 잠겼을 뿐이었고.
문이 닫히기 직전까지 문틈으로 카메라를 들이밀던 기자들은 곳 문이 닫히자, 영후에게로 몰려들었다.
“이봐요? 안에 상황이 어떻든 가요?”, “혹시 아는 얼굴이던가요?”, “한 명인가요? 아님 여러 명?”
영후에게라도 실마리를 얻어보려는 기자들이 한꺼번에 질문을 하며 달려들었지만,
영후는 쓰고 있던 위생모를 더욱 눌러 쓰며 고개를 푹 숙인 채
묵묵히 카트를 밀면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결국 별 소득이 없을 거란 결론을 내린 기자들은 영후를 가만히 내버려두는 듯 했다. 하지만,
“이봐요!”
한 기자의 부름 덕분에,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던 영후였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듯, 기자 쪽을 잠시 돌아보았다.
“네…?”
“그런데… 여기 일하시는 분들은 객실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나 보죠?”
뭔가 답변을 해야 했지만, 순간 영후의 머릿속은 텅 빈 것만 같았고,
뭔가 이상한 조짐을 느낀 기자가 영후에게로 다가오는 순간, ‘땡!’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영후는 그대로 엘리베이터 안으로 쏜살같이 카트를 밀고 들어가 닫힘 버튼을 눌러댔다.
한편 그 기자를 필두로 모든 기자들이 뒤늦게 영후에게로 뛰어왔지만,
다행스럽게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속도가 조금은 더 빨랐다.
“후…”
그야말로 첩보영화를 방불케 했던 영후와 하연의 탈출작전이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나 나가도 돼?”
시트 속에서 답답했던 하연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아직은 안심할 때가 아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도 카메라가 달려있었으니.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었기에, 영후는 시트 속에 손을 넣어 하연의 손을 꼭 잡아주며 말했다.
“조금만, 힘들겠지만 조금만 더 참아봐.”
땡.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섰지만, 6층이었다.
재빨리 하연의 손을 놔버린 불안한 영후와는 달리, 문이 열리자 선글라스를 낀
꽤나 섹시한 여자가 ‘또각 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에 올라섰고,
청소부 따위는 관심조차 없다는 듯, 옆구리에 샤넬 핸드백을 낀 채로
꽤나 도도한 척을 하며 문이 닫힘과 동시에 1층 버튼을 눌렀다.
‘이런 젠장!’
순간 영후는 바짝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분명, 위에 있던 기자들과 로비에 있던 기자들끼리 연락을 주고 받았을 텐데,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지하 주차장에 서겠거니 하고 멍청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었던 것이다.
이대로라면, 분명 1층에서 기자들과 맞닥뜨리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뿐이었다.
‘어쩌지…’
미처 영후의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에 엘리베이터는 최신형이라는 것을 뽐내듯
빠른 속도를 내며 하강하기 시작했다. 5,4,3,2…그리고 결국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은
결국 스르륵 열리기 시작했고, 영후는 순간 바지춤을 뒤져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열렸다! 열렸어!”, “사진 찍어!”, “비켜봐! 안보이잖아!”
그야말로 열린 문 밖으로 기자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영후는 다들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허리를 굽히며, 6층에서 탄 여자를 향해 인사를 했다.
물론, 이때 손에 든 만 원짜리 한 장을 높이 치켜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순간 그 여자는 별꼴 다 보겠다는 눈으로 선글라스를 한 번 치켜올리고는
영후를 피해 얼른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지만, 모든 기자들은 그저 청소부와 여자가
탈출했다는 전화를 받았기 때문에, 영후 옆에 있던 여자에게 시선을 줄 수 밖에 없었고,
청룡영화상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아도 될 만큼의 뛰어난 영후의 연기력 덕분에
엘리베이터가 닫힐 때까지 기자들은 한치의 의심도 하지 않고는 다들 그 여자만을 쫓기 시작했다.
“하근명 선수와는 어떤 사이세요?”,”언제부터 교제 중이셨나요?”,
왠지, 부적절한 이유로 호텔을 찾았던 것 같은 그 여자는 선글라스만으로도 충분히 가려진
얼굴을 핸드백으로 더 가려가며 기자들에게 벗어나려 뛰고 있었고, 그 덕분에
플래시와 질문으로부터 벗어난 영후와 하연은 그제야 한숨 놓으며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갈 수 있었다.
땡.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직원인 듯한 남자가 영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남자 또한 조금은 긴장한 듯 주위를 살펴보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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