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야설

Goal! - 18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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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부. 너무나 안타까운.












“장혜미 파이팅~!”




한국여대의 첫 연습경기가 열린다는 소문은 부지불식간에 많은 남학생들에게 퍼져나갔던 모양인지, 


벌써부터 스탠드에는 마치 국가대표팀의 연습경기를 관람하러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많은 인파들이 운집해 있었다. 게다가 혜미의 골수 팬이 되어버린 남학생들은 어디서 구해왔는지 


한국여대의 유니폼을 맞춰 입은 채 경기 시작 전부터 방방 뛰며 목이 터져라 응원을 해대고 있었다.




“야, 야, 근데 저기, 저기 좀 봐.”




“뭐 임마, 우리 혜미님 보기도 바빠 죽겠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저기… 이영후 감독이 나와있는데?”




“그게 뭐가 색햐~! 당연히 감독이 나와야지. 그럼 지금 이 와중에 PC방에 처박혀 있겠냐?”




“하여간 이 상병신을 친구라고… 미친 새꺄~ 넌 신문도 안보냐? 


오늘 국가대표팀이 월드컵 예선 앞두고 요르단으로 출국하는 날이잖아!”




“근데 뭐!”




“이게 완전 국대엔 관심 끊었구만? 새꺄 이영후도 이번 국가대표 엔트리에 포함된 거 몰라?!”




“뭐어? 진짜?! 근데 왜 지금 여ㅤㄱㅣㅆ어?”




“내 말이!”




혜미만을 바라보다 잠시 샛길로 빠져 이상한 대화를 나누던 남학생들은 어느새, 


조금은 경직된 얼굴로 터치라인 부근에 서 있는 영후를 바라보았지만, 


이내 준비를 마친 선수들이 각자의 포지션에 자리를 잡고 나자 심판인 듯한 남자가 


양쪽 진영을 점검한 후 센터라인에 섰고, 남학생들은 언제 이영후를 걱정했었냐는 듯 


다시금 연신 ‘장혜미 파이팅!’을 외치기 시작했다.






삐~익!






이윽고 일요일 아침을 여는 휘슬이, 


고즈넉한 안개들을 날려버리려는 듯 심판의 입에서부터 청명하게 울려 퍼졌고, 


그와 동시에 혜미가 공을 아라에게로 패스하고는 적진을 향해 날렵하게 달려나갔다. 




“자 평소대로 해보자~!”




잔뜩 긴장한 선수들을 독려하듯 터치라인에 바짝 서 있는 채로 연신 박수를 치는 영후의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던 남희는, 도대체 이 남자는 천운을 타고 난 것인지, 아님 임기응변이 뛰어날 뿐인 건지 


쉽사리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 며칠 전 죽고 싶을 만큼 무기력했었던 하루를 떠올려 보고 있었다.










-


“감독님…”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조차 들지 못한 채 힘없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희의 그늘진 얼굴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며, 영후는 잔뜩 기대한 얼굴로 물었었다.




“그래, 어디에요? 우리가 연습경기를 할 첫 팀은? 설마 다들 자기들이 먼저 하겠다고 서로 싸우는 건 아니죠?”




너스레까지 떨며 묻는 영후의 말처럼 정말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하지만 남희는 크리스마스 아침에 선물을 기대하며 눈곱도 떼지 않은 채 양말로 달려가는, 


아이 같은 눈망울의 영후를 바라보며 그 순간 쥐구멍이 있다면 바로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팀이 만들어졌으니 자체 훈련은 물론이거니와 이제부터는 다른 팀들과 연습 경기를 통해 


실전 감각을 익혀야만 했기에, 남희는 며칠 전부터 영후의 지시대로 몇몇 학교에 연습경기 협조에 관한 


공문을 보냈었다. 하지만 믿을 수 없게도, 마치 약속이나 한 것 마냥 모든 학교에선 


‘불가’ 답변만이 돌아왔던 것이었다.




자신이 맡은 팀은 도대체 뭐 하나 쉽게 넘어가는 것이 없는 것만 같아,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그만두고 싶을 만큼 마음이 저만치 쯤 떠나기도 했었던 남희였더랬다. 


하지만, 그런 마음들은 한 남자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또 그 남자를 생각하고 있노라면 


그저 갓 꺼진 촛불의 연기처럼 어디론가 사르륵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랬기에, 


지금의 이 상황을, 저 초롱초롱한 눈을 하고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에게 알려주어야만 한다는 것이 


참으로 못된 짓 같기만 했던 것이었다.




“저… 감독님…”




어렵사리 입을 떼는 남희의 모습을 바라보던 영후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환했던 표정을 거두며 이내 담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남희씨가 잘못한 것도 아니잖아요.”




“감독님…”




“차라리 잘됐네요. 실은 나도 우리 팀의 비밀을 벌써부터 알려주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리고,”




“?”




“연습 상대라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도 차고 넘치니까요.”




남희의 어깨를 몇 번이며 다독여주는 이 남자는 역시나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고, 


이런 남자에게 자신의 첫 순정을 내어준 것은 절대로, 절대로 잘못 선택한 것이 아니었음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는 한 여자였다.










-




“혜미! 수비한테 떨어지지 말고, 자리를 차지해야지!”




자꾸만 센터백에게 밀려나는 혜미에게 아니나 다를까 수림의 외침이 들려왔다.




‘쳇, 나도 그러고 싶다구요.’




하지만 평소답지 않게 혜미는 단 한 명의 센터백에게 꽁꽁 묶여 있었기에, 


마치 혜미를 꿰뚫고 있다는 것 같은 수비수의 움직임에 혜미는 폭발하기 일보 직전 이었다. 


게다가 작심을 한 듯 아저씨들의 도발도 틈만나면 이어지고 있었기에 더더욱 평정심을 잃어 가고 있었다.




“혜미야, 너 임마 일요일 아침에도 볼 차러 안 나오고. 선수니 뭐니 한다고 하더니만 도대체 뭘 배운 거냐?”




또다시 자신을 마크하고 있는 걸걸한 아저씨의 목소리가 바로 등뒤에서 들려왔지만, 


혜미는 대꾸할 여력조차 없어 보였기에 묵묵부답이었고 그런 혜미를 지켜보는 아저씨도 


겉으론 웃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여유가 넘치는 것만은 절대 아니었다.




‘거참, 내가 천하의 혜미를 다 막아보는 구먼.’




그저 경기 시작 전 영후로부터 들었던 혜미의 수비 방법 그대로, 꽤나 어렵지 않게 막아내고 있으면서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던 아저씨는 그러나 자칫 혜미를 놓칠까 다시금 그림자처럼 붙기 시작했다.












-




“감독님, 도대체 어떤 팀이 온다는 거죠?”




경기를 앞둔 약 한 시간 전, 각자 몸을 풀고 있는 학생들을 바라보던 조금은 긴장한 표정의 영후에게 


남희 또한 그에 못지 않은 긴장을 가득 담은 얼굴로 묻고 있었다. 




“팀… 이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어쨌든 지금의 우리 팀에겐 무척 도움이 될만한 분들일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있는 영후를 믿을 수 밖에 없었던 무기력한 남희는 


그저 아무 차질 없이 연습경기가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을 것만 같았다.




한편 그라운드에선 수림의 지도하에, 선수들이 이른 아침부터 학교 운동장에서 경기 준비를 위해 


꼼꼼하게 몸을 풀고 있었고, 모든 훈련 때마다 가장 솔선수범을 보이던 혜미는 역시나 가장 열심히 


몸을 풀고 있었는데, 갑자기 모든 움직임을 멈춘 채 어디론가 시선을 고정하기 시작했다.




“혜미, 왜 그래?”




수림이 의아해 하며 혜미에게 물었지만, 혜미는 수림의 물음에 대답할 생각도 못한 채 


점점 가깝게 다가오고 있는 한 무리의 남자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제야 다른 선수들도 저 멀리 보이는 남자들의 무리들을 보고는 준비운동을 하던 움직임을 


하나 둘 멈추기 시작했고, 그 중 가장 먼저 그들을 알아본 혜미는 꽤나 놀라고 있었다.




“아저씨… 들?”












-


“얘기도 없이 갑자기 이러시기에요?”




간만에 공을 잡고서 센터백과 마주선 혜미가 단단히 뿔이 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임마, 우릴 버리고 간 게 누군데 그래?”




대화를 하면서도 약간의 간격을 두고 막아선 남자는, 


결코 더 다가서지도 그렇다고 더 멀어지지도 않은 채 이른바 영후가 알려준 ‘혜미와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고, 혜미는 이상하리만치 그 간격을 겁내며 수비를 따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


“에? 혜미를… 막는 방법… 이라고라?”




조기 축구회원들 모두가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로 놀라고 있었지만, 


영후는 그런 아저씨들의 얼굴과는 달리 그저 담담하게 말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예, 뭐 굳이 말하자면 그렇지만, 그렇다고 대단한 비밀이 있는 건 아니구요.”




“그치만, 뭐시냐 그때 감독 슨상도 혜미한테 한 꼴 먹어부렀잖여~?”




“하하! 네 그랬었죠. 그래서 알게 된 겁니다.”




조기축구회의 모든 아저씨들은 또다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영후의 다음 말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가끔, 선수들은 선수가 아닌 일반 사람들에게 휘둘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건, 말하자면 


일종의 ‘합’과 같은 건데요. 보통 체계적으로 훈련을 받은 선수들은, 어느 정도 공격과 수비의 절차가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럴 땐 돌파를 하겠구나, 또 저럴 땐 패스를 하겠지… 


뭐 이런 식이죠.”




“이잉, 그니까 감독 슨상 말씀은, 혜미는 선수들하곤 다르게 그 뭐냐 잉, 마구잡이, 마구잡이다 이런 것인감?”




“마구잡이는 아니더라도, 체계적으로 축구를 배운 게 아닌 혜미의 경우엔 의외로 쉬운 방법이 있을 것 같아서요.”




“그니까, 각설하고, 고것이 뭐당가요 대체?”




“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주세요. 그거면 될 겁니다. 우선은요.”




“거리를 두라고라고라? 그게 무신 말씀이라요? 그랬다가는 후딱 제껴질 수도 있을 것이고, 슛도 못 막을텐디?”




“그 점은 걱정 마시고, 우선은 그렇게 해 주세요. 부탁 드립니다.”




늘 혜미와 공을 차던 아저씨들은 수비 시에 혜미를 일정간격으로 떨어뜨려 놓으라는 영후의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우선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 밖에 없었다.










-




그리고 거짓말처럼, 


혜미는 조금 떨어진 채로 자신을 수비하고 있는 아저씨 한 명에게 그야말로 엄청난 압박감을 받고 있었고 


어쩐지 그 애매한 거리 덕분에 돌파도, 슛도 할 엄두가 나지 않는 듯 했다.




“쳇!”




결국 혜미는 다시 뒤쪽에 대기하고 있던 공격형 미드필더 아라에게 패스를 한 채 


다시 활로를 모색해보려 했지만, 역시나 미리 백패스의 길목을 막고 있던 상대 미드필더에 의해 


인터셉트를 당하고 말았고, 공수가 전환되자 마치 20대 때의 체력을 보여주겠다는 듯 


중년의 공격수들 전부가 전방으로 내달리기 시작하자, 


간만에 공세 중이었기에 수비라고는 센터백인 진희와 미애 뿐이었던 한국여대의 진영은 


그 순간 너무나 공허해 보이기만 했다. 




이내 전방에서 어렵지 않게 볼을 건네 받고는 잠시 멈춰선 마흔이 넘은 아저씨는 꽤나 저돌적인


돌파로 간단하게 미애를 제친 후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 들어서자마자 강력한 오른발 막슛을 날렸고, 


그 정도 강도의 공을 받아 본 적이 없었던 미자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어렵지 않은 궤도의 공을 


막기는 커녕,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으며 피하고 말았다.




결국 아무런 제지도, 방해도 받지 않은 공은 유유히 한국여대의 골망을 가르고야 말았고, 


관중석에선 갑작스레 찬물을 끼얹은 듯, 차가운 고요함만이 퍼져가고 있었다.




삐~익!




주심의 휘슬소리와 함께, 전광판의 스코어는 곧바로 1 : 0 으로 바뀌었고, 


그저 처음으로 내준 실점이었지만, 선수와 코치들이 받는 충격은 꽤 커 보였다. 


게다가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팀의 중심인 혜미의 활로가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수비도 문제지만 혜미가 너무 고립되는 데요?”




보다 못한 수림이 남희와 영후를 번갈아 바라보며 입을 열었지만, 연신 손에 든 수첩에 메모를 해가며 


역시나 근심스럽게 경기를 지켜보던 남희와는 달리 영후는 그리 걱정스런 얼굴이 아니었다.




“성장하는데, 아프지 않을 순 없으니까요.”




영후의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들으며, 수림은 이 남자 역시 성장통이 진행중인 걸까 싶은 생각에 


자신의 집에 노감독이 방문했던 그때를 떠올리고 있었다.












-


가장 편해야 할 자신의 집에서, 수림은 편하기는커녕 숨이 막힐 것 같아 죽을 지경이었다. 


원래 의도한 대로였다면, 영후와 단 둘이 오붓하게 차도 마시며 그간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도 나눴을테고, 


또 그랬으면 너무나 멀어져 버린 둘 사이의 마음도 조금쯤은 가까워 질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휴우… 흡!”




몇 십 분이 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서로 마주 앉아 바라만 보고 있는 두 남자들을 앞에 두고,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다 놀래 황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본 수림은 이내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수림 따윈 이미 안중에도 없다는 듯 두 남자의 눈동자는 여전히 상대방의 눈동자에 고정되어 있었고, 




수림은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지만, 


마치 두 사람은 꽤나 심도 있는 대화를 쉬지 않고 나누고 있는 것 같아 보였는데, 실은 정말 그러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다짜고짜 대표팀에 들어오라니?’




‘놈! 네 입으로 그리 말하지 않았느냐? 내가 필요로 할 때 언제든 돌아오겠다고.’




‘그건 그렇지만, 이렇게 무턱대고 고집을 피울 감독님이 아니란 걸 아니까 이러는 겁니다. 


게다가 지금은 제가 책임지고 있는 팀이 있다는 것도 알고 계신 분이… 이러시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그건…’




결국 눈싸움, 아니 기 싸움에서 먼저 백기를 든 건 노감독 쪽이었다. 


어렵게 눈을 내리 깐 노감독은 그러나 그러고도 한참을 찻잔에 다시 시선을 고정시킨 채 


고민을 거듭하는 모양이었다. 벽시계의 초침소리가 그렇게 크게 들릴 수도 있구나 싶을 만큼 


고요한 적막감이 흘렀지만, 그 이공간을 깨뜨리며 입을 연 것은 다름아닌 노감독이었다.




“그런데, 처자는…?”




갑작스럽게 대화에 참여하게 된 수림은 꽤나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네? 아, 저요? 아 그러니까 저는 그…”




“절 돕고 있는 코칩니다.”




당황하는 수림을 구해줬다는 사람이 영후였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질 뻔도 했지만, 


그저 영후의 주변사람에게 코치로 밖에 설명될 수 없다는 사실에 수림은 조금쯤 서글퍼지려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마음까지 꿰뚫겠다는 듯 물끄러미 수림을 바라보는 노감독의 눈빛에 


수림은 자신도 모르게 슬며시 옷깃을 여며보았다. 




“그럼, 굳이 자리를 피해 달라는 말은 필요치 않겠구먼.”




잠시 차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난 노감독은 다시 약간의 망설임 후에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점점 나이가 먹어갈수록, 왜 그리도 아까워지는 게 많은지. 그러니 늙는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겠지만 서도.” 




도대체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건지, 영후와 수림은 쉽게 짐작해보지도 못한 채 


느릿하게 이어지는 노감독의 이야기에 온 신경을 모아 집중하기 시작했다.




“하나만 묻자꾸나.”




“…?”




“지금 네놈이 바라는 소원은 무어냐? 아니 소원이란 게 있긴 있느냐?”




수림은 점점 이상한 소리를 하는 노감독과 점점 굳어가고 있는 얼굴의 영후를 번갈아 볼 수 밖에 없었다. 


소원이라니… 소원이 없는 사람도 있을까. 하지만, 문득 수림도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 남자가 바라고 있는 게 과연 뭘까…’




하지만 영후가 채 대답을 하기도 전에, 노감독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떻게 경험도 미천한, 그것도 축구와 한동안 동떨어져 있던 네놈에게, 


축구부조차 없는 한국여대에서 덜컥 감독 제의를 했던 건지 단 한번도 궁금하지 않았느냐?”




자꾸만 이상한 얘기를 하는 노감독을 이해할 수 없었던 수림은, 그러나 아무생각없이 고개를 돌려 


영후의 얼굴을 보고는 너무나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분노. 




저 착한 얼굴에도 그처럼 엄청난 감정의 표출이 가능할 거라고는 한번도, 단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했었기에, 


수림은 그 기세에 눌리는 것만 같아 너무나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나였다.”




또다시 노감독의 입이 열린 직후, 영후의 혈압을 재보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수림이 보기엔 영후 몸 속의 피는 그야말로 들끓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겨우 감정을 다스리는 듯 입술을 질끈 깨물며 노감독을 바라보는 영후의 눈은 그러나 그야말로 


원망의 눈초리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런 걸 아는 지 모르는 지 노감독은 덤덤하게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오늘 죽을 지 내일 죽을 지 모르는 이 늙은이에게도 소원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네놈을 


원래 자리에 되돌려 놓는 것이었지. 물론 내 원래 하고자 했던 것과는 거리가 좀 있었지만, 


그래도 내 마지막 소원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바로 이 눈앞에! 


그저 손만 뻗으면 잡힐 것만 같아서, 그래서…”




“결국… 감독님이셨던 겁니까? 저는 그럼 한낱 꼭두각시에 불과했었던 겁니까!? 그런 거에요!?”




“어차피 내가 아니었어도 네놈은 돌아올 게 아니었느냐!”




“다릅니다! 그런 줄… 그런 줄 알았더라면 전 절대로 돌아오지 않았을 겁니다! 절대로!!”




“괜한 고집 부리지 마라 놈! 축구에 미친 건 네놈 하나만이 아니란 말이다!”




“그래도 이런 건 아닙니다! 언제나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시 하셨잖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제가 왜 감독님을 따랐었는지 정말… 정말 모르셨단 말입니까?!”




절규와 같은 영후의 말에 노감독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늘 하신 말씀들, 못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게… 지금 제가 감독님께 해드릴 수 있는 유일한 보은입니다.”




결국,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는 영후의 뒤통수에 대고 


노감독은 지지 않겠다는 듯 고함을 질렀다.




“놈! 이미 엔트리는 정해졌다! 네놈이 안온대도, 난 네놈 자리를 비워놓은 채로 출국 할게야!!”




노감독의 말을 듣고는 문을 열고 나가다 멈칫 했던 영후는 그러나 이내 문이 부서져라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고 정작 집주인이었던 수림은 그야말로 좌불안석일 수 밖에 없었다.




‘따라… 나가야 하나? 하지만 손님이… 어쩌지…?’




어째야 하는지 갈피조차 못 잡고 있는 수림을 그제야 인식한 노감독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직은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더 마셔보았다.




“그래, 코치를 하신다고?”




갑자기 질문을 받은 수림은 조금 전까지의 긴박했던 상황에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리며 진정되지 않았지만, 


겨우 내색하지 않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보았다.




“예에…”




“흐음. 그래 어떠신가, 영후와 일 하기가?”




“그게… 실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야 하는데, 아는 게 별로 없어서요. 되려 도움만 받고 있어요.”




진심으로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나고 있는 수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노감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런 순수한 마음씨가 그대로 전해진 덕에, 노감독 자신의 마음은, 


지금은 영후를 이런 식으로 불러들이고 싶지 않았다는 것을, 사실은 영후의 의견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 처자에게라도 말하고도 싶었지만, 그래 봤자 자신이 기득권 세력에게 굴복하고 말았다는 현실 앞에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기에 마음으로나마 수림에게 속삭여보고 있었다.




‘그만하면 충분히 그 녀석을 돕고 있는 걸세.’




하지만 그 뿐이었다. 


노감독은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던 속마음을 들킬까, 이내 ‘끄응’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실례가 안된다면… 뭐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꽤나 용기에 용기를 냈을 수림의 얼굴을 바라보며 노감독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그 끄덕임 덕분에 안도의 숨을 내쉬던 수림은 다시금 용기를 짜내어 입을 열었다.




“저희 감독님이 다시 선수로 뛸 수도 있다는 말씀이신건가요? 아까…”




“뛸 수 있냐고? 허허…”




노감독에게 영후는 뛸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닌, 꼭 뛰게 해야만 하는 제자였기에 


반신반의하며 묻고 있는 수림의 물음에 노감독은 그만 너털웃음이 터져나오고 말았다.




“이거, 갑자기 웃어서 미안하구만. 그럼, 코치 선생은 어쩌길 바라시나?”




“네? 그건…”




답변만을 들으려 했었기에 갑작스레 질문을 받아든 수림은 역시나 우물주물 하고 있었지만, 


역시 영후의 문제였기 때문이었을까. 수림의 입이 열리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저희 감독님 스스로 결정을 내리시겠지만…”




축 처진 눈꺼풀을 위로 올려보며 노감독은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었고, 


수림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내 노감독의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감독님이라면, 감독님을 아끼는 모든 사람들이 실망할 결정 같은 건 절대 내리지 않을 거에요.”




부디 그랬으면 좋으련만. 확실한 건 하나도 얻지 못하고 돌아가야만 하는 노감독에겐 


그나마 수림의 말 한마디가 크나큰 위안이 됐음은 물론이었다.




“이거 초면에 실례가 많았구먼. 미안하외다.”




“아, 아니에요. 저희 감독님의 감독님이시잖아요.”




맹목적으로 영후에게 믿음을 싣고 있는, 단발머리 만큼이나 귀여운 수림을 


한동안 다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노감독은, 그 순간 이상하게도 하연이 떠올라 괜히 헛기침을 하며 


문을 나섰고, 둔탁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자 어느새 평소의 수림의 방이 되어버리며 


고요함이 밀려들 무렵, 혹시나 싶어 바로 창가로 뛰어가 창 밖을 내다본 수림의 눈엔, 


핸드폰을 들고서 몇 번이고 통화를 시도하다가 안되자 더 화가 치미는 것 같아 보이는 


여전히 머리끝까지 흥분하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들어오고 있었다.












-




점차 시합이 거듭될수록, 남희가 배정한 선수들의 포지션 별 능력에 


영후는 조금쯤 머리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혜미


…………………………스트라이커 


……………………………아라


………………………공격형 미드필더




……민지…………수정………… 은채…………나경


…레프트 윙……미드필더……미드필더……라이트 윙




……하늘…………진희…………미애…………소영 


…레프트 풀백…센터백…………센터백……라이트 풀백




………………………………미자 


………………………………골키퍼




윤지 (?), 지영 (수비형 미드필더), 승은 (양 풀백) , 정화 (윙플레이어)




단순히 장기 말을 늘어놓은 것 같은 작전지시서를 들여다보며 영후는 더더욱 그럴 수 밖에 없었다. 


현재 첫 실전을 치르며 많이 긴장하고 주눅이 들어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선수들은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들이 원했던, 그리고 남희가 수락했던 포지션이


제법 마음에 드는 지, 나름대로 임무를 잘 수행해내고 있었기에 그것만으로도 만족해야만 했다.


적어도 선수들이 스스로 깨닫기 전까지는.




“미애! 라인 유지하고! 그렇지! 민지! 수비! 수비!”




한편, 포지션 지정과는 별도로 


정말 축구를 했었다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현장을 읽는 눈이 뛰어난 


수림의 지시와 조련은 남희와는 또 다르게 영후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




‘이러다 정말 내가 할 일이 없어지겠는걸?’




영후는 두 여인의 절대적인 도움에 감사하고 싶었지만, 지금 당장은 그럴 여유가 없을 것 같았다.


그라운드 위에선 체격적인 열세와 성별의 차이를 쉽게 만회할 수는 없었는지, 


한국여대 선수들은 조기축구 아저씨들에게 점차 밀리고 있었고, 어느덧 센터라인도 넘어오지 못한 채 


하프코트게임을 하듯 자신의 진영에 갇혀 있다시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목이 터져라 지시를 하던 수림은 역시 안되겠는지, 영후를 돌아보았지만 영후는 전혀 급해보이지 않았기에 


어느덧 승부욕이 발동하고 있는 수림의 눈에선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감독님!!!”




“예? 예? 왜요?”




“계속 그러고만 계실 거에요? 




“아…”




한심스럽게도 스스로 감상적이 되어버린 채 경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던 영후 였기에 


그제야 그라운드를 똑바로 바라보기 시작했지만, 이미 밸런스가 완전히 무너져버린 팀은 


단순한 지시 만으로 바뀔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보였기에 영후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은 좀 그렇고… 전반 끝나고 좀 다독여 줘야겠네요.”




“네?”




수림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다독여 준다고? 단지 그것 뿐? 


수림은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는 영후에게 무어라 이야기를 꺼내려는데 이윽고 주심의 입에선 


인저리 타임 없이 전반 종료를 알리는 휘슬 소리가 울렸고, 


전광판에는 7 : 0 이라는 축구 스코어 같지 않은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


‘뭐 하는 거냐 이영후.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잖아.’




전반전이 끝나자 스코어 만큼이나 답답한 심정으로 스탠드 한 켠에 앉은 채, 


연신 담배에 불을 붙이던 철용은 당장이라도 뛰어가 영후에게 한방을 먹여주고 싶었지만, 아직은. 


아직은 축구 경기가 끝나지 않았기에 선수 시절 그 누구보다도 진득했던 자신의 인내심을 


다시 발동시켜보며 폐 속 깊이 담배 연기를 빨아들여보았다.










-




영후의 지시로 열심히 경기를 촬영하고 있었던 윤지는 어느새 라커룸으로 들어와 


선수들에게 음료와 타올을 건네며 파이팅을 외쳐봤지만 녹초가 된 몸 만큼이나 주눅이 들어버린 


선수들의 귀에 그런 응원 따위가 들어올 리 만무했다. 연습경기였지만 ‘첫 경기’라는 것이 가지는 의미가 


남달랐을 모두는 너무나 처참한 결과에 대해 그 누구도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비단 남희나 수림도 별반 다르지 않았고. 




역시 감독 밖에 없었을까. 




다 죽어가는 얼굴들을 하고 있는 모두들을 바라보던 영후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힘들었나요?”




아무렇지도 않게 묻는 영후의 질문에 그 누구도 입을 뻥긋 하지 못했다. 


물론 힘들었다. 아니 곧 죽을 것처럼 힘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운동을 해왔던 결과가 


고작 이정도 밖에 안 되는 것이었나 싶어서, 그토록 희망적이었던 마음마저 다 죽을 것 같았기에, 


정작 몸이 힘든 건 힘든 것도 아니었다.




“혹시… 오늘 연습 경기를 하는 의미에 대해 아는 사람 있을까요?”




계속 이상한 말만 하고 있는 영후를 남희와 수림은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럴 때가 아니잖아요… 




남희와 수림은 도대체 이 남자가 이토록 아까운 10분을 왜 저렇게 허비하고 있는 것인지 황당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미녀 코치의 시선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영후는 혹시 자신의 물음에 답을 줄 사람이 있을까 


조금 기다려 보았지만 대답은 커녕 점점 시무룩해지는 것만 같아 결국 자신의 입을 다시 열었다.




“자, 우린 신생 팀입니다. 맞죠? 게다가 어쩌면, 공식적인 시합이 잡히기 전까지 


다른 축구팀과의 연습경기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남희는 괜히 뜨끔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 누구도 탓할 마음이 없어 보이는 영후의 표정 덕분에 


가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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